# 19
리그너스 대륙전기 019화
‘플레이어치고는 생각보다 능력치가 높아.’
클래스 전직만 안했다 뿐이지, 상대는 레벨만 하나를 더 올리면 E 등급 클래스로 승급할 수 있는 능력치를 보유하고 있었다.
호 역시 한 달이 넘는 시간을 커티삭의 병영 공사장에서 노동을 하면서 경험치를 획득했고, 지금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이 세계로 끌려오기 전 연동시켰던 공략본과 이미 리그너스 대륙전기라는 게임의 엔딩을 봤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경험이 전혀 없는 소환자인 시진, 시현 자매나 아스트리드 벨의 능력치는 저 수인 종족 플레이어의 반도 따라가지 못했다.
“수인 종족들은 게임에서처럼 소환자에게 잘 대해주는 건가?”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수인족의 왕 아쉬토는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 했던 유저들 사이에서 흉폭하고 잔인하기로 이름이 높은 영웅이었다.
차라리 호랑이와 사자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달려들어 애교를 부리는 행동을 보는 게 가능성이 훨씬 높아 보였다.
하물며 아쉬토의 폭력성은 마왕 쉐르난비체보다도 위였다.
‘잠깐?!’
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있었다. 마족의 플레이어 중 자신과 똑같은 세계에서 온 사람은 없었다.
한씨 자매와 아스트리드 벨은 패러럴 월드인 평행 세계에서 온 여인들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 온 사람이 본인 혼자라는 법은 없었다. 실제로 커티삭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모두 똑같은 세계에서 오지 않았던가?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대해 아는 사람일지도 몰라.”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호가 이 세계로 끌려오기 전, 리그너스 대륙전기는 가상현실게임을 좋아하는 게이머들에겐 큰 인기를 끌고 있던 게임이었다.
그렇게 생각과 생각을 거듭하던 와중에서 멀찍이서 수인 종족의 병사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 수인 병사 뒤쪽에서 코르기들의 호위를 받으며 검은 머리의 남성이 걸어오고 있었다.
“…….”
호의 머릿속이 흐트러졌다.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 지 고민이 되는 것이다.
소환자로 보이는 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힘을 합쳐서 이 세계에서 살아나갈지 아니면 지금처럼 홀로 성장해 나갈 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하지만 잠시간 흔들리던 호의 눈동자는 곧 차갑게 가라앉았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생각이잖아?”
커티삭에서 들었던 창조신 리그로우와 세리너스의 계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선택받은 존재, 오직 하나의 이만이 세계의 모든 것을 손에 넣을 것이니. 그와 함께하는 생명들에게 영원한 영광이 있을 것이다.’
계시에는 오직 하나의 이만이 세계의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상대는 자신이 속한 마족과 칼을 겨눠야 하는 수인 종족의 소환자였다.
“혜연이와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 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니 호는 웃으면서 상대를 맞이하려고 했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취이익…취익…….”
수인 병사들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흥분한 오크들이 거친 숨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앞으로 뛰쳐나갈 기세였다.
하지만 호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기에 그들은 가까스로 자신들의 본능을 억누르고 있었다. 오크 전사들이 그러한 모습을 보일 수 있던 것에는 호의 통솔 포인트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척! 척! 척! 척!
붉은색의 눈동자를 지닌 다람쥐 병사들이 자신들의 풍성한 꼬리를 흔들며 어깨에 창을 멘 채 군인처럼 행군하고 있었다.
그렇게 점점 자신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적들을 노려보던 호가 자신의 검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1 초, 2 초, 3 초…….’
곧 전투가 시작될 거라는 긴장감과 두려움, 그리고 기대감이라는 다양한 감정들이 호의 온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게임이었다면 흥분과 즐거움이 가득했겠지만, 여기는 게임이 아닌 현실이었다.
이제 자신의 명령이 떨어지면 이 자리는 끔찍한 전장으로 변할 터였다. 하지만 그게 무서워서 도망을 칠 수는 없었다.
“공겨역!”
그리고 눈을 번쩍 뜬 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큰 목소리로 외쳤다.
“취아아악!”
“췩! 대장의 명령이다! 취엑!”
“옥스 아널!”
퍼어억!
손도끼가 먼저 날아가며 앞줄에서 행군하던 다람쥐 병사를 단숨에 시체로 만들어 버렸다.
그와 함께 도끼와 창, 그레이트 소드와 같은 다양한 무기를 든 오크 전사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용감하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뭐…… 뭐야?!”
갑작스러운 오크 전사들의 등장에 함진규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흉측하게 생긴 오크가 침을 흘리며 자신들의 병사를 공격하고 있었다.
“키키킥!”
“취익!”
맹렬하게 돌진하는 힘이 더해진 공격에 가격당한 다람쥐 병사가 짧은 비명을 토해내며 뒤로 축 늘어졌다.
사방은 어느새 번뜩이는 무기들이 오가는 전쟁터로 변했고, 여기저기서 비명과 함께 붉은색과 녹색의 피들이 숲에 뿌려지기 시작했다.
“머어엉!”
뒤에서 기회를 엿보던 코르기 하나가 기합과도 같은 울음소리와 함께 앞으로 달려들어 자신의 뭉툭한 무기를 휘둘렀다. 그러자 다람쥐 병사의 가슴에 칼을 찔러 넣은 오크의 머리가 날아가며 녹색의 피분수가 치솟아 올랐다.
그러나 오크 하나를 죽인 코르기는 곧바로 이어지는 무기들에 난도질이 되어 땅바닥에 쓰러졌다.
칼에 베이고, 창에 찔리고, 도끼에 찍히고, 다양한 이유들로 수인족들과 오크들이 목숨을 잃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비명을 지르며 죽어나가는 것은 오크보다 다람쥐 병사들이 많았다.
[병종-다람쥐 병사(F 등급)
공격력-2 방어력-1 이동속도-2]
난전이 펼쳐진 상황에서는 기량이 낮은 다람쥐 병사보다 오크 전사의 전투력이 더욱 높았기 때문이었다.
무기의 장점을 이용할 수 있는 제대로 된 회전이었다면 모를까, 두꺼운 나무가 즐비한 숲의 지형도 오크들에게 유리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E 등급 클래스인 하사관 윤호의 지휘를 받는 오크 전사들은 일반 오크 전사보다도 능력이 더욱 뛰어났다.
하지만 함진규는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좋아, 잘한다! 다 죽여!’
상황을 알아채자마자 재빠르게 몸을 숨긴 함진규는 메시지가 나타날 때마다 속으로 외쳤다. 끔찍한 전투가 펼쳐지는 장소 쪽은 쳐다보기도 싫었기에 현재 그는 전투가 벌어지는 반대쪽으로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대로 자신의 병사가 오크들을 전부 물리쳐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띵동.
-경험치를 1 획득했습니다.
-경험치를 2 획득했습니다.
수인 병사들 갑작스레 나타난 오크들을 죽일 때마다 경험치를 획득했다는 메시지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었다.
“좀 더 빨리 못 죽이나? 조금만 더 경험치를 얻으면 전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럴 줄 알았으면 무력과 통솔치를 올리는 건데 실수했어. 괜히 매력을 찍어서는…….”
피잉! 콰득!
그렇게 함진규가 정보창만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도중 파공성을 내며 무언가가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고, 곧바로 나무기둥에 틀어 박혔다.
그 정체는 다람쥐 병사의 목숨을 빼앗았던 오크들의 손도끼였다.
“히이익!”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난 함진규 연신 주위를 살폈다. 이어서 그의 눈으로 한 남자가 많은 수의 오크를 대동한 채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 어어?!”
함진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오크들을 이끌고 있는 남자는 분명 인간이었다. 함진규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였고, 그 모습을 본 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유저다!’
함진규가 방금 보여줬던 행동은 영웅의 정보를 알아낼 때 사용되는 리그너스 대륙전기라는 게임의 명령어였다.
“하, 하하……. 안녕하세요? 저는 함진규입니다. 우리, 같은 소환자라 불리는 사람들이죠? 에, 그러니까 윤호 군?”
함진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시선은 호의 뒤에 있는 오크들에게 향해 있었다. 함진규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가기 시작했다.
호는 굳은 얼굴로 함진규라는 남자를 바라봤다. 분명 그는 리그너스 대륙전기라는 게임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틀림없었다.
서늘해진 마음을 감추며 호가 눈앞에 보이는 남자, 함진규를 향해 말했다.
“그런 것 같군요. 딱히 좋은 상황에서 만난 것은 아니지만요.”
“하…… 하하…… 히익?!”
오크들의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자 함진규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저 많은 수의 오크들이 자신을 노린다면 영락없이 죽을 게 분명했다.
다행히 오크들을 이끄는 사람은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영웅이 아닌 소환자였다.
‘설마 나를 공격하지는 않겠지? 사람이잖아?’
함진규는 힐끗 호를 바라봤다. 오크 부대를 이끌고 있는 이 남자는 20대 중, 후반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상대가 마족의 영웅이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도망갈 수 있을까?’
함진규의 머리로 무리라고 생각이 들었다. 앞쪽에도 그리고 뒤쪽에도 수인 병사들과 싸우는 오크들이 있었다.
게다가 혼자 그것도 자신의 체력을 생각해보면 딱히 오크들의 추격을 떼놓고 도망을 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젠장. 이거 더럽게 걸린 것 같은데…… 이참에 마족의 소환자로 활동을 해야 되나?’
전투가 벌어지는 바람에 경험치를 많이 올린 것은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병사는 계속해서 죽어나가고 있었다.
함진규는 힐끗 호를 바라봤다. 표정만 보면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자연스레 상대의 정보를 계속해서 확인할 뿐이고, 그러한 함진규의 행동은 호에게 더욱 경계심을 안겨다 주고 있었다.
“하…… 하하. 이 이상한 세계 때문에 본의 아니게 이런 꼴로 만나게 되는군요.”
함진규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일단 자신이 살기 위해서 혹은 도망치기 위해서는 살기가 넘치는 이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게 필요했다.
“마족들에게 끌려가신 거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수인들은…….”
수인족들에게 끌려간 소환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함진규의 눈에 호가 살짝 태도를 바꾸는 게 들어왔다. 관심을 가지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함진규는 슬며시 말꼬리를 흐렸다.
“수인들에게 끌려간 분들은 다들 괜찮은 겁니까?”
호가 앞으로 두 걸음 정도 나서며 함진규와 거리를 좁히며 물었다. 오크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머무르고 있었다.
“뭐, 다들 죽을 맛입니다. 호랑이 녀석이 얼마나 포악한지 저와 함께 했던 사람들 중 몇몇은 이미 죽었습니다. 게다가 여자도 얼마나 밝혀대는지…….”
“호랑이라면?”
“아쉬토 말입니다. 아, 선택의 신전에 있었던 수인족의 왕 말이죠.”
“아! 그때 이상한 건물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정말 힘드셨겠네요.”
호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설정 그대로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렇게 말을 한 호는 앞에 보이는 나무둥치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그렇습니다. 뭐, 마족들에 비하면 천국일지도 모르겠군요. 마족. 딱 듣기만 해도 무섭고 위험하지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똑같습니다. 마족들에게 끌려가신 분은…….”
그때를 떠올리던 호는 함진규가 볼 수 있게끔 의도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이상한 건물에서 마왕이라는 존재는 무려 열다섯 명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커티삭에서 한 명이 또 죽었고, 현재는 저를 포함해서 네 명만이 남아있는 상황이죠.”
“하하하…….”
호의 대답을 들으며 함진규는 고개를 도리질했다. 수인들에게 끌려왔던 자신이 다른 소환자들에 비해 운이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남자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그…… 하아. 전부 이 거지같은 세상 때문이죠. 사실 이번 공격도…… 아니, 공격이 아니라 식량 창고는 털라는 것도 하지 않으면 제가 죽을 상황이라…….”
함진규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함진규의 태도에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호의 눈동자는 함진규의 허리춤에 있는 코르기들이 사용하는 칼에 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