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리그너스 대륙전기 018화
‘생각보다 수인 병사들의 진군이 느리다.’
다람쥐 병사와 코르기들로 이루어진 병력 구성치고는 호가 알고 있는 지식에 비해 이동속도가 굉장히 느렸다.
‘게다가 지휘관이 누군지는 몰라도 멍청해.’
사실 정찰을 보냈다고는 하지만 F등급에 불과한 오크 전사들의 정찰 능력은 굉장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찰을 보냈던 오크들은 상당히 많은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 말은 즉, 수인 병사들을 이끄는 지휘관이 무능하거나 혹은 병사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이 없는 상태로 이 식량 창고로 향하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수인족 병사들이 오고 있다는 방향을 바라보던 호의 눈빛이 살짝 가라앉았다.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머릿속으로 가정해야만 했다.
“소환자처럼 이 대륙의 전쟁을 모르는 자가 지휘관일 수도 있겠지.”
커티삭에 있는 한씨 자매나 아스트리드 벨과 같은 평행 세계의 소환자들이 병사를 지휘하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지금의 자신처럼 말이다.
어쨌든 호는 이런 전투를 치른 경험이 수도 없이 많았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엔딩은 날로 먹은 게 아니었다.
“혹시 모르니 조심은 해야겠어.”
호의 입매가 살짝 휘었다.
현재까지 드러난 전력만으로는 충분히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전쟁에서는 그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는 법. 행여나 있을 패배의 위험 요소를 줄이기 위해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의 성과를 올릴 수 있는 전략과 전술을 생각해야만 했다.
“취익!!! 췩!”
“취이익!”
오크 전사들이 붉은 눈동자로 호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미 호의 명령에 따라 목숨을 걸고 수인 병사들과 싸울 준비를 모두 마친 상황이었다.
하지만 호는 넓게 펼친 지도를 보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다람쥐 병사와 코르기라면 분명…….’
다람쥐 병사는 오크 전사들과 마찬가지로 수인 종족의 가장 기본 병종이었다.
긴 창으로 무장한 그들은 난전에서는 딱히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공격력과 방어력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전이 아니라 진형을 갖춘 전투라면 다람쥐 병사는 충분히 오크 전사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가할 수 있었다. 방패를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긴 창으로 무장한 그들이 진형을 갖추는 순간, 그것을 뚫기 위해서는 많은 오크가 희생될 가능성이 높았다.
끝 부분이 직각으로 휘어져 특이하게 생긴 칼을 무기로 쓰는 코르기는 오크 전사와 비슷한 성질을 지닌 보병이었다. 발전도가 낮은 마을을 보유한 수인 영웅들이 주로 사용하는 주력 병종이었는데, 이들은 다람쥐 병사와는 달리 일대일과 난전에 강하고 무기가 없어도 날카로운 이빨로 상대를 물어뜯을 수 있었다.
또한 네 발로 이동할 수도 있어 추격전도 굉장히 능한데다가 충성심이 높아 불리한 상황에서도 아군을 배신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다람쥐 병사가 많고 코르기가 적다라……. 수인들과 전투를 치를 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상황이네.”
다람쥐 병사를 이용해 상대의 돌진을 막는 방어벽을 만들고 코르기의 돌격으로 진영을 무너뜨리는 이러한 전투 방식은 가상현실게임에서 수인들을 상대했던 호가 자주 경험했었던 전술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런 수인족의 진형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호의 눈이 지도로 향했다. 지도에는 수인들의 도시 ‘안테 로리’에서 자신이 주둔하고 있는 식량 창고로 향하는 방향으로 울창한 숲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수인 병사들은 이 숲을 통해 자신이 있는 곳으로 진군해 오고 있을 터였다.
“출진! 출진이다!!!”
“우리에게 싸움을! 피를!!!”
호는 지금 당장에라도 전투를 벌일 준비가 되어 있는 오크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취익거리는 소리와 거친 콧바람을 내쉬는 괴물들이 듬직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게 여러 마리의 오크와 눈을 마주친 호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전군! 출진한다! 목표는 숲! 숲속에서 수인들을 요격한다! 연약한 동물들에게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주자!!!”
“취익! 취익!!!”
“전투다! 전투! 취에엑!!!”
“오크의 영광을 위하여!!!”
“옥스! 아날!!!”
호의 명령이 떨어지자 오크 전사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며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피비린내가 짙게 나는 전투는 그들이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호의 능력 및 특성에 따라 일반 오크 전사들보다 공격력과 방어력이 상승한 오크 전사들이 숲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 * *
날카로운 창끝에 햇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창의 주인공인 다람쥐 병사들은 오와 열을 이루며 천천히 진군을 중이었다.
그 뒤로는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머리는 불독과 비슷한 외형을 지닌 코르기들이 누군가를 경호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쳇! 빌어먹을! 카아악 퉷!”
코르기들의 철저한 경호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이는 검은 머리를 가진 30대의 남성이었다. 허리춤에 코르기들이 들고 있는 무기와 똑같이 생긴 무기를 차고 있는 남자는 무엇이 그리 불안한지 계속해서 욕설을 내뱉으며 자신의 손톱을 규칙적으로 물어뜯고 있었다.
끼이익!!! 끼익!
“아! 씨발, 깜짝이야!”
갑자기 튀어나온 동물들의 모습에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런 남자의 반응에 잠시 다람쥐 병사들이 진군을 멈췄지만, 곧 별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고양이 새끼. 갑자기 마족을 공격하라는 게 말이 돼? 그것도 고작 이런 녀석들을 데리고? 이왕 병사를 줄 거면 등급이라도 높은 병사를 주든가!”
병사들을 이끌고 있는 남자의 표정은 불만과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함진규. 선택의 신전에서 수인 종족의 왕 아쉬토에게 끌려갔던 소환자 중 하나였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영문도 모르게 이 세계로 끌려온 함진규는 선택의 신전에서 수인족의 선택을 받았고, 그러한 자신의 운을 저주해야만 했었다.
수인족의 왕 아쉬토에게 끌려갔던 소환자 중 넷이 그날 바로 목숨을 잃는 모습을 두 눈으로 봤기 때문이었다.
호랑이 머리의 괴물이 단번에 소환자의 숨통을 끊어내는 모습을 보며 함진규는 그 자리에서 거품을 물었었다.
그만이 아니었다. 같이 끌려갔었던 소환자 중 출중한 미모를 지녔던 여성 둘은 아쉬토의 노리개가 되었다.
그렇게 수인족의 수도에서 짧지만 지옥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던 소환자들은 아쉬토의 명령에 따라 각자 뿔뿔이 흩어졌고, 함진규는 마족과 엘프 종족들이 있다는 붉은 핏빛의 대지에 있는 영지 안테 로리에서 머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된 안테 로리에서 함진규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도시의 영주인 여성 묘인에게 충성을 다했다.
다행히 애완동물로 고양이를 키워본 경험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그 결과, 안테 로리의 영주는 이 세계에게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소환자들이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함진규에게 세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마족의 식량 창고를 파괴하면.”
함진규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번 작전을 성공리에 마치면 보상 경험치를 통해 E등급 클래스로 전직을 할 수 있었다.
“후. 빨리 경험치를 모아서 승급을 해야 할 텐데. 젠장. SSS등급까지는 언제 올리지?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게임을 제대로 플레이해 보는 건데. 쩝.”
투덜거리는 함진규의 입에서 묘한 내용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상관없어. 분명 능력치를 올리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내가 유리해. 그래도 나는 가상현실에서 이 세계를 이미 경험해 봤단 말이지.”
수인족의 수도에서 함진규는 소환자라 불리는 다른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리고 그중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대해 알고 있는 소환자는 자신을 포함해 고작 둘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대해 알고 있는 다른 이는 그와 동일한 세계에서 온 여자였는데, 아쉬토의 노리개가 되어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난 그렇게 되지 않겠어.”
함진규는 안테 로리로 떠나기 전 생기를 잃어버린 그녀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불쌍하다거나 안타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었다. 그녀를 제외하면 자신이 수인 종족의 소환자 중 유일하게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아는 존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키워나갈 생각이었다.
“레벨도 좀 더 높이고, 아이템도 얻고 나면 마음에 안 드는 놈들 은 싹 다 죽여 버려야지.”
그러려면 일단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해야만 했다.
전장에 직접 나선다는 게 무섭기는 했지만, 함진규는 빠르게 식량 창고만 파괴하고 튈 생각이었다. 어차피 자신은 지휘관이니까 병사들만 내보내면 될 것 같았다.
그때였다.
쉬리리릭!
“키아아앙!”
어디선가 조그마한 손도끼가 날아들더니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선두에서 걷던 다람쥐 병사가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함진규는 어떠한 명령도 내리지 못한 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키킷! 킥!!!”
“크르르릉!”
동료의 죽음에 당황하던 다람쥐 병사들이 곧 자신들의 창을 들어 올리며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코르기들도 마찬가지였다.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자신의 뭉툭한 무기를 꺼낸 그들은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멍멍!! 오크! 오크다!!!”
코르기들의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지휘를 내려야 할 함진규는 방금 전 죽은 다람쥐 병사의 끔찍한 모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적은 없다면서! 아니, 어떻게 내가 오는 것을 안 거지?!’
함진규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한 경험이 있기는 했지만, 에디터를 이용했을 뿐 정상적으로 전투를 벌여본 경험은 없다시피 했다.
게다가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니라 정말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함진규의 머리와 몸을 더욱 굳게 만들고 있었다.
* * *
오크들의 공격이 이루어지기 5분 전.
<플레이어 정보(Status)>
1. 이름 : 함진규
2. 성별 : 남(36)
3. 종족 : 인간
4. 소속 : 수인
5. 레벨 : 9
6. 직업 : 기회주의자(F)
7. 세부 능력
통솔 : 7/10(F) 무력 : 6/10(F)
지력 : 8/10(F) 정치 : 10/10(F)
매력 : 8/10(F)
‘어……?!’
수인 종족의 병사를 이끌고 오는 영웅의 정보를 살펴 본 순간 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가장 먼저 플레이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자신처럼 선택의 신전에 있었던 사람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