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리그너스 대륙전기 016화
“아무리 마족이 전쟁을 좋아하는 종족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나 많은 병사가 주둔하고 있다는 것은 쉬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의 지식에 의하면 인구와 병사 수의 적당한 비율은 십 분의 일 정도였다. 아니, 이것도 많은 편이었다.
보통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엔딩을 본 많은 유저가 추천하는 인구 대비 병사 수의 비율은 13분의 1에서 15분의 1 정도였다. 이 비율보다 병사를 많이 고용하게 되면 유지비를 감당하기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특산품이 있어 수입을 많이 올릴 수 있는 부자 영지면 상관이 없겠지만, 호는 커티삭에서 딱히 수입을 올릴 수 있는 무언가를 본 적이 없었다.
“잠깐……?”
이제까지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이상한 부분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고 있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엔딩까지 봤던 자신이 ‘왜 이런 이상한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지?’라는 생각이 호의 머릿속을 쾅 하고 내려쳤다.
취익! 취익!
소란스러운 오크 전사들을 뒤로하고 호는 눈앞에 있는 커티삭의 영주성을 바라봤다. 깔끔하기는 했지만 굉장히 허름함이 느껴지는 성이었다.
“…….”
다른 종족도 아니고 엘프와 수인이라는 적대적인 종족과 붙어 있는 영지였다.
그런데 커티삭의 인구는 고작 삼천밖에 되지 않았다. 전쟁이 잦다는 주변의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수가 너무 적었다.
그뿐인가? 성 내의 건물 중 멀끔한 게 하나도 없었다. 한마디로 영지 자체가 너무나도 가난했다.
‘게다가 커티삭에 주둔하는 영웅은 단둘.’
영지에는 영주만 있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영주의 밑에서 영지의 자잘한 일들을 처리하는 하위 등급의 영웅이 필요했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건물을 쌓아 올렸던 병영도 등급이 있는 영웅이 관리 감독을 했다면 일찌감치 완공이 됐을 터였다.
그러나 커티삭에는 F등급은 제외하더라도 E등급부터 C등급 사이의 영웅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회사에 사장과 임원은 있는데 부장이나 대리급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사장과 임원이 일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당장 있는 것도 아니고.”
호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는 오크 전사들을 향해 눈을 돌렸다.
백오십이나 되는 수였지만, 호에게 있어 그들을 지휘하는 일은 딱히 어렵지 않았다. 호 제국의 황제로 있을 때는 수백만 대군을 한 손에 주물렀던 그였다.
“자, 가자!”
“취익! 취이익!!!”
호의 명령에 따라 백오십의 오크 전사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녹슨 칼, 도끼, 철퇴 등 다양한 무기를 들고 얼기설기 철판을 엮은 낡은 갑주를 장비한 입은 오크들이지만 백오십이나 되는 수가 동시에 움직이는 모습은 장관이 따로 없었다.
오크 전사들의 움직임은 꽤 질서정연했다. 같은 오크라지만 이들은 공사 현장의 오크들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호는 오크 전사들의 이러한 행동이 E등급인 하사관 클래스를 지닌 자신이 지휘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영웅이 지휘를 하는 게 아니었다면.’
이들이나 공사장의 오크들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일 게 분명했다.
“목표는 북서쪽의 식량 창고! 속도를 조금 더 높인다!”
페릴 예노스는 호에게 수인족의 공격을 막아내고 식량 창고를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명령은 무조건적으로 완수를 해야만 했다.
이 세계에서 임무 실패의 페널티가 어떻게 다가올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몸이 성하지는 않겠지.’
그렇기에 식량 창고를 지키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커티삭에서 북서쪽의 식량 창고가 있는 곳까지는 오크들의 걸음걸이로 약 네 시간이 걸렸다. 제법 긴 시간을 이동해야 했지만 외부의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병종-오크 전사(F등급)
공격력-3 방어력-2 이동속도-2]
최하위 등급의 병사답게 오크 전사들 전투력은 보잘것없었다. 물론, 지금의 호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병사들이었다.
최근 들어 다른 종족들의 습격이 잦아졌다고는 하지만 예노스가 말했던 식량 창고까지 도착하는 동안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호는 식량 창고에 도착하자마자 오크 전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취에엑!!!”
“취익! 인간 대장이 명령을 내렸다!!! 땅을 파라!!!”
“췩! 삽! 곡괭이! 낫!!!”
호가 내린 명령은 바로 참호를 파는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호의 명령을 받은 오크 전사들은 주위의 나무들을 베어 조그마한 주둔지도 만들기 시작했다. 이는 타 종족들의 원거리 공격에 아군이 쉽게 죽어나가는 것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하는 유저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방법 중 하나였다.
‘경험치를 몰빵했는데, 아직 부족한가 보네.’
그것을 끝으로 오크 전사들을 호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이제까지 남겨놓고 있던 경험치를 모조리 사용해 통솔 수치를 17까지 올리긴 했지만, 많이 부족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걱정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커티삭을 공격하고 있는 적 병사들의 등급을 모르니 불안하긴 하네. 거기에 영웅도 있으면 큰일인데…….’
상대 종족의 관해 아는 정보가 없으니 조금은 답답했다. 행여나 D등급의 병사가 몰려오면 여기에 있는 오크들은 죄다 쓸려 나갈 수도 있었다. 그나마 E등급에 비슷한 수라면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가상현실게임이라고는 하지만 리그너스 대륙 통일은 날로 한 게 아니었다.
물론, 베스트는 이 식량 창고가 그 누구에게도 공격당하지 않는 것이었다.
“취에엑!!! 취익!”
“열 명을 짝을 지어 나간다! 췩!”
“오크의 영광을 위하여!!!”
“옥스 아날!!!”
호는 백오십의 오크 전사 중 마흔의 오크를 열 명씩 짝지어 식량 창고에서 약 30, 40분 정도 떨어진 장소로 정찰을 보냈다.
고작 백오십밖에 되지 않는 오크 부대를 잘게 나눠서 정찰을 보낸 까닭은 정찰로 얻는 정보가 전투에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언제 공격을 당할지 또 어떤 종족이 쳐들어올지는 알아야지.”
그렇게 정찰을 보낸 호는 높이 1, 2m 정도의 원통형 벽과 둥근 지붕으로 되어 있어 몽골족의 게르를 연상케 하는 지휘 막사에서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자신의 말을 누군가에게 들으라는 의도는 아니었다. 단지, 생각만 하기보다는 입으로 내뱉어 가상현실게임 내에서 리그너스 대륙을 통일했던 호 제국의 황제였던 자신의 감각과 기억들을 되살리려는 마음이었다.
“진짜 더럽게 이상한 세계라니까.”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탈을 쓴 이 세계는 게임과 다른 점이 분명 있었지만, 흡사한 면이 더더욱 많았다.
비록 가상현실게임으로 경험을 했다지만 리그너스 대륙을 통일했던 경험이 오크 전사 부대를 지휘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러했다.
“백오십이라…….”
어떻게 보면 많은 숫자일 수도 있겠지만, 영지전 혹은 전쟁에서 오크 전사 백오십은 일제 공격이나 마법 한 방으로 죄다 쓸려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미약한 전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군주급 영웅의 영지전, 혹은 영토 단위나 종족 단위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나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래도 붉은 핏빛의 대지에 있는 엘프나 수인들이 내가 지휘하는 오크 부대를 가볍게 제압할 수 있는 전력은 분명 아닐 거야.”
근거는 있었다. 일단 인구가 삼천 명밖에 되지 않은 커티삭이 이제까지 두 종족의 공격을 버텨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B등급 영웅이자 커티삭의 영주인 페릴 예노스의 존재가 가장 컸다.
그녀의 무력 수치는 292. A등급을 넘어서 S등급 바라보는 그녀의 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주위의 엘프와 수인 영지 역시 고만고만하다는 이야기였다.
페릴 예노스를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영웅도 없었고, 머릿수라도 그녀를 제압할 수 있는 높은 등급의 병종 역시 없는 게 틀림없었다.
혹은 그들의 영지 또한 커티삭과 마찬가지로 불균형이 심화된 영지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수인 애들이 여기를 노린다고 해도 다람쥐나 개 정도만을 보내겠군.”
오크 전사가 마족의 F등급 병종이라면 창을 주 무기로 하는 다람쥐 병사는 수인족의 F등급 병종이었다.
유저들 사이에서 개라 불리는 수인족의 보병 ‘코르기’가 그들보다는 한 등급 높은 E등급의 병종이었다.
“좀 더 최악을 가정한다면.”
수인족의 D등급 기병 ‘레오파드’까지가 붉은 핏빛의 대지에 자리하고 있는 수인족의 최대 전력일 터였다.
톡. 톡. 톡.
호의 생각이 깊어질수록 탁자를 두드리는 손가락 소리의 간격이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결국, 타 종족의 본격적인 공세만 아니라면 이 식량 창고를 지키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적어도 식량 창고를 지키지 못해 페릴 예노스에게 처벌을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호는 그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행여나 레오파드 부대를 이끈 수인족의 영웅이 공격해 온다면 오크 전사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도망을 갈 생각이긴 했다.
괜히 싸우다가 죽는 것보다는 자신이 사는 게 먼저였다.
“취이익! 췩!”
“일해라, 일!!! 게으름 부리지 마라!”
막사 밖으로 나오니 진지 공사가 한창이었다. 지휘관 계열의 클래스 보유한 탓인지 오크 전사들은 호의 명령을 어느 선까지는 군말 없이 잘 수행하고 있었다.
식량 창고 주변에는 오크 전사 말고도 다른 이들 또한 보이고 있었다. 고블린과 코볼트, 오크, 그리고 노예들로 커티삭의 영지민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확한 곡물을 식량 창고에 저장하기 위해 한 시간이 멀다 하고 곡물을 나르고 있었다.
드물지만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하는 유저들 사이에서 인기 순위 10 안에 꼽히는 종족인 마족의 다크 엘프도 목격할 수 있었다.
파아앗!!!
호가 살짝 손을 흔들자 미약한 빛과 함께 눈앞에 홀로그램으로 펼쳐진 책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서 호만이 알아볼 수 있는 ‘관우는 내 여자’라는 유저가 작성한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공략본이었다.
‘어떻게든 운 좋게 병사들을 얻었으니 최대한 부려먹어야 하지 않겠어?’
호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이들을 이용해 뽕을 뽑아낼 생각이었다. 백오십이나 되는 많은 수의 병사는 자신 혼자서는 결코 해낼 수 없는 일들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이들을 이용해 퀘스트나 이벤트, 혹은 던전을 성공적으로 공략해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남는 장사였다.
다만 식량 창고를 지켜야 하는 만큼 모든 병력을 동원할 수는 없었다.
호는 퀘스트와 던전, 정확히 말하자면 커티삭, 그것도 현재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근처에서 진행할 수 있는 퀘스트를 찾기 시작했다.
“음…….”
그렇게 천천히 공략본을 읽어 내려가던 호의 얼굴에 점점 실망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병사들을 이용해 빠르게 경험치와 아이템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무난한 것이 바로 던전의 공략이었는데, 현재 그가 머무르고 있는 위치에서는 던전이라고 부를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현재의 위치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가면 E등급 던전이 하나 있기는 했지만, 그곳은 커티삭보다는 수인족의 마을인 안테 로리에 더욱 가까운 장소였다.
“이렇게 되면 병사들이 있어도 마땅히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공략이 가능한 던전 중에는 커티삭에 도착하기 전 공략본을 통해 확인했던 던전인 지하수렁도 있었다.
그러나 지하수렁은 호가 주둔하고 있는 곳하고는 정반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지하수렁은 딸랑 오크 전사들로만은 클리어가 불가능에 가까운 D등급 던전이었다.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은 정도의 퀘스트들이 이 주위에 몇 있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