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리그너스 대륙전기 015화
“드디어 E등급이다.”
근 한 달간 고생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이어서 뿌듯함도 밀려왔다.
가상현실게임이 아닌 이상한 세계에서 E등급 클래스를 달성한 것이다. 그렇게 잠시 기쁨을 즐기던 호는 정보창을 띄워놓은 채 생각에 잠겼다.
전직을 하면서 불로소득으로 획득한 경험치를 어떻게 사용해야 가장 효과적일지 고민이 됐다.
‘통솔은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의 사기와 전체적인 능력 및 명령 수행을, 무력은 유저의 전투 능력을, 지력은 특성과 스킬의 효과를 보정했던가……?’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설정들이었다. 다행히도 힘겹게 기억을 떠올릴 필요는 없었다. 공략본에 세부 능력의 효과에 대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능력을 주로 성장시킬지는 또 고민을 해봐야겠네.’
승급을 할 때 나타났던 메시지처럼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설정이 이 세계와 비슷한 면이 있다면 허투루 넘길 수는 없었다.
일과 등급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경험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통솔 능력은 패스해야겠네.”
통솔 능력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병사를 지휘할 때였다.
그러나 호가 내일 당장 해야 할 일은 병사들을 지휘하는 게 아닌 공사 현장에서 오크 및 미노타우르스와 돌덩이를 나르는 일이었다.
“당장 누군가와 싸울 것도 아니니까 무력 능력도 패스, 지력도 당연히 제외.”
자신이 보유한 스킬에 영향을 주는 지력은 지금 당장은 통솔보다도 쓸모가 없는 능력이었다.
“남은 건 정치와 매력인데…….”
매력도 패스였다.
게임 내에서 매력 능력은 대륙의 영웅들과의 교류를 나누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지금은 교류를 나눌 수 있는 영웅이 없었다.
“결국 정치가 최선의 선택이네.”
손가락을 움직이자 정치 수치가 9에서 10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세부 능력을 높일 수 있는 경험치는 있었지만, 정치 능력이 F등급에 불과한 하사관이라는 직업의 한계 때문이었다.
“뭐,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니까.”
자연스레 호는 남은 경험치를 보관하기로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보관했던 경험치를 모조리 사용해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 * *
리그너스 대륙의 기후는 지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특수한 기후 지역도 존재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커티삭의 기후는 호의 기준으로는 평범한 수준이었다.
현재 커티삭이 보내고 있는 계절은 가을. 그것도 수확철이었다. 그 때문에 커티삭의 지배자인 페릴 예노스와 그녀를 모시고 있는 멜리아 비쉬는 눈코 뜰 새 없을 정도로 바빴다.
문제는 커티삭의 주변 상황이었다. 커티삭은 엘프, 수인족과 경계를 맞닿고 있는 영지였다.
그리고 이 세 종족은 견원지간이라는 말로도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서로만 보면 으르렁거리다 못해 피를 봐야만 하는 사이였다.
자연스레 붉은 핏빛의 대지의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들은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의 영지를 공격하는 다른 종족들과 전쟁을 벌이곤 했다.
그렇게 흘린 피가 땅을 붉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올 정도로 전쟁이 잦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붉은 핏빛의 대지였다.
특히나 붉은 핏빛의 대지에서 서로 간의 교전이 가장 많이 벌어지는 시기는 바로 가을이었다. 매년 수확철만 되면 각 종족이 상대 종족이 제대로 겨울을 나지 못하도록 병사를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아씨, 빌어먹을! 이 뾰족 귀 녀석들이 진짜!!!”
페릴 예노스가 으득거리는 소리에 주위에 서 있던 오크들이 몸을 움찔했다. 현재 그녀는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바로 그녀가 입에 올린 뾰족 귀, 일명 엘프라 불리는 종족 때문이었다.
그럴 만한 게 페릴 예노스와 그녀가 지휘하는 오크 부대는 몇 번이나 자신들의 식량 창고를 박살 내고 도망치는 엘프의 부대를 계속 놓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아아악!!!”
불에 타서 이제는 재밖에 남지 않은 식량 창고를 보며 페릴 예노스가 분노에 찬 비명을 토해냈다.
그러나 엘프의 부대는 자신들의 임무를 다하고 사라진 뒤였다.
“식량 창고에 병사를 배치했어야 했어!”
커티삭으로 돌아온 페릴 예노스가 영주성으로 영웅들을 호출하고는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다른 종족들의 계속된 습격에서 영지 곳곳에 임시로 지어져 있는 식량 창고를 지키기 위해 방어 병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페릴 예노스는 집무실로 호출된 이를 보고는 몸을 움찔했다.
‘멜리아는 너무 바쁜데…….’
그녀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커티삭에서 병사를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물은 자신을 포함해 멜리아 비쉬밖에 없었다. 그러나 커티삭의 식량 창고는 여러 군데나 되었다. 게다가 커티삭 영지는 작은 편도 아니었다.
“오크 녀석들만 보내놓으면 분명 개죽음만 당할 텐데.”
페릴 예노스가 불만스레 말하고는 곧 세차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벌써 식량 창고가 네 개째 불타 오른 상황에서 병사들까지 잃었다가는 큰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충분히 복구할 수 있는 피해였다. 하지만 수확철이 이제야 시작되었다는 게 큰 문제였다.
“이럴 때 병사를 지휘할 수 있는 영웅이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도움이 되었을 텐데……. 그러니까 제가 영웅들을 만날 수 있는 주점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잖아요?”
“언제는 병영이 먼저라면서?!”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쨌든 커티삭의 문제는 병사를 지휘할 수 있는 지휘관의 부족이었다.
엘프들의 부대를 영지에서 쫓아내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적어도 그들의 공격에서 식량 창고를 지킬 수만 있을 정도의 능력만 지니고 있어도 충분했다.
그때였다. 집무실로 인영들이 헐레벌떡 모습을 드러냈다. 호를 포함한 소환자들이었다.
“저 녀석들은 뭐야?”
갑작스레 등장한 인간들을 모습에 페릴 예노스가 눈을 부라렸다.
‘꿀꺽.’
그런 그녀의 반응에 호는 땀이 차갑게 식었다. 갑자기 소환자들을 모두 호출했다는 소리에 다급히 집무실로 왔는데,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마…… 예노스 님의 호출 명령에 저 아이들도 부른 모양인데요?”
“빌어먹을. 소환자 따위를 어디에 써먹으라고? 대체 시종 녀석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페릴 예노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투덜거리던 그녀는 두려움과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는 소환자들을 바라봤다.
“……어?”
페릴 예노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눈이 조금 동그랗게 떠질 때쯤, 멜리아 비쉬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환자, 뭘 숨기고 있는 거지?”
멜리아 비쉬의 질문에 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딱히 무엇을 숨기고 있다고 말할 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 호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E등급, 최근에 E등급 클래스인 하사관으로 전직할 수 있었습니다.”
“하사관?”
페릴 예노스의 코웃음에 호가 흠칫했다.
‘아차?!’
순간적으로 한 말이었지만,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니었다. 과연 이들이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등장하는 NPC처럼 클래스와 등급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촤라락!
“커헉!”
호는 무언가가 자신의 목을 휘감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곧 몸이 붕 떴고, 잠시 후 엄청난 충격이 몸을 강타하며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커어억!!!”
눈이 부릅떠질 정도의 엄청난 충격이었다. 다행히도 목을 휘감았던 채찍은 바로 풀렸고, 호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켁켁거리며 막혔던 호흡을 다시 쉬기 시작했다.
욱신거리는 몸의 고통보다는 살았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하사관이면 병사를 지휘할 수 있는 거 맞지? 그럼 너, 오늘부터 식량 창고 방어해라.”
기침을 토해내는 호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온 페릴 예노스가 호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호의 눈에 비치는 페릴 예노스의 표정은 이제껏 그가 본 그 어느 때보다도 밝아 보였다.
멜리아 비쉬도 자신의 외알 안경을 매만지면서 관찰하듯 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
자신을 바라보는 마족의 두 영웅의 시선을 느끼며 호는 목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손끝이 살짝 닿을 때마다 화끈한 감각이 올라왔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공격이었다.
역시 B등급 영웅. 지금 자신의 능력으로는 상대도 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그것도 페릴 예노스는 무력이 292나 되는 영웅이었다.
“확실히 커티삭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는 달라진 느낌이 들어요.”
“그렇지?”
페릴 예노스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좋은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표정이었다.
‘눈에 스카우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대체 어떻게 안 거지? 게임 내에서는 정보 공유를 해야지만 알 수 있는 내용일 텐데?!’
순간 이십여 년 전 대한민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일본 만화책의 내용이 떠올렸다.
특히나 멜리아 비쉬는 외알 안경을 끼고 있어서 그런지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대충 훑어보는 것에 불과한데, 자신이 무엇이 변했는지를 알아채는 것이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네. 쓸모는 있을 것 같아요.”
노란빛을 띠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흥미로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멜리아가 다시 한번 눈을 깜빡이자 그 감정은 씻은 듯 사리지고 없었다.
“저 녀석에게 오크 전사 부대를 내줘. 북서쪽에 있는 식량 창고를 지키는 역할을 맡겨야겠어.”
페릴 예노스가 멜리아 비쉬에게 명령하는 걸 들으며 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E등급 클래스인 하사관이 되려던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병사들을 지휘하기 위해서였다.
‘병사만 있으면……!’
그들을 방패로 삼아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탈을 쓴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몸을 지켜 나갈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을 이용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경험치와 힘을 손에 넣을 수도 있었다.
가장 먼저 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커티삭의 주위에 있는 소형 던전과 몬스터 무리였다.
커티삭에 주둔하고 있는 오크 병사 중 일부만 자율적으로 지휘할 수 있어도 그들을 물리치고 아이템을 획득할 수 있었다.
“흐음…….”
그리고 멜리아 비쉬가 다시 한번 호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북서쪽의 식량 저장고라. 최근까지 제가 지키고 있던 곳이로군요. 그런데 수인 녀석들이 나타난 곳인데…….”
“알고 있어. 하지만 직접적인 공격은 없었으니 그 녀석들은 이놈에게 맡기고 너와 나는 뾰족 귀 녀석들을 쫓아야겠어.”
“알겠습니다.”
그렇게 얼떨결에 호는 오크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이 되었다.
“미친…….”
명령에 따라 자신에게 배치된 오크들을 보며 호는 욕설을 내뱉었다. 그 수가 무려 백오십이나 되었기 때문이었다.
‘커티삭의 인구는 삼천 명 정도에 불과할 텐데?!’
마족이 아무리 싸움을 좋아하는 호전적인 종족이라고 해도 적당한 수준이라는 게 있었다.
오크가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도 아니고, 삼천 명의 영지에서 운용할 수 있는 병사의 수는 한계가 있었다.
문제는 커티삭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가 고블린 투척병이 440, 오크 전사는 무려 600이나 된다는 점이었다.
“조만간 영지 파산하겠는데…….”
호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놀람과 어이없음이 섞인 표정이었다.
종족이 종족이니만큼 주둔하고 있는 병사의 숫자가 인구수 대비 많을 거라고는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 수가 무려 천이나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