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리그너스 대륙전기 012화
[병영 공사 진척도-39%]
걸음을 옮기면서 호는 자신이 작업을 해야 할 건물인 병영의 건설 상태에 대한 정보를 확인했다.
그와 함께 자신의 주위를 지나치는 NPC들에 대한 정보도 하나씩 열어보고 있었다.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할 때 생겨난 버릇 같은 행동이었다.
이 세계가 리그너스 대륙전기라 불리는 가상현실게임과 배경이 흡사하기는 했지만 게임처럼 세이브와 로드를 사용해 유저가 입맛대로 활동할 수 있는 세계는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정보창과 같은 게임 시스템은 이 세계가 자신이 주로 즐기던 가상현실게임이라는 착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렇다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생각했다가는…….’
호는 빠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등줄기가 오싹했다.
선택의 신전에서 만났던 SSS등급의 영웅, 마왕 쉐르난비체의 손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던 탓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열다섯이나 되는 사람이 순식간에 시체로 변하는 장면도 목격했었다.
‘일단은 안전하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이용해 어떻게든 살아남겠어!’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이 세계에서의 능력을 높이는 것이 급선무였다.
“상태창.”
<플레이어 정보(Status)>
1. 이름 : 윤호
2. 성별 : 남(27)
3. 종족 : 인간
4. 소속 : 마족
5. 레벨 : 1
6. 직업 : 파이터
7. 세부 능력
통솔 : 7/10(F) 무력 : 6/10(F)
지력 : 6/10(F) 정치 : 9/10(F)
매력 : 7/10(F)
8. 특성 : 획득하고 있는 특성이 없습니다.
9. 스킬 : 보유하고 있는 스킬이 없습니다.
상태창을 부른 호는 자신의 정보를 확인했다. 역시나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유저들은 게임 내의 행동에 따라 어느 수준의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었고, 그러한 경험치를 이용해 자신의 능력치를 높일 수 있었다.
그리고 호는 그러한 방법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행동에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공략본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다행인 점은 커티삭의 영주인 페릴 예노스나 주요 영웅인 멜리아 비쉬가 소환자라 불리는 자신들에 대해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취엑. 당신이 페릴 예노스 님께서 보낸 인간인가?”
미노타우르스가 가리킨 장소에 도착하자 오크 하나가 호에게 말을 걸었다.
피에 젖은 것으로 보이는 붉은 천으로 안대를 하고 있는 오크였다. 미노타우르스가 말했던 애꾸 오크로 보였다.
그리고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머뭇거리던 호는 잠시 후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다.”
호의 입에서 반말이 흘러나왔다.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등장하는 종족들과의 유저의 관계는 대부분은 첫 만남에서부터 결정되게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호는 영웅이 아닌 일반 NPC에 불과한 오크들에게 움츠러드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약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이들은 자신을 업신여기며 잡아먹으려 들 게 분명했다. 실제로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게임 시스템에 따르면 NPC들의 반응은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취익. 알았다.”
그리고 애꾸눈의 오크는 호의 말투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 오크의 반응에 호는 자신이 그럭저럭 잘 행동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익, 예노스 님이 왜 당신을 이곳에 보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취이익……. 위대하신 분의 뜻이니…….”
계속해서 말이 이어지면서 오크의 커다란 콧구멍에서 세찬 바람이 흘러나왔다. 숨소리가 크게 거슬리기는 했지만 이야기의 내용을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할 말을 끝낸 애꾸눈의 오크는 호에게 공사 현장에 필요한 몇 가지 도구를 건네며 말했다.
“췩! 이제부터 여기서 자유롭게 일하면 된다. 하지만 철저히 기여도를 체크할 테니 보상을 받고 싶으면 열심히 일을 해야 할 거다. 취익.”
말을 마친 애꾸눈의 오크는 천천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작업 도구를 바라봤다.
“이거 완전히 똑같잖아?”
기분이 이상했다.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하는 것과 흡사한, 아니, 똑같다고 생각이 될 정도의 진행이었다. 단지 호가 인간족으로 게임을 플레이했을 때는 턱수염이 가득 난 중년 남자가 이런 말을 했었지만 지금은 애꾸눈의 오크라는 게 달라졌을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호는 곧 자신의 작업 도구를 들고 병영의 공사 현장으로 향했다.
애꾸눈의 오크는 분명 자유롭게 일해도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여도를 위해서라면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결코 좋은 행동이 아니었다.
‘분명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는…….’
그날 하루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잘 완수했느냐에 따라 경험치가 주어졌다.
그리고 이 경험치는 유저의 세부 능력과 레벨을 높이는 데 사용됐다.
“그럼 열심히 해볼까?”
전쟁에 참가한다거나 던전의 공략을 마치고 획득할 수 있는 경험치에 비하면 이런 건물 공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경험치의 양은 현저히 적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호에게는 이런 소량의 경험치마저도 소중했다.
작업이 시작되었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쯤 그날의 공사가 끝이 났다. 그렇게 하루 종일 온몸이 욱신욱신할 때까지 일을 한 호가 얻은 경험치는 8이었다.
띵동!
-‘처음으로 이 세계에 도움이 되었네요?’의 업적 보상으로 오늘 얻은 경험치가 두 배로 상승합니다.
-경험치를 8 획득했습니다. 정보창에 경험치라는 새로운 수치가 오픈되었습니다.
“업적 시스템까지 그대로 있다니.”
호의 입에서 허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0. 보유 경험치 : 16
메시지에 나타난 대로 호의 상태창에는 ‘경험치’라는 이름의 새로운 세부 항목이 생겨나 있었다.
오늘 호가 얻은 경험치는 16. 업적 시스템으로 얻은 보상으로 인해 경험치가 두 배로 늘어난 것이다.
“그러면…….”
경험치를 획득했으니 이제는 세부 능력치와 레벨을 높여야 할 때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 선택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이 세계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성장시킬지에 대해서는 ‘관우는내 여자’라는 마스터 유저가 쓴 공략본을 자세히 살펴본 후 결정을 내릴 생각이었다.
* * *
선택의 신전에서 마족의 소환자로 선택된 호와 일행은 커티삭의 영주이자 마족의 B등급 영웅인 페릴 예노스의 성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2층으로 지어진 페릴 예노스의 성은 개척 도시를 다스리는 영주의 성치고는 큰 편에 속했기에, 일행이 머무르기에도 충분히 넓었다.
그리고 호를 포함한 소환자들은 현재 1층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째 체할 거 같네.’
숟가락으로 감자를 갈아 만든 죽을 휘휘 젓던 호는 슬쩍 식사를 하고 있는 여자들을 바라봤다.
커티삭에서 자신과 함께 머물게 된 소환자인 한씨 자매, 한시진과 한시연, 그리고 벨기에 연합의 공주인 아스트리드 벨이 무거운 표정으로 음식을 깨작거리고 있었다.
다들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기껏해야 중학생으로 보이는 한시연이었다.
‘괜찮은 건가?’
그녀의 그릇에 담긴 죽은 식사 전과 마찬가지로 줄어든 기색이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오들오들 떠는 게 보기만 해도 걱정이 들 정도였다.
아무래도 선택의 신전에서부터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이도 어린 만큼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힘든 게 분명해다.
호의 시선이 시연의 옆에 앉은 말총머리 소녀에게로 향했다. 친언니인 그녀가 함께 있지 않았다면 분명 사달이 났을 거였다.
아스트리드 벨이라는 벨기에 연합의 공주 역시 갑작스럽게 달라진 자신의 환경에 무너지는 모습이었다.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종종 자신의 뺨을 세차게 때리는 모습을 보이곤 했기 때문이었다.
의외로 가장 멀쩡한 것은 말총머리 소녀 한시진이었다.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가짐 때문일까? 그녀는 호만큼이나 이 세계에 빨리 적응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호는 그녀가 마족들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곤 모습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
문득 저들은 요 며칠간 이 도시에서 무엇을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다행히 페릴 예노스와 멜리아 비쉬와 같은 영웅들은 소환자들의 행동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증거로 식사 장소에는 호를 포함해 소환자들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는 병영의 건설 현장에서 육체적인 노동을 했습니다.”
“건설 현장요? 저와 시현이는 계속해서 이 성의 부엌에서 이상한 채소를 깎았어요. 가사 노동은 나랑은 관계없을 줄 알았는데…….”
한시진이 호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경험치 : 7
정보를 확인하니 그녀가 보유한 경험치 수치가 보였다. 며칠간 획득한 경험치가 7. 굉장히 낮은 수치였다.
안타깝게도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무거운 분위기가 길게 대화가 이어지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하고픈 말이 있어도 말을 꺼내는 행동 자체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모습은 군대에 갓 입대한 신병들보다도 못했고, 그것은 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아키네 씨가 보이지 않네요.”
갑작스레 식당을 울리는 호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어느새 눈물을 흘린 모양인지 시현도 붉어진 눈동자로 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시진이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키네 씨는 요 며칠 전부터 보지 못했어요.”
“며칠 전부터…….”
“도시에 도착해서 악마들을 만난 이후부터 같아요.”
그녀의 대답에 호는 고개를 내리깔고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은 했지만 결국…….’
호는 페릴 예노스의 손아귀에 붙들린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죽었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했다.
마족을 이루는 종족 중 하나인 서큐버스들은 동족의 마력을 흡수해 미미하게나마 자신들의 능력을 높일 수 있었다.
그리고 아키네는 그런 서큐버스의 마력에 중독이 된 여인이었다. 커티삭의 영주 페릴 예노스 역시 서큐버스고 말이다.
“설마……?”
그런 호의 반응에 한시진이 화들짝 놀라며 호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 가득 서린 걱정과 경계심에 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키네 씨는 분명 무사할 겁니다.”
“그렇…… 겠죠?”
잠시 망설이던 호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그리고 다시 어색한 침묵이 식당에 맴돌았다.
잠시 후 멜리아 비쉬가 식당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녀의 명령에 따라 모두들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자신에게로 배정된 방에 들어선 호는 낡지만 침대의 형태를 한 가구 위로 몸을 던졌다.
먼저 씻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피곤하고 귀찮았다. 그렇게 잠시 멍하니 기하학적인 무늬가 그려진 방의 천장을 바라보던 호는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