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리그너스 대륙전기 010화
커티삭. 페릴 예노스가 영주로 있는 이 소규모 개척 도시는 여러 종족이 흘린 많은 피가 대지를 붉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는 ‘붉은 핏빛의 대지’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 말은 즉, 지리적으로 커티삭이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이 지역의 토양은 붉은빛을 띠고 있었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전투에서 흘리고 있는 피들이 토양의 색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콰자자작!!!
“키히익!!!”
아름드리나무가 박살이 나며 소름 끼치는 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소리의 주인공은 미남자라는 말이 어울리는 남성 엘프였다.
페릴 예노스는 핏줄이 터져 붉은색의 눈물을 흘리며 숨이 끊어진 엘프를 뒤로한 채 손을 혀로 핥으며 파르르 몸을 떨었다.
“하아아……. 난 엘프들의 비명을 들을 때가 가장 좋더라.”
숲의 종족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언제나 자신이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엘프가 어떻게든 살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녀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뚝! 뚜두두둑!!!
그녀가 손에 쥔 채찍을 들어 올리자 억지로 뼈를 뒤튼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게 마지막 엘프 병사가 목숨을 잃는 것을 끝으로 커티삭을 침략한 적과의 전투가 승리로 끝이 났다. 하지만 마족의 피해도 제법 컸다.
특히나 숲속에 자리를 잡은 엘프들을 상대로 페릴 예노스가 오크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린 것이 피해를 키웠다.
“예노스 님! 아무리 오크 병사라지만 그들을 훈련시키는 데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는지 아십니까?”
무모한 명령으로 인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오크 부대의 모습에 외알 안경을 쓴 서큐버스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불만을 표출해 냈다.
“오백 리스입니다! 오백 리스! 우리 영지의 재정으로 결코 적은 돈이 아니라고요, 예노스 님!”
“알아, 알아! 하지만 그렇게나 허무하고 죽어나갈 줄은 나도 몰랐다고. 이건 분명 훈련이 부족해서야.”
“하아아…….”
빼죽 입술을 내밀며 불퉁한 모습을 보이는 페릴 예노스의 반응에 외알 안경의 서큐버스, 멜리아 비쉬는 답답함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알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예노스 님.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으니 이제는 영주성으로 돌아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왜? 영주성으로 돌아가 봤자 할 것도 없잖아?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귀 긴 애들이나 이빨 좀 나 있는 녀석들 몇 마리 더 족치고 가자. 응?”
페릴 예노스가 자신의 진보랏빛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멜리아 비쉬를 향한 그녀의 목소리에는 투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예노스가 들고 있던 채찍이 휘둘러지며 흙더미가 튀어 올랐다.
수백에 가까운 엘프가 커티삭을 침략했고, 고작 이틀 만에 그들을 모조리 물리쳤지만 페릴 예노스는 전혀 만족하지 못했다.
전투의 열광을 원하는 마족의 피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노스 님, 위대하신 만마의 지배자 쉐르난비체 폐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쉐르난비체 폐하의 지시?”
고개를 갸웃하는 영주의 모습에 멜리아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저녁, 처음으로 이 대륙에 모습을 드러낸 마족의 소환자들이 커티삭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위대하신 만마의 지배자 쉐르난비체 폐하께서는 영주님에게 소환자들의 처리를 맡기셨습니다.”
“……어?!”
멜리아의 말에 페릴 예노스의 눈동자가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소녀처럼 반짝였다.
그녀의 말대로 보름 전, 여신 라헬이 소환자라 불리는 창조신의 계시를 받은 존재를 소환했다는 소문이 대륙에 널리 퍼졌다.
그리고 만마의 지배자인 마왕 쉐르난비체가 마족의 소환자들을 커티삭으로 보내겠다는 전령이 도착했던 게 불과 닷새 전이었다는 게 예노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마 쉐르난비체 폐하의 명령을 잊으셨습니까?”
살짝 눈을 흘기는 멜리아의 모습에 페릴 예노스는 자신의 무기인 채찍을 갈무리한 날개를 활짝 펴며 말했다.
“아니? 기억하고 있는데? 사실 커티삭으로 돌아가려고 했었는데?”
그러고는 멜리아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혀를 베 하고 내밀고는 힘차게 날개를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신의 성이 있는 커티삭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눈망울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창조신의 계시를 받은 소환자라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이 피어오를수록 그녀의 날갯짓에는 더욱더 힘이 실렸다.
* * *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이동을 하던 마차는 언제부터인가 붉은색의 대지를 달리고 있었다.
그로 인해 호는 이제 얼마 후면 자신들이 커티삭에 도착하리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커티삭의 대지가 붉은색이라는 것은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에 나와 있었다.
‘커티삭.’
마족의 B등급 영웅인 페릴 예노스가 다스리는 개척 도시.
공략본에 따르면 커티삭은 플레이어가 처음 게임을 시작했을 경우 인구 삼천 정도의 조그마한 마을로 설정이 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호는 이제 곧 자신이 도착할 커티삭이 이 설정에 크게 벗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여전히 이 세계가 무섭고 두려웠지만, 그래도 자신이 즐기던 게임의 배경과 흡사한 탓인지 아직까지는 버틸 만했다.
‘누가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었지?’
호는 그 말이 정말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탈을 쓴 이상한 세계에 온 지 벌써 보름 가까이나 흐른 탓일까?
커다란 돌에 부딪혀 수레가 크게 덜컹거리는 것도, 곰팡이의 누룩 내가 나는 걸레 같은 모포를 덮고 자는 것도, 쉭쉭거리며 뱀처럼 혀를 내밀고 자신들을 살피는 리자드맨의 노란색 눈동자를 보는 것도 이제는 익숙한 일이었다.
“언니, 우리는 언제쯤 도착해?”
“곧. 곧 있으면 도착할 것 같아. 저들이 그렇게 말했어.”
옆에서 시진, 시현 자매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호의 귀에 들려왔다.
시간이 흘러서일까? 조금이긴 하지만 그녀들 역시 지금의 이 상황에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같은 괴상한 냄새와 맛을 자랑하는 고기를 먹어야 하는 식사 시간은 예외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동생의 경우에는 아직까지 늦은 밤마다 훌쩍이는 소리를 내곤 했다.
“아!”
잠시 고개를 돌리던 호와 공주풍의 드레스를 입은 아스트리드 벨의 눈이 마주쳤고, 탄성과 함께 벨이 민망한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실제로 공주님일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호는 그녀들과 처음 이야기를 나눴던 때를 떠올랐다. 이대로 가만히 수레에만 갇혀 이동하다가는 정신병에 걸릴 것 같다는 말총머리 여인 한시진의 제안으로 시작된 대화였다.
다행히도 리자드맨은 그런 일행의 모습에 쉭쉭거리기만 할 뿐, 제지하지는 않았었다.
그리고 그녀들과의 대화를 통해 호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패러럴 월드라는 게 정말로 있을 줄이야.’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은 판타지 소설에서나 등장할 법한 패러럴 월드의 존재였다. 덕분에 호는 시진, 시현 자매의 소개를 들었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야만 했다.
그녀들의 국적은 대한 제국. 한반도는 물론이고, 일본과 만주를 포함해 시베리아까지 국경을 넓혔다는 그야말로 대체 역사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나라였다.
아스트리드 벨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벨기에 연합의 공주였다.
‘EU도 아니고.’
당연히 처음 듣는 국가 연합이었지만 대한 제국과는 같은 세계에 존재하는 국가 연합이었나 보다. 수레의 가장 막내인 시현이는 그녀의 정체가 벨기에 연합의 공주라는 사실을 알고는 조그맣게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읏!”
마력의 쾌감에 중독이 되어 폐인이 되다시피 한 여인의 이름은 카타리나 아키네. 그녀 역시 대한 제국의 국민이었다.
‘대한 제국이라. 나도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다.’
그녀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대한 제국은 호에게는 유토피아에 가까운 세계였다. 그래서인지 시진, 시현 자매는 자신들의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났다.
벨기에 연합의 공주인 아스트리아 벨도 몇 번이나 대한 제국이 대단한 나라라는 뉘앙스로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호는 그녀들에게 한 가지 거짓말을 했다. 아니, 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이 아닌 대한 제국의 사람이라는 것.’
자신을 제외한 네 명의 여인은 같은 세계의 사람이었다. 그런 와중에 자신이 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그녀들에게 혼란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경계선이 그어질 것 같았다.
다행히 그녀들은 그런 호의 거짓말에 딱히 의심을 보이지 않았다.
덜그럭덜그럭.
마차는 계속해서 붉은색의 대지를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노을이 질 무렵 리자드맨들이 쉬이익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쉬이익! 커티삭!!!”
“커티삭이 보인다! 쉬악!!!”
호는 리자드맨의 목소리에서 기쁨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말은 안 했어도 리자드맨 역시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저기가 커티삭인가 봐.”
“언니,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멀리서 보이던 마을을 둘러싼 목책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일행의 표정은 조금씩 어두워졌다.
커티삭이라 불리는 저 마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감옥이나 다름없었던 수레에서 벗어났다는 기쁨보다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더 크게 다가오고 있었다.
붉은색의 흙길 위를 달리는 마차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십여 분을 달리고 난 후, 호와 일행은 강철 갑주와 배틀 엑스로 추정되는 커다란 도끼를 어깨에 멘 녹색 피부의 괴물이 지키고 있는 커티삭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등장하는 각 종족의 도시들은 발전 상황에 따라 여러 분류로 나눌 수 있었다.
군사 도시, 문화 도시, 상업 도시, 생산 도시 등이 그 예였다. 하지만 이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들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붙인 이름일 뿐 실제로 게임 시스템상으로 이런 정의가 내려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엔딩을 본 유저답게 호는 커티삭에 건설된 건물들의 대략적인 모습과 구조만을 보고도 커티삭이 무엇을 중시하는 도시인지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무장한 오크들이 커티삭 주위에 돌아다니고 있었고, 성내 곳곳에 보이는 마족들의 건물들 역시 눈에 익었다.
‘군사 도시다!’
커티삭에 지어진 건물의 대다수는 병영과 훈련장과 같은 병사들의 양성에 주력한 건물이었다.
성문을 지나 영주성에 가까워질수록 호의 고개가 이리저리 돌아갔다. 그럴수록 주먹에 힘이 강하게 쥐어졌다.
커티삭의 모습과 발전 상황은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등장하는 마족의 도시와 판박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호는 가슴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로 자신이 플레이했던 게임의 설정과 비슷한 상황이라면 이곳으로 오기 전 우연히 다운받은 공략본이 무용지물이 아닌, 엄청난 보물이 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이 세계에서 목숨을 잃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