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리그너스 대륙전기 008화
“숙여라.”
쉐르난비체가 오들오들 떨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또박또박 들리는 얼음같이 차가운 목소리는 가상현실게임 속에서 호가 종종 들었었던 마왕 쉐르난비체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그리고 호는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몸을 엎드렸다.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했던 기억 때문이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녀가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릴 리가 없었다.
몸을 엎드리는 것과 동시에 주위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호와는 달리 그들은 멀뚱멀뚱 서로를 바라보며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어째서?’
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제까지 각 종족들이 보여준 모습에서 위기감을 느끼지 못한 것일까?
“모두 엎드려요!”
순간 자신에게 선 밖으로 나가는 것이 위험하다고 충고했던 여성과 그녀의 동생이자 시현이라는 이름의 어린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온 순간 호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촤아악!!!
호는 날카로운 기운이 자신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는 느낄 수 있었다. 이어서 따뜻한 감각이 등에서 느껴지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쉐르난비체가 만들어낸 검풍에 의해 사람들의 몸이 찢겨서 휘날리고 있었다.
“아…… 아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참극이었다.
스무 명이나 되는 사람 중 열다섯이 땅바닥으로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호의 눈으로 들어왔다.
“웁…… 우웁…….”
그 모습을 보며 호는 지금의 이 세계는 가상현실 따위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다섯 명이나 살았네?”
무려 열다섯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스럽지 않은지 쉐르난비체가 아쉬운 말투로 말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엎드려서 구역질을 토해내고 있는 호의 머리를 지그시 발로 밟았다.
“……!!!”
머리가 부서질 것 같은 아픔에 호가 비명을 질렀다. 아니,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쉐르난비체의 능력 때문인지 입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가상현실게임? 버그? 소환자? 그런 내용들이 전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아픔이 호의 몸을 잠식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토해내었던 더러운 오물이 얼굴 가득 묻어나고 있었지만, 호는 계속해서 몸을 버둥거렸다.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네놈이 네 명을 살렸구나.”
자신의 발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리는 호를 향해 쉐르난비체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강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쉐르난비체, 당신의 행동은 저를 곤란하게 만드는군요.]
“칫!”
여신 라헬의 담담한 목소리에 쉐르난비체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호의 얼굴을 걷어찼다. 그리고 그게 선택의 신전에서 있었던 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꿀꺽.”
그렇게 호가 기절하자 남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그들은 어떻게든 손으로 입을 막으며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올 비명을 막고 있었다.
눈물, 콧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저 소리를 막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이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잃었고, 자신들에게 위험을 알렸던 남자는 두 개의 뿔을 지닌 괴물의 발길질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다행히 몸을 꿈틀거리는 것을 보면 살아 있는 것 같았지만,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아아아?!”
비명과 함께 살아남았던 여성 중 하나가 제단 위로 쓰러졌다. 마족 중 하나인 서큐버스의 마력에 잠식된 까닭이었다.
베히모스와 눈이 마주치고 기절했던 까닭에 운 좋게 쉐르난비체의 공격을 피했던 남자는 안타깝게도 심장마비가 왔는지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렇게 기절해 있는 호와 서큐버스의 마력에 몸이 잠식된 여성을 제외한 세 명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였다.
[마왕 세르난비체, 그대는 창조주 리그로우와 세리너스의 계시를 믿지 않는 건가요?]
환한 빛줄기와 함께 여신 라헬의 청명한 목소리가 선택의 제단에 울려 퍼졌다.
쉐르난비체의 행동을 탓하는 내용이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것은 호기심이라는 이름의 감정이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알아챌 리 없었다.
“창조주들의 계시는 잊지 않고 있다, 여신 라헬. 하지만 내 검도 피하지 못하는 버러지들이 과연 창조주가 안배한 존재일까?”
[쉐르난비체, 소환자들은…….]
무어라 말을 하려는 여신을 무시한 채 세르난비체는 남아 있는 인간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몸을 벌벌 떠는 인간들의 모습만이 그녀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운이 좋은 녀석들이군.”
그렇게 목숨을 건진 인간들의 생김새를 하나하나 확인하던 쉐르난비체가 망토를 펄럭이며 몸을 돌렸다.
“블라디션으로 돌아간다.”
“만마의 제왕이자 위대하신 쉐르난비체 폐하. 소환자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명령을 내려주세요.”
서큐버스 하나가 한쪽 무릎을 꿇고는 쉐르난비체의 의견을 구했다.
“살아남은 녀석들은 모두 커티삭으로 보내고, 페릴 예노스에게 그들의 처분을 맡긴다. 정말로 저들이 창조주가 안배한 존재들이라면 커티삭에서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폐하.”
대답과 함께 서큐버스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고는 마수를 시켜 쓰러져 있는 호와 함께 살아남은 네 명을 데리고 선택의 제단을 떠났다.
그렇게 마왕 쉐르난비체의 마족을 마지막으로 모든 종족 대표자가 떠난 선택의 신전은 고요함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시 후, 그그긍거리는 소리와 함께 뭐라 설명 지을 수 없는 중얼거림들이 주문처럼 신전 내에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햇살로 만들어진 하나의 문장이 선택의 제단 위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2회 차 소환–510]
* * *
빛이 번뜩이며 피보라가 몰아친다. 찢긴 살점들과 생기가 사라진 사람들의 모습은 지옥을 연상케 했다. 그런 끔찍한 공간에서 호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라는 가상현실에서 그는 절대의 존재였었다. 수천, 수억이 넘는 사람이 호의 이름을 외쳤고 제국의 백성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런 가상현실에서의 생활은 거짓된 삶이었다.
평범한 집안에서 큰 고생 없이 자라 적당한 기업에 취직하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예쁜 여자 친구가 있었던 현실 역시 거짓이었다.
‘아…… 아아아…….’
자신은 단지 단순히 죽음을 기다리는 나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지금이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질퍽한 감촉들과 사방에서 느껴지는 피비린내는 도저히 정상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때였다.
[일어나세…….]
[이봐, 괜찮아……?]
“큿!”
갑자기 머릿속이 지잉 하고 울리며 깨질 듯이 아파왔다. 호는 찐득한 피가 묻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환청과도 같은 목소리가 의식의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느낌이었다.
심한 노이즈가 낀 것처럼 끊기듯이 들려오는 목소리는 계속해서 호의 머릿속을 노크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거대한 강진이 발생한 것처럼 큰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환한 빛이 호의 눈앞을 가득 메웠다.
“일어나세요. 일어나 봐요!”
“이봐요? 괜찮아요? 살아 있어요?”
“언니, 죽은 거 아니야?”
“한시현! 그런 소리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하…… 하지만! 이 아저씨 안 일어나는걸…….”
주위에서 들려오는 높은 톤의 목소리들. 지끈거리는 두통을 뒤로한 호가 인상을 쓰며 가까스로 손을 꿈틀거리자 여기저기서 다행이라는 감정이 담긴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호가 제대로 정신을 차린 것은 그 이후로 이십여 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였다.
“괜찮으세요?”
말총머리를 한 여인이 물었다.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울먹이는 꼬마 아이를 달래던 여인이었다.
“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긴 하지만 그것 말고는 괜찮은 것 같아요.”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한 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는 것.
“뿔이 난 여자가 당신을 세게 걷어찼고, 당신은 그대로 기절했어요.”
“뿔이 난 여자요?”
“네. 그 마왕이라고 하던데요?”
여자의 말이 끝나는 순간 호는 오싹한 느낌과 함께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마왕 쉐르난비체의 발에 깔려 벌레처럼 발버둥 치던 자신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공포에 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때 힘없이 떨어진 호의 오른팔이 퉁하고 땅바닥에 부딪쳤다.
‘퉁?’
팔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잠시 정신을 차린 호는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곧 시선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부딪치는 소리뿐만 아니라 팔에서 느껴진 감각도 이상했다. 땅바닥이 아니라…….
“어?”
기다란 나무 널빤지에 여기저기 틈이 패여 있는 모습이 호의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로 지면으로 추정되는 검은색 땅의 모습이 계속해서 변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린 호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마치 죄인처럼 커다란 나무 수레에 위에 묶인 채 실려 가고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저도 잘 몰라요. 괴물들이 여기에 타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탔어요. 아, 우리를 데리고 커티삭이라는 곳으로 간다고 했어요.”
불안과 초조가 섞인 눈동자를 숨기지 않은 채 말총머리의 여인이 대답했다.
덜그럭덜그럭.
다행히 호가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퉁명스럽긴 했지만 자신들을 끌고 가는 리자드맨들이 대답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커티삭…….’
이들은 쉐르난비체의 명령에 따라 선택의 신전에서 살아남은 다섯 명을 데리고 커티삭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지 리자드맨들은 쉭쉭 뱀 같은 혀를 내밀며 호와 일행을 바라볼 뿐 딱히 해코지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들에게 도망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리자드맨들은 철저하게 4인 1조로 쉼 없이 수레 내부를 감시했다.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등장하는 영웅인 마왕 쉐르난비체에게 죽을 뻔했다는 사실은 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세계가 가상현실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일까? 호가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은 기절에서 깨어난 뒤로도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후우…….”
정신을 차리고 가장 먼저 호가 한 일은 바로 가상현실게임을 종료하는 마스터 명령어를 부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호의 행동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
반복된 행동으로 몇 번의 명령이나 마스터 메뉴를 불렀지만, 선택의 신전에서처럼 마스터 메뉴는 묵묵부답이었다. 실망스럽긴 해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플레이어 정보(Status)>
1. 이름 : 윤호
2. 성별 : 남(27)
3. 종족 : 인간
4. 소속 : 마족
5. 레벨 : 1
6. 직업 : 파이터
7. 세부 능력
통솔 : 7/10(F) 무력 : 6/10(F)
지력 : 6/10(F) 정치 : 9/10(F)
매력 : 7/10(F)
8. 특성 : 획득하고 있는 특성이 없습니다.
9. 스킬 : 보유하고 있는 스킬이 없습니다.
“이게 뭐야……!”
하지만 눈앞에 선명하게 나타나는 플레이어 정보에 호는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플레이어 정보는 지금의 이 세계가 가상현실게임이라고 알려주는 정보였다.
하지만 이 가상현실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죽을 뻔도 했다. 그런 이유로 인해 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짜증, 공포와 좌절 같은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믿기지 않는, 그리고 무섭게 느껴지는 자신의 상황에 호는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아니, 진짜로 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