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리그너스 대륙전기 005화
“@#[email protected]#$%^!”
“좋아! 그거지!!!”
“괴물을 상대로 용기 있게 나설 녀석은 없는 거야?”
그렇게 한바탕 구토를 쏟아내자 호는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제단 위에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비명과 환호성을 지르는 NPC들의 소리가 호의 귀를 세차게 두드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버그인가?’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는 분명 싱글 플레이 가상현실게임이었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플레이어가 있을 리 없었고, 있어서도 안 됐다.
분명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온라인으로 만들어달라는 게이머들의 세찬 요구가 있기는 했다. 호도 그런 게이머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Korea사에서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온라인으로 만들었다는 기사는 어디서든 본 적이 없었다.
또한 리그너스 대륙전기는 방금 전의 호가 목격한 것처럼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에게 혐오감을 나타내는 장면도 등장하지 않았다.
어쨌든 호가 생각하던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오프닝 이벤트는 이런 게 결코 아니었다.
‘혹시 2회 차 이벤트인 건가? 그러면 눈앞의 사람들은 유저가 아닌 NPC? 협력 플레이라도 하라는 건가?’
당황함은 별의별 생각까지 떠오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제단 위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 호의 입은 천천히 벌어지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눈앞의 사람들은 리그너스 대륙전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현실 세계의 복장을 입고 있었다. 정장, 체육복, 교복은 물론이고 심지어 최근 유행을 타고 있는 더블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는 여성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이스, 퓨말, 아디오스 등 현실 세계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유명한 브랜드까지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미친!”
한껏 불안한 얼굴로 뭉쳐 있는 이들은 결코 NPC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호의 발밑으로 짙은 그림자가 생겨났다.
“……!!!”
가상현실게임으로 단련된 감각이 위험을 알리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큰일이 벌어질 거라고 온몸이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호는 자신의 감각을 믿었다.
카아앙!
호가 반사적으로 몸을 날리는 것과 동시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NPC들의 함성이 좀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커졌다.
그리고 방금 전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상황을 파악하던 호는 침을 꿀꺽 삼켜 넘겼다.
[크르르르!]
방금 전, 어떤 남성의 팔을 으적으적 씹어 먹는 모습을 보이며 호가 땅바닥에 구토를 하게 만든 사마귀 형태의 괴물이 그를 향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의 날카로운 쇳소리는 괴물의 날카로운 앞다리가 만들어낸 소리였다. 그 앞다리에는 방금 전까지 괴물이 먹고 남은 살점이 징그러운 모습으로 걸려 있었다.
그 끔찍한 광경을 보니 당장에라도 게임을 종료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어…… 어…… 게임 종료…… 게임 종료…….”
얼마나 당황했는지 수백, 수천 번을 사용했던 메인 메뉴가 어디에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세이브를 하고 싶은 마음은 온데간데없었다. 허공에 손가락질을 하는 호의 행동이 우스꽝스러웠는지 NPC들의 웃음 섞인 함성이 제단에 울려 퍼졌다.
“씨발……. 무슨 게임이 뭐 이래?”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웃음은 악몽과도 같았다. 당장에라도 게임을 종료하고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바쁘게 손을 움직이던 호의 얼굴이 차츰 굳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왜? 왜?!’
아무리 명령어를 입력해도 메인 메뉴가 나타나지를 않았다. 가상현실게임을 강제로 종료시킬 수 있는 마스터 시스템 역시 먹통이었다.
뭔가 명령어를 잘못 입력했나 싶어 계속해서 손을 움직여 봤지만, 오히려 귀에 들려오는 웃음소리만이 더더욱 커지고 있었다.
그렇게 호가 점점 패닉에 빠질 무렵, 신전 위에 있던 무리 중 한 여성이 외쳤다.
“거기 있으면 위험해요! 빨리 이리 와요.”
‘위험?!’
여성의 경고는 호의 정신을 바짝 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는 생각이 호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분명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게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호는 마스터 명령어를 입력해 게임 속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저였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이 현실 세계의 옷을 입고 있다고는 하지만, 호는 이들이 유저, 혹은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인정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을 하게 된다면…….
[키이이!]
“괴물이 움직이려고 해요! 빨리 와요!”
“빨리 오게! 거기 있다가는 정말로 죽는다고!”
그러나 눈앞의 사마귀 괴물이 고개를 까닥이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집어넣는 것을 본 호는 곧바로 몸을 돌려 사람들이 모인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젠장! 젠장!”
어째서일까? 눈가에 눈물이 핑 도는 느낌이었다.
[키르르륵!!!]
당장에라도 날카로운 발톱을 휘두를 것만 같은 사마귀 괴물은 호가 사람들의 무리에 끼어드는 순간 관심을 잃은 듯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광기에 찬 NPC들의 고함은 계속해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대체…….”
“조심해요. 빠르게 선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큰일이 났을 거예요. 벌써 두 명이나 죽었다고요. 그러니까 선 밖으로 나가지 않게 조심해요.”
호가 뭐라 말하려고 입을 열려던 찰나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성이 빠르게 자신이 할 말을 내뱉었다. 그녀의 말대로 제단의 바닥에는 5㎝ 정도 폭으로 하얀 선이 기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저게 뭐야?’
호의 얼굴이 굳었다. 아무리 오래된 일이라 해도 선택의 제단에 저런 선은 본 적조차 없었다.
게다가 선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고 유저가 죽는다?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하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하지만 얼굴 가득 두려움이 드러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분명 거짓이 아니었다. 저런 NPC들이라면 Korea사의 기술력에 국내 제일, 아니, 세계 제일이 틀림없을 것 같았다.
* * *
“…….”
선택의 제단 위에 우글우글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동물원의 동물들과 연상케 했다. 당연히 구경꾼은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등장하는 일곱 종족.
그리고 그런 구경거리 중 하나인 호는 NPC들의 함성이 조금씩 잦아드는 와중에도 열심히 자신의 손을 놀리고 있었다. 이제까지 수십 번이나 입력했던 마스터 명령어를 입력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헛된 시도였다.
‘왜 이래? 왜 반응이 없는 거야? 강제 종료가 왜 안 돼?!’
버그? 해킹?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빨리 잠을 자고 출근해야겠다는 생각은 날아간 지 오래였다. 지금은 당장 이 게임 속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게다가 조금 전부터 무지하게 신경이 쓰이는 대화들이 호의 귀로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하아……. 엄마 보고 싶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돼, 언니?”
“쉿. 조용히 해, 시현아.”
“그렇지만, 내일 학교도 가야 되고, 나 미술 숙제도 안 했단 말이야…….”
“괜찮아. 지금은 가만히…… 가만히 있으면 돼. 다 괜찮을 거야.”
초등학생?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칭얼거리자 언니로 보이는 여인이 안심을 시키려는 듯 소녀의 등을 계속해서 쓸어내리고 있었다.
‘숙제? 미술?’
자매로 보이는 이들의 대화에 있던 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리그너스 대륙전기 내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단어들. 게임 내보다는 현실 세계에서나 들을 수 있는 대화였다.
“…….”
순간 쫘악 하고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자신의 행동을 중단하고, 조용히 주위 사람들의 대화에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회사, 출근, 게임, 외계인, 몰래카메라 등 현실 세계에서나 사용될 법한 대화들이 귀로 들려오고 있었다.
‘미친…….’
이들은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등장하는 단순한 NPC들이 아니었다. 유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계속해서 이들의 대화를 들어본 결과 호는 이들이 게임을 즐기던 유저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사람…… 사람들이야. 지금 이 세계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분명 이 세계는 리그너스 대륙전기라는 가상현실게임에 등장하는 세계였다. 하지만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단순히 게임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이 결코 아니었다.
‘설마?’
여신 라헬을 만나기 전부터 느꼈던 위화감이 이것이었던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세계는 비정상적이었다.
단지, 한 번이라도 겪어봤던 익숙했던 장면들이기에, 그리고 게임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냥 넘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고개를 세차게 흔든 호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미친 것 같았지만, 침착하게 지금의 상황에 대해 직시를 할 필요가 있었다.
혜연이 그랬다. 오빠는 언제나 침착하게 행동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고.
‘먼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세계의 배경은 리그너스 대륙전기가 틀림없었다. 비록 유저인 자신을 제외하고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다수 끼어 있었지만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다만, 너무나 현실처럼 느껴지는데다가 아무리 해도 게임을 종료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어떻게 해서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짐작이 가는 게 전혀 없었다. 단순히 게임 속 버그라고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키리릭! 키릭!]
사마귀 괴물은 사람들이 모여 있지 않은 공간을 제집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여성이 좀 전에 말했던 대로 괴물은 선을 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후우.”
호는 천천히 숨을 가다듬으며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나갔다. 자신과 함께 있는 현실에서 볼 법한 사람들이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물어보면 대답을 해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의문인 점이 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처음에는 딱히 별 느낌이 없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생각이 달라지고 있었다.
‘이제야 일어났군.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겁 대가리 없는 소환자가 하필이면 내 담당일 줄이야. 나와라! 네 녀석이 마지막이다.’
짜증이 가득 담겼던 벨리네 크로아트의 말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가리켜 소환자라고 불렀다. 유저가 아니라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또한 자신을 가리켜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바로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이겠지. 소환자라고 불리는……?’
호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아마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벨리네가 말한 소환자라 불리는 사람들이 분명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그중 한 명이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리그너스 대륙전기라는 게임 속의 세상이면서도 그렇지 않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호는 이런 사실을 믿고 싶지도,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주위 사람들의 두려움이 전염이 되는 것일까?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도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가상현실의 마스터 시스템을 여는 명령어를 입력하는 손동작을 취해봤지만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차라리 지금의 현실이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좁은 공간에서 부대끼면서 자연스레 느껴지는 다른 사람들의 체온과 흐느낌 소리는 지금의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