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리그너스 대륙전기 004화
‘피곤해.’
자다가 일어난 탓일까? 감은 눈동자에서 피로감이 느껴지자 호는 천천히 눈에서 힘을 빼기 시작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빛무리가 사라지면서 로딩이 끝나면 게임이 시작될 테고, 곧바로 세이브를 하고 종료할 생각이었다.
‘내일이 토요일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호의 의식이 조금씩 스르르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 * *
[일어나!]
학창 시절, 특히 호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매일 아침 6시 정각마다 깨우는 엄마의 저 소리는 호가 가장 듣기 싫어했던 소리 중 하나였다.
가뜩이나 공부 때문에 늦게 잠을 자야 하는데다가 호가 다니던 학교는 고작 집에서 5분 거리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조금은 늦게 깨우면 안 돼요? 일찍 일어나서 할 것도 없단 말이에요. 학교도 가깝잖아요.]
그러나 엄마에게 이런 호의 불만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계속해서 늦게 일어나다 보면 결국은 게을러질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결국 호는 학창 시절 내내 울며 겨자 먹기로 아침 여섯 시만 되면 잠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그리고 이런 호의 기상 습관은 호가 사는 데 있어 제법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나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 군 생활 당시 호는 단 한 번도 늦잠을 자 불이익을 받은 적이 없었다.
[이것 봐라? 안 일어나네?]
“조금만…….”
고등학생 시절의 데자뷰인가? 익숙한 패턴으로 이어지는 목소리에 호는 눈을 감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곧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눈을 번쩍 떴다. 지금 자신이 있는 세계가 현실이 아닌 리그너스 대륙전기라는 게임 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 잠은 침대에서 자야 제대로 피로가 풀리는데…….”
대륙에서 워낙 오랜 시간을 보냈던 터라 여신 라헬을 만나고 난 이후 시작되는 종족 선택 이벤트에 대해서는 어렴풋이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종족 선택 이벤트가 그리 길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당장 기억나는 것은 선택의 신전에서 각 종족들의 지도자들을 만나서 자신의 종족을 선택한 후 흘러가는 이벤트를 물 흐르듯 구경하면 본격적으로 게임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빨리 끝내고 자야겠다.’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킨 호는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그런 호의 눈에 은색의 갑주를 입은 여기사가 무언가를 내려찍으려는 듯 발을 들어 올리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철로 만들어진 단단한 군화가 자신의 얼굴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어어?!”
호는 재빠르게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아무리 가상현실이고 통각이 제한된 세계라고는 하지만 아무 이유도 없이 NPC에게 발로 찍히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리고 부웅 하는 소리와 함께 힘이 실린 발차기가 호의 코끝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야 일어났군.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겁대가리 없는 소환자가 하필이면 내 담당일 줄이야. 나와라! 네 녀석이 마지막이다.”
여기사의 입에서 짜증이 가득 담긴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발을 내리자 금속성의 부츠가 저벅 하며 지면에 맞닿는 소리가 절도 있게 들려왔다.
몸이 살짝 떨릴 정도로 위압감까지 느껴지는 여기사의 모습에 호는 절로 감탄을 터뜨렸다.
‘역시 리그너스 대륙전기. Korea사의 이런 기술력은 정말 말이 안 나올 정도로 대단하다니까.’
현실이 아닌 가상현실에서 유저가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게끔 현실처럼 완벽한 가상현실을 구현해 낸 이 기술력은 정말 놀랍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어째서 Korea사를 찬양하는 노예가 많은지 충분히 이해가 되고 있었다.
‘그래도 저번의 플레이는 이렇게까지 실감나지 않았었는데?’
뭔가 게임의 퀄리티가 전보다도 조금 더 높아진 것처럼 보였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조금만 더 즐겨볼까?’
내일을 위해 잘 생각이었지만, 이벤트를 마치고 접속을 종료하면 괜한 아쉬움에 잠만 설칠 것 같았다.
어쨌든 에디터를 쓰지 않고 새로운 마음으로 플레이를 한다는 마음가짐 때문인지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아직까지 누워 있는 것을 보면 내 인내심을 시험할 정도로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는 건가?”
‘벨리네?’
협박에 가까운 목소리에 조심스럽게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호는 익숙한 얼굴을 확인하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벨리네 크로아트.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캐릭터 중 하나로 호가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영웅 정보(Status)>
1. 이름 : 벨리네 크로아트(여)
2. 소속 : 골든 크로우
3. 레벨 : 147
4. 직업 : 로얄 나이트(B)
5. 세부 능력
통솔 : 342/500(S)
무력 : 266/300(A)
지력 : 116/200(B)
정치 : 109/200(B)
매력 : 87/100(C)
6. 특성 : 호감도가 낮아 확인할 수 없습니다.
7. 스킬 : 호감도가 낮아 확인할 수 없습니다.
8. 호감도 : 2/1000
F등급에 불과한 지금의 자신은 쳐다보기도 힘든 높은 등급의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B등급이라면 그리 높은 것도 아니지.’
B등급임에도 불구하고 통솔 등급이 S나 되는 것을 감안하면 벨리네는 분명 유능한 영웅이었다.
하지만 호는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끝을 본 유저. 대륙을 통일할 당시 그는 대륙에 존재하는 위대한 영웅들을 휘하에 두었고, 그중 S등급 이하의 영웅은 한 명도 없었을 정도였다.
게다가 영웅의 유능함을 판가름하는 데 있어 등급이 모든 것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게다가 우리나라 게이머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놈들이 모였는데…….’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인생을 바친 유저 중에서는 자신의 게임 경험을 바탕으로 세부 능력에 비해 비상식적인 활약을 펼치는 이들도 있었다.
‘그나저나 여기는?’
주위를 둘러보니 화려한 문양이 장식된 석조 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 시절의 건축물처럼 보이는 이 건물은 분명 선택의 신전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벨리네 크로아트는 자신을 각 종족들의 지도자가 모인 선택의 제단으로 데리고 갈 영웅으로 보였다.
“소환자! 빨리 준비 안 하나!”
벨리네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오자 호는 재깍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먼저 문을 나서는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가기 시작했다.
“여기도 간만이네.”
색색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 신전의 벽면은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처음 플레이하는 유저라면 절로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신비롭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여기저기로 고개를 돌리는 호의 행동이 거슬렸던 모양인지 벨리네가 거칠게 기침 소리를 내었지만, 가볍게 무시한 호는 오랜만에 보는 신전의 모습을 눈으로 즐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음을 옮겼을까? 호의 눈앞으로 제단으로 향하는 계단이 보이기 시작했다.
태양을 형상화했다고 알려진 신전의 제단은 거대한 원형을 중심으로 불꽃 모양을 지닌 조그마한 제단 일곱 개가 시계 방향으로 세워져 있는 모습이었다.
‘저게 바로 선택의 제단.’
그리고 처음 게임을 시작하는 유저들은 신전 내부에 있는 선택의 제단에서 자신이 플레이하기를 원하는 종족들을 고를 수 있었다.
뭐, 딱히 크게 의미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들은 페널티만 감수한다면 언제든지 자신을 플레이하고 싶은 종족으로 종족을 변경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계단을 올라서면 나타나는 원형의 커다란 제단은 유저인 자신이 서 있을 장소였다.
그렇게 유저가 제단 위에 올라서고 나면 불꽃 모양을 한 일곱 개의 제단에 인간, 엘프, 드워프, 수인, 천족, 마족, 정령까지 각 종족의 지도자들이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이번에는 무슨 종족으로 해볼까나?”
전의 플레이에서 호는 인간족을 선택했었다. 모든 면에서 평균 이하라는 평가를 받는 인간은 딱히 매력적인 종족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은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유저들이 가장 많이 선택을 하는 종족이기도 했다. 그만큼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호는 인간 종족으로 시작해 호 제국으로 대륙을 통일한 바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인해 이번에는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으로 게임을 플레이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호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하! 듣자 하니 어이가 없군. 고작 소환자 주제에 감히 누구를 선택한다고 그렇게 자신 있게 떠드는 거지?”
벨리네 크로아트의 차가운 목소리가 호의 귀로 파고들었다. 조금 전에 확인한 벨리네 크로아트의 호감도를 떠올리면 그녀의 이런 반응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모습이기도 했다.
“……무슨 소리지?”
하지만 아까부터 자신을 소환자라 부르는 그녀의 호칭이 점점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말 그대로다. 주제를 알라는 거다. 소환자.”
“…….”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를 듣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낮은 호감도를 보이는 상대로는 화를 내봤자 본인만 손해였다.
어차피 인간 종족으로는 플레이할 생각이 없는 만큼 선택의 신전에서 진행되는 이벤트를 마치고 나면 그녀와 마주칠 일은 더 이상 없을 터였다.
짜증이 나긴 해도 어차피 게임 속의 일. 이런 감정 하나에 일희일비할 정도로 호는 가상현실에 대한 내공이 얕지 않았다.
“그래, 알겠어. 그런데 왜 아까부터 나를 소환자라고 부르는 거지?”
“흥!”
낮은 호감도 때문일까? 호의 질문에 벨리네는 원하는 답을 해주지 않았다. 결국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한 호는 빨리 세이브를 하고 게임을 종료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선택의 제단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그렇게 계단에 올라서면서 호는 불꽃의 제단에 나타난 종족들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환자, 소환자다”
“뭐야? 저 녀석도 굉장히 약해 보이는데?”
“어머! 남자잖아? 저 부드러운 피부 좀 봐! 한입에 넣어도…….”
“야! 너! 여기 좀 봐봐!”
“시끄러워…….”
불꽃 모양을 한 제단에서 자신을 향해 과할 정도의 관심을 보이는 각 종족의 모습을 보며 호는 계속해서 계단을 올랐다.
‘아르넨 리네, 이레네 아르티아 …….’
그중에는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대표하는 영웅들이자 게이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각 종족의 대표 영웅들이었다.
정말로 새롭게 게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게 앞으로 있을 모험을 생각하며 호는 거침없이 원형의 제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크아아악!”
제단 위에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뭐지?!’
비명과 함께 사방에서 들려오던 환호성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호는 그런 NPC의 환호성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들려서는 안 될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계단을 오르는 호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제단이 가까워질수록 코로 파고드는 지독한 비린내에 구역이 치밀어 오를 것 같았지만, 호는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렇게 선택의 제단 위로 올라선 순간 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싸악 가셨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방금 전까지 새로운 시작으로 가슴을 두근대던 호의 몸을 차갑게 식히기에 충분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호의 고개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자신만이 있어야 할 선택의 제단에 백 명 이상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방금 전의 비명 때문인지 그들은 다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호는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제단을 울렸던 비명의 주인공인지, 피가 뚝뚝 흐르는 어깨를 부여잡은 삼십 대의 남성이 얼굴에서 눈물 콧물을 쏟고 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우우웁!”
이어서 호는 참고 있었던 구토를 한바탕 쏟아내야만 했다. 으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괴 생명체가 남자의 잘린 팔을 씹어 먹는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그대로 목격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