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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3화 (3/522)

# 3

리그너스 대륙전기 003화

‘어……?’

갑작스레 든 이상한 느낌에 호는 눈을 번쩍 떴다. 분명 집의 침대에서 잠이 들었었다. 하지만 침대는 물론이고, 자신이 덮고 있던 이불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잠이 들기 전 입고 있던 잠옷을 제외하고는 주변의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사방이 흰색으로만 가득한 미지의 공간은 묘한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함이 있었다. 아니, 호가 잘 알고 있는 공간이었다.

“어라?”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살피던 호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시작 화면이잖아?”

눈에 보이는 공간은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시작했을 때 나타나는 공간과 꼭 닮아 있었다.

‘그런데 내가 언제 게임을 시작했지?’

곰곰이 기억을 떠올려 봤지만, 어제 자신은 분명 침대 위에서 잠이 들었었다.

하지만 지금 눈에 보이는 광경은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시작 화면과 판박이였다.

그 때문일까? 마음속에서 생겨났던 위화감이 씻은 듯 사라졌다. 잠시 후면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세계관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뺨치는 영상으로 나타날 것이고, 그렇게 오프닝 영상이 끝나면 라헬이라는 이름의 여신이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예상대로 거대한 영상이 호의 눈앞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미 한 번 봤었던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오프닝 동영상에 호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지간히 게임이 하고 싶었던 모양이네.”

조금은 민망했다. 자신도 모르게 절로 몸이 알아서 게임을 실행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쉽게 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니리라.

어쨌든 역사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처럼 자신의 몸을 감싸며 생겨났다 사라지는 게임의 오프닝 동영상은 호가 전율을 느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쉐르난비체, 아르넨 리네, 유스타시아, 클리퍼드…….’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등장인물들이 미소를 보이며 한 명씩 호를 스치고 지나갔다. 덕분에 호는 자연스럽게 좀 전의 당황함을 잊고 게임에 빠져들 수 있었다.

오프닝 동영상에 나오는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세계관은 참신할 정도는 아니었다. 태초에 리그로우와 세리너스라는 두 창조신이 있었고, 둘이 힘을 모아 만든 세계가 게임의 배경이 되는 리그너스 대륙이라는 것이 게임의 설정이었다.

그렇게 많은 실력을 쏟아 대륙을 창조한 두 신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피조물에게 대륙의 관리를 맡기고 기나긴 잠에 빠져드는 모습이 호의 눈에 들어왔다.

영상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창조신들은 깊은 잠에 빠졌지만 그들의 피조물은 열심히 대륙을 가꿔 나갔고, 시간이 흘러 대륙에는 하나둘씩 새로운 생명체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인간, 엘프, 드워프, 수인, 천족, 마족 그리고 정령들.’

게임 속에 등장하는 각 종족들이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여기에 드래곤까지 포함이 되어야 하겠지만 다른 종족들과 다르게 드래곤은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없는 진영이었다.

어찌 되었든 대륙에 등장한 이 일곱의 종족은 점점 자신들의 세력권을 넓혀 나갔고, 종족의 영광을 위해 리그너스 대륙을 전화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뭐, 전쟁이 일어나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기는 했지만 오프닝 영상에서는 다루지 않는 내용이었다.

어쨌든 일곱의 종족 중 한 종족을 선택해 리그너스 대륙을 통일하는 것이 게임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그리고 호는 저번의 플레이에서 에디터를 사용해 인간족으로 호 제국을 세우고 모든 종족을 자신의 발아래에 두었던 경험이 있었다.

“그나저나…….”

게임을 어떻게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호는 지금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게임을 종료하고 잠을 자는 일이다. 눈을 뜨고 나니 갑자기 가상현실세계라는 게 당황스럽긴 했지만 어쨌든 자신은 당장 내일 출근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게임을 종료하기 위해서는 일단 프롤로그의 동영상을 모두 감상한 후 캐릭터를 설정하고 종족까지 선택하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끝내야만 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캐릭터 설정까지만 정해야겠다.”

눈앞으로 스쳐 가는 화려한 영상들을 흘리며 호는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이라도 게임을 플레이하고 싶었지만, 제대로 게임을 플레이했다가는 내일을 장담할 수 없었다.

정말로 아쉽지만 일단은 캐릭터를 설정하는 것으로 끝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게 직장인으로서 맞는 행동이었다.

“그래도 일단…….”

오프닝 동영상이 진행되는 와중에 호의 손가락이 허공의 어느 부위를 콕콕 누르기 시작했다. 잠이 들기 전 다운받았던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공략을 연동시키는 행동이었다.

잠시 후, 공략이 연동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오프닝 동영상이 끝이 났다. 그리고 나지막한 미성이 호의 귓가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대륙의 혼란을 구원해 줄 용사여. 어서 오세요.”

“…….”

호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여 모습을 드러낸 존재에게로 향했다.

왼쪽은 흰색, 오른쪽은 검은색이라는 상반된 색상을 지닌 커다란 날개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 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이 살짝 움직일 때마다 광채를 띤 빛들이 일렁이면서 호의 눈을 휘감았다.

‘여신 라헬.’

리그너스 대륙을 창조한 창조신 리그로우와 시리너스 사이에서 태어난 피조물이자 대륙의 관리자. 그리고 플레이어를 이용해 혼란스러운 리그너스 대륙을 막으려는 정의로운 여신.

‘……은 개뿔. 유저들에게 먹은 욕만으로도 수억 년은 살 수 있는 희대의 통수 년이지.’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호의 눈동자는 싸늘했다.

미녀에게는 죄가 없다고, 처음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들에게 있어 여신 라헬은 그야말로 선 그 자체였다.

하지만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하는 유저들이 늘어나고 엔딩까지 도달하는 유저들이 생겨나면서 라헬의 정체 역시 낱낱이 밝혀졌다.

그리고 유저들이 밝혀낸 라헬의 진정한 모습은 정의로운 여신이 아닌 탐욕 그 자체였다.

호 역시 라헬의 정체를 알고 있는 유저였다. 전회 차에서 에디터를 쓴 이유가 바로 그녀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발진들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는지, 미의 절정이나 다름없는 아름다운 외모에서 들려오는 달콤한 목소리는 호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라헬의 매력에 빠져 자신이 통일한 대륙을 그녀에게 고스란히 가져다 바친다는 황당한 설정의 엔딩이 진 엔딩이라고 주장하는 유저들도 있었다. 물론 호는 아니었다.

“아뇨, 아닙니다. 여신 라헬.”

“아, 제 이름을 알고 계시는군요. 그러면 당신의 이름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호. 윤호입니다.”

앞으로 리그너스 대륙에서 활동하면서 사용할 이름이었기에 호는 또박또박 한 자씩 힘을 주며 말했다.

남들은 애명이나 별명, 혹은 재미있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호는 자신의 이름이 굉장히 마음이 들었다. 아, 동생과 함께 있을 때는 예외였다.

‘엄마는 왜 이름을 그렇게 지어서는…….’

동생의 이름은 윤범. 덕분에 호는 학창 시절 친구들에게 시베리아에서 온 형제라고 놀림을 당하곤 했었다.

“윤호. 영웅의 기상이 느껴지는 이름이로군요.”

라헬이 말과 함께 살며시 미소를 보냈다. 남심을 흔드는 모습이었지만 호는 나름대로의 무표정함을 연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행성 지구의 대한민국 출신. 27세. 이름 윤호.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다시 한번 제대로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이 리그너스 대륙으로 당신을 이끈 여신 라헬이라고 합니다.”

“……어?”

호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라헬이 원래 이런 말을 했던가? 하지만 오프닝 이벤트를 경험한 지가 꽤 전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그냥 그러려니 넘어갔다. 어차피 캐릭터와 종족 설정까지만 하고 게임을 종료할 생각이었다.

“그러면 호, 당신은 이 리그너스 대륙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말은 마쳤지만 라헬의 붉은색 입술은 계속해서 움직이려고 하고 있었다. 아마 리그너스 대륙에 대해 설명해 주려는 듯했다.

여기서 유저가 잘 모른다는 뜻의 대답을 하면 라헬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방대한 리그너스 대륙의 설정 및 도움말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난 그런 도움말 따위는 필요 없지.’

라헬이 말해주는 정보들은 분명 리그너스 대륙을 플레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호는 이미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마지막을 본 유저였다. 게다가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하는 데는 라헬이 말해주는 정보보다는 방금 전 다운받은 공략집이 백배 유용했다.

“이 대륙에 대해서는 충분히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명은 굳이 안 해줘도 될 것 같습니다.”

“진심이십니까?”

“네.”

고개를 끄덕이는 호의 시야에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라헬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렇게 리그너스 대륙에 대해 설명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제껏 보지 못한 라헬의 표정에 신선한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처음 게임을 시작했을 때는 라헬의 설명을 끝까지 들었었지만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여태까지 본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호는 곧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빨리 오프닝 이벤트를 끝내고 자야겠어.’

현실보다도 더욱 현실처럼 느껴지는 이 가상현실에 빠져 있는 것도 좋았지만 일단은 내일의 출근이 우선이었다.

“리그너스 대륙에 대한 설명을 듣지 않은 페널티는 윤호, 본인이 감수하리라 생각하겠습니다.”

“…….”

원래 이런 설정이었던가?

섬뜩할 정도로 이상하게 들리는 말에 호는 물끄러미 라헬을 응시했다.

지그시 입술을 깨무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를 안을 뻔했다. 역시 Korea사의 가상현실 구축 기술은 감탄이 흘러나올 정도로 사실적이었다.

이어서 따악 하는 소리와 함께 라헬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고, 하나의 거대한 창이 호의 눈앞으로 떠올랐다.

<플레이어 정보(Status)>

1. 이름 : 윤호

2. 성별 : 남(27)

3. 종족 : 인간

4. 소속 : -

5. 레벨 : 1

6. 직업 : -

7. 세부 능력

통솔 : 7/10(F) 무력 : 6/10(F)

지력 : 6/10(F) 정치 : 9/10(F)

매력 : 7/10(F)

8. 특성 : 획득하고 있는 특성이 없습니다.

9. 스킬 : 보유하고 있는 스킬이 없습니다.

‘휘유…….’

창을 내용을 확인하자 코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대륙을 일통한 호 제국의 황제였던 당시의 능력과 비교하면 끔찍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치들이었다.

하지만 처음 게임을 시작했을 때 기본적으로 유저가 얻는 능력치들이 F등급인 것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엔딩도 봤는데 특전 같은 것도 없나.”

호는 F등급으로 도배된 자신의 능력치를 보며 툴툴거렸다.

어쨌든 세부 능력의 최대 수치는 10. 직업을 바꾸지 않는 이상 게임 속에서는 그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저 수치 이상으로 능력을 올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딱히 걱정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직업은 리그너스 대륙에서 활동을 하며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었다. 특성과 스킬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획득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물론, 좋은 스킬과 특성을 획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호는 ‘관우는 내 여자’라는 증명된 유저의 완벽한 공략본을 가지고 있었다.

“…….”

호는 계속해서 라헬이 만들어낸 빛으로 일렁거리는 자신의 정보창을 바라봤다.

무력과 지력이 낮다는 것은 아쉬웠지만, 게임 초반 쉽게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정치 수치가 높다는 것은 꽤나 긍정적인 내용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셨다면 이제 리그너스 대륙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대륙에 대한 설명을 듣지 않았다는 게 그리 기분 나쁜 일이었을까? 처음 만났을 때하고는 다르게 라헬의 목소리는 차가워져 있었다.

하지만 스토리상 프롤로그를 제외하면 나중에야 마주치는 존재였기에 호는 그런 라헬의 반응을 가볍게 무시했다.

전의 플레이에서 라헬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까닭에 결국 에디터를 써서 게임의 엔딩을 봤던 터라 그녀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그래.”

대답과 함께 사방이 화악하며 밝아지자 호는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빛무리가 가라앉고 눈을 뜨고 나면 ‘선택의 신전’이라는 곳에서 게임을 시작하게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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