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리덴부르크가의 아가씨
대관식 당일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룩센투크의 예배당이 번잡했다.
바레뎃샤의 신관들과 왕성의 하녀, 시종들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지금 왕실은 대관식을 화려하게 치러 왕실의 위엄을 공고히하는 것보다 하루빨리 대관식을 치루는 것이 더 급한 상황이었다.
일정이 당겨진 만큼 많은 의전들이 간소화되었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중대 행사를 허투루 치를 수는 없었다.
왕성과 교단 사람들은 모두 바쁘게 움직였다.
왕자비인 마리안과 교황 로베르토 가르뎅 역시 예외는 없었다. 두 사람은 예배당을 돌아다니면서 일이 잘 진행되고 있나 하나하나 체크했다.
그들이 잠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던 시각은 오전 11시가 되기 직전.
대관식은 2시에 시작하고 요제프는 정오 조금 넘는 시간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니 대략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붕 뜨게 된 것이다.
“식사는 하셨나요, 교황님?”
마리안이 교황에게 물었다.
마리엘라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마음이 많이 무너진 탓일까. 처음 그를 대했을 때와 비교하여 많이 부드러워진 태도였다.
그 미묘한 변화를 교황 역시 느꼈다.
‘만약 코부르덴 후작이 요제프를 죽인다면, 왕자비는 폐위시킬 필요 없이 그대로 내버려 둬도 괜찮겠어.’
그는 속으로 마리안을 제 입맛에 맞게 잘 구슬려야겠다는 간악한 생각을 하며 겉으로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대관식이 끝난 뒤에 식사를 할 계획이었습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그의 푸근한 인상은 사람을 이용할 때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교황은 이러한 자신의 장점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마침 잘 되었군요. 교황님께 자문을 구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요. 괜찮으시다면 저희와 같이 차 한 잔 하시겠어요?”
“좋지요.”
두 사람은 나란히 티타임을 즐기게 되었다.
대관식 준비 문제로 왕성에 남는 손이 얼마 없던 탓인지, 데이지가 특별히 차 시중을 들었다.
“차향이 특이하군요.”
“저의 고향에서 즐겨 먹던 차랍니다. 발효된 홍차 잎에 라산 숲에서 난 열매의 향을 입히죠.”
데이지가 마리안의 앞에 과일 케이크를 놓아 주었다.
과일 케이크를 먹던 마리안이 교황에게 권했다.
“케이크가 참 맛있는데 드시겠어요?”
“괜찮습니다. 과일을 먹으면 온몸에 발진이 나는 체질이라.”
손바닥을 내보이며 곤란한 미소를 짓던 교황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봄바람에 나뭇잎이 살랑거리는 풍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나저나…… 이제 조금 뒷면 요제프 전하께서 룩센투크에 도착하시겠군요.”
케이크 위의 과일을 집어 먹던 마리안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그녀는 소리가 나지 않게 포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그리고 진중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그 때문에 만남을 청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신지요?”
갑자기 뒤바뀐 분위기에 교황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제가 교황 성하께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마리안이 힘없이 웃었다. 씁쓸해 보이기도, 허탈해 보이기도 한 미소였다.
“첨탑에 갇힌 코부르덴 후작이 요제프의 정부입니다.”
“세상에, 그런.”
교황은 룩센투크에 아주 많은 첩자들을 심어 놓았고, 마리엘라와 요제프의 관계를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교황은 가증스럽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놀라는 시늉을 했다.
“사악한 마녀가 흑마법으로 왕자 전하를 유혹했군요.”
“그럴 수도 있겠죠. 제 고민거리는 이것입니다. 돌아올 요제프에게 마리엘라의 부재를 어떻게 설명하죠?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계된 귀족들을 죄다 감옥에 가둬버리는 바람에, 그녀의 빈자리가 잔뜩 티 날 텐데요.”
“그간 근심이 깊으셨겠군요.”
“교황 성하의 고견이 필요합니다.”
“흠.”
교황은 잠시 생각에 빠진 척을 했다. 사실 그의 눈에는 마리안이 부질없는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어차피 대관식은 어그러질 테고, 데르샤바크 왕가는 끝을 맞이할 것이다.
요제프가 마리엘라의 부재를 알아차리고 노발대발할 틈이 있을까 싶었다. 그가 계획한 상황이 도래하면 제 살기 급급해질 텐데 말이다.
‘어찌 되었건 답은 해줘야 하니.’
그는 대충 생각한 방안을 엄청난 지혜인 양 내놓았다.
“일단은 대관식을 진행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왕자 전하께서 대관식 전이나 도중에 코부르덴 후작을 찾는다면 급히 심부름을 보냈다고 하세요. 가족을 핑곗거리로 삼는 것이 좋겠군요. 리덴부르크 백작의 건강에 큰 이상이 생겨서 급히 마리엘라를 보냈다고 하세요. 그다음은 제가 맡겠습니다.”
마리안의 표정이 한결 홀가분해진 듯 했다. 그녀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교황의 현명함을 칭송했다.
“역시 교황님의 지혜는 남다르군요. 털어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는 사람 좋아 보이는 표정 뒤로 음흉한 마음을 숨겼다.
* * *
요제프가 왕성에 돌아오자마자 꺼낸 말은 마리안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마차에서 내린 그는 주변을 한번 살펴보더니 작지 않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마리엘라가 안 보이는 군.”
“고향에 급한 일이 있어서 잠시 내려 보냈어요.”
마리안은 교황의 조언을 그대로 따랐다.
그 말을 들은 요제프의 한쪽 눈썹이 쓱 올라갔다.
“급한 일? 내 대관식보다?”
“아버지께서 낙마로 생사를 오가셔서요. 제가 갈 수 없으니 마리엘라를 대신 보냈습니다.”
요제프는 말없이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리덴부르크 백작과 마리엘라의 사이가 썩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마리안에게 추가 질문을 해, 그녀를 떠보려 했다.
그러나 그때, 그의 비서관인 필립 슈스터가 그를 재촉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예복을 갈아입으러 가셔야 합니다.”
“흠, 알았네.”
요제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떠났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에 담긴 뜻이 납득인지 불신인지, 그것도 아니면 흥미로움을 담은 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 * *
드디어 대관식이 진행되었다.
요제프는 황금실로 수놓은 화려한 예복과 붉은색의 무겁고 긴 망토 차림으로 교황 로베르토 가르뎅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요제프와 맞춘 화려한 대관식용 드레스를 입은 마리안은 그의 한 발자국 뒤에서 무릎을 꿇고 양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한 손에 경전을 든 교황이 남는 손을 요제프의 머리 위에 올렸다. 그리고 세 번에 거친 질문을 했다.
“요하네스의 장자, 요제프 하이젠 데르샤바크는 바리 신의 말씀과 가르침을 바탕으로 베르단을 이끌어 갈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요하네스의 장자, 요제프 하이젠 데르샤바크는 바리 신의 말씀과 가르침을 바탕으로 매일 스스로의 영혼을 정죄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요하네스의 장자, 요제프 하이젠 데르샤바크는 바리 신의 말씀과 가르침을 바탕으로 부패와 향락의 유혹을 평생토록 거부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교황의 양옆에 있던 신관들이 그의 손에 있던 경전을 받아 간 뒤, 순서대로 왕홀과 보주, 보검과 왕관을 내밀었다.
교황은 왕홀을 요제프의 오른손과 오른 품에, 보검을 그의 왼손에 내어 준 다음 마지막으로 왕관을 씌워주었다.
“나, 바레뎃샤의 교황 로베르토 가르뎅은 바리신의 대리인으로서, 요하네스의 장자 요제프 하이젠 데르샤바크를 베르단의 왕으로 인정합니다.”
교황의 엄숙한 선언과 함께 성가가 시작되었다.
성가를 부르는 이들은 전부 하얀 베일을 쓰고 있었는데, 이는 바리 신의 은혜가 너무도 찬란해 직접 목격하는 자는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성가대 가장자리, 요제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여성 하나가 어설프게 입만 뻐끔대고 있었다.
그녀는 노래를 하나도 모르는 사람처럼 박자 하나도 제대로 못 맞췄는데, 다행히 사람들이 요제프에게 관심을 쏟는 바람에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수상한 여자의 정체는 마리엘라 코부르덴으로 오늘 아침, 첨탑에서 빠져 나와 성가대로 위장했다.
아름다운 성가를 들으며, 요제프는 천천히 왕좌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그가 왕좌에 앉으면 대관식은 끝이 난다.
교황은 바로 그 순간이 더렵혀지길 원했다. 마리엘라에게는 생사가 걸린 순간이었지만, 그에게는 그저 재미있는 오락거리에 불과했다. 교황은 제 망토 속에 있는 하얀돌을 만지작거리며 요제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 시골 마녀의 선택이 궁금해지는군. 평생 모셔왔던 아가씨와 사랑하는 남자 중 누굴 선택할까?’
망토 속의 하얀 돌은 마리엘라가 마음이 변심해 그를 노릴 때를 대비해 따로 챙겨 온 것이었다.
하얀 돌의 효과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지니고 있는 자를 흑마법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지닌 자의 의지에 따라 흑마법을 무효화하는 것이었다.
그는 하얀돌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심신의 안정을 얻었다.
이제 교황의 관심사는 지금 이 자리에서 누가 죽게 될까 하는 궁금증뿐이었다.
약속된 시간이 다가왔다.
요제프가 왕좌에 다다르고, 그 위에 앉으려는 순간.
교황이 마리엘라를 향해 눈짓을 보내자, 마리엘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초 후, 요제프가 왕좌에 앉았다.
“바레뎃샤의 공인과 이 나라 백성들의 지지를 통해, 나, 요제프 하이젠 데르샤바크가 이 나라의 국왕이 되었음을 선포하오.”
“……?”
요제프가 예배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스스로 국왕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동안,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교황은 혹시 사람들이 요제프에게 너무 집중한 나머지 마리안이 죽은 것을 눈치채지 못했나 싶어 뒤를 돌았다. 그러나 마리안은 처음과 똑같은 자세로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뭔가 싶은 교황이 고개를 돌려 마리엘라를 보았다. 베일 틈새로 호선을 그리는 마리엘라의 입꼬리가 보였다. 그녀는 비뚜름하게 웃으며 교황을 응시하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교황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교황은 성급히 망토 속의 하얀 돌을 움켜쥐었다.
‘이것만 있으면 난 안전해. 이것만 있으면……!’
교황이 강박적으로 주문을 외고 있을 때였다.
그는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지며, 온몸에 힘이 스르륵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풀썩.
그의 다리가 꺾였다.
“세상에, 교황 성하!”
“성하께서 쓰러지셨다, 빨리 의원을 모셔와!”
대관식의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는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한다.
“말도……안 돼. 어떻게……?”
희미해져가는 정신을 붙잡으며 교황이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성가대 가장자리, 마리엘라 코부르덴을 향해 있었다.
베일을 걷어낸 마리엘라가 섬뜩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내일 대관식에서 죽게 되는 게 누구인지 묻지 마세요.’
그의 귓가에 어젯밤, 마리엘라가 했던 말이 떠돌았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희생양으로 정한 것은 요제프도 마리안도 아니었다.
마리엘라가 죽이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교황 로베르토 가르뎅이었다.
* * *
교황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어느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눈을 뜬 그의 앞에는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세 사람의 이름은 각각 요제프, 율리안, 마리엘라였다.
“드디어 깨어났네.”
요제프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교황은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율리안이 흑마법사인 것이 밝혀졌고, 마리엘라가 요제프의 암살을 사주 받은 지금, 저 세 사람은 결코 한자리에 있으면 안되었다.
교황은 서둘러 외부에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혀와 입이 굳어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으…… 으어…….”
그의 입에서 옹알이 같은 신음 소리만 흘러나왔다.
마리엘라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외부의 도움은 기대하지 마세요. 당신의 양아들 율리안이 모든 신관들의 출입을 막았으니까요. 아, 그리고 몸을 직접 움직이거나 소리를 칠 수도 없을 거예요. 혹시 모른 사태에 대비해 온몸을 마비시켰거든요.”
그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 모습을 요제프가 대놓고 비웃었다.
“아직도 깨닫지 못했나 보군.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다 계획한 일이라는 걸.”
그는 옆에 있던 마리엘라와 율리안을 번갈아 보며 동조를 구한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비겁하게 뒤에서 이래라저래라 명령만 했던 놈이 대체 뭘 알겠어? 그러니 제가 함정에 빠져 놀아 난 줄도 모르고 겁 없이 날뛰지.”
그의 말을 마리엘라가 받았다.
“사람이 원래 다 그래요. 한 가지에 집중하다 보면 다른 중요한 가능성들을 간과해버리죠. 저도 그래서 당신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는 걸 늦게 알아차렸지 뭐예요.”
그녀는 다시 교황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같잖다는 표정을 감추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당신을 여태 살려둔 것은 대관식이 당신의 죽음으로 더렵혀지면 곤란해서이기도 했고, 그대로 허망하게 가기에는 당신의 죄가 너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적어도 어떻게 됐는지는 알고 죽어야 마지막 가는 길, 울분에 가득 차지 않겠어요?”
그녀는 그의 실패 요인을 조목조목 짚어 주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을 설명하려면 과거로 돌아가야 했다.
교황이 모습을 드러낸 날, 그러니까 대략 이주 전 즈음으로.
* * *
“언제부터 그가 왕가의 머리 꼭대기 위에 있음을 알았지?”
요제프가 율리안의 정체를 알아차린 그날 밤의 일이었다. 세 사람의 공통된 적이 교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
마리엘라는 지금이야말로 진실을 실토해낼 적기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조심스레 서두를 꺼냈다.
“말씀드릴 게 있어요. 어쩌면 이 일에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요제프의 고개가 돌아갔다.
마리엘라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자신의 죄악을 고백했다.
“과거에 사람을 죽인 적이 있어요. 한…… 열다섯 정도?”
그 말에 요제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말과 교황의 일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나는 내가 죽인 사람이 몇인지 셀 시도도 못 해봤는데.”
마리엘라는 꿋꿋이 자기 할 말을 이었다.
“지난 십 년 동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잘 숨기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율리안에게 덜미가 잡혔죠. 제가 죽인 사람들 중 하나가 마리안의 어머니였거든요.”
그 말을 듣고 요제프는 노틀란의 말을 떠올렸다. 리덴부르크 시골 영지의 장례사였던 노인. 그녀는 리덴부르크 백작 부인의 시신에 푸른 반점이 있었다고 증언했었다.
그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래서 율리안과 한 배를 타게 된 거군. 그에게 마녀인 걸 걸려서.”
요제프는 이해득실에 눈이 밝은 편이었다. 복수심, 적의, 동정심 같은 것들은 왕성에서 살아남으려면 빨리 버려야 하는 것들에 속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두 사람이 한때 그를 배신했다는 과거가 아니라, 두 사람과 힘을 합쳐 교황을 칠 수 있다는 현재였다.
그가 더 이상 변명할 필요 없다는 충고를 그녀에게 하려던 찰나였다. 마리엘라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실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진실이 있어요.”
“?”
“이건 율리안도 모르는 거예요.”
리덴부르크 백작도, 율리안도, 파르니의 마녀들도 정확히 모르고 있는 일.
마리엘라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비밀을 고백했다.
* * *
마리엘라가 요제프에게 모든 진실을 고한 이후 며칠이 지났다.
요제프가 뷔하 지방으로 떠나기 전날 밤.
그는 측근들을 모아 조촐한 연회를 열었다.
데이지는 그 측근 사이에 자신이 끼지 못한 사실에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며 베갯잇을 적셨다.
‘내 인생은 왜 항상 이럴까. 사람들은 왜 나한테만 못되게 굴지?’
데이지는 베게에 얼굴을 묻으며 더 서럽게 울던 그때였다.
똑똑.
문밖에서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자신이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 왕실에서 나 같은 건 아무도 찾아주지 않아.’
똑똑.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결국 그녀는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문밖에는 시종장이 서 있었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으며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시죠?”
시종장은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했다.
“왕자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예?”
데이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 * *
눈물을 닦은 데이지가 황급히 요제프의 앞에 섰다. 그곳에는 마리엘라도 같이 있었다.
“왕자 전하, 어찌한 연유로 저를 부르셨는지…….”
“정적을 제거하는데 그대의 도움을 좀 받고 싶어서.”
“네?”
데이지가 눈을 크게 떴다.
요제프는 그녀에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미리 말하는데 아주 위험한 일이야. 또한 그쪽에서 그대를 회유하려 들 걸세. 아주 많은 금은보화로 말이지.”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농담하듯 덧붙였다.
“금은보화는 알아서 슬쩍 챙기도록 하고, 우리의 이중 첩자가 되어주길 바라. 물론 아무 대가 없이 뻔뻔히 요구하는 건 아니야. 그대가 가장 원하는 걸 내어주도록 하지.”
그러나 그 내용마저 장난스럽지는 않았다.
데이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제가…… 원하는 거요?”
요제프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씩 웃었다.
“필립 슈스터는 내년이 되기 전에 바로 고향으로 내려갈 거야. 올 봄에 따로 채집해 놓은 나비인지, 굼벵이인지 기억도 안 나는 무언가가 가을을 기점으로 변태한다더군. 그럼 비서관 자리가 공석이 되겠지. 그 자리를 그대가 맡아.”
비서관이라니. 모든 대귀족이 탐내는 자리가 아닌가.
데이지는 놀란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스스로를 단속했다. 그녀는 혀끝으로 바짝바짝 말라가는 입술을 축이고 조심스레 여쭤보았다.
“하오나 여자는…….”
“잘 생각해 보게. 베르단의 가장 위대한 왕 바욘 2세는 흑마법사를 베르단 정계에 정착시켰어. 알다시피 흑마법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은 여자에게 주로 발현했고, 그 덕에 흑마법사 가문의 가주는 죄다 여자였지. 그들을 위해 증조부께서는 직접 법을 뜯어 고쳐 여자의 정치적 활동을 용인했고, 그 법은 선왕께서 3차 성마전쟁으로 흑마법사를 모두 몰아낸 뒤에도 바뀌지 않았네. 그 말은 곧.”
그가 그녀를 향해 몸을 숙였다. 그리고 선악과 먹기를 제안하는 뱀처럼 사근사근 속삭였다.
“그대도 조건에 충족한다는 뜻이지.”
내내 입을 다물고 요제프의 등 뒤에 섰던 마리엘라가 물었다.
“어떻게 할 건가요?”
그녀가 제안을 거절하면 곧바로 다른 이에게 넘겨줄 태세였다.
데이지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일생일대의 기회가 그녀 앞에 섰다.
“저, 저는…….”
데이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심호흡을 크게 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그 순간, 두 사람을 올려다보는 데이지의 눈이 열망으로 번뜩였다.
항상 헛헛했던 그녀 내면의 무언가가 포만감으로 차올랐다.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것은 명문가 아가씨로서의 대우가 아니라, 사람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권력 그 자체임을 깨달았다.
* * *
회상은 끝났다.
마리엘라와 요제프는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교황을 내려다보며 저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데이지를 우리의 첩자로 끌어들였죠. 교단이 그녀를 끌어들이기 전에 말이에요.”
“율리안을 감옥에 가둔 건 그게 그에게 가장 안전한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지. 아무리 바레뎃샤라도 반역죄를 쓴 죄인의 사면에 힘을 쓸 수는 없을 테니까. 율리안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위치에 서면, 교단도 그를 신경 쓰지 않으리라 여겼고 예상은 그대로 맞아떨어졌지.”
그가 뿌듯하단 표정으로 율리안을 바라보았다.
율리안은 다소 떨떠름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기분이 나빠서라기보다는 이렇게 한 방에 상황이 타파된 현실에 적응이 덜 된 것 같았다.
“그리고 뭐 이런저런…… 뒷공작을 했는데, 거기에는 요제프의 아카데미 동문이자 현 비서관인 필립 슈스터 백작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그는 심문을 핑계로 율리안을 찾아갔고, 그에게 모든 상황을 설명한 뒤 교황이 쓰러진 후에 교단 사람이 그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주길 청했죠. 그래서 그가 지금 여기 있는 거고요.”
마리엘라 역시 대화를 끝내며 율리안을 바라보았다.
율리안은 처연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 그의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에 다시 고개를 돌려 교황을 응시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는 요제프로 하여금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예상이 가능했다. 요제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넘어가주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건 여태까지 자신들을 골탕 먹였던 로베르토 가르뎅을 괴롭히는 것이지 깔끔하게 끝난 관계를 질투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요제프가 약 올리는 목소리와 표정으로 교황을 향해 말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호트너 부인을 다시 불러들여 그녀의 앞에서 다툰 것도 전부 계획된 일이었어. 그녀는 국왕파보다 귀족파에 더 호의적이었고, 연줄도 그쪽에 더 많았지. 그 연줄을 파고 올라가면 교단에 닿겠구나 싶어 한 번 이용해 본 거야.”
요제프는 피날레를 마리엘라에게 맡겼다.
마리엘라가 차분하면서도 섬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도 아직 가시지 않는 의문이 있을 거예요. 하얀돌을 쥐고 있었는데 왜 당신이 이렇게 됐는지. 그걸 설명하자면 오늘 오전 티타임을 빠트릴 수가 없겠군요.”
그녀가 숨을 깊게 마시고 상황을 마저 설명하려 할 때, 갑자기 문밖에서 누군가 노크를 했다.
똑똑.
“이제 나 들어가도 돼?”
마리안의 목소리였다.
“들어오세요.”
마리엘라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리안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등 뒤에는 데이지가 함께 했다.
“고마워. 저 못된 영감이 죽는 순간을 직접 내 두 눈에 담고 싶었거든.”
마리엘라는 내내 손에 쥐고 있던 작은 무언가를 마리안에게 내밀었다.
새끼손가락만 한 길이의 바늘이었다.
“직접 하시겠어요?”
“으음, 그건 좀.”
“그럼 제가 하지요.”
마리안이 난색을 표했고, 마리엘라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엘라가 서서히 교황에게로 다가갔다. 교황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으! 어어…… 으어어어-”
그는 움직이지 않는 혀로 어떻게든 그녀를 만류하려 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마리엘라는 바늘을 들고 있던 손으로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곧 교황은 따끔, 하는 감각을 귀 안쪽에서 느꼈다. 차갑고 소름끼치는 통각이었다.
할 일을 마친 마리엘라가 서늘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발진 때문에 과일을 먹을 수 없죠. 그건 아주 공공연한 사실인데 일국의 왕자비쯤 되는 이가 설마 그걸 모르고 있었을까요?”
모든 것은 처음부터 일그러져 있었다. 그들이 마리엘라에 관한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오해함으로 인해.
마리엘라는 교황을 향해 싱긋 웃었다.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에 대한 홀가분함과 동시에 어딘지 모르는 쓸쓸함이 깃들어 있는 미소였다.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아버지에 관한 회상을 했다.
마리엘라의 아버지는 숲지기였다. 광산도, 특산물도, 인재도 없는 리덴부르크 백작가의 유일한 자랑거리인 라산사냥터의 숲지기.
비록 귀족 자제들과 그들이 데리고 온 기사들, 시종들에게 천대받는 게 일상인 일이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한 번도 제 직업을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두 가지의 커다란 자부심이 있었다. 하나는 라산 사냥터라는, 온 귀족이 아는 아주 멋진 숲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이 숲의 모든 나무는 내 손아귀에 있지. 버섯과 약초도 마찬가지야.”
호반 가족은 가난했고, 대대로 남자는 숲지기, 여자는 하녀 일을 맡아왔다.
라산 숲은 단순한 사냥터가 아니었다.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할 만큼 많은 약초와 독초들이 나는 곳.
라산 사냥터의 숲지기는 그것을 모두 분별하는 시험에 통과해야지만 될 수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괜히 자신의 직업을 자랑스럽게 여긴 것이 아니다. 과거 숲지기는 약초사, 의원과 동일한 대우를 받았던 귀한 존재였었다.
마리엘라는 호반 가족의 막내딸로, 어머니를 따라 하녀가 되었지만 아버지의 일 역시 조금씩 배워왔다.
그녀는 라산 숲에 관한 것은 뭐든 다 알았다.
이 숲에서 무엇이 나는지, 어떤 것이 약이 되고 또 독이 되는지.
온 가족이 백작마님의 계략에 의해 몰살당한 뒤, 복수를 결심한 그녀가 선택할 수 있었던 방법은 단 하나였다.
독살.
마리엘라는 마녀가 아니었다.
우연찮게 백작가 사람들을 죽일 때 쓴 버섯이 푸른 발진을 일으켰던 것뿐이었다.
흑마법사인 율리안은 그것을 그녀가 마녀인 증거라고 넘겨 생각해버린 거고.
처음 율리안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던 건 백작 마님을 죽인 과거가 드러난 이상 같은 흑마법사인 척하는 게 생존에 유리할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율리안을 속인 그날 이후 그녀는 줄곧 마녀인 척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에게 많은 이점을 안겨주었다.
중간에 마리안을 쓰러지게 만들란 지시를 받았을 때는 미리 만들어 먹인 약과 독침을 활용해 해결할 수 있었다.
파르니의 마녀들이 진실의 조각을 들이 밀었을 때에는 애매모호한 표현들로 거짓을 숨겼다.
교황을 무너뜨릴 때도 이와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다. 앞으로는 마녀라는 신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의 명령을 따르는 척하면서, 뒤에서는 마리안, 데이지와 협업해 그를 독살할 계획을 세웠다.
아침에 몰래 북쪽 탑을 빠져나온 그녀는 교황과 마리안이 마실 홍차 안에는 독을, 과일 케이크 안에는 해독제를 넣었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처음부터 사람의 몸을 마비시키고 실신시키는 효능을 지닌 독초를 사용했다.
죽이는 것은 그다음으로 미뤄도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제 모든 정황을 이해하셨겠지요? 저는 고귀한 혈통이나, 마법 능력같이 타고나야 되는 건 하나도 갖고 태어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약초와 독초를 구분하는 것 같이 노력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뭐든 잘할 수 있죠. 아시겠어요, 교황님? 저는 약초사예요. 마녀가 아니라.”
교황의 눈동자가 점점 흐리멍덩해졌다. 그녀가 만든 독이 서서히 그의 몸에 퍼지는 중이었다.
마리엘라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남겼다.
“그리고 교황, 여자의 인생을 사치와 사랑으로 압축시키려 하지 마세요. 우리는 그것보다 더 다양한 인생을 사니까.”
교황이 눈을 감기 직전, 마리안이 둘 사이에 끼어들어 마지막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알겠냐, 이 개새끼야?”
그렇게 교황 로베르토 가르뎅은 세상에서 가장 굴욕이며 치욕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교황이 죽은 직후였다. 마리안이 발그레 올라온 뺨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싸며 부끄럽다는 듯이 작게 말했다.
“아, 나 이 속어 정말 써 보고 싶었어.”
“요즘 좀 거친 글을 읽으시나 봐요.”
지금의 분위기와는 맥락이 맞지 않는 대화였다. 마리엘라만이 익숙하게 그녀의 말을 받아줬다. 뒤에서 가만히 있던 율리안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런데 어떻게 마리안 왕자비가 이 자리에 있지? 우리의 계획은 데이지 아가씨까지 아니었나?”
“아, 그거 말이죠.”
마리엘라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마리안이 끼어들게 된 일의 전말을 설명했다.
* * *
대관식 당일, 그러니까 오늘 새벽의 일이었다.
마리엘라가 뜬 눈으로 첨탑 밖을 응시하고 있는데 불현듯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다.
그곳에는 붉게 달아오른 눈을 한 마리안이 서 있었다.
“도망가.”
그게 마리안이 그녀에게 꺼낸 첫 마디였다.
“지금이면 널 보내줄 수 있어. 대관식 준비 때문에 다들 정신이 없어서 갇혀 있는 네가 뭘 하고 있는지 신경도 쓰지 않으니까. 지금이 아니면 내가 손 쓸 수 없어. 그러니 지금 가.”
마리안은 마리엘라의 계획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마리엘라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녀의 성격이 작전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고, 모든 것을 철저히 비밀로 부쳤다.
그러니 이 상황은 온전히 마리안의 선택이었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으세요? 제가 아가씨의 어머니를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잖아요.”
“모진 말로 흔들어 놓으려 하지 마. 아무 생각 없이 여기 온 건 아니니까. 지금 이건 날 위한 선택이야.”
마리안은 팔등으로 눈가를 벅벅 닦았다. 그리고는 코를 한 번 크게 들이키더니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의심은 불꽃과 같다고 했지? 난 못돼 처먹어서 누굴 죽인다고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이렇게 널 죽게 내버려 두면 아마 난 남은 모든 생을 그 불길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겠지. 그렇게 두지 않겠어. 모든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넌 멀쩡히 살아 있어야 해.”
마리엘라의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눈물을 꾹 참는 사람처럼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감정을 막아보려 했지만, 이어지는 마리안의 말에 결국 패배 선언을 하게 되었다.
“일이 잠잠해지면 다시 널 찾을 거야. 어떤 방식을 써서라도 꼭 찾아 낼 거야. 처벌은 그때 내려도 되는 거잖아. 그러니 일단 살아. 살아서…….”
“아가씨는 정말 변한 게 없으시네요. 14년 전 그때와 아주 똑같아요.”
“시간 없어, 어서 도망가야 해.”
마리안은 바깥을 힐끔 살폈다. 그녀가 꾀를 부려 멀리 보낸 기사가 다시 돌아올까 걱정이 된 것이다.
마리안이 마리엘라에게 다가와 그녀를 문밖으로 이끌려 하자, 마리엘라가 그 손을 뿌리쳤다.
“너, 지금 무슨-”
마리안이 황망한 표정으로 마리엘라를 바라 볼 때였다.
참다 못한 마리엘라가 모든 것을 고하기로 마음 먹었다.
“끝까지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도무지 그럴 수가 없군요.”
“비밀?”
마리안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처형을 앞두고 있던 죄수 같던 마리엘라의 표정이 순식간에 모든 것들을 내려 보는 여신의 그것으로 변모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요. 실은 이 모든 상황이 저와 요제프가 유도한 일이었다는 걸 납득시키려면.”
그렇게 마리안은 그들의 마지막 조력자로 합류하게 되었다.
* * *
며칠 뒤, 교황의 장례식.
속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그는 바레뎃샤를 이끌던 수장이었으므로 장례식은 베르단의 수도에서 국장처럼 치러졌다.
왕자비인 마리안과 그녀의 시녀 마리엘라 역시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율리안이 단상에 나가 그의 추도문을 읽고 있던 때에 갑자기 마리안이 마리엘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리고는 그녀의 귓가에 속닥였다.
“그럼, 마리엘라. 우리 엄마를 죽인 사람이 너는 아닌 거지?”
벌써 열다섯 번째 듣는 질문이었다.
“몇 번을 말해요. 전 마법을 쓸 줄 모른다니까요.”
마리엘라가 뻔뻔하게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녀는 라산 숲에서만 나는 독버섯 하나가 사후 푸른 발진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숨겼다. 독초와 관련된 지식은 악용할 여지가 충분했기에 대대로 라산 숲의 숲지기에게만 전해 내려왔다. 아버지와 형제들은 죽은 지 오래되었으니 마리엘라만 입 다물면 영영 사라져 버릴 정보였다.
‘가끔은 적절한 거짓이 평화와 평안을 불러일으켜 주기도 하지.’
그녀는 그 일을 영원히 비밀에 부치는 것을 선택했다.
마리안을 위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에필로그. 그레타의 책
요제프가 왕위에 오른 지도 벌써 다섯 달이 지났다.
사촌을 죽이고, 대신들을 감금하는 등 대관식 직전의 난폭했던 모습과 다르게 국왕이 된 요제프는 안정적으로 나라를 이끌어갔다. 당파 간의 대립은 줄어들었고, 바레뎃샤가 흑마법사를 핑계로 왕성을 들쑤시는 일도 없었다. 왕성을 둘러싼 모종의 음모와 계략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야말로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 보이는 룩센투크에 단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데르샤바크에 내려진 그레타의 저주가 풀리지 않은 것이다.
마리엘라는 그레타가 자신에게 남긴 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기대는 기대에 그쳤다.
아무도 이 책이 무엇인지, 어떻게 활용해야 그레타의 저주를 풀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파르니의 가주인 에블린 파르니 역시 아무것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궁리해도 별다른 방도가 나오지 않자, 그들은 지하감옥에 있는 파르니의 가주에게 그레타의 책을 가져가 자문을 구했다. 교단에서 잡아간 파르니의 어린 마녀들을 구출해주는 조건이었다.
에블린은 책을 보자마자 코웃음을 쳤다.
“도대체 마녀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한 번 보고 뭐든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고작 하얀 돌 때문에 몰살당하지는 않았겠지.”
그들은 에블린에게 이 책이 그레타가 남긴 유산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직 흑마법사와 데르샤바크 간의 사이가 회복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효과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는 파장력 큰 물건의 정체를 적에게 대뜸 밝힐 수는 없었다.
“짐작 가는 부분이라도 없으세요?”
마리엘라가 간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에블린 파르니가 고개를 저었다.
“없어. 그냥 책이야.”
“마력을 한 번 주입해 보면 어떨까요?”
마리엘라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사실 앞서 율리안의 마력을 몇 번 주입해 본 적이 있다.
그때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음을 확인했지만, 한 번 더 비슷한 것을 시도해 보려는 것은 여자 흑마법사의 마력에는 반응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하얀돌 때문에 안 될 텐데.”
“괜찮아요. 그건 제가 쥐고 있으니까요.”
마리엘라는 소매 속에 감춰져 있던 하얀돌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하얀돌은 두 가지 효과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하얀 돌을 소지하고 있는 자를 마녀의 마법으로부터 지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얀 돌을 가지고 있는 자의 의지에 따라 특정 마법을 무효화하는 것이었다.
마리엘라가 마법을 허용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이곳에서 에블린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뜻이었다.
에블린은 바로 책 위에 손을 얹었다. 검은 오라가 그녀에게서 뻗어 나왔다. 그러나 그레타의 책은 마력을 흡수하기만 할 뿐,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음, 안 되네.”
에블린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 * *
요제프의 개인 서재.
마리엘라와 요제프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빠졌다.
“그레타는 네가 마녀가 아니라는 걸 알아본 기색이라고 했지?”
요제프의 질문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타는 리덴부르크 백작을 직접 만나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짐작건대 그것은 백작가 내에 벌어졌던 의문의 연쇄 살인이 마녀의 짓인 것처럼 꾸미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영특한 리덴부르크 백작이 범인을 눈치채고 사건을 자세히 파헤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마리엘라는 가만히 가슴에 손을 얹어 보았다. 끝까지 그녀를 감싸주려고 했던 그레타의 배려에 온기 같은 감정을 느껴졌다.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심하던 요제프가 말했다.
“그럼 그냥 단순한 트릭이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물에 적셔 보거나 불에 그을려보던가 하면 뭔가 나올지도.”
그녀는 바로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다 해봤어요.”
“흠.”
요제프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하루, 이틀이면 해결될 줄 알았던 문제가 다섯 달을 넘어가니 이제 슬슬 그도 초조해졌다. 평생을 죽음을 각오하고 살아왔던 요제프였지만, 해피엔딩을 코앞에 두고 무너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관점을 바꿔 문제에 접근해보기로 했다.
“그레타에 대해서 더 말해줘. 그 안에 무슨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마리엘라가 그레타의 행적을 떠올려보았다.
스스로를 안락한 집의 관리자라고 칭하던 노인은 때때로 멍한 눈을 하고 있었다. 현재를 바쁘게 살면서도 아주 조금의 틈만 나면 과거를 유영하고 있는 느낌.
“……무언가를 계속 후회했어요. 처음에는 저만한 또래의 남자애 얘기를 하더군요. 자기가 그 아이를 사지로 몰았다면서.”
“그건 날 말하는 건가?”
“아마도? 그다음에는 자신의 오판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게 했다고도 했고.”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용서해라. 용서할 수 없어도 용서해라.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너 역시 타인의 용서 위에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야.”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자꾸 맴돌았다.
‘그레타는 왜 그렇게 용서를 강조했을까.’
그녀는 그레타가 때때로 내보였던 깊은 회환과 혼란을 떠올렸다.
‘어쩌면 누구보다 용서를 받고 싶었던 건 그녀 자신이 아니었을까.’
마리엘라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내보였다.
“제 생각이지만 그레타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자신이 끼어든 것 자체를 후회하는 것 같았어요.”
“정말 머리가 아프군.”
요제프가 얕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말없이 그레타가 남긴 책의 책장을 넘겼다. 여전히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책이었다. 마리엘라는 책장을 넘기는 손에 속도를 더했고, 그러다가 종이에 손이 베였다.
“아!”
그녀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바로 그때였다.
그레타의 책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그것은 순식간에 서재를 가득 채웠다.
-부족……하다…….
‘뭐?’
마리엘라와 요제프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 성별과 나이대가 다른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섞어놓은 듯한 음성이었다.
-……아직……를 풀기엔…… 부족…….
목소리는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이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서재를 가득 채웠던 검은 기운도 사라졌다.
두 사람은 놀란 눈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방금 그게 뭐였지?”
요제프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명쾌한 답변을 해줄 수 있는 자는 이곳에 없었다.
* * *
요제프와 마리엘라는 날이 밝자마자 지하 감옥을 찾았다. 파르니의 가주를 찾아가 어제 있었던 일에 관해 물어보기 위함이었다.
“책장에 손이 베이자 반응했다고?”
모든 설명을 들은 파르니의 가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내놓았다.
“고대 마법 중에 특정인의 혈흔에 반응하는 것들이 몇 개 있었어. 피를 한 번 떨어트려 보는 건 어떠니.”
마리엘라가 고개를 저었다.
“해봤는데, 두 번째 반응은 없었어요.”
“내가 한번 해 보지.”
요제프는 간수를 불러 작은 칼을 하나 구해오게 시킨 뒤, 동료들을 이끌고 지하 감옥을 떠나있으라고 했다.
간수 하나 없이 텅 빈 감옥.
파르니의 가주, 에블린 파르니가 스스로의 손바닥을 찔러 그 피를 책에 떨어트렸다. 그녀의 피가 닿자마자 또 어제 같은 일이 벌어졌다.
검은 기운이 감옥 안을 가득 채우더니, 노인도 아이도 아닌 괴이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하나가 더…….
그리고 순식간에 모든 것이 사라졌다.
지하 감옥 안에 침묵이 깃들었다.
정적을 깬 것은 파르니의 가주였다.
“내가 아주 중요한 걸 간과해버렸군.”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그녀는 고개를 돌려 마리엘라와 요제프를 차례대로 응시했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을 하고 물었다.
“이 책, 누가 만들었지?”
두 사람은 더 이상 그녀를 속일 수 없음을 알았다.
마리엘라가 이 책을 얻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난 후였다.
파르니의 가주가 그레타에 관해 알고 있는 정보를 내놓았다.
“그분께서 항상 강조하던 것이 있었어. 화합과 균형. 그분은 마녀도, 왕가도, 교단의 편도 아니었지.”
갑자기 마리엘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레타에게 하얀 돌을 없애 달라고 요청해 본 적은 없나요? 마지막 전쟁 때는 들어줄 법도 했을 텐데요.”
“그게……. 아리송한 말을 하더군. 저주를 풀려면 세 사람의 피가 필요하다고. 그땐 그게 뭔지 몰랐는데 이제 알 것 같아. 세 사람. 그건 세 집단의 대표자들을 의미하는 것 같네. 데르샤바크의 핏줄, 흑마법사, 그리고 아마도 증인이자 그분의 대변인이 되어 줄 코부르덴 후작……?”
아리송한 표정으로 마리엘라를 짚은 에블린이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마침 그런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어쩌면 그분에게 소문처럼 예언의 능력이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군.”
그녀는 곧 결론을 냈고, 결론을 바탕으로 그들에게 제안했다.
“세 사람의 피를 섞어 보는 게 좋겠어.”
* * *
그렇게 요제프, 마리엘라, 율리안이 한곳에 모였다.
세 사람은 파르니의 가주가 한 충고에 따라 우선 피를 한데 모아 섞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레타가 남겨준 책에 떨어트렸다.
똑.
핏방울이 떨어지자마자 그레타의 책이 번쩍 빛났다. 세 사람은 갑작스러운 섬광에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텅 빈 책 위로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대의 이름은?
셋은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섯 달 동안 기다려 왔던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었다.
먼저 나선 것은 마리엘라였다. 마리엘라는 펜을 잡고 천천히 자신의 이름을 적어나갔다.
마리엘라 코부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적어나가는데, 갑자기 뒤의 ‘코부’라는 글자가 사라진 것이다. 마리엘라는 이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보다가, 다시 이름을 적어나갔다.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마리엘라 호반
그러자 그 밑에 또 다른 글씨가 새겨졌다.
또 다른 이의 이름은?
요제프 하이젠 데르샤바크
이번에 나선 것은 요제프였다. 이름을 다 적은 요제프가 자신이 들고 있던 펜을 율리안에게 넘겨주었다.
마지막 그대의 이름은?
율리안 폰 바이르
율리안까지 이름을 적어 내자, 갑자기 펼쳐져있던 책이 닫혔다.
-그럼 테스트를 시작하지.
나이와 성별을 예측할 수 없는 괴상한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렸다. 그와 동시에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짙은 검은 어둠이 책에서 쏟아져 나왔다.
마리엘라는 어둠에 익사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뒷걸음질이 무색하게, 어둠은 순식간에 세 사람을 잡아먹었다.
* * *
마리엘라는 자신이 죽음 속에서 눈을 뜬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방은 믿을 수 없이 깜깜했고, 방금 전까지 함께 했던 요제프와 율리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녀는 이 공간에 살아 있는 것은 오롯이 자기 하나뿐이라는 막연한 느낌을 가졌다.
삐걱- 삐걱- 삐걱.
멀리서 나무 가구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이 끔찍하게 고요한 탓에, 그녀는 그 소리가 어느 지점에서 나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마리엘라는 두려운 마음을 안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걸어갔다.
삐걱— 삐거억.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세게 박동했다.
마침내 소음의 진원지에 다가갔을 때, 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안락의자와 하나가 된 늙은 노인이었다.
노인의 온몸은 진흙처럼 흘러내리고 있었으며, 눈 전체가 어두운 푸른색으로 빛났다. 저승의 심판자, 내면의 어둠, 저주의 형상. 대략 그런 이름이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확실한 건 저것은 그레타가 아니라는 것이다.
노인이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자, 마리엘라의 온몸이 굳었다.
삐걱- 삐걱-
안락의자 움직이는 소리가 끔찍하게 들렸다.
-손님이 왔군. 드디어.
일전에 검은 연기와 함께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책이 아닌 눈앞의 노인이었던 것이다.
노인은 옆구리와 안락의자 사이에 끼워 놓았던 두꺼운 책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책장을 쓱쓱 넘기며 무언가를 찾았다.
-어디 보자…… 마리엘라 호반? 흠, 험난한 인생을 살아왔군.
리덴부르크가의 사람들이 그대의 가족을 희생양 삼았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그 집안의 여자애를 모시고 있군?
이상한 일이야.
똑같이 되갚아 주면 될 일인 것을.
마리엘라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마리안은 제 복수의 대상이 아니에요. 절 살리기 위해 채찍을 맞았고, 제가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다고 생각했을 때도 절 살리기 위해 애를 썼어요. 전 그 일과 관련해서 한 번도 그녀를 미워한 적이 없습니다.”
노인이 커다란 책 너머로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노인의 눈동자는 흰자와 검은자의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정확히 그녀의 어느 지점을 보고 있는지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마리엘라는 등 뒤의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노인의 반박이 들어왔다. 다소 퉁명스러운 어조로 보아 그녀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 했다.
-하지만 리덴부르크 백작은 다르지.
그가 그때 그런 명령들만 내리지 않았더라면, 그대의 가족들은 모두 다 살아있을 거야.
리덴부르크 백작이 증오스럽지 않나?
지금이라도 그를 죽일 수 있을 텐데.
백작의 딸만 눈치 못 채게 하면 되지.
“전 그를 죽이지 않을 거예요.”
-왜?
노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썩어 진물이 흘러넘치는 시체의 몸에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 같은 몸짓이 괴이한 느낌을 주었다.
마리엘라는 겁먹지 않으려 노력하며 제 진심을 고했다.
“그를 용서할 거니까요.”
-왜?
“저는 이미 복수를 마쳤어요. 이제 더는 과거에 미련 두지 않을 거예요.”
-리덴부르크 백작은 그 일에 별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있는데?
그는 자신의 선택이 어쩔 수 없다고 여기고 있어.
제 가족의 생명만 소중한 못난 인간의 전형이지.
죽은 그대의 가족들을 떠올려 봐.
그들이 마지막 순간에 느꼈을 절망과 두려움을 생각해 봐.
그것은 마치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하지만 마리엘라는 그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미 수백 번도 넘게 생각해 본 일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를 용서합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군.
납득하기가 어려워.
날 설득시켜 보는 게 어떠니?
네…… 진솔한 언어로.
노인이 손가락으로 그녀를 지목했다.
마리엘라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이유는 간단해요. 제겐 남은 삶이 있으니까요.”
-…….
“평생을 남을 미워하는데 쓸 수는 없어요. 세상이 제 발목에 걸었던 모든 족쇄가 풀렸으니, 이제 제 스스로의 밧줄도 끊어야지요. 앞으로의 삶을 위해서, 전 그들을 용서할 겁니다.”
-그래…….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군.
노인이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제가 정답을 말했나요?”
마리엘라의 질문에 노인이 불현듯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불쾌한 말이군.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노인이 지나가는 자리에 끈적이는 점액질이 남았다. 마리엘라는 심장이 멎을 것만 같은 큰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지만, 두 사람의 거리는 벌어지지 않았다. 변명이라도 하려 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마리엘라가 할 수 있는 것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황급히 고개를 젓는 것뿐이었다.
쿡.
노인의 손가락이 쇄골 바로 밑을 찔렀다.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차가운 온도의 손이였다.
노인의 얼굴이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노인은 입이 찢어지도록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삶에 답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내가 내린 질문에 정답은 없어.
오직 의지와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마리엘라는 노인이 저 커다란 입으로 자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고, 그와 동시에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가 뒤섞인, 수 십, 수백의 무리들이 큰 소리로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내 말을 명심하도록.
그 목소리를 끝으로 귀를 먹먹하게 했던 끔찍한 고요가 사라졌다.
* * *
마리엘라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요제프의 서재에 있었다.
세 사람은 이마에 땀방울을 한두 개씩 달고 다소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서로 비슷한 일을 겪은 것 같았다.
“이상한 목소리의 노인을 만났나요?”
마리엘라의 질문에 두 사람은 각자 다른 대답을 했다.
“병상에 있는 우리 아버지를 만났는데.”
“우리가 죽인 내 양아버지가 살아 돌아왔더군.”
깊게 설명하지 않아도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것’은 일정한 형태를 지니고 있지 않고, 그때그때 시전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흉내 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것’이 낸 수수께끼 역시 비슷한 양상을 띠었으리라 생각했다.
“용서한다고 말했나요?”
그녀의 두 번째 질문에 요제프가 고개를 저으며 뻔뻔하게 답했다.
“아니. 지금 내 주적은 교단이라 마녀 같은 건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말했는데.”
참으로 요제프다운 대답이었다.
마리엘라의 고개가 율리안을 향해 돌아갔다.
“바이르 공작은…….”
율리안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다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선 용서든 뭐든 다 할 것이라 맹세했다.”
대답은 마리엘라에게 했는데, 반응은 요제프가 보였다. 요제프의 한쪽 눈썹이 쓱 올라갔다.
기분이 상한 것과는 별개로 제 하나뿐인 친우와 다툴 용의는 없던 요제프가 융통성 없는 율리안 대신 상황을 정리했다.
“그래, 우리 율리안이 사랑하는 친우를 위해 뭐든지 다 하는 의리 넘치는 사람이지.”
마리엘라는 두 사람의 주의를 돌리기로 했다.
“저주가 풀렸나요?”
그녀의 말에 요제프가 옷자락을 풀어헤쳤다. 그의 가슴팍에는 여전히 푸른 반점 자국이 가득했다.
요제프가 묘하게 말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아니?”
“그럼 왜…….”
마리엘라는 말문이 턱 막혔다. 그녀는 난감해하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황급히 그레타의 책을 집어 들었다. 책장을 넘기려는 순간 쪽지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다섯 달 동안 한 번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요제프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나는 그대를 용서한다. 그대도 나를 용서하기를 바라며.
“그럴듯한 말이 써 있는 것과는 다르게 달라진 점이 없군.”
요제프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율리안을 보았다.
율리안 역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지금 상황이 당혹스러운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대체 무엇을 위해 검은 어둠 속에서 그레타의 시험을 치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던 마리엘라가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그녀의 눈동자가 휙휙 움직였다.
마치 책 속의 글을 읽는 중인 것 처럼.
요제프가 그녀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여전히 백지 상태였다.
“뭐가 보여? 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나도 마찬가지야.”
그의 뒤를 이어 율리안이 말했다.
마리엘라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레타의 주문이에요. 안식의 축복을 내렸을 때 사용했던 주문부터, 저주를 해지하는 주문까지…… 모든 게 이 안에 담겨있어요. 정말 모든 게…….”
하얀돌은 안식의 축복의 부산물이고, 안식의 축복은 데르샤바크 가문에 내려진 저주였다.
만약 그들이 요제프에게 걸린 저주를 풀게 된다면, 높은 확률로 하얀 돌 역시 효능을 잃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요제프를 살리기 위해 하루빨리 저주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편, 파르니의 경우처럼 살아남은 흑마법사들이 복수를 하러 오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그녀에게 그레타의 주문이 적힌 책이 들어왔다. 심지어 이 주문은 그녀만 읽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요제프가 능글맞게 웃으며 농을 던졌다.
“이상한 일이네. 베르단의 국왕과 흑마법사 공작을 제치고 그대에게만 주문이 보이다니.”
“주문을 알려 드리면 요제프의 저주를 풀 수 있나요?”
“최선을 다하겠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리엘라는 율리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고, 율리안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가득 미소를 지었다.
동화 속에서만 보아왔던 해피엔딩이 그들의 코앞에 있었다.
* * *
마리엘라가 그레타의 모든 주문을 손에 넣은 지 일주일 째 되는 날이었다.
그녀는 현재, 저주가 풀린 요제프와 함께 왕성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외진 곳이라 다른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마음 놓고 손을 잡았다.
마리엘라는 더 이상 외부 요소에 의해 휘둘리지 않아도 되었다.
귀족들의 심기를 거슬려 쥐도 새도 모르게 개죽음을 당할까 걱정할 필요도 없고, 복수심에 모든 것을 내 걸 필요도 없었다.
14년간 그녀의 어깨 위에 짊어져 있던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 정도인데 요제프는 얼마나 홀가분할까 궁금해졌다.
“평생을 괴롭혀 왔던 저주가 풀린 기분이 어때요?”
의외로 요제프는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기분이 이상해. 더는 내게 아무런 과업이 남아 있지 않은 느낌이야. 갑자기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 눈을 뜰 때마다 ‘이제 난 뭘 하면 되지?’ 하는 질문이 끊임없이 들더군.”
“앞으로 해내야 할 일이 하나 있긴 하죠.”
“그게 뭐지?”
마리엘라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에 따라 자연스레 요제프도 멈춰 서게 되었다.
그녀가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그리고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그를 유혹했다.
“키스.”
살포시 눈을 감고 한 번 더 입맞춤을 졸랐다.
요제프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키스해주세요, 도련님.”
그가 몸을 숙여 살포시 입술을 맞댔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 같은 풋풋한 입맞춤.
그 입맞춤 하나에 마리엘라는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현실의 억압, 신분의 한계, 과거의 상처…….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온전한 자유 속에 속삭이는 사랑은 얼마나 달콤한가.
<리덴부르크가의 수상한 아가씨 마침>
- 외전 -
아가씨는 오늘도 행복합니다
요제프가 베르단의 국왕이 된 지 10년이 지났다. 그 사이에 베르단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마리안 왕비가 사망했다. 요제프가 국왕이 되고 2년째 되는 해였다. 왕성은 그녀가 아이를 잃고 난 뒤 그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마지막은 조용히 보내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그녀의 장례식은 국장이 아닌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10년 동안 베르단에서 벌어진 주요 사건 사고가 마리안 왕비의 죽음과 그에 파생된 일들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즉위하고 7년째 되는 해, 베르단의 국왕 요제프는 그리너드와 연합해 아샤칼을 공격했다. 3년에 거친 긴 전쟁이 시작되었고, 치열한 전투 끝에 연합군은 아샤칼을 함락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그게 바로 지난달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리너드의 수도, 바클렌.
베르단에서 파견한 대사의 마차가 그리너드의 왕성 앞에 섰다.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 내야 해.’
대사는 마차 안에서 그리너드 왕성을 올려다보며 굳은 다짐을 했다.
‘이게 내 마지막 기회니까.’
베르단에서 보낸 대사의 이름은 브랫 백작이었다.
그는 10년 전 있었던 척결에서 살아남은 자였다.
요제프가 그를 유배 보내거나 감옥에 보내지 않은 것은 브랫 백작이 가지고 있는 국외 연줄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브랫 백작은 목숨과 작위를 부지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 전과 같을 수는 없었고, 그는 10년 동안 요제프의 눈치를 보며 왕성 내 한직을 전전했다.
그러던 그에게 드디어 재기의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 * *
전리품 배급과 관해 베르단과 그리너드 간의 치열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아샤칼의 땅이었고, 그중에서도 힐데트 라는 땅을 누가 가질 것인가에 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힐데트는 험한 산지가 가득한 지형으로, 제국 렝바토 시절에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버려진 땅이었으나 현재는 모두가 원하는 땅으로 탈바꿈했다. 험한 산지 밑에 금과 철이 넘쳐난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평야가 많은 탓에 그럴듯한 광산 하나 없는 베르단으로서는 꼭 가져야만 하는 땅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그리너드에서는 힐데트를 넘겨주는 것을 제지하고자 했다.
아샤칼이 멸망한 지금, 필연적으로 그리너드와 베르단은 국경을 맞대야 한다. 이미 다른 나라의 속국이 되어 본 경험이 있던 그리너드에게 강국 베르단은 껄끄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너드 왕실은 베르단 국왕의 성정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가 그리너드와 연합해 아샤칼을 쳤듯, 같은 방식으로 그리너드 역시 공격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리너드의 대신들은 어떻게든 힐데트를 사수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들은 필연적으로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는데, 이번 승리의 공 대부분은 베르단에 있기 때문이었다.
회의장, 브랫 백작이 기세등등한 태도로 주장했다.
“지난 3년간의 군수 물자 대부분을 저희 베르단에서 부담했습니다. 피에트로부터 무기를 수입해 옴은 물론이고, 연합군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기까지 했지요. 나라가 휘청거릴 정도로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갔어요. 그런 베르단이 험난한 산지 하나를 가져가겠다는 게 도대체 무슨 문제입니까?”
당연한 수순으로 그리너드의 귀족이 반발했다.
“과장이 심하십니다. 베르단이 아무 조건 없이 물자를 내주었습니까? 그중 반은 그리너드 왕실이 차차 갚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그걸 지금 갚으시겠습니까?”
“…….”
그리너드의 귀족들이 말을 아꼈다. 섣불리 입을 놀렸다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불러들일까 두려웠던 탓이었다.
상황이 베르단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브랫 백작이 선심 쓰듯 말했다.
“물론 공으로 그 땅을 달라 요구하진 않겠습니다. 베르단이 가지고 있던 그리너드 영지를 다시 돌려드리지요.”
“하나, 그것은……!”
그리너드의 노귀족 하나가 발끈했다.
베르단이 소유하고 있던 그리너드의 영지는 아샤칼로부터 받은 것이다. 아샤칼이 그리너드를 강제로 속국화해서 넘겨준 땅이니 만큼 돌려주는 게 옳았다. 당연한 것을 선심 쓰듯 말하니 울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필요 없으십니까?”
브랫 백작이 얄밉게 물었다. 다시 그리너드의 귀족들이 침묵했다. 그리너드의 국력으로는 베르단을 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브랫 백작의 얼굴 위로 흡족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협상을 원하는 대로 이끌어 갈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근 십 년 만에 누리는 권력의 맛이 참으로 달콤했다.
“길게 얘기할 것 있겠습니까. 힐데트를 기점으로 그 아래쪽을 베르단이, 그 위쪽을 그리너드가 가져가는 것으로 하지요.”
그가 간단히 상황을 정리했다.
바로 그때였다.
끼이익.
회의장 문이 열리고 검은 베일을 뒤집어 쓴, 호리호리한 여자가 등장했다.
“제가 많이 늦었군요. 엘리자베스 로시입니다. 그리너드의 협상을 위해 왔습니다만.”
모두의 시선이 그 여자에게로 향했다.
체구가 그리 크지 않았건만, 그녀의 등장으로 회의장의 공기가 달라진 듯하였다.
브랫 백작은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베일의 색이 워낙 짙었기 때문에 브랫 백작은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 볼 수 없었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붉게 칠한 입술뿐이었다.
‘어딘가…… 만나 본 적 있는 기분이.’
묘한 기시감이 브랫 백작을 사로잡았다.
회의장에 모인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녀 자체보다 그녀가 쓰고 있는 베일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게 된 엘리자베스가 베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신경 쓰지 마세요, 어릴 적 얼굴에 화상을 입어 가리고 다니는 것 뿐이니.”
엘리자베스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회장 가운데로 걸어 나가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 자기는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마저 하라는 의미로 손짓했다.
“협상을 계속하시죠. 아, 그전에 아까 무슨 말을 하고 계셨는지 묻고 싶군요.”
브랫 백작의 옆에 있던 베르단의 귀족 하나가 다소 깔보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힐데트 땅은 베르단에서 가져가겠다는 이야기 중이었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엘리자베스 로시는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에게서는 묘한 여유가 흘러넘쳤는데, 문제는 이 여유가 사람에게 위압감을 준다는 것이었다.
‘대체 뭐지? 저 여자를 어디서…….’
브랫 백작은 엘리자베스 로시의 정체를 알아내고 싶었다. 스스로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의 몸은 지금 과하게 초조해하고 있었다.
브랫 백작이 원인을 모르는 불안감에 다리를 달달 떨고 있을 때, 엘리자베스 로시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곧, 그녀가 말했다.
“그리너드의 대표로 말하지요. 싫습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오만한 태도에 베르단의 대사들이 정색했다.
“이미 끝난 협상입니다.”
“그럼 다시 하면 되지요. 아직 도장은 찍지 않았잖아요?”
그녀는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 했다.
‘저 목소리, 제스쳐…….’
엘리자베스 로시가 회의장을 헤집어 놓고 있을 때, 브랫 백작은 기억을 헤집고 있었다. 그는 이 기시감의 원인을 찾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베르단의 대사 하나가 브랫 백작의 옆구리를 쿡 찔렀을 때였다.
그제야 제가 이곳에 온 이유를 자각한 백작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손잡는 척하면서 뒤통수치는 것이 이곳의 관례인가 보군요. 십 년 전 그 일도 모르는 척 눈감아 줬건만.”
그는 베르단의 귀족들 중 극소수의 몇 사람만 알고 있는 비밀을 슬쩍 흘렸다. 10년 전 왕자비 납치 사건 때 그리너드의 대사가 연관되어 있었다는 정보 말이다. 물론 정보를 모두 공개할 생각은 아니었고, 그저 겁을 좀 줘서 그리너드 사람들의 입을 꾹 다물게 만들 심산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결과물이 그와 달랐다.
“십년 전? 아아, 파르니의 마녀들 말인가요?”
엘리자베스 로시가 다소 가벼운 목소리로 그날의 사건을 콕 집어 말해버린 것이다.
‘내부 사정을…… 모두 알고 있어?’
그녀의 말을 들은 브랫 백작의 동공이 커졌다.
마리안 왕자비 납치 사건이 그리너드 왕실과 파르니의 마녀들의 공조라는 사실은 베르단 내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처음 듣는 소리에 베르단과 그리너드 귀족 몇이 웅성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리자베스 로시는 소란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심드렁한 태도로 제 할말한 할 뿐이었다.
“뭐, 그건 이쪽에서 잘못한 게 맞지만. 조금 의외군요. 베르단이 그 일을 아직도 들먹이다니. 그리너드가 파르니의 마녀들과 일을 치렀던 덕에 데르샤바크 가문에 걸린 저주를 풀 열쇠를 얻게 된 걸로 알고 있는데.”
“예?”
브랫 백작이 멍청한 표정을 되물었다. 처음 보는 여자의 입에서 자신도 몰랐던 왕실의 일들이 쏟아져 나오니 순간적으로 크게 당황한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을 이었다. 다소 투덜거리는 어조였다.
“좋은 마음으로 행한 일은 아니라 감사 인사를 받을 건 아니지만 적어도 없던 일로 넘겨줄 만하지 않나 싶네요.”
“…….”
브랫 백작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화를 섞으면 섞을수록 느껴졌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 특유의 기운이.
브랫 백작은 여기서 기운을 빼 봤자 하등 쓸모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다른 방도를 궁리했다.
백작은 그리너드에 남아 있는 자신의 지인이 몇이나 되는지 셈해보았다. 그의 그리너드 출신 지인들은 대부분 어두운 그늘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이었다.
‘일단 저 엘리자베스인지 엘리스인지 하는 여자가 협상에 참석하지 못하게 해야 해.’
사람을 시켜 납치를 하든, 사고를 일으키든 할 작정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후퇴하자.’
그는 멀쩡한 얼굴로 뻔뻔하게 회의를 중단시켰다.
“오늘은 제가…… 몸 상태가 좋지 않군요. 괜찮다면 내일 회의를 다시 이어서 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지요.”
엘리자베스 로시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 * *
회의가 파하자 귀족들이 하나둘씩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브랫 백작도 같이 온 사절단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회의장을 나섰다. 그런데 등 뒤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브랫 백작.”
베일을 쓴 여자, 엘리자베스 로시였다. 그녀는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여기서 보니 반갑군요.”
브랫 백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희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요?”
“인생에서 한 번은 마주한 적이 있겠지요.”
엘리자베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브랫 백작은 그녀가 자신을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짜증이 좀 났지만 협상을 하러 파견 온 곳에서 분란을 일으킬 수는 없기에 그럴듯한 처세술로 대충 상황을 넘기려고 했다.
웬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존재 자체가 껄끄러웠다.
“그것 참 시 같은 말이군요. 엘리자베스 로시…….”
“백작 부인이랍니다.”
“네, 로시 백작부인. 오늘 만남은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뵙지요.”
그가 정중한 말과 함께 뒤를 돌았다. 또 다시 말을 걸면 못 들은 척하고 도망갈 심산이었다.
그 결심은 오초도 가지 못하고 무너졌다.
“마리엘라에게 제 말 좀 전해주시겠어요?”
“예?”
그가 얼빠진 얼굴로 뒤를 돌았다.
“일곱 번의 맹세 중 하나를 지금 받아가겠다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렇게 말하면 잘 알아들을 거예요. 그럼.”
엘리자베스는 별다른 설명도 하지 않고 그를 스쳐 지나갔다.
* * *
브랫 백작이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한 일은 짐 가방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양피지를 펼쳐보는 것이었다.
왕실에서 건네준 마법 양피지였다.
그는 우선 재상인 마리엘라 코부르덴 후작에게 연락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마리엘라의 질문은 딱 한 줄이었다.
혹시 그녀의 성이 로시인가?
어떻게 아셨습니까? 정확한 이름은 엘리자베스 로시입니다.
그렇다면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게.
“제정신인가?”
그는 마리엘라의 명령에 복종할 수 없었다. 상인의 감각이 아우성치고 있었다. 이대로 힐데트 땅을 저들에게 넘겨준다면 왕실은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될 것이라고.
이번 협상의 책임자로서 절대 그렇게 두고 볼 수 없었다.
백작은 또 다른 양피지를 펼쳤다.
요제프와 바로 연락 할 수 있는 마법 양피지였다.
그를 설득하기 위해 열심히 이런 저런 전황을 잔뜩 적어 보냈건만, 요제프에게 돌아온 답장은 딱 한 줄이었다.
코부르덴 후작이 뭐라고 하던가?
로시 백작 부인의 말을 무조건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녀의 말대로 해.
필담을 나누던 브랫 백작의 입가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다…… 미친건가?”
그는 세상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건 아닌지 심각하게 의심하기 시작했다.
* * *
다음날이었다.
브랫 백작은 베르단의 대표자로서 그리너드에 힐데트를 넘겨준다는 협상문에 서명을 했다.
베르단에서 온 사절단들이 그를 원망하듯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로서도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였지만 국왕과 재상의 마음이 워낙 굳건해 어쩔 수 없었다.
서명을 끝내고, 양국의 귀족들끼리 가진 짧은 티타임.
점잖은 척이란 척은 다 하며 별 쓸데없는 대화나 나누고 있는데, 옆 자리에서 누군가가 차를 엎질렀다. 흐른 차는 테이블을 넘어 브랫 백작의 허벅지를 적셨다. 그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허벅지를 털었을 때, 맞은편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아쉽네. 다 식은 차라.”
목소리의 주인공은 엘리자베스 로시였다.
“…….”
그 말을 들은 브랫 백작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지난 이틀 동안 들었던 묘한 기시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옆에 있던 귀족들이 손수건을 뽑아 그의 젖은 옷을 닦아 주었다.
엘리자베스는 그에게 가벼운 충고를 해주었다.
“그래도 세탁은 바로바로 해 둬요. 그대의 비싼 사치품이 망가지면 속상할 테니까.”
“…….”
브랫 백작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검은 베일 속 보이지 않는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 *
베르단에서 온 사절단이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소란했던 그리너드 왕성이 평소처럼 한적해졌다.
소박한 매력이 있는 그리너드 왕성의 정원.
아렐 후작과 엘리자베스 로시가 나란히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그 말이 진짜인가요?”
“어떤 걸 두고 하는 말이죠?”
너무 포괄적인 아렐 후작의 질문에 엘리자베스가 되물었다.
“베르단의 국왕이 파르니의 도움을 받아 저주를 풀었다는 거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모르죠, 저야.”
“네?”
너무도 당당한 태도에 아렐 후작이 얼빠진 얼굴을 했다.
“뭐, 제 알반가요. 어차피 브랫 백작도 그 사건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르는 건 매한가진데.”
이럴 땐 그냥 우기면 돼요.
그녀는 뭐 대단한 팁이라도 전수하는 사람처럼 그에게 살짝 윙크했다.
엘리자베스가 간과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지금 그녀는 검은 베일을 쓴 상태라 아무도 그녀의 윙크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아렐 후작은 혼자 심각해졌다.
“혹 이 일로 베르단 왕실에서 문제를 제기한다면…….”
율리안 폰 바이르가 교황이 된 이후, 바레뎃샤는 무분별한 마녀 사냥을 멈추었다. 그러나 마녀들을 향한 사람들의 민심은 여전히 싸늘했다. 데르샤바크 왕가도 이를 염두에 두고 절대로 표면 밖으로 마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런 금기를 엘리자베스 로시가 어긴 것이다. 그것도 거리낌 없이.
아렐 후작이 복잡하게 머리를 굴려 대책을 고민하는 사이, 엘리자베스가 간단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다시 저를 부르세요.”
“네?”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뭐, 요제프쯤이야.”
“…….”
아렐 후작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두려워하실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웬만해선 그쪽에서 지고 넘어가줄 테니까요.”
“혹시나 싶어 말씀드리는 것인데…….”
“네, 말씀하세요.”
“혹시…… 그날 일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으신 건…….”
아렐 후작은 혹시 그녀가 10년 전 일에 대한 복수를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그녀의 도 넘은 언행에 화가 난 베르단이 그리너드를 칠 수도 있지 않는가.
“아뇨? 오히려 감사하는 편인데요.”
“예?”
엘리자베스가 그의 어깨를 두어 번 쳤다. 다 큰 어른이 별것도 아닌 일로 소심하게 굴지지 말라는 뜻이었다.
“너무 죄책감 갖지 말아요. 원래 진정한 사랑이 이루어지려면 큰 고난 한 번은 겪어 내야 하고, 그대는 그걸 위해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것뿐이니.”
아렐 후작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에게 그녀는 여전히 성격을 파악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하나만 더 여쭤봐도 될까요.”
“그러세요.”
“국왕 전하께서 수도로 올라오실 의향이 있으신지 여쭤보라고 하셨습니다. 원하신다면 왕실에서 직접 저택을…….”
여태까지 모든 걸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 엘리자베스가 정색하며 말을 잘랐다.
“그건 곤란하죠. 꼬리가 길면 잡히니까요.”
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그리너드 왕성을 바라본 뒤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앞으로 그리너드에 베르단 귀족들이 오고 갈 텐데, 마리안 왕비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으면 얼마나 기분이 이상하겠어요? 베일을 쓰고 있어도 언젠가 정체를 들킬 거예요.”
“그건 저희가…….”
아렐 후작이 한 번 더 그녀를 설득하려던 순간이었다.
그녀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어느덧 산책로의 끝이 보였다. 그리고 그 끝에는 엘리자베스 로시의 마차가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그를 향해 밝게 웃어 보이며 작별 인사를 했다.
“아무튼, 전 이만 돌아가 볼게요. 토끼 같은 남편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어서.”
사랑에 빠진 자 특유의 밝고 뭉실뭉실한 분위기가 그녀 주변을 가득 떠 다녔다.
* * *
엘리자베스 로시가 살고 있는 로시 백작령은 그리너드 수도에서 네 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회의가 끝난 것이 오후 두시 경이었고, 그 뒤로 가벼운 티타임과 산책을 가졌으니 그녀가 집에 도착한 시간은 자연히 늦은 저녁일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 엘리자베스가 조용히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그녀가 아렐 후작에게 자랑했던 바로 그 토끼 같은 남편이었다.
“기다렸어요.”
미하엘이 활짝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베일을 집어 던진 엘리자베스, 아니 마리안이 그에게 꼭 안겼다.
“보고 싶었어!”
요제프가 즉위하고 2년 뒤.
그는 마리엘라와의 약속대로 마리안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었다.
일국의 왕비라는 신분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죽음을 위장하고, 고국을 떠나 먼 타지에 자리 잡아야 했지만 마리안에게 그것은 전부 상관없는 일이었다.
베르단의 왕비로서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사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당당하게 함께 사는 삶이 더 나았다.
그녀는 언제나 사랑을 동경했고,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았다.
미하엘의 부인으로 살던 지난 팔 년 동안의 인생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그러니 앞으로의 인생도 이렇게 행복할 것이다.
영원히.
<외전_아가씨는 오늘도 행복합니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