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맹세와 언약
교황 로베르토 가르뎅이 습격으로 인한 부상을 회복하고 수도에 입성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진짜로 습격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부상을 입긴 한 건지의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고, 요제프도 그렇게 알고 있는 척했다.
교황은 수도 입성 후 이틀을 교황청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다가 삼일째 되는 날 왕성을 방문했다.
두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사람 좋은 얼굴들을 하고 평화롭게 대관식 일정에 관한 논의했다.
원래 대관식은 한 달이 넘는 준비 시간을 갖추는 것이 정상이었으나, 교황의 피격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국왕의 자리가 공석이었던 점을 감안하여, 논의 날짜로부터 열흘 뒤에 열기로 했다.
베르단의 후계자가 왕위를 물려받으려면 선행되어야 할 두 가지 예식이 있다.
하나는 대관식을 치르기 일주일 전, 왕실령 뷔하 지방으로 가서 ‘속죄의 샘’이라는 이름을 가진 샘물의 물로 일주일 동안 목욕을 하는 정죄 의식을 치르고 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교황이 직접 주관하는 대관식이었다.
정죄 의식을 할 동안에 그는 세상의 모든 것들과 단절된 채로 살아야 했다. 설사 전쟁이 나더라도 그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요제프는 그사이에 왕성 내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라 확신했다.
본디 뱀은 허물을 벗을 때 가장 약해지는 법이다. 교황이 그 순간을 그냥 넘길 리가 없었다.
그는 남은 삼 일간 교황의 공격에 대비해 이런저런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에 모든 시간을 다 할애했다.
소중한 이들을 만나 잘 다녀오겠다며 인사말을 건넬 시간조차 없었다.
뷔하 지방으로 내려가기 전날 밤, 겨우 자투리 시간을 만들어 낸 요제프가 자신의 지인들을 열어 자그마한 만찬을 열었다.
모인 이는 총 넷으로, 그들의 이름은 각각 마리안, 마리엘라, 율리안, 미하엘이었다.
네 사람은 한마디 말도 없이 조용히 식사만 했다. 각자 요제프를 대하기 껄끄러운 이유가 하나씩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요하다 못해 서늘한 식탁.
요제프가 나이프 질을 하다 말고 만찬에 참석한 이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스푼을 들어 와인 잔을 세 번 쳤다.
댕댕댕.
종소리 비슷한 소음에 모두의 시선이 요제프에게로 몰렸다.
“생각을 해 봤는데, 호트너 부인을 다시 룩센투크에 불러들이는 게 좋겠어. 내가 속죄의 샘에 들어가 정죄하고 올 동안 왕자비가 너무 적적할 것 같아서 말이야.”
당장 내일 왕성을 떠나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발표였다.
다들 그의 저의가 무엇인지 추측되지 않아 입을 다물고 있는데, 유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졸지에 예절 수업을 듣게 된 당사자, 마리안 왕자비였다.
“지금 나한테 호트너 부인의 수업을 다시 들으라고 하셨어요?”
그녀가 따지듯 물었다.
“사실 이미 불러 들였어. 아마 내일 아침에 짐을 싸서 올 거야.”
“내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베르단의 왕자비가 무례하다는 소문이 국내외로 파다해. 베르단 내에서는 내가 잘 무마시켜 줄 수 있지만 베르단 밖에서까지 그러면 곤란하지. 그대는 이 나라의 유일한 왕자비고 곧 왕비가 될 사람이니까.”
“절 한 번도 아내로 생각해 본 적 없는 주제에 요구가 과하시네요.”
마리안의 공격을 요제프가 능청스레 받아쳤다.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그러는 그대는 날 남편으로 생각한 적은 있나? 그대의 맞은편에 있는 미하엘 경의 눈을 마주하며 한번 말해보게.”
요제프는 아무렇지 않게 마리안의 가장 큰 치부이자 약점을 건드렸다.
이 대화의 최대 피해자는 미하엘이었다. 미하엘은 요제프의 폭탄 발언에 사례에 걸려 콜록대자, 마리안이 그를 노려보았다.
“미하엘은 끌어들이지 말아요.”
그녀가 날을 세워 선을 그었다.
지난 이년 여간 의도치 않게 룩센투크의 정쟁 중심에 서 왔던 덕택에 그녀에게는 웬만한 왕족 못지않은 위엄과 기개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요제프의 눈에 보이는 그녀는 그저 털 세우는 어린 짐승 같을 뿐이다.
“글쎄, 애초에 아무것도 모르는 열아홉 살짜리 기사를 룩센투크의 험난한 정쟁에 휘말리게 만든 건 내가 아니라 그대인 것 같은데.”
그 말에 할 말이 없어진 마리안이 침묵했다. 그러나 그녀는 입만 꾹 다물었을 뿐 요제프를 노려보는 도끼눈을 지우지는 않았다.
요제프는 성난 고양이처럼 발톱을 세우는 마리안을 빤히 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꽉 쥐고 흔들어보았다.
갑작스러운 행태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당황했다.
“지금 누구 볼을 꼬집어요!”
마리안의 앙칼진 목소리가 회장을 가득 채웠다.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칠 때마다 한 번씩 이 얄미운 볼을 콱 꼬집는 상상을 했어. 여동생을 가져 본 적이 없는데, 만약 있다면 딱 이런 꼴일 것 같군.”
“진짜 짜증 나는 사람이야!”
요제프의 손을 억지로 떼어낸 마리안이 신경질을 있는 대로 부렸다.
마리엘라는 마리안의 진정한 적수는 정치적으로 반대 노선에 있었던 브랫 백작이나 파칼 공작이 아닌 요제프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동안 서로 속고 속이느라 부딪칠 일이 없었기에 몰랐던 걸지도.’
현실 감각 없는 마리안과 죄의식 없는 요제프.
아마 저 둘을 동시에 맞서야 하는 사람은 속이 타들어 갈 것이다.
‘마치 나처럼 말이지.’
그녀는 대관식 이후의 삶이 꽤나 시끌벅적할 것 같단 생각을 하며 고기를 썰었다.
그 사이에도 마리안과 요제프의 신경전은 계속되었다. 정확히는 요제프의 장난질에 마리안이 일방적으로 말려들어 가고 있는 꼴이었지만.
요제프가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하며 말했다.
“도대체 날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야? 난 그대의 앙큼한 거짓말도 눈 감아 줬고, 어린 기사와 진득하게 사랑에 빠진 것도 용인해줬는데. 화를 낼 게 아니라 착한 남편 상이라도 줘야 하지 않아?”
“날 기만했잖아요!”
“그건 여기 있는 모두가 마찬가지지. 우리들 중 서로에게 죄 없는 자가 있나?”
조용히 밥 먹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던 세 사람이 일시에 나이프 질을 멈추었다.
요제프는 그들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 미묘한 반응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성이 잔뜩 난 마리안뿐이다.
“끝까지 날 가지고 놀려고!”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한 마리안이 바닥에 발을 쾅쾅 구르더니, 돌연 요제프를 세게 꼬집었다.
“아야. 이거 진짜 아픈데.”
요제프가 엄살을 부리자, 마리안이 고개를 턱을 치켜세우고는 말했다.
“흥, 나도 당신이 얄미워서 좀 꼬집어 봤어요.”
‘서로를 꼬집고 꼬집는 왕자비 부부라니…….’
풍자극에도 나오지 않을 기괴하고 우스운 모양새였다.
세 사람은 이곳에 다른 귀족들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 *
요제프가 만찬을 열었던 날 밤, 데이지는 혼자 처소에 틀어박혀 울고 있었다.
하녀였던 마리엘라는 속할 수 있는 곳에 저는 배제되었다는 사실이 못내 속상했기 때문이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디 그리 의지에 따라 쉽게 좌지우지되는 일이던가.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느꼈다. 차라리 이브노말 남작령에서 지낼 때가 더 행복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차라리 돌아갈까 했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데이지가 왕자비의 시녀가 된 이후, 그녀의 가족들은 사치를 부리기 시작했다. 가족들의 낭비벽은 도를 넘어 그녀의 지원이 없으면 파산할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서 그만두고 돌아간다 해도, 가족들이 반기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녀는 도움을 청할 곳도 없는 스스로의 신세에 깊은 절망을 느꼈다.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데이지 이브노말은 이브노말 남작의 둘째 딸로 위로 언니 하나, 오빠 둘, 아래로 남동생 하나를 둔 대가족의 일원이었다.
이브노말 남작은 자그마한 영지에 비해 많은 자식을 낳았고, 심지어 그들 대부분은 게으르고 탐욕스러웠다. 때문에 남작은 항상 빚에 쫓겨 가며 살아야 했다.
그의 가장 순한 자식이었던 데이지는 언제나 부모를 이해하고 돕는 역할을 맡았다. 그녀가 착한 딸 역할을 그만두고 수도로 상경하게 된 것은 그 당시 결혼을 전제로 진지하게 만나던 남자가 데이지를 버리고 그녀의 언니를 선택했던 사건 때문이었다.
남자는 같은 조건이라면 지참금을 더 줄 수 있는 첫째 딸과 결혼하는 게 현명한 일이라며 뻔뻔하게 굴었고, 데이지의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은 그녀에게 용서를 강요하거나 아예 이 일을 모르는 척했다.
데이지는 그간 가족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희생과 인내가 실은 아무 의미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으며, 그것은 ‘왕자비의 시녀가 되어 신분 상승을 해 보겠다.’라는 현실적인 야망으로 발현되었다.
그녀는 가지고 있던 돈을 싹싹 긁어모아 수도로 상경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고난 끝에 왕자비의 시녀가 되었다.
이제 앞길이 좀 풀리나 했더니 또 다른 고난이 찾아왔다. 고난의 이름은 ‘마리엘라’ 였다.
‘아무리 열심히 왕자비 전하를 모시면 뭐해, 부르는 이름이라고는 그 놈의 마리엘라, 마리엘라, 마리엘라!’
데이지는 탄탄대로일 것만 같던 자신의 입지가 누군가의 입김 하나만으로 쉽게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임을 자각했다.
그 어떤 관계도 그녀를 지켜주지 않는다.
가족들에게 배신감을 느꼈던 그날의 반복이었다.
‘내 인생은 왜 항상 이럴까. 사람들은 왜 나한테만 못되게 굴지?’
데이지는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더 서럽게 울었다.
그때였다.
똑똑.
문밖에서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자신이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 왕실에서 나 같은 건 아무도 찾아주지 않아.’
똑똑.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
침대에 엎드려 펑펑 울고 있던 데이지가 코를 훌쩍거리며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데이지가 익히 아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으며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시죠?”
남자는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했다.
“……께서 찾으십니다.”
“예?”
순식간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데이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의외의 인물이 남자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 * *
율리안은 오랜만에 룩센투크 서쪽에 마련된 자신의 처소에 머물렀다.
지난밤 있었던 만찬이 너무 늦게 끝나서였기도 했고, 아침 일찍 뷔하 지방으로 떠나는 요제프를 마중하기 위해서는 이곳에 머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옷까지 다 갈아입고 나온 그를 마리엘라가 반겼다.
“준비는 다 끝났나요?”
“…….”
율리안은 대꾸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마리엘라에게 화가 나서 그녀의 말을 모조리 무시하고자 하는 건 아니었다.
마음을 거절당한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녀를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는 상태에 가까웠다.
마리엘라 역시 그러한 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도 웬만해서는 율리안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급한 일이 생겼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죠.”
마리엘라는 율리안을 지나쳐 처소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율리안은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이내 천천히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하녀와 시종들을 다 내보낸 율리안의 처소.
바깥을 내다보며 엿듣는 이가 있는 건 아닌지 확인을 끝낸 마리엘라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다급한 얼굴로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고백할 게 있어요. 사실 며칠 전에 요제프가…….”
그녀가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을 때였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문밖에서 기사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문이 열렸다.
“율리안 폰 바이르 공작.”
율리안과 마리엘라의 고개가 벌컥 열린 문가로 향했다. 두 사람은 문을 연 남자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보았다.
푸른 늑대 기사단의 조셉 남작.
그는 요제프의 최측근 중 하나였다.
요제프가 왕성을 떠나기 직전에 율리안을 치워버리려 수를 쓴 것이다.
“반란 모의 혐의로 체포한다.”
조셉 남작이 기사들을 이끌고 율리안을 잡으러 왔다.
조셉 남작의 손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구리 상자가 놓여 있었는데, 율리안은 그것이 눈에 익다고 생각했다.
곧 조셉 남작의 입을 통해서 그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
“흑마법을 쓰려 해도 소용없을 거야. 하얀 돌 조각을 들고 왔으니.”
조셉 남작이 들고 있는 구리 상자는, 율리안이 요제프에게 건네주었던 바로 그 상자였다.
조셉 남작이 등 뒤의 기사들에게 턱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푸른 늑대 기사들이 율리안의 양팔을 붙잡았다.
끌려가기 직전, 율리안은 고개를 돌려 마리엘라를 바라보았다. 배신당했다고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에도 그의 눈동자는 맑았다.
마리엘라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율리안의 손을 꼭 붙잡았다.
“내가 요제프와 잘 이야기해 볼게요. 내가…….”
기사들은 그녀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고, 마리엘라는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율리안을 떠내 보낼 수밖에 없었다.
홀로 남은 마리엘라는 황량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구경나온 하인들이 그녀를 힐끔힐끔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 * *
요제프는 왕성을 나갈 준비를 모두 끝마쳤다.
마차를 타러 가기 직전, 그의 수하가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정보를 전달했다.
“바이르 공작을 지하 감옥에 가두는 것에 성공했답니다.”
“그래.”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제프는 곧바로 마차를 타지 않고 등 뒤를 둘러보았다. 마리엘라가 마중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그를 향해 다가오는 여성의 드레스 자락이 보였다. 여성의 정체를 확인한 요제프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리안의 예절 수업을 위해 부른 호트너 부인이었다.
“왕자 전하.”
호트너 부인이 그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요제프는 과거의 멍청하고 순진한 왕자를 연기했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부인. 덕분에 제 아내가 한시름 덜겠어요.”
“아닙니다. 전하께서 저를 잊지 않고 찾아주신 것이 영광일 따름입니다. 저, 그런데 왕자비 전하께서는……?”
호트너 부인이 주변을 둘러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남편이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데 아내가 마중 나오지 않은 상황을 심상치 않게 보았던 것이다.
요제프는 방긋 웃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 치부했다.
“침실에서 안정을 취하는 중입니다. 알고 계실지는 모르겠으나, 제 아내가 아이를 잃은 이후로 몸과 마음이 많이 무너져있는 상태예요. 그래서 부인을 부른 것이고요.”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마리안은 지난밤 요제프와 된통 싸운 이후로 일부러 얼굴을 내비치지 않은 것뿐이었다. 이제 그녀는 대외적으로나마 그와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는 일을 포기해버렸다.
“책임을 통감합니다.”
“제가 없는 일주일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이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바로 그때, 마리엘라가 요제프를 향해 다가왔다. 그녀는 잔뜩 성이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러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호트너 부인을 대할 때는 대외적인 이미지를 고수하던 요제프의 얼굴이 차갑게 싹 돌변했다.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
“요제프!”
그녀가 초조함을 못 이긴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요제프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요 며칠 머리가 아파서 잠을 잘 못 잤어. 정말 날 생각한다면 진정하고 목소리 좀 줄여줬음 좋겠는데.”
“당신이 이렇게 나오는데 제가 어떻게 진정하죠?”
“나도 최선을 다하는 중이야.”
“무슨 최선?”
그가 그녀의 턱을 그려 쥐었다. 세게 힘을 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공포심을 심어 주기에는 충분한 행동이었다.
요제프는 그녀를 향해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의 두 눈은 여전히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중이었다. 곧이어 낮고 무뚝뚝한 음성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대를 믿어 보려는 최선.”
“…….”
마리엘라는 할 말을 잃었다. 그가 그녀의 턱을 잡았던 손을 풀었다.
“그러니까 좀 조용히 해줘. 머리가 너무 아파서 정신이 하나도 없군.”
마리엘라는 작전을 바꾸었다. 그녀는 요제프의 팔뚝을 잡고 간절하게 애원했다.
“요제프, 이러면 안돼요. 율리안은 당신을 위해서…….”
그러나 요제프의 반응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그 애절함은 율리안을 향한 동정심에서 나오는 건가? 아니면 당신의 가족이 그의 어머니를 죽였다는 데에서 나오는 죄책감?”
그가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그것은 그녀를 향해 경고장을 날리는 행위와 같았다.
“날 위해서라는 추상적인 이유를 끌고 오지 마. 명확한 사실은 그가 귀족파 수뇌부를 움직여 날 사지로 몰았다는 것뿐이니.”
마리엘라가 한 번 더 간청했다.
“당신이 그에게 실망했고, 화가 많이 났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율리안을 알잖아요. 그는 그저 어둠을 두려워하는…….”
“약한 면모가 있다고 선한 사람은 아니지. 자꾸 그런 식으로 그를 포장해주면 역효과만 난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불쾌함을 표했다. 더는 이 주제로 이야기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요제프!”
마리엘라가 그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지만, 요제프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차가 출발했다.
마리엘라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마차가 왕성을 빠져나가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았다. 깊은 절망에 빠진 모양새였다.
‘지금 이게…… 대체……?’
그 모든 광경을 왕자비의 예절 선생, 호트너 부인이 지켜보고 있었다.
* * *
율리안이 반역죄로 룩센투크 지하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은 반나절이 지나서야 교황의 귀에 도달했다.
그는 하나 뿐인 양자가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흑마법사를 부리고 있다는 진실이 드러나지 않게 하는 일에 더 신경을 썼다.
요제프가 하나뿐인 친우에게 반역죄란 무서운 죄목을 붙인 것은 이미 율리안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교황은 율리안이 모든 진실을 불기 전에 그를 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교황이 서둘러 요제프에게 서신을 보냈지만, 요제프는 이미 뷔하 지방으로 들어간 뒤였다.
한번 정죄의 의식을 치르러 뷔하 지방으로 들어가면 일주일 동안 세상과 단절된다. 아무리 교황이라 하더라도 따로 요제프에게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요제프가 오늘 아침에 돌연 율리안을 가둬버린 이유였다.
초조해진 교황은 곧장 왕자비 알현을 청했다.
마리안은 마리엘라, 데이지를 이끌고 교황이 기다리고 있던 응접실로 갔다.
마리안이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교황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양팔을 펼쳐 마리안을 반겼다.
“반갑습니다, 왕자비 전하. 저희가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지요?”
온 나라가 받들어 모시는 바레뎃샤의 수장이건만, 마리안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마리안이 즐겨 읽는 통속 소설의 남자 주인공은 주로 세 가지 신분을 지녔다.
황제, 대공, 교황.
그런데 저 셋 중 하나의 신분인데 잘생기고 키가 큰 미남이 아니라 나이가 오십이 넘은 늙은 남자다? 그렇다면 역할은 뻔했다.
주인공을 고난에 빠지게 하는 악역.
이러한 생각의 흐름을 타고 마리안은 그를 나쁜 사람으로 단정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방법이었으나 내려진 결론이 틀리지 않았다는 게 이 상황의 아이러니였다.
“바이르 공작과 관련해서 오셨다고요.”
자리에 앉은 마리안이 물었다.
그녀의 생기 없고 사무적인 어조에 교황 로베르토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곧 표정을 갈무리한 그가 짐짓 진지하고 엄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예. 다른 방도가 없어 알현을 청했습니다. 왕자 전하가 대관식을 위해 왕성을 비우셨으니, 왕자비 전하에게 간청을 드릴 수밖에요.”
마리안은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르 공작이 감옥에 갇히든, 바이르 공작의 사촌이 감옥에 갇히든 모두 제 알 바가 아니라는 태도였다.
“그렇군요.”
“음모가 있는 것 같습니다. 허니 왕자비께서 힘을……”
그녀는 대뜸 교황의 말을 잘랐다.
“그런데 어쩌죠? 저에겐 아무 권한이 없습니다. 있다 해도 도와드릴 용의가 없고요.”
교황 로베르토 가르뎅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리엘라는 그가 왜 저렇게 기분 상해하는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로베르토 가르뎅이 교단 바레뎃샤의 수장으로 살아 온 지도 벌써 이십 년이 넘었다. 선왕인 요하네스조차도 그를 대할 땐 조심스러워 했는데, 감히 딸뻘 되는 여자애가 건방지게 구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을 것이다.
교황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제가…… 뭔가 잘 못 들은 것 같습니다만.”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마리안은 그런 것쯤은 가뿐히 무시했다.
“아니요, 정확히 들으셨습니다. 전 바이르 공작을 풀어주지 않을 겁니다.”
교황이 정색하며 말했다.
“왕자비 전하. 율리안은 제 양자이자 바레뎃샤의 성기사단을 이끄는 성기사단장입니다.”
“압니다.”
마리안은 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교황을 무시하는 반응을 보일 때마다 교황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마리엘라는 그의 반응 하나하나를 눈에 담았다.
마리엘라와 달리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은 데이지는 고개를 돌리며 애써 이 상황을 못 본 척했다.
“또한 유서 깊은 바이르 공작가의 가주이자 유일한 생존자고요.”
“예.”
묘하게 끝이 올라간 어조가 듣는 사람에 따라 비꼬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런 율리안이 누명을 써서 감옥에 갇혔는데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시겠다고요? 그는 평생 동안 데르샤바크만을 위해 일해 왔습니다.”
잡다한 표현들이 많았지만, 결국 바레뎃샤를 등질 계획이 되어 있냐는 뜻이었다.
설득의 탈을 쓴 협박.
그 미묘한 압박을 못 느낄 마리안이 아니었다.
갑자기 마리안이 싱긋 웃어 보였다. 그건 상대방을 콱 누르기 직전에 나오는 그녀만의 버릇이었다.
“현명한 거지요. 무릇 공과 사는 떨어트려 놓으면 놓을수록 명확해지는 법입니다. 자세한 내막은 조사를 한 뒤에 밝혀지겠지요.”
“왕자비 전…….”
마리안은 다시 한번 그의 말을 잘라냈다.
“바이르 공작이 감옥에 갇히게 된 까닭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아 덧붙여 설명하자면, 그는 현재 왕자비 납치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조사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때 납치당했다가 무사 귀환한 왕자비는 다름 아닌 저고요. 아무래도 번지수를 잘못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 아직 제가 그날 겪은 충격을 극복하지 못했거든요.”
갸륵한 표정 속에 절대 지지 않겠다는 광기가 번뜩였다.
교황도 그 심상치 않은 눈빛을 읽어냈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광경을 보며 마리엘라는 조용히 과거를 회상했다.
마리안은 어릴 때부터 성질머리가 장난 아닌 걸로 유명했다. 때문에 툭하면 유모가 갈아 치워졌고, 나중에는 유모를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 하녀들이 번갈아 가며 그녀를 키웠다. 갈아 치워진 유모들이 백작가를 나가기 전 혀를 차며 하는 말이 있었다.
‘정말이지 어디서도 지지 않는 깡다구야.’
마리엘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때 들었던 그 말을 속으로 따라했다.
그 이후로도 숨 막히는 침묵이 계속되었다.
아무래도 더는 대화의 진척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교황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봐야겠습니다.”
“그러시지요.”
교황은 예의상의 인사를 건넸고, 그건 마리안도 마찬가지였다.
“휴.”
마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얕은 한숨을 쉬었다. 가시방석 같던 회담이 끝나자 긴장의 끈이 느슨하게 풀려버린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밖으로 나가는 문을 향해 걸어 나가던 교황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 마리엘라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마치 그녀의 얼굴을 눈에 익혀두겠다는 듯이.
“…….”
불길한 예감이 마리엘라의 온몸을 휩쓸었다.
* * *
같은 날 저녁, 마리엘라는 교황으로부터 은밀히 율리안이 머물었던 서쪽 별관으로 오라는 쪽지를 받았다.
그 쪽지를 전달한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왕성의 시종 중 하나라는 것이 어이가 없었지만 왕성에 교단에서 심어 둔 첩자가 하나도 없는 것이 더 이상했으므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녀는 적혀 있는 시간에 교황을 만나러 갔다.
“이게 벌써 세 번째 만남이군?”
“율리안을 위해서 이곳에 왔으나, 많은 시간을 낼 수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왕자비 전하의 눈을 피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마리엘라는 마리안의 히스테리에 안절부절못하는 시녀인 척 연기했다. 우습게 보이면 보일수록 자신에게 유리한 때가 오리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교황이 호탕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의 커다랗고 두툼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그녀는 그것이 불쾌했지만 티 내지 않았다.
“걱정 말게. 나도 많은 시간을 쏟진 않을 거야. 간단히 용건만 주고받지.”
“말씀하시죠.”
“그 애가 흑마법사라는 건 알고 있지?”
‘이렇게 대놓고 드러낼 줄이야.’
첫 대화부터 곤욕이었다.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큰일이야. 요제프가 율리안을 반역죄로 집어넣었다는 건 뭔가 확실한 증거가 있단 뜻이고, 그건 곧 그 아이의 능력 자체를 알아차렸단 뜻과 일통하니. 무언가 방법을 세우는 게 맞지. 그렇지 않나?”
그는 이번에도 그녀의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혼자 뒷짐 지고 창밖을 응시하다가 말을 이었을 뿐이었다.
“대관식 날 요제프 왕자를 죽여줘야겠어. 후작의 그 비밀스러운…… 흑마법으로 말이지.”
그녀를 돌아보는 그 두 눈이 뱀처럼 번뜩였다.
마리엘라는 시키지 않았는데 자문자답하며 꿍꿍이를 드러내는 교황의 모습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녀가 리덴부르크가의 하녀일 때, 라산 사냥터에서 마주쳤던 수많은 귀족들의 거들먹거리는 순간이 떠올랐던 것이다.
자아가 비대한 중년 남성이라는 점에서 그들과 교황은 일통하는 점이 많았다.
한 가지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라산 사냥터를 오고 갔던 귀족들은 별 볼 일 없는 고작해야 평민 두셋을 죽일 수 있는 권력을 지닌 반면에 눈앞의 이 남자는 일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정신적 가치를 들먹이며 권력과 재물을 탐하는 자들을 낮잡아 보곤 한다. 하지만 권력과 재물이야말로 사람이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의 전부였다. 똑같은 말이라도 바레뎃샤의 교황이 하는 것과 가르트 남작이 하는 것의 위엄이 다르듯이.
그러니 교황의 말에 마리엘라의 손과 발이 벌벌 떨리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다.
마리엘라는 긴장감에 침을 한 번 크게 삼켰다. 그리고 조심스레 교황에게 물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얼마든지.”
“제가 왕성의 하녀였을 적, 율리안은 항상 교단과 편지를 주고받곤 했어요. 그건 다 교황 성하와 주고받았던 건가요?”
교황이 그녀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긴장으로 경직된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그가 피식 웃었다.
“날 떠보는군. 이 상황에 율리안이 말을 전했는지 여부가 궁금한가? 너무 속상해 말게, 그 아이는 내 질문에 단 한마디도 답하지 않았으니. 거센 채찍질 앞에서도 말이야. 후작이 흑마법사인 걸 알게 된 건 다른 루트가 있었어.”
교황이 익살스러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모습은 마치 인간 세계에 헌신한 악마의 형상 같았다.
마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그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파르니의 마녀를 잡은 건 왕실 기사단뿐만이 아니라네. 아무리 율리안이 사건 자체를 무마하려 교단에 힘을 좀 썼다지만 내 손아귀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
그녀는 다른 진실에 집중했다.
마리엘라의 얼굴 위로 혐오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등 뒤의 흉은 당신 짓이었군요.”
“어쩔 수 없었어. 뼛속까지 죄악에 절여진 아이를 어찌 길들였겠나. 쓸데없는 일에 마음 쏟지 말고 중요한 대화나 마저 나눕세. 그래, 내 제안에 대한 대답은?”
“이 정도로 자세히 알아내셨다면 제 대답이 뭔지도 뻔히 아실 텐데요. 저와 왕자 전하의 관계를 아시잖아요.”
교황이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고작 사랑하나 때문에 목숨을 저버리겠다, 이건가? 어리석군그래.”
역시 여자들이란.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만 들리게 작게 덧붙이며 혀를 찼다.
똑똑.
그가 더 무언가를 말하려 할 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왔습니다.”
“벌써? 빠르군.”
교황이 살짝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는 그녀를 더 설득시키는 대신, 돌려보내는 쪽을 선택했다.
“다음에 다시 보지.”
마리엘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그녀의 눈에 검은 망토를 뒤집어 쓴 여자가 보였다. 망토를 너무 푹 눌러쓴 바람에 여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리엘라가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려 할 때, 등 뒤에서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장담하는데, 그땐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제발 살려만 달라고 빌게 될 걸세.”
저주처럼 끔찍한 말이었다.
마리엘라는 망토를 쓴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을 포기하고, 재빨리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 * *
마리엘라가 떠난 서쪽 별관.
망토를 쓴 여자가 요제프의 처소로 들어갔다.
교황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여자에게 물었다.
“그래, 결정을 내렸나 보군. 이곳까지 온 것을 보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은데 내 추측이 맞나?”
“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망토를 벗었다.
마리엘라가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여자의 정체는 데이지 이브노말이었다.
* * *
어느 초저녁, 데이지는 시종의 은밀한 부름을 받고 교황을 만나러 갔다.
“이브노말 남작가의 둘째 딸, 데이지 이브노말이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반갑네. 여기에 좀 앉게.”
그녀는 인사를 건넨 후 그의 맞은편 쇼파에 앉았다. 데이지의 얼굴 위로 긴장감과 불편한 기색이 떠돌아다녔다.
“저…… 외람된 말씀이지만 도대체 저를 왜 부르셨는지…….”
“작은 담소라도 나눌까 싶어서 불렀네.”
“아, 네…….”
데이지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테이블 밑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뿐이었다.
교황 로베르토 가르뎅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요즘 형제, 자매들이 고향에서 아주 말썽이라던데. 왕자비의 시녀가 된 그대를 믿고 지나친 사치를 부리고 있다고 들었네.”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데이지가 겁을 먹어 몸을 움츠리자, 교황이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책망하려는 게 아니야. 도움을 주고자 해서 왔네.”
“예?”
그가 뒤에 있는 시종에게 손짓을 했다.
시종이 들고 있던 주머니 하나와 손바닥만한 보석함 하나를 데이지에게 건넸다.
“왕자비의 시녀가 되었으니 그럴듯한 드레스와 보석을 더 구비해도 모자를 텐데, 그대의 친정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있으니 말이야.”
데이지는 얼결에 그것들을 받았다.
그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교황을 바라보자, 그가 어서 그것을 열어 보라는 손짓을 했다.
열어보니, 벨벳으로 만든 주머니에는 금화가, 보석함에는 번쩍이는 다이아몬드로 만든 목걸이, 귀걸이 세트가 있었다.
데이지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이게 다 뭐죠?”
교황은 옆집 아저씨처럼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그대를 위한 선물이야. 요즘 아가씨들은 사치스러운 보석과 드레스에 혈안이던데, 그대는 그런 게 하나 없더군. 마음에 걸려 따로 준비했지.”
그는 속으로 데이지를 낮잡아봤다.
‘여자들은 저런 사치품에 사족을 못 쓰지. 부나방처럼 말이야.’
데이지는 번쩍이는 금화와 장신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솔직히 탐이 났다. 하지만 이것을 받은 이후의 일이 겁이 났다.
그녀는 슬그머니 그것들을 교황 쪽으로 밀어 넣었다.
“신경 써 주시는 마음은 감사드리지만, 죄송합니다. 이런 것을 이유도 없이 받을 수는 없어요.”
일순 인자하기만 했던 그의 얼굴 위로 섬뜩함이 맴돌았다.
“이유도 없이 주는 것은 아닐세.”
“예?”
데이지가 놀란 눈을 했다.
“내가 요구하는 것은 별 것 없네. 왕자비의 곁에서 내 눈과 귀가 되어주게.”
그녀는 단박에 난색을 표했다.
“아무리 그래도 왕자비 전하를 배신할 수는…….”
“그대가 감시해야 할 것은 마리안 데르샤바크가 아닐세.”
“……?”
“마리엘라 코부르덴이지. 그 사악한 마녀가 왕자비를 유혹하게 내버려 두어선 안 되니까.”
충격적인 발언에 데이지의 사고가 멈추었다. 그녀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혼란스러웠다.
“도,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 바레뎃샤의 주적이 뭔지 아나?”
교황 로베르토 가르뎅이 착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데이지가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쯧. 교황이 혀를 한 번 찼다. 데이지를 바라보는 눈빛 속에서 묘한 경멸과 무시가 담겨 있었다. 끝까지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결국 그가 직접 답을 말해 주었다.
“흑마법사. 흔히들 말하는 마녀일세.”
* * *
다음날 오후였다.
마리엘라는 룩센투크의 정원에서 비서관인 필립 슈스터 백작과 함께 걸었다.
많고 많은 응접실과 서재들을 놔두고 왜 이곳에서 대화를 나누느냐 하면은 슈스터 백작의 독특한 관심사 때문이었다.
“슈스터 백작. 저번에 말한 그 일은…….”
“잠시만요, 어깨 위에 사마귀가!”
마리엘라가 서두를 꺼내려 할 때, 슈스터 백작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는 마리엘라의 어깨 위에 있던 사마귀를 제 손으로 옮기더니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붉은 낫 사마귀군요. 마른 솔잎만 먹고 살아 이 근방엔 잘 안 보이는 종인데!”
마리엘라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살살 저었다.
‘요제프가 왜 그를 신용하는지 알겠어. 정말 두 발 달린 인간에겐 관심이 없군.’
그의 욕망을 건드리려면 최소 여섯 개의 발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징그러운 것에 관심이 많으시네요.”
“곤충은 우리의 친구죠! 그들이 없으면 어찌 열매를 맺…….”
확실히 적의 손에 휘둘릴 리 없는 대쪽 같은 성향은 좋으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곤충과 관련된 일이라면 말이 너무 많아진다는 점이었다. 대화가 길어질 기미가 보이면 바로 정색하며 끊어내야 했다. 바로 지금처럼.
“저번에 말씀 드린 것은 어찌 되었는지요.”
다소 무례한 대화법임에도 슈스터 백작은 기분 상한 기색 없이 대꾸했다.
“지하 감옥에 갇힌 율리안과 파르니의 마녀 말인가요? 걱정 마세요. 부탁 받은 대로 잘 처리하고 있으…….”
슈스터 백작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저 멀리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코부르덴 후작님!”
고개를 돌려 살피니 시종 둘이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왕자비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저희와 같이 가셔야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대화를 끝마치고 곧바로 가겠습니다.”
마리엘라의 말을 들은 기사 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들은 굳은 얼굴로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이건 부탁이 아닙니다.”
그제야 마리엘라는 무언가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 * *
마리엘라는 기사들을 따라 응접실로 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교황과 함께 있는 마리안을 보며 어떻게 된 일인지를 금세 파악했다.
서늘한 분위기.
기사 둘이 그들의 앞에 그녀를 꿇어 앉혔다.
“오늘 널 부른 것은 직접 확인할 것이 있어서야.”
머리 위로 마리안의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엘라는 냉철함을 연기하는 마리안의 턱이 달달 떨리고 있음을 인지했다.
“……네가 내 어머니를 죽였어?”
지난 십 년간 마리엘라가 깊이 두려워하며 간절히 오지 않길 바랐던 순간이 지금 당도했다.
마리엘라는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다, 이내 대답하는 것 자체를 포기해 버렸다. 그 어떤 변명도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마리안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평소에는 또박또박 반박하던 마리엘라가 아무 대답이 없자, 마리안이 분노했다. 두 눈의 실핏줄이 터질 정도였다. 마리안은 눈물이 맺힌 그렁그렁한 눈으로 한 단어, 한 단어를 짓씹듯이 뱉었다.
“지금 나는, 네가, 내 어머니를 죽인 마녀가 맞냐고 묻는 거야.”
“…….”
마리엘라는 끝까지 대답이 없었다.
* * *
마리엘라는 마리안의 명으로 룩센투크의 지하 감옥이 아닌, 북쪽의 탑 꼭대기에 갇혔다. 그곳은 과거 마리안이 마녀로 몰렸을 때, 유폐되었던 장소였다. 그녀가 흑마법을 써 탈출하지 못하게 교황이 마리안에게 하얀 돌을 빌려주었다.
상황을 알게 된 슈스터 백작이 급히 그녀를 구하려 애를 썼다. 그러나 이제 막 권력을 잡기 시작한 백작이 왕자비의 명에 불복종할 수는 없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가 꼬리를 말고 물러섰다.
그녀가 북쪽 탑에 갇히게 된 첫날.
교황이 직접 그녀를 보러 왔다. 그는 꼴좋다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왕자비가 마음을 바꿀 것이라 생각하지 말게. 난 사람을 휘두르기 정말 좋은 위치에 있고, 그것은 왕자비의 시녀조차도 흔들리게 하더군.”
그제야 마리엘라는 그녀가 그의 제안을 거절했을 때, 그가 자신만만해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날 본 망토를 뒤집어 쓴 여자의 정체가 데이지라는 것도.
“데이지를 회유했군요.”
“보석에 껌벅 죽던데.”
교황이 엄지와 검지를 말아 보이며 씨익 웃었다.
마리엘라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아직도 마음이 바뀌지 않았나? 이래서 여자들이란. 사랑 아님 사치에 목숨을 건다니까. 그것이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일러줘도 말일세.”
“…….”
마리엘라는 고개를 숙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 위로 처연함이 내비쳤다. 아무래도 많이 지친 상태인 것 같았다.
교황은 그 순간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많이 약해졌다 판단한 그가 선심 쓰는 투로 말했다.
“그럼 내 친절을 베풀어주지. 그렇게 요제프를 향한 사랑이 극심해 포기할 수 없다면 그렇게 하게. 그는 소중한 데르샤바크의 마지막 혈통이니 후세를 위해 지켜줄 필요가 있지.”
너무 좋은 제안에 마리엘라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교황이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조건을 덧붙였다.
“그 대신, 마리안 왕자비를 죽이게. 시간은 예정대로 대관식 날.”
마리엘라의 두 눈동자가 떨렸다.
“왕자비를 죽이는 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직접적으로는 없지. 하지만 간접적으로는 이용해 먹을거리가 무궁무진하게 많다네. 예를 들면 대관식을 없었던 일로 만들고, 베르단 정계를 엉망으로 헤집어 놓을 시간을 벌 수도 있고, 요제프 왕자에게 씌인 마녀의 저주 때문에 그녀가 죽은 거라고 소문을 낼 수도 있지. 어떤 백성이 저주 받은 왕을 원하겠나. 분위기는 서서히 기울 거고, 우리 바레뎃샤에 충성을 보이는 귀족이 왕이 될 거야.”
마리엘라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보이자, 교황이 작게 혀를 찼다. 그리고 마지막 기회라는 듯 두 가지 선택지를 내주었다.
“물론 원래 계획대로 왕자를 죽여도 되네. 왕자든 왕자비든 대관식에 마녀의 저주로 죽는 모습만 보여주면 돼. 내 목적은 베르단의 정권을 잡는 거지, 특정인에 대한 사사로운 악감정이 아니니.”
“…….”
“어떻게 하겠나? 평생을 받들어 모셨지만, 그대를 죽이려 하는 옛 주인과 사랑하는 남자. 둘 중 누굴 죽일지는 후작의 선택이네.”
“……둘 다 거부한다면?”
그가 어깨를 으쓱 해 보이며 답했다.
“그럼 그대가 죽어야지 뭐 별수 있겠나.”
* * *
마리엘라가 북쪽 탑에서 지낸 지 이틀이 되던 날 새벽이었다.
남들은 다 잠자리에 든 아주 늦은 새벽이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 위에 앉아 멍하니 창밖만 보고 있는데 갑자기 철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마리안이 마리엘라를 보러 온 것이었다. 그녀의 등 뒤로 같이 따라온 데이지가 보였다.
마리안은 열린 문 사이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화가 난 건지, 슬픈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마리엘라 역시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으므로 가만히 있었다.
조금의 시간 후에 마리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입으로 정확히 듣고 싶어서 왔어. 진짜야?”
“…….”
“네가 정말, 우리 엄마를 죽였어?”
마리엘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그녀를 외면했다. 그러자 마리안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마리안은 마리엘라의 손을 잡고 그녀의 허벅지에 뺨을 기댔다.
“난 네 말만 믿어. 네 입에서 나오는 말만 믿을 거야. 그러니 마리엘라, 한 마디만 뱉어. 아니라고, 제발 그렇게 말해줘.”
절규와도 같은 애원에 마리엘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여기서 흔들리면 안 된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끝까지 마리안을 외면했다.
“……정황이 그렇게 잡혔는데 여기서 부정한다고 의심이 그리 쉽게 가라앉을까요? 의심은 불꽃과 같아요. 한 번 불씨가 일면 모든 것을 태워버리기 전까진 결코 멈추지 않죠. 결백이 증명되기 전까지 긍정도 부정도 않겠어요.”
“나는 너밖에 없어. 정말 너밖에 없단 말이야. 그런데 네가, 네가 이렇게…….”
마리엘라의 치맛자락이 마리안의 눈물로 젖어갔다.
마리엘라는 차갑게 마리안을 밀어내려던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실패의 원인은 그녀가 마리안의 눈물을 못 본 척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에 있었다.
마리엘라가 손을 뻗어 마리안의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문가에서 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데이지를 한 번 쳐다보았다.
‘교황이 심어 놓은 첩자가 한둘이 아닐 거야.’
그녀는 진실을 말하는 것 대신 다정한 말로 마리안을 달래는 방법을 선택했다.
“아가씨. 14년 전, 아가씨께서 절 살리기 위하여 채찍을 맞았던 순간을 기억하세요?”
“대충 기억은 나지만…….”
마리안이 웅얼거리는 투로 답했다. 현재 그녀는 눈물을 그친 상태였지만, 아직 목소리에 울음기가 남아 있었다
마리엘라는 손가락으로 계속 마리안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녀가 따듯하고 부드러워 안정감이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모습은 아이를 토닥이는 어머니나, 손자에게 옛 이야기를 해 주는 할머니를 연상케 했다.
“아가씨는 날 일곱 번 살린 거예요. 그날 나는 아가씨를 일곱 번 지키기로 맹세했어요. 그러니 이것 하나만 기억하세요. 마리엘라 호반은 복수를 잊지 않지만, 동시에 은혜도 잊지 않아요.”
“지금 넌…… 마리엘라 코부르덴이잖아.”
하여튼, 뭐 하나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훌쩍이며 토를 다는 마리안의 모습에 마리엘라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가씨 앞에서 전 언제나 마리엘라 호반이랍니다. 아가씨가 왕자비가 되셔도 제겐 영원한 아가씨인 것처럼요.”
* * *
그로부터 사흘이 더 지났다.
이제 내일이면 정죄 의식을 끝낸 요제프가 돌아온다.
대관식은 요제프가 돌아오자마자 바로 시작하기로 예정되어있었다.
깊은 밤, 교황이 그녀가 감금되어 있는 북쪽 탑을 방문했다. 율리안이 감금되어 있는 지하 감옥과는 다르게, 북쪽 탑은 교황의 방문이 용이했다.
“이제 내 말을 들을 마음이 들었나?”
마리엘라는 그가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
그가 그녀에게 그런 것이 가당키나 하냐는 듯 코웃음을 지었다.
마리엘라는 동요하지 않고 제 요구사항을 말했다.
“내일 대관식에서 죽게 되는 게 누구인지 묻지 마세요. 마음 같아서는…… 다 없던 일로 하고 싶으니까.”
스스로가 선택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견디기 어려워서, 입 밖에 내고 싶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