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15. 장막은 거두어지고 (2) (17/21)

<공금/갠소> 우리끼리만 보기!!! by S.R

리덴부르크가의 수상한 아가씨 5권

15. 장막은 거두어지고 (2)

마리안 왕자비와 그녀의 두 시녀들이 인질로 잡혀있는 아렐 후작의 저택은 반구 형태의 방어막으로 빙 둘러싸여 있었다.

그 주변을 검은 늑대 기사단이 감시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별 효용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저택 정면에서 조금 빗겨나간 곳에는 천막으로 만든 임시 초소들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크고, 가장 저택에 근접한 곳에 위치한 초소는 율리안을 위한 것이었다.

“그대들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예!”

저택 주변을 한 바퀴 빙 둘러보고 온 율리안이 미하엘만 데리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초소에는 전략을 짜기 위한 커다란 테이블 하나와 의자들, 휴식을 위한 간이침대가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저택의 평면도가 놓여 있었는데, 적들이 있을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 몇 군데가 표시되어 있었다.

율리안은 그 앞으로 가 평면도를 쓱 훑었다. 미하엘 역시 그의 근처로 다가가 힐끔힐끔 지도를 훔쳐보았다.

그때, 돌연 율리안이 그를 호명했다.

“미하엘 슈리츠.”

순간 놀란 미하엘이 크게 움찔했다. 그는 이내 마음을 진정시키고 진지한 태도로 호명에 답했다.

“예.”

“그대는 그대의 연인을 얼마나 사랑하나.”

예상치 못한 질문에 미하엘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그는 지금 율리안의 저 질문의 목적이 왕자비와 사랑에 빠진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비난인지, 이번 일에 대한 그의 각오를 재확인하려는 것인지 판가름할 수가 없었다.

미하엘이 대답을 머뭇거리자, 율리안이 친절히 질문의 범위를 좁혀주었다.

“그녀를 위해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는지 묻는 거다.”

“……심장을, 아니, 제가 평생 동안 믿고 지켜왔던 기사의 정신과 가문의 영광보다 더 깊게 사랑합니다.”

율리안은 말없이 미하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주황색에 가까운 붉은 곱슬머리와 진한 주근깨. 어리숙한 외양과 다르게 꽤 다부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제 연인을 지켜내겠다는 젊은이의 당돌함이 그 안에 깃들어 있다.

율리안은 그 굳건한 마음이 불편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미하엘의 마음이 일시적인 젊은이의 치기였으면 하고 바랐다. 그래서 일부러 미하엘의 마음을 뒤흔들 질문을 했다.

“잠깐의 설렘 뒤에 끝없는 나락이 펼쳐져 있을 거다. 그걸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대 혼자만의 나락이라고 해도?”

“예?”

미하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율리안이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다소 냉소적인 태도였다.

“만약 그대의 연인에게 그대만큼의 각오가 없다면 어쩔 것인가? 상대는 그저 가볍게 즐기려는 마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나. 아니, 질문의 결을 조금 틀지. 상대가 그러한 생각으로 그대를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깊게 파고드는 율리안의 질문에 미하엘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눈동자를 아래로 깔고 잠시 율리안의 말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자신의 생각을 하나하나 읊었다.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접힐 마음이라면 그녀를 만나기로 마음먹지도 않았습니다. 그것까지도 안고 갈 겁니다. 누군가에게 스쳐 지나가는 순간의 쾌락으로 남아도, 저에게는 계속해서 찬란할 영원의 기억이 될 테니까요.”

율리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영원이라…… 그건 그대의 설명만 들으면 지옥과 다름없는데.”

“생각하기 나름이겠죠. 저에겐 그곳이 천국일 것입니다.”

미하엘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런가.”

율리안은 저 확신의 근거가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미하엘 스스로의 마음임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씁쓸한 감정이 밀려 들어왔다.

율리안은 여태까지 어린아이처럼 도망친 것이 누구였나 생각해보았다.

“그래, 그렇게…… 될 수도 있겠군.”

율리안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가 다시 미하엘의 이름을 불렀다.

“미하엘 슈리츠.”

“예.”

“그대의 각오를 알겠다. 그렇다면 이제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라.”

“맡겨만 주십시오.”

쾅!

율리안이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아 땅에 박아 넣었다. 그 움직임에 따라 검을 중심으로 검은 기운이 펑 터졌다. 그 광경을 처음 본 미하엘의 등 뒤가 쭈뼛 섰다.

율리안이 고개를 돌려 미하엘을 응시했다.

“지금부터 나는 이 결계를 깬다. 검기를 쓸 건데 문제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해. 아무도 방문하지 못하게 했으면 하는데, 내 말을 잘 알아들었나?”

미하엘이 각을 세워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목숨을 다하겠습니다!”

목소리에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 * *

아렐 후작과의 모종의 거래가 끝난 후, 요제프는 푸른 늑대 기사단원들을 이끌고 후작의 저택을 방문했다.

얼굴과 머리카락에 끈적하게 묻었던 죄의 흔적을 말끔하게 씻어낸 정갈한 차림이었다.

“율리안은?”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친우인 율리안이었다. 곁에 있던 검은 늑대 기사단장이 바로 답변했다.

“방어막을 파할 준비 중입니다. 같이 온 조무래기 기사의 말에 따르면, 아무도 초소에 들이지 말라고 했다더군요.”

검은 늑대 기사단장의 대답 속에는 그러니 귀찮게 그를 찾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왕성 안에서 벌어졌던 참극을 모르는 검은 늑대 기사단원들은 내심 그를 얕잡아 보고 있었다. 요제프에게까지 훤히 내비치는 오만함이었지만, 그는 그런 것을 꼬투리 잡지 않았다. 옆에서 발끈해 검을 뽑으려는 푸른 늑대 기사단원을 손짓으로 말리기까지 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군신 간의 위계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리해야지.”

그는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요제프의 시선이 반구 형태의 은색 방어막과, 그 막 사이로 흐릿하게 내비치는 건물의 형태에 닿았다.

“건물을 좀 둘러보고 싶은데.”

“위험합니다. 아직 저들의 정체가 뭔지도 모르고…….”

옆에 있던 검은 늑대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이 요제프를 말렸다. 그러나 요제프의 고집은 꺾일 줄 몰랐다.

“알아, 하나 내 아내가 저 안에 있는데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이 친구와 함께 주변을 둘러보고만 오겠네.”

그가 간절한 표정을 자아냈다. 그 눈빛에 기사들이 흔들렸다.

한참 후에, 검은 늑대 기사단장이 옅은 한숨을 쉬며 요제프의 부탁을 승낙했다.

“원하신다면 그리하시지요.”

“고맙네. 내 오늘의 배려를 잊지 않도록 하지.”

요제프가 감사의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떠났다.

그 뒷모습을 보며 부기사단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 단장님. 뭐 이상한 거 못 느끼셨습니까?”

“이상한 것?”

“왕자 전하의 말투나 분위기 같은 것이 조금 달라지지 않았나하는…….”

곧바로 기사단장의 호통이 내려왔다.

“쓸데없는 데 신경 쓸 시간에 방어막을 파훼할 방법이나 찾아! 손 놓고 바이르 공작에게 모든 일을 전임하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나!”

그가 부 기사단장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며칠의 시간이 더 지난 후였다.

* * *

요제프는 호위 기사 하나만을 대동하고 저택 담장을 따라 걸었다.

그의 걸음이 멈춰선 곳은 인적이 드문 저택의 측면.

요제프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이곳을 감시하는 기사는 네, 다섯밖에 없었다.

요제프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쯤이 좋겠군.”

“예?”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호위기사가 되물었다. 요제프는 그 말에 대꾸해주는 대신, 방어막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파지직.

정전기가 이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옅은 스파크가 튀었다. 호위기사가 화들짝 놀라 그를 만류했다.

“전하, 위험합니다.”

“그래, 확실해 그래 보여.”

요제프는 따끔따끔한 감각이 남아 있는 제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 요제프의 손길을 따라 방어막이 살짝 열렸다. 그의 호위 기사는 깜짝 놀라 알아차리지 못했겠지만, 그의 눈에는 선명히 보였다.

‘아렐 후작의 말이 사실이었군.’

요제프는 제 품 안에 있는 마법 양피지를 떠올렸다. 파르니의 마녀들이 협상을 위해 왕성으로 보낸 마법 양피지였다. 아렐 후작은 바로 그것이 방어막을 통과하게 만드는 열쇠라고 말했다. 그가 지닌 마법 양피지에는 파르니의 방어막을 일시적으로 해지시키는 힘이 있었다.

‘문제는 이게 일인용이라는 것이지만.’

그런 작은 일에 불평 불만할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든 마리엘라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뭐, 어쩌겠나.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해 발 동동 구르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요제프는 괜히 어깨를 으쓱했다.

스파크를 본 검은 늑대 기사단이 요제프에게 다가와 물었다.

“전하, 방금 전 그게 무슨…….”

“마침 잘 왔어.”

요제프가 경계 태세로 서 있는 검은 늑대 기사단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생각 정리를 하고 싶으니 저들을 치워주게.”

다행히 기사들은 별 토를 달지 않고 그의 명을 따랐다.

이제 이곳에는 요제프의 호위 기사와 요제프, 단 둘만 남았다.

고작 사람 넷 정도가 치워진 것뿐인 데도, 휑한 분위기가 돌았다.

“흠.”

코앞에 반투명한 방어막을 두고, 요제프는 생각에 잠겼다.

아렐 후작이 넘긴 정보에 따르면, 마녀들은 처음부터 요제프와 단 둘이 만나 원하는 것을 직접 얻어낼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걸 위해 세드릭 아렐이 왕성으로 잠입한 것이었다.

아렐 후작의 진짜 역할은 요제프를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키고, 판단력을 흐리게 한 뒤, 혼자 마녀들을 만나러 가게 등 떠미는 일이었다.

“만지지 마십시오. 너무 위험합니다.”

요제프가 너무 마법 방어막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 같자, 그의 호위 기사가 경계했다.

요제프는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호위 기사를 안심시켰다.

“걱정도 참. 내가 같은 곳에서 두 번 넘어지는 것 봤나?”

그리고는 더는 자신을 방해 못하도록 호위 기사에게 명했다.

“그대도 좀 물러서게. 나는 생각에 잠길 때 누가 시야에 걸리면 거슬려 하는 사람이라.”

호위 기사가 열 걸음 정도 물러섰다.

요제프가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더 뒤로.”

기사는 열 걸음을 더 뒷걸음질했다.

“이 정도면 됩니까.”

“그래, 아주 좋아.”

요제프는 팔짱을 끼고 방어막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중간에 한 번 뒤를 돌아 호위 기사가 아직도 멀찍이 떨어져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좋아, 그럼 가 볼까.”

그는 심호흡을 했고, 곧 방어막 안으로 쑥 들어갔다.

파직, 파지직-.

방어막에 닿은 그의 신체 여기저기에서 작은 불꽃들이 튀었다.

“전하!”

요제프의 돌발 행동에 놀란 그의 호위기사가 방어막을 향해 달려들었다.

탕!

그러나 경쾌한 소리와 함께 뒤로 나자빠졌을 뿐이었다.

“그대는 못 들어와. 이건 딱 한 사람만 들여보내 주는 열쇠거든.”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기사들을 불러오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요제프가 혀를 찼다.

“소란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자네 한 명만 데리고 왔는데 그러면 되나.”

“전하의 안전보다 우선인 것은 없습니다.”

호위 기사는 끝까지 우직했다. 요제프는 그런 기사의 고지식함을 아꼈지만, 오늘만큼은 그의 충성심이 달갑지 않았다.

요제프가 고개를 저으며 호위 기사를 만류했다.

“그대의 충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야. 하나 내게 기회를 주게.”

요제프가 힘없이 웃어 보이며 말을 덧붙였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

“…….”

고집이 강한 요제프의 호위 기사가 요제프의 명을 따르기로 한 것은 그의 말이 호위 기사를 설득시켜서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가 아군을 불러 올 준비가 되어 있던 호위 기사의 두 발을 묶어낸 것은 요제프가 마지막에 내보인 씁쓸한 미소였다.

그의 미소 속에 삶에 대한 허탈함과 사랑에 대한 애절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것은 마리 아가씨를 향한 제이 도련님의 마음이었다.

너무 꽁꽁 숨겨 둔 탓에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던.

* * *

요제프는 창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방어막을 통과하자마자 마녀들이 우르르 몰려들리라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저택은 무섭도록 고요했다.

그가 파르니의 마녀들과 마주치게 된 것은 1층 중앙 홀에서였다.

파르니의 가주는 어린 마녀들을 이끌고 여유롭게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 꼬맹이가 이렇게 장성하다니. 정말 세월이 무섭단 말이야.”

마치 옆집 소년을 대하는 듯한 친근한 태도에 요제프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마주했던 적이 있었던가?”

“아주 많았지. 난 네가 어미젖을 먹는 갓난아기 때부터 보아왔단다. 세례식에도 참석했지. 그런데 들은 것과 완전 딴판이구나. 소문엔 대신들의 입김에 놀아나는 멍청한 놈으로 자라났다던데.”

과연 마녀들을 이끄는 가주다운 눈썰미였다. 한두 번 말을 섞은 것만으로 요제프의 성미를 단박에 파악했다.

“바로 그 소문을 내기 위해 지난 십년간 부단히 노력했으니까.”

요제프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기분이 이상하군. 내 어미를 죽인 마녀들이 내 어린 시절을 들먹인다는 게.”

가주의 뒤에 있던 시에라가 발끈해 소리쳤다.

“먼저 배반한 것은 왕가였어! 이 비열하고 역겨운……!”

가주가 손을 뻗어 그녀를 만류했다.

“쓸데없는 언쟁은 벌이지 말자꾸나, 시에라. 열 내지 말고, 어서 ‘그걸’ 가지고 오렴.”

씩씩 대며 요제프를 노려보던 시에라가 곧 가주의 말에 순종했다.

“……네, 가주님.”

시에라는 마녀 몇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가주의 말에 이상함을 발견한 요제프가 한쪽 눈썹을 까딱 올렸다.

“그것?”

“진실의 조각. 그게 뭔지는 말 안 해도 알지?”

진실의 조각이 무엇인지는 요제프도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아버지가 자신을 배신한 신하들에게 사용하는 것을 몇 번 보았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정신을 조종하는 마법이 주 능력이었던 랏 데르시는 정치가들에게 아주 쓸모 있는 물건들을 아주 많이 만들어 냈고, 그것은 그중 가장 높게 쳐 주는 물품이었다.

거대한 마법 방어막이 마녀들을 지키고 있다는 데에서 오는 안도감 때문일까. 파르니의 가주는 거리낄 것 없다는 듯 모든 것을 읊어 주었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가 그렇게 신뢰 깊은 사이는 아니잖니. 이런 상황에서 상대의 말을 믿으려면 마법의 힘을 빌릴 수밖에.”

“내가 이곳에 직접 온 것은 위험에 빠진 연인을 구하기 위해서지, 파르니의 마녀들에게 멍청히 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걸 좀 기억해주었으면 하는데.”

그가 정확히 그들의 가문을 언급하자, 가주의 등 뒤에 있던 앳되어 보이는 외모의 여자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파르니의 가주는 오히려 그것을 반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우리의 정체를 알아냈구나. 역시 안나의 자식이군.”

요제프는 그녀의 입에서 언급되는 어머니의 이름이 거북했다. 그는 가주의 목적이 그의 감정을 뒤흔들어 자신들에게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걸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그의 죽은 어머니와 관련해 설전을 벌이는 대신, 원하는 바를 명확히 요구했다.

“마리엘라 코부르덴을 저택 밖으로 내보내 주기만 한다면, 그대들이 원하는 걸 모두 내어주지. 괜찮으면 그녀와 함께 갇혔던 운 나쁜 여인 두 명도 함께.”

파르니의 가주가 놀리듯 말했다.

“우리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

“하얀 돌의 제조법을 찾고 있다던데, 아닌가?”

그가 정확한 답을 가지고 오자, 파르니의 가주가 얼굴을 굳혔다. 그녀는 눈을 감고 분노를 꾹꾹 눌렀다.

“……그리너드가 우릴 배신했군.”

“흔한 일이지.”

이번에는 요제프가 그녀를 놀리듯 말했다.

“그걸 알고서도 이곳에 왔니? 우린 비밀을 알아낸 뒤 널 죽일 거야. 하나를 알았으면 둘을 예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위 기사 하나 없이 이곳에 왔다는 게 믿기지 않는구나.”

“당장 저 밖에 늑대 두 마리가 있어. 율리안도 이 결계를 깨트리기 위해 합류했다.”

파르니의 가주가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었다.

“아, 그 교황의 애완견 말이니? 잘 해보라고 하렴. 고작 소드마스터 하나로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그를 어린아이 다루듯 했다.

요제프는 마녀에게 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들과의 대화에 선을 그었다.

“자꾸 말이 요지 밖으로 도는군. 내 요구사항은 하나야. 당장 마리엘라를 밖으로 보내.”

그 말을 들은 파르니의 가주가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그때, 가주의 뒤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정말 눈물겨운 사랑이네. 죽게 생겼다는 걸 알면서도 초지일관 태연해.”

시에라였다.

시에라는 왼손에 단검을 쥐고 있었다. 햇빛에 비친 단검의 날카로운 부분이 반짝, 빛났다.

“아깝지 않아? 그 결연한 모습을 사랑하는 연인에게 직접 보여줘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냥 개죽음일 뿐이잖아.”

시에라가 한쪽 입술만 비죽 올려 웃었다.

명백한 비아냥에 요제프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한곳에 쏠려 있었다.

바로 시에라가 오른손으로 붙들고 있는 여자.

마리엘라 코부르덴.

“마리.”

요제프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리엘라는 현재 마법으로 만든 반투명한 푸른 밧줄로 꽁꽁 묶인 상태였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어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했다.

요제프가 그녀가 있는 쪽으로 걸어 나갔다. 계단을 올라 마리엘라를 코앞에 두었을 때, 시에라가 손을 휘저어 마법을 썼다. 거대한 힘에 의해 요제프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사랑의 포옹은 뒤로 미뤄둬. 그 전에 우리끼리 해야 할 일이 있잖아?”

시에라 주변의 마녀들이 진실이 조각이 든 약병과 주사기를 꺼내 들었다. 마녀들은 약병에 물을 집어넣어 약을 용해시킨 후, 주사기로 그것을 빨아들였다.

손이 남는 다른 마녀들이 요제프의 등을 밀었다. 요제프는 순순히 그들이 이끄는 대로 향했다.

“알지? 거짓을 말하면 심장이 멎는 것보다 더한 괴로움이 인다는 걸.”

“하얀돌의 제조법과 주요 재료들을 말해.”

“원하는 것만 준다면 이 아가씨는 순순히 돌려보내 주겠다.”

마녀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말했다.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시에라였다. 시에라는 마리엘라의 목에 단검을 가져다 댔다. 마리엘라의 목에서 피가 한 방울 흘러내렸다.

“단, 거짓을 말하면 이 여자의 목을 베어 죽일 거야.”

요제프는 표정을 굳혔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마녀들과, 위험에 처한 마리엘라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돌연 피식 웃었다.

“좋아, 진실의 조각인지, 조종인지 하는 걸로 내 말에서 거짓을 찾아 봐.”

그는 제 손으로 상의를 뜯어냈다.

“단, 이것과 그것을 분간할 수 있다면 말이야.”

“!”

옷 속에 감춰있었던 요제프의 비밀을 알게 된 마녀들이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심장 부근을 중심으로 푸른 반점이 얼룩덜룩했다. 그 표식은 요제프가 마녀의 저주로 죽어가는 신세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가 비릿하게 웃으며 자신의 심장을 가리켰다.

“하얀 돌의 비밀을 알고 싶다고 했지? 이것이 그 답이다.”

파르니의 가주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언가 추측되는 것이 있는 듯했다.

“설마…… 안식이……?”

요제프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축복이 대를 타고 내려오고 있지. 저주로 치환되어서.”

2차 성마전쟁 당시, 바욘 3세가 구해온 하얀 돌은 그의 간절한 기도에 감동한 신이 내려준 축복의 돌이 아니었다.

궁지에 몰린 바욘 3세가 안식의 축복을 받은 아버지의 시신을 이용하여 마녀들의 공격을 막아내다가 발견하게 된 우연의 산물이었을 뿐이다.

바욘 2세 이후, 안식의 축복을 직접적으로 쓸 수 있는 왕실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몸에서 꺼낸 심장은 안식의 축복에 비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왕가는 그 사실을 쉬쉬 했지만, 이제 더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하얀 돌은 데르샤바크 피를 이은 사람들의 심장이다.”

데르샤바크의 혈통은 오늘 이 자리에서 끊길 예정이니까.

요제프가 마녀들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왔다. 위협적인 눈빛에 마녀들이 움찔하며 몸을 뒤로 물렀다.

“하얀 돌을 영원히 없애고 싶은가? 답은 간단해. 마리 아가씨를 향한 칼로 내 심장을 겨누게. 나를 죽이고, 내 심장을 파괴해."

그가 자신의 가슴에서 가장 푸른 곳, 심장이 위치한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마지막 남은 하얀 돌의 재료다.”

* * *

율리안 폰 바이르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아홉 살 이전의 삶에 몰려있었다.

그의 부모님은 역사 깊은 바이르 공작가의 가주와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흑마법사 가문 랏 데르시의 마법을 쓸 수 없는 장녀 바네사 랏 데르시였다.

두 남녀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한 번쯤 뒤 돌게 할 만큼 수려한 외모의 소유자였고, 성격 역시 번듯하고 자애로웠다.

가문 간의 결합을 위해 시작된 결혼 생활이 진실한 사랑으로 번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마음을 주고받은 끝에 율리안이 태어났다.

율리안이 태어나 아홉 살이 될 때 까지, 바이르 성에는 웃음소리만 가득했다.

봄바람처럼 온화한 분위기만 풍기던 바이르 공작가가 현재의 으스스한 고성으로 몰락하게 된 것은 외부의 급격히 변한 정세와 관련이 있었다. 3차 성마전쟁이 그들의 가족에게 불행을 몰고 온 것이다.

대대로 데르샤바크를 지켜왔던 바이르 공작가의 가주와 4대 흑마법사 가문인 랏 데르시 가주의 친언니인 바네사. 두 사람의 사랑은 평화 위에서만 존재 할 수 있던 짧은 단꿈이었다.

율리안이 열 살 생일을 맞이하기 직전의 어느 늦겨울이었다.

남들 몰래 자신의 동생을 만나러 간 어머니는 그 길로 실종되었다.

어머니가 실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이르 공작가 근처 영지가 접전 지역이 되었다. 아버지는 그를 지키기 위하여 눈물을 삼키며 아내의 먼 혈연 지간일 마녀들을 향해 칼을 뽑았다.

하얀 돌을 지닌 성기사단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바이르 령은 지옥이 되었다. 율리안은 그 당시의 상황 대부분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유난히 선명했던 기억은 단 하나였다.

아버지가 전사하고 바이르 기사단들이 몰살당한 그 당시의 일들. 율리안은 시종의 도움을 받아 바이르 성 가장 깊숙한 곳으로 대피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벌벌 떨며 숨죽이고 있던 그때, 그를 세상 밖으로 꺼낸 목소리가 있었다.

“어린애 유해가 안 보인다 했더니, 여기 숨어 있었군. 이것 참 불쌍해서 어쩌나. 명문 바이르가의 명맥을 잇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현재 그의 양 아버지이자, 교단 바레뎃샤를 이끄는 모두의 아버지, 교황 로베르토 가르뎅이었다.

율리안은 그 순간의 모든 것들을 기억한다.

인기척에 쿵쾅댔던 심장 박동 소리, 헛구역질을 하게 만드는 피 냄새, 갑자기 쏟아진 빛에 흐려졌던 시야와, 그 뒤에 두 눈에 잡힌 교황 로베르트 가르뎅의 환한 미소까지.

‘쓸데없는 생각.’

초소 안. 율리안이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이마 위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는 현재 검 손잡이를 잡고 그 안에 마력을 집어넣고 있었다.

땅 위에 일자로 박힌 그의 검안에는 그가 직접 공수해온 나무 지팡이가 숨겨져 있다.

율리안은 검을 마법 보조도구 삼아 흑마법을 쓰는 중이었다.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대놓고 마법을 쓴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행위였지만, 그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파르니의 마녀들이 내일 밤 아홉시에 마리엘라를 처형하겠다고 선언했다.

하루 안에 파르니의 마법 방어막을 부수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율리안은 아렐 후작의 저택을 둘러보았을 때 보았던, 은색의 방어막을 떠올려보았다.

그 정도로 거대한 방어막을 하루가 넘는 시간 동안 유지해냈다는 것은, 방어막을 만들어내고 유지시키는 마녀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최소 열댓 명의 마녀들이 저 안에 있을 것이다.

통상적으로 여자 흑마법사는 남자 흑마법사보다 월등한 실력을 자랑한다. 게다가 율리안은 혼자고, 파르니의 마녀들은 열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레뎃샤에게 도움을 요청할 상황도 되지 못했다.

하얀 돌을 지닌 교황은 타국에 있을뿐더러, 이런 저런 상황들로 급히 귀국할 사정이 안 되는데다가 교단이 잘못 끼어들 시에는 멀쩡히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마리엘라와 그 일행들이 모조리 죽게 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불리한 상황에서도 율리안은 한 가닥 희망을 가졌다.

‘해 볼 만해. 상대는 파르니의 마녀들이니까.’

모든 마법에는 조금씩 약점이 존재했다. 4대 흑마법사 가문에도 약점은 존재했다.

불은 물을, 물은 흙을, 흙은 나무를, 나무는 금속을, 금속은 다시 불을 이길 수 없다는 동양의 오행 개념처럼, 그들의 약점은 각 흑마법사 가문끼리 서로의 꼬리를 물고 물어 다시 원점에 다다르는 형식이었다.

가장 강력한 흑마법사 가문이었던 한 가문은 물을 다루는 씨몽 가문의 마법에 약했고, 치료 마법 전문이지만, 공격 모드일 때 불치병과 관련된 저주를 퍼붓기로 유명했던 르베르크는 축복으로 유명했던 가르시아 가문에게 약했다.

율리안의 외가인 랏 데르시는 육체 강화 마법에 통달했던 벨로프 가문에게 항상 지곤 했다.

그리고 파르니는…….

‘랏 데르시에 약하지. 모든 것을 막는다는 그들의 방어막이 딱 하나 걸러내지 못하는 것이 바로 랏 데르시의 정신 마법이니까.’

율리안은 처음으로 자신의 핏줄에 감사함을 느꼈다.

요제프의 저주를 풀기 위해, 많은 가문의 마법 주문을 익혀왔지만 역시 가장 손에 익은 것은 외가인 랏 데르시의 정신 마법이었다.

작금의 상황에 딱 맞는 능력.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쓰임 당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까지 여겨졌다.

그는 랏 데르시의 정신 마법을 통해, 방어막을 담당하고 있는 마녀들을 모조리 잠재울 계획을 세웠다.

방어막은 깨질 것이고, 마녀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기사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잘만 하면 기사들이 마녀 한둘 정도는 해치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마법은 대단한 능력이었지만 그것을 쓰는 마녀들은 완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때때로 육체적 공격에 치명상을 입곤 했다.

안식의 축복과 하얀 돌이 없었던 시절의 성기사들은 그런 식으로 마녀들과 맞서 싸웠다.

율리안은 다시 검 끝으로 마력을 흘려보내는 것에 집중했다. 주문을 중얼거리는 그의 머릿속으로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지쳐 보였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화관 만들기를 좋아했던 어머니, 그가 죽인 사람들의 배신감 가득한 얼굴, 그의 양 아버지의 인자한 미소…….

그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그의 친우 요제프였다.

아카데미 재학 시절, 어둠에 예민했던 그가 발작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다. 당시 같은 방을 썼던 요제프는 아무렇지 않게 다른 방에 있던 초들을 모조리 가지고 와서는 불을 켰다. 그리고 율리안이 민망해하지 않도록 자신의 속 깊은 곳에 있던 상처를 공유했다. 저주로 살이 썩어 죽어가던 그의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구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알면서도 교단의 눈치 보기에 급급해 외면했던 그의 아버지. 모든 상황을 종용했던 교단 바레뎃샤의 위선까지.

오늘의 선택이 지나면, 더는 그를 위해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아리게 했다.

‘잡다한 것들은 생각하지 마.’

율리안이 스스로를 다잡았다.

‘난 더 이상 균형을 이루지 않아. 나는…….’

그는 자신을 새롭게 정의하려 했다. 그런데 무엇이라 칭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율리안의 마음속이 크게 요동쳤다.

지금 이 행동이 새로운 가치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 아니라, 흔들리는 감정을 주체 못 한 일탈에 불과할까 봐 두려웠다.

그것으로 인해 잃어야 하는 것이 명예나 금전 따위가 아닌, 목숨만큼 소중한 친구 요제프의 안위라는 것도.

바로 그때, 미하엘의 말이 떠올랐다.

‘……심장을, 아니, 제가 평생 동안 믿고 지켜왔던 기사의 정신과 가문의 영광보다 더 깊게 사랑합니다.’

그 말 하나가 그가 반평생을 아집처럼 짊어지고 왔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게 했다.

‘그래. 나는 그저 평범한 남자일 뿐이다.’

율리안은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스스로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의 내리깐 눈이 번쩍 뜨였다.

‘……사랑하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 걸 각오가 되어 있는!’

그와 동시에 율리안의 몸에서 검은 마력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들은 모두 땅에 굳게 박힌 그의 검으로 옮겨갔다.

검 끝을 타고 땅 아래로 스며든 검은 마력.

검은색 나무 덩굴이나 수백 마리 뱀의 그림자 같은 것이 바닥을 타고 기어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마력은 마법이 되어 아렐 후작의 저택을 향해 뻗어 나갔다.

방어막을 뚫고 그 안으로 들어가 저택의 바닥을 샅샅이 훑었다.

방어 마법의 시전자를 찾아내겠다는 듯이.

그리고 마침내,

콰앙!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방어막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 * *

율리안이 마법을 쓰기 대략 십 분 전.

요제프는 마녀들과 대치 중이었다.

마녀들의 손아귀에는 마리엘라가 잡혀 있었다. 그들은 마리엘라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상태였다.

요제프는 그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부러 도발했다.

“뭘 망설이지? 어서 그 검을 내 심장에 박아. 심장이 굳어 하얀 돌이 되기 전에, 잘게 토막 내고 불에 태워 버려. 그럼 그대들이 두려워 할 것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네.”

시에라가 신경질적으로 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어서 진실의 조각을 주입해!”

“아, 그런 문제였던가? 그럼 어쩔 수 없군. 절차에 맞춰서 진실을 규명해주지.”

조급해 보이는 그 행동에 요제프가 여유롭게 팔을 내밀었다.

능청스럽게 굴었지만 사실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 초조한 것은 그였다. 최악의 경우 마리엘라와 함께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녀들이 그의 팔을 잡고 주사기를 이용해 진실의 조각을 주입했다. 요제프는 작은 실벌레 같은 것이 팔뚝을 타고 올라오는 감각을 느꼈다.

시에라가 턱을 치켜들고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이제 더는 그 세 치 혀를 얄궂게 놀릴 수 없을 거다! 하얀 돌의 진짜 제조법과 그것을 만들기 위한 재료들을 말해.”

요제프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찬찬히 아까 전 했던 말을 반복했다.

“데르샤바크 혈통을 지닌 자의 심장을 꺼내 피를 제거하고 그늘진 곳에 며칠 잘 말리면 된다네. 효용과 아무 상관없는 제조 방법이지만 보통은 그렇게 해. 안 그럼 색이 검붉어 지거든. 바레뎃샤는 예전부터 하얀색을 좋아했지.”

요제프가 자신들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한 시에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저놈이 아직도……! 그래, 이 여자가 죽는 꼴을 보고 싶다니 소원대로 해주지.”

시에라가 마리엘라의 목에 단검을 더 가까이 들이댔다. 아직까지는 진짜로 죽일 생각은 아닌 것 같았으나, 한두 번만 더 도발하면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마리엘라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한 것은 파르니의 가주였다. 파르니의 가주는 우아하고 기품있는 목소리로 시에라를 저지했다.

“시에라, 인질을 함부로 다루지 마라. 저건 쓸모 있는 패야. 진실의 조각이 작용할 때까지 기다려 보자꾸나.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최대 일 분이었지?”

그리고 옆에 있던 어린 소녀를 향해 질문했다.

“네.”

“그래, 지금 얼마나 지났지?”

자그마한 모래시계를 들고 있던 마녀가 대답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아! 지금 막 일 분이 지났습니다.”

마녀들의 시선이 요제프에게로 향했다.

저주를 받아 죽어가고 있는 탓에 그의 가슴팍은 이미 푸른색 반점으로 얼룩덜룩했다. 때문에 푸른 반점으로 진실 여부를 가를 수는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진실의 조각에는 또 다른 효과를 동반했다.

바로 심장이 멎는 듯한 통증.

아무리 고통을 견디는 훈련을 거친 기사라 할지라도, 심장이 멎는 통증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들은 요제프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모습을 예상했다. 거짓말을 한 대가로 마리엘라의 신체 부위를 잘라 압박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요제프는 쌩쌩했다. 그는 멀쩡히 서서 능청스러운 태도로 어깨를 으쓱했다.

“어떤가, 이제 날 죽일 결심이 섰나?”

시에라는 놀란 표정으로 파르니의 가주를 응시했다. 무슨 신호가 오고 갔던 것은 아니고, 그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가주는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이게 우리에게 좋은 거야, 나쁜 거야……?”

가주의 등 뒤에서 어린 마녀들이 저들끼리 쑥덕거렸다. 폭탄선언으로 그들의 평정심을 흐트러트리는 일에 성공한 요제프가 다시 한번 같은 것을 요구했다.

“확인이 끝났으면 마리엘라에게 건 속박 마법을 풀고 안전히 저택 밖으로 내보내 줬으면 해. 그 대가로 내 목숨을 내어 주겠다.”

그 동안 모르는 척했지만, 사실 요제프는 눈앞의 중년 여성을 기억하고 있었다. 파르니의 가주는 본디 온화한 사람으로, 쓸데없는 살생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파르니의 가풍이기도 했다. 요제프는 파르니가 방어마법을 유달리 발전시킨 것은 그들의 타고난 성품이 선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쥐여 준다면 굳이 마리엘라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그의 예상을 철저히 빗겨나간 것이었다.

“그럴 수는 없지. 여기서 코부르덴 후작을 풀어주면 바로 널 구하려 할 텐데? 이해해주렴, 아무것도 모르는 햇병아리라도 마법을 쓸 줄 아는 자를 적으로 두기는 부담스러워. 귀찮은 일이 많이 생기거든.”

파르니의 가주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죽음을 앞둔 요제프를 다독이듯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렴. 하얀 돌을 모두 제거한 후에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문제를 해결할 거란다.”

결국 모든 것은 요제프의 죽음 이후 결정하겠다는 뜻이었다.

사실 그들이 지금 여기서 마리엘라 먼저 죽이고 요제프를 죽인다고 해도 하얀 돌이 없는 그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세였다.

‘에드먼드 파칼을 더 빨리 죽일걸.’

요하네스 왕의 심장은 교단이 가져갔고, 에드먼드 파칼의 심장이 굳어 하얀돌이 되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교단을 끌어들였어야 했나. 아냐, 하얀돌이 없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야.’

교단은 하얀돌을 무조건 교황에게 맡긴다.

하얀돌의 보관 방식은 교황마다 달랐다. 이번 대 교황 로베르토의 경우엔 그것들을 모조리 들고 다닌다고 알고 있다. 아마 요하네스의 심장 역시 교단의 신관들을 통해 교황에게로 전해졌을 터였다. 베르단 내에 여분의 하얀돌이 없다는 뜻이다.

결국 그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죽을 운명이었는지도 모르지.’

그가 허심탄회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랑하는 여인도 구하지 못하고 개죽음 당하게 생겼다니. 내 신세도 참.”

“생각 없이 뛰어든 결과지. 다시 한번 물으마. 이건 그냥 내 단순한 궁금증에서 나온 질문이야. 하나, 제대로 대답해 준다면 네 연인의 처우를 좀 더 개선해주마.”

요제프는 질문해보라는 표정으로 파르니의 가주를 응시했다. 가주의 부드러운 눈매 속에서 날카로운 눈동자가 번뜩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음에도 아무 준비 없이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이냐?”

요제프는 그 질문이 가당찮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눈앞에서 자신의 연인이 죽어 가는데 제 살겠다고 머리 굴리는 머저리 같은 놈도 있나?”

“그렇군.”

파르니의 가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납득했다는 태도였다.

“진실 된 마음이 여기까지 느껴지는구나. 드디어 데르샤바크 가문에 사람다운 놈이 태어났군. 아주 바람직한 결과야. 그 끝이 이렇게 되어서 안타깝지만……. 그럼, 잘 가길.”

요제프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건넨 파르니의 가주가 시에라를 향해 턱짓했다. 신호를 받은 시에라가 품 안에 가두고 인질로 썼던 마리엘라를 바깥쪽으로 밀쳤다.

마리엘라는 마법으로 만든 밧줄로 온 몸이 꽁꽁 묶인 상태였기 때문에 던져진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요제프의 몸이 반사적으로 마리엘라를 향해 돌아갔지만, 그는 그녀를 일으켜 세울 수 없었다.

“이날만을 기다렸다!”

시에라가 요제프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

마리엘라는 눈을 크게 뜨며 요제프의 이름을 불렀지만, 모든 소리는 재갈에 막혔다.

단검이 요제프의 가슴을 푹 찌른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앙!

굉음과 함께 저택 문이 열렸다.

동시에 바닥을 타고 바깥에서부터 저택 안으로 들어오는 검은 음영이 보였다.

수백, 수천의 검은 뱀들이 말도 안 되는 빠른 속도로 돌진하는 모양새였다.

“꺄아악!”

순간적으로 그림자와 현실을 구분 못한 어린 마녀들이 제 발밑을 스쳐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에 발을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요제프도 어리둥절해하고 있던 그 순간에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것은 파르니의 가주였다.

파르니의 가주는 목에 걸고 다니던 목걸이를 끊어내, 그것을 허공에 띄웠다. 목걸이에 걸린 펜던트는 금으로 만든 창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것에 마력을 주입하자, 그것은 금세 성인 여성의 키만큼 커졌다. 가주는 그것을 뒤집어 잡고, 창끝으로 바닥에 선을 그었다.

가주의 황금 창이 뱀 그림자를 끊어냈다.

바깥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검은 그림자들이 가주가 그어놓은 선을 넘지 못하고 그 앞에 쌓였다.

그림자가 중첩되어 까마득한 어둠을 만들어 냈다.

방금 가주가 쓴 마법은 파르니의 방어 마법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마법이 랏 데르시의 정신 마법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녀의 선조들이 다른 가문에게서 훔쳐 비밀리에 가주들에게만 전수한 주문이었다.

가문의 마법이 아니었기에, 이 마법을 사용하려면 도구들이 필요했다. 가주가 늘 지니고 있던 황금 창이 바로 그것이다.

가주가 등 뒤의 마녀들에게 명령했다.

“랏 데르시의 정신 마법이야! 시에라, 아이들을 이끌고 서재로 가라. 가서 방어막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고 서재의 아이들을 지켜! 비상시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지?”

“예! 다들 이쪽으로.”

시에라가 발 빠르게 마녀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이제 이 공간에는 가슴에 칼이 찔린 요제프와 묶인 채로 쓰러져 일어날 수 없는 마리엘라, 그리고 홀로 랏 데르시의 마법에 맞서는 파르니의 가주만 남았다.

가주가 창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 잡았다. 그리고 창끝으로 바닥을 굴렀다. 선을 타고 검붉은 화염이 타올랐다.

가주의 등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황금 창을 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

요제프는 물끄러미 파르니의 가주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의 머릿속에 많은 것들이 떠다녔다.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뱀 같은 것이 언제까지 유지될까.

파르니의 가주는 이 상황을 얼마나 버틸 수 있지?

가주가 죽어도 마녀들이 살아 있으니 방어막은 유지되겠군.

이 인질극의 끝은 몰살이 될 것인가.

대부분, 답이 쉽게 도출되지 않는 질문이었다. 시간이 있다면 찬찬히 풀어나갈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 시간이 많지 않았다.

요제프는 손끝으로 가슴을 쓱 훑었다. 붉은 피가 그의 손을 흠뻑 적셨다.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마리엘라를 보았다.

단기간에 너무 많은 피가 빠져나간 탓에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가 흐렸지만, 자신을 향해 울먹이는 마리엘라의 얼굴은 또렷했다.

온몸이 꽁꽁 묶인 채로 바닥에 쓰러진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고 싶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요제프는 다시 파르니의 가주를 보았다.

그는 느리고 절뚝거리는 발걸음으로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팍, 푸욱!

제 심장에 꽂혔던 검을 뽑아 파르니 가주의 등에 꽂았다. 검을 뽑은 그 순간, 그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이…… 비겁한……!”

파르니의 가주가 뒤를 돌아 자신을 공격한 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저주를 걸 것 같은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파르니의 가주는 나이 오십이 넘은 중년 여성이었고, 동시에 육체적 단련이라고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칼에 찔리는 충격을 견뎌낼 몸 상태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녀의 표정이 분노에서 고통으로 뒤바뀌었다.

파르니의 가주는 하얗게 질린 손으로 황금 창을 꽉 쥐었다. 아마도 그것을 지지대 삼아 버텨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지나지 않았다.

스스스슥-

창이 다시 열쇠만 한 크기로 작아졌다. 동시에 가주의 몸이 앞으로 넘어갔다.

요제프는 자꾸만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파르니의 가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쓰러져 있는 가주의 모습이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머리가 제 기능을 못하게 된 것이다.

그는 몇 번 비틀거리다가 스르륵 무릎을 꿇었다.

그의 왼쪽 뺨이 바닥에 닿기까지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깜박. 깜박.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바닥에 엎어진 그에게 보이는 것은 스르륵- 소리와 함께 바닥 속을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뿐이었다.

이상하게도 비식비식 헛웃음이 났다.

‘내 사촌형님이 이런 기분이었겠군 그래.’

그는 몇 시간 전에 자신이 죽인 에드먼드 파칼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 * *

요제프의 공격으로 파르니의 가주는 전투 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그녀가 랏 데르시의 마법을 막아 내지 못하게 되자, 율리안이 만들어낸 검은 그림자가 활개를 쳤다.

그것들은 떼를 지어 다니는 정어리 떼처럼,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저택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니다가 서재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곳의 마녀들을 발견하자마자 바닥에서 튀어 나왔다.

거대한 어둠은 악몽으로 구현되어서 그들의 정신세계에 파고들었다.

시에라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 마녀였지만, 랏 데르시의 정신 마법에 대항할 정도의 능력자는 아니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정신을 잃은 마녀들을 데리고 도망가는 것이었다.

시에라는 방어막을 동그란 구 형태로 변환시킨 뒤, 그 안에 마녀들을 집어넣어 달아났다.

마법진에 마력을 집어넣을 마녀들이 사라지자, 저택을 둘러싼 거대한 방어막이 순식간에 해제되었다.

기사들이 아렐 후작의 저택에 진입하였다. 그들은 곧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 중년의 여성과, 이 나라의 왕자를 발견했다.

요제프는 마리엘라의 품에 안겨있었다.

애초에 마리엘라의 몸을 묶었던 밧줄은 파르니의 마녀들이 마법으로 만든 것이었다. 파르니의 방어막은 랏 데르시의 정신마법을 제외한 대부분의 마법을 막아 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마리엘라가 마법을 쓰지 못하게 방어막을 뒤집어 그녀를 가둬 놓은 것이었다.

마법 시전자가 없으니 마법은 자연스레 해제되었다. 몸이 자유로워진 마리엘라는 요제프에게 달려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는 그의 겉옷을 벗겨 붕대처럼 만들어 지혈했고, 얼마 되지 않아 문을 열고 달려오는 기사들을 마주했다.

“왕자 전하!”

기사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크게 당혹스러워했다.

그녀는 침착하게 기사들을 지휘했다.

“심장을 비껴 맞은 것 같습니다. 출혈이 심하지만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에요. 어서 들것을 가지고 전하를 모셔가세요.”

그녀의 명에 따라 요제프가 실려 나갔다.

상황이 일단락되자, 기사 하나가 조심스레 말했다.

“저어, 후작께서는…….”

같이 올라가 보라는 뜻이었다.

마리엘라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먼저 가세요. 마리안 전하가 안전한지 확인 후에 따라가겠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요제프의 약점이 마리안이 아닌 마리엘라라는 사실이 밝혀진 직후, 파르니의 마녀들은 마리안에게 아무 관심도 두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가장 안전한 것은 바깥에서 고군분투했을 율리안도, 마녀라고 밝힌 마리엘라도 아닌 모두의 관심 밖 존재였던 마리안과 데이지였다. 때문에 마리안의 안위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녀가 이곳에 남고자 하는 것은 생각 정리를 위해서다.

기사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아렐 후작의 저택. 마리엘라가 복도를 비적비적 걸어 나갔다. 그녀는 1층 복도 끝에 서서 창밖을 응시했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충격으로 머릿속이 새하얘 질 정도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진심과 진실들이 휘몰아쳤고, 그 덕에 그녀는 인생의 갈피를 잃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요제프와 율리안이 확실한 적처럼 굴 때가 더 편했다.

그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답안이 정해져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그녀는 요제프가 스스럼없이 심장을 내놓았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우습네. 스스로의 연심도 주체 못하는 주제에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쥐고 흔들려 하다니.’

그리고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조소를 보냈다.

바로 그 때였다.

“마리엘라.”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고, 울 것 같은 표정을 한 율리안을 마주했다.

“바이르 공……!”

마리엘라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율리안이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갈비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강한 완력이었다. 그녀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그를 밀쳤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 번도.”

그녀의 머리 바로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단 한 번도 되돌아본 적 없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 절절했다.

마리엘라는 그를 벗어나려는 행동을 멈추었다.

고해 같은 고백이 이어졌다.

“내게 과거란 어쩔 수 없는 일들의 총체였고, 다시 되돌아가 봤자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었어. 주어진 건 언제나 최악과 차악뿐. 난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왔다고 굳건히 믿었다. 때문에 후회해 본 적이 없었어. 요제프와 함께했던 그의 수많은 수하들을 베어가면서도.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요제프를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음에도……. 나는 요제프를 지켜야 했고, 그것은 그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

“과거를 그리워 해 보긴 했어도, 과거의 선택을 바꾸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아니, 그냥 어떤 선택이 두렵거나 망설여졌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말끝을 흐린 율리안이 그녀의 어깨 위로 고개를 묻었다. 그녀는 그의 몸이 조금씩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그 모든 걸 부정하고 싶어졌어. 내가 살아왔던 모든 순간, 모든 방식……그것들이 너를 해칠 줄 알았더라면. 네가, 이토록 위험에 처하게 될 줄 알았으면…….”

목소리에 물기가 서려 있었다.

율리안은 결국 말을 잇지 못했다.

한 참의 시간 후, 그가 그녀를 안았던 손을 풀었다. 그제야 율리안의 품에서 벗어난 마리엘라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소리 없이 뚝뚝 눈물을 흘리는 청년이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만인에게 감춰왔던 그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율리안의 청초하고 맑은 두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 마리엘라의 몸이 굳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이 맞을지 판단 해내지 못했다.

우는 그를 달래야 하는지, 모르는 척 뒤를 돌아야 하는지, 싸늘하게 내쳐야 하는지.

그녀가 아무것도 못하고 경직되어만 있을 때, 율리안이 먼저 움직였다.

“마리엘라.”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손을 뻗어 그녀의 양 뺨을 감쌌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마리엘라가 그를 저지하려 했다.

“잠깐, 공…….”

그러나 한발 늦었다.

율리안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로 안착했다.

입을 벌리게 하거나 혀를 섞으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그저 살포시 입술을 얹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무사히 살아 있음을 꼭 안은 품과 입술 위 온기로 확인한다는 듯이.

꽃잎이 떨어지는 것 같은 부드러운 입맞춤이 길게 이어졌다.

지금 밀어내면 조용히 물러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는 가만히 그의 입술을 받았다.

마음이 무너져 눈물을 펑펑 흘리는 남자의 진심이 가득 담긴 입맞춤을 어찌 거부한단 말인가.

* * *

다음날 아침이었다.

마리엘라는 율리안의 침대에서 눈을 떴다.

현재 그녀가 발 디디고 있는 곳은 바이르 공작의 성 내부에 위치한 율리안의 침실이었다.

‘여기까지 올 생각은 없었는데…….’

마리엘라는 옆에서 잠이 든 율리안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홀로 생각했다.

흔히 남녀 사이에 밤을 보냈다 하면 상상하는 끈적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나약해진 율리안을 품에 안아 다독이기만 했을 뿐이다.

아렐 후작의 저택에서 입맞춤이 끝난 직후, 율리안은 그녀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도 그것을 풀 의지가 없었고.

자연스레 그의 마차를 타고 가다 보니 도착한 곳이 이곳이었을 뿐이었다.

부끄러워선지, 두려워선지, 그도 아님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건지. 바이르 공작가에 도달하기까지 율리안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어도 대답해 줄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마리엘라도 아무 질문하지 않고 그가 가는 대로 따랐다.

시종과 하녀들의 인사말을 통해 이곳이 율리안의 본가인 바이르 성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속으로 살짝 놀랐으나 겉으로는 아무 티도 내지 않았다.

마리엘라는 율리안을 침대에 눕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하루 일이 많았으니 푹 쉬세요. 저는 다른 곳에서 휴식을 취하겠습니다.”

그 순간, 이유모를 침묵을 고수하던 율리안이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돌아갈 건가? ……룩센투크로?”

다른 방에서 쉬겠다는 뜻을 잘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마리엘라가 손으로 그의 처소를 가리키며 답했다.

“여기서 밤을 지새울 수는 없지 않을까요?”

율리안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으나 자존심이나 상황 때문에 미처 뱉지 못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표정이었다.

그녀가 살포시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 순간이었다. 등 돌린 그녀의 발목을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가 붙잡았다.

“……가지 마.”

“……?”

마리엘라는 뒤를 돌았고,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율리안을 보았다.

“나와 함께 있어줘.”

그 말로는 그녀를 설득할 수 없다 여겼는지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오늘…… 하루만.”

마리엘라는 그가 말하는 ‘함께’가 음흉한 목적을 제거한, 위로의 의미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악몽을 꾼 어린아이가 부모의 품을 찾듯, 율리안은 그저 두려움을 해소할 수 있는 온기를 원할 뿐이었다.

그동안 온 힘을 다해서 경계했던 바이르 공작은 누구인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좋아요, 오늘 밤만.”

그렇게 해서 마리엘라는 율리안과 한 침대를 쓰게 되었다.

* * *

가운을 꿰어 입은 마리엘라는 혼자 바이르 성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율리안이 단잠에서 깰 때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계획이었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니 넓은 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는 역대 공작 부부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초상화 아래에는 화가의 서명과 함께 누구를 그린 것인지 적혀 있었다.

그녀는 오래된 순서부터 차근차근 그림을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흥미를 가지고 그림 앞에 서서 인물을 자세히 살펴보던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대충 훑어보고 지나갔다.

바이르 가문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명문가였고, 그 역사만큼 많은 가주를 가졌다. 너무 많은 인물과 그림들에 집중력과 관심이 흩어진 것이다. 딴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녀는 율리안의 성에서 요제프의 걱정을 했다.

‘파르니의 마녀들이 검을 다룰 줄 몰라서 다행이었어. 만약 조금이라도 더 오른쪽으로 찔렀다면 치명상을 입었을 거야. 몇 분 되지 않아 급사했을지도 모르지.’

전대 공작 부부의 초상화 앞으로 갔을 때 즈음에는 거의 그림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율리안과 인사를 한 뒤에 룩센투크로 돌아가야지. 가서 요제프의 상태도 확인하고, 이번 사태도 해결하…….’

무심코 고개를 올려 눈앞의 초상화를 바라보던 그녀의 걸음이 멈추었다.

“이게, 이게 어떻게…….”

마리엘라의 손끝이 벌벌 떨려왔다. 그녀는 뒤통수를 한 대 크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넋 놓고 서서 초상화 속 공작 부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바라본 것은 여자 쪽이었다.

전대 바이르 공작 부인이자 율리안의 어머니인 바네사 바이르.

랏 데르시 가주의 마법 능력이 없던 친언니.

율리안이 지난밤에 해준 말에 따르면 그녀는 3차 성마전쟁이 발생할 즈음에 홀연히 사라졌었다고 했다.

리덴부르크령과 바이르령은 지리적 거리감이 상당했다. 바네사는 3차 성마전쟁 때 실종된 인물이기 때문에 리덴부르크 시골에서 나고 자란 마리엘라로서는 그녀와 마주했던 적이 없었어야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거대한 바이르 공작가 내부.

초상화 속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은 그녀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저 여자 때문에 그녀의 인생이 뒤바뀌었으니까.

창백한 뺨의 여자.

백작부인의 협박을 받고 아버지가 죽인 여자가 저 그림 속에 있다.

마리엘라의 머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작년, 왕성 지하 감옥에서 리덴부르크 백작과 창백한 뺨의 여자를 두고 이야기했을 때, 그가 뭐라고 했더라.’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자신이 했던 말과 그가 했던 말을 되새겨보았다.

“그렇게 사랑한다면서 어째서 초상화 한 장도 남겨두시지 않았죠? 저는 기회가 될 때마다 백작님의 서재와 방을 뒤졌어요. 그곳에는 연서 한 장도 없더군요. 정말 그 여자를 그렇게 많이 사랑하신 게 맞나요.”

“그러나 마리엘라, 그건 나만을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굳이 너한테 이런 말을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위선 같긴 하지만. 나에겐 그게 최선이었어. 너는 이걸 알아들을지 모르지만.”

그리고 반년이 넘은 지금에야 깨달았다.

마리엘라는 몸을 돌려 뛰쳐나갔다.

그녀가 다급히 향한 곳은 율리안이 있는 침실이었다. 마리엘라는 막 잠에서 깬 율리안에게 아침 인사도 건네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요구했다.

“마차를 준비해주세요.”

“예?”

“리덴부르크 백작가로 내려가야겠어요.”

“도대체 무슨 연유인지 설명을….”

율리안이 당황해 눈만 깜박였다.

마리엘라는 설명할 시간도, 의지도 없다는 듯 단호하고 차갑게 요구했다.

“지금 당장.”

마리엘라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가 리덴부르크가에 진실을 묻어놓고 떠났듯이 리덴부르크가도 그녀에게 숨겨둔 것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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