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장막은 거두어지고 (1) (16/21)

14. 장막은 거두어지고 (1)

율리안 폰 바이르가 나고 자란 바이르 성은 수도에서 마차를 타고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바이르 성은 왕성 룩센투크 만큼이나 웅장하고 거대했지만 가문의 명성에 비해 투박한 외양을 하고 있었는데, 공작가 사람들의 미적 감각이 떨어져서나, 성을 화려하게 건축할만한 재물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고 그저 지어졌던 당시의 건축기술이 지금에 비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바이르 공작가는 역사 깊은 명문가였다.

그들의 선조가 지은 바이르 성은 지금은 멸망한 제국 렝바토의 흥망성쇠를 모두 지켜보았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그런 바이르 성의 가장 깊은 곳.

어둡고, 축축하며 물곰팡이 냄새가 물씬 풍겨 나오는 음침한 공간에서 율리안 폰 바이르는 초 하나만을 켜 놓은 채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그것은 흑마법사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수련법이었다.

4대 흑마법사 가문 중, 가장 강대했고, 강력한 마법을 뽐냈던 한 가문은 동양에서 핍박을 피해 넘어온 마녀 집단이었다. 그들은 터를 옮긴 지금까지도 선조들의 수련 방식을 그대로 이어나갔고, 그것은 다른 흑마법사 가문에게까지 퍼져나갔다.

율리안은 이 방식을 그의 어머니에게 배웠다. 그의 어머니는 마녀는 아니었지만, 일평생을 흑마법사 가문의 장녀로 살아왔던 자로써, 마법과 관련된 모든 것에 통달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배움을 속으로 새기며 수련에 집중했다. 어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의 온몸에는 땀이 흥건했다.

그가 전처럼 호흡을 주체 못해 쌕쌕거리거나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지 않는 것은, 어둠보다 더 두려운 것이 생긴 탓이었다.

마리엘라에 대한 그 자신의 마음.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는 통제되지 않는 스스로의 감정에 혼란과 혐오를 동시에 느꼈다.

어찌 수백, 수천의 목숨을 어깨 위에 올려 두고 코앞에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마음을 빼앗긴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처참했던 유년 시절과 비극적이었던 혈연의 역사를 떠올리면 더욱더.

‘더 이상 흔들려서는 안 돼. 더 이상은……. 나는 균형을 이루는 자다.’

그는 마음이 무너져 내릴 때마다 스스로에게 되뇌었던 주문을 반복했다.

‘비겁하시네요, 바이르 공작.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못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못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사랑…….’

그러나 그럴수록 마리엘라에 관한 기억은 더더욱 강력해져 그를 뒤흔들었다. 특히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은 그의 머리에 콕 박혀 도통 떠날 줄을 모른다.

그날 밤, 마리엘라가 했던 말은 그를 세상에서 가장 초라하고 비참한 남자로 만들었다. 그 순간 그가 느꼈던 수많은 감정, 교차하고 맞부딪치는 고뇌와 갈등들은 단어와 문장으로 다 설명할 수 없었다.

마리엘라를 잊으려 그녀의 소식이 닿지 않는 공작가까지 왔건만, 여기서마저 그녀 생각에 사로잡힌 스스로가 밉고 어리석어 보였다.

그가 흔들리는 마음을 제대로 부여잡지 못하고 있을 때, 불현듯 과거의 어떤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마음은 물과 같지. 흘려보내렴. 그리움이든, 상처든 뭐든 다.’

그것은 모친의 목소리였다.

바네사 바이르.

봄 햇살같이 따스하고, 겨울 눈 결정체보다 아름다웠던 그의 어머니.

율리안의 행복했던 시절은 모두 그의 어머니와 함께했다.

바네사가 3차 성마전쟁 도중 갑작스레 사라진 이후, 율리안은 물론, 바이르 가문까지 순식간에 몰락해버렸다.

“물…….”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은 그 자세 그대로 율리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안 좋은 기억이 자꾸 생각이 난다는 건, 네가 그것을 흘려보낼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야. 오고 가는 생각을 애써 막지 마렴. 호수에 던진 돌은 영원히 수면 밑에 존재하지마는 강물에 떠나보낸 조각배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기억해.’

어릴 적엔 잔소리라고만 생각했던 모친의 가르침이 이제야 이해가 될 듯 말 듯했다.

율리안이 그 가르침을 이어받아 수련에 박차를 가하려고 할 때였다.

똑똑.

누군가 문밖에서 조심스레 노크를 했다.

“왕성에서 급히 전보가 왔습니다.”

이어 들리는 목소리에 율리안은 눈을 떴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문밖의 방해자에게 한 소리 했다.

“내가 수련 중이라고 말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중한 일이라 명을 어기고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단 들어는 보도록 하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들에게 왕자비가 납치되었답니다.”

나라가 발칵 뒤집힐 소식에 율리안은 덤덤했다. 그는 그저, 확실히 중요한 일이군 따위의 생각을 하며 이 일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해 먹을지 냉철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이어지는 집사의 말에는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녀의 시녀 둘과 함께 말입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당황한 건지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집사를 닦달했다.

“지금 당장 나갈 채비를 하게. 최대한 빨리.”

* * *

마리엘라를 포함한 세 사람은 다시 원래 있던 자리에 갇혔다. 그들이 갇힌 응접실은 아렐 후작의 저택 2층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천장을 높게 지었기 때문에 사실상 다른 건물 3, 4층 정도의 높이였다. 창문이 열려 있다고 쉽게 도망갈 수 있는 상태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마리엘라는 밖에서 걸어 잠근 문에 귀를 대고 얻어 낼 수 있는 정보가 있는지 살폈다. 하녀장으로 위장한 중년의 여인과 다른 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답장은?”

“아직입니다.”

“세드릭 후작은 아직 왕성인가?”

“예. 방금 연락이 왔어요. 아무도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더군요.”

“다행이군.”

“그자를 믿을 수 있을까요?”

“사람은 믿을 필요는 없지만, 그의 간절한 소망은 믿어도 돼. 우리는 원하는 것이 같고, 각자의 욕망을 위해 못할 것이 없지.”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급기야 구둣소리까지 들린다. 마리엘라는 문에서 귀를 떼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마리안과 졸도 직전인 데이지에게 신호를 보냈다.

“왔어요.”

마리안이 굳은 결심을 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엘라는 급히 창가로 달려갔다.

철컥철컥.

밖에서 잠금장치를 해제하는 소리가 들리고, 곧 문이 열렸다.

하녀장의 복장을 한 여인이 그녀를 따르는 젊은 여인 두셋을 이끌고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처음에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는데, 그것은 응접실의 가구 구조가 완전히 뒤바뀌어 있기 때문이었다.

바닥에는 찻잔과 찻주전자였을 것들이 수십 개의 파편이 되어 나뒹굴었고, 소파며 테이블, 의자 따위가 뒤집어지고, 옆으로 기운 채로 어수선하게 놓여 있었다. 비단으로 만든 커튼은 갈기갈기 찢어져 창문을 채 가리지도 못할 만큼 짧아져 있었다.

여자는 잠시 당황하는 듯했다가 곧 인자한 미소를 자아내며 물었다.

“갈아입은 옷은 편안하던가요? 방 상태를 보아하니 그리 평안한 시간은 보내지 못한 듯하지만요.”

아무래도 소문의 왕자비가 소문보다 성깔이 더 장난 아니구나. 하고 가볍게 생각한 것 같았다.

마리안은 여자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질문으로 대화의 흐름을 바꾸었다.

“그대들의 의중을 알고 싶은데.”

그녀에게서 적대감과 분노, 위엄이 적절히 어우러져 드러났다.

그러나 그렇게 질문하는 그녀의 몸이 두려움으로 파르르 떨리고 있다는 것은 등 뒤에 선 데이지와 마리엘라는 알 수 있었다.

가까이에 선 데이지가 마리안의 손을 잡았다.

지금 있는 창가를 사수해야 하는 까닭에 자리를 움직일 수 없었던 마리엘라는 이 자리에 데이지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마리안의 질문에 여자가 픽 웃었다.

“의중이랄 게 뭐 있나요, 그저 전하를 속이려다 실패한 멍청한 악당들일 뿐.”

마리안을 움츠러들게 하는 느긋함.

‘고위 귀족이야. 최소 공, 후작 급.’

마리엘라는 여자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데이지의 온기로 마음을 진정한 마리안이 여자의 말을 날카롭게 받아쳤다.

“속이려면 좀 더 철저했어야지. 우리 발로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은 칭찬할 만하나 그 뒤처리가 애매해.”

“저희는 철저히 준비했습니다. 일이 이렇게까지 꼬인 것은 전부 다 왕자비 전하의 지혜가 깊으신 탓인걸요.”

여자는 무릎을 굽혔다 펴며 경외하는 몸짓을 했다. 겸손하게 마리안을 추켜세우는 그 말이 비아냥과 조롱을 담고 있다는 걸 이곳에 모르는 자는 없었다.

마리안이 어금니를 아득 깨물었다.

긴장으로 굳었던 마리안의 혀가 동면을 끝낸 뱀처럼 깨어나기 시작했다.

“아니. 애초에 그대들은 인질극을 벌일 의향이었잖나. 처음부터 끝까지 우릴 속이는 건 불가능해. 그건 그대들도 잘 알고 있을 거야.”

“우린 아샤칼을 거쳐 이곳으로 왔습니다. 아마 베르단 왕실은 우릴 에드먼드 파칼의 끄나풀 정도로 파악하고 있을 겁니다. 세드릭 아렐은 어쩌다 운 나쁘게 이 일을 뒤집어쓸 뻔한 그리너드의 불쌍한 후작이 될 거고요.”

“그렇다면 이렇게 친절히 내게 그 사실을 고할 이유가 없지. 내가 가서 그대로 고하면 다 끝나는 일 아닌가.”

두 사람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항상 한두 마디만 하면 벌벌 떨던 룩센투크의 이리떼만 상대하던 마리안에게 눈앞의 여자는 처음 맞는 적수였다.

잠시 정적이 일고, 두 여자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서로의 표정을 탐색했다.

마리안이 침묵을 끊고 상대를 도발했다.

“그래, 목적을 이룬 다음엔 어쩔 계획이지?”

“잠자코 있으면 아무 일도 없을 거랍니다, 왕자비 전하.”

“그 말을 믿기엔 너무 많은 것들에 속았는데.”

“너무 겁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린 같은 편을 해하지 않아요. 비열한 누구들과는 달리.”

여자의 눈에서 일순 살기가 감돌았다. 과거 누군가에게 심한 배신을 당한 듯했다.

창가에 선 마리엘라는 마리안의 등 뒤에서 존재감을 감춘 채, 이러한 변화를 하나하나 눈에 넣어 두었다.

그녀의 세심한 관찰과는 별개로 마리안과 중년 여성,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내 생각을 말해 볼까. 그대들에겐 다른 계획이 있어. 그건 아마 나와 관련된 것들이겠지.”

마리안의 말에 여자의 등 뒤에 있던 어린 하녀들이 움찔했다. 그 반응을 캐치해낸 마리안이 신나서 계획에도 없던 말을 떠들어댔다.

“생각해보면 아주 간단해. 나약함과 희망만 버리면 쉽게 도출되는 답이지. 목적을 이루면 우리 셋을 죽일 작정인거지?”

‘아니야.’

하녀 복장을 한 여자들에게 일순 안도의 분위기가 맴돌았다.

‘너무 나갔어.’

마리엘라는 당황한 표정으로 마리안의 등을 응시했다. 그녀를 말리고 싶었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마리엘라는 이 자리에서 해야 하는 일이 있었고,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자리를 벗어나서는 안 되었기에 입술만 깨물 수밖에 없었다.

그 짧은 사이에도 마리안의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우리를 죽이면, 베르단이 가만히 넘어갈 것 같은가? 그대 생각보다 베르단엔 유능한 자들이 많아.”

“과대망상이십니다. 죽일 것이라면 진작 죽였겠지요. 이를테면 저녁에 마셨던 차에 독을 타던가.”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지. 지금 죽으면 인질의 역할을 못하니까.”

“아, 제 말은 왕자비 전하가 아니라…… 그 옆의 두 명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자의 시선이 마리안에게서 데이지와 마리엘라에게로 옮겨갔다. 옆에 있던 데이지가 겁을 잔뜩 집어 먹었다.

마리엘라는 데이지가 마리안을 제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어쩔 수 없지. 너무 이르기는 하다만.’

그녀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한숨을 쉬고 난 후의 마리엘라의 얼굴 표정은 싹 뒤바뀌어있었다.

먹잇감을 채가기 직전의 독수리처럼, 발톱을 한껏 세운 그녀가 목소리를 내어 감춰져 있던 존재감을 드러냈다.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어리석군요.”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 마리엘라에게로 몰렸다.

마리엘라는 부러 비뚜름한 미소를 지은 채로 적들을 자극했다.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마리엘라의 말에 여자가 되물었다.

“무엇을 말이죠?”

“저희를 살려둔 것, 이 방에 방치해 둔 것. 나아가…….”

촤악.

마리엘라는 등 뒤의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미리 만들어둔 밧줄을 창밖으로 던졌다.

그녀가 마리안, 데이지와 함께 방 안의 가구들을 재배치하고, 찻잔과 찻주전자를 산산조각 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밧줄을 만들기 위해 갑작스레 기장이 짧아진 커튼이 수상하게 보이지 않게 만들고, 나아가 그 커튼으로 만들어낸 밧줄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응접실을 어수선하게 꾸며냈던 것이다.

“저희를 인질로 선택한 것까지!”

그녀가 커튼을 이어 묶어 길게 엮어낸 밧줄을 붙잡고 뛰어내렸다.

휘익-.

커튼으로 만든 밧줄과 피부가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그들이 다급하게 만든 밧줄은 저택의 높이에 비해 길이가 부족했다. 준비한 밧줄이 끝을 보이자 그녀가 망설임 없이 뛰어 내렸다.

“윽.”

그 과정에서 발목을 삐끗했지만 고통스러워할 시간이 없었다.

“잡아!”

“예!”

건물 안에서 하인들이 우르르 튀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리엘라는 절뚝거리며 앞으로 내달렸다.

어둠을 피해서, 빛이 나는 곳을 향하여.

* * *

자정에 가까운 늦은 밤이었다.

요제프, 미하엘, 아렐 후작이 함께 집무실에 모여 어떻게 왕자비를 구출할 것인지 논의를 하고 있는데, 벌컥! 하는 소리와 함께 집무실 문이 거세게 열렸다.

세 사람의 고개가 문가를 향했다. 그곳에는 마리엘라에 대한 걱정으로 벌건 눈을 한 율리안이 서 있었다.

요제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율리안을 환영했다.

“드디어 관련 인사가 다 모였군.”

율리안은 집무실 한 칸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미하엘과 아렐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요제프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이 자들은…….”

“한쪽은 내 아내가 갇혀 있는 저택의 본주인 되는 자고, 또 다른 한쪽은 내 아내 되는 자의 영원한 귀염둥이라네.”

요제프가 아렐 후작과 미하엘을 번갈아 가리키며 그에게 소개했다. 미하엘은 ‘영원한 귀염둥이’라는 말에 몸을 움찔거렸다.

율리안은 여전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율리안의 정보망에 저 두 사람이 없었으니까.

요제프는 그들이 왜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그 당위성을 열심히 설명하는 대신, 굴러가는 상황을 공유함으로써 그를 이 모임에 참가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쪽을 택했다.

“쓸데없는 말은 이 정도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납치범들에게 편지가 왔어. 정확히는 이것이 왔지.”

요제프의 손에서 편지의 정체를 확인한 율리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법 양피지였다.

정체도, 목적도 알 수 없는 협박범은 실시간으로 데르샤바크 왕실과 협상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율리안은 바로 진행 상황을 물었다.

“편지 내용은?”

“데르샤바크의 비밀을 밝히라더군.”

요제프가 덤덤하게 답했다.

그 말을 들은 율리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납치의 목적이 미궁으로 빠져 들어갔다.

율리안이 알고 있는 데르샤바크의 비밀은 요제프가 저주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 밖에 없었다.

율리안은 이 비밀을 알게 되면 가장 큰 이득을 취하는 자가 누구인지 홀로 고민해 보다가, 곧, 자신이 이 문제에 관해 너무 근시안적인 시각을 가질 뻔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협상은 심리전이다.

적이 원하는 정보가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율리안은 스스로의 추측을 확정 짓지 않고 당사자에게 되묻는 것을 택했다.

“비밀?”

요제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보충 설명을 했다.

“그래. 정확히 무슨 비밀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지만, 뭐 그건 차차 알아갈 일이지. 마침 너도 왔으니 협상을 시작해 볼까 하는데.”

두 사람은 이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았다.

펜을 집은 요제프가 펜촉에 잉크를 묻혀 마법 양피지에 답장을 보냈다.

요제프 하이젠 데르샤바크입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유감이군요.

인질들은 무사합니까?

요제프가 적어나간 글자들이 양피지에 문신처럼 진하고 뚜렷하게 새겨지더니, 몇 초 되지 않아 휘발되어 날아갔다.

네 사람은 둥그렇게 모여, 빈 양피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중 가장 긴장한 것은 미하엘이었다.

몇 분 되지 않아 양피지 위에 글자가 피어올랐다. 상대방이 답신을 한 것이다.

무사합니다.

요제프는 다시 펜을 들었다.

그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답변은 바로 날아 들어왔다.

저희가 증명해 낼 필요가 있을까요?

참으로 오만하고도 태평하고도, 느긋한 답변이었다.

협상하기에 좋은 상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하.”

요제프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미하엘과 아렐 후작은 안절부절 못하며 서로를 바라보았고, 율리안은 턱을 매만지며 침묵했다.

요제프가 다시 펜촉에 잉크를 묻혀 답신의 답신을 보냈다. 글씨를 쓰는 단순한 행동에서 다소 신경질적인 모습이 엿보였다.

오늘 대화는 이것으로 마칩시다.

내일 정오에 뵙지요.

탁.

순식간에 협상을 중단시킨 그가 펜을 책상 위에 올렸다.

집무실 안에서 묘한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요제프가 이렇게 단박에 협상을 접을 줄 몰랐던 미하엘과 아렐 후작이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보았다. 평소에 보여주었던 것과 다른 모습에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그 두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말든.

요제프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유롭군. 고립되어 있는 주제에 지나치게 여유로워.”

탁, 탁, 탁.

그가 책상을 손끝으로 치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미하엘을 응시했다.

“미하엘 경.”

미하엘이 의자에서 일어나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예, 전하.”

“그대에게 검은 늑대 기사단과 공조해 이번 사태를 수습하기를 명령하네. 그대는 임시적으로 각 기사단의 부기사단장과 똑같은 권위를 가지며, 이를 넘보는 자들은 이번 사태에 한해서 벌을 줄 수 있는 권리를 주지. 안타깝지만 직책명은 없어. 그럴듯한 이름을 지어낼 시간까지는 없어서.”

“예, 명 받들겠습……예?”

갑작스러운 진급에 미하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시 농담인가 하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지만 요제프의 얼굴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

“사랑에 목숨 바칠 준비가 되었느냐 묻는 거야.”

“…….”

찔리는 일이 많은 미하엘은 입을 다물었다. 마리안의 하녀 출신인 마리엘라와 요제프가 모종의 관계라는 것까지는 알고는 있지만, 마리안과 요제프가 어떤 사이인지는 정확히 몰랐던 까닭이었다. 그냥 평범한 귀족들이 그러하듯, 본부인과 남편 사이일 것이라 생각한 미하엘은 요제프 앞에서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 반응을 보고 요제프가 피식 웃었다.

“그대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하지만 그런 건 하등 쓸모없는 고민거리야.”

“무슨……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그릇된 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 정말로 전하께서 하시는 말씀이 제 아둔한 머리로는 도통 이해가-”

너무 당황한 터라 그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미하엘이 중언부언 말을 늘여놓고만 있을 때, 중간에서 요제프가 말을 잘랐다.

“간단해. 단 한 번도 마리안을 사랑한 적 없단 뜻이지.”

충격적인 선언에 미하엘과 아렐 후작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그런 그들의 반응을 보며, 요제프가 여유롭게 말을 덧붙였다.

“물론 마리안도 같은 마음일 테고. 우린 운명의 장난질에 놀아난 가엾은 남남일 뿐이라네. 아마 마리안은 내가 죽어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걸.”

“…….”

미하엘은 상황파악이 덜 된 표정으로 멍하니 바닥을 응시했다.

아렐 후작은 표정을 갈무리하려 애썼지만, 경악스러운 마음은 쉬이 감춰지지 않았다.

요제프가 태연하게 미하엘과 아렐 후작에게 말을 걸었다.

“몰랐나? 의도치 않게 그쪽도 놀란 것 같군. 아무튼, 내가 사랑한 건 마리엘라 하나야. 자세한 건 이 사태가 정리되고 나서 설명해 주도록 하지. 그나저나, 미하엘 경, 난 아직 대답을 듣지 못한 걸로 아는데.”

요제프의 얼굴에서 다시 한번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가 엄중한 목소리로 미하엘의 이름을 불렀다.

“미하엘 슈리츠,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걸 준비가 되었나?”

부름을 받은 미하엘의 표정 역시 진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예. 각오 되었습니다.”

“좋아, 지금부터 검은 늑대 기사단을 이끌고 왕성을 드나드는 모든 이들의 소지품을 수색한다. 자존심만 강한 어중이떠중이들이라 다루기가 힘들 거야. 그건 알아서 하고, 수색할 때 이런 양피지를 숨기고 있는 지나 눈여겨보도록.”

요제프가 들고 있던 마법 양피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티 나지 않게 아렐 후작을 슬쩍 보며 눈웃음 지었다.

“혹시 첩자가 같은 방법으로 외부인과 소통 중인 걸 수도 있으니.”

“명 받들겠습니다.”

미하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세 사람만 남은 방, 요제프가 아렐 후작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책 회의가 끝났음을 고했다.

“후작은 이제 들어가 쉬시죠. 제 시종이 머물 곳을 안내해드릴 겁니다. 앞으로 도움받을 일이 많을 테니 잘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아렐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요제프에게 안심의 말을 전했다.

“저…… 오늘 들은 말은 비밀에 부치겠습니다. 중요한 건 괴한으로부터 인질을 구하는 것이지, 왕자 전하의 사생활이 아니니까요.”

요제프는 그래도 상관없고,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투로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시늉을 했다.

“그래 주신다면 감사한 일이지요.”

아렐 후작은 요제프를 향해 인사를 한 후 뒤 돌아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복도를 걷던 그는 요제프와의 대화에서 느꼈던 이질감에 고개를 갸웃했다.

‘왕자의 성격이…… 조금, 변한 것 같은데.’

그는 곧 고개를 가볍게 젓고는 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문이 닫히고 이제 방 안에는 둘만 남게 되었다.

요제프 하이젠 데르샤바크와와 율리안 폰 바이르.

두 사람은 아카데미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오래된 친우이자 마리엘라를 사이에 두고 신경전을 벌이던 연적이었다.

이제는 마리엘라를 구하기 위해 협업해야 하는 사이이기도 하다.

율리안은 등허리를 뻣뻣하게 피고 무심한 척 연기를 했다. 아직 마리엘라에 대한 마음을 털어내지 못한 것을 요제프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요제프는 그런 율리안을 힐끔 보더니 대수롭지 않은 사실을 일러주듯 가장 중요한 정보를 넘겼다.

“아직 말 안 한 게 있는데, 세드릭 아렐을 조심해. 순진한 얼굴로 무고한 척하지만 실은 납치범과 한통속이거든.”

뜬금없는 소리에 율리안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그건 또 무슨 소리지?”

“그의 오른쪽 소매 단추를 보았나?”

율리안은 말없이 조용히 아렐 후작의 소매가 어땠는지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같이 있던 내내 단 한 번도 유심히 본 적이 없었기에, 아무리 노력을 해본들 기억나지 않았다.

요제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알아서 설명을 줄줄 이었다.

“왼쪽 단추에 비해 유독 광택이 나더군. 흑요석이었어. 원래대로라면 내가 마리엘라에게 선물해 준 드레스 달려 있어야 했던 단추였지.”

“그 말은…….”

“마리엘라가 신호를 보낸 거야. 아렐 후작은 그들과 한 편이니 긴장을 놓치지 말라고.”

“…….”

이 긴박한 상황에 뭐가 그리 우스운지, 요제프가 키득키득 웃었다.

“영특하지 않나? 일차적으로 자신을 의심하게 만들어서 도리어 의심을 피하다니. 더군다나 아샤칼 세력을 몰아내려고 검은 늑대 기사단이 눈에 불을 켜고 있던 이 시국에 아샤칼 출신의 하녀들을 이용했어. 원하는 것을 얻고 난 뒤 모든 죄는 에드먼드 파칼에게 뒤집어씌울 계획이었던 거야.”

율리안은 표정을 굳혔다. 세드릭 아렐에 대한 그의 평은 단 한 줄이었다.

“간특하군.”

“그래, 이제 그 간특함을 우리가 이용할 때지. 내가 마리안에게는 별 관심이 없고, 마리엘라를 더 소중히 여긴다는 정보를 안 이상 그냥 있지는 않을 거야. 어떻게든 납치범들과 연락을 취하려고 할 테고, 그 내용은 뻔하지 않겠나.”

요제프의 눈이 번뜩이며 말을 이었다.

“마리엘라 코부르덴이 진짜다. 마리엘라 코부르덴을 보호하라.”

* * *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엘라는 하인의 손에 잡혀 들어왔다. 애초에 수십이 넘는 장정을 해치고 홀로 도망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녀장 복장을 한 여인이 만신창이가 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손이 많이 가는 자로군.”

마리엘라를 잡아 온 하인이 여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내버려 두면 또 쥐새끼처럼 돌아다닐 겁니다.”

“흠.”

여자는 잠시 고민해 보다가 그들에게 턱짓했다.

“서재로 끌고 가도록. 곁에 두고 감시하면 한결 편하겠지.”

“알겠습니다.”

하인들은 마리엘라를 억지로 끌고 갔다. 마리엘라는 흙과 먼지, 낙엽 등이 잔뜩 묻은 몸으로 비틀비틀 따라 걸었다.

푹 숙여진 그녀의 머리.

마리엘라는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가리고 웃었다.

모든 것이 의도한 대로 흘러간다.

* * *

마리엘라는 성공적으로 적의 사령부에 들어설 수 있었다. 비록 특별 감시라는 명목이 붙고, 그 때문에 손과 발, 입이 모두 꽁꽁 막히게 되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들의 긴밀한 대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엿들을 수 있게 된 것이 중요했다.

데르샤바크 왕실과의 1차 협상이 끝나고, 하녀복장을 한 여인들이 저들끼리 모여 회의를 시작했다.

앞서 몇 가지 사건들로 마리엘라는 저택 내 기묘한 위계질서를 하나 발견했는데,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월등한 권위를 지니고 권력을 휘두른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렐 후작도 하녀장에게 깍듯이 예의를 차렸지. 마치 그들이…… 이 계획의 모든 키를 쥐고 있다는 듯.’

하인과 하녀들은 서로 섞일 라야 섞일 수 없는 존재처럼 굴었다.

마리엘라는 한참의 생각 끝에 결론 하나를 내렸다.

그들을 납치한 이 정체불명의 사람들은 하나의 집단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었다. 최소 두 개 이상의 집단이 각자의 목적을 위해 잠시 뭉친 임시 모임일 뿐이었다.

‘도대체 목적이 뭘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아샤칼에게 지배당하는 그리너드의 절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라를 구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가진 이들이 저들끼리 선을 긋고 내외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일단은 두고 보자.’

마리엘라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상황을 살폈다.

꽁꽁 묶인 그녀를 서재 구석에 둔 채로, 하녀 복장을 한 여인들끼리 회의는 계속되고 있었다. 여인들 대부분은 마리엘라보다 열 살 정도 어려 보였고, 두셋 정도만이 그녀 또래로 보였다. 하녀장 복장을 한 여자만이 중년이었다.

“알폰스는 당연히 이쪽에 붙을 거고, 브랫 백작은…… 아마 이쪽 아닐까요.”

집단 내 2인자로 보이는, 마리엘라 또래의 여자 하나가 조심스레 자신의 생각을 내보이자 하녀장 복장을 한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브랫 백작은 빼 둬. 아마 중립을 지킬 거야. 확실한 이득이 되지 않으면 몸을 사리는 겁쟁이니까.”

성정이야 어찌 되었든, 브랫 백작은 현재 베르단의 한 당파를 이끄는 대귀족이었다. 그런 어마어마한 거물에 대한 그녀의 평가는 가차 없다 못해 싸늘했다.

“앞으로 요제프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지는 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남의 의견에 쉽게 휘둘리는 나약하고 한심한 머저리로 자라났다던데, 과연.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여자는 이어서 요제프에 대한 제 생각마저 드러냈다.

상황을 살피던 마리엘라의 얼굴 위로 흥미로움이 풍겨 나왔다.

‘베르단 출신. 대략 십 오 년 전쯤에 베르단 정계를 휘저었던 자군.’

마리엘라는 엿들은 대화에서 정보를 도출해냈다.

무리를 이끄는 중년 여성은 브랫 백작의 본질을 꿰뚫음을 물론 요제프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다.

거기다 그 둘을 내려다보기까지 했다.

단순한 허풍이나 허세가 아닌, 경험에서 우러난 태도와 담대함이었다.

마리엘라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정보들이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을 듯한다. 진실이 실루엣을 드러냈는데 천막을 걷어낼 수 없는 답답함. 그녀는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그들의 대화에 더 귀 기울였다.

어린 여자 하나가 불안한 얼굴을 하고 조심스레 중년의 여인에게 물었다.

“저, 가주님. 그들이 바레뎃샤를 끌어들이지는 않겠지요?”

그 질문에 서재에 모인 모든 이들의 시선이 몰렸다.

여인들에게 가주라고 불리는, 하녀장 복장을 한 중년의 여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그가 얼마나 하이든의 딸을 사랑하느냐에 달렸지.”

가주의 대답이 석연치 않았는지, 어린 여인들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마리엘라는 그들의 낯빛에 드리워진 두려움의 그림자를 엿보았다.

숙연해진 분위기를 간파한 집단 내 2인자가 확신이 가득 찬 어조로 그들을 어르고 달랬다.

“너무 겁먹고 있지들 마. 교황은 사고를 당해 베르단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고, 데르샤바크는 아샤칼을 적으로 삼았다. 평생을 기다려도 오지 않을 기회야. 죽든 살든 해보는 수밖에.”

여자의 눈동자 속에 굳은 결심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와 가주라는 여인을 제외한 나머지 어린 소녀들의 얼굴 위에는 여전히 공포가 가시지 않고 있었다.

표정은 가끔 말보다 많은 것을 전달한다.

‘그렇게 된 것이군.’

뒤늦게 이들의 정체를 파악하게 된 마리엘라가 픽 웃었다. 이렇게 대놓고 드러내는데 그동안 왜 생각도 못하고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데르샤바크 왕가를 등질 정도의 적대감과 담대함.

베르단 출신의 고위 귀족.

목적을 위해 그리너드와 손을 잡은 집단.

구성원 대부분의 성별이 여자이며, 교단을 두려워하는 자.

답은 단 하나였다.

흑마법사.

‘마녀들이야.’

자신들에게 계획을 미주알고주알 일러준 것도 이해가 간다.

여차하면 마법으로 기억을 지우고 떠날 계획이었던 것이다.

생존자가 존재했다.

그것도 일족 단위로.

* * *

다음날이었다.

율리안과 요제프는 룩센투크의 집무실에 모여 진중한 표정으로 양피지를 응시했다.

정오가 되자, 요제프가 펜을 들어 양피지에 글자를 썼다.

약속된 시간이군요.

다시 대화를 시작할까요.

일차 적인 요구사항은 어제와 동일합니다.

인질들의 안전을 확인 받고 싶군요.

곧 이어 상대 쪽에서 보낸 답신이 마법 양피지 위에 꽃처럼 피어났다.

안타깝지만 저희에게 그것을 증명해낼 방법이 없습니다.

어제의 것과 비교해서 한결 부드러워진 어조였다.

주도권이 서서히 옮겨지고 있었다.

요제프가 픽 웃으며 답신을 적어 보냈다.

제겐 있지요.

두 가지 문제를 드리겠습니다.

하나, 호수는 결국 무엇을 품었는가.

둘, 사과 파이 위에 얹어야 할 것과 빼야 할 것은 각각 무엇인가.

첫 번째 문제는 마리안을, 두 번째 문제는 마리엘라를 겨냥한 질문이었다.

오늘 오전, 요제프는 사람을 시켜 마리안과 데이지, 마리엘라의 처소를 뒤져 그들이 가지고 있던 통속 소설을 모두 찾아오도록 했다. 그리고 그것들 중 가장 낡고 너덜너덜한 책을 찾아냈다.

호수의 주인 나탈린. 문학적인 제목과 그에 어울리는 문체를 가진 통속 소설이었다.

요제프는 빠르게 그 책을 속독했고, 마리안이 답을 낼 수 있는 문제를 골랐다.

두 번째 문제는 마리엘라와 요제프가 처음 만났던 그 시절의 이야기였다. 그가 그녀에게 제이 도련님이란 아명으로 불렸을 때의 대화들.

아마도 마리엘라는 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서로에게 가장 따듯했던 순간이었으니까.

잠시 추억에 잠겼던 그가 현실을 자각했다.

요제프가 고개를 돌려 율리안에게 확인을 받았다.

“그럼 여기서 끊어야겠지?”

“물론.”

율리안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요제프가 펜을 들어 글씨를 적어 나갔다.

그는 상대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제 할 말만 하고는 이차 협상을 끝냈다.

그럼 세 시간 후에 뵙지요.

세 시가 되자 양피지에 글자가 떠올랐다.

첫 번째 문제에 답하겠습니다. 나약해 보듬어 주고 싶은 자.

요제프는 맞다 그르다 정답을 매기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두 번째 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두 번째 문제에 대한 답변은 오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그가 펜을 들었다.

사과 파이는?

관심 없다고 하더군요.

양피지 위의 글자를 바라보던 요제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안 좋은 소식이야.”

그의 표정을 읽은 율리안이 흔들리는 눈으로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요제프가 장난기를 지워 버린 얼굴로 말했다.

“마리엘라의 안전이 불확실해.”

율리안이 침묵했다. 잠시 후 그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아렐 후작이 그들에게 따로 기별을 넣지 않았나 보지?”

“그럴 수도 있고, 다른 일이 생긴 걸 수도 있고.”

두 사람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암살자를 투입하는 건 어때.”

율리안의 제안에 요제프가 입꼬리를 당겨 씩 웃었다.

“정말 오랜만에 의견이 맞는군.”

* * *

오후 네 시 반이었다.

점심을 먹기에는 너무 늦고, 저녁을 준비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축 늘어져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잡다한 것들을 떠올리고 있는 바로 그 애매한 시간대에 유독 바삐 몸을 움직이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렐 후작의 저택 정원 구석이었다.

‘너는 오른쪽, 너는 왼쪽, 너희들은 각각 정문과 후문을 노리고, 너와 나는 2층에 있다는 빈방을 통해서 잠입한다. 알아들었나?’

끄덕.

사내들은 대화 대신 손짓과 고갯짓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그들의 뒷목 아래쪽에 달 모양의 문신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뒷세계에서 으뜸으로 쳐준다는 ‘아세티의 달’ 소속 암살자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럼 흩어진다.’

암살대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해산의 손짓을 했다.

그들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게 사라졌다.

* * *

암살자들의 우두머리는 동료 한 명과 함께 벽을 기어올랐다.

의뢰인에게 받은 정보를 토대로 2층 빈방을 통해 건물 안으로 잠입하는 중에 갑자기 먼저 가던 동료가 아무 것도 없는 빈 허공에 부딪쳐 뒤로 나자빠졌다.

동료는 급히 일어나 주변을 살피고는 다시 앞으로 걸었다.

콰당!

그리고 또 넘어졌다.

난데없는 행동에 우두머리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물었다.

“이봐, 뭐 하는 짓이야?”

동료가 당황한 얼굴로 앞을 더듬었다. 무언가 유리로 만든 벽 같은 것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내 의지가 아니야.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

우두머리는 동료에게 다가왔다. 그가 허공을 향해 팔을 뻗자, 믿기지 않게도 손끝에 무언가 걸렸다. 주먹을 쥐어 두드려보니 통통, 가벼운 소리도 났다.

“이게…… 뭐지?”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했다. 둘 다 귀신을 본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일단 한 번 깨볼까?”

그의 동료가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 순간 우두머리의 머릿속에 불현듯 어떤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게 마법의 잔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잠깐…….”

우두머리는 급히 동료를 막아섰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동료의 날카로운 검 끝이 보이지 않는 보호막 표면에 박혔다. 두 사람은 투명한 보호막 위에 실선처럼 가는 금이 새겨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번쩍!

눈을 멀게 할 정도의 섬광과 함께 거대한 마법 방어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암살자들이 저택 내부에 잠입하기 대략 십 분 전, 마리엘라는 늦은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남이 건네주는 딱딱한 빵 쪼가리를 오물오물 씹는 것도 식사라고 칠 수 있다면 말이다.

아무 반항도 하지 않고, 어린 마녀들이 건네는 빵을 꿀꺽 삼키며 속으로 조용히 생각했다.

‘파르니의 마녀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서재에 갇혀 작전을 엿들은 지 하루도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들이 방어마법의 귀재로 유명했던 파르니 가문의 마녀들이라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사실 이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베르단의 4대 마법 가문에겐 가문의 문장만큼 유명한 신체적 특징들이 몇 있었다.

흑발에 흑안을 가진 한 가문, 백발에 녹안을 가진 르베르크 가문, 금발에 벽안을 가진 랏 데르시 가문, 마지막으로 부스스한 주황빛 머리에 주근깨, 갈색 눈동자를 가진 파르니 가문.

베르단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가문과 혼맥을 이어간 탓에 모두 똑같은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곳에 모인 하녀들에게는 비슷한 특징이 하나 있었다. 그들의 머리카락이 모두 부스스하다는 것과 주근깨가 유독 두드러진다는 것. 주근깨와 악성 곱슬머리는 파르니 가문의 상징과도 같았다.

‘아렐 후작이 이 집을 구입한 것도 파르니 가문의 입김이 작용한 걸까?’

그녀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릴 적 살던 집에 강한 향수를 가지니까. 억지로 떠나야만 하는 사정이 생겼다면 더더욱.

마리엘라가 파르니의 마녀들이 이 저택을 고집한 진짜 까닭을 알아차리게 된 것은 그녀가 식사를 끝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다 드셨죠? 이제 다시 입을 막을게요.”

그녀에게 빵을 건네주던 어린 마녀가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마녀가 책상에 올려놓았던 재갈을 집어 든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번쩍!

엄청난 섬광이 저택 전체에 확 퍼졌다가 사라졌다. 시간이 잠시 멈춰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리엘라는 놀란 눈을 하고 주변을 살폈다. 어린 마녀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침입자다!”

“침입자가 들어왔어!”

“이제 어쩌지?”

그들은 죽음을 앞둔 병사처럼 절망했다.

쾅!

문이 거세게 열리고 그들을 이끄는 2인자가 들어왔다.

“시에라님!”

2인자의 이름은 시에라인 것 같았다.

시에라는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책상과 카페트를 모두 치워. 지금부터 플랜 B에 들어간다.”

어린 마녀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책상과 카페트를 치워 구석에 몰아 놓았다.

카펫 밑에 숨겨져 있었던 거대한 마법진이 보였다. 마법진은 서재 바닥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다랬다.

‘그래, 이곳은 파르니 가문의 저택이었지.’

마리엘라는 뒤늦게 이곳이 성마전쟁에서 살아남은 까닭을 알게 되었다.

세드릭 아렐이 이 저택을 고집한 진짜 이유도.

“다들 제자리로!”

시에라의 명에 따라 소녀들이 마법진 위에 섰다. 그들이 눈을 감고 손으로 삼각형 모양을 만들자, 그들의 머리카락과 치맛자락이 바람을 맞은 것처럼 나풀거렸다. 그와 동시에 그들에게서 검은색의 오라가 퍼져나갔다. 오라는 곧 마법진으로 흡수되었다. 마력을 흡수한 마법진이 군청색의 빛을 내기 시작했다.

부웅-

곧이어 공기가 낮게 진동하는 소리가 났다.

시에라는 허리에 손을 얹고 그 모든 과정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녀는 악단을 관장하는 지휘관의 눈을 하고 어린 마녀들을 다독였다.

“그래, 잘하고 있어. 당황하지 말고, 마법진에 마력을 보태는 것에만 집중해. 그들은 겨우 암살자 몇을 보낸 것뿐이고, 대부분은 가주님이 직접 처치하셨다.”

마법진 위에 올라가지 않은, 파르니 가문의 참모로 추측되는 이들 몇이 작은 목소리로 위험을 알렸다.

“하지만, 시에라님. 너무 빨라요. 아직 하루밖에 되지 않았잖아요. 제대로 된 대화도 오고 가지 않았고요. 협상이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이러는 이유가 뭘까요? 왕가는 지금 저희가 예상한 것 보다 두, 세배의 속도로 밀어붙이고 있어요.”

“혹시 그것 때문이 아닐까요. 저희가 두 번째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 것이요.”

‘정확한 지적이야.’

멀리서 모든 걸 관망하던 마리엘라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곳에서 저들의 대화를 다 엿듣고 있었기 때문에 요제프가 낸 두 가지 문제를 알고 있었다.

그가 암살자를 보낸 것은 저들의 말대로 두 번째 질문에 제대로 답을 보내지 못했기 때문일 터였다.

인질범들이 두 번째 질문에 대한 감을 잡지 못했다는 것은, 그 질문의 답을 가지고 있는 마리엘라 코부르덴이 위험한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니까.

‘요제프가 불안해하고 있어. 이 상황에서 그가 보일 두 번째 반응은 무엇일까. 아, 그전에 내가 보낸 표식은 알아보았나.’

인질의 신분으로 조금이라도 더 살아남으려면 인질범의 행동과 요제프의 대응, 두 가지를 다 예측하고 있어야 했다.

마리엘라가 조용히 요제프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시에라가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

참모들의 압박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싶은데, 아무래도 시에라라는 여자는 머리 쓰는 걸 즐겨 하는 편이 아닌 것 같았다.

“시끄럽다! 이건 꼬맹이들이 막대기를 가지고 하는 전투 놀이가 아니야. 우린 목숨을 걸고 이 자리에 왔어! 저 까마득하게 어린 것들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나? 마지막 전쟁에서의 치욕을 생각해. 그들이 우리 어머니들의 목을 베고 심장을 뽑던 그 순간을 기억하…….”

그때였다.

시에라가 팔을 붕붕 휘두르며 분노를 쏟아붓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가주와 그녀를 따르는 여자 두셋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그만.”

흰머리가 지긋이 든 가주는 우아하고 단호한 눈빛으로 시에라를 말렸다.

“아이들의 말이 맞다, 시에라.”

그러더니 고개를 휙 휙 돌려 주변을 살폈다.

일순, 가주와 마리엘라의 눈이 마주쳤다.

가주는 망설임 없이 마리엘라 쪽으로 걸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꾸깃꾸깃 접힌 쪽지가 있었다.

“가주님……?”

시에라가 얼빠진 얼굴을 하고 가주를 불렀다.

가주는 마리엘라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코부르덴 후작.”

마리엘라는 태도가 돌변한 중년의 마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제가 요제프 왕자의 애첩을 몰라봤군요.”

세드릭 아렐의 연락이 드디어 그녀들에게 닿은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파르니의 가주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마리엘라를 묶었던 밧줄이 스르륵 풀렸다.

속박에서 벗어난 마리엘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밧줄 자국이 선명한 제 손목을 가볍게 살피더니, 시선을 돌려 가주를 응시했다.

마리엘라가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피차 마찬가지입니다, 파르니의 가주님.”

“쓸데없는 말은 이쯤 하고,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가주가 다시 한번 손을 휘두르자, 저 멀리서 의자와 탁자가 날아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좀 얻고 싶은데요. 아직은 요제프 왕자를 자극할 생각이 없어서 말이죠.”

‘아직?’

마리엘라는 가주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

“사과파이. 당신을 겨냥한 질문이었죠?”

가주가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마리엘라를 살살 구슬리려 했다. 팔짱을 낀 채 마리엘라를 향해 몸을 자연스레 기울인 그녀에게서 상냥한 옆집 아주머니 같은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실체를 아는 마리엘라로서는 조금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가장 찬란했던 시절의 기억이죠.”

마리엘라는 여유로운 척하며 그들이 자신의 마음이나 생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올바른 답이 무엇인가요?”

“제가 그걸 대답할 의무가 있을까요. 사멸해가는 파르니의 잔당들에게.”

선을 넘은 마리엘라의 말에 가주의 표정이 굳었다.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되나 보군요.”

순간적으로 드러난 흑마법사의 살기에도 마리엘라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저런 위협에 하나하나 겁을 먹기에는 그간 살아온 인생이 순탄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여야해. 당황해 저도 모르게 허점을 드러낼 수 있게.’

마리엘라는 요제프를 떠올렸다.

그의 거만하고 오만한 태도와 몸짓. 어깨를 으쓱거리며 지어 보였던 능청스러운 표정 같은 것들을.

그리고 그것들을 그대로 따라했다.

“상황파악은 그쪽에서 못 하고 있죠. 궁금한 게 너무 많아서 질문하고 싶은 것도 아주 많은데, 가주님의 인내심이 얕아 다 말로 풀기에는 시간이 촉박해 보이는군요. 그럼 간단하게 하나만 묻지요.”

이번에는 마리엘라의 몸이 탁자 앞으로 기울었다. 그녀는 가주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낮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겨우 숨만 붙은 수준인 파르니의 마녀들이 목숨을 내다 버릴 각오를 하면서까지 데르샤바크에게서 얻고자 하는 것이 뭐죠?”

* * *

요제프, 율리안, 아렐 후작이 회의장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왕자비와 그녀의 두 시녀가 납치된 아렐 후작의 저택에서 오로라 빛의 방어막이 갑자기 생성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지 한 시간 정도가 지난 시간이었다.

회의를 열지도 않았는데, 방어막의 등장에 겁을 집어먹은 귀족들이 알아서 왕성으로 모여 들었다. 그들은 자초지종을 설명하라며 아우성이었다.

“새가 너무 많군.”

회의장으로 가는 길, 넓게 난 창을 통해서 하늘을 올려다본 요제프가 작게 중얼거렸다.

“예?”

그의 뒤를 따르던 아렐 후작이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요제프는 아렐 후작의 말을 못들은 척 무시하고 율리안을 바라보았다.

“율리안. 부탁이 하나 있는데.”

그리고는 율리안에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알았다.”

그 말을 들은 율리안이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 몸을 돌려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저, 방금 무슨 대화를 나누신 건지……?”

상황을 이해 못한 아렐 후작만 어리둥절했다.

요제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럼 우린 갈 길을 가지.”

* * *

요제프가 회의장 바로 앞에 도달했을 때였다.

회의장 문을 열지도 않았음에도 귀족들의 대화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전하는 대체 언제 오신단 말입니까!”

“마법이라니, 수도에서 다시 흑마법이 횡행하는 꼴을 내 두 눈으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도대체 무슨 사달이 난 건지 아무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오?”

“아렐 후작의 저택을 포위한 기사들은 대체 무엇이고!”

왕가의 권위 따위는 개나 주라는 듯, 왕성 룩센투크에서 할 말 안 할 말을 구분 못하는 그들의 행태에 시종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크흠. 왕-”

보다 못한 시종이 요제프의 등장을 큰 목소리로 알리려 했다.

요제프가 손을 내밀어 시종을 저지했다.

“아냐, 됐어. 조용히 들어가지. 그보다 특별히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예.”

“내 명이 있기 전까지는 문을 열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그가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신신당부했다.

“그 어떤 소란이 있어도.”

* * *

문이 열리고, 요제프와 율리안, 그리고 기사 몇이 회의장으로 들어왔다.

“제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군요.”

“요제프 전하!”

“왕자 전하!”

신하들이 구원자를 목 놓아 부르듯 요제프의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 정말 요제프를 존경해서 하는 행동은 아니었고, 그저 말로 살살 굴려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왕자를 밀어붙일 작정일 뿐이었다.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속이 뻔히 보이는 그들의 가식. 요제프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마냥 온화하게 그들을 맞았다.

“그동안 너무 오래 시간을 끌었어요. 많이 답답하셨을 겁니다. 그 속을 저도 잘 알지요. 앞으로의 일은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더 나아가 눈을 접어가며 미소 지었다.

“이제, 모든 것을 끝낼 때가 왔으니까요.”

끼이익.

회의장 문이 닫혔다.

철컥.

회의장 밖에서 열쇠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귀족들 중 누구도 그 소리에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도.

* * *

요제프가 아우성치는 귀족들을 저만의 방식으로 다스리고 있던 그 시각.

마리엘라는 마리엘라 나름대로 마녀들을 흔들고 있었다.

장소는 아렐 후작의 저택 내 서재.

단도직입적인 마리엘라의 질문에 파르니의 가주가 상긋이 미소 지었다.

“무례한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재주가 있군요.”

두 사람을 중심으로 바람이 불고, 마주 앉은 테이블이 작게 진동했다.

다정한 위협이었다.

마리엘라는 끝까지 태연했다. 그녀는 저들이 자신을 해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위협적으로 나올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파르니의 마녀들이었다.

일단 마리엘라가 무사하다는 걸 요제프에게 증명해야 그들의 계획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런 발칙한 매력으로 요제프를 꾀어내긴 했죠. 그나저나 듣고 싶은 말을 아직 못 들었습니다만.”

“그걸 저희가 대답할 의무가 있을까요.”

“네. 잘 되어가던 저희의 계획을 중간에 망가트렸으니까요. 그에 대한 책임은 확실히 지고 가셔야지요.”

파르니의 가주와 마리엘라, 두 사람 사이에서 대화가 팽팽하게 오고 갔다.

“계획?”

가주는 계획이라는 그녀의 말에 관심을 보였다. 마리엘라는 이 틈이 바로 기회라고 여겼다.

그녀가 파르니의 마녀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성공해야 하는 미션은 두 가지.

하나는 마녀들의 진짜 목적을 알아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리너드와 마녀 사이의 분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이용해 보기로 했다.

“비밀을 하나 말해드릴까요?”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는 발언으로 위협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던 그녀가 뜬금없이 눈을 반짝이며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자 마녀들이 갈피를 못 잡고 저들끼리 바라보았다.

그녀는 깜짝 선물을 공개하는 사람 마냥 발랄하게 공표했다.

“당신들의 눈앞에 있는 마리엘라 코부르덴은 마녀랍니다.”

“!”

마녀들이 경악했다.

그들이 놀라 입도 열지 못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시부뚱한 표정으로 가주 뒤에 삐딱한 자세로 서 있던 시에라가 마리엘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는 분노로 이성을 잃은 광기 어린 눈을 하고 있었다.

콰당!

시에라에게 목이 잡힌 마리엘라가 의자 째로 뒤로 넘어졌다.

주먹질을 하듯 뒤로 젖혀진 시에라의 오른손을 중심으로 검은 오라가 피어올랐다.

“시에라!”

시에라가 마리엘라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리꽂기 직전, 파르니의 가주가 커다란 목소리로 그녀를 저지했다.

시에라의 오른손이 허공에서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핏줄이 다 터진 눈으로 마리엘라를 노려보았다. 상황이 허락만 한다면 지금 당장 죽여 버리고 싶다는 눈빛이었다.

시에라는 오른손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이내 이성과 현실에 굴복한 그녀는 주먹을 쥐었던 손을 내려놓았다.

시에라는 마리엘라의 귀에 자신의 입을 갖다 댔다. 그리고 마리엘라에게 경고했다.

“너…… 그딴 식으로 머리 굴렸다간 내 손에 죽어. 알겠어?”

울분을 꾹꾹 눌러 삼키는 듯한 목소리였다.

마리엘라는 위협을 받으면서도 이죽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대들처럼 피와 피를 통해 발현된 것은 아니지만, 뭐,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면서요. 대마법사 그레타가 그런 케이스고.”

“그걸 우리가 어찌 믿지?”

분노를 한층 가라앉힌 시에라가 이글거리는 눈을 하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은 아직도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 보고 있는 상태였다.

마리엘라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왕자비의 모친이 푸른 반점에 뒤덮여 사망했다는 소식을 모르시나보죠?”

그리고는 자신의 위에 올라탄 시에라를 밀어냈다. 그녀의 손길에 따라 시에라가 스르륵 옆으로 비켜섰다.

파르니의 가주가 등 뒤의 마녀들에게 마리엘라를 부축하라는 의미의 고개짓을 했다. 마녀들이 서둘러 다가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난 마리엘라는 먼저 구겨진 옷을 피는 시늉을 했다.

이곳에 납치된 신세라 할지라도 그들보다 우위에 있음을 공고히 하려는 것이었다.

요제프의 밑에서 1년 가까이 일하면서 배운 것은, 사람이란 분위기에 좌우되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집단 내에서 형성되는 무언의 흐름.

사람을 이용하려면 그 소리 없는 흐름을 탈 줄 알아야하며, 나아가 손 위에 올려 제 뜻대로 굴릴 줄 알아야 한다.

현실은 왕자에게 흔들리고 공작에게 휘둘리는 종이 인형 같은 인생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엄청난 정보를 쥐고 있는 핵심 인물처럼 보여야 했다.

마리엘라가 마녀들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보아하니 마법 양피지 외에 외부와 소통할 어떤 장치가 있는 것 같은데 부족하다면 조사해 보시죠. 9년 전, 백작가의 하인들이 어떤 증상을 보이며 죽어나갔는지.”

그리고 자신의 가장 깊은 죄를 고백했다.

"시체는 태울 수 있어도 기억은 그럴 수 없죠."

덧붙이는 말까지 들은 마녀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말도 안 돼.”

“아니야. 가능성이 없진 않아. ‘그’ 리덴부르크잖아.”

“하지만 시간이…… 나이대가 맞지 않아.”

“본인 주장대로 갑자기 발현한 케이스일지도 모르지.”

“백날 떠들어야 무엇 하지? 진짜 마녀면 마법을 쓰도록 하면 되잖아.”

마리엘라는 마지막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했다. 어차피 그녀가 상대해야 할 것은 채 자라지 못한 어린 소녀들이 아니라 파르니의 가주였다.

“이제 저와 대화를 할 마음이 생기셨는지요.”

“중요한 설명을 마저 듣고 나서 결정하도록 하지요. 그대들의 계획이 궁금합니다만.”

마리엘라가 대화의 물꼬를 틀려고 하자 가주가 딱 선을 그었다. 마리엘라에게 그 말은 생각할 시간을 벌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호락호락하지 않군.’

마리엘라는 날카로운 표정을 숨기고 헤실헤실 웃었다.

“아, 그거 말이죠.”

“조직이 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말이 마음에 걸려서 말이죠. 코부르덴 후작이야 운 좋게 시골에서 발현했다지만, 그대들의 동료는…… 흑마법사는 대부분 살해당한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가주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마리엘라 앞에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살아남은 다른 가문이 있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크게 흔들렸던 것이다.

마리엘라는 그 감정을 날렵하게 파악했다.

‘내 말을 믿고 있는 낌새야.’

마리엘라는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거드름을 피웠다. 그들에게 안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함이었다.

사람은 자신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는 자를 얕잡아보고 밀어내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가끔은 상대가 지니고 있는 장점과 이점까지 부정하면서까지.

그 반대의 상황을 원하는 그녀로서는 거만하고 건방진 여자로 보이는 것이 유리했다.

“멸문당한 줄 알았던 파르니가 제 눈앞에 떡하니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 아니겠어요?”

그녀가 픽 웃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찌 그대들만이 유일한 생존자라고 할 수 있는지.”

아까부터 열심히 참고 있었던 시에라가 한 번 더 폭발했다.

“세 치 혀로 우릴 농락하려 하다니! 네가 정말 우리와 같은 마녀라면 왜 아까 전 내 공격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

마리엘라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받아쳤다.

“오랜 훈련의 덕이죠. 정체를 숨기고 적의 심장부에서 살아가야하는 자가 이런 소소한 일에 하나하나 반응한다면 어찌 되겠어요?”

그녀에게 한 방 먹은 시에라가 씩씩대며 마리엘라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시에라의 뇌리에 어떤 묘수가 떠올랐다.

“네가 정말 우리 편인지 증명해야겠어. 플랜 D의 변형으로 간다. 진실의 조각을 가지고 와!”

그 말에 어린 마녀들이 바삐 움직였다.

그들은 검붉은 광석을 담은 작은 유리병과 날카로운 바늘을 가진, 그녀로서는 도대체 무엇인지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유리 공예품을 들고 왔다.

“저건…….”

마리엘라가 유리 공예품을 보고 고개를 기울이자 시에라가 그녀를 비웃듯 씩 웃었다.

“시골 출신이라 한 번도 보지 못했을 거다. 저건 ‘주사기’라고 하는 거야. 피에 직접 마법약을 주입해 즉각적인 효과를 불러내지. 르베르크가 만들었고, 랏 데르시가 애용했지.”

시에라는 먼저 붉은 광물이 든 유리병 안에 물을 조금 집어넣었다. 곧 작은 기포와 함께 광물이 물속에 녹아들었다.

그녀는 가만히 자신의 행동을 지켜보는 마리엘라를 보며 으스댔다.

“진실의 조각이다. 랏데르시의 피로 만든 아주 귀한 마법 용품이지. 이 걸 네 몸 속에 집어넣을 건데, 질문에 진실을 말하면 아무 일도 없겠지만, 거짓을 말하면 피부가 푸른색으로 변해. 죽을 것 같은 고통은 덤이지. 원래는 요제프 왕자에게 쓰려고 준비한 거지만…… 왕자의 정부에게 하나 쓴다고 무슨 일이 나진 않을 거야."

시에라는 주사기를 이용해 진실의 조각이 융해된 물약을 마리엘라의 팔에 주입했다. 깨끗이 소독된 천으로 주사기가 찌른 부위를 가볍게 문지르기까지 한 그녀가 부릅뜬 눈으로 마리엘라를 응시하며 말했다.

시에라의 테스트는 일종의 도발과도 같았다.

"자, 어디 그 잘난 계획을 말해보지 그래.”

덤덤한 표정으로 진실의 조각을 주입받은 마리엘라는 주사를 맞은 팔을 내려다보며 잠시 시간을 끌었다.

어떤 대답이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지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결정을 내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모든 곳을 잠식해나가고 있었죠. 베르단 왕실에서 부터 교황이 기거하는 교황청까지.”

현재 그녀는 흑마법사인 율리안을 도와 그가 권력을 쟁취하는 것을 돕고 있었다.

비록 목숨을 협박받아 억지로 움직이는 강압적인 관계였지만, 어쨌건 두 사람이 한 배를 탄 것 자체는 거짓이 아니었다.

“거짓이면 심장이 멎는 고통을 안게 될 거야.”

대답을 끝낸 마리엘라는 자신의 손을 살폈다.

시에라의 말 대로 시골에서 자라 마녀나 마법 같은 것을 접할 길이 없었던 그녀는 진실의 조각이 어디까지 작용하는지 궁금했다.

주입받은 사람이 믿고 있는 정보까지만 판단하는 건지, 그 이상의 진실을 파헤치는 건지.

전자라면 의도적으로 정보를 숨기거나 교묘히 비틀어 대답하는 것을 잡아낼 수 있는지.

거짓이 걸렸을 시, 겪게 될 고통은 어느 정도일지.

일 분가량이 지났다.

그동안 그녀의 몸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고통도 없다.

“이 정도면 충분한 답변이 된 것 같은데.”

마리엘라가 이제 어쩔 거냐는 듯이 시에라를 응시했다.

시에라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돼, 하나 더!”

그녀는 등 뒤의 마녀에게서 진실의 조각이 든 통을 갈취했다. 시에라가 새로운 조각에 물을 섞으려던 찰나 가주의 호통이 들려왔다.

“시에라!”

“하지만 가주님, 이건 말이 안돼요. 저희 말고 다른 놈들이, 이건, 이건……!”

“요제프에게 쓰기 위해 어렵사리 구한 물건이다. 이런 쓸데없는 일에 낭비할 셈이냐?”

가주의 꾸지람의 시에라의 고개가 숙여졌다. 마리엘라가 조용히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증명이 끝났으면 그 다음단계로 나아가고 싶은데요. 어떻게, 저와 협상을 할 마음이 드셨나요.”

가주가 다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마리엘라가 시에라와 소동을 벌이는 그 순간에 요동치던 마음을 다잡은 것 같았다.

“그대가 흑마법사를 위해 큰 계획을 한다는 건 랏데르시의 피로 증명되었으니 더 파고들려 하진 않겠어요. 하지만 역시 의심 가는 점이 없진 않군요.”

“의심이요?”

“묘하게 그리너드와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치 패권을 잡아야 하는 건 그대여야 한다는 듯이.”

딱.

가주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동시에 마리엘라의 주변으로 물로 만들어진 물기둥이 바닥에서부터 확 치솟았다. 그것들은 밧줄이 되어 순식간에 그녀의 발목과 손목을 꽁꽁 묶었다.

“지금 이게 무슨!”

“마력을 차단했습니다. 그대가 우리에게 마법을 쓰면 곤란하니까요. 아시겠지만 우리 파르니는 마법사들의 마법을 막는 데에 특화되어있어요. 마녀들의 흑마법이든, 신관들의 백마법이든. 그래서 ‘방어의 파르니’라고 불린 거고. 뭐, 모든 것은 과거의 영광으로 남았지만.”

가주는 손을 휘휘 내저어 그녀를 다시 의자 위로 앉혔다. 그리고 마법 양피지와 펜을 그녀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두 번째 질문에 답변을 해 보죠. 시나몬 파이에 들어갈 것과 빼야 하는 것은?”

마리엘라가 이를 아득 물었다.

“제가 순순히 답을 내어 드릴 것 같으세요?”

“……정보가 미흡하여 그대가 왕자비의 모친과 그 하녀들을 죽였는지 그 진실 여부는 하나도 모르지만, 그 대신 명확히 알고 있는 다른 사실이 있죠.”

가주는 그녀의 등 뒤로 다가왔다. 그리고 앞으로 묶인 탓에 불편하지만 글씨는 쓸 수 있는 마리엘라의 오른손에 친절히 잉크 묻힌 펜을 쥐여 주었다.

가주가 마리엘라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대가 마리안 왕자비와 각별한 사이라는 것.”

“그렇게 알려져 있기는 하죠.”

마리엘라가 정색하고 부정하자 가주가 작게 실소했다.

“알려져 있는 건지, 실제로 그러한 건지는 직접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가주는 고개를 돌려 문가에 있는 마녀에게 명령했다.

“마리안 왕자비를 데리고 와. 이 자리에서 그 목숨값을 재어보도록 하지.”

“잘 생각해 보셔야 할 겁니다. 지금 이런 행동은 저희와 척을 지겠다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으니까요.”

마리엘라의 으름장에 가주가 피식 웃었다.

“이해를 못하셨군요. 이건 척을 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것을.”

가주는 무릎을 굽혀 마리엘라와 시선을 마주했다.

덕분에 마리엘라는 가까이에서 가주의 눈동자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안에는 많은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뒤섞여 녹아 있었다. 마리엘라가 놀란 점은 가주의 내면에서 가장 번뜩이는 감정이 분노나 복수심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세월의 흔적으로 폭 가라앉은 눈두덩이.

지친 눈꺼풀 안에서 끝없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회한과 의구심.

“교단과 왕실에 침투했다고요? 아마도 그건 곁가지에 불과한 걸 겁니다. 제대로 파고들었다면 ‘그것’을 몰랐을 리가 없으니까.”

“그것?”

마리엘라는 눈살을 찌푸리며 가주의 말을 따라했다.

“우리가 데르샤바크에게 얻고자 하는 것. 아니…… 파헤쳐 파괴하고자 하는 것에 더 가깝겠군요.”

가주가 그녀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하얀돌의 비밀 말입니다.”

* * *

“……하여, 긴급히 기사들로 하여금 아렐 후작의 저택을 포위하도록 한 것입니다.”

요제프가 담담히 사건의 경위를 설명했다.

물론 그들이 보낸 마법 양피지나, 협상 중 몰래 암살자를 보낸 결과로 마법 방어막이 생성되었다는 등의 중요한 사항은 쏙 뺀 채로.

왕자비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대신들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재상인 알폰스 후작이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럼, 그 마법 방어막은 어찌 된 연유로…….”

요제프가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발뺌했다.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진짜로 아무것도 모르는 힘없고 무고한 왕자처럼 보였다.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아렐 후작은 눈앞의 저 사람이 제가 아는 요제프가 맞나 혼란에 휩싸였다.

요제프의 말을 들은 귀족들이 저들끼리 웅성거렸다.

“마녀일까요?”

“단언하지는 맙시다.”

“하나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거대한 마법 방어막을…….”

“그 저택이 파르니 방계가 소유했던 저택이지 않습니까. 어쩌면 흑마법사가 아니라, 그 집 자체가 정밀하게 만들어진 마법 용품일 수도 있지요.”

“섣부르게 행동하지 맙시다. 이 일을 교단이 알게 된다면…….”

귀족들 모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모두 성마전쟁을 겪어본 자들이었다.

아직도 전쟁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기억한다.

하늘을 뒤덮는 검은 연기, 무차별적으로 솟아올랐던 불기둥과 얼음 운석들.

인간의 상상력을 아득히 뛰어넘는 마녀들의 기상천외한 이능에 깊은 공포를 느꼈지만, 그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전쟁이 끝난 후 바레뎃샤가 보여줬던 무자비한 마녀심판이었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마녀라는 누명 아래 학살당했던가.

광기의 시대.

분노한 민중과 승리에 취한 교단의 손짓 아래 많은 비이성적인 일들이 벌어졌다.

그때는 그래도 되었다. 아니, 그렇게 여겨야만 살아남았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비겁했던 침묵을 기억한다.

언제 자신의 아내, 딸이 마녀로 지목 당할지 몰라 숨죽여 떨었던 새벽녘의 공기까지.

마리안 왕자비가 흑마법사 가문과 연관된 가문을 솎아냈을 때, 그들은 마지막 전쟁에서 겪었던 광기의 시대가 다시금 반복될까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이번 일에 신중을 기하기로 했다.

“일단은 납치범들의 정체를 알아내는 게 급선무겠군요.”

그들은 일단 왕자비를 납치해간 괴한들의 정체가 마녀인지 아닌지 판단하려 애썼다. 그래야 이번 일에 교단의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을 테니까.

누군가 아주 당연한 질문을 했다.

“아렐 후작의 하인들이라면서요.”

귀족들의 시선이 아렐 후작에게로 꽂혔다. 갑자기 이목이 집중되자, 아렐 후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 그것이…….”

말을 더듬던 아렐 후작을 구원해준 것은 요제프였다.

“아렐 후작의 고향에서 데리고 온 하녀와 하인들은 향수병을 이기지 못하고 그리너드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시종을 시켜 사용인들을 새로 구했다는군요. 공교롭게도…… 그들이 아샤칼 사람입니다.”

귀족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또?”

요제프가 정보를 던져 물꼬를 터주자, 귀족들이 알아서 아샤칼을 물어뜯었다.

“아샤칼 왕실이 그리너드에게 모든 죄를 떠넘기려는 것은 아닌가?”

“말이 되긴 하는 군요. 일이 그릇되자 상황을 정리하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여론이 한쪽으로 기울려고 할 때, 누군가 나서서 반대 의견을 내세웠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스케일이 너무 크지요.”

모두의 고개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에드먼드 파칼이었다.

에드먼드 파칼은 현재 사면초가인 상태였다. 혹여 잘못 엮일까 두려워진 아샤칼 왕실은 그를 외면하는 것을 선택했다.

베르단은 내전으로 인재를 비롯한 많은 것을 잃은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직 대륙 내 실권을 잡고 있는 강국이었다. 그런 베르단과 직접적으로 붙기에는 아샤칼이 지니게 될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거기다 이번 일은 아샤칼 왕실이 관여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파칼 공작이 제멋대로 일을 벌여 자기들에게 불똥을 튀겼다며 분노하고 있었다.

파칼 공작이 아샤칼로 돌아오면 이번 일과 관련하여 큰 징계를 받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아샤칼 사교계에 파다했다. 그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는 이미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이번 일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않는 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문제는 또 하나 있었다. 왕실이 그를 버렸다는 것은 그의 자금줄인 바우만 후작과의 연 역시 끊기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먼젓번 마리안이 말한 적 있듯, 그에게는 아버지의 공작위를 물려받기 전에 아샤칼로 도망간 과거가 있고, 후계자가 없는 귀족의 영지는 왕가에 귀속 시킨다는 베르단의 특별법 때문에 아버지의 영지를 물려받지 못했다.

아샤칼은 베르단 보다 척박한 땅이 많았고, 그의 영지 역시 그중 하나였다. 바우만 후작의 금전적 지원 없이는 전과 같은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기 힘들었다.

‘여기서 판을 뒤집지 않으면 승산이 없어.’

오늘 그가 칼을 갈며 이 회의에 참석한 이유였다. 그가 원래의 생활을 되찾으려면 왕자 부부가 몰락해야만 했다.

궁지에 몰린 에드먼드 파칼이 뻔뻔스레 목소리를 높였다.

“아샤칼 왕실이 왕세손 독살을 감추려고 납치극을 벌였다? 그것도 흑마법을 이용해서? 일을 너무 크게 벌인데다가 너무 속이 뻔히 보이지 않습니까. 저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파칼 공작은 일단 사람들이 쉬쉬거리며 뒤에서 떠들고 다니던 화젯거리를 수면위로 끌어 올렸다. 자극적인 이야기로 주목을 받았다 싶었을 때 진짜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아렐 후작의 저택에 잠입해 납치극을 벌이는 저들은 마녀입니다.”

그러자 즉각적으로 반발이 날아 들어왔다.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분명 마녀는 그때 다 죽었는데.”

그가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었다. 파칼 공작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반박했다.

“세상에 완전히는 없습니다. 교황께서 성기사단을 이끌고 대륙을 순회하시는 이유도 그 때문 아닙니까. 다른 나라로 피신한 흑마법사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다시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하나,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누군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파칼 공작에게 그것은 미끼를 문 물고기처럼 느껴졌다. 그가 인상을 한 움큼 찌푸리며 과장된 어조로 되물었다.

“베르단 수도에 거대한 마법 방어막이 떡하니 등장했는데 증거가 없다고요?”

파칼 공작이 강한 확신을 가지고 말하자, 회장의 분위기가 또 어수선해졌다.

혼란을 헤치고, 학자 타입의 남자가 앞으로 나와 차분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아직 세상에 남아있는 마법 용품을 이용한 걸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전쟁 때, 우리도 그들이 남긴 마법 용품을 이용하지 않았습니까. 엘바 전투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참전했던 기사들을 모두 흑마법사로 몰 생각은 아니겠지요.”

“뭐,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제 입장은 다릅니다. 일단 제 추리를 들어보시고 판단해주시지요.”

“그러겠습니다.”

“일단 제가 첩자를 보내 왕자비 전하를 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게 된 부분부터 이야기하지요. 갑자기 저를 반역자로 몰아가는 상황부터가 이상했습니다. 누명을 씌운 이를 찾으려 했으나 그것마저 쉽지 않았죠. 생각해보십시오, 왕세손 독살까지 하면서 저를 반역자로 몰 자가 여기서 누가 있을지.”

파칼 공작이 귀족들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귀족들을 통솔하는 우두머리처럼 굴었다.

“하나 이 일이 마녀들의 술수라고 생각하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아샤칼은 성마전쟁 때 지원군까지 보내준 사이 아닙니까. 마녀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눈엣가시 같은 아샤칼을 제거하고, 베르단을 집어삼키려면 어떤 수를 쓰려고 할지.”

그의 발언은 교단과 공조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분위기를 살피느라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겁 많은 귀족들에게 힘을 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의견을 폭넓게 듣고자 했던 이들, 줏대 없이 이리저리 갈대처럼 휘둘리는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귀족들이 작은 목소리로 수근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말이 되긴 하는군요.”

“함부로 교단을 끌어들여서는 안 되겠지만, 만약 진짜 마녀들의 짓이었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지요.”

“역시 교단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겠어요. 베르단은 바레뎃샤의 힘없이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이들의 소심한 목소리는 파칼 공작에게 크나큰 힘이 되었다. 파칼 공작은 거들먹거리며 귀족들 사이를 휘젓고 다녔다.

“그들이 무얼 원하든 절대 봐줘선 안 됩니다. 물론, 왕실을 지킬 기사단을 이 이상 차출하는 법도 없어야겠지요.”

알폰스 후작이 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까?”

“교단과 손을 잡아야지요. 바레뎃샤는 기꺼이 백마법사와 성기사단을 빌려줄 겁니다.”

회의장의 분위기가 반으로 갈렸다. 교단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마녀들을 무찔러야 된다는 쪽과, 아무리 그래도 왕자비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 옳지 않겠냐고 생각하는 쪽.

분위기는 반으로 갈렸지만, 전자를 주장하는 이들의 머릿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아무래도 왕자비의 친정인 리덴부르크 백작가가 수도에서 입지가 강한 가문이 아닌 데다가, 왕자비 자체도 이런저런 일들로 귀족들의 비호감을 축적했기에 그랬다.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이유는 어느 누구도 왕자 요제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요제프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꼭두각시 인형 같은 사람이었다. 눈치를 볼 필요도, 아부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양심 있는 누군가가 조심스레 반대 의견을 냈다.

이제 막 정계에 들어 온 혈기 넘치는 귀족이었다.

“그들이 왕자비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을 할 텐데요. 바레뎃샤는 인질보다 마녀 축출을 더 중시한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쯧.

파칼 공작이 대놓고 혀를 찼다. 그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질문을 한 귀족을 가르치듯 말했다.

“큰 그림을 보아야지요.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베르단 왕국의 안녕과 데르샤바크의 번영을 위해서라면, 또 바리 신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 희생은 감내해내야 합니다.”

대놓고 요제프를 무시하는 말에 회장 내 귀족들 대부분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에드먼드 파칼이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

파칼 공작은 뒤를 돌아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그는 가증스럽게 큰 몸짓으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간청하는 척 했다.

“하오니 왕자 전하, 마음은 조금 아프시겠지만 더 많은 이들의 평화와 안전을 위하여, 교단 바레뎃샤에게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파칼 공작은 요제프로부터 나올 대답을 속으로 셈 해보았다.

‘아내와 관련된 일이니 바로 알겠다고 고개 끄덕이진 않겠지. 눈물을 질질 짜겠지만, 대신들과 힘을 합쳐 윽박지른다면야.’

그는 자신에게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파칼 공작이 슬그머니 웃었다.

바로 그때였다.

상황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만 깜박깜박 뜨며 가만히 관망만 하고 있던 요제프에게서 의외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뭐,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긴 했지만…….”

“예?”

한숨과 함께 흘러나오는, 혼잣말인 듯, 불평불만인 듯 구분이 가지 않는 목소리. 그와 동시에 내비쳐진 심드렁한 표정은 귀족들로서는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에드먼드 파칼이 당황해 되묻자, 요제프가 짜증난 표정으로 신하들에게 못 박았다.

“싫습니다.”

“……왕자 전하?”

브랫 백작이 얼빠진 얼굴로 요제프를 불렀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는지 요제프가 피식 웃었다. 요제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심해 죽겠다는 눈빛으로 그들을 주욱 훑어보았다.

“교단은 무슨.”

그는 옆에 있던 호위기사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푸욱-.

그리고 그 검으로 에드먼드 파칼의 배를 찔렀다.

검술 연습용 볏짚을 베듯 무감한 표정을 하고선.

파칼 공작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는 칼에 꿰뚫린 제 배와 그 칼을 들고 있는 요제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쿨럭.

그의 입에서 피가 튀어나왔다.

“크흡, 지금, 무슨…… 짓을…….”

파칼 공작이 있는 힘을 다해 겨우 목소리를 냈다.

요제프는 그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며 비아냥거렸다.

“무슨 짓이긴. 하나 남은 사촌 형님의 배때기에 칼을 쑤셔 넣고 있는 중이지. 좀 더 품위 있게 말해 드릴까?”

일순 요제프의 두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요제프가 파칼 공작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감히 왕실의 권위를 넘보다니. 그대의 불경함에 분노를 금치 못하겠소, 에드먼드 파칼.”

요제프는 그 말을 뱉음과 동시에 파칼 공작의 배를 찌른 검 손잡이에 힘을 주었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칼이 좀 더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허억.”

파칼 공작이 고통에 겨운 소리를 냈다. 그가 요제프의 멱살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감히, 이러고도…… 무사할, 줄…….”

금방이라도 저주를 내뱉을 듯한 처절한 모습에도 요제프는 어깨 한 번 으쓱할 뿐이었다.

“그럼 잘 가시오. 하나뿐이었던 형제여.”

작별 인사를 끝낸 요제프가 그의 배에 꽂아 넣었던 검을 한 번에 빼냈다.

파칼 공작에게서 뿜어져 나온 피가 그의 전신을 흠뻑 적셨다.

파칼 공작은 배를 부여잡고 바닥을 기어갔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요제프는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던졌다. 전신에 사촌 형의 피를 흠뻑 적신 채로, 자신의 사촌형이 죽어가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알폰스 후작과 브랫 백작을 비롯한 회의장의 귀족들은 충격에 휩싸인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피를 철철 흘리며 도움을 청하는 파칼 남작을 일으켜 세울 생각도 하지 못했다.

파칼 남작은 몸이 뒤집힌 벌레처럼 자신의 피 웅덩이에 빠져 한참을 허우적댔다. 마침내 모든 움직임이 멎고, 그가 죽은 것처럼 보였을 때 요제프가 입을 열었다.

“내 안위를 걱정해 주다니, 그래도 혈연은 혈연이라 이건가. 하지만 불필요한 걱정이야. 나는 이 일을 이번 왕자비 납치 사건과 연관하여 다 같이 묻어 버릴 거거든.”

귀족 몇 더 죽이는 거야 이 기나긴 연극에 비해서 일도 아니지.

덧붙이는 말에 귀족들이 기겁하여 뒷걸음질 쳤다. 몇몇은 귀족의 품위와 품격 따위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문가로 달려갔다. 그러나 아무리 다급하게 문고리를 흔들어 봐도, 문은 철컹 소리만 낼 뿐 열릴 줄을 몰랐다.

“요제프 전하!”

“지, 지금 이게……!”

귀족들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요제프가 악마처럼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마음에 드나? 그동안 유약하고 순진해 그대들이 쉽게 생각했던 왕자가 알고 보니 개망나니 기질이 돋보이는 잔악한 폭군이었다는 결말이?”

“…….”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요제프는 그들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그것이 그들의 공포심을 더 자극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두려운가 보군. 아직도 주제 파악 못하고 배신감에 분노하거나 어처구니가 없어 보이는 이들도 몇 있어 보이네. 아무래도 상관없지. 어차피 그대들은 할 수 있는 게 없어. 뭐 어쩌겠는가.”

그가 아무렇지 않게 머리를 쓱 올려 넘겼다. 에드먼드 파칼의 굳은 피가 그의 머리카락을 고정시킨 까닭에 그의 훤칠한 이마와 눈썹이 드러났다.

“내가, 선왕의 유일한 적자인데.”

“……”

귀족들은 모두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오늘의 요제프와 어제의 요제프는 다르다.

과거의 오만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테다.

* * *

왕자의 집무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서걱서걱 펜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문밖에서 미하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중간보고 드립니다.”

그러나 텅 빈 방 안에서 대답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보고하라는 명을 기다리던 미하엘이 이상함을 느꼈다.

똑똑.

그는 조심스레 집무실 문을 두드려 보았다.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답이 없으시면 들어가 보겠습니다.”

끼이익.

그가 문을 열었다.

미하엘의 눈에 보인 것은 텅 빈 집무실. 그리고…….

“어……?”

빨리 답신을 확인하라고 재촉하는 듯 빛이 번쩍이는 마법 양피지.

미하엘은 서둘러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인 양피지를 확인했다.

시나몬을 뺀 사과 파이. 라즈베리 가니쉬를 얹어서.

양피지 위에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 적혀 있었다.

* * *

회의장의 분위기는 얼음장같이 싸늘했다.

모두가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데 요제프 혼자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곤 왕좌에 앉아 있었다. 요제프의 머리카락, 속눈썹 끝, 한쪽 뺨에 덕지덕지 묻은 사람의 피가, 그를 세상에 둘도 없는 암군처럼 보이게 했다.

침묵하는 대신들과 여유로운 왕자 사이에 에드먼드 파칼의 시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시체 주변으로 가득 고인 피 웅덩이.

그 웅덩이 너머로 왕좌에 앉은 요제프가 비쳤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날파리가 시체 위로 몸을 안착한 그 순간이었다.

쾅쾅!

“전하, 미하엘입니다. 급히 전할 말이 있습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미하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요제프가 고개를 까딱하며 바깥의 시종에게 명했다.

“문을 열라.”

문이 열리고 미하엘이 회의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심상치 않은 회의장 풍경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게, 지금 무슨…….”

겁먹은 귀족들은 무엇이며, 저 가운데에 엎어져 있는 또 무엇인가 싶었다.

놀라 주변을 살피는 그에게, 요제프는 대수롭지 않은 일에 신경 쓰지 말라는 듯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사랑에 눈 먼 남자처럼 굴게, 미하엘 경. 이것저것 다 살피다간 원하는 걸 쟁취하지 못해. 그래서, 급히 전할 말은?”

미하엘은 시체의 몸을 뒤집어 신원을 확인하려다가 곧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들고 왔던 마법 양피지를 요제프에게 건넸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이 왔습니다.”

시종일관 여유로웠던 요제프의 표정이 돌변했다.

“서재로 가서 대화하도록 하지. 이봐.”

그가 호위기사를 불렀다.

“예.”

“저놈의 시체는 옆방에 따로 보관하고, 저것들은…… 일단 여기다 가둬 놓도록 하지.”

요제프가 에드먼드 파칼의 시체와 귀족들을 순서대로 가리켰다.

“전하……!”

귀족들이 요제프를 부르며 애원했다.

요제프는 가당찮다는 의미의 미소와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누가 그대의 전하인가? 나는 이런 머저리 같은 놈들을 신하로 거둔 적이 없거늘.”

회의장을 빠져나오며 그가 챙긴 것은 베르단의 귀족이 아닌, 그리너드의 외교관이었다.

“아렐 후작, 그대는 나를 따라오게.”

“아…… 예!”

요제프의 행보에 긴장을 바짝 한 아렐 후작이 힘차게 대답하며 그를 따랐다.

회의장 안에 갇히게 된 귀족들은 절망에 젖은 얼굴로 요제프와 그 일당이 떠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문단속 철저히 하도록.”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요제프는 싸늘한 태도를 유지했다.

* * *

왕자의 집무실에 세 사람이 모였다.

요제프, 미하엘, 아렐 후작.

요제프가 펜을 들어 납치범들에게 답신을 보냈다.

확인이 늦었습니다.

뒤늦게 답을 찾아 보낸 걸 보니

제 마리 아가씨를 찾은 듯하군요.

그녀와 필담을 나누고 싶습니다.

가능합니까.

마리엘라 코부르덴입니다.

저쪽에서 협상을 계속 진행하길 바란다네요.

요제프는 한눈에 마리엘라의 필적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일부러 그녀를 의심하는 척했다. 영리한 그녀가 힌트를 쉽게 넘겨줄 수 있도록 빌미를 남기려는 것이다.

그대가 나의 마리 아가씨라는 걸 어찌 믿는단 말이지?

왕비님의 브로치를 기억하세요.

전하께서 연못에 세 번 던진 그 브로치요.

마리엘라의 답장을 받은 요제프가 픽 웃었다. 그가 빠른 속도로 글씨를 써 내려갔다.

그래. 과연 그대가 맞군.

별일 없었나? 어디 다친 곳은 없고?

협상을 진행하죠.

글씨체가 달라졌다.

인질범이 마리엘라에게서 펜을 빼앗고 협상 테이블에 앉은 것이다.

마리엘라와 필담을 나눌 때는 한결 누그러졌던 요제프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원하는 것이 뭡니까.

왕가의 비밀.

감춰둔 비밀이 없어 드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잠시 상대방 쪽에서 답이 없었다. 요제프는 침착해지려 애쓰며 빈 양피지를 노려보았다.

몇 분 후, 마법 양피지에 글자가 새겨졌다.

저희가 너무 온순하게 나왔나 봅니다.

멋대로 협상을 좌우하려는 것도, 협상을 깨고 암살자를 보낸 것도 모르는 척 넘어가 주려 하니 본인의 잘못은 물론, 주도권을 누가 잡고 있는지 잊어버리시는군요.

그럼 긴장감을 좀 부여해드리도록 하지요.

눈가가 파르르 떨리긴 했지만 그 외엔 별 다른 표정 변화가 없는 요제프와 달리, 미하엘과 아렐 후작은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다음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서걱서걱, 펜 소리와 함께 정갈한 글씨가 양피지 위로 떠올랐다.

내일 밤 9시.

마리엘라 코부르덴을 처형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제프가 펜을 들어 다급하게 글을 써 내려갔다.

갑자기 이렇

그러나 그가 문장을 만들기도 전에 상대 쪽에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럼 내일 정오에 다시 연락드리죠.

마법 양피지가 빛을 잃고 도르륵 말렸다.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모르겠으나, 상대 쪽에서 더는 연락을 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방 안에 허탈함이 맴돌았다.

요제프는 힘이 탁 빠진 멍한 눈으로 빈 책상만 내려다보았다. 그의 양 옆에 섰던 아렐 후작과 미하엘은 요제프의 눈치를 봤다.

그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부탁 받은 일을 모조리 처리하고 왔는데…… 분위기가 대체 왜 이러지?”

죽은 새 두 마리와 구리 상자 하나를 들고 온 율리안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네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율리안은 요제프를 통해 그간 벌어졌던 일들을 알게 되었다.

“그래, 그렇게 되었군.”

그가 착잡한 표정으로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상상했던 것들 중 최악의 결과였다.

율리안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생각을 정리하게 된 요제프는 침착함을 되찾았다. 요제프가 다른 사람들을 다독였다.

“침울해 있을 틈이 없어. 내일 밤 9시까지 뭐라도 해야지. 오늘 협상에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야. 마리엘라가 범인에 대한 힌트를 보낸 것 같거든. 연못 말이야.”

“연못?”

율리안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요제프가 방긋 웃으며 부연 설명을 했다.

“내가 어릴 적에 꽤 개구쟁이였거든. 인어에게 선물을 준다며 어머니 보석들을 죄다 연못에 던져버리곤 했지. 그런데 세 번이란 말을 한 적은 없어. 이게 무슨 의미일까.”

두 사람의 표정이 일순 진지해졌다. 율리안은 팔짱을 낀 채로 생각에 잠겼다.

“세 번, 세 번이라…….”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옆에서 같이 고민에 빠졌던 요제프가 불현듯 물병을 들었다. 그는 책상 위에 물을 조금 쏟고는, 두 번째 손가락으로 물웅덩이를 가볍게 건들었다.

물웅덩이 위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두 사람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고, 곧 무언가를 깨달았다.

“!”

요제프와 율리안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같은 단어가 나왔다.

“파르니.”

한 때 베르단 정계를 휩쓸었던 4대 흑 마법사 가문에게는 각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 있다.

화염 마법이 주 능력인 한 가문은 검은 화염, 치료 마법으로 유명한 르베르크는 전나무 잎 2개를 형상화했고, 정신 조종 마법에 통달했던 랏 데르시는 사선으로 기울어져 있고 가운데 선이 조금 더 긴 빗금 세 개를, 그리고 방어 마법을 주로 쓰던 파르니는 파동을 연상시키는 원 세 개를 가문의 문양으로 삼았다.

마리엘라는 바로 이 상징을 이용해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를 알린 것이다.

예상도 못한 적의 정체에 미하엘이 입을 떡 벌리고 경악했다.

아렐 후작도 그들의 빠른 접근에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서, 설마요…… 분명 마녀들은 멸족했는데.”

“맞습니다. 그것만으로 확신하기엔 아직…….”

요제프와 율리안은 두 사람의 말을 싸그리 무시하고, 자기들끼리만 아는 대화를 했다.

“파르니의 마녀들이 데르샤바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려 하고 있군.”

요제프의 말을 들은 율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바레뎃샤는 안 돼. 교단이 아는 순간 그 누구도…….”

“보호 받지 못하겠지. 과거, 우리 어머니처럼.”

요제프의 눈에 불신이 스쳤다. 율리안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데르샤바크 왕가와 바이르 공작가는 3차 성마대전에서 많은 것을 잃었다.

당시 어린 아이였던 요제프가 기억하는 장면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그의 어머니가 마녀의 저주에 고통스러워하며 천천히 죽어가는 순간이었다.

왕가와 교단의 승리가 거의 확실시 된 순간이었다. 요제프의 어머니에게 저주를 건 르베르크의 마녀들은 전쟁을 중단하고, 마녀들의 퇴각로를 만들어 주면 모든 것을 해결해 주겠다고 했지만 교단은 가차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푸르게 변한 살이 점차 검게 썩어가는 것을 느끼며 죽었다. 어머니의 장례식 이후 요제프는 바레뎃샤를 믿지 않았다.

“광신도처럼 눈이 뒤집혀 마녀를 멸족시키는 것에만 집중할 거야. 다른 사람들의 생명 따위는 알 바가 아니겠지. 하나, 그렇게 큰 방어막이 작동한 이상. 교단이 이 일을 모르진 않을 텐데.”

걱정하는 요제프의 말에 율리안이 해결책을 내놓았다.

“내 선에서 막을 수 있어.”

옆에서 잠자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렐 후작이 조심스레 한마디 보탰다.

“그보다 중요한 건, 하얀 돌 없이 마녀를 해치울 수 있느냐……가 아닐까요.”

“그렇긴 하지.”

그 말에 두 사람이 수긍했다.

요제프가 율리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율리안, 마녀의 방어막을 검기로 파괴할 수가 있나?”

“최선을 다해 보지. 하나, 도움이 좀 필요해. 저 소년을 빌려 가도 되나?”

율리안의 시선 끝이 미하엘에게로 향했다.

미하엘의 등이 긴장으로 꼿꼿해졌다. 마녀와 싸워 사랑하는 연인을 구해야 하는 작금의 상황에 더해, 모든 기사들의 존경을 받는 율리안의 지목을 받아 그와 함께 마녀를 해치우러 간다는 것에 부담감을 느꼈던 것이다.

미하엘의 굳은 표정을 슬쩍 본 요제프가 귀엽다는 듯 피식 웃었다.

“마리안의 귀염둥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시간을 지체할 수 없던 율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지금 당장 떠나도록 하지. 일어나라, 미하엘.”

그는 요제프에게 인사를 하지도 않고 바로 자리를 떠났다.

“그럼 저도 따라 나가 보겠습니다.”

“그리하게.”

율리안의 뒤를 미하엘이 다급히 따랐다.

갑작스레 두 사람이 떠나자,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아렐 후작도 일어날 준비를 했다.

“그럼 저도 같이…….”

서둘러 두 사람을 쫓아가려는 아렐 후작을 잡아 선 것은 요제프의 차분한 음성이었다.

“아니요, 후작께서는 저와 함께 이곳에 남으시지요.”

“예? 하오나…….”

아렐 후작이 어벙한 얼굴로 율리안이 떠난 자리와 요제프를 번갈아 보았다. 그 나름의 소심한 반항이었다.

끝까지 가면을 벗지 않는 그 집요함에 요제프가 푸스스 웃었다. 싸늘한 두 눈동자는 그의 웃음이 긍정적인 의미가 아님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요제프의 머리와 옷에는 여전히 에드먼드 파칼의 굳은 피가 스며들어 있었다.

“이건 청이 아닙니다. 방으로 들어오는 바이르 공작을 보고 짐작하셨을 텐데요. 우리들이 처음부터 그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걸.”

“무슨…….”

요제프가 아렐 후작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회의장에 가기 전에, 율리안에게 따로 부탁해 두었지. 궁수들을 이끌고 정원으로 가서 성안을 드나드는 새들을 전부 쏴 죽이라고.”

그는 손을 뻗어 율리안이 가지고 온 죽은 새 두 마리를 들었다. 죽은 새의 발목에는 각각 하나씩 쪽지가 묶여 있었다.

요제프는 쪽지 하나를 펼쳐 읽었다.

“‘일정을 앞당기겠습니다. 내일 밤 9시, 거사를 치르도록 하지요.’ 흠, 이건 파르니의 잔당들이 보낸 것일 테고.”

그는 다른 하나를 마저 꺼내 읽었다.

“‘왕자의 동태가 수상합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그에 대해 잘못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예상치 못한 행동을 보이기 전에 어서 빨리 마리엘라의 안전을 확인시켜 주시지요.’ 그래, 이게 그대가 보낸 서한인가 보군.”

아렐 후작이 주먹을 꽉 쥐었다. 요제프의 비아냥은 멈출 줄을 몰랐다.

“너무 뻔하지 않나. 마법 용품이나 첩자 없이 저택의 마녀들과 소통하는 방법 치고는.”

순박하고 부드럽게만 보이던 후작의 얼굴이 점점 굳었다.

“증거를 가지고 오시니 부정할 수가 없군요. 그럼 이제 저를 죽이실 건지요.”

그의 예민하고 날카로운 표정을 접한 요제프는 속으로 작게 탄식했다.

왜 몰랐을까, 자신이 유약하고 보잘것없는 왕자를 연기해냈듯 다른 누군가도 그리할 수 있다는 것을.

요제프는 아렐 후작에게 약간의 동질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찰나의 감정이었고, 그에게 중요한 것은 마리엘라를 무사히 구출해내는 것이었다.

“죽여? 내가 왜? 안타깝지만 그대의 정체 따윈 내게 별 감흥을 주지 않는다네. 그리너드의 속내야 뻔하지.”

시간을 내어 줘도 아렐 후작이 제 자리로 돌아올 생각을 않자, 요제프가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렐 후작에게 다가간 그는 율리안이 가지고 왔던 구리 상자를 내밀었다. 아렐 후작이 머뭇거리다 그 상자를 받아 열었다.

상자 안 물건을 확인한 아렐 후작이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제프는 그 반응을 즐기며 거들먹거렸다.

“그리너드를 위해 내 직접 마련한 선물인데 어떠한가.”

“이것을 왜…….”

“대놓고 말하지, 그대들을 이간질하기 위함이라네.”

“…….”

아렐 후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구리 상자 안에 들어있는 ‘무언가’와 요제프를 번갈아 보았다. 아무리 봐도 거짓을 말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도대체 이것을 왜?’

아렐 후작이 끝까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자, 요제프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낮잡아 보았다. 요제프가 선심 쓰겠다는 듯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공통점이 없는 두 세력이 힘을 합쳐 왕자비를 납치했다. 한쪽은 마녀, 또 다른 한쪽은 나라를 잃은 그리너드 왕실. 오고 갔던 말들이야 뻔하지. 마녀는 독립을 도와준다 했겠고, 그리너드는 그 사실이 달가우면서도 내심 불안했겠지. 마녀를 들였다가 공포 정치에 휘둘렸고, 끝내 세 차례 내전을 치루었던 베르단의 역사가 코앞에 있었거든. 두려웠겠지. 아샤칼에 휘둘리던 그리너드 왕실이 이번엔 그들의 손에 좌지우지될까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상황 판단이었다. 아렐 후작은 대체 이 남자가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지 두려워졌다.

툭.

요제프의 손가락 끝이 아렐 후작이 쥐고 있는 구리 상자 위로 닿았다.

“그래서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바로 이 ‘하얀 돌’ 말이야.”

“농이 과하시군요, 이게 어떻게 하얀 돌이란 말입니까. 이것은 그저…….”

요제프의 말을 부정하며 상자안의 끔찍한 것을 응시하던 아렐 후작은 곧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아렐 후작이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하얀 돌은…….”

요제프가 이제야 알았냐는 듯 씨익 웃어 보였다.

“그래, 바로 그것이라네. 별것 아니지만 우리 가문 사람들에게는 저승까지 들고 가야 할 치부가 되었지. 이것을 아는 자는 딱 두 사람. 왕자인 나와 교황 로베르토 가르뎅. 이제 세 사람이 되었군 그래.”

아렐 후작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상자안의 그것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요제프가 구리 상자를 아렐 후작 쪽으로 밀었다.

“이것을 그대에게 주겠네. 그리너드에는 그 어떤 피해도 가지 않게 하겠어. 하지만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내가 원하는 건 별거 없어. 그대는 단 한 가지 정보만 내게 넘기면 되네.”

그가 아렐 후작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마녀들의 진짜 목적을 말해.”

“…….”

그것은 그리너드의 앞날을 두고 하는, 일생일대의 거래였다.

아렐 후작은 고개를 푹 숙였다. 구리 상자를 든 그의 손이 달달 떨렸다.

요제프는 느긋하게 아렐 후작을 지켜보았다. 안 그래도 궁지에 몰린 그를 더 압박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위협은 에드먼드 파칼의 죽음으로 충분했고, 회유 역시 저것으로 완벽해. 이제 남은 것은 시간뿐이야.’

요제프는 아렐 후작이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자신이 원하는 선택을 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잠시 후, 아렐 후작이 보인 반응은 요제프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크큭.”

아렐 후작은 고개를 숙인 채로 웃어댔다.

“하하. 푸하하하!”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참지 못하는 행동에 요제프가 불쾌함을 드러냈다.

“왜 그렇게 웃지?”

“기분이 이상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일을 꼬고 꼬아 원하는 것을 얻고자 했는데, 생각지도 않게 제 손에 모든 것이 다 들어오다니.”

“모든 것?”

요제프의 한쪽 눈썹이 쓱 올라갔다. 위협적인 그 모습에 아렐 후작은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두 눈동자에 형형함이 깃들었다.

“파르니의 마녀들이 원하는 건 단 한 가지입니다.”

이제 더는 협상할 거리가 없다.

모든 판단을 마친 아렐 후작이 꽁꽁 숨겨왔던 진실을 드러냈다.

“하얀 돌의 제조 방법을 알아내는 것.”

* * *

비슷한 시각이었다.

창고 같은 방에 갇힌 마리엘라는 충격 받은 표정으로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파르니의 마녀들이 떠들어댔던 말이 웽웽 울렸다.

‘하얀돌은 시간이 지날수록 효력이 약해지는 돌이야.’

‘우린 하얀 돌을 파괴했어. 분명 그 망할 것을 파괴 했다고.’

‘그것은 없애도, 없애도 계속 나타났어. 마치…… 제조법이 따로 있는 것처럼.’

그러고 보니 과거에 요제프가 하얀돌에 대한 설명을 머뭇거렸던 적이 있었다.

율리안이 갑자기 등장해 끝내 대답을 듣지 못했던 것이 기억난다.

“하얀 돌과 안식의 축복 간의 차이점이 뭐죠?”

마리엘라는 과거 자신이 했던 질문을 복기해보았다.

아무것도 몰랐던 그녀의 질문을 들은 순간, 요제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리엘라는 머릿속에서 엉키고 꼬인 정보들을 정리했다.

지난 일 년간 그녀가 부지런히 모았던 정보들이 단 한 문장으로 정의되었다.

“……하얀돌과 안식의 축복, 그 사이에 뭔가가 있어.”

혼란으로 흐리멍덩해졌던 그녀의 눈빛이 점점 또렷해졌다.

데르샤바크 왕가가 숨기고 싶어 하는 어떤 것.

거대한 진실이 저 너머에 있다.

<5권에 계속> <공금/갠소> 우리끼리만 보기!!! by S.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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