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다.
마리엘라는 마리안, 데이지와 함께 티타임을 즐겼다.
“향이 아주 좋네요.”
하녀였던 시절과 비교해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들의 차 시중을 들던 위치에서 함께 차를 마시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
“원하신다면 엇비슷한 것으로 더 구해 올 수 있습니다. 고향에 연락을 넣을까요?”
그리고 그들 사이에 그리너드의 귀족인 아렐 후작이 자연스레 앉아 있다는 점이었다.
아렐 후작의 과한 친절에 마리엘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아니에요.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너드에서는 흔한 차 종류거든요.”
마리엘라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조용히 차를 홀짝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비록 그리너드의 귀족이라고 하나, 후작과 서로 존중하면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그동안 그녀와 귀족들의 관계는 착취밖에 없었다.
젊음과 아름다움을 착취당하거나, 노동력을 착취당하거나.
이렇게 인간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감개무량했다.
‘이제 익숙해 져야 할 일이지.’
마누엘 코부르덴이 회의장에 등장해 폭탄선언을 한 지 한 달 반이 지났다.
마리엘라는 요제프 왕자의 지지 하에 공식적으로 코부르덴 후작위를 물려받았다.
여자가 작위를 받을 수는 없다며 반발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마누엘 코부르덴이 여성의 정계 진출을 허하는 법 구절을 찾아와 그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 법은 요제프의 증조부인 바욘 2세가 직접 제정한 법이었다. 세 차례의 성마전쟁이 마녀들의 존재를 세상에서 지워버렸어도, 그들의 흔적까지는 모두 지워버릴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 덕에 마리엘라는 무사히 코부르덴 후작이 될 수 있었다.
그 후에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마누엘 코부르덴과 함께 영지 시찰을 다녀왔고, 그의 재산 일부분을 미리 상속 받았다. 왕성에 올라오자마자 바로 마리안의 시녀가 되었다. 수도에 알맞은 저택이 나올 때까지 당분간 왕성 내, 마리안의 처소 근처에서 지내기로 했다. 마리엘라는 일단 이 생활에 적응해 보기로 했다.
그녀가 작위를 받은 이후로 요제프는 더 이상 정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이 상황 자체가 만족스러워 보였다. 불행 중 다행인 일이었다.
‘적응은 할 만큼 한 것 같고. 다시 찬찬히 계획을 짜야지.’
요제프와 밤을 보냈고, 그가 원하는 대로 코부르덴 후작이 되었지만 마리엘라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녀는 다과로 나온 케이크를 작게 잘라 먹으며 재기할 기회를 노렸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보겠습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다음번에도 또 만나 뵙길 바라요.”
티타임이 끝났다.
아렐 후작과 마리안이 사이좋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옆에서 데이지가 얼굴을 붉혔다. 아무래도 아렐 후작에게 마음을 빼앗긴 모양이었다.
마리엘라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함께 수도 내 저택을 둘러보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선왕의 재상이었던 마누엘 코부르덴은 이십 년 전 왕성 근처에 있는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자신의 영지로 내려갔다. 그래서 그녀는 수도에 새 저택을 구해야 했는데, 수도에는 현재 코부르덴 후작같이 고위 귀족급이 머물 만한 고급 저택이 없었다.
그녀가 여전히 평민이었다면 집이야 외양이 어떠하든 지붕과 벽만 멀쩡하다면 전부 다 괜찮은 일이었겠지만, 귀족이 된 그녀에게는 벽지의 무늬 하나하나까지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되었다.
평판은 곧 권력이니까.
어쨌든, 수도에 그녀의 권위에 적합한 저택이 남아있는 않은 탓에 남은 선택지는 낡거나 남들이 꺼리는 집을 구입해서 전부 다 뜯어 고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은 세드릭 아렐 후작이 적임자였다.
후작이 머물고 있는 저택은 본디 파르니 가문의 방계가 소유했던 곳으로, 3차 성마전쟁을 겪고도 그을린 자국 몇 개 말고는 별 타격을 입지 않은 저택이었다.
그 저택에서 벌어진 일들과 그 저택의 주인들이 어떻게 된 줄 알고 있는 베르단 사람들은 그곳을 유령의 집 마냥 꺼려했지만, 그리너드에서 온 아렐 후작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후작은 본디 파르니 가문의 것이었던 저택을 싼값에 매입해 격에 맞춰 꾸몄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은 그곳이 흑마법사 가문의 집이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저도 오늘은 이만-”
마리안에게 간단한 인사말을 건네려고 하는데, 갑자기 마리안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저기, 마리엘라.”
그리고 간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렐 후작이 있어 직접 입 밖으로 부탁을 꺼내지 않았지만, 마리엘라는 그녀가 요청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미하엘을 만나 달라는 의미였다.
마리엘라 덕분에 지하 감옥에서 나오게 된 미하엘은 그 직후 마리안과의 모든 연결고리를 끊었다.
처음에는 이게 뭔지 몰라 우왕좌왕하던 마리안은 뒤늦게 미하엘과 마리엘라가 마상 창 시합에서 서로를 보았다는 소리를 듣고 좌절했다.
평소였다면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난동 부렸을 마리안이었지만, 이번만은 유독 잠잠했다. 그것이 몰래 미하엘을 만났던 일 때문이라는 걸 몰랐던 마리엘라는 마리안이 철이 들었다고만 생각했다.
“걱정 마세요. 열흘 안으로 해결할 테니.”
마리엘라는 마리안의 손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
* * *
마리엘라는 반나절만에 수도의 저택을 거의 다 둘러보았다. 애초에 매물이 몇 개 나오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매물로 나온 저택 대부분은 마녀와 관련된 곳이었다. 한 가문의 소유였다던가, 랏 데르시의 마법 교습소, 파르니의 마지막 마녀가 죽은 장소 같은 수식어들이 가격표 옆에 따라붙었다.
저택을 다 둘러본 후, 잠시 들린 카페.
소문의 ‘코부르덴 여후작’의 등장에 귀족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마리엘라는 그들의 따가운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아렐 후작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었다.
“마음에 든 곳이 있으신가요?”
“글쎄요. 사람 살기 적합한 곳은 아닌 것 같네요.”
매물로 나온 저택 대부분은 상태가 아주 심각했다.
동네 꼬마들의 장난질 때문이었다.
마녀를 향한 증오와 적개심은 세월이 지나면서 조롱과 멸시로 변질되었다.
성마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 아이들이 나뭇가지와 돌멩이를 들고 마녀의 집에 쳐들어오기 시작했고, 그것은 곧 하나의 놀이가 되었다.
그녀가 들렀던 집 열의 아홉은 그런 꼬맹이들의 장난질로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제 생각도 비슷했습니다.”
아렐 후작이 어색하게 웃으며 맞장구 쳤다.
안절부절못하면서 재빠르게 그녀의 의견에 동조하는 꼴이 수상했다. 그녀와 같은 감정,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어필하고 싶어 하는 몸짓.
‘흐음.’
마리엘라는 찻잔 너머로 세드릭 아렐의 동태를 살폈다.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라산 사냥터의 늙은 귀족들을 떠올리게 한다.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탁.
그녀는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만 일어날까요. 하루 종일 걸어 다녔더니 피로가 몰려오는군요.”
그 말에 아렐 후작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을 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찔린 것이 분명했다.
그는 곧 시무룩하게 사과했다.
“숙녀분의 체력을 생각하지 못했군요. 제 불찰입니다.”
“괜찮습니다.”
마리엘라는 무덤덤하게 사과를 받아주었다.
정말 괜찮았다. 어차피 그녀는 피곤하지 않았으니까.
몇 달 전만 해도 온 왕성을 돌아다니며 집안일을 하던 사람이 이깟 집 좀 둘러 봤다고 피곤할 리가 없었다.
모두 다 미하엘을 만날 시간을 벌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 * *
마리안에게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마리엘라라고 별 다른 취급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미하엘은 마리엘라 역시도 피했다. 사람을 시켜 불러내는 것도, 직접 찾아가는 것도 모두 통하지 않았다. 그는 사방이 꽉 막힌 벽 같은 사람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이유로 그녀는 그를 간단히 불러냈다.
비법은 별 것 없었다.
“왕자 전하, 미하엘 슈리츠입니다.”
그저 요제프의 이름을 이용하면 되었다.
요제프가 없는 요제프의 집무실, 마리엘라는 문 밖에서 들리는 미하엘의 목소리에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다루기 쉬운 자를 만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왕자 전하.”
미하엘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그녀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을 요제프의 분노라고 생각했는지, 문밖에서 미하엘이 고해성사를 시작했다.
“……전하께서 느끼셨을 기분을 압니다. 혹, 제 죄를 물으실 계획이시라면 주저하지 않고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제 선에서 끝내고 모든 일을 묻어 주십시오.”
마리엘라가 성큼성큼 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를 막아야 했다. 이 이상 마리안의 부정이 알려지면 곤란해지니까.
벌컥, 문이 열렸다.
“그럴 필요 없어요. 당신을 부른 용건은 그게 아니니까.”
마리엘라는 자신의 얼굴을 확인한 후, 안면 근육을 종잇장 마냥 구기는 미하엘을 마주했다. 그의 눈빛에는 경멸을 띠고 있었다.
“돌아가 보겠습니다.”
미하엘이 절도 있는 몸짓으로 뒤를 돌았다. 마리엘라는 얄밉게 양쪽 눈썹을 쓱 올리며 물었다.
“왕자의 명을 거역하고?”
그 말에 그가 멈칫했다.
“저는 전하의 명만 받습니다.”
“요제프의 명이 맞아요. 그가 당신을 불렀죠, 나를 위해서.”
“도대체 요제프 전하와 무슨 사이입니까? 당신은 왕자비…… 아니, 리덴부르크가에서 올라온 하녀 출신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다시 그녀 쪽으로 몸을 튼 미하엘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아직 덜 자란 몸이라지만, 그래도 기세 하나만큼은 성인 기사와 견주어서 절대 지지 않았다.
그런 미하엘의 분노를 마주하고도 마리엘라는 덤덤했다. 그녀는 문을 좀 더 열어 그가 들어올 수 있을 만큼의 틈을 벌렸다.
“그런 은밀한 이야기를 복도에서 나누어야 되겠어요? 들어오시죠.”
미하엘은 의심쩍은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정치에 익숙하지 않은 그의 머리로도 그녀의 말이 맞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경계를 누그러트리지 않으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달칵, 문이 잠겼고 이제야 두 사람 간의 허울 없는 대화가 시작될 수 있었다.
우선 마리엘라는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생각하는 게 모두 맞아요. 마리안과는 자매와도 다름없는 사이고, 요제프와도 꽤 깊은 관계죠.”
“어떻게 감히 그런……!”
그 말에 미하엘 슈리츠가 격노했다.
그녀의 행적은 그의 기준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리엘라가 픽 웃으며 그의 모순을 지적했다.
“당신과 마리안과의 관계는 그 ‘어떻게 감히’에 포함되지 않는 관계인가 보죠?”
“…….”
“몰랐다는 변명 뒤에 수치심을 감추려 하지 말아요, 슈리츠 경. 그대 내면의 연심이 아직 꺼지지 않았음을 알고 있으니.”
마음이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면 마리안 대신 자신이 죽겠다는 말을 꺼낼 리가 없었다. 미하엘은 착하고 순한 청년이었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대쪽 같은 면모가 있었다. 만약 그가 마리안에 대한 마음을 다 접은 상태였다면 그녀 대신 죽겠다는 말 대신 그녀와 같이 처벌 받겠다고 할 것이었다.
저 순수한 청년의 머릿속에는 모든 죄인은 죗값에 따라 공평하게 처벌 받아야 한다는 문장이 진리처럼 자리 잡고 있을 테니까.
미하엘이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수없이 부정했던, 마리안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제 그만 피할 때도 되지 않았나요?”
마리엘라의 질문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후작께서는 제 마음을 모르십니다.”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
“마리안을 향한 절절한 사랑이나, 요제프를 향한 충성심 따위는 제 관심사가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건 하나예요. 태도를 확실히 하세요. 끝내던가, 아님 또 여태까지처럼 어영부영 이어가던가.”
미하엘이 고개를 들어 마리엘라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현실적인 이야기만 하는 마리엘라가 마녀처럼 느껴졌다.
“기만이라는 단어를 아시나요.”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잘 압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두 사람은 이미 사랑에 빠졌고, 이제 선택할 시간이죠.”
“…….”
“환상에서 깨어나세요, 슈리츠 경.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경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사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답니다. 비겁과 비열 사이에서 선택하셔야지요.”
비겁한 도망이냐, 비열한 사랑이냐.
마리엘라가 쥐어준 두 개의 선택지에 미하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참고로 저는 두 개 다 해봤습니다.”
도망도 치고, 사랑도 해 보고.
가볍게 덧붙이는 그녀의 말을 듣고 미하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더 가치 있었습니까.”
마리엘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을 해줬다.
“둘 다 별거 아니었어요.”
그런 쓸데없는 것에 의미를 찾지 말아요. 어차피 남는 건 성가심 뿐이니까.
그녀가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충고했다.
* * *
마리엘라가 미하엘을 만나 대화를 나눈 지 닷새가 지났다. 그 닷새 동안 마리안은 초조함과 불안함으로 비쩍비쩍 말라갔다.
보다 못한 마리엘라가 그녀에게 산책을 제안했다. 햇빛이라도 맞으면 상태가 한결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산책?”
“요 앞에 수선화가 만개했더라고요. 적적하게 앉아 계시느니 바람도 쐴 겸, 잠시 정원을 산책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흠.”
그 말에 마리안이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는 마리엘라에게 슬쩍 제안했다.
“아렐 후작도 함께하면 어떨까?”
마리엘라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가벼운 정원 산책에 굳이 아렐 후작을 부를 필요가 있냐는 뜻이었다.
마리안이 황급히 덧붙였다.
“항상 우리끼리만 다녔잖아. 난 좀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
그 말이 더 수상했다.
‘이십 오년 동안 백작가에서 아가씨 친구는 저 하나였던 것 같은데요.’
마리엘라는 그 말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죠.”
마리안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 졌다.
‘미하엘의 관계가 파탄 난 지금, 뜬금없이 남의 연애사에 연연할 리는 없고.’
마리엘라는 마리안의 꿍꿍이가 뭔지 밝혀질 때까지 두고 보기로 했다.
* * *
새싹이 막 움트는 중인 룩센투크의 정원.
갑자기 찬바람이 크게 불었다.
마리엘라가 바람에 흩날리는 숄을 손으로 꽉 여미자, 아렐 후작이 제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 위로 얹어 주었다.
“바람이 아직 차군요.”
“아직 초봄이니까요.”
정원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 갑자기 마리안이 머리가 어지럽다며 데이지를 데리고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눈에 빤히 보이는 엮어주기에 마리엘라의 의심이 점점 더 깊어졌다.
‘갑자기 왜?’
아무리 마리안이 통속 소설에서 나오는 장면을 고대로 재현해내는 기행을 종종 저지르곤 한다지만, 지금은 정말 때가 아니었다.
마리엘라는 어느새 제 옆에 선 아렐 후작을 힐끔 보았다.
숱 많고 얇은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너풀거렸다. 마리엘라의 고동색 머리와는 다르게, 흰 우유를 많이 탄 것 같은 옅은 머리카락색은 안 그래도 선한 편인 그의 인상을 더더욱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세드릭 아렐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살짝 바깥으로 돌렸다. 누가 봐도 그녀에게 호감이 있어 보이는 태도였다.
조심스레 마음을 두드리는 사랑.
누구라도 가슴이 두근거릴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다른 생각을 했다.
‘여기서 뭉그적거릴 시간이 없어.’
마리엘라는 그냥 그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저는 의미 없이 시간 보내는 것을 따분해한답니다. 아무래도 하녀 생활할 때의 습관이 남아있나 봐요. 일할 때 빙 둘러 말하면 크게 야단맞게 되거든요.”
그녀가 정말 궁금한 것은 마리안이 도대체 왜 우리 둘 사이를 밀어주지 못해서 안달인지였지만, 친분도 없는 사이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볼 수는 없었으므로 적당히 돌려 말했다.
그녀의 말에 아렐 후작이 시무룩해졌다.
“아….”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은데. 제 짐작이 틀렸나요?”
“아니요, 정확하십니다.”
세드릭 아렐의 눈빛이 일순 진지해졌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마리엘라는 드디어 마리안과 아렐 후작과의 뒷거래를 듣게 되겠구나 했다.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아렐 후작의 행동은 그녀가 예상을 완벽하게 비껴나갔다.
사용인들이 돌아다니는 왕성 정원.
갑자기 아렐 후작이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청혼을 하고 싶습니다.”
“예?”
그녀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나왔다.
그 미묘한 거부감을 못 느낀 건지, 아님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그는 제 할 말을 이었다.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프러포즈를 들은 마리엘라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주위를 둘러보아 근처 사람이 있는지 살피는 것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나무를 정리하던 정원사가 슬그머니 나무 뒤로 몸을 숨기는 것이 보였다.
‘망했군.’
질투 많은 요제프가 어찌 반응할지 너무 뻔했다.
아렐 후작에게 청혼 받았다면 소문이 퍼지면 율리안이 어떤 반응을 할지 걱정되기도 했다.
마리엘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 * *
같은 날 밤이었다.
그녀가 예상한 대로, 요제프에게 자신의 처소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마리엘라는 비밀 통로를 통해 요제프의 처소로 향했고, 그곳에서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들었다.
“비서관은 필립 슈스터 백작이 맡기로 했어. 아카데미 시절 동문인데, 머리가 비상하고 욕심이 없기로 유명했지.”
비서관 문제에 관한 요제프의 해결 방법은 간단했다.
마리엘라 호반을 마리엘라 코부르덴으로 만들어서 귀족들의 혼을 쏙 빼놓은 다음, 각 당파를 이간질해 비서관 자리에 귀족파나 국왕파 사람이 올라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 후 지방에서 조용히 살고 있던 친구를 끌어들였다.
대신들은 이름조차 들어 본 적 없던 백작이 요직에 오른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었지만, 그렇다고 상대 진영에서 선출되게 둘 수는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요제프는 결국 모든 이들을 만족하지 못하게 하면서, 동시에 모든 이들을 안심시키는 방법으로 일을 성공적으로 진행시켰다.
마리엘라는 오랜만에 그의 계획이 성공한 것이 그의 유능함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티 내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것에 관심을 보였다.
“슈스터 백작은 회유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자인가요?”
“아마도.”
그의 확답에 마리엘라가 피식 웃었다.
“동문에게 많이 약하신가 봐요. 전하께서 그렇게 사람을 쉽게 믿으시는 분인 줄 몰랐네요.”
요제프는 기분 나빠하지 않고 능글거렸다.
“직접 보면 알 거야. 그 친구에 대한 내 신임은 사람에 대한 믿음과 신뢰와는 조금 다른 결이라는 걸.”
“좀 더 자세한 설명이 듣고 싶은데요.”
“그 친구는 욕망이 없어. 아니, 정확히는 두발로 걷는 것들이 뭘 입고 뭘 지껄이는지는 관심이 없지.”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되지 않는 말투성이다. 마리엘라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요제프는 그런 게 있다며 웃어 넘겼다.
“요즘 율리안과의 사이는 어때?”
그녀가 뭐 더 할 말이 있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아주 훌륭하게 망쳐놓으셨어요.”
“급한 일이 있다며 영지로 간 지 꽤 됐는데도 돌아오지 않고 있긴 하네.”
갑자기 연락이 끊긴 것은 미하엘뿐만이 아니었다. 율리안 역시, 그날 밤 이후 급히 수도를 빠져나와 그녀와 만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마리엘라는 갑자기 푹 꺾어진 그의 기세가 당혹스럽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가 알고 있던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사악한 흑마법사의 후예 바이르 공작은 어디에 갔는지.
그녀는 자신이 율리안을 잘못 파악한 것은 아닌지 재고 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 마음을 요제프에게 그대로 티낼 수는 없었다. 그녀가 씩 웃으며 뼈 있는 말을 농처럼 던졌다.
“공작의 가장 친한 친우가 그를 배신하고 그가 오래 짝사랑해 온 여자를 쟁취해 버렸다네요. 그래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거죠.”
남들이었으면 수치스러움에 성을 내거나 자리를 피했을 법한 말에 요제프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것을 기회 삼아 제가 진짜 하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그럼, 세드릭 아렐은?”
“…….”
마리엘라가 입을 다물었다. 언젠가 나올 말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타이밍일 줄은 몰랐다.
요제프는 자신의 질투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가 눈썹을 까딱하며 비아냥거렸다.
“연적을 제거했더니, 또 새로운 남자의 출현이라.”
“두려워하실 필요 있나요. 고작 그리너드에서 온 후작인데.”
마리엘라가 그에게 다가가 가볍게 안겼다. 한쪽 팔로는 그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쪽 손으로는 그의 어깨 위를 매만졌다. 연인을 대하는 듯한 자연스러운 태도.
요제프의 얼굴 위로 일순 만족감이 깃들었다. 그가 팔에 힘을 줘 그녀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그리고 이를 내어 그녀의 귓바퀴를 콱 깨물었다.
마리엘라가 놀라서 몸을 뒤로 물렸다. 요제프는 힘으로 그녀를 붙잡지 않고 순순히 내보내 주었다.
그녀가 홧홧하게 열이 오르는 귀를 매만지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책망과 짜증을 담은 눈길이었다. 그가 입을 삐죽 내밀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쉽게 포기할 것 같아서.”
그녀는 그에게 쓴소리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지금은 그를 안심시켜야 했다. 흔들수록 흔들리는 율리안과는 달리, 요제프는 날카로워지는 습성이 있었다. 그가 그녀의 모든 것을 파헤치도록 둘 순 없었다. 모든 것을 그녀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둘 때까지 그를 살살 구슬려둬야 했다.
“소문에 그 얘긴 없던가요? 주제도 모르는 코부르덴 후작이 단칼에 잘생긴 청년의 청혼을 거절했더라는 말이요.”
“들었어.”
“이렇게 날 세우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전 그런 시시한 남자에게 관심 없으니까.”
적나라하면서도 속물적인 그녀의 말에 요제프가 푸스스 웃었다. 그가 고개를 잘게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어느 정도 동조했다.
“그렇지. 율리안에 비해서야 시시한 남자긴 하지. 그런데 난 다른 점을 주목해봤어. 그 남자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것.”
“도대체 어느 귀족이 데르샤바크 왕가와 바이르 공작가를 뛰어넘을 수….”
“자유.”
날카롭게 치고 들어오는 말에 그녀가 침묵했다.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요제프가 그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욕망까지 읽어내고 있다는 것을.
“그 남자는 네가 가장 원하는 걸 가지고 있지.”
“…….”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렐 후작과 결혼하여 그리너드로 넘어가면, 그녀는 간단히 자유를 얻게 된다. 요제프와 율리안이라도 지리적 거리를 뛰어넘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마리엘라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마리안의 존재를 잊지 마세요. 저는 왕자비 전하를 두고는 어디에도 가지 않아요.”
“눈물겨운 충심이군.”
그가 재미없다는 듯 입꼬리를 내리고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본적으로 그녀의 말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었다.
그녀는 휘말리지 않고 무덤덤한 표정을 고수했다.
“절 잘 아시는 줄 알았는데요. 충의나 절개, 지조 같은 단어는 절 가둬 놓지 못해요. 권력자의 입맛에 맞춰 노는 건 주어진 신분만으로 충분했어요. 그들에게 영혼까지 쥐여 줄 수는 없죠.”
“그럼 널 쥐고 흔드는 건 뭔데?”
마리엘라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제 안위요.”
“참고하지.”
“이미 너무 늦으셨어요. 우린 너무 많은 강을 건넜죠.”
그녀는 왕자의 처소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비밀 통로를 통해 하녀 시절 숙소로 돌아가고자 했다. 떠나는 그녀의 발목을 요제프의 말 몇 마디가 잡았다.
“흔들리긴 했잖나.”
그녀는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긴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옆 선이 살짝 실루엣으로 보였다.
“혹하지 않으면 그게 사람이겠어요?”
대답을 마친 그녀는 앞으로 나아갔다.
요제프는 새 연적이 될지도 모르는 아렐 후작을 경계하느라 온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마리엘라에게 그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
‘정말 마음을 접었나.’
율리안 폰 바이르.
그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요제프가 제멋대로 비서관을 선출해 권력을 재편할 준비를 하고, 마리엘라가 아렐 후작을 이용해 도망갈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그는 그저 숨을 죽이고 영지에 처박혀있다.
무섭도록 조용하게.
* * *
비슷한 시각, 인적이 없는 복도에서 데이지가 망을 보고 있다. 미어캣처럼 열심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데이지의 등 뒤에서는 마리안과 한 남성이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는 이 상황이 낯선지 자꾸 옷깃으로 얼굴을 가리려고 애썼다.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상황을 보고했다.
“부탁하신 대로 편지는 전달했으나, 답장을 받아오지는 못했습니다.”
“눈앞에서 편지를 찢거나 불태우지 않았죠?”
“네.”
“그걸로 충분해요.”
마리안이 안심했다는 듯 제 가슴을 쓸었다.
어두운 밤, 은은한 달빛이 남성의 얼굴까지 다다랐다.
남성의 정체는 미하엘 슈리츠가 아니었다.
“사람들을 통해 들었어요. 마리엘라에게 청혼하셨다고요.”
“예. 그다음도 익히 들어 아실 거라 사료됩니다만.”
마리안의 말에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의 이름은 세드릭 아렐. 그리너드에서 외교관으로 파견된 자였다. 동시에 마리안이 통속 소설 속 조연을 쏙 빼닮았다며 내심 아끼고 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안색을 살핀 마리안이 아차 싶어 급히 변명을 덧붙였다.
“치부를 들추고자 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갑작스러운 전개에 당혹스러워…….”
“……네?”
그녀는 여전히 현실의 사건 사고들을 통속 소설 속 무언가로 치환해버리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뜬금없는 대화 흐름에 아렐 후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마리안이 손을 내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도 여기서 포기하실 것은 아니지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사모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여인을 괴롭힐 수는 없지요.”
“그…….”
포기를 의미하는 듯한 힘없는 목소리.
마리안이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그래선 안 되죠! 제가 제일 답답해하는 전개가 뭔 줄 아세요? 바로 이렇게 몸 사리다가 아무것도 못하고 홀랑 시간만 까먹는 거예요!”
“예?”
마리안의 지독한 통속 소설 외길 인생을 모르는 아렐 후작으로서는 여전히 뜻 모를 소리였다. 마리안은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 번 치며 자신 있게 소리쳤다.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제가 그대들의 든든한 시라노가 되어 줄 테니!”
“…….”
그가 지금 그녀의 말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한다는 사실은 염두에 두지 않은 채였다.
“제가 약조 드렸잖아요. 후작께서 저를 도와주신 만큼 저도 성의를 보이겠다고.”
마리엘라가 청혼 때문에 잠시 깜박하고 넘겨버린 일이 있었다.
마리안 왕자비와 아렐 후작 사이에 미묘한 거래는 실존했다.
그녀는 그것을 더 자세히 파헤쳤어야 했다.
마리안이 더 큰 사고를 치기 전에.
* * *
며칠 전이었다. 정확히는 마리엘라가 일주일을 기다려보자고 한 지 나흘이 지난날 낮이었다.
여전히 미하엘의 근황은 감감무소식이었고, 마리안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다 못해 식사를 거르고 머리를 벽에 쿵쿵 박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결국 그녀는 마리엘라 몰래 다른 방도를 찾았는데,
“하얀 늑대 기사단의 미하엘 경을 찾아가 이 편지를 전해드리면 된다고요?”
그것은 바로 아렐 후작이었다.
아렐 후작은 마리안이 전해 준 편지를 가만히 살폈다. 밀랍으로 단단히 봉해져 있었기에 그 안의 내용을 미리 살필 수는 없었다.
“읽지는 마시고요.”
절대, 절대, 절대, 절대요.
마리안의 과한 강조에 아렐 후작이 멈칫했다. 그의 얼굴 위로 곤란함이 깃들었다.
“이 편지를 전해줌과 동시에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은 건 저 만의 착각입니까?”
남 엿 먹이기는 잘하지만 호의를 가진 사람에게 거짓말 하는 건 잘 못하는 마리안이 시선을 피했다.
“착각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만큼의 성의를 다하겠습니다. 그것만은 확실히 약조 드려요.”
아렐 후작은 잠시 말이 없었다.
조용히 손끝으로 편지 봉투만 만지작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며, 마리안은 덜컥 겁이 났다. 그가 이 길로 요제프에게 달려간다면 그녀는 끝이었다.
“곤란하시다면 없던 일로 하지요.”
그녀가 편지를 돌려받으려는데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손에 힘을 주어 그녀의 손에서 편지를 빼앗아 갔다.
“아니요.”
마리안이 동그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렐 후작의 눈이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하겠습니다. 제 고향 그리너드를 위해서.”
* * *
그날 이후였다. 마리안은 눈에 띄게 마리엘라와 아렐 후작 사이를 밀어주기 시작했다.
마리엘라가 그의 청혼을 거절한 이후에도 말이다.
“오랜만에 오붓한 티타임을 가져 볼까 하는데 말이야.”
마리안이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 말을 꺼냈다. 그녀의 곁에서 책을 읽던 마리엘라의 눈빛이 단박에 날카로워졌다.
“아렐 후작도 있나요?”
“으음.”
마리안이 딴 곳을 보는 척하며 말을 흐렸다. 마리엘라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 가요.”
“아, 왜!”
마리안이 그녀의 팔을 흔들었다. 곁에 있던 데이지가 곤란한 표정을 했다. 마리안이 떼를 쓰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는 걸 체득한 탓이었다.
마리안의 투정에도 마리엘라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안 간다면 그렇게 아세요.”
마리엘라는 책을 탁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처에 있던 하녀들이 흘깃흘깃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그 시선을 느꼈다.
오늘의 일이 어떤 소문을 몰고 올지는 뻔했다.
‘천운으로 귀족 작위를 받게 된 하녀 출신 여후작이 건방지게 주제 파악을 못하고 왕자비를 누르려 든다고 떠들어 대겠지.’
곤란한 일이었으나 감내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내게 새 남자가 생겼다는 소문보다는 나으니.’
이 이상 율리안의 귀에 아렐 후작의 이야기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
마리엘라의 목표는 율리안과 요제프를 제 손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지, 둘 다 지쳐 나가떨어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율리안이 생각지도 못한 타격을 받은 지금, 몸을 사리는 것이 옳았다.
* * *
마리엘라는 답지 않게 마리안에게 강경하게 나갔다.
그러나 그녀만큼 마리안 역시 물러서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집 안에만 있으니 너무 답답해. 산책이라도 가야겠어.”
오늘도 마리안은 마리엘라를 아렐 후작과 만나게 하려고 수작을 부렸다.
“다녀오세요.”
마리엘라는 이제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태도에 드디어 마리안이 뿔이 났다.
“너는 내 시녀 아니야?”
마리안은 양 허리에 손을 올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두 사람의 대립에 옆에 선 데이지만 안절부절못했다.
팔랑.
마리엘라는 여유롭게 책장을 넘겼다. 그녀는 여전히 마리안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대꾸했다.
“저라면 다른 생각을 해 보겠어요. 예를 들면 너무 속이 뻔히 보이는 것 아닌지 하는 생각?”
“얄미워 죽겠어!”
마리안은 소리를 버럭 지르고는 씩씩대며 처소를 나섰다. 문이 쾅 닫혔고, 마리엘라는 콧방귀를 꼈다.
* * *
같은 날 오후였다.
마리안과 마리엘라, 데이지는 늦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카드 게임을 했다. 게임에서 데이지가 먼저 죽고, 남은 것은 이제 두 사람뿐이었다. 마리엘라가 카드 하나를 뽑고 눈을 굴리고 있을 때, 대뜸 마리안이 말했다.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
마리엘라뿐만 아니라 데이지의 고개까지 같이 돌아갔다.
“이대로 시간 낭비만 해선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요?”
“독서 모임을 가질까 하는데.”
마리안의 꺼낸 말에 마리엘라는 문득 붉은 사과 독서 모임을 떠올렸다.
‘그곳에 가면 율리안이 있을까?’
그녀는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었다. 안 그래도 제게 날을 세우는 요제프에게 적의 본거지를 알려주는 셈이었다. 그렇게 되었다간 율리안은 물론 요제프에게서도 살아남지 못한다.
‘사랑을 얻기 위해서 죽음을 감당할 필요는 없지.’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틈에 마리안이 옆에서 조잘조잘 떠들었다.
“내가 그동안 너무 통속 소설만 읽은 것 같아서 말이야. 교양 있게 다른 도서도 좀 챙겨 볼까 하는데 아무래도 혼자서는 힘들잖아.”
마리안의 말에 마리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엘라의 시선이 데이지에게 향했다.
“생각을 해 보긴 하셨네요.”
“너도 참석할 거지?”
“아뇨.”
그녀는 카드를 책상 위로 내던졌다. 그리고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속이 빤히 내다보이시네요, 왕자비 전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먼저 일어나 좀 쉬고 싶군요.”
마리엘라는 입으로 허락을 구하는 말을 하면서,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리엘라 코부르덴.”
처소 밖으로 나가려는 그녀의 등 뒤로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꽂혔다. 그녀는 뒤를 돌았고, 잔뜩 기분이 상한 마리안과 마주했다.
“내가 왕자비의 이름으로 명령을 해도 거부할 건가?”
위엄과 위협을 적절히 갖춘 목소리였다. 과연 정치에 잔뼈가 굵은 대신들이 깜박 속아 벌벌 떨 만했다.
그러나 그녀와 오랜 시간 함께한 마리엘라에게는 통하지 않는 헛짓거리이기도 했다.
마리엘라는 아예 뒤를 돌았다. 짝다리를 짚고,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그녀가 날 선 눈으로 마리안을 응시했다.
“명령하실 건가요?”
“아니…….”
두 눈을 부릅뜬 마리엘라의 위세에 마리안이 깨갱 꼬리를 말았다.
* * *
마리엘라가 떠나고, 마리안은 또 아렐 후작을 만나러 갔다. 정확히는 그를 자신의 티타임에 초대했다.
“안타깝게도 오늘도 걸려들지 않네요.”
“그렇군요.”
마리안의 말에 아렐 후작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엘라의 마음을 얻는 것을 포기했는지 한껏 초연해진 그 모습이 마리안의 심금을 울렸다.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제가 다음 기회엔 꼭!”
그녀의 말에 아렐 후작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예상치 못한 말에 마리안이 눈을 깜박였다.
아렐 후작이 힘없이 미소 지었다.
“미련을 접지 못한 남자 하나 때문에 후작께 추문이 붙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안 그래도 막 작위를 물려받아 불안정한 코부르덴 후작을 괴롭혀서는 안 되겠지요. 하여, 은애하는 마음은 마음으로 남겨두고자 합니다.”
통속 소설 조력자에게 어울리는 마음가짐 그 자체의, 배려심이 가득 베인 다정한 말이었다. 마리안은 더더욱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그녀와 정치적으로 얽힐 일이 없으며, 언제나 그녀가 부탁한 것을 들어주었고, 동시에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를 짝사랑한다.
‘마리엘라의 배필로 딱인 사람이야.’
그녀는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심을 재고해 보라고 회유하는 듯한 마리안의 말에 아렐 후작이 선을 그었다.
“물론 왕자비 전하께서 마음 써주시는 것은 매우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미하엘 경과의 편지 교환은 계속해서 도와드릴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요, 아렐 후작….”
“거기다, 오늘은 다른 이유로 이곳에 왔습니다. 때문에 처음부터 마리엘라 양이 아닌 왕자비 전하를 뵙고자 했죠.”
그가 품 안에서 표 두 개를 건넸다.
“이게 뭐죠?”
“제 고향 그리너드에서 유행하는 연극입니다.”
‘그리너에드에서 넘어온 연극’ 하면 그녀도 아는 바가 있었다.
마리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 혹시 ‘아가씨와 나비’를 원작으로 하는?”
‘아가씨와 나비’는 통속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입소문이 난 작품이었다.
별 볼 일 없는 약소국의 공주가 동양의 황제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내용이 주 줄거리였다.
남자 주인공의 국적이 동양으로 넘어간 것도 독특했지만, 무엇보다도 이 소설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선정적이고 파격적인 이야기 전개와 장면 묘사였다.
“맞습니다. 그 소설을 아십니까? 아직 베르단에서 정식 출판되지는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맞아요, 구하기가 어찌나 힘들었는지.”
“예?”
마리안이 또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이게 그 극의 표군요.”
그녀가 탐나는 눈을 하고 뚫어지게 표를 바라보았다.
미하엘과의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한동안 통속 소설과 연극에 관심을 꺼두었더니 이런 재미난 극을 놓칠 뻔했다.
“네, 아는 사람이 이 극단의 연출가라서요. 특별히 부탁해 좋은 자리를 구해왔습니다.”
“그렇다면 이 극을 두 분이 관람하시는 건 어떤가요?”
마리안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워버리지 않은 채로 제안했다.
아렐 후작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거절했다.
“아니요. 이제 됐습니다. 저는 정말 코부르덴 후작의 행복만을 바랄 뿐입니다.”
* * *
연극 티켓을 본 마리엘라의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리너드에서 온 극단이 만든 작품이군요. 분명 아렐 후작이 구해줬을 테고.”
마리엘라는 표정에서 의구심을 지우지 않았다. 어서 빨리 꿍꿍이를 털어놓으라는 듯한 빤한 시선에 마리안이 몸을 살짝 뒤로 뺐다.
“으응. 하지만 이번엔 달라.”
“뭐가요?”
“아렐 후작이 안 오거든.”
“흠.”
마리안의 말을 믿고 있지 않는 태도였다. 마리안이 변명하듯 덧붙였다.
“우리 셋만 보러 가는 거야.”
“흐음.”
“진짜!”
마리안이 바닥에 대고 발을 쿵쿵 구르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한참동안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마리안을 게슴츠레하게 살피던 마리엘라가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나갈 채비를 하죠. 그 전에 전할 말이 있어요.”
“뭔데?”
마리엘라는 주변을 가볍게 훑었다. 맡은 일에 분주한 하녀와 시종들이 그녀의 눈 끝에 걸렸다.
“사람을 다 물러 주시죠.”
마리안은 냉큼 그들을 모두 방 밖으로 나가게 했다.
이제 방 안에 남은 것은 마리안과 마리엘라, 시녀인 데이지뿐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리엘라에게 몰렸다.
마리엘라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하엘이 결정을 내렸어요.”
애타게 기다려왔던 소식에 마리안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극이 끝나는 여덟 시, 극단 뒤에서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하도록 할게요.”
* * *
그리너드에서 넘어온 통속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연극, ‘아가씨와 나비’의 공연 당일이 되었다.
마리안의 외출복을 본 마리엘라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드레스가 너무 치렁치렁한 것 아닌가요?”
마리안은 새로 맞춘 연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 드레스는 통상적인 드레스들보다 레이스와 리본이 두 배로 달려 있었다.
그녀는 풍성하다 못해 무거워 보이는 드레스에 갓난아기 손바닥만 한 크기의 루비 귀걸이, 다이아몬드가 수백 개 들어간 목걸이를 착용했다.
그야말로 과함의 극치였다.
마리엘라의 지적에 마리안이 당당하게 대꾸했다.
“오랜만의 외출이잖아. 보는 눈도 많을 텐데 이 정도는 되어야 왕실의 본이 살지 않겠어?”
말은 저렇게 했지만, 오랜만에 미하엘을 만날 생각에 들떠서 저렇게 차려입었다는 사실은 마리안도, 마리엘라도 그 옆에 있는 데이지까지도 알았다.
“설레는 그 마음을 이해는 하지만 되도록 갈아입고 오시는 게 좋을 텐데요. 어떤 옷차림은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주기도 하니까요.”
“그래도…….”
마리엘라의 조언에 마리안이 미적거렸다.
마리엘라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옷을 갈아입고 올 것을 종용했다.
“신분이 들추어진 후 첫 만남인데 초장부터 미하엘에게 부담을 줘서 좋을 게 없어요.”
마리안이 입을 삐죽 내밀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예쁜 모습 보여주고 싶었는데.”
“갈아입고 오세요. 최대한 수수하게. 그러나 왕자비 전하가 지니고 있는 본연의 기품과 청순함은 뚜렷이 드러나게.”
“너무 어려운 주문이야.”
투덜거리는 마리안의 말을 들은 마리엘라가 픽 웃었다. 그녀는 친절하게 마리안이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덧붙였다.
“호수의 주인 나탈린이 입을 법한 복장으로 오세요.”
“몇 권?”
“1권, 97페이지. 대사까지 읊어드릴까요?”
“아냐, 됐어.”
마리안이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데이지를 데리고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 * *
‘아가씨와 나비’가 공연되는 장소는 아담한 매력이 있는 극장이었다.
왕자비를 위해 따로 준비된 2층 특별석에 착석한 마리안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미하엘은?”
“기다리세요.”
“응.”
마리엘라는 딱 한마디의 말로 조급하게 구는 마리안을 잠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극이 시작되었다.
“그분은 저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하겠다고 말했어요.”
“왜 그대는 당연한 진실을 못 보는 것이오? 목숨을 내 던질 만큼 정열적인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저물고 마는 것을.”
극이 중반에 다다랐다.
“하암.”
마리엘라는 마리안이 보지 못하게 고개를 돌리고 하품을 했다.
‘지루하네.’
하녀 시절, 마리안을 좀 더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많이 읽어두긴 했지만 통속 소설은 마리엘라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랑을 믿지 않는 그녀에게 사랑 이야기란 그저 마구간에 가득 쌓인 밀짚 같은 것이었다. 주변에 차고 넘쳐 가지려면 쉽게 가질 수 있지만, 동시에 결코 탐나지 않는 것. 그녀에게 사랑은 딱 그 정도의 위치였다.
‘어쩌다가 요제프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어.’
그녀는 제이 도련님 시절의 요제프를 떠올렸다.
‘왕좌든 뭐든 다 포기하고 여기서 조용히 숨어 살다가 조용히 죽자, 그렇게 생각했지’
생각하고 싶지 않아 머릿속 깊은 곳에 꼭꼭 묻어 두었던 그의 진심이 갑자기 툭 튀어나왔다.
마리엘라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지금은 그런 사소한 감정에 휩쓸릴 때가 아니야.’
지금은 흔들릴 때가 아니라 흔들 때였다.
현재 마리엘라는 영지에 틀어박혀 있는 율리안을 끄집어낼 묘책도 떠올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는 요제프를 향해 커져 갈 뻔한 제 마음을 억눌렀다.
‘어?’
그런 그녀의 코끝에 매캐한 향이 감지되었다.
“어디서 탄내가 나지 않나요?”
마리엘라는 연극에 푹 빠진 마리안 대신, 데이지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연기도 좀 짙어진 것 같고요. 무대 효과를 너무 과하게 쓴 걸까요?”
마침 극의 두 남녀가 새벽의 호숫가에서 재회를 하는 장면을 연기하고 있었다. 무대 위에 가득 퍼진 연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이 더 애틋하게 보였다.
마리엘라는 데이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극장 의자 위에 등을 푹 기대며 경계심을 누그러트렸다.
극이 클라이막스에 다다랐다.
“사랑을 어떻게 증명하실 건가요? 누군가와 나누어 가져야 할 마음이라면 거절…… 콜록, 콜록.”
걷잡을 수 없이 자욱해진 연기에 여자 주인공을 연기하던 배우가 기침을 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1층에서 연극을 관람하던 관객들도 일제히 콜록거렸다. 놀란 마리안이 고개를 돌려 마리엘라와 눈을 마주했다. 그제야 마리엘라는 이것이 단순한 무대 연출용 연기가 아님을 깨달았다.
“불이야!”
1층에서 누군가 그렇게 소리쳤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뒤쪽 좌석에서부터 불이 올라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불은 빠른 속도로 번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대 장막까지 불이 옮겨붙었다. 연기는 점점 더 자욱해져 이제 시야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마리엘라와 마리안, 데이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사들이 마리안을 중심으로 빙 둘러쌌다.
“왕자비 전하를 호위해라!”
극장 전체에 불이 번진 위급 상황에 쓸데없는 짓에 매달리는 호위 기사를 보니 마리엘라의 마음속에서 화가 솟구쳤다. 그녀는 기사 하나의 다리를 차며 호통을 쳤다.
“불이 났는데 호위는 무슨! 비상구나 찾아!”
그러나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쉽게 탈출로를 찾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불은 이제 계단을 타고 올라 와 난간을 장식하던 천들을 모두 태웠다.
마리안이 입고 있던 드레스 앞자락에 불씨가 옮겨붙었다. 마리엘라는 잽싸게 발길질을 해 불을 껐다.
“콜록, 콜록, 콜록!”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기침 소리가 거세진다.
“빨리, 출구를…….”
연기 때문에 자꾸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마리엘라가 주변을 살폈다.
‘이대로 가면 개죽음만 당할 뿐이야.’
“소매로 코와 입을 막으세요!”
마리엘라가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어디에 문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마리안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불길이 더 심해지기 전에 벽을 더듬어서라도 문을 찾으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어디를 더듬어도 문으로 추정되는 곳은 발견되지 않았다.
‘여기가 아닌가? 반대쪽으로 가야 하나?’
잠깐 고민에 빠진 짧은 시간에도 불길은 기세를 확장시켰다.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우왕좌왕하고 있던 그 순간이었다.
덜컥.
누군가 바깥에서 문을 열었다.
세 사람이 있는 곳에서 일 미터쯤 떨어진 곳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눈앞은 자욱한 연기.
등 뒤는 지옥 같은 불길.
아주 작은 판단 오류에도 생과 사가 갈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마리엘라는 자신들을 구하러 온 남자의 얼굴을 보고 그 자리에 굳었다.
“빨리 이리로 오시지요!”
남자의 정체는 아렐 후작이었다.
* * *
극장 주변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밖에서 본 화재는 안에서 보는 것만큼이나 끔찍했다. 불은 여전히 잦아들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맹렬히 타올랐고, 검은 연기는 하늘을 뒤덮겠다는 기세로 뭉게뭉게 올라갔다.
가까스로 화제 현장을 빠져나온 사람들은 황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는데, 그들이 타고 온 마차가 모두 전소되었기 때문이었다.
도움을 요청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되지 않았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혹시라도 불이 여기까지 번질까 두려워 도망가기에 바빴다.
“미하엘은 어떡하지? 날 찾으러 왔다가 화재 때문에 엇갈리면 상심이 클거야.”
상황을 살피던 마리엘라의 귓가에 마리안이 작게 속삭였다.
“기사 하나를 불러 따로 말해 두었어요. 여기서 기다리다 그에게 따로 소식을 전하라고요.”
마리엘라는 마리안을 안심시키는 말을 하며 속으로 다른 생각에 잠겼다.
‘우연인가? 아니면…….’
마리엘라는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훑었다. 아무래도 마리안과 함께 당한 변이라 그랬다. 화재는 자연스럽게 정적을 제거할 수 있는 암살 방법 중 하나니까.
‘혹 율리안이 마리안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라면?’
의심은 가장 가까운 곳을 향했다.
마리엘라는 율리안이 가만히 마음이 접히기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율리안이 마리엘라를 수도에서 쫓아내기로 마음먹었다면, 가장 쉽고 빠르게 목표에 이르는 방법은 마리안을 제거하는 것이다.
고작 연모하는 이 하나를 잘라내려고 일국의 왕자비를 제거한다는 것이 과하다고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사람은 생각보다 비이성적이고 극단적인 일을 자주 저지르는 존재들이고, 그것은 궁지에 몰렸을 때 더 힘을 발휘하니까.
마리엘라가 진지한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옆에서 마리안이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잔기침을 하시는군요. 혹시 연기를 들이마셨나요?”
아렐 후작이 다정하게 마리안을 챙겼다.
“약간 그런 것 같기는 해요.”
“마침 근처에 제 저택이 있습니다. 일단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시지요.”
그 말에 데이지가 우물쭈물했다.
“하오나 마차가…….”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제 마차를 타고 가시면 되는 것을요. 물론 공간이 비좁은 탓에 호위기사까지 챙길 수는 없지만, 레이디 셋을 태우기엔 충분하답니다. 아, 기사들에게는 제 저택의 주소를 알려 줄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튼튼한 두 발로 걸어오라 하면 되니까요.”
데이지는 여전히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으나, 마리안은 발 빠르게 마차위로 올라탔다.
“이 친절은 잊지 않고 보답하겠습니다.”
“되도록이면 제 고향 그리너드를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마리안의 감사인사에 아렐 후작이 싱긋 웃었다.
데이지도 마차 위로 올라타고, 이제 남은 것은 마리엘라 혼자였다.
마리엘라의 발이 굼뜬 것은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오늘의 일이 요제프와 율리안에게 어떻게 작용할지 속으로 열심히 계산하느라 마차 위로 올라갈 생각을 못했던 것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아렐 후작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압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그대를 얽매려 할까 두려우신 것이겠지요.”
“아, 저는.”
그가 헛다리를 집자 마리엘라가 급히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러나 아렐 후작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솔직히 아직 마음을 다 접지는 못했습니다만,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친절을 빌미로 그대의 발목을 잡으려 하지 않을 터이니 의심 말고 마차에 오르시지요.”
“……알겠습니다.”
마리엘라는 더 이상 정정하려 하지 않으며 마차 위로 올랐다.
* * *
세 사람은 아렐 후작의 저택에서 잠시 머물게 되었다.
그리너드의 시골을 모티브로 삼아 꾸며봤다는 아렐 후작의 저택은 품격 있고 우아할 뿐만 아니라 평온한 느낌까지 자아냈다. 상아를 연상케 하는 옅은 베이지 색을 기본으로 부드러운 색감의 자작나무로 만든 가구, 짙은 초록색을 띤 장식물로 포인트를 더한 인테리어는 더할 나위 없이 깔끔했다.
집 안에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워낙 온화해 세 사람은 자신들이 화재로 급히 대피를 온 것이 아니라 한적한 시골로 나들이를 온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다.
탁.
딱 봐도 신참으로 보이는 하녀들이 테이블에 차를 내려놓았다. 아렐 후작은 그들의 서투름을 나무라는 대신 일어나 손님들에게 차를 따랐다.
“폐병 환자들이 즐겨 마시는 차입니다. 증상은 다르지만 의원이 없으니 효과가 있길 바랄 수밖에요.”
덧붙이는 말에 마리안이 감동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작은 행동 하나에도 세심한 배려가 녹아 있었다.
그가 내온 차를 마시며 마리엘라는 생각에 잠겼다.
‘저런 남자와 사랑에 빠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녀는 그와 함께했다면 누릴 수 있었을 일상을 상상해보았다.
무난하고 무탈한 하루하루들. 약간의 다툼과 위기는 있겠지만 대부분은 대화와 온기만으로 충분히 풀어질 수 있는 것들일 테다.
‘기껏해야 가계부로 골머리를 썩겠지. 지금처럼 누굴 죽이고 어떻게 살아남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거기까지 생각하니 비죽 비죽 웃음이 흘러 나왔다. 아득바득 살아가는 스스로의 처지가 너무 처량 맞고 절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마리엘라는 상황과 맞지 않는 감정과 표정을 정돈하려 차를 마셨다. 그때 옆에서 마리안이 제 소매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마리안은 작은 목소리로 마리엘라와 데이지를 향해 말했다.
“냄새가 가시지 않네. 돌아가면 바로 버려야겠어.”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된 아렐 후작이 얼른 말했다.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겠습니다.”
“아니요, 그러실 필요까지는…….”
당황한 마리안이 급히 손을 내저으며 거절의 의사를 전했다. 그러나 아렐 후작은 아랑곳 않고 시종을 불러 옷을 준비하라 명했다. 시종은 바로 대령하겠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 일상적인 대화에 마리엘라의 고개가 기울었다.
‘귀족 여성이 입을 만한 옷이 구비되어 있어? 그것도 세 벌이나?’
세드릭 아렐은 그리너드에서 외교관으로 파견된 사람이었다. 그녀가 아는 바에 따르면 그는 가정이 없는 남자였고, 홀로 이 대저택에 산다. 여인이 머물 것을 대비한 옷이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저택을 드나드는 여인이 있다는 소문은 못 들어봤는데.’
마리엘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화재를 헤치고 그들을 구하러 오느라 여기저기 붉게 그을린 세드릭 아렐의 옷을 살폈다. 2층에서 연기만 마신 그들과는 달리 1층부터 그녀를 찾으러 올라온 아렐 후작의 옷차림이 더 심각했다.
“후작님께서는.”
“예?”
“후작님께서는 옷을 갈아입으러 가지 않으시나요? 저희들보다 더 옷 상태가 처참하신데요.”
날이 선 듯, 아닌 듯.
아리송한 뉘앙스를 품은 마리엘라의 질문에 세드릭 아렐이 뒤늦게 제 옷을 살폈다.
“아, 저는 바로 왕성에 가야 해서요. 하루빨리 왕자비 전하의 상황을 전해야 하지 않습니까.”
마리엘라의 고개가 기울었다.
“그 차림으로요?”
“한시가 급한 일이니까요.”
“아랫사람을 보내면 되지 않나요?”
“중대한 일이니까요.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죠.”
예의를 갖춰서, 부드럽게 이어지는 대화.
그러나 그 속에 보이지 않는 칼날이 숨어 있다는 것은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이 묘한 신경전을 끊고 뒤로 물러선 것은 마리엘라였다.
“그렇군요……."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대충 납득한 척했다. 그리고는 막 무언가가 생각난 것 것처럼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마리엘라가 들고 온 손가방에서 휴대용 반짇고리를 꺼냈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그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마치 남성이 여성에게 프로포즈를 하는 모양새였다.
“무슨…….”
아렐 후작이 붉어진 얼굴을 다른 쪽 팔등으로 가렸다. 누가 봐도 당황한 모양새였다.
마리엘라는 아랑곳 않고, 능숙한 솜씨로 바늘에 실을 이었다.
“저희를 구하느라 소매단추가 뜯어지셨잖습니까. 제가 바느질해 드리지요.”
“괜, 괜찮습니다. 어차피 버리게 될 옷인데요.”
“입성하시는 길인데 최소한의 외양은 갖춰야지요.”
이번에는 그녀도 물러서지 않았다.
“하오나 시간이…….”
“혹시 몰라 항상 챙겨 다닌답니다. 잠시면 해결되는 일이니 기다리세요.”
결국 아렐 후작은 얕은 한숨을 쉬며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마리안과 데이지는 통속 소설을 보는 표정으로 마리엘라의 바느질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조용한 응접실에 사부작거리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다 됐습니다.”
몇 번의 바느질이 끝나고, 마리엘라가 가위로 잔 실을 잘라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뒤로 물러나 마리안의 옆에 앉았다.
“그럼 저는 먼저 왕성에 가 상황을 전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아렐 후작은 마리안에게 공손히 인사한 후 자리를 떠났다. 마리안은 홀린 눈으로 아렐 후작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달칵.
문이 닫히고, 마리안이 데이지를 보며 동의를 구했다.
“아까 너무 로맨틱했어. 그치, 데이지?”
데이지도 마리안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무덤덤한 것은 마리엘라밖에 없었다.
“정신 차리세요, 왕자비 전하.”
“응?”
“아렐 후작이에요.”
“뭐가?”
마리엘라가 100퍼센트의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극단에 불을 낸 범인.”
상황에 어울리지 않은 말을 들은 마리안과 데이지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설마…….”
“저희는 지금 적진 한가운데 있는 중이죠.”
지금 이 순간, 마리엘라는 세드릭 아렐을 다시 평가했다.
그는 매우 영리하고 자신의 속내를 완벽히 숨길 줄 아는 자다.
마리엘라를 좋아하는 척 마리안에게 접근해 오늘의 기회를 잡을 때까지, 마리안, 요제프는 물론 마리엘라 조차도 감쪽같이 숨겼다.
‘이렇게까지 해서 얻어내려는 게 도대체 뭐지?’
그리너드에서 아샤칼도 아니고, 베르단의 왕자비를 화재를 이용하면서 얻어내야 할 것이 도대체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일단 탈출이 우선이야.’
“확실한 물증은 없으시잖아요. 후작께서 자, 잘못 생각하신 게 아닐까요.”
데이지가 턱 끝을 달달 떨면서 현실을 부정했다.
마리엘라의 시선이 아렐 후작이 떠난 응접실 문에서 데이지에게로 옮겨갔다.
“그럼 그걸 테스트해 볼까요?”
* * *
몇 분 뒤였다. 갑자기 응접실 안에서 소란이 일었다.
“아, 갑자기 배가……!”
마리안이 배를 부여잡고 허리를 반으로 접자, 데이지가 안절부절못하며 소리쳤다.
“전하!”
그 소리에 어린 하녀 하나가 문을 열어 상황을 살폈다.
하녀의 눈에는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벗고 원피스 형태의 속옷 차림이 된 마리엘라가 마리안에게 등을 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제가 업겠습니다.”
마리엘라는 능숙하게 그녀를 업고 응접실 밖을 나섰다. 그 뒤를 데이지가 졸졸 따랐다.
세 사람의 발걸음이 도달한 곳은 저택의 정문 앞이었다. 그곳에는 하녀장과 세드릭 아렐이 떠나기 전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예의와 격식을 갖추고 있었는데, 평범한 주인과 사용인의 관계가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은 마리엘라가 마리안을 등에 업고 나타나자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마리안이 아파 보여서 였는지, 마리엘라가 속옷과 다름없는 얇은 속 원피스 차림이어서였는지, 그것도 아님 전혀 다른 모종의 이유가 따로 있는지는 아직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왕자비 전하께서 복통을 호소하십니다. 지금 급히 의원을 뵈러가야겠어요.”
다급해 보이는 마리엘라의 말에 아렐 후작이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답했다.
“의원은 저희 쪽에서 불러드리지요.”
마리엘라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아니요, 마차만 빌리겠습니다.”
“어찌 귀한 손님에게 딸랑 마차만 보낸단 말입니까.”
“의원이 오고 갈 시간이 없습니다.”
“있을 겁니다.”
이제 그는 둘러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마리엘라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세드릭 아렐은 여유롭게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업고 있던 마리안을 데이지에게 넘겨주고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렐 후작.”
“예, 코부르덴 후작님.”
“그대는 지금 그리너드 외교관의 신분으로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요? 우리에게 이런 무례를 범해도 되는 건지 묻고 싶군요. 아니면…… 이 모든 것이 그리너드 왕실의 의도였던가.”
세드릭 아렐의 눈썹 끝이 살짝 올라갔다. 단박에 그의 본질을 간파한 그녀의 영민함에 감탄한 듯했다.
“아주 정확하십니다. 그대의 예리함은 피하려 해도 피할 수가 없군요.”
세드릭 아렐의 입꼬리가 아주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눈꺼풀에 가려졌다 다시 드러난 그의 탁한 녹안 속에서 어떤 욕망이 번뜩였다.
열망보다는 갈망에 가까운 무언가가 그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리안 왕자비 전하, 코부르덴 후작, 그리고 데이지 아가씨. 그대들은 모두 이 저택에 감금되셨습니다. 저희가 마련해둔 거취로 돌아가 조용히 자리를 지켜주시길 권합니다.”
그가 세 사람을 향해 정중하게, 그러나 강압적인 태도를 숨기지 않으며 돌아가 잠자코 있기를 권유했다. 돌변하는 분위기에 세 사람을 할 말을 잃었다.
언제 그렇게 험악하게 굴었냐는 듯, 신사적인 표정으로 얼굴을 싹 바꿔 끼운 그가 문밖으로 나섰다.
하녀장이 아렐 후작을 따라가며 당부했다.
“지금부터 한 시간입니다.”
아렐 후작은 하녀장을 향해 깍듯이 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야말로.”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고 문이 온전히 닫혔다.
* * *
“마리안이 그대의 저택에 있다고요?”
늦은 시각, 요제프는 왕성 응접실에서 아렐 후작을 맞이했다.
“예. 현재 안정을 취하는 중입니다. 연기를 조금 들이마셨지만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자신의 아내가 무사하다는데 요제프의 표정은 시종일관 평온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관심은 다른 이의 안위에 있었으니까.
“시녀 둘도 같이 따라간 걸로 아는데, 셋 다 무사한가요?”
“아, 네. 세 분 다 다친 곳 하나 없이 무사합니다. 다만, 어디에서 불이 옮겨붙어 그렇게 된 건지는 몰라도, 타고 오신 마차가 다 전소되어서요. 왕자비 전하가 돌아가실 때 탈 만한 편안하고 푹신한 마차를 한 대 제 저택에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당연히 저희 쪽에서 신경 쓸 일이죠. 그렇게 조심스레 부탁하실 필요 없어요.”
요제프는 평소 자신이 잘 구축해 놓았던 유약하고 유순한 왕자님의 이미지에 맞게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선이 아렐 후작의 추레한 옷차림으로 돌아갔다.
요제프는 화재 현장에서 있다 나온 티를 팍팍 내는 아렐 후작의 복장에 저도 모르게 실소할 뻔했다.
삐져나오는 웃음을 헛기침인 척 무마한 요제프가 자연스레 대화의 화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후작의 복장이 대단하군요. 얼마나 큰 화재인지 보지 않아도 알겠어요.”
“송구합니다. 두 분을 저택에 데려다 드리고 바로 달려오느라 그랬습니다. 급한 사안이라 판단되어…….”
아렐 후작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요제프가 고개를 작게 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책망의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검은 늑대 기사단의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큰일 났습니다!”
“왕자비 전하가 납치를!”
그 말을 듣자마자 아렐 후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후작은 당황한 얼굴로 상황을 부정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전하께서는 분명 저의 저택에 잘 모셔다드렸…….”
상황 보고가 급한 기사들이 아렐 후작의 말을 자르고 앞다투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정보들을 전달했다.
“알 수 없는 괴한들이 저택의 문을 닫고 농성 중입니다. 왕자비 전하를 인질로 잡고요.”
“애초에 극단에 난 화재 자체도 그들의 소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렐 후작이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다시 한번 상황을 부정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깜박 속을 만한 뛰어난 연기력이었다.
“하나 전하께서 그 작품을 보게 되실 줄 어찌 알고요. 그 티켓은 제가 따로 구해드린 겁니다.”
검은 늑대 기사단원들의 싸늘한 시선이 아렐 후작에게 꽂혔다.
“그리너드의 외교관이시니 국제 정세에 능통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요즘 베르단과 아샤칼의 관계 역시 잘 알고 계시겠군요.”
“두 나라 사이에 이런저런 충돌이 있다는 것은 압니다. 하나, 그 일이 이 사건과 무슨 연관이…….”
“당연히 있지요. 저희는 파칼 공작과 아샤칼 왕실을 뒷조사 중이던 검은 늑대 기사단입니다. 왜 이 사건을 저희가 가장 먼저 알아차렸는지 아십니까.”
“그건…….”
“시종과 하녀들을 새로 들이셨다지요.”
“원래 데리고 있던 사용인들의 향수병이 심해져 돌려보내고 이곳에서 새로 구했습니다만…….”
“새로 구한 하녀장이 아샤칼 출신이라는 것도 아십니까.”
“……그 일은 제 시종에게 시켰던 터라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를 이용해서 왕자비 전하를 꾄다고요? 고작 그리너드 출신의 힘없는 후작인 저를요?"
후작은 계속해서 상황을 부정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연기와 대사였다.
‘우선 어벙하게 굴어 모두의 경계심을 누그러트린 뒤에 되려 타인에게 날 의심할 만한 정보들을 던져준다. 그럼 저들에게 나는 그저 제 실수조차 덮지 못한 멍청하고 한심한 귀족이 되어버리지. 이보다 완벽히 의심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거야.’
기사들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아렐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럴수록 아렐 후작은 속으로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아샤칼의 공작에 재수 없게 말려든 불쌍한 그리너드 출신의 귀족으로 보여야 해. 원하는 것 하나를 얻자고 베르단과 등질 수는 없으니까.’
후작은 자신의 역할을 끝까지 소화해냈다.
기사들의 시선이 아렐 후작에서 요제프에게로 옮겨갔다. 그들은 조심스레 여러 가능성을 점쳤다.
“에드먼드 파칼의 짓일까요?”
“아샤칼 왕실이 그 뒤에 있을지도 모르죠.”
“흠.”
요제프가 턱을 매만지며 고심에 빠진 시늉을 했다.
그때 아렐 후작이 발발 떨며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의도치 않게 왕자비 전하를 위험에 빠트렸으니 목숨으로 값을 치르겠습니다.”
검은 늑대 기사단의 부단장이 그를 일으켜 세우며 다른 제안을 했다.
“일단 저희를 도와 왕자비 전하를 구출하는 일에 협조해주시지요. 저택의 내부구조를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두 사람이 왕자비의 구출 문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왕자의 존재는 한순간에 뒤로 물렸다. 명백한 무시에도 요제프는 별로 괘념치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곳에 있었다.
“그래. 그렇게 된 일이군…….”
요제프의 시선은 한 곳에만 향했다.
유독 번들거리는 세드릭 아렐의 검은색 소매 단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