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금/갠소> 우리끼리만 보기!!! by S.R
리덴부르크가의 수상한 아가씨 4권
12. 코부르덴 후작
사냥대회가 끝났다. 마리엘라는 율리안의 마차 안에서 생각에 잠겼다.
‘사랑만큼 사람을 간절하게 만드는 것은 없지. 그걸 이용해야 해. 두 사람이 내게 품은 마음을 날카롭게 벼리어서, 결국은 그것이 서로를 겨냥하게.’
마리엘라는 두 사람 사이의 분열을 이용해 두 사람 모두에게서 벗어날 계획을 짰다.
바쁘게 머리를 굴리던 그녀에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오늘이 지나면 그녀는 다시 마리안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다가,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아니야. 어차피 마리안은 곁에서 계속 돌봐 줘야만 해. 이번에 사고 친 것도 그렇고, 시녀 하나가 혼자서 감당해 낼 수 있는 스케일이 아니야.’
왕성에 와서도 철이 들지 않는 마리안을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엎어진 물에 연연하지 말고, 수습할 계책이나 세우자. 율리안은 내게 마음을 품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어. 어쩌면 이건, 그에게는 스스로의 마음을 잘라낼 좋은 계기일지도 몰라. 그를 계속 자극해서 끊임없이 내 생각만 하게 만들어야 해. 내가 그의 곁에 있을 때는 물론-’
그녀는 고개를 돌려 율리안을 바라보았다. 청초한 느낌을 자아내는 외모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의 곁에 없을 때까지도.’
시선을 느낀 그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지?”
차갑고 낯선 얼굴이 더는 무섭지 않다. 그녀는 걱정하는 얼굴을 자아내고는 우물쭈물 어두를 꺼냈다.
“이런 말을 할 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미리 정해두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무엇을?”
“제가 다시 왕자비의 하녀가 되면, 그다음은 어쩌죠?”
“…….”
그가 잠시 침묵했다.
당황해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보다는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지적 받은 사람 같았다. 아마 요 며칠 그녀에게 신경을 과하게 쓰느라, 스스로의 본업을 깜박 한 모양이었다.
율리안의 마음을 알게 되니, 그의 언어 속 쉼표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저는 각하의 명을 어떻게 전해 듣나요? 잘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 저는 요제프 왕자의 최측근으로, 종종 왕자 전화와 밀회를 가지고 있죠.”
‘밀회’란 단어에 그의 눈가가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그녀는 그것을 못 본 체하며 혼자 재잘재잘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왕성이 왕자 전하의 영향력하에 있기 때문이에요. 그의 밀정은 어디에나 있죠. 시종, 기사, 대신, 때로는 볼품없는 하녀의 탈을 쓰고.”
한 박자 쉰 그녀가 그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그런데 각하는요? 공작 각하의 첩자는 어디에 있죠?”
“내가 알아서 해.”
그녀의 닦달에 그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그녀의 성에 차지 않는 대답이었다.
“제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해 적발당할 위험성 역시 염두에 놓은 건지 여쭙고 싶네요.”
대놓고 빈정대는 소리에 율리안이 입을 열어 무언가를 변명하려다가 멈추었다. 마리엘라의 화법에 휘말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율리안은 자신의 신분이 공작이며, 또한 동시에 그녀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냈다.
“……네 말이 맞아. 정말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군.”
목소리에 일순 위엄이 깃들었다.
“영리한 하녀니 금방 알아듣겠지. 입 다물고 기다려. 내가 답을 내릴 때까지.”
위협적인 말.
그것이 그녀에게는 ‘시간을 달라’ 애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둘 순 없지.’
그녀는 남자의 마음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불안하게 뒤흔들수록 간절해진다.
그들에게는 가질 수 있는 것보다 가질 수 없는 것이 귀하고, 그냥 가질 수 없는 것보다 가질 수 있을 것 같지만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 더 귀하니까.
마리엘라는 그런 존재가 되고자 했다.
전 재산을 바치는 것도 모자라, 심장을 내어주고, 가문의 영광과 명예를 헌납하며, 목숨을 쥐여 줘도 마음을 내어주지 않아 애를 태우는 여인.
“명심하죠.”
관계의 우위에 서기 위해 마리엘라는 꾀를 쓰기로 했다.
* * *
마리엘라가 왕자비의 처소로 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마리안과 미하엘과의 밀회 날짜를 앞당기는 것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연인을 만날 수 있다는 소식에 마리안의 입이 귀에 걸렸다.
“역시 마리가 오니 모든 게 일사천리야.”
“그 말이 별로 칭찬처럼 들리지 않는 걸요.”
드레스 차림의 마리엘라가 하녀 복을 입은 마리안의 외양을 다시 한번 체크 하며 답했다. 기교 부리지 않고 깔끔하게 묶어 올린 머리와 단정한 길이의 스커트, 모두 합격이다.
그녀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안이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는 물었다.
“됐어? 이제 가도 돼?”
마리엘라는 깐깐한 가정교사처럼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는 질문했다.
“사람들 지나갈 땐 어떻게 하라 그랬죠?”
“고개를 푹 숙이라고.”
“맞아요. 누가 뭐라고 하면 ‘왕자비님의 명을 받아 급하게 가는 곳이 있습니다.’라고만 말해요. 감히 그 말에 시비를 거는 간 큰 놈들은 없을 테니까.”
“알았어.”
“절대 얼굴을 보이면 안돼요. 차라리 냅다 도망치세요. 그게 더 수습하기 편하니까.”
“언제 출발해? 이러다가 늦겠어.”
잔소리가 길어지자 마리안이 재촉했다. 마리엘라는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베일을 머리 위에 썼다.
두 사람이 나갈 채비를 끝마치자, 근처에 있던 데이지가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저는….”
마리엘라는 따라오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치는 데이지를 단호히 내쳤다.
“여기 계세요. 처소에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해 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알겠어요.”
마지못해 대답하는 데이지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 * *
선왕 요하네스의 처소.
오늘도 두 남녀의 사랑놀이가 한창이다.
“나의 릴리!”
“나의 미하엘!”
이제 이 광경이 익숙해진 마리엘라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소파에 앉았다. 오늘 그녀는 책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이곳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마리엘라는 무료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애정극을 관람했다.
사랑에 눈먼 두 남녀는 멀리서 지켜보는 마리엘라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둘은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하고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그러다 겨울 사냥대회와 관련된 주제가 튀어 나왔다.
“소식 들었어요. 바이르 공작께서 왕자비님께 눈의 화관을 씌워주었다죠. 릴리도 그 자리에 있었죠?”
“아, 뭐…… 그랬죠.”
마리안이 별 흥미를 가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녀가 대충 얼버무리자, 미하엘의 마음속에서 불안함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과거, 동료의 입을 통해 들었던 소문들이 그의 머릿속을 사로잡았다.
그는 몇 번 망설이다 조심스레 그녀에게 물었다.
“저…… 릴리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사실만을 말해 줄 것을 약조해 주실 수 있나요?”
“네? 갑자기 무슨….”
마리안의 머릿속은 다른 주제로 팽팽 돌아갔다.
그녀는 혹시 그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십 육 년간 무서운 것 없이 살아왔던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미하엘은 그런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본인 내면의 열등감과 질투심을 잠재우기에 급급했던 탓이었다.
미하엘이 우물쭈물하며 본론을 꺼냈다.
“릴리는…… 바이르 공작과 아무 사이도, 그러니까, 어떤 감정적 교류도 없는 거…… 맞죠?”
“바이르 공작이요? 율리안 폰 바이르……?”
마리안의 눈동자에 의문이 한가득 담겼다. 자신이 왕자비라는 사실이 들통 난 줄 알고 벌벌 떨었는데, 상대는 뜻 모를 소리만 한다.
그녀는 율리안의 얼굴을 떠올렸다. 매사 무심하고 무덤덤했던 태도와 눈빛. 처음 본 순간이나, 지금이나 율리안을 바라보는 마리안의 평은 단 한 줄이었다.
‘재수 없어.’
그녀에게 율리안은 선 밖의 사람이었다. 적도 아군도 아닌 사람. 저번부터 미하엘이 그의 이름을 자꾸 꺼내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대를 의심한다는 뜻은 아니고, 그게, 그것이…… 사람들이 자꾸, 리덴부르크가의 마리엘라라는 하녀가 바이르 공작님과 깊은 관계라고 떠들어대서요.”
그녀가 계속해서 추궁의 눈빛을 보내자, 결국 그가 모든 것을 실토했다.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마리안이 실소했다.
“설마요. 그 인간은 그냥 멀리서 멀뚱멀뚱 지켜보기만 하는 석상 같은 놈……이 아니라, 그냥 남이에요, 남. 서로 관심도 없고, 서로에 대해 아는 것도 없어요. 소문을 너무 믿지 말아요, 미하엘. 세 사람만 거치면 없던 일도 진짜처럼 거론된다는 걸, 우리 모두 알잖아요.”
그녀가 다정한 어조로 상황을 설명하자, 미하엘의 두 눈동자에 다시 생기가 감돌았다.
“그럼, 둘은 정말 아무 사이가 아닌 거죠? 릴리뿐만 아니라 바이르 공작도?”
“당연하죠. 저희는 서로를 길거리의 돌맹이보다도 못한 눈으로 본답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마리엘라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마리안을 보며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마리엘라.”
“왕자비님.”
마리안이 얼른 무릎과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언제 봐도 감쪽같은 모양새였다. 마리엘라는 속으로 혀를 차며 겉으로는 냉담한 왕자비 연기를 했다.
“난 이만 가 보겠어. 언제까지 둘의 밀회를 지켜봐 줄 수는 없는 일이니까.”
오늘은 망을 대신 봐줄 필요가 없다. 어차피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까.
마리엘라가 뒤를 돌자, 마리안의 옆에 있던 미하엘이 대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왕자비님.”
마리엘라가 피식 웃고는 뒤를 슬쩍 보며 답했다.
“감사 인사는 하녀 마리엘라에게 하세요. 그쪽이 수백 배는 더 고생했으니까.”
언제나 그렇듯, 뼈가 있는 말이었다.
* * *
요하네스의 처소를 빠져나온 마리엘라의 발걸음이 향한 것은 왕자의 개인 서재였다.
서재로 들어선 마리엘라가 머리 위에 씌웠던 천을 거뒀다.
밀린 공무를 보고 있던 요제프가 그녀를 확인하고는 눈을 휘어 웃었다.
“또 드레스네. 신분 상승이 꿈이라면 그렇게 해 줄까?”
그녀는 그의 장난질에 반응하지 않았다.
“갑자기 웬 서재죠?”
“매번 같은 장소만 고집하는 건 위험하니까.”
뭐가 그리 불만족스러운지, 눈가를 찌푸리며 서재를 훑어보는 그녀에게 그가 방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오늘 회담은 짧아, 곧 율리안이 올 거거든.”
“바이르 공작이요?”
“응. 그래야 오늘 우리의 만남이 자연스럽게 보일 테니.”
“…….”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두 사람의 첩자였고, 따라서 율리안을 따로 만나는 날도 요제프를 따로 만나는 날도 많았지만, 두 사람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날은 많지 않았다.
그녀의 신분이 일개 하녀였기 때문이었다.
쉽게 오지 않는 기회였다.
어쩌면 그녀가 예측한 기간보다 빠르게 율리안 내면의 응어리진 마음을 분출시킬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마리엘라는 흑심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며, 조용히 이런저런 계략을 짰다.
아무것도 모르는 요제프는 현재 왕성의 정세만 읊고 있었다.
“계속해서 우리의 수를 간파당하고 있어. 내 행동 패턴을 읽었다는 뜻이야. 새로운 방법이 필요해. 그래서 말인데….”
그가 그녀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녀가 그에게 몸을 기울이자, 그가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대관식을 앞당겨보려고.”
여태까지의 고만고만한 수와는 달랐다.
마리엘라가 의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어떻게요?”
“있는 거라고는 거대한 자아와 두터운 아집뿐인 내 사촌 형님이 있잖아.”
“아, 에드먼드 파칼.”
그녀는 몇 달 전, 마리안에게 처참하게 패배한 젊고 오만한 귀족을 떠올렸다. 그는 그날 이후 이렇다 할 존재감을 내뿜지 못한 채, 수도의 한 저택에서 머무는 중이라고 했다.
“그가 우릴 치게 할 거야.”
요제프의 한쪽 입꼬리가 위험하게 올라갔다. 자신만만해질 때마다 나오는 그만의 습관 같은 것이었다.
그의 교활한 뱀 같은 본심을 마주하고도 마리엘라는 무감했다.
그녀는 힌트처럼 내던져진 언어 속에서 그의 저의를 찾아내려 했다.
“암살을 말하는 건가요?”
“그 엇비슷한 거라도 상관없어. 아샤칼이 베르단에 침투 중이라는 것만 증명되면 되니까.”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못미더운 표정을 하곤 물었다.
“그 겁쟁이가 그렇게 할까요?”
“물론 자신의 정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려 하진 않겠지. 그랬을 인재라면 마지막 성마전쟁 때 그렇게 줄행랑을 쳤겠어? 누누이 말하지만 암살까지 갈 필요도 없어. 심어둔 첩자만 잡아내도 돼. 첩자를 암살자로 바꾸는 건 내 친위대들이 할 일이니.”
“내부의 적을 치기 위하여, 외부의 적을 먼저 만든다…. 괜찮은 꾀네요. 제거해야 할 대상도 정확하고요.”
사실 외부로 시선을 돌리고 싶다면 흑마법을 들먹이는 것이 최고였다. 그러나 그것을 건드리기엔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큰 데다가, 전에 봉합된 왕자비의 혈통 문제가 다시 또 거론될 위험성이 있었다.
반면 아샤칼을 끌어들이면 모든 것이 깔끔해진다. 성마전쟁처럼 내전이 일어날 일도 없고, 교황청이 간섭할 여지도 주지 않는다. 그저 에드먼드 파칼과 관련된 이들을 쫓아내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봉합될 문제였다.
제국의 분열 이후, 어정쩡하게나마 대륙의 패권을 잡은 것은 베르단이었다. 겉으로 티 내지는 않지만, 베르단 사람들은 그 사실에 엄청난 자부심을 품어왔다.
그런 그들에게 이제 막 팽창하기 시작한 아샤칼은 눈의 가시와 같았다. 귀족 개개인의 이권과는 상관없이 민심이 그러했다.
귀족파와 국왕파 모두 아샤칼을 제거하는 것에 동의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실행은 언제쯤이죠?”
그녀의 질문에 요제프가 기다렸다는 듯 답변을 내놓았다.
“사촌형이 심어둔 첩자들은 이미 다 찾아냈어. 남은 것은 미세한 조정뿐이지.”
작전이 거의 다다른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조정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두 사람의 일을 사촌 형제간의 왕위 다툼이 아니라 적국 아샤칼이 베르단을 먹어 치우기 위해 정치적 개입을 시도한 것으로 보이게 하면서 동시에 전쟁을 일으킬 만큼 큰일은 아니게 만들어야 했다.
그렇다고 너무 가벼운 일이면 곤란했다.
현재 에드먼드 파칼은 귀족파의 호응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왕성이 발칵 뒤집어질 정도의 큰일이 아니라면, 귀족파가 나서 사건을 덮어버릴 것이다. 백성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를 테고, 모든 것은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다.
적당히 위협적이어서 모두가 털을 세울 만한 사건이 필요했다.
꽤나 머리를 굴려야 할 일이었지만, 마리엘라의 알 바는 아니었다. 현재 그녀의 목표는 두 사람의 마음을 양손 위에 쥐게 되는 것이지, 요제프가 왕위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군요.”
그녀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말았다.
오늘의 그녀는 평소와 달랐다. ‘제가 할 일은 무엇이죠?’ 하며 적극성을 내비치지도, 심각한 고민을 하는 척하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넋을 놓은 눈을 하고 그의 입술만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웃지 않아도 올라가 있는 입꼬리와 붉은빛을 띠고 적당한 두께를 지닌 그의 아랫입술을.
대놓고 유혹하는 그림은 아니었다.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 행동 속에서 본심을 드러낸 사람처럼 은근하고 뭉근했다.
요제프는 에드먼드 파칼의 첩자들을 어떻게 아샤칼과 엮을 것인지에 대한 계획들을 읊다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는 말을 멈추었고, 이건 또 무슨 속셈이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가 이내 쏟아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로 그녀에게 물었다.
“뭘 그렇게 빤히 봐?”
마치.
“원하는 게, 따로, 있는 것처럼.”
그가 천천히 말을 늘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장난스럽게 호선을 그렸던 입술이 점점 더 가까워진다. 서로의 숨소리가 어느 때보다 가깝게 들렸다.
닿을 듯 말 듯한 공간 속에서 느껴지는 체온.
마리엘라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곧,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어졌다. 가벼운 버드키스가 전부였던 지난번과는 다르게 농익은 키스가 이어졌다. 그의 혀가 닫힌 입술 사이를 파고 들어와 치열을 가볍게 훑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어 그를 받아들이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누군가 서재 문을 거세게 열고 들어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반갑지 않은 침입자에게로 향했다. 그곳에는 살벌한 얼굴을 한 율리안이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누군가를 베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살기였다.
“아. 율리안.”
요제프가 픽 웃으며 제 친우의 이름을 불렀다.
비밀 입맞춤을 들킨 자의 부끄러움이나 급급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여유로움이었다.
도리어 이 상황이 벌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한 당돌한 태도에 마리엘라는 그 역시 율리안의 마음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확신했다.
“요제프, 너…….”
율리안이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에서 둔탁한 분노가 느껴졌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녀는 목석같은 움직임으로 꾸벅 인사를 한 뒤, 급하게 자리를 빠져나왔다.
수치스러운 일을 적발당한 사람처럼 당혹감으로 굳은 얼굴을 푹 숙이고 뛰쳐나왔지만 속마음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기둥 뒤에서 숨을 골랐다. 그녀는 여태까지의 겁에 질린 표정은 싹 지워버리고, 무표정으로 뒤를 돌았다. 요제프와 율리안이 있을 서재 창문이 손톱만큼 작게 보인다.
‘무슨 대화를 나눌지 뻔하지.’
마리엘라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앞으로 걸었다.
두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해야 했다.
그녀를 지독히 의심하도록.
* * *
마리엘라가 떠난 서재.
남은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심상치 않다.
율리안은 어디 한번 해명해 보라는 듯, 서릿발같이 차가운 눈으로 요제프를 보고 있었고, 요제프는 떳떳하고 당당한 눈으로 그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먼저 백기를 들고 입을 연 것은 요제프였다. 그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하고 율리안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왜 갑자기 정색하고 그래. 우리 관계는 이미 잘 알고 있었잖아?”
“너만 바라보고 있을 네 아내를 생각해.”
“아, 마리안 말인가? 그녀는 뭐…… 창작자가 만들어 놓은 예술의 세계에 푹 빠져 나 같은 것은 쳐다보지도 않던데.”
책 속의 세상과 현실을 분간해 낼 의지도 없어 보이던 마리안을 떠올리며 요제프가 픽 웃었다.
왕성에 살면서 온갖 인간 군상을 접한 요제프에게도 마리안은 처음 보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요제프의 가벼운 농에도 율리안은 입꼬리 하나 올리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차갑고 딱딱한 태도를 유지했다.
“기만은 배신과 같은 언어다.”
아이러니하게도 율리안의 그 말 자체가 기만이었다.
율리안은 지금 왕자비를 존중하라는 이유로 요제프와 대립 중이지만, 그것이 표면적인 명목일 뿐이라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다.
스스로의 마음을 숨긴 채, 홀로 고고한 척 구는 율리안의 태도에 요제프의 심기가 뒤틀렸다. 소중한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 것은 너무나도 오랜만이어서, 그는 지금 자기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도 헷갈렸다.
“알아.”
“…….”
“그래서 공표하려고.”
“뭐?”
대화의 흐름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자, 율리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요제프의 눈동자에 패기인지 광기인지 정확히 분간할 수 없는 형형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정부 말이야.”
“…….”
갑작 폭탄선언에 율리안의 시선 끝이 떨렸다.
항상 재고의 재고를 거쳐 정답이 확실한 길만 걷길 고집했던 요제프.
그가 이제 계획에도 없던 수를 두기 시작했다.
* * *
폭풍전야와 같던 밤이 사그라지자 어김없이 태양이 떴다.
이 나무, 저 나무를 옮겨 다니며 시끄럽게 빽빽 울던 산새마저 졸음에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는 따사로운 정오.
왕자비 부부는 오랜만에 티타임을 가졌다. 티타임 장소는 유리 온실이었다.
부부는 자그마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아 있었으며, 데이지는 마리안의 바로 옆에 바짝 붙어 있었다.
이곳의 유일한 평민인 마리엘라는 홀로 서서 시종 대신 차 시중을 들었다. 그녀는 의식하지 않는 척하면서 계속 요제프의 행동거지를 주시했다.
턱을 괴고 앉은 자세와 살짝 나른하게 감긴 눈꺼풀과 미세하게 올라가 있는 입꼬리. 어느 것 하나 수상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곧 무언가 대단한 사고를 칠 테니 기대해 보라고 화려하게 예고하는 것 같이 느껴질 정도다.
‘아니, 경고인가.’
잠깐 마주친 요제프의 장난기 짙은 눈동자. 더 깊이 살피면 그 안에서 부글부글 끓는 감정이 엿보였다.
하긴 지난 밤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본다면 그가 내비치는 분노가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마리엘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자극을 받은 요제프가 어떤 식이든 반응을 보이리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각오를 조금 했을 뿐 모든 것을 초연하게 받아들일 준비까지는 되지 않았다.
아직 그녀는 이곳에 온 지 일 년도 되지 않는 뜨내기 하녀일 뿐이고, 요제프는 태어날 때부터 이 진창에서 구르고 구른 인물이었다.
입맞춤 몇 번 얻어 냈다고 그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있다는 착각을 해서는 곤란했다.
피식.
대놓고 자신을 경계하는 마리엘라의 태도에 요제프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찻잔을 엎어, 실수인 척, 마리안의 드레스 자락에 차를 흘렸다.
“저런.”
탄식하는 소리와는 다르게 전혀 안타깝지 않다는 표정이다.
마리안의 옆에 있던 데이지가 호들갑을 떨었다.
“왕자비 전하, 괜찮으세요?”
“아, 괜찮아. 우유를 탄 차라 뜨겁지는 않아. 옷은 갈아입고 와야겠지만.”
요제프가 말없이 마리엘라를 바라보았다.
마리엘라는 치맛자락을 꾹 쥐었다. 그녀는 시선에 소리가 있다면 유리가 깨지는 파열음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두 남녀 사이에 흘렀다.
아무리 요제프에게 관심 없는 마리안이라 할지라도, 단박에 눈치챌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마리안과 데이지는 쏟아진 찻물에 신경 쓰느라 두 사람의 전초전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요제프는 보란 듯이 짓궂은 미소를 마리엘라에게 지어 보이다가, 이내 모두가 아는 ‘요제프 왕자’가 되어 마리안을 걱정했다.
“다친 곳이 없나요, 내 사랑. 다 제 탓입니다. 사냥대회 이후 손목이 시큰거렸는데, 가벼이 여겼다가 결국 당신을….”
“괜찮습니다, 전하. 옷이야 금방 갈아입고 오면 되는 거죠.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마리안이 데이지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제프는 방긋 웃으며 어서 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저는 여기에 있겠습니다.”
마리엘라는 요제프와 함께 있기를 선택했다. 선택이라고 말하기에도 뭐했다. 그가 탁자 밑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아 마리안을 따라갈 수 없는 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리안과 데이지가 떠나고, 두 사람만 남은 온실, 마리엘라가 표정을 싹 굳히며 앙칼지게 따져 물었다.
“위험하게 뭐 하시는 거죠? 왕자비 전하께서 보셨으면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다신 이런 무모한-”
쏘아붙이는 그녀의 말을 요제프가 단칼에 잘랐다.
“연유가 뭐야.”
서늘하고도 차분한 목소리. 요제프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다리를 꼬았다. 거만해 보이게 턱을 들고, 위태로운 미소를 짓는다.
마리엘라의 눈에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시위이자 위협처럼 느껴졌다.
“생각을 좀 해봤어. 어젯밤 일 말이야. 쌀쌀맞기만 했던 우리 아가씨가 그날따라 먼저 날 유혹한 것도 신기한데, 하필 그 광경을 율리안이 봤다? 어딘가 좀 이상하지 않아?”
“…….”
그녀는 할 말이 없는 사람처럼 시선을 문가로 돌렸다.
요제프가 그녀의 손목 위를 검지로 가볍게 두드렸다. 자신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빨리 이실직고하라는 압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입을 열 생각이 없었다.
“율리안을 자극해서 네가 얻는 것이 뭐지?”
“…….”
“내가 무서워 대답하기 어렵다면, 내 친히 네 편이 되어줄 자를 이리로 데리고 오지.”
율리안을 이리 불러 삼자대면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
그녀의 쉬이 항복하지 않자, 그가 쿡쿡 웃으며 그녀의 손톱 위로 자잘한 입맞춤을 했다. 마리엘라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향했다. 새끼손톱까지 입맞춤을 끝낸 그가 손등 위로 얼굴을 짙게 비볐다. 그리고 눈을 치켜떴다.
“내가 못할 것 같은가 봐.”
더 이상 회피할 곳이 없다. 끝의 끝까지 밀린 마리엘라가 담담한 표정을 얼굴 위에서 긁어냈다. 무심하고 퍼석한 눈동자가 그대로 드러났다.
“공작 각하의 더 큰 사랑이요.”
그 말을 들은 요제프가 픽 웃었다. 그는 곧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숨길 생각도 안 한다 이건가.”
“숨기려는 노력을 무산시킨 건 왕자전하세요.”
요제프가 마리엘라의 손목을 쥐었던 손을 놓았다.
“그를 연모해?”
“그래 보이나요?”
도리어 마리엘라가 되물었다.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변이었다.
뻔뻔하게 느껴질 정도로 거침없는 언행에 요제프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부라도 되려는 거야?”
이번에는 마리엘라가 그를 비웃었다.
“절 너무 얕보시네요. 그런 거면 지금이라도 당장 얻어낼 수 있죠. 왕성에서 가장 예쁘장한 하녀로 소문이 난 마당에 고작 정부가 뭐라고.”
한껏 으스댄 그녀가 불안한 그의 마음에 쐐기를 박았다.
“청혼을 기다려 보려고요.”
요제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커졌다.
“불가능해. 그는 곧 교황청 소속으로 들어갈 예정이고, 어쩌면 차기 교황이 될 수도 있겠지. 너도 알겠지만 바레뎃샤는-”
그는 빠르게 그녀의 말을 반박했지만, 곧 그녀의 가벼운 도리질 하나에 말을 멈추었다.
마리엘라는 설핏 미소 지었다. 자만과 사랑이 섞인 반짝반짝한 눈을 하고는, 위에서 아래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나긋나긋한 어조로 그를 짓눌렀다.
“리덴부르크 백작가에서, 저희가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하시나요?”
“…….”
그의 얼굴에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마리엘라는 과거 그에게 내보였던,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선언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희열이 미소 근처에 옅게 베여 있는 듯 했다.
“어려울 것 없죠. 제가 그의 전부가 된다면.”
그것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당신이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증명해 보라는 의미가 담긴.
* * *
어느 늦은 새벽이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한 요제프의 처소.
그곳에 갑자기 한 무더기의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검은 늑대 기사단의 기사들이었다.
“늦은 시간에 불현듯 방문해서 송구합니다. 하나, 급히 전해야 하는 소식이 있습니다.”
기사들은 요제프의 침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요제프는 침대에 앉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이제 막 잠에서 깬 탓인지 퍼석하고 예민한 분위기가 그에게서 은은히 풍겼다.
“말해보세요.”
기사들은 하나같이 말을 꺼내지 못하고 쭈뼛댔다. 엄중한 사항을 온전히 감당해 낼 그릇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요제프는 인내심이 동나는 것을 느끼며 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언의 압박감을 느낀 건지, 기사들 중 가장 선두에 선 자가 입을 열었다.
“방금 전, 왕성 약초 보관소에 잠입을 시도한 첩자를 하나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 첩자에게….”
“첩자에게?”
기사가 말을 하다 말자 요제프가 계속해서 보고하라는 듯 그의 마지막 말을 반복했다. 그의 재촉에 기사가 무겁게 혀를 내어 말을 이었다.
“…왕자비 전하를 해하려고 한 정황이 발견되었습니다.”
분위기가 일순 서늘해졌다. 기사들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애꿎은 땅만 바라보았다.
검은 늑대 기사단이 보초를 맡은 지 한 달이 넘었다. 한 달 전, 그들은 왕실 최정예 기사단인 우리가 왜 보초 같은 걸 서야 하냐고 거센 항의를 했었다.
그런데 이제야 첩자 하나를 겨우 잡았다. 더군다나 첩자가 노리던 것이 왕자비였다. 그들이 요제프의 눈치를 보는 것이 당연했다. 바보 같아 보일 정도로 순한 요제프 왕자가 유일하게 예민하게 구는 것이 왕자비의 신변 문제라는 것을 모르지 않으니.
혹시라도 왕자 전하와 눈이 마주쳐 책문의 대상이 될까 그들의 고개는 더욱 깊이 숙였다. 그래서 그들은 요제프의 입꼬리가 만족스레 올라가는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였다.
지금 요제프의 마음은 잔뜩 들쑤셔진 벌집과 같았다.
가장 친한 친구와 가장 사랑하는 여자가 그의 뒤통수를 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분노가 어느 정도의 파급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는 자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리안과 마리엘라는 그의 가장 소중한 자들이었다.
그 두 사람에게 화를 낼 수는 없다.
갈 곳 없는 분노는 적에게 향했다.
아둔한 주제에 욕심은 많아서 갖지도 못할 왕좌를 탐내는 에드먼드 파칼에게.
* * *
날이 밝자마자 요제프는 주요 귀족들을 소환했다.
여유롭게 뒷짐 지고 룩센투크에 입성한 귀족들은 검은 늑대 기사단의 보고를 받으며 경악했다.
“……첩자는 왕자비 전하가 드시는 찻잎을 바꿔치기하려던 도중 검거되었습니다. 조사해 보니 왕자비께서 즐겨 드시던 찻잎에 이런 독초가 들어가 있더군요.”
기사단장이 들고 온 종이봉투에서 말린 식물 하나를 꺼내 들어 보였다.
“아이를 지우는 독초입니다. 피해자의 몸에 흔적이 남지 않아 귀부인들이 정부의 아이를 지울 때 쓰곤 하지요.”
“그렇다는 것은 설마….”
“지난번의 그 일도……?”
국왕파의 늙은이들이 웅성거렸다.
많은 귀족들이 마리안 왕자비가 사람들 앞에서 쓰러졌던 그날 일을 떠올렸다.
누구보다 건강하던 왕자비가 갑자기 허약해진 것이 미심쩍었었는데, 음해하려던 세력이 수를 쓴 것이라 생각하니 모든 것이 말이 되었다.
“첩자를 보낸 이를 찾았소?”
“아니요.”
기사단장은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고 대꾸하는 그의 모습에서 부족한 수사에 대한 부끄러움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묘한 당당함이 깃들어 있었다.
“설명을 끝까지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이 독초는 베르단 귀부인들이 쓰는 독초가 아닙니다. 따듯하고 습한 환경인 베르단에서는 나지 않는 식물이기 때문이죠. 아마 대부분이 이 독초의 존재 여부도 몰랐을 겁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이곳에는 다른 나라 출신이 아주 많으니까.”
누군가 수염을 매만지며 거드름을 부렸다.
바로 그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기사단장의 눈이 번뜩였다.
“예, 그것을 바탕으로 수사를 진행해 나갈 예정입니다. 이 독초는 주로 아샤칼에서 나고 쓰이거든요.”
“!”
회장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부단장은 손가락을 하나씩 펴 가며 발표를 정리했다.
“용의자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하나, 아샤칼 출신으로 이 독초의 쓰임을 알고 있을 만한 자. 둘, 상단을 통해서건 독자적인 밀수를 했건 아샤칼에서 이 독초를 가지고 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 셋, 왕자비의 왕세손 잉태를 원하지 않는 자. 저희는 이 세 가지 특징을 바탕으로 수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꿀꺽.
회장에 있던 귀족들이 말없이 침만 삼켰다.
말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지, 검은 늑대 기사단이 의심하고 있는 용의자는 단 한 명이었다.
에드먼드 파칼.
요제프의 사촌 형제이자, 현 왕위계승서열 2위. 또한 그는 아샤칼 국왕이 아끼는 외재종손이기도 하다.
그가 범인으로 지목되는 순간, 왕위 다툼과 국제 정세가 얽혀 든다.
이렇게 단순하게 다룰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국왕파는 국왕파 나름대로, 귀족파는 귀족파 나름대로 이 수사를 저지할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국왕파와 귀족파, 어느 누구도 입도 벙긋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기사단의 경솔함을 묻자니…… 저기 있는 저놈은 내 셋째 아들놈이고, 여기 있는 이놈은 내 친구 놈의 막내아들이고.’
‘사위의 앞길은 터놓아야겠고, 그렇다고 파칼 공작을 해할 수도 없고.’
‘눈치 없는 둘째 놈이 또 사고를 치는구나.’
‘이를 어쩌면 좋을꼬.’
조사에 착수한 이들이 혈연으로 묶인 자신들의 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귀족들을 보고 요제프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는 이 꼴을 보기 위해 일부러 검은 늑대 기사단을 채택했다.
부모 잘 만난 덕에 하는 짓 없이 빈둥빈둥대는 주제에 누구보다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는 파락호들.
요제프는 그들을 이용해 에드먼드 파칼을 치기로 했다.
혈연, 지연이 발목을 잡은 이 상황에서, 파칼을 옹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청렴하고 대쪽 같기로 유명했던, 재상 알폰스 후작 하나뿐이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애초에 단서는 단 한 가지뿐입니다. ‘첩자가 아샤칼에서 주로 나는 독초를 사용했다.’ 바꿔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파칼 공작을 음해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수를 썼다고요.”
“불쾌하군요.”
누군가 즉각적으로 대응했다.
요제프였다.
“제 아이가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방금 재상의 말은 아이를 잃은 아비를 모욕했습니다.”
“전하. 저는 그저-”
“변명할 거리가 있으신가요? 아니, 그 전에 묻고 싶군요. 재상의 눈에는 제가 왕위 계승을 위해 하나뿐인 사촌과 제 아이를 해할 사람으로 보이시는 겁니까?”
알폰스 후작이 입을 다물었다.
귀족들은 평소답지 않게 사람을 몰아세우는 요제프의 모습에 내심 놀랐으나, 이내 이 일이 왕자비의 신변과 관련된 일임을 깨닫고 납득했다.
요제프는 아내와 관련된 일이면 물불 가리지 않는 애처가니까.
마리안 왕자비가 마녀로 몰렸었던 지난 일을 떠올려 보면 이상할 것이 없었다.
요제프의 두 눈동자에 분노가 넘실거렸다.
불똥이 튈까 두려운 이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냉랭해진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의 배후자로 지목 받고 있는 에드먼드 파칼이었다.
“그만하시지요. 왕자 전하도, 저도 진범이 아닙니다.”
검은 늑대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저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따로 조사를 착수했지요.”
회의장에 모인 귀족들의 마음은 단 하나였다.
지금 당장 저놈의 입을 틀어막고 싶다!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사단장의 입에서는 말이 술술 나왔다.
“적발된 첩자 두 명을 각방에 가둬 따로 심문한 결과, 공통된 증언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누굴 위해 일하고 있는지 모르더군요. 그저 돈을 주는 이의 명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에드먼드 파칼이 기세등등해졌다.
“보십시오, 밝혀진 것은 결국 독초 하나뿐이잖습니까.”
기사단장의 만면에 회심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제 말을 끝까지 들어보시지요. 저는 분명 ‘공통된 증언’이라 했습니다. 그들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자신에게 돈을 주고 명을 내린 자가…… 아샤칼 억양을 썼다고.”
“…….”
파칼 공작의 얼굴이 누군가에게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변했다. 패배 선언과 다름없는 태도였지만, 기사단장은 자비를 두지 않았다.
“또한 이 일에 투입된 첩자들에게 아샤칼의 자금이 흘러들어왔다는 점도 확인했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아샤칼은 금화 주조법이 살짝 다릅니다. 그래서 추적이 쉬웠습니다.”
제국 렝바토의 멸망 이후, 렝바토의 것이었던 영토는 피에트, 베르단, 아샤칼로 조각났다. 각 나라가 건국된 지 백여 년, 그동안 금화 주조법을 비롯한 많은 것들이 바뀌었지만 세 나라 사이에서 사용되는 통화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왕자에게 첩자를 심은 자는 그 점을 간과했고, 기사단장은 바로 그 허점을 노렸다.
“물론 파칼 공작님이실 리가 없지요. 요양차 이곳을 방문하신 공작께서 첩자를 둘 만큼 넉넉히 자금을 챙겨 오셨을 리가요. 그런데 지난달, 공작님의 대부이신 바우만 후작께서 공작님께 보낸 막대한 자금의 행방이 불분명합니다.”
바우만 후작은 현 아샤칼 국왕의 사촌남동생이며, 에드먼드의 파칼의 대부였다. 귀족들이 파칼 공작을 주목했다.
에드먼드 파칼은 순식간에 궁지에 몰렸다.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 어안이 벙벙했다. 첩자를 심은 것도 사실이고, 그 과정에서 대부의 금전적 지원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맹세컨대 왕자비를 해할 시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함정에 발이 걸렸다는 건 알겠는데, 누가, 어떤 의도로 팠는지가 불분명했다. 가장 의심 가는 것은 왕자비지만, 왕자비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버려가며 그를 공격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 일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무조건 아니라고 잡아떼야 하는 건 맞는데, 그렇게 되면 피해를 입는 건 아샤칼에 있는 그의 대부다.
화가 난 요제프가 아샤칼에 직접적으로 항의를 한다면 고향에 있는 그의 대부는 곤욕스러워질 것이다. 똑같은 왕족이라도, 왕위를 물려받을 왕자와 왕의 사촌은 지위의 격이 다르다. 거기다 아직은 베르단이 아샤칼보다 강국이었다.
‘……하지만 대부의 일까지 결백했다고 목소리 냈다가는.’
아샤칼의 편을 든다고 눈 밖에 나는 걸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왕족의 핏줄.
그것도 하나뿐인 왕자의 아이를 해하려 했으니 내려질 처벌은 자명했다.
사형.
파칼 공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분한 일이지만 이번 일은 몸을 사리는 게 맞았다.
“저는……모르는 일입니다.”
요제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시겠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 일말의 위험이라도 두고 싶지 않은 아비의 마음을 이해해주시지요.”
기사단의 수사에 반발하지 말란 뜻이었다.
파칼 공작은 속으로 대부의 명예와 자신의 안위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저울질했다. 답은 하나였다.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 * *
찝찝한 결론과 함께 회의가 파했다.
돌아가는 길, 귀족들은 당파에 따라 삼삼오오 모여 이 일에 대한 담화를 나눴다.
국왕파는 당연히 이 사태에 분노했다.
“왕께서 계셨으면 이런 지지부진한 판결은 내리지 않으셨을 걸세. 어디 아샤칼 따위가!”
“이건 아니 될 일입니다. 우리 끼리 치고 박고 싸울 수는 있어도, 아샤칼이 이 일에 끼어들게 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들의 분노는 아샤칼에 대한 무시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칫 잘못하다간 여기서 권력을 차지할 수 없겠다는 위기감에서 온 것이기도 했다.
알폰스 후작의 침묵 속, 국왕파의 귀족들은 저들끼리 이 일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토론했다. 그러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대관식을 서둘러야 하는 것 아닙니까?”
“대관식?”
“대관식은 좀…….”
처음에는 다들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나이 많은 귀족들 입장에서, 교황이 참석하지 않은 대관식은 아무래도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반전된 것은 그들 중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하는 늙은 귀족이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였다.
“나쁠 건 없다고 보오. 아니, 참으로 적절한 판단이지. 아샤칼이 이렇게 나오게 된 것은 결국, 이 나라를 이끄는 국왕이 부재함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오. 교황 성하께서 함께하지 못함은 매우 아쉽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이 나라의 왕좌를 언제까지 공석으로 둘 수는 없지 않나.”
“듣고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백작님의 고견이라면 언제든지 따라야지요.”
멀지 않은 거리에서 국왕파의 대화를 듣게 된 귀족파의 귀족들이 픽 웃었다.
“경박하군. 아무리 상황이 급박해졌다 한들 교황 성하께서 불참하신 대관식이라니.”
“그만큼 저들이 궁지에 몰렸단 뜻이겠지요.”
귀족파 사람들은 모두 다 조금씩 국왕파의 귀족들에게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상업으로 부를 일군 놈들이라며 멸시 받았던 기억 때문이었다.
국왕파가 앞다투어 아샤칼을 비난했듯, 귀족파는 국왕파의 실태를 비꼬았다. 비웃음이 난무하는 가운데, 누군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귀족파 사람들의 고개가 돌아간다. 입을 연 것은 아주 젊은 귀족이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진중함이 청년의 눈에 깃들어 있었다. 청년은 망설이지 않고 제 생각을 이어갔다.
“요제프는 유약합니다. 왕자비의 존재가 거슬리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부의 적입니다. 하오나 아샤칼은.”
청년의 생각이 위험하다 판단되었는지, 브랫 백작이 중간에 그의 말을 끊었다.
“거기까지 하시죠. 파칼 공작이 우리와 손을 잡았다는 걸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정중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명백한 경고였다.
겁을 먹거나 기분 나빠 할 법도 한데, 청년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우아하게 브랫 백작의 경고를 받아쳤다.
“압니다. 제가 아는 것이 그것뿐이겠습니까. 파칼 공작이 등장한 그날, 우리 귀족파에서 선출된 재상이 즉사했다는 것도 알지요. 정말 절묘한 타이밍입니다.”
“…….”
귀족파의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라고 머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 번쯤 속으로 생각해 봄 직한 일을 눈앞의 청년이 정확히 짚어냈다. 애써 잠재워 놓았던 의구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게 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잘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어쩌면 그는 우리가 가장 낮은 곳에 있을 때 시간 맞춰 등장한 구원자가 아니라, 자신이 등장할 타이밍에 맞춰 우리를 나약하게 만든 간악한 뱀일 지도 모른다는 걸 염두에 두십시오.”
청년의 의견에 동조하는 눈빛들이 오고갔다.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브랫 백작 하나였다. 청년은 자신만만하게, 그러나 거만하지 않게 주변을 쓱 훑어보고는 마지막 쐐기를 박고 자리를 떠났다.
“대관식은 최악이 아니라 차악이 될 겁니다.”
그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깊은 침묵만이 남았다.
드물게 각 진영의 의견이 동일했다.
모든 귀족들은 이번 일의 배후에 아샤칼 왕실이 있는 건 아닌가 진심으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 * *
“…….”
대신들이 모두 떠난 복도. 율리안은 벽 한구석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오른쪽 눈꺼풀이 지금 그의 심기가 몹시 좋지 않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저, 공작 각하….”
새로 배정된 하녀가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율리안은 스르륵 눈을 떠 차가운 눈으로 하녀를 응시했다.
하녀가 안절부절못하며 말을 이었다.
“교단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가능한 빠른 답장을 받아보고 싶다는 말도 덧붙여서요. 어찌할까요, 평소처럼 연무장으로 갈까요? 아니면-”
짧고 날카로운 대답이 들어왔다.
“처소.”
“예?”
하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그가 하녀를 휙 지나치며 다시 대답해주었다.
“처소로 돌아가지.”
그의 친절은 여기까지였다.
그는 따라오는 하녀를 배려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 * *
“언제까지 아픈 척해야 해?”
마리안이 이불 사이로 눈만 빼꼼 내민 채로 마리엘라에게 물었다. 마리엘라는 대답 대신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외부의 시선을 모두 차단시킨 후에 마리안에게 다가온 그녀는 차분하게 마리안을 다독였다.
“조금 더 기다리세요. 온 나라가 왕세손의 비극적인 죽음을 알게 되고, 그들의 통탄에 베르단이 다 뒤흔들릴 때까지.”
그 말을 들은 마리안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있지도 않던 아이가 죽었다고 나라가 들썩이다니, 이것 참.”
마리안은 눈알을 도르륵 굴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었다.
“근데, 그건 사실이래? 파칼 남작이 내게 아이가 생기지 않는 약을 먹였다는 것.”
마리엘라는 얼굴 위에 뜬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가…… 가지고 싶으신 건가요?”
마리안과 미하엘의 밀회를 적발한 이후, 마리엘라는 항상 생각했다. 최후의 복병은 요제프나 율리안이 아닌 마리안일 수도 있겠다고.
요제프와 율리안은 협상까지의 과정이 어려울지언정 일단 합의한 내용은 지키는 편이었다.
가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뒤통수를 치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그것까지 계산에 넣어둔다면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했다.
허나 마리안은 달랐다.
그녀는 그야말로 천방지축, 말괄량이 그 자체였다.
마리엘라는 진심으로 들판을 널뛰는 야생마가 마리안보다 다루기 쉬울 것이라고 확신했다.
십수 년 동안 마리안을 보좌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어떻게 제어해야 하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속을 빤히 보여줘 다루기 쉬운 사람인 척하면서, 그날그날 기분이나 컨디션에 따라 날름 마음을 뒤집어 버린다.
변덕은 죽 끓듯 하고, 고집은 황소보다 세며, 담력은 웬만한 장군 저리가라 할 정도다.
그뿐인가. 필요에 따라서 거짓말을 또 어찌나 잘하는지. 그녀의 ‘응’은 ‘일단, 그렇다고 대답해줄게.’라는 뜻에 더 가까웠다.
마리엘라는 마리안의 사랑이 어린애와의 소꿉놀이에서 멈추길 소원했다. 단순 바람이라면 쉬쉬 덮고 끝낼 수 있지만, 작정하고 미하엘과 아이를 만들어 그것을 요제프의 아이로 위장시키려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리안 본인은 물론, 그 일에 가담한 자신과 데이지, 미하엘, 그리고 연관된 이 모두의 직계 가족까지 모두 숙청될 것이다.
“아니, 예전엔 그랬는데 지금은 별 생각 없어.”
웬일로 마리안이 마리엘라의 입맛에 쏙 들어맞는 말을 한다.
그러더니 그녀는 묻지도 않은 이유를 줄줄 읊었다.
“고향에 돌아가니 소피아가 아이를 낳았더라고. 하루 종일 빽빽 우는 것을 품에 안고 어르는 소피아의 눈동자가 텅 비었더라. 속이 빈 허수아비 같았어. 단두대 앞에 서도 그보다 더 절망스럽지는 않겠더라고. 그래서 생각을 해봤지, 현실적으로.”
‘현실적으로?’
마리안의 입에서 나온 그 문장이 너무 낯설다.
‘진작에 좀 현실적으로 굴어줬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가지도 않았을 텐데.’
마리엘라는 허탈한 마음을 숨기며 마리안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척했다.
“나한텐 하루 종일 울어 재끼는 아이를 사랑으로 보듬을 만한 인내심이 없어. 어쭙잖은 환상에 팔아버리기엔 앞으로 보낼 내 이십 년이 너무 창창해.”
마리안답지 않은 고찰이었다. 그녀는 기억 속 소피아의 퀭한 모습을 되짚어보다가, 이내 현실로 돌아왔다. 지금 중요한 것은 에드먼드 파칼의 악행이지 겪어볼 일도 없는 육아가 아니었다.
마리안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마리엘라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무튼, 벌어지는 일의 전말은 정확히 알아봐야겠어.”
알아오란 뜻이었다.
옆에서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데이지가 앞으로 나섰다. 데이지는 지금 마리엘라의 등장으로 인해 급격히 줄어든 자신의 입지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제가-”
평소였다면 마리엘라도 모르는 척 일을 넘겨주었을 거다. 그러나 이건 데이지가 맡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마리엘라는 데이지의 말을 끊었다.
“제가 알아오죠.”
“…….”
데이지의 얼굴 위로 섭섭함이 내비쳤지만 그녀는 그것을 못 본 척했다.
“하녀들끼리 속닥대는 담화들이 은근 적중률이 높거든요.”
마리엘라는 그저 능청스럽고 적극적인 하녀일 뿐인 것처럼 굴었다.
* * *
마리엘라는 바로 마리안의 처소를 빠져나왔다.
그녀가 기다란 복도를 지나 모퉁이를 돌자마자 커다란 손이 튀어나와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았다. 우악스러운 힘이 그녀를 단숨에 벽까지 밀쳐졌다.
마리엘라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위협한 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덩치가 커다란 남자는 그녀가 익히 알고 있던 자였다.
율리안 폰 바이르.
그가 사나운 눈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내자, 그가 고개를 숙여 작게 으르렁거렸다.
“일터를 옮겼다고 네가 어디에 속하는지 홀랑 까먹었나보군.”
아무래도 오늘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상당히 성이 난 것 같았다.
마리엘라가 의도적으로 그를 물 먹인 거라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마리엘라는 그의 분노에 동요하지 않았다. 여기서 겁을 먹어봤자 의심만 깊어질 뿐이었다. 그녀는 오히려 그를 노려보며 톡 쏘아댔다.
“주제넘는 행동하지 말고 가만히 기다리라고 하셨던 건 공작 각하가 아니셨나요? 고작 하녀가 어떻게 공작 나리의 처소를 들락날락하라는 거죠? 보는 눈이 많은 이 왕성에서?”
할 말을 끝낸 그녀가 자신의 어깨 위에 놓인 율리안의 손을 치웠다. 그리고 빠르고 야무진 손길로 구겨진 옷자락과 먼지가 묻은 곳을 털어냈다.
짜증을 내야 하는 입장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피력한 것이다.
“…….”
율리안이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
마리엘라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더 몰아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죠? 모든 일을 내다보던 바이르 공작께서 이렇게 준비성 없는 모습이시라니.”
율리안은 그녀의 비아냥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이내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 그녀를 응시했다.
“일 벌이지 말고 가만히 기다려.”
그의 새까만 눈동자 위로 이채가 돌았다.
“다시 널 데리고 올 방법을 모색하겠다.”
* * *
겨울비가 내리는 새벽이었다.
이제 막 국무를 끝낸 요제프가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율리안이 그의 처소를 방문했다.
율리안은 혼란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언질도 없이.”
얇은 잠옷 차림의 요제프가 장난스레 웃으며 물었다. 그의 눈 끝에 겨울비에 젖은 율리안의 로브자락이 잡혔다. 생각에 잠겨 정원을 서성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일부러 제 친우의 긴장을 풀어주려 애썼다.
요제프의 노력에도 율리안은 딱딱하게 굳은 그 모습 그대로를 고수했다. 아니, 오히려 더 긴장한 것 같았다.
침을 한번 꿀꺽 삼킨 율리안이 요제프의 시선을 피하며 용건을 꺼냈다.
“부탁이 하나 있어서.”
“뭔데?”
“내 하녀를…… 돌려줄 수 있나?”
장난기 어렸던 요제프의 얼굴이 싸늘히 식었다.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다시 한번 사실을 확인했다.
“마리엘라 말이야?”
율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다시 내 전속 하녀가 되었으면 해.”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맴돌았다.
율리안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요제프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요제프는 지금이라도 그가 말을 거둬들였으면 하고 소망했지만 그럴 기색은 없어 보였다.
마음이 답답해진 요제프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는 한숨을 얕게 쉬고는, 날선 감정을 숨길 생각도 않고 물었다.
“왜?”
“…….”
율리안이 침묵했다.
요제프는 여기서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다. 지금은 그도 여유 넘치는 상황이 아니었다.
요제프가 한 번 더 되물었다.
분노를 꾹 누른 목소리였다.
“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거지, 율리안.”
율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덜덜 떨리고 있는 턱 끝과 다르게 그의 눈동자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네가?”
“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서.”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증폭되는 감정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사랑이 그러했다.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무섭게 가라앉았다.
요제프는 불쾌함을 감추지 않으며 눈썹 아래 뼈를 꾹꾹 눌렀다.
“그녀와 내 사이를 모르는 것은 아닐 텐데.”
“알아.”
요제프의 차가운 말에 율리안이 즉각 대답했다.
그 덤덤한 대응이 요제프의 심기를 건드렸다. 요제프가 한쪽 눈썹을 쓱 올리며 율리안을 응시했다.
“곧 정부로 들일 계획이라는 것도 말했었던 것 같은데.”
“그랬지.”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거지?”
이번에는 대답이 바로 날아오지 않았다. 율리안은 친우의 질문에 고개를 돌려 처소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아로 만든 침대 장식, 금을 녹여 입힌 벽지의 문양, 제국 렝바토의 황실에서부터 내려져 왔다는 선이 고운 화병…. 백여 년의 세월에 거쳐 차곡차곡 쌓아 올라간 베르단의 부와 권력이 이 한 곳에 모두 모여 있었다.
율리안은 이 자리에 놓일 마리엘라의 모습을 상상했다. 박제된 사냥감과 정부의 차이점이 뭘까.
율리안에게 그 둘의 역할은 같았다.
누군가의 권위를 재확인시켜 주기 위한 트로피.
자기 주관이 확실하고 총명한 마리엘라에게 어울리는 자리는 아니었다. 비록 그녀가 그 자리를 원한다고 할지라도.
율리안이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권력자에게 정부나 애첩은, 사랑 없이도 만들 수 있는, 장식품 같은 거라지.”
주변을 훑어보던 그의 시선 끝이 천천히 요제프에게 돌아왔다.
주어진 선택지를 모두 잘라 내고, 한길만을 걷기로 굳게 결심한 남자의 눈이었다.
“그래서 부탁하러 온 거야. 그녀를 정부로 두겠다는 네 결정이, 사랑이 아니라 다른 육체적인 관계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그녀를 놓아 달라고…….”
요제프가 한쪽 입꼬리만 당겨 웃었다. 그는 율리안이 회피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바로 간파했다.
요제프가 율리안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물었다.
“사랑이라면?”
“…….”
“내가 마리엘라 호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요제프의 판단이 정확했다. 허를 찔린 율리안은 순식간에 할 말을 잃었다.
요제프는 침묵하는 친우에게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몰아세웠다.
결국 율리안이 본심을 드러낼 때까지.
“그렇다면…… 더욱 놓아주길 바라.”
“너답지 않은 언행이군, 율리안.”
요제프가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그는 자신이 율리안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선악과 도덕, 규율에 집착하는 딱딱한 샌님.
그래서 이런 공격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율리안에게 그릇된 방향을 걷고 있다는 사실만 알려주면, 그가 알아서 정도(定度)로 돌아가기 위해 시정할 것이라고 여겨서.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그의 예측을 벗어났다.
“너는 그녀를 기껏해야 정부 자리에 둘 수밖에 없지만, 나는 그녀에게 공작부인 호칭을 줄 수 있어.”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요제프의 두 눈이 흔들렸다.
“너……. 그 말은 성기사단장 자리를 내려놓겠다는 뜻이야?”
율리안이 고개를 잘게 끄덕이며 답했다.
“연모하는 마음을 속이고 그 자리에 앉을 수는 없지.”
“…….”
“교황께서 돌아오시면 모든 걸 이실직고하고 물러날 계획이다.”
이미 모든 각오를 끝냈다는 태도에 요제프가 당황했다.
그는 놀란 마음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강하게 나갔다. 미간을 찌푸리고, 목소리를 낮게 깔고, 어르고 윽박지르는 시늉을 한다.
“평민인 그녀가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 갑작스러운 행운은 독보다 독해.”
그러나 율리안은 그 모습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강직하게 나갔다.
“공작령으로 내려가 한적하게 살 계획이다. 사교계는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어.”
율리안이 간절하게 요제프에게 청했다.
“그녀를 놓아줘, 요제프. 하다못해 겉껍질이라도.”
“그건 또 무슨 뜻이지?”
“깊이 사랑하는 관계라면, 지금처럼 비밀리에 만나도 좋아. 난 공작부인 자리만 그녀에게 건네줄 테니, 그렇게 지내도록 해.”
대답을 유보하는 요제프를 향해 율리안이 덧붙였다.
“그게 더 안전하다는 것을 너도 잘 알잖아.”
상황이 뒤바뀌었다.
율리안이 과감하게 드러낸 진심에 요제프가 궁지에 몰린 것이다.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게 되었음에도 율리안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는 지금 스스로의 결정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마리엘라를 요제프의 품에서 빼내려는 것은 정치적 이유 때문인가, 그가 품고 있었던 흑심 때문인가.
어느 쪽이든 요제프에게 걸리면 곤란했다. 그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딛고 주어진 목표에 최선을 다했다.
“평민 출신의 정부보다 공작부인 출신의 정부가…… 더 나은 선택이겠지. 그녀의 생존을 위해서도, 나중에 태어날 아이들을 생각해서도.”
“싫다면?”
이번에는 요제프가 제 본심을 드러냈다.
“너도 잘 알다시피 난 욕심이 많아. 껍데기든 속 알맹이든 다 내가 가져야 성미가 풀리니까.”
그는 뼛속부터 율리안과 다른 사람이었다.
질투, 이기, 적의, 오만까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속 안에 깃든 비틀린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 * *
며칠이 지난밤이었다. 호출을 받은 마리엘라가 그의 처소에 들렀다.
그런데 오늘따라 요제프가 이상하다. 산더미 같은 서재와 지도, 각 인사들의 약점을 적어놓은 수많은 서류들은 어디 가고, 다과가 놓인 테이블에 그녀를 앉히고는 자신은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고 그녀를 응시하고만 있다.
‘또 무슨 속셈이지.’
부담스럽다는 감정이 일기 전에 의구심이 들었다. 그녀는 최대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권하는 대로 차를 홀짝였다.
이제는 거의 탁자 위로 엎드린 상태로 그녀를 빤히 구경하던 요제프가 슬그머니 화제를 꺼냈다.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그녀가 대화의 싹을 잘라내려 했다.
“쓸데없는 말을 할 거라면 다음에 하시죠.”
“내 정부가 되는 건 어때.”
그러나 요제프의 의지가 그보다 더 강했다.
대관식 관련한 이야기를 나눌 것으로 짐작했던 그녀는 뜬금없는 소리를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요제프는 마리엘라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의미로 입을 다물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녀에게 답변을 종용했다.
“대답은?”
하아. 마리엘라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헛소리 받아 줄 여유가 없으니 다음에-”
“농이 아니야. 제안도 아니고.”
마리엘라가 한쪽 눈썹을 쓱 올렸다. 이제 그녀는 요제프의 장난질이 익숙했다. 그래서 여유롭게 대처하는 방법을 알았다.
가장 쉽게 상황을 넘기는 방법은 그를 다섯 살 어린아이 보듯 하는 것이다. 동요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적당한 짜증과 적당한 다정함으로 투박하게 달래면 상황을 대강 넘길 수 있다.
“그렇게 막아 보시겠다는 건가요?”
“네가 원래 있을 자리를 알려주는 거지.”
보통 때라면 말이다.
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코끝을 툭 건드렸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한쪽 다리를 꼬고 거만하게 앉은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는 널 왕비로 만들려 했어. 첫 단추를 잘못 끼우는 바람에 모든 것이 뒤얽히긴 했지만.”
요제프가 자신의 말이 장난이 아님을 넌지시 드러냈다.
그의 진심에 마리엘라가 난색을 표했다.
“저는 더 이상 정부 자리에 흥미 없어요.”
“나도 널 계속 그 자리에 둘 생각은 없어.”
한 번쯤 곱씹어 볼 필요가 있는 말이었다. 마리엘라가 정색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말은, 마리안을 해하겠다는 뜻인가요?”
“한 번 말하면 딱 알아듣던 영특한 아가씨는 어디 갔지?”
그녀의 예민 반응에 그가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었다.
민망할 법도 했건만, 마리엘라는 쀼루퉁한 표정을 고수했다.
곧 웃음을 멈춘 요제프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소매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가지 말란 소리야. 나 말고 다른 이에겐 아무것도 내어 줄 생각하지 마.”
그 모습은 마치 투정하는 어린 아이 같았다.
요제프는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마리엘라와 눈을 맞추었다. 보이지 않는 벽을 치고 있는 듯한 덤덤하고 무감한 갈색 눈동자는 언제나 그를 서럽게 했다.
그가 그녀를 향해 샐쭉이 웃었다. 그리고 작고 간드러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는 내 거잖아.”
나의 마리엘라. 있는 건 숲과 덩굴뿐인 리덴부르크 영지에서 찾은 가장 귀한 보석.
덧붙이는 말이 퍽 달콤했다. 그러나 마리엘라에게는 그 모든 행동이 그저 애정을 갈구하는 강아지의 몸부림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모든 것을 손에 쥔 듯 태평하게 굴던 왕자님은 어디 갔죠.”
“죽었지. 온 마음을 다 준 아가씨가 다른 사내에게도 관심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그날 밤.”
며칠 전 입맞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저런.”
그녀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임으로써 지금 그녀가 전혀 안타깝지 않아 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어떻게 보면 도발이고, 또 어떻게 보면 신경전인 그녀의 반응을 보며 요제프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너무 피곤해서 머리가 어지럽네요.”
이 이상 쓸모 있는 대화거리는 없겠다 싶은 마리엘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대충 예의를 갖춰 무릎을 굽혔다 펴고는 도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전하, 쓸데없는 곳을 헤매시고 있는 중이신 것 같아 힌트를 하나 드리고자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그가 한 번 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엘라의 눈이 금세 매섭게 벼려졌다.
“제 마음을 확인하고 싶다면 선택지를 없애지 마세요. 전 위험에 빠지면 사랑부터 버리는 사람이니까요.”
“참고하지.”
요제프가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고개만 끄덕했다.
그녀가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서려는 그때, 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마리엘라.”
마리엘라는 문을 열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삐딱하게 의자에 기대앉은 요제프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는 지금 미묘하게 심기가 뒤틀려 있는 상태였다.
“지금은 좋게 말하지만, 그 다음번에도 좋게 말로 해결하겠다는 장담은 못 내리겠어. 조심하길 바라.”
그녀는 미소와 함께 무릎을 한 번 더 굽혔다 폈다.
“조언 감사합니다. 하지만 선을 넘으셨어요. 약조하셨잖아요? 당신의 적을 제거하면, 나와 마리안을 놓아 주기로.”
그리고 이번에는 대답을 듣지 않고 문을 닫고 완전히 나가 버렸다. 그녀 나름의 복수인 셈이었다.
요제프는 왕자를 상대로 신경질을 부리는 발칙한 하녀의 태도에 유쾌한 웃음을 보냈다.
한참 후, 웃음이 잦아든 그가 스스로의 귓불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랬었지.”
그렇게 말하긴 했었지.
아무도 없는 방. 작게 읊조리는 요제프의 두 눈동자가 불안하게 번뜩였다.
* * *
비슷한 시각, 알폰스 후작의 서재에 귀족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모두 국왕파 소속 귀족들로, 대관식 문제와 관련해 재상인 알폰스 후작을 압박하기 위해 모였다.
“내 오늘은 대답을 들어야겠소이다.”
수염이 하얗게 센 늙은 귀족이 먼저 서두를 열었다.
“대관식,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어영부영하다가 또 없던 일로 되어 버리는 건 아니겠지요.”
노귀족의 뒤를 이어 젊은이들이 한마디씩 말을 보탰다.
“저희도 그 일이 궁금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아샤칼 따위에게 밀려서는 안 되지요!”
귀족들이 성을 내며 닦달해도 알폰스 후작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그는 서류를 펄럭이며 애매한 의미의 감탄사만 뱉었다.
“흐음.”
알폰스 후작은 이들의 강경한 주장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자리에 모인 많은 귀족들이 답답해 가슴을 퍽퍽 치고 있을 때, 후작의 옆에 선 온건한 성격의 귀족들이 부드럽고 정중한 목소리로 그를 설득하려 했다.
“귀족파도 지금 같은 생각 중일 겁니다.”
“양쪽이 힘을 모아 일을 추진한다면, 교단에서도 뭐라 하지는 않을 거고요.”
그러나 이번에도 알폰스 후작의 반응은 같았다.
“흠.”
참다못한 노귀족이 사람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미온한 반응만 보이지 말고, 결론을 내주시지요!”
노귀족의 등 뒤로 고개를 끄덕이는 수많은 귀족들이 보였다.
더 이상 못 들은 척 흘려 넘길 수 없음을 알게 된 알폰스 후작이 들고 있던 서류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서재 안의 모인 이들의 시선이 알폰스 후작의 손끝으로 향했다가, 다시 그의 입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명료하게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휴우.
알폰스 후작은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말은 다 알아들었네. 나도 대관식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야. 탐욕 아샤칼 왕실이 그리너드로 모자라 우리 베르단을 노리려 하다니,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런데 말이야, 그런 생각이 들더군. 과연 이 일이 국왕의 부재 때문일까?”
“……?”
국왕파 귀족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서로의 눈치를 봤다. 도통 알폰스 후작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알폰스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뒷짐을 진 상태로 청중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잘 생각해 보시게. 현재 데르샤바크 왕가의 핏줄은 단 두 사람뿐이네. 왕자 전하와 파칼 공작이지. 아샤칼이 우리를 노리게 된 것은 파칼 공작에게 아샤칼 왕실의 피가 섞여 있어서야. 잠식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지.”
사람들은 홀린 듯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있네. 요제프 왕자 전하는 아직 살날이 많이 남은 이십대 중, 후반일 뿐이고 파칼 공작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도 않을뿐더러 심지어 더 어리지. 요제프 전하와 파칼 공작이 각각 왕위 계승 1순위와 2순위라 해도 그 간격은 하늘과 땅 차이야. 그런데 아샤칼은 왜 이리도 오만하게 구는지를 생각해야 하네.”
알폰스 후작의 말이 길어질 것 같자, 늙은 귀족 하나가 툴툴댔다.
“빙빙 돌리지 말고 핵심을 말하게. 나이가 드니 시간 가는 것을 마냥 지켜볼 수가 없어.”
알폰스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이곳에 모인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인자한 할아버지 같았던 그의 얼굴이 전쟁터를 누비는 노장의 것으로 바뀌었다.
그는 힘 있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의 핵심은 왕자 전하가 왕으로 즉위하지 못했음이 아니야. 왕자 전하의 몸이 나라를 이끌기에 너무 약하다는 것일세. 전하께서 몸져누운 탓에 국정을 논하지 못했던 것이 도대체 몇 날인가.”
긴 설명 끝에 알폰스 후작이 말하고자 했던 바는 하나였다.
“지금 요제프 왕자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허울뿐인 왕위 계승이 아니라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키고 보좌해줄 충실한 비서관일세.”
말이 좋아 비서관이지, 풀어 놓고 보면 섭정과 다를 바 없었다. 그는 요제프의 모든 것을 지켜볼 사람을 곁에 둠으로써 그의 팔과 다리를 묶으려 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이는 율리안이었다.
* * *
그날 밤 이후, 마리엘라를 대하는 요제프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는 이제 주변에 사람이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고 그녀를 향한 제 마음을 드러냈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요제프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시종과 하녀들이었다. 그들은 금세 알아차렸다. 그의 진득한 눈길 끝에 머무는 것이 누군지.
그에게서는 평소와 사뭇 다른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조바심에서 나오는 경계심과 독점욕이었다.
룩센투크에 다시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은 율리안을 홀렸던 리덴부르크가 출신 뜨내기가 이번에는 왕자를 유혹하기 시작했다고 떠들었다.
소문은 흘러 흘러 요제프의 귀까지 들어왔지만 그는 크게 괘념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심 만족스러워 했다. 이제 그만 하라는 마리엘라의 경고에도 그는 오히려 더 대담히 행동했는데, 어찌나 적나라하게 굴었는지-
“전하.”
“네, 나의 마리안.”
“어딜 그렇게 바라보시는 거죠?”
……왕자비인 마리안에게 마저 의구심을 품을 정도였다.
그때 두 사람은 겨울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꿀꺽.
근처에 있던 시종과 기사들이 침을 크게 삼켰다. 그들 모두 항간에 도는 소문을 알고 있었다.
마리안은 고개를 천천히 돌려 조금 전까지 요제프의 시선이 닿았던 곳을 쫓았다. 마리안의 외투와 담요를 들고 있는 마리엘라가 그 끝에 걸렸다.
마리안은 미묘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녀가 입술을 열어 무언가를 더 캐물으려 할 때, 요제프가 적절히 끼어들었다.
“그대의 옷이 많이 헤진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물론 일국의 왕자비다운 검소함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사치를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 말에 마리안이 싱긋 웃었다.
“다정하신 분, 그렇지만 저 외투는 제가 좋아하는 옷이랍니다. 마음 쓰실 일 없게 하녀를 시켜 수선을 하도록 하지요.”
상냥한 대화였지만, 그 속에는 일말의 애정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의 무심함이 쌍방이었다는 것이다.
산책이 끝난 직후, 마리엘라가 요제프를 향해 몸을 틀고 으르렁거렸다.
“한 번만 더 그런 장난질을 친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어요.”
불온한 하녀의 태도에도 요제프는 그저 느긋하게 굴었다.
“언제쯤이 좋겠어? 그대가 내 정부가 되는 것 말이야.”
그 말을 들은 마리엘라가 코웃음 쳤다.
“왕의 정부가 고작 평민에게 허락되는 자리였던가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왕의 정부는 최소 귀족의 부인이어야 했다. 평민 출신이라 하더라도, 겉껍질만은 귀족신분이어야 한단 소리였다.
“괜한 걱정은.”
요제프는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럽게 답했고, 마리엘라는 대꾸할 필요성도 못 느낀다는 표정으로 뒤를 휙 돌아 나갔다.
씩씩거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그가 실실 웃었다. 그는 아주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다. 이제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관식 일도 이렇게 진행되면 좋겠군.’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기대를 배신하는 법이다.
* * *
몇 시간 뒤, 회의가 시작되었다.
오늘 회의의 주제는 대관식이었다.
대신들은 오늘 따라 편을 갈라 싸우지 않고 비슷한 결의 의견을 냈다.
“언제까지 교황 성하를 기다릴 수도 없는 일이니….”
“문제는 교단에서 이를 수용할지….”
“대주교나 원로 신관을 초청하는 것은 어떠할지….”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왔다.
말을 꺼낸 자들은 모두 어중이떠중이들로, 브랫 백작에게도 알폰스 후작에게도 연이 닿지 않아 돌아가는 판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각 당파의 핵심 인물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그들은 신나게 입을 놀려댔다. 교황이 아끼는 율리안에게 일을 맡겨보는 건 어떠냐는 말까지 나올 때 즈음에 이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알폰스 후작이 끼어들었다.
“대관식을 준비하는 것도 좋지만, 그런 것에 연연하기보다 좀 더 시야를 넓혀보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떠들던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잦아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실실 웃던 요제프 역시 알폰스 후작을 주시했다.
“대관식을 늦추든, 당기든 요제프 전하는 왕이 되실 겁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요. 아사캴에서 온 파칼 공작을 제외하면, 베르단 내에 왕자 전하를 제외한 왕족이 없다는 게 문제 아니겠습니까. 지금 왕세손이 잉태된다 쳐도, 나라를 이끌 수 있을 만큼 장성하려면 최소 십오 년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 문제가 왜 지금 거론되는 것인지….”
알폰스 후작이 문제 제기를 한 자의 말을 끊었다.
“링글렌드에 그런 제도가 있더군요. 왕이 병세가 심각할 경우 비서관이 대신 업무를 보는.”
“!”
미리 이야기를 전해 듣지 못한 자들의 눈동자가 커졌다.
권력과는 동떨어진 국왕파의 귀족 하나가 침을 튀기며 반발했다.
“그게 섭정과 무엇이 다릅니까? 섭정은 한 핏줄이기라도 하지, 비서관에게 모든 지위를 넘겨주는 것은 너무 위험한 것 아닌지요. 그보다 대관식을-”
베데르 백작이 알폰스 후작 대신 답해주었다.
“물론 다르지. 섭정은 후계자가 자라날 때까지라는 모호한 말로 기한 없이 권력을 휘두르지만 비서관은 임기가 정해져 있으니까. 거기다 비서관의 선출은 귀족끼리 회의 끝에 투표로 뽑고, 필요에 따라서는 같은 회의를 열어 끌어 내릴 수도 있소.”
“…….”
무거운 침묵이 회의장을 덮쳤다.
각 당파의 귀족들은 각자의 이익을 셈했다.
누군가가 슬그머니 물었다.
“회의에 참석하는 귀족들을 특정 당파로 채우진 않으시겠지요.”
알폰스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당연하지. 양 당파에서 번갈아가면서 선출하는 방법도 있소이다.”
분위기가 슬그머니 기울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곳에 데르샤바크 왕실에게 충성하기 위해 모인 이들은 극히 적었다. 저들이 아샤칼의 침공에 반발하는 것도 자신들의 권력을 한 톨이라도 빼앗길까 전전긍긍하기 때문이었다.
귀족들은 각기 다른 꿈을 꾸었는데, 권세 있는 자는 자신의 당파 소속의 비서관을 선출해 지금의 권세를 더 강화할 생각을 했고, 아무것도 없는 비루한 자들은 운 좋게 자신이 비서관이 되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상상을 했다.
귀족의 신분으로는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왕의 권력을 나눠 받을 수 있다는 건 어떻게 봐도 매우 달콤한 제안이었다.
“괜찮은 방법인 것 같기도.”
“비록 같은 길을 걷진 않으나, 재상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요.”
“크흠, 데르샤바크의 피를 이은 자들은 방계의 방계까지 모두 절명하고 말았으니.”
“새로 잉태될 왕세손이 장성할 때까지 누군가 든든하게 베르단을 뒷받침 해줘야 합니다.”
여론이 뒤바뀌는 광경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요제프의 심정은 착잡했다.
비서관에게 권력 일부를 나눠줘야 해서가 아니다. 알폰스 후작이 가지고 온 제도의 최고 문제점은 비서관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요제프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본성을 숨기고 살아왔다. 필요한 명령은 어둠 속에서 은밀히 지시하면서. 그에게 비서관이 생긴다는 것은 그런 은밀한 활동이 모두 차단된다는 것을 뜻했다. 그것은 또한 그의 적이 그의 본성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까지 의미했다.
‘마리엘라와 율리안에게 신경을 좀 썼더니.’
그가 잠깐 한눈판 사이에 새로운 수를 들고 오는 장막 뒤의 누군가.
요제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에게 적개심과 감탄을 동시에 했다.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신하들의 눈길은 그를 향했다.
재상인 알폰스 후작이 한 발 앞서 나왔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 전하의 의견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떠신지요, 전하.”
요제프에게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아, 머리가….”
“왕자 전하!”
그는 일단 시간을 벌어보기로 했다.
평소와 같은 방법으로.
* * *
왕자가 쓰러지고, 회의가 급하게 파했다.
돌아가는 길, 국왕파의 귀족들이 알폰스 후작의 곁에 찰싹 붙어 입을 놀려댔다.
“이를 어쩌지요. 전하께서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시니.”
전혀 걱정하는 투가 아니었다. 요제프의 건강보다는 본인의 안위가 우선인 사람들. 알폰스 후작은 위선적인 귀족들 틈에서 가만히 생각을 했다.
“전하의 건강이 너무 걱정되는군요. 의원은 시종일관 마음의 문제라는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요. 타고난 혈통이 그러하니.”
데르샤바크 왕가의 피를 이은 자들은 모두 잔병치레를 견디지 못하고 요절했다. 그래서 귀족들도 요제프의 잦은 혼절을 익숙하게 여겼던 것이다.
알폰스 후작도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요제프의 건강을 위해 동양에서 귀한 약재를 구해 오기까지 했다.
그때는 순수하게 믿었지만 이제는 다르다. 율리안에게 따로 들은 것이 있었다.
알폰스 후작이 말없이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대책을 내놓았다.
“의원을 따로 구해와야겠습니다.”
더 이상의 꾀병은 봐주지 않겠단 소리였다.
* * *
요제프 왕자가 회의장에서 쓰러졌다는 말이 왕성을 돌았다.
왕자비의 최측근인 마리엘라는 역시 이 소식을 들었지만, 또 곤란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자빠졌겠거니 하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사는 두 남자의 마음을 어떻게 들었다 놨다 할 것 인가였지, 두 남자의 중상모략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이제 부차적인 문제였다.
이 일이 생각보다 더 심각한 사건임을 깨달은 것은 그녀의 숙소에 요제프가 들어온 것을 발견한 뒤였다.
“……알폰스 후작이 외부에서 의원을 구하고 있어. 아무래도 내 꾀병을 눈치챈 모양이야.”
간단한 인사말이 오고 가자마자 요제프가 본론을 꺼냈다. 꽤나 위급한 상황이었으나 마리엘라의 태도는 무감했다. 이 일에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요제프를 믿기 때문이었다.
“대책 없이 절 찾아오실 분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맞아. 그에 따른 계획을 통보하려고 왔지.”
그녀의 책상에 몸을 기댄 요제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독을 마실 거야.”
머리를 풀러 빗으로 빗던 마리엘라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녀는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물론 아주 적은 량을, 매우 조심히 배분해서 마셔야겠지만.”
요제프는 그녀의 그런 반응이 걱정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그녀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말을 덧붙였지만 그 말에 그녀가 진짜로 안심하지는 않았다.
마리엘라가 눈가를 찌푸리며 물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나요.”
요제프의 몸은 저주로 나날이 약해져 가고 있다. 그걸 염두에 둔 걱정이었으나, 마리엘라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몰랐던 요제프는 대충 말이 되게 둘러대기만 할 뿐이었다.
“지나치게 건강한 모습을 들키면 안 되니까.”
그녀는 입을 열어 그를 만류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자신이 요제프를 걱정할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그가 독을 먹지 못하게 말리는 대신 차선책을 선택했다.
“전하께서 드실 약의 약재 배합표를 보고 싶은데요.”
“그럼 뭐가 달라지나?”
“모르셨겠지만, 이래 봬도 대대로 숲지기만 맡았던 집안에서 나고 자랐답니다.”
라산 숲은 단순한 사냥터가 아니었다.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할 만큼 많은 약초와 독초들이 나는 곳. 라산 사냥터의 숲지기는 그것을 모두 분별하는 시험에 통과해야지만 될 수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괜히 자신의 직업을 자랑스럽게 여긴 것이 아니다. 과거 숲지기는 약초사, 의원과 동일한 대우를 받았던 귀한 존재였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는데.”
“약초에 관해서는 전하의 의원들보다 많이 알고 있을 거라 자부해요.”
“흐음.”
그가 별로 신용이 가지 않는다는 눈빛을 보냈다. 마리엘라는 더는 그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반응이 불신보다 장난에 가깝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 * *
며칠 뒤, 요제프가 다시 한번 그녀의 방을 방문했다. 그의 손에는 그녀가 일전에 부탁했던 약재 배합표가 들려있었다. 그녀는 배합표를 살펴보았다. 모르는 약초가 몇 개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녀가 아주 잘 아는 것들이었다.
“고열과 오한을 불러일으키는 독초들이군요.”
“아무래도 그게 보여주기엔 딱 좋으니까.”
“흠.”
마리엘라는 방 안에 있던 책을 뒤적거렸다. 약초에 관한 책으로 왕성 서재에서 슬쩍 해온 것이었다. 자신이 몰랐던 독초의 이름과 성능을 확인한 그녀가 책을 덮었다.
“야크 나무 수액이랑 섞어 드세요. 그게 증상을 더하고, 장기를 보호해 줄 거예요.”
“그런 건 들어 본 적도 없는데.”
그녀가 씨익 웃어 보였다.
“이제 기억하게 되실 거예요. 맛이 아주 대단하거든요.”
* * *
알폰스 후작이 외부에서 구해 온 의원이 왕성에 들어오기 바로 전날 밤이었다.
요제프는 마지막 남은 독약을 털어 넣으며 구시렁댔다.
그의 곁에는 마리엘라가 지키고 있었다.
“네 말대로 아주 고약한 맛이야. 오늘 밤은 끔찍한 악몽을 꿀 것 같군.”
“고작 이것 가지고 엄살은. 사흘 동안 잘 참아내셨으면서요.”
그녀의 핀잔에 그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원래 마지막이 더 버거운 법이야.”
“얼씨구.”
마리엘라가 헛웃음을 지었다. 요제프는 어째 점점 더 어린아이 같아졌다. 첫 만남 때의 의젓하고 다정한 제이 도련님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강압적이고 우악스러운 손길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강하게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가지 마. 날 토닥여줘야지.”
“제가 전하의 유모는 아닐 텐데요.”
“나 오늘 아파.”
그녀는 징징대는 그에게 가당찮다는 태도로 맞섰다.
“전하는 어제도 아프셨어요.”
그러나 마리엘라만큼 요제프도 끈질겼다.
“혹시 알아? 독약이 잘못돼 오늘 밤 꼴깍 유명을 달리할지. 그럼 넌 두고두고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될 거야.”
“약 만드는 과정까지 제가 다 지켜봤어요. 말도 안 되는 떼라는 건 스스로도 아시죠?”
“무서운 꿈을 꾸기 전에 다독여줘. 넌 날 사랑하잖아. 제이 도련님이 아파도 이럴 거야?”
결국 그녀가 졌다. 마리엘라는 한숨을 쉬고 의자에 다시 앉았다.
며칠 음독한 탓인지 요제프의 이마 위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나 있었다. 그녀는 협탁 위 마른 손수건으로 그의 이마를 닦아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가끔 전 이런 생각을 해요. 전하가 날 붙잡고 흔드는 사랑이라는 무기가, 실은 전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패가 아닐까 하는.”
“아주 날카로운 지적이야. 참고하도록 할게.”
독이 서서히 스며들어 정신이 아득해지는 그 순간에도 요제프는 농담을 잃지 않았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요제프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떠진다. 그는 독 때문에 노곤해진 몸을 가지고 잠과 싸웠다. 이대로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운 시간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모든 걸 포기할 생각을 했어.”
촛불 몇 개만이 일렁이는 공간.
그가 조심스럽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진심을 내비쳤다.
“리덴부르크 영지에서, 널 처음 만났을 때.”
옆에서 가만히 책을 읽고 있던 마리엘라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요제프는 다 죽어가는 병자가 마지막 유언을 남기듯이, 그렇게 잔잔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왕좌든 뭐든 다 포기하고 여기서 조용히 숨어 살다가 조용히 죽자, 그렇게 생각했지. 마음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는 것보다야, 눈이 안 보이는 게 더 나았으니까.”
갑자기 선명해진 제이 도련님과의 기억에 마리엘라의 마음이 요동쳤다.
그녀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기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요제프가 그녀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은밀히 최측근들만 부르고자 한 거야. 재화 몇 개만 빼돌리고, 죽은 걸로 해 두고 싶었거든.”
“……왜, 돌아갈 생각을 한 건데요.”
더는 참지 못한 마리엘라가 그에게 질문했다.
귀가 좋은 자라면 그녀의 격양된 목소리 끝이 갈라져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을 터였다.
반년의 시간 동안 속으로 조용히 품고 있었던 의혹들이 있었다.
마리엘라가 그것을 직접 물어 풀어내지 않은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쟁 같은 상황 속에서 사랑의 진실성을 찾을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입 밖으로 꺼내어 묻기에는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까닭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요제프와의 첫 만남이 그녀의 생각만큼 아름답고 순수하지 못할까 봐.
그가 품었던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마주하게 될까 봐.
그녀는 진실을 마주한 자신이 무너져 내릴 것을 내심 걱정했다.
룩센투크에서의 요제프는 버리고 가더라도, 리덴부르크 영지에서의 제이 도련님에 관한 기억은 안고 살아갈 생각이었다.
그만큼 그녀에게 그 순간의 기억들이 찬란했다.
생에 가장 맹목적인 시절이었다.
그녀의 기우를 알아차린 건지 요제프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감쌌다. 열이 올라 뜨거운 손바닥이 마리엘라의 손등을 감싸자, 그녀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가 다정하게 손등 위를 다독였다.
“사랑하는 아가씨에게 두려워하는 것이 있기에.”
“…….”
“내 옆에 있으면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 본디 내 것이어야 했던 권력과 명예를 쥐여 주면 일평생이 평안할 테니까. 그러려면 다시 그 지옥 같은 왕성으로 돌아가야만 했지.”
그가 스르륵 두 눈을 감았다. 더는 버텨낼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고개를 편한 쪽으로 돌린 요제프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콧김에도 열이 배어들었는지 호흡이 버거워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말을 이어가려 했다.
“그래도 괜찮았어, 그때는. 지킬 것이 있다면 없는 힘도 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고.”
피식.
그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순수한 마음이었지. 사랑하는 아가씨의 손에 쥐여 주고 싶은 게 많았어. 지금은…… 그 아가씨가 떠나지 못하도록 손을 꽉 쥐고 싶군.”
포장 하나 없는 진솔한 마음.
요제프가 가감 없이 내보여준 진심에 마리엘라가 보내 줄 수 있는 대응은 하나였다.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그녀는 말을 돌렸고, 그는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고 있어.”
“이제 그만 주무세요. 푹 주무시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 있을 거예요.”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마리엘라는 마지막으로 그의 이마에 난 땀을 닦아 주었다.
그가 푹 잠들 수 있도록 이부자리를 정돈 해주고는 살금살금 걸어 처소를 나섰다.
탁.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요제프는 감았던 눈을 조심스레 떴다.
그가 마리엘라가 떠난 곳을 힐끔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난 항상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졌지.”
소중한 것을 뒤흔들면서까지.
* * *
꾀병 문제는 간단히 해결됐다.
알폰스 후작이 데리고 온 의원은 요제프의 상태를 세밀히 살피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타고난 약골은 어찌할 수 없다는 의원의 말에 알폰스 후작은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 이상의 일을 벌이지는 않았다.
알폰스가 구해 온 의원은 이제 막 피에트에서 내려온 자로, 피에트 수도에서 명의로 소문난 이였다. 아무리 요제프가 잔꾀를 부린다 해도 피에트에 있는 의원에게까지 손 뻗었을 리는 없다고 판단한 알폰스 후작은 요제프를 향한 의심을 거두었다.
피에트에서 왔다는 의원은 요제프에게 증상을 완화할 약을 처방해주고 다시 피에트 수도로 올라가 버렸다.
물론 요제프는 그 약을 먹지 않았다.
그의 몸은 독이 중화되면서 차차 회복되었다.
대낮, 오랜만에 늦잠을 잔 요제프가 기지개를 켰다.
“마리안에게 가볍게 산책하자고 전해줘.”
“벌써 나가시게요?”
“언제까지 병상에 누워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성가신 알폰스 후작이 떠나서인지, 독 기운이 중화돼 건강이 되찾아서 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는 아주 홀가분해 보였다.
그의 옆에는 표면상 마리안의 명을 받아 요제프의 병색을 살피러 온 걸로 되어 있는 마리엘라가 함께 있었다.
그가 창가로 걸어 나가 커튼을 걷었다. 성 마른 나뭇가지 위에 조그마한 꽃봉오리들이 피어날 준비를 했다. 마리엘라가 그의 뒤를 쫓으며 닦달했다.
“비서관 문제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렸다.
‘사랑하는 아가씨에게 두려워하는 것이 있기에.’
며칠 전 요제프가 했던 말이 마리엘라의 귓가를 맴돌았다. 그것은 그녀의 마음을 아주 불편하게 했다. 결국 마리엘라는 그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요제프는 그런 그녀를 빤히 응시하다가, 곧 어깨를 으쓱하며 유쾌한 표정을 자아냈다.
“사흘 뒤에 왕실 기사단끼리 마상 창 시합을 벌인다더군. 왕실의 소소한 축제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공개되진 않을 테지만, 초대받은 귀족들은 올 수 있지. 마상 창 시합을 관람한 적이 있나? 리덴부르크 영지 근처에는 그렇다 할 볼거리가 없는 걸로 아는데.”
“말 돌리지 마세요.”
“그날로 해야겠어. 내 복귀를 공표하는 것 말이야.”
단순히 건강을 되찾았음을 알리고자 하는 것은 아닐 터였다.
마리엘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말은…… 국무회의 대신 마상 경기장을 이용하시겠단 뜻인가요?”
“무대가 화려해야 주인공이 빛나는 법이지. 네게도 꽤 괜찮은 배역을 줄게. 난 대본을 쓸 줄 아는 배우니까.”
“왕자비께서 참석을 내켜하지 않을 텐데요. 잊으셨을지 모르겠지만 전 왕자비 전하의 하녀랍니다. 왕자 전하가 아니라.”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어때. 당장 내일 마리안의 침실에 마상 창 시합이 멋들어지게 나오는 통속 소설 하나 끼워 넣지 뭐.”
‘마리안을 아주 정확히 간파했군.’
마리엘라는 그의 사람 보는 혜안에 탄복했다.
* * *
마리엘라가 요제프와 비밀스러운 만남을 지속시키는 동안 마리안도 미하엘과 착실히 시간을 쌓아갔다.
두 사람의 만남은 여태까지와 다른 양상을 띠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하녀들에게 당부해뒀지?”
“네. 왕자비님이 몹시 피곤하시니 아무도 들이지 말라 전했습니다. 그게 설사 왕자비님의 하녀 마리엘라라도.”
……마리안이 마리엘라의 제어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로운 만남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마리엘라가 요제프의 일로 바빠지자, 자연스레 마리안과 미하엘이 만나는 날들이 줄어들었다. 만남이 줄어들자 두 사람의 마음은 더 간절해졌다.
처음에 두 사람은 편지를 통해 그리움을 메우려 했다. 마리안이 데이지를 통해 편지를 전하면 미하엘이 착실히 답장을 보내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미하엘이 먼저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내용은 굉장히 간단명료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꼭 만나 뵈었으면 하는군요.
남들이 보면 연애편지가 아니라 첩자가 보낸 비밀 편지인 줄 알 정도였다.
그러나 마리안은 미하엘을 알았다. 미하엘은 감언이설로 사람을 꼬여내는 부류가 아니었다. 그의 무뚝뚝한 편지 안에는 그녀를 향한 사랑과 애절함과 그리움이 담겨있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했고, 곧 그를 만나러 가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물론 마리엘라 몰래.
늦은 밤, 선왕 요하네스의 처소.
데이지의 경비 속에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긴히 할 말이 있다고요.”
마리안은 온갖 난리 법석을 피우는 평소와는 다르게 만나자마자 용건부터 물었다.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정신은 온통 자신의 처소를 급습할지도 모르는 마리엘라에게 향해 있었다.
미하엘이 방긋 웃었다. 등 뒤에 선물을 쥐고 좋아하는 아이 앞을 얼쩡거리는 어린애같이, 기분 좋은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얼굴이었다.
“왕자비 전하께서 마상 창 시합을 관람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릴리도 그 자리에 나오나요?”
‘마상 창 시합?’
마리안이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자신의 일정에 관해 아무것도 들은 것이 없었다.
“아, 저는.”
“제가 쓸데없는 질문을 했네요. 당연히 왕자비 전하의 뒤를 따라오겠죠.”
“네, 뭐….”
그녀가 미적지근하게 대답했다.
“마상 창 시합에는 왕성의 내로라하는 기사들만 참가할 수 있거든요. 겉으로는 조촐한 왕성 내 행사라고 둘러대지만, 그 속에는 네 기사단 간의 치열한 자존심 싸움이 깃들어 있지요.”
순한 얼굴과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미하엘은 뼛속부터 무인이었다.
그리고 마리안은 그 로맨틱한 ‘겨울의 기사’에도 별 관심을 두지 않을 정도로 그쪽 일에 무감했다.
그가 눈을 번뜩이며 마상시합 우승자의 위대함에 설명할 동안, 마리안은 시종일관 가식적인 호응과 어색한 웃음만을 지었다.
미하엘의 장황한 설명이 끝나자마자 그녀가 질문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건 왜……?”
“아.”
미하엘이 머쓱한 표정으로 뒷목을 매만졌다.
“별건 아니고요, 저 같은 신출 기사에겐 관람을 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거든요. 후에 릴리의 입을 통해서나마 들어볼까 하고요.”
‘정말 저게 다야?’
마리안이 순간적으로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평소의 그녀라면 이렇게 김빠지게 하는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차고 넘치는 사랑이 더러운 성질머리를 이겼다.
마리안이 눈웃음을 치며 그가 원할 만한 답변을 내놓았다.
“최대한 노력해 볼게요.”
그녀는 속으로 데이지를 시켜야지, 하고 생각했다. 통속 소설 속 전투 장면을 봐도 머릿속에 남는 기억은 ‘둘이 싸웠네.’뿐인 그녀에게 마상 창 시합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남자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꼴은 몇 번을 봐도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그녀의 이런 가식적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하엘은 반짝반짝한 눈을 가지고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았다.
“네. 유심히 지켜봐 주세요, 꼭.”
만약 마리엘라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바로 알아차렸을 거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얼마나 절묘한지.
* * *
마상 창 시합 날이 다가왔다.
봄을 맞아 왕실 내부에서 연 소소한 대회였다.
그 소소한 대회에 수도의 난다 긴다 하는 귀족들은 모조리 참석했다.
그들의 참석에는 별 속내가 없었다. 그저 마상 창 시합이 최고의 구경거리이기 때문에 그 재미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물론 요제프의 속내는 전혀 달랐다.
그는 시종일관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시합을 관람했다.
창이 부러지고 사람이 나자빠지는 격렬한 경기장 한복판에서 시종일관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 그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섬뜩했다.
마리엘라는 저 섬뜩함을 알아차린 이가 없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경기에 집중하느라 왕자의 표정 따윈 신경도 쓰지 않았다.
“거기서 더 오른쪽을 쳤어야지!”
“죽여! 저놈이 다시 못 일어나게 해!”
평소에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젠체하는 귀족들이 이날만큼은 미친 사람처럼 열광했다.
마리엘라는 고개를 살살 젓고는 마리안의 상태를 살폈다.
마리안은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면사포를 쓰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면사포 때문에 그녀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 곳을 향해 돌아가 있는 고개라던가, 신경 쓰이게 까닥까닥 움직이는 발목 등이 그녀가 이 경기를 매우 지루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 일에는 통 관심이 없었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나, 한때 백작이 마리안에게 검술 선생을 붙인 적이 있었다. 선생은 마리안이 타고난 운동 신경에 비해서 승부욕과 성취욕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안은 어떻게 검술 연습을 빠질지만 고심했고.
마리엘라는 마리안이 이 지루함을 어디까지 견뎌낼지 궁금했다.
“아앗.”
몇 경기 지나지 않아 마리안이 이마를 짚고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요제프를 비롯한 주변의 사람들이 그녀를 주시했다.
마리안은 기다렸다는 듯 본론을 꺼냈다.
“햇빛을 쐬었더니 머리가 너무 어지럽군요. 실례지만 전하, 먼저 들어가 봐도 될까요?”
눈에 훤히 보이는 꾀병이었다. 그러나 요제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걱정하는 얼굴을 자아냈다.
“그러세요, 나의 여린 꽃. 그대의 몸이 회복되지 않아 걱정이군요.”
“잠시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기만 하면 될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부부는 표면적인 다정함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했다.
마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의 뒤를 데이지와 마리엘라가 따랐다.
마리안은 데이지에게 명령했다.
“넌 여기 남아서 경기를 관람토록 해.”
작은 목소리였지만 마리엘라와 요제프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시녀보다 하녀를 더 우선시하는 행동은 시녀를 무시하고 모욕 주는 것과 다름없다.
데이지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보다 못한 마리엘라가 재빨리 나섰다.
“제가 남을게요.”
“경기 결과에 대한 보고를 받고 싶어. 하나도 빠지지 않고 상세히.”
그러려면 데이지가 더 낫지 않겠냐는 투였다.
“그런 일이면 더더욱 절 시키셔야죠. 바이르 공작을 모신 덕택에 연무장을 맨날 들락날락했는데요.”
마리엘라의 말을 듣고 마리안이 잠시 고민했다.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알았어. 자세히 보고 와야 해. 안 본 사람도 현장을 바로 이해할 수 있게.”
마리안은 신신당부를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데이지가 마리안을 따라나서기 전, 그녀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고 떠났다.
일이 잘 마무리됐음에도 불구하고 데이지의 낯빛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앞으로도 마리안 왕자비에게 자신은 영원한 만년 2등일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마리엘라는 데이지가 속상하겠다는 생각은 했으나 안타깝지는 않았다. 데이지의 일은 데이지의 일인 거니까.
그녀에게는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요제프가 꾸민, 대본을 알 수 없는 연극에 참여하는 일.
마리안의 눈치를 보느라 감히 접근하지 못했던 귀족들이 요제프에게 몰려들었다.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비서관 문제 때문이온데.”
알폰스 후작이 서두를 꺼냈다.
요제프는 경기하는 기사들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흘리듯 답했다.
“원하는 대로 하시지요.”
“예?”
“경들의 생각이 옳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태껏 그랬듯이.”
각오했던 것과 달리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 것 같자 알폰스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그는 지금 이 상황이 함정이 아닐까 의구심이 드는 것 같았다.
요제프가 고개를 돌려 알폰스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특유의 말똥말똥하고 순진한 표정을 이용해 알폰스의 의심을 해제시켰다.
“누가 될지는 다음 회의 때 차분히 대화해 봅시다. 그런데 지금은 시합에 집중해도 될까요? 왕실의 몇 안 되는 구경거리라서요.”
“실례했습니다. 이만 물러나지요.”
알폰스 후작과 그를 따르는 귀족들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퇴장했다. 다들 아리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마리엘라도 마찬가지였다. 마리엘라가 그의 곁에 서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무슨 계획이신 거죠?”
이렇게 쉽게 순응하는 것은 그녀의 계산에 없던 일이었다.
요제프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잘 봐둬. 살면서 본 적 없는 구경거리를 만들 테니까.”
그의 시선은 여전히 경기장에 꽂혀 있었다.
마리엘라 역시 그의 시선을 따라 경기를 지켜보았다.
기사 하나가 멋지게 상대편 기사를 말에서 떨어트렸다. 벌써 3연승이었다. 여기저기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요제프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격렬히 박수를 쳤다.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지?’
마리엘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딘지 모르게 농락당하는 기분이 들어 불쾌했다.
그 사이에 3연승을 한 기사가 관중을 향한 감사 인사를 끝내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새 게임을 위해 새 기사 두 명이 각자의 자리에서 창을 잡고 말안장 위에 앉았다.
“아, 저기 새 기사가 나오는군. 요즘 내가 눈여겨보는 기사야.”
요제프가 그중 하나를 향해 턱짓을 했다. 마리엘라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 기사가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마리엘라는 요제프가 눈여겨보는 기사를 확인했고, 놀라 그 자리에서 굳었다.
미하엘이었다.
마리안이 사랑하는 기사.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엘라와 미하엘의 눈이 마주쳤다.
“!”
마리엘라와 미하엘 모두 모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두 사람을 둘러싼 시간이 멈춘 듯했다.
삐이이-
날카로운 휘슬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릴 시간조차 없다.
미하엘은 투구를 썼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퍼억-!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그의 몸이 바닥 위를 뒹굴었다.
관중이 그에게 야유의 함성을 질렀다.
랜스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나자빠진 기사.
기사로서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나, 지금 미하엘을 휘감은 감정은 그것이 아니었다. 미하엘이 고개를 들어 한 곳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왕자 요제프가 있는 곳.
요제프 왕자의 옆 좌석이 비워져 있었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지만….’
미하엘은 현실을 부정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럴수록 의문들이 그의 마음을 뚫고 자라났다.
‘만약 그렇다면 왜 지금 왕자비님이 하녀복을 입고 있는 거지?’
그의 눈동자가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마리엘라가 바로 시선을 아래로 피한다.
그녀의 복장을 다시 한번 확인한 미하엘이 생각의 영역을 확장했다.
일개 하녀가 임의로 왕자비인 척 연기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떤 가능성을 열어 두어도 길은 결국 하나로 통한다.
미하엘의 시선이 땅 아래로 떨어진다. 그는 동료들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에서 떨어지며 문제가 생긴 건지, 오른쪽 다리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괜찮나? 걸을 수는 있고?”
“부러진 것 같습니다.”
그가 덤덤하게 자신의 부상을 알렸다. 자포자기한 태도였다.
“부목 가지고 와”
“그걸로 되겠어? 들것 가지고 오라 그래.”
주변에서 떠들어대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선배 기사 중 하나가 그의 얼굴 위로 손을 흔들었다.
“근데 이놈 표정이 왜 이래? 이봐, 미하엘. 부상의 정도가 심한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야?”
“…….”
미하엘은 아무 응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허탈한 표정으로 가만히 자리에 서 있었을 뿐이다.
* * *
요제프 왕자의 바로 옆, 미하엘에게 정체를 들킨 마리엘라의 머리가 핑핑 돌아간다.
‘단순한 우연인가, 요제프의 함정? 그가 말한 연극이 이것이었나.’
쯧.
옆에서 요제프가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쉽게 끝난 이번 경기에 대한 아쉬움의 표시 같았다.
“부상이 심하려나? 잘 키워서 요긴하게 써먹으려 했는데.”
아직 요제프가 어디까지 간파하고 있는지 모르는 마리엘라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어떻게 지금 이 상황을 무마시킬 수 있을지 고심했다.
‘일단 미하엘의 입부터 막아야 해.’
결론을 내자마자 바삐 몸을 움직였다.
“잠시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그대가 내 하녀는 아니니까.”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는 은유적 표현에 요제프는 흔쾌히 그녀를 보내 주었다.
그녀가 사람들을 헤치고 단상을 내려오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후덕한 인상에 덩치가 있는 장년 남성이 그녀와 부딪쳤다.
“죄송합니다.”
마리엘라는 바로 고개를 숙였고, 남성은 후덕한 인상에 걸맞게 호탕하게 대처했다.
“아니, 내가 앞을 잘 못 본 탓…….”
마리엘라의 얼굴을 확인한 남자의 표정이 확 굳었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팔을 확 잡았다. 경황이 없어 보이는 몸짓이었다.
“자네…….”
“네?”
“자네, 혹시 어느 영지 출신인가.”
마리엘라는 당황스러웠다. 처음 보는 남성이 저를 보고 아는 척을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어쩌면 저 남자를 처음 보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묘하게 눈에 익어.’
그녀는 머릿속을 뒤져 저렇게 생긴 남성을 만난 적 있는지 기억해내려 애썼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저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만 물안개처럼 뿌옇게 올라올 뿐이었다.
그 사이에 남자가 영지 이름들을 대며 그녀의 과거를 추측하려 애썼다.
“할슈엘? 리바르트? 리덴부르크? 어느 지역에서 왔지? 혹시 모친이-”
그의 입에서 정확히 리덴부르크 영지가 튀어나오자 마리엘라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녀는 눈앞의 장년 남성이 라산 사냥터에서 그녀가 꼬시려 했던 귀족 중 하나였다고 생각했다.
‘무조건 잡아떼야 해.’
그녀는 고개를 아래쪽으로 돌려, 그가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지 못하게 한 다음 사슴처럼 가녀리고 겁이 많은 여성을 연기했다.
“무, 무슨 오해가 있으신지는 모르겠사오나, 저는 그저 시골에서 올라온 하녀일 뿐입니다. 나리께서 찾으시는 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에요.”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대는 분명 내가 아는….”
소란이 길어진다.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경기장에서 마리엘라와 장년 남성에게로 옮겨갔다.
마리엘라는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든 남자에게서 빠져나가고 싶은데, 꽉 붙잡힌 팔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녀가 아등바등 대고 있을 때, 누군가가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쯤 하시지요.”
머리 위로 지는 그림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도와준 이의 정체를 확인했다.
율리안이었다.
그가 마리엘라를 제 등 뒤로 숨겼다.
“제 하녀가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그 틈을 또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내’ 하녀지.”
소란을 확인하러 기사들을 이끌고 당도한 요제프였다.
율리안이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요제프는 몸을 틀어 장년 남성을 반겼다.
“그나저나, 이렇게 연락도 없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초대장을 받았는데 안 올 수가 있나!”
마리엘라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눈치를 살폈다. 정황상 요제프와 장년 남성이 꽤 친밀한 사이인 것 같았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초대장을 보냈을 텐데요. 아무튼 이렇게라도 뵐 수 있어서 반갑습니다. ……코부르덴 후작.”
마리엘라는 그제야 제가 왜 저 남자를 익숙하게 여기는지 깨달았다. 전에 요제프와 함께 그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다.
선왕 요하네스의 재상.
합리적인 정책들로 많은 귀족들의 신임과 선망을 받았던 귀족.
마누엘 코부르덴.
* * *
요제프가 마누엘 코부르덴의 이름을 밝히자 사방에서 웅성거렸다.
“코부르덴 후작이라고?”
“저분이?”
“수도에 어쩐 일이시지.”
“그러게. 아무 목적이 없을 리는 없어. 근 이십 년 만의 방문인데.”
나이가 많건, 적건, 귀족파든, 국왕파든, 귀족들은 가리지 않고 모여 떠들어댔다. 그들에게 이 일은 마상 창 시합보다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요제프가 소란스러운 주변을 훑어보며 말했다.
“여전히 인기가 많으시네요.”
“과거는 언제나 미화되기 마련이지요. 잘 지내셨습니까, 왕자 전하. 요즘 대관식 문제로 마음이 참 복잡하시겠습니다.”
마누엘 코부르덴이 호탕하게 웃으며 답했다. 가볍게 덧붙이는 말에 꽤 뼈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 말이 사람을 불쾌하게 하거나 긴장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과연 십 년 넘게 재상직을 맡았던 자다웠다.
요제프는 평소와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왕자를 연기하며 코부르덴 후작의 말을 가볍게 넘겨버렸다.
“하하. 그 일은 대신들의 몫이지요. 그네들이 얼마나 일을 잘해주는지 전 항상 감사하고 있답니다. 응접실에서 볼까요, 여긴 사람이 너무 많아 소란스럽군요.”
“그간의 일을 차분히 나눠 보는 것도 좋지요. 다만, 이 하녀는…….”
마누엘 코부르덴이 말끝을 흐리며 마리엘라를 바라보았다. 미련이 철철 흘러넘치는 눈이었다.
마리엘라는 율리안의 등 뒤로 숨었다. 다행히 율리안도 피하거나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녀를 중심 소재로 한 요제프와 코부르덴 후작 간의 대화가 계속되었다.
“제 부인이 고향에서 데리고 온 하녀입니다. 마리안을 본 적이 있으신지요.”
“아니요. 아직 뵌 적은 없습니다만, 한 가지 여쭈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왕자비의 본적이 리덴부르크가 맞습니까.”
‘또 리덴부르크 영지의 이름이 나왔어.’
마리엘라는 왜 자꾸 전 재상의 입에서 시골 백작 가문의 영지가 오르락내리락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전대 백작이면 몰라도, 현 백작 하이든 리덴부르크에게는 저런 거물급 인사와 닿을 만한 끈이 없었다. 적어도 그녀가 라산 사냥터에서 꼬셨던 적은 없다는 뜻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코부르덴 후작이 어떠한 연유로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지, 또 어떻게 그녀의 고향을 쉽게 유추해 낼 수 있었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 상황이 매우 찝찝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소처럼 직접 나서 질문할 수는 없었기에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기만 하였다.
“그렇긴 한데…… 무슨 연유로 묻는 거죠?”
요제프 역시 코부르덴 후작의 말 속에서 이상함을 감지한 것인지, 다소 경계하는 투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저 하녀도 리덴부르크가에서 왔다는 뜻이군요.”
“제 아내의 하녀에게 관심이 많으시군요.”
“저 아이의 부모에게 궁금한 게 많지요.”
‘우리 부모님?’
마리엘라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그녀의 어머니는 대대로 리덴부르크 백작가의 하녀였고, 아버지는 숲지기 집안의 장손이었다. 저런 대 귀족이 궁금해하기는커녕, 존재를 기억할 만한 그 어떤 요소도 없었다.
대화를 엿들으면 엿들을수록 모든 것이 미궁 속으로 빠졌다.
“숲지기의 딸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모두 죽었다고 하더군요. 그 이상은 저도 아는 게 없고요.”
“숲지기…….”
코부르덴 후작이 입 속으로 그 단어를 외었다.
요제프가 선심 쓰듯 먼저 물었다.
“그렇게 신경이 쓰인다면 제가 따로 알아보라 할까요?”
“아, 아닙니다. 오랜만에 만나 뵙게 된 귀한 시간을 그렇게 허투루 쓸 수는 없지요.”
코부르덴 후작은 다시 호탕한 남성으로 돌아갔다.
“자리를 안내하지요.”
요제프가 생긋 웃으며 앞서 걸었다.
* * *
경기장 근처의 아무도 오지 않는 정원.
커다란 물푸레나무 아래, 율리안과 마리엘라가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비서관을 코부르덴으로 쓸 계획인가?”
율리안의 질문에 마리엘라가 고개를 저었다.
“따로 전해 들은 게 없어요.”
진짜였다. 요제프는 연극이니 배우니 하는 말만 거창하게 늘어놓았을 뿐, 자세한 계획을 읊진 않았다.
율리안은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리엘라는 자신이 그였어도 똑같이 의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잠깐 사이 코부르덴 후작이 보인 행보라고는 마리엘라를 향한 지대한 관심뿐이었으니.
‘진짜 나도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데 어쩌라는 거람.’
동시에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도 코부르덴 후작이 왜 저렇게 구는 것인지 알 수 없어서 답답하긴 매한 마찬가지였다.
곧 그가 고개를 휙 돌렸다.
“상관없어, 어차피 잘되지 않을 테니. 마누엘 코부르덴은 너무 나이가 많아. 허약한 왕자를 대신하기 위해 만든 제도에 오늘내일하는 늙은이를 쓸 수야 없지.”
경기가 막 끝났는지, 사람들 몇이 어슬렁대는 것이 보였다.
그가 그들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회의가 당장 내일인데 다른 대처방안이 있을지 궁금해지는군.”
그 광경을 본 마리엘라의 마음이 급해졌다.
율리안 때문이 아니었다. 미하엘이 경기장을 빠져나가기 전에 그를 만나러 가야했다.
“먼저 가 봐도 될까요. 제가 오늘 좀 바빠서.”
그녀는 율리안이 따로 더 할 말이 없어 보이자, 모임을 파하고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가려 했다.
떠나려는 그녀를 율리안이 붙잡았다.
“다른 술수가 있는 건 아니고?”
“그걸 알아보러 가는 겁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미하엘이 있는 곳으로 가려다가 곧 무언가를 생각해내곤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만 뒤로 틀어 율리안을 바라보았다.
“참. 일전에 말씀하신 그건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절 다시 데리고 온다는 계획이요.”
“……조금 더 기다려.”
그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다소 자신 없어 보이는 태도였다.
마리엘라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각하께서 시키신 것을 중 가장 쉬운 일이군요.”
그리고 그녀는 바로 미하엘을 보러 갔다.
요제프, 율리안, 코부르덴 후작까지.
당황스러운 일들투성이였으나 지금으로서는 미하엘의 입을 막는 게 먼저였다.
* * *
다음날 오후였다.
마리엘라는 마리안의 처소에 앉아 손수건에 수를 놓았다. 마리안이 미하엘을 주겠다며 열심히 꽃 자수를 넣다가 실패한 것들이었다.
“휴.”
그녀가 망한 자수를 손보다 말고 얕은 한숨을 쉬었다.
요즘 자꾸 일이 꼬였다. 보이지 않는 적 때문에 번번이 무너졌던 요제프의 좌절과 절망이 절실히 이해 갈 정도였다.
미하엘의 입을 막는 것엔 성공했지만 요제프를 만나 의중을 떠보는 것은 실패했다. 그가 밤새 코부르덴 후작과 담소를 나누느라 처소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종장을 통해 따로 만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겼으나 아무 답변이 없었다.
미하엘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마상 창 시합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연극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코부르덴 후작이 저를 아는 척하는 것은 짜여진 각본인 건지, 비서관 제도에 대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묻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았지만, 만날 수조차 없는 상황이니 매우 답답했다.
‘일단 마리안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잘 처리했지만 그 이후가 문제야.’
그녀는 마리안을 힐끔 보았다.
미하엘의 부상소식은 물론, 마상 창 시합 참가 소식도 모르는 마리안은 혼자 희희낙락해서 통속 소설을 읽고 있었다.
데이지가 그 옆에서 열심히 같은 책을 읽고 있었으나, 마리안과 다르게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녀가 다시 자수틀로 시선을 옮겼을 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문을 열어보니 여느 때와 같이 진중한 표정을 지닌 시종장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자연스러운 손길로 통속 소설을 침대 밑으로 숨긴 마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경계심이 가득 묻어나 있었는데, 시종장이 나타나서 좋은 일이 없었다는 그간의 경험에서 우러난 태도임이 분명했다.
시종장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말했다.
“말씀 전하러 왔습니다. 마리엘라 호반을 회의장으로 호출하라고 하시더군요.”
마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 이름과 헷갈린 건 아니고?”
“아니오. 정확히 마리엘라 호반만 호출하라는 명입니다.”
그녀는 시종장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어. 데이지, 나갈 채비를 해. 왕자 전하를 뵈러 가야겠다.”
데이지가 괜찮은 드레스를 고르기 위해 헐레벌떡 처소 밖을 나가려는 순간, 시종장이 마지막 말로 확실히 마리엘라를 호출했다는 사실을 못 박았다.
“왕자 전하의 명이 아닙니다. 코부르덴 후작께서 요청하신 겁니다.”
“……?”
마리안과 마리엘라의 시선이 마주했다. 두 사람은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 * *
비슷한 시각, 요제프는 귀족들 앞에서 코부르덴 후작을 소개하고 있었다.
“어제 마상 창 경기에 참석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코부르덴 후작께서 왕성을 방문하셨습니다. 오랜만에 회의에 참가하고 싶으시다더군요.”
마누엘 코부르덴이 그 앞에 서서 대신들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모두 반갑습니다. 나와 직접적으로 아는 이도, 모르는 이도 있을 테지만 내 이름은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오랜 기간 동안 선왕을 모셨던 코부르덴 후작이라고 합니다.”
많은 존경을 받았던 코부르덴 후작이었지만, 모두의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 나라의 귀족들이 국왕파니 귀족파니 나뉘기 전에 재상을 맡았던 자였다.
당파를 선택하지 않은 명문가 귀족. 이는 그가 모두의 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요하네스 전하의 장례식장에서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왜 지금 와서 저러는 거지?”
“비서관 제도가 꽤 달콤한 것이긴 한가 봅니다. 저런 늙은이도 달려왔으니.”
귀족들은 따가운 시선으로 그를 맞았다.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적대감에 코부르덴 후작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룩센투크가 많이 변했구만.”
중얼거리는 그 말에 많은 귀족들이 헛기침을 했다.
싸늘해진 분위기.
현 재상인 알폰스 후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코부르덴 후작, 그대가 이 회의장에 나타난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하오.”
두 사람은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코부르덴 후작의 고개가 알폰스 후작이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두 노장의 기세 좋은 눈빛들이 허공에서 한 번 맞부딪쳤다.
긴장감 가득한 대치가 끝나고, 코부르덴 후작이 먼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요즘 룩센투크가 뒤숭숭함은 내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곳에 온 것은 노인네의 사사로운 욕심과 고집 때문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길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안심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곳저곳에서 코부르덴 후작과 비서관직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아우성쳤다.
“전하. 비서관 제도는 왕실과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 고안된 제도입니다. 나이가 많은 이를 비서관에 올릴 수는 없습니다.”
“맞습니다. 물론 코부르덴 후작의 실력이야 이 나라에서 모르는 자가 없는 것을 압니다만, 그래도 그의 나이를 생각하신다면 비서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요즘의 복잡한 정세를 이십 년 전과 비교할 수는 없지요. 우리의 적은 이제 마녀가 아닌 아샤칼이니.”
누군가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몇 안 남은 파칼 공작 지지자들이 발끈했다.
“아직 아샤칼 왕실이 범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꼭 증거가 필요합니까? 이런 일은 정황이 중요합니다. 정황이.”
“아니, 그럼, 누군가 일을 이렇게 꾸몄다는 정황이 발견되면 또 입장을 뒤집으실 겁니까? 제가 보기에 경의 입장은 정황과 증거가 없을 때부터 이미 정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만.”
다툼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발생하였다.
“자자, 그만들 하시게. 전 재상이셨던 코부르덴 후작 앞에서 이 무슨 추태인가.”
보다 못한 브랫 백작이 파칼 공작 지지자를 말렸다.
사람들이 하나둘 비난의 논조를 던지자, 파칼 공작 지지자가 얼굴을 벌겋게 불태우며 소리 질렀다.
“후작께서 이곳에 방문하셨으니 발발한 싸움 아닙니까! 다들 본인들 연줄에서 비서관이 선출되길 바라면서!”
자신들의 추악한 속내가 남의 입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 민망해진 몇몇 귀족들이 헛기침을 했다.
코부르덴 후작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다들 이익에 눈이 멀어 내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하고 있군. 아,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것인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제가 이곳에 온 것은 비서관 자리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인지요.”
베데르 백작이 공손하게 물었다.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회의장의 문을 두드렸다.
요제프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문을 지키는 시종에게 말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문이 열리고, 갈색 머리의 하녀 하나가 들어왔다.
다들 그녀가 누군지 아는 기색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요 반년 동안 룩센투크를 들썩이게 한 소문의 반할은 그녀가 주인공이었으니.
마리안 왕자비가 친자매처럼 아껴 친정에서 직접 데리고 왔다는 하녀, 왕성에서 가장 예쁜 하녀라는 별칭이 있는 여자, 대범하게 율리안과 젊고 어린 기사 사이를 오간다는 염문설의 당사자.
이 모든 것이 마리엘라 호반을 지칭하는 문장이었다.
마리엘라가 다소곳한 자세로 회의장 한가운데에 서자, 코부르덴 후작이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음흉한 의도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단단하고 따듯한 손이었다.
마리엘라는 순간, 친할아버지가 생존해있었다면 바로 이런 느낌으로 자신을 다독여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하녀를 아십니까. 리덴부르크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마리엘라라는 하녀로 마리안 왕자비를 따라 왕성에 왔더군요.”
마리엘라는 눈을 아래로 깔고 가만히 그의 말을 들었다.
오늘 그녀가 이곳에 순순히 온 것은 모두 요제프의 의도를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요제프가 코부르덴 후작의 호출을 가만히 두고 보았다는 것은 무언가 이 일을 통해 얻어낼 것이 있다는 말인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 일단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
그녀는 단상 위에 앉은 요제프를 힐끔 보았다. 늘 그렇듯 요제프는 꿍꿍이가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곧 코부르덴 후작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제겐 영토 관리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던 가신 겸 친우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친우의 이름은 다니엘 호웰로, 안타깝게도 성마전쟁 때 저와 함께 나라를 지키다가 전사하였습니다. 이 친구의 유해를 들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곳에서 매우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더군요.”
그의 목소리가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어찌나 맛깔스럽게 말을 늘여놓는지, 팔짱을 낀 채로 내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던 알폰스 후작조차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코부르덴 후작은 이야기를 하다 말고 숨을 한 번 크게 마셨다. 숨이 달려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청중을 집중시키기 위한 그만의 비법이었다.
그는 공포 소설을 구연하는 배우처럼 목소리를 낮추었다.
“호웰 경의 몇 안 되는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그의 친인척들이 그의 아내와 피붙이들을 싹 다 죽여 버린 겁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마녀’라는 오명을 붙이면 무엇이든 되던 시대 아니겠습니까.”
사람을 거짓 밀고해 이득을 취한 적 있는 귀족파의 몇몇 양심 없는 귀족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귀족들 눈에 끔찍하다는 감정이 스쳤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몸을 부르르 떠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성마전쟁을 직접적으로 겪은 세대고, 전쟁 전후의 마녀 사냥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았다.
“제 친구의 병약한 아들은 물론이고, 그 아들의 아내, 그 아내가 낳은 여자아이까지 모두 다 실종되었습니다. 아마 몇몇은 화형 되었을 것이고, 또 몇몇은 물속에서 생을 마감했겠죠. 광기의 시대였으니까요. 저도 그런 줄 알고 포기하고 있었습니다만.”
코부르덴 후작의 기세등등한 얼굴이 생의 모든 것을 포기한 늙은이의 것으로 바뀌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한 번 내 쉬었다. 그와 동시에 비극적인 과거를 음미하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는데, 감았을 때의 표정과 떴을 때의 표정이 달랐다.
눈을 감았을 때의 표정이 가진 것 하나 없는 패배자의 분위기였다면, 다시 눈을 떴을 때의 느낌은 먹잇감을 코앞에 둔 독수리 같았다.
“제 친우와 그 아내를 꼭 빼닮은 아이를 근 20년 만에 상경한 이 룩센투크에서 보았지 뭡니까.”
마리엘라가 놀라 코부르덴 후작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귀족들의 입에서도 비슷한 의미의 탄성이 새어 나왔다.
“설마…….”
누군가 마음속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고, 코부르덴 후작은 재빠르게 그것을 이야기에 이용했다.
“예, 바로 이 아이입니다.”
마리엘라의 놀란 눈동자가 율리안과 요제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율리안과 요제프 둘 다 표정 변화가 없었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거지?’
마리엘라는 머릿속이 마비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왕성의 하녀로 일하면서, 수많은 정치 공작들을 보아 오고, 가담해 온 그녀였지만 그 정치 공작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수많은 눈이 저를 지켜보고 있는 마당에, 놀란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야 할지,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하게 굴어야 할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부산하게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일단은 대신들의 기억에 남지 않게 공기처럼 가만히 서 있는 것을 선택했다.
혼란스러운 그녀의 마음과는 별개로 대신들은 저들끼리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겁니까.”
“단지 닮은 아이를 두고 우리가 이리 모여 왈가왈부할 필요가 있습니까?”
“시선을 돌리려고 빙 둘러 가는 것 아니오?”
“좀 더 들어보시지요.”
코부르덴 후작이 잠잠한 어조로 봇물 터지듯 나오는 불만들을 잠재웠다. 그는 마리엘라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제 낮, 마상 창 시합 경기장에서 이 아이를 본 순간, 저는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다니엘 호웰의 손녀딸이 멀쩡히 살아있다는 것을요.”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이의를 제기하려 했다.
코부르덴 후작은 잠시만 기다리라는 손짓을 한 다음, 제 할말을 이었다.
“그냥 닮았다는 이유로 이런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설명을 잠깐 드려야겠군요. 다니웰 호웰의 며느리는 귀족은 아니었지만, 꽤 괜찮은 집안의 셋째 딸로, 친정은 할슈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할슈웰에 도착하기 위해 들러야 하는 도시가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리덴부르크.”
브랫 백작의 입에서 익숙한 영지의 이름이 나왔다. 코부르덴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지리에 통달하시는 분이 여기 계시는군요. 맞습니다. 리덴부르크. 다들 알다시피 리덴부르크는 마리안 왕자비 전하께서 나고 자란 곳이지요. 여기 있는 이 아이 역시 같은 영지 출신이고요.”
“하나, 모든 것은 추측 아닙니까.”
“네. 그래서 저는 왕자 전하의 허락을 받아 뒷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급히 돈을 푸니 하루도 되지 않아 증거가 잡혔습니다. 살아남은 이 아이의 친척이 그러더군요. 호반 가족은 여자 아이를 낳은 적이 없다고. 배 속에 품은 적은 있었으나, 불행히도 막달 즈음에 유산되었다고요.”
‘거짓말이야.’
마리엘라는 제 옆에 있는 이 늙은이가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음을 알았다.
수확절만 되면 그녀의 집에 모였던 외갓집 어른들이 그녀만 보면 꼭 하는 소리가 있었다. 나올 때 어머니를 고생시켜 몸집이 큰 남자아인가 했더니, 완전 조그마한 여자아이였다는 말이었다.
누군가 그녀의 출생을 조작하려고 하고 있다.
코부르덴 후작을 이용해서.
그녀의 시선 끝이 요제프를 향했다.
“이것만으로는 여러분들의 이성을 만족시켜주지 못할 것을 압니다. 그래서 오늘 오전, 급하게 받은 증거품이 있습니다. 호반 가족의 친척이 호반 가족의 서랍에서 몰래 훔쳤다는 팬던트입니다. 금화 다섯 개를 준다 하니 냉큼 들고 오더군요. 이 팬던트를 열어 보면-”
후작은 이제 제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유아용 목걸이를 꺼냈다. 팬던트가 달린 낡고 오래되어 보이는 은 목걸이였다.
코부르덴 후작의 커다란 손이 그의 엄지손톱보다 작은 팬던트를 열었다.
“이렇게, 호웰 가문의 인장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엘라 호반은 사실 마리엘라 호웰이었던 것이지요. 자세한 사정은 이 아이에게 직접 묻는 것이 마땅하나…… 너무 어렸을 때 벌어진 일이라 본인은 기억하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
길고 긴 이야기가 끝났다. 서론이 끝나고 본론이 등장할 차례.
마리엘라가 찾고자 했던 것이 곧 이어지는 코부르덴 후작의 말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하나입니다. 마리엘라 호반을 제 양녀로 입양하고자 합니다.”
“!”
생각도 못했던 코부르덴 후작의 발언에 같은 장소에 있던 귀족들 모두 놀란 얼굴을 했다.
가라앉은 눈꺼풀 속에 모든 감정을 숨기고 가만히 자리를 지키던 마리엘라 역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리고, 제 후작 작위를 이 아이에게 양위하고 싶습니다. 제겐 총 세 개의 작위와 영지가 있고, 이 중 하나를 친우의 딸에게 물려준다 해도 충분히 먹고살 만한 재산이 있습니다.”
코부르덴 후작이 요제프를 향해 정중히 요청했다.
“흔한 일은 아니라 직접 왔습니다. 허락해주시지요.”
* * *
회의가 파하고, 마리엘라는 바로 요제프의 처소를 찾아갔다.
“이게 무슨 개수작이죠?”
그녀가 씩씩대며 따졌다.
“난 숲지기 호반의 딸이에요. 외가는 대대로 하녀 일을 해왔고, 친가도 기껏해야 약초사…….”
“알아. 어머니, 아버지, 어느 핏줄을 거슬러 올라가도 그대를 특별하게 만들어 줄 수가 없다는 걸.”
요제프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능청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마리엘라는 자신이 농락당한 기분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평정을 잃고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무슨……!”
그의 눈이 순간 싸늘하게 식었다.
“평민은 왕의 정부가 될 수 없다기에, 내 친히 계단을 만들어 주었지.”
마리엘라는 따져 묻는 것을 그만두고 입을 다물었다. 요제프의 표정이나 어조에서 돌아가는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스스로의 귀를 매만졌다.
“이름이 뭐였더라. 하얀 늑대 기사단의 젊은 기사 말이야. 미하엘? 뭐 그런 흔한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장난기 어린, 그러나 동시에 적의감이 섞인 흉흉한 눈동자가 마리엘라 쪽으로 돌아갔다. 그는 끝까지 입을 다문 그녀를 지켜보다가, 문밖의 기사를 호출했다.
“맥스.”
“예, 전하.”
“그놈의 손을 자르라고 해.”
“왕자 전하!”
그녀가 깜짝 놀라 요제프의 손을 붙잡았다.
그가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입맞춤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
요제프의 빤한 시선이 마리엘라의 두 눈동자를 움직일 수 없게 얽매었다.
“아니면…… 내 아내를 탐낸 두 눈부터 뽑을까?”
‘알고 있었어!’
마리엘라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요제프가 괜히 마상 창 시합에 그녀를 불러들인 것이 아니었다. 그가 말한 연극의 주인공은 코부르덴 후작과 마리엘라가 아니라, 미하엘이었던 것이다.
요제프는 자신의 손을 꽉 붙든 마리엘라의 양손을 힐끔 보았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달달 떨리고 있었다.
그가 기사에게 내렸던 명령을 시정했다.
“모든 결정을 유보한다. 미하엘을 지하 감옥에 가두고, 삼 일간 물을 포함한 아무것도 주지 마. 모두 나가보도록. 우리의…… 코부르덴 양을 제외하고는.”
요제프가 그들을 내치는 손짓을 했다. 방 안에 있던 이들이 그의 명을 따라 문밖으로 나섰다.
오롯이 둘만 남은 방.
그가 해명을 해보라는 듯 팔짱을 끼고 탁자에 기댔다.
마리엘라의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녀는 지금 많은 것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코부르덴 후작의 작위를 받는다는 것은, 평민이기에 누릴 수 있었던 자율성을 잃게 된다는 뜻이다. 나아가 마리안과 함께 왕성을 떠난다는 계획 자체가 어그러질 가능성이 크다.
요제프가 그녀의 발에 족쇄 하나를 건 셈이다.
마리안과 미하엘의 밀회를 들통 난 일은 또 어떠한가.
요제프가 마음만 먹으면 두 사람 모두의 목숨을 잃게 할 수도 있다.
졸지에 코부르덴 후작 위를 잇게 된 일도 당황스럽고, 마리안의 바람을 요제프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사실도 당혹스러웠지만, 그녀를 가장 두렵게 만드는 것은 이번 사태로 잃게 될 요제프의 신뢰였다.
“왜 그러지? 할 말이 있어 날 붙든 거 아니었나?”
‘마리안이 바람을 핀 건 사실인데, 딱히 할 말이 있을 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이라도 지어내야 하는 스스로의 상황이 갑갑했다. 그녀는 침착해지려 애쓰며 가만히 바닥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마리엘라는 제게 벌어진 모든 일을 단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시간을 들여 고심하지 않아도 즉각적으로 해답이 도출되는 경우가 있다. 방금 전, 그녀에게 바로 그 행운의 순간이 당도했다.
해법은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에서 시작된다. 이번 사태는 정보를 모으고 머리를 굴려 그때그때 생긴 문제에 대응하는 것 보다, 그 문제가 발생한 과정들을 되짚어 보는 과정이 더 중요했다.
마리엘라는 요제프가 일을 여기까지 끌고 온 이유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그가 비뚜름한 태도 뒤에 숨기고자 했던 진심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뻔히 알면서 모른 척했던 미하엘과 마리안의 사이를 이번 일에 끌어들인 것은 그녀가 후작이 되지 않겠다 성을 부려서다.
하녀로 잘 지내고 있던 그녀를 갑자기 후작으로 만들려 하는 것은 그녀가 정부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이고, 정부 제안을 했던 것은 그녀가 율리안과 요제프 사이를 대놓고 저울질했기 때문이다.
미하엘의 문제를 무마할 해결책은 바로 그 시발점에 있었다.
연인의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요제프의 마음, 그 불안함에.
이런 일은 그녀가 전문이었다.
마리엘라는 요제프에게 다가가 그의 품에 안기다시피 했다. 그리고 눈썹 끝을 축 내린 처량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간청했다.
“한 번만 더 결정을 번복해 줄 수는 없나요?”
급변한 표정 변화를 요제프가 못 알아챌 리 만무했다. 그의 표정이 흥미로움으로 바뀌었다.
그것이 바로 마리엘라가 유도하고자 한 바였다.
“없을 리가.”
그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마리엘라의 턱을 들어 올렸다.
“충성의 키스를 해주렴, 마리엘라.”
두 남녀가 서로를 향해 밀어를 속삭인다. 그와 동시에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사랑의 키스는 안 되나요?”
“내가 눈이 멀었을 때처럼?”
“당신이 사람에 고팠을 때처럼.”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 입술을 맞댔다. 그가 입을 떼지 않은 채로 푸스스 낮게 웃었다.
밤보다 짙은 낮이었다.
* * *
서늘한 공기가 공간을 가득 채우는 새벽.
요제프의 침대 위에서 잠깐 눈을 붙였던 마리엘라가 선잠에서 깼다.
그녀의 앞에는 웬 드레스 하나가 걸려있었다.
“저 옷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로 밀린 정무를 보던 중이었던 요제프가 마리엘라의 목소리를 듣고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가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둥근 어깨를 매만지며 속삭였다.
“그대를 위해 준비했지. 곧 정계를 좌지우지할 코부르덴 후작을 위하여.”
그녀는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드레스를 향해 다가갔다.
짙은 녹색의 벨벳 천으로 만든 드레스였다. 가슴과 소매 부분의 레이스 몇 개를 제외하면 죄다 검정색으로 장식되어있었다.
장례식 복장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드레스.
마리엘라가 무감한 얼굴로 드레스 치맛자락을 살짝 들췄다.
“우중충한 색감이군요.”
“한 가문에서 자주 쓰던 방식이야. 무겁고 무서운 느낌을 주기 위하여 어두운 색만 이용해서 옷을 지었지. 정치는 남자의 영역이라고 뻐기는 녀석들을 상대해야 했으니까.”
드레스는 여자의 갑옷이다.
사교계에서 흔히 통용되는 말이었다. 여성에겐 외적인 매력이 곧 권력이라는 뜻이었으나, 한 가문은 진짜로 드레스를 갑옷처럼 사용했던 모양이었다.
정쟁에서 상대방의 기를 콱 누르는 용도로.
“제가 마녀라도 되길 바라세요?”
발칙한 발언에 요제프가 픽 웃었다.
“그만큼 영향력 있길 바라. 앞으로의 데르샤바크는 왕자비의 치마폭이 아니라 코부르덴 후작의 손아귀 밑에서 놀아날 생각이거든.”
* * *
인적이 드문 이른 아침, 요제프가 준비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마리엘라가 요제프의 처소를 빠져나왔다.
방으로 돌아가려던 그녀의 앞을 율리안이 막아섰다.
그의 몸 위에 걸친 망토 자락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아마 밤새 밖을 서성인 것 같았다.
“밤새 그 방에 있었나? 그대의 본분도 잊고?”
그의 마음속에 있는 초조함과 질투, 불안 등이 섞여 분노로 표출되었다.
평소라면 모르는 척 넘겨 버렸을 마리엘라였지만 오늘은 타이밍이 안 좋았다. 타의에 의해 인생의 궤도를 바꿔야 된다는 현실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짜증이 차오르던 참이었다.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율리안의 앞에서 의도치 않게 터져 나왔다.
마리엘라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율리안을 응시했다. 그녀의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 그가 주춤거리는 낌새를 보이자, 그녀가 입을 열어 비아냥댔다.
“각하가 생각하는 제 본분이 뭐죠? 당신의 첩자가 되는 것? 아니면, 더 은밀한…… 감정적 교류를 나눈 남녀 사이에서 무언의 규칙이 된 정절 같은 거?”
정곡을 찌른 말에 율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었을 거라 예상치 못했는지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피식.
그녀가 대놓고 그를 비웃었다.
“비겁하시네요, 바이르 공작.”
마리엘라의 부채 끝이 그의 심장 부근을 쿡 찔렀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못하면서.”
율리안은 끝까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상관없었다. 대답을 들으려고 꺼낸 말은 아니었으니까.
마리엘라 호반, 아니 마리엘라 코부르덴은 자리를 떠났다.침묵하는 율리안을 지나쳐서 자신의 길을 향하여.
또각, 또각, 또각.
힘 있는 구두 소리가 복도에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