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아가씨와 기사 (2) (13/21)

11. 아가씨와 기사 (2)

날이 밝았다.

대망의 사냥대회 날.

지난밤과 다르게 하녀복을 제대로 차려입은 마리엘라는 율리안의 옷 시중을 들고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군.”

그녀가 건넨 옷에 한쪽 팔을 꿴 율리안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다소 툴툴대는 어조였다.

마리엘라는 별 신경 쓰지 않고 대충 대꾸해주었다.

“예, 뭐, 그렇게 되었죠.”

“얼굴빛이 좋아 보여.”

“네?”

뜻 모를 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을 삐죽대다가 말을 말았다.

“기분이…… 아니다.”

마리엘라는 더 묻지 않고 제 할 일에 열중했다.

“끝났습니다. 다른 건 견습 기사에게 맡기세요. 제가 각하의 생명까지 책임질 수는 없으니까요.”

‘오늘이 공작의 책상을 털 적기야. 어차피 하녀는 사냥대회를 구경할 수 없으니까.’

이 기회에 율리안이 교단과 주고받는 편지들을 훔쳐볼 계획이었다.

아무리 율리안이 교황의 양아들이며 신성 기사단장을 맡고 있다 해도, 교단이 순순히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주는 것이 수상했다. 분명 거짓과 이간질로 바레뎃샤의 신관들을 구워삶았을 터였다. 그녀는 그 간사한 거짓을 포착해내고자 했다.

‘편지를 통해 바레뎃샤와 데르샤바크 왕가 사이를 이간질했다는 명확한 증거만 찾는다면 단숨에 판을 뒤집을 수 있어.’

율리안의 처소를 힐끔 보며 속으로 방략이나 세우고 있는데, 갑자기 닫혔던 문이 벌컥 열리더니 그의 얼굴이 보였다.

“가만히 서 있지 말고 사냥대회에 갈 채비를 해. 너도 같이 갈 거니까.”

“네?”

그녀가 당황해 되물었다.

‘속마음을 읽는 흑마법도 있나?’

살짝 겁을 집어먹을 찰나 그가 시선을 피하며 덧붙였다.

“네 위치를 잊지 말라는 뜻이야. 적어도 오늘까지는 네가 내 담당 하녀니까.”

그녀는 그를 빤히 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 * *

사냥대회는 왕가 소유의 사냥터에서 이루어진다. 마차를 타고 북서쪽으로 1시간가량 달리면 나오는 새하얀 숲, 라인발츠. 바닥에 소복이 쌓인 눈들과 그보다 창백한 나무들이 자아내는 풍경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걸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사냥터를 쓱 훑어본 마리엘라가 헛웃음을 지었다.

모시는 아가씨도 없이 이곳에 몇 시간을 앉아 있어야 한다니, 자신에게 향할 눈초리가 벌써 훤했다.

그녀는 최대한 곤란한 상황을 피해 보고자 머리를 굴렸다.

“저, 공작 각하. 각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마차에서 쉬고 있어도 될까요?”

“왜?”

“감히 저 자리에 끼어들 수 없어서요.”

그 말을 들은 율리안의 고개가 돌아갔다. 의자가 마련된 자리엔, 이름 있는 가문의 아가씨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확실히 하녀의 존재가 이질적이긴 했다.

“왕자비의 곁에 있어.”

“각하의 은혜에 정말 깊이 감명받았습니다.”

마리엘라가 싱긋 웃으며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물론 비꼬는 의미였다. 그녀는 그가 무슨 반응을 보이기 전에 얼른 마리안에게 달려가 그녀의 옆을 꿰찼다.

예정된 시간이 다가왔다.

사냥대회 참가자들은 모두 자신의 연인을 찾아가, 결의가 담긴 인사를 건넸다.

마리엘라는 관심 없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하여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작게 하품을 했다. 남자들이야 직접 뛰어 사냥이라도 나간다지만, 여자들은 여기 앉아 하염없이 우승자를 기다려야 했다. 벌써부터 지루하고 따분했다.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지, 원.’

그녀가 속으로 불평불만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요제프였다.

“나의 위대한 봄. 그대에게 영광을 선사하기 위해 모든 열정을 다 바치겠습니다.”

요제프는 마리안에게 다가와 주변의 남자들과 별다를 것 없는 말을 했다. 조금 더 휘황찬란하고, 격식 있는 말이었으나 속에 담긴 내용물은 똑같았다. 귓바퀴에도 들어오지 않는 그저 그런 인사말이었다.

“건강히…… 다녀오세요.”

마리안이 시선을 그의 어깨너머로 두며 말했다. 평소, 남들을 속여먹는 것에는 죄책감이 없어 보였던 그녀였지만, 스스로의 마음을 기만하는 것과는 다른가 보았다.

“최선을 다하고 오겠어요, 나의 눈송이.”

그는 평소처럼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춘 뒤 제자리로 돌아갔다.

새하얀 말을 탄 금발의 왕자님 그리고 바로 옆에서 차가운 얼굴로 흑마를 모는 그의 절친한 친우, 율리안.

한편의 동화가 떠오르는 광경이었지만, 두 사람의 속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감정을 안다면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휘이이이-!

사냥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뿔 나팔 소리가 경기장을 가득 울렸다.

두 남자는 서로를 향해 덕담을 하나씩 던졌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

“너야말로.”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와 함께 새하얀 평지 위로 말 발자국이 하나둘 찍힌다. 대회에 참가한 귀족들이 각자의 무리를 형성하며 숲으로 들어갔다.

유독 눈에 띄는, 백마와 흑마를 모는 두 사람.

요제프와 율리안이 두 갈래로 나누어져 멀어져갔다.

* * *

라인발츠는 베르단에서 가장 손꼽히는 사냥터 중 하나였다. 100종의 네발짐승과 101종의 날짐승이 있다고 알려진 라산 사냥터도 라인발츠의 명성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베르단 내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여러 종류의 겨울 철새들과 소만 한 덩치를 가진 엘크, 은빛 갈기를 가진 늑대 등이 라인발츠에 서식하는 대표 희귀종이었다.

보통 사냥대회는 사냥한 동물의 가치에 따라 점수를 매긴다. 그러나 그것은 이곳에선 통용되지 않는다. 라인발츠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동물들이 사는 데다가, 희귀한 동물이 넘쳐났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점수를 매겼다가는, 언쟁이 벌어질 것이 자명했다.

겨울의 기사를 선정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금색 뿔을 가진 흰 사슴을 잡은 자를 우승자로 뽑는 것이다.

사냥대회가 시작되기 전, 왕가는 미리 발 빠른 흰 사슴을 점찍어 놓았다가, 그 사슴의 뿔에 금을 칠한 뒤 흰 사슴 무리 전체를 숲에 풀어놓는다.

금색 뿔을 한 사슴은 단 한 마리. 자연스레 겨울의 기사가 될 수 있는 자도 단 한 명이 된다.

이러한 규칙 때문에 간혹 우승자가 나오지 않는 해도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불평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그 희귀성이 겨울의 기사가 가지는 명예를 더 드높였으니까.

피- 융!

소복소복 눈이 내린 라인발츠 숲속.

화살이 찬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짐승의 단말마가 울렸다.

소리가 난 곳은 근처 덩굴 속. 화살을 쏜 자는 요제프였다.

그의 눈은 평소와 다르게 메마르고 날이 서 있었다.

기사 하나가 후다닥 달려가 활에 꽂혀 죽어가는 동물을 집어왔다.

“붉은 털 여우입니다.”

요제프는 죽은 여우를 힐끔 보고는 주변을 살폈다. 그의 무덤덤한 얼굴 위엔 실망도, 만족도 없었다.

그의 뒤에 있던 기사들이 눈치를 살살 보다가 사기를 북돋는 말을 했다.

“시작이 나쁘지 않습니다.”

“붉은색은 승리의 색이라 하지 않습니까.”

이들은 모두 요제프의 수행기사로, 사냥대회의 참가자가 아닌, 사냥대회에 참가한 왕자를 보필하는 임무를 맡은 자들이었다.

사냥대회 참가들은 피리꾼, 몰이꾼 외에 사냥된 동물을 수거하는 자, 호위기사 등을 동행해 숲에 들어간다. 이들의 복장을 맞추는 것도 다 돈이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수행원을 동행하느냐가 사내들 사이에서 서열을 나누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요제프와 율리안의 경우, 각각 열한 명, 여덟 명의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명성에 비해 다소 조촐한 숫자의 인원이었지만, 둘 다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누가 금색 뿔의 사슴을 잡느냐지, 누가 더 잘나 보이느냐가 아니니까. 언뜻 보기에 전혀 통하는 것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은 지독한 실리주의자들이었다.

요제프가 무감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마른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단순히 바람에 흔들린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그는 활을 꺼냈다.

핑.

요제프가 두 번째로 활시위를 당기자, 화살이 억센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탁.

화살은 사냥감을 지나쳐 나무에 박혔다. 동시에 놀란 사슴이 풀숲에서 튀어나왔다. 너무 빨라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흰 사슴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화살 하나를 더 꺼냈다. 호흡을 멈추고, 시선을 한 점으로 집중한 뒤, 활시위를 당겼다.

피-융

활을 맞은 사슴이 두세 번 더 껑충껑충 뛰어가다가 이내 픽 쓰러졌다. 바닥에 누워 허공을 향해 헛발질하는 그 모습이 처량하다 못해 허망해 보이기까지 하다.

기사 둘이 서둘러 사슴을 향해 달려나갔다.

눈앞에서 본 사냥감은 생각보다 덩치가 좀 있었다.

“검은 꼬리 사슴입니다.”

기사의 말대로 흰 사슴의 꼬리 끝부분이 살짝 검었다. 마치 잉크에 살짝 물든 종이처럼.

쯧. 요제프가 작게 혀를 찼다.

“흰 사슴인 줄 알았건만…….”

금색 뿔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적어도 숲에 풀어 놓은 흰 사슴 무리 중 하나일 것이라 여겼던 요제프가 아쉬운 소리를 뱉었다.

혼잣말에 가까운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모두가 그것을 들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지만, 요제프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 그의 신경을 긁고 있는 것은 이런 자잘한 일이 아니었다.

알폰스 후작이 재상이 된 이후부터, 아니, 지그리트 후작이 사고사를 가장한 암살을 당한 이후부터 그의 복잡했던 머릿속은 더 복잡하게 엉켜 들어갔다.

마리엘라를 비롯한 제 측근들에게는 대책이 넘쳐나는 사람 마냥 태연하게 굴었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매일 매일 악몽 속에서 사는 것만 같았다. 이른 아침 눈을 뜬 순간부터 늦은 밤잠이 들 때까지.

그는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귀족파 뒤에 숨어 있는 진짜 적은 누구인가.

적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내부에 배신자가 있나?

배신자가 있다면 누구지?

그전에, 그렇게 잘난 적은 왜 자신을 없애려 하지 않나.

다른 가문이 왕위를 이으면 곤란한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인가?

수없이 많은 의문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중 가장 강하게 치고 올라오는 의문 하나.

‘……율리안과 마리엘라는 무슨 사이지?’

파스슥.

어딘가에서 마른 나뭇잎 밟는 소리가 났다.

요제프는 끝없이 드는 생각을 멈추었다. 그리고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망설임 없이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핑!

화살이 짧은 거리를 날아가 수풀 사이로 박혔다. 기사 하나가 말에서 내려 바쁜 걸음으로 사냥감을 수거해왔다.

“토끼입니다.”

성인 남자의 팔뚝보다 조금 작은, 갈색 토끼였다. 살짝 메마른 것이 겨우내 굶은 듯 보였다.

요제프는 이번에도 관심 없다는 듯 대충 시선을 건넸다 거두었다.

이미 사냥한 것에는 흥미가 없다. 그의 눈은 다른 사냥감을 빠르게 찾는 중이었다.

이곳에서 다른 동물을 사냥하는 것은 그저 자신의 사냥 실력이 형편없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용도일 뿐이었다. 겨울의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황금 뿔을 가진 흰 사슴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요제프는 시위를 당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 사냥은 잡념을 없애는 방법이었다.

* * *

삐이이이-!

율리안의 피리꾼이 피리를 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다른 무리의 피리 소리도 들렸다. 피리꾼은 15분마다 소리를 낸다. 그것으로 시간을 대충 파악한 율리안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벌써 한 시간이 지났나.”

“예.”

그가 잘게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우승자가 나오려면, 아직 한참 남았군.”

겨울의 기사가 선출되기까지의 시간은 평균 여섯 시간. 저번 사냥대회 같은 경우는 하루를 꼬박 새웠다고 들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걸릴지.’

율리안의 얼굴에 벌써 피곤한 기색이 내비쳤다.

숲속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겨울의 기사가 되겠다는 열의가 줄어들었다. 왕성에 있을 때는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감정들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적막뿐인 라인발츠 숲을 거닐면서 명확해졌다.

어딘가에서 가볍게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들짐승이 살얼음이 진 눈을 가볍게 밟는 소리였다.

그의 수행원 중 하나가 소리가 나는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공작님, 저쪽에 흰 사슴이……!”

“황금 뿔은 아니지 않나.”

모두가 다급해진 마당에 오직 율리안만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입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었다.

“쓸데없는 살생은 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그는 검을 다루는 무인이었지만, 동시에 피 냄새에 역함을 느끼는 열 살의 소년이기도 했다.

삐이이이-!

15분이 지났는지 피리꾼이 또 피리를 불었다. 동시에 가까운 곳에서 다른 피리 소리가 들렸다. 근처에 다른 참가자 일행이 있는 것이다.

“흰 사슴 무리일까요.”

그의 부하 중 한 명이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사슴은 보통 무리를 지어 다닌다. 왕가에서 풀어놓은 흰 사슴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근처에 다른 피리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다른 참가자들이 이곳으로 몰린 이유가 있다는 뜻.

“글쎄.”

율리안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의 머릿속은 한숨으로 가득했다.

‘지금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

깊은 회의감이 들었다.

평소였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대회였다. 겨울 사냥대회는 왕가의 행사지 교황청의 행사는 아니었으니까.

‘내가 잠시 미쳤군. 지금은 다른 일에 한눈팔 때가 아닌데.’

그가 깊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수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돌아가신 어머니, 성마전쟁, 교황청, 데르샤바크 왕가, 요제프…….

지키지 못했던 것과 지켜야 할 것들이 나란히 그의 어깨를 짓누른다.

양아버지 로베르트 가르뎅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는 조용히 눈을 떴다.

‘나는 균형을 이루는 자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훈계이자 경고였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정해 놓았던 길을 걷기로 한 결심의 언어이기도 했다.

그에 대한 반작용이었을까?

갑자기 마리엘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야.’

그는 눈을 부릅뜨며 스스로의 마음을 부정했다.

‘지금은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야.’

그가 스스로를 단속하려 할수록 그녀의 얼굴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해맑은 미소부터 겁 없이 윽박지르는 모습, 능청스럽게 익살을 부리는 표정까지.

그의 머릿속에서 그녀가 생동감을 찾아가는 만큼, 율리안 내면의 혼란이 가중되었다.

‘그녀는 방해물일 뿐이다. 더 이상 흔들리면 안 돼. 그녀는 …….’

율리안은 강박증에 걸린 사람처럼 같은 말을 계속 외었다. 마귀의 유혹을 코앞에 둔 성직자가 기도문을 외듯 간절하게.

그가 마리엘라의 생각을 저버리려 한참 애를 쓰던 바로 그때였다.

부시럭.

가까운 풀숲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나더니-

“…….”

눈앞에 흰 사슴이 등장했다.

휘황찬란한 황금색 뿔을 자랑하는 사슴이었다.

그곳에 있던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짧은 순간, 율리안은 화살통 속 화살을 꺼내야 할지 말지를 고민했다. 우승을 하려고 사냥대회에 참가했지만, 막상 대회가 시작되니 우승을 할 생각이 사라졌다.

그는 이것이 자신의 본심이라고 생각했다. 마리엘라라는 유혹에 흔들려 잠시 보지 못했던 것이라고. 그러나…….

“…….”

율리안은 끝없이 갈등했다.

사슴이 등을 보이고 있다.

지금 활을 뽑아 든다면, 활시위를 당긴다면, 그는 어렵지 않게 겨울의 기사가 될 것이다.

삐이이이-!

어디선가 피리 소리가 들린다.

불청객의 존재를 알아차린 사슴들이 무리 지어 달아난다. 율리안의 기사들은 눈치 없는 피리꾼을 흘겨보았으나, 피리를 분 것은 그가 아니었다. 뒤늦게 그것을 알아차린 기사들이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요제프.

율리안은 하나뿐인 제 친우를 사냥터에서 마주했다.

* * *

두두두두 두두두두-!

죽음처럼 창백한 나무와 새하얀 눈밭이 장경을 이루는 겨울의 라인발츠.

그곳에서 땅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수십 마리의 흰 사슴들이 군집을 이루며 내달리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포식자를 피해 다급하게 달아나는 사슴 무리의 뒤를 흰 말과 검은 말을 모는 남자 둘이 바짝 따라잡았다.

삐이이이-!

요제프와 율리안, 각 진영의 피리꾼들이 피리를 불었다. 그 소리에 사슴 무리의 발걸음이 더더욱 빨라졌다.

“저쪽으로 몰아!”

“예!”

말발굽 소리, 사냥개 짖는 소리, 기사들의 고함이 한데 뭉쳐 소란을 일으킨다.

요란스러운 분위기 속, 요제프와 율리안은 황금 뿔을 가진 사슴을 사냥하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흰 사슴 중에서 황금 뿔을 가진 사슴을, 그것도 달려 나가는 사슴 무리 안에서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갑자기 맞닥뜨린 고난.

두 사람의 대처 방식은 상이했다.

피-융-

요제프는 쉴 새 없이 활을 쏘아댔다.

화살을 맞은 사슴들이 픽픽 쓰러졌지만, 그는 사냥감의 뿔이 황금인지 아닌지만 확인하고 재빠르게 달려나갔다.

반면 율리안은 신중하게 행동했다.

요제프와 비슷한 속도로 내달리면서, 화살을 집어 드는 대신 주변을 살폈다.

‘무리 내에서 가장 발 빠른 사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 우두머리가 아니란 뜻이야.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흰 사슴에 대한 정보들을 나열했다.

흰 사슴은 우두머리 외에도 중간 관리자급의 사슴들을 정해 놓는다. 그들의 역할은 낙오될 가능성이 큰 어린 개체들을 이끄는 것.

율리안은 달리던 말의 속력을 낮췄다.

군집의 선두만 노리고 달렸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무리의 오른쪽 끝.

어린 사슴들 사이로 보이는 번쩍이는 황금 뿔.

‘저기다.’

율리안은 등 뒤의 화살을 집어 들었다.

피-융.

그가 쏜 화살이 사슴의 어깻죽지를 관통했다. 황금 뿔을 가진 사슴이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나뒹군다.

그에 황금 뿔의 사슴을 따르던 어린 사슴들이 주춤거렸다.

생존 본능은 어느 무엇보다 무섭다. 어깻죽지에 화살을 맞았던 사슴이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달렸다. 아까 전보다 더 빠른 속도였다. 아마도 너무 놀란 나머지, 머릿속에 생존 본능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저기군.’

안타깝게도 사슴은 요제프에게까지 위치를 노출 당했다.

요제프가 율리안보다 황금 뿔 사슴에게 더 가까웠다. 요제프는 익숙하게 화살을 뽑아 사슴을 겨누었다.

핑-!

요제프의 화살이 황금 뿔을 지닌 사슴의 등을 관통했다.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활을 쏘아댔다.

피- 융!

어떤 것은 황금 뿔 사슴을 관통했고, 어떤 것은 애꿎은 다른 사슴의 숨을 앗아갔으며, 또 어떤 것은 나무나 땅에 박혔다.

요제프는 빗나간 화살에 아쉬워하는 대신 사냥감의 숨통을 끊는 것에 온 정신을 기울였다.

황금 뿔을 지닌 사슴은 요제프의 집중을 흩어놓겠다는 듯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어다녔으나, 그는 집요하게 같은 짐승만 쫓았다. 그가 화살통에서 마지막 화살을 꺼내 들었을 때였다.

푸드덕-!

갑작스러운 소동에 당황한 산새들이 급하게 날아오르며 요제프와 율리안의 시야를 가렸다. 그것은 아주 잠깐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들의 사냥감을 다시 무리에 숨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바로 앞에는 광활한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흰 사슴 무리는 호수를 중심으로 양 갈래로 흩어졌다.

‘오른쪽!’

요제프는 본능적으로 오른쪽으로 내달렸다. 그에 따라 요제프의 수행기사들이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사슴의 뒤를 쫓아 말 달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율리안은 잠시 말을 멈추고, 요제프와 요제프가 쫓는 사슴 무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율리안의 수행기사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는 주변을 한 번 크게 살핀 뒤 결정했다.

“왼쪽으로 간다.”

* * *

요제프의 결정은 옳았다.

황금 뿔을 지닌 사슴은 그가 쫓은 오른쪽 무리에 있었다.

호수의 뒤편.

눈을 맞아 하얗게 센 땅 위에 사슴의 검붉은 피가 지저분하게 떨어져 있었다.

요제프는 검지로 입술 위를 살짝 누르며 수행기사들이 다가오는 것을 저지했다. 조용히 타고 있던 말에서 내린 그는 천천히 핏방울을 따라 걸었다.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그가 걸어 나갈수록 핏자국이 점점 짙어졌다. 그쯤에서 사냥감의 걸음걸이가 느려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 이긴 싸움이군.’

요제프는 슬그머니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짐승은 이성보다 본능이 강한 존재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에서도 생존 본능을 앞세워 달아날 때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순간적인 일일 뿐이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어딘가에 픽 쓰러져 있곤 했다.

요제프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말에서 내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나무와 덤불 사이에 툭 튀어나와 있는 황금 뿔을 발견한 것이다.

아마 무리는 도망을 치고, 혼자 낙오된 듯했다.

‘상관없지. 난 저것을 잡아가기만 하면 되니까.’

요제프는 마지막 남은 화살을 다시 집었다.

그의 목표물은 많이 지쳐 있었고, 또한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덤불 사이에 숨어 거친 숨을 내쉬는 짐승.

이토록 거저먹는 게임이 있던가.

그는 숨을 죽였다.

그리고 사슴을 겨냥했다.

시위를 한계치까지 잡아당겼을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고, 곧 율리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

요제프의 오랜 친우이자 유일한 연적인 존재가 대각선 방향에 있었다.

율리안 역시 황금 뿔의 사슴을 발견한 것 같았지만 이미 늦었다. 어차피 우승자는 요제프가 될 것이었다. 그가 잡고 있던 시위를 놓기만 한다면.

요제프는 본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될 수 있으면 많은 것을 갖고자 했으며, 그것을 위해서 다른 이를 해하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짐승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은 정원의 꽃을 따는 것만큼의 가벼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시위를 잡은 손이 쉽게 놓을 수 없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그가 뒤늦게 현실을 자각했다.

‘아무리 애를 써 봤자 사랑하는 아가씨의 머리 위에는 들꽃 하나 얹어 줄 수 없는 신세인 것을.’

피- 융,

팍!

그가 쏜 화살이 나무에 박혔다. 사슴의 머리 바로 위쪽이었다. 부러 엇나가게 쏜 것이다.

머리 위로 떨어진 화살에 사슴이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도망쳤다. 큰 부상을 당한 상태라 성인 남성이 뛰어가도 쉽게 잡을 수 있을 만큼 더딘 속도였다.

요제프는 도망친 사슴을 쫓지 않았다.

“…….”

그저 율리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제 네 진심을 내보이라는 듯이.

* * *

“하암.”

마리안이 따분함을 숨기지 않고 하품을 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애써 못 본 척하는 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보다 못한 마리엘라가 그녀에게 작게 속닥였다.

“아가씨, 하품은 부채 뒤에 숨어서 하세요.”

잔소리를 들은 마리안이 별안간 푸념을 늘어놓았다.

“지루해. 아주 그냥 지루해 죽겠어. 도대체 눈의 화관 따위가 뭐라고 이곳에서 몇 시간이고 죽치고 기다려야 하는 거지? 남자들이야 사냥하느라 재밌겠지. 우린 여기서 뭐냔 말이야. 소설에서 이런 장면을 짧게 그리는 이유를 알겠어. 이건 여자들에게 아무 의미 없는 행사야. 그저 저들의 들러리일 뿐이라고.”

“원래 사냥대회가 다 그렇죠. 구경하는 사람에게는 별 특별한 게 없는 게임이란 건 이미 다 알고 있던 사실이잖아요?”

마리안이 입술을 삐죽였다.

“사랑하는 내 님이 참가했다면 모를까, 이런 건-”

마리엘라가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그 모습에 마리안이 하던 말을 멈추었으나, 이미 중요한 말은 다 나온 뒤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워낙 작은 목소리로 한 투정이라 데이지와 마리엘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못 들었다는 것이었다.

“말조심하세요. 이제 교수대에 걸릴 목이 넷이나 있다고요.”

경고는 마리안에게 했는데, 겁은 데이지가 집어먹었다. 옆에서 데이지가 ‘힉’ 하고 짧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마리안은 적반하장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일곱 살 어린아이처럼 툴툴댈 뿐이다.

“누가 그런 말에 겁먹을 줄 알아? 나도 이제 이곳 정세를 다 안다고.”

‘퍽이나.’

마리안의 허세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내보일 수는 없었다.

“아, 네…….”

그녀는 전혀 납득이 안 간다는 얼굴로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사람들이 하늘을 보며 웅성거렸다.

“저것 봐! 노란색 연막탄이야.”

“우승자야.”

“겨울의 기사가 나왔다!”

세 사람 역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하나 없이 맑은 하늘에 황금을 닮은 노란빛의 연막탄이 쏘아 올려졌다. 누군가 황금 뿔을 가진 사슴을 잡았다는 의미였다.

“이렇게 빨리?”

“누구지?”

이제 사람들은 우승자가 누구일지 추측하기 시작했다.

“요제프 왕자님 아닐까요? 궁술 하나만은 발군이셨잖아요.”

“바이르 공작님일 수도 있죠.”

“왜 그렇게 뻔한 생각만 하시죠? 전 바론 남작님일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백작님일 겁니다.”

어린 아가씨들끼리 설레발을 치는 동안 저 멀리서 우승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숙녀들은 모두 수다를 멈추고 숨을 들이켰다.

새까만 말을 타고 다가오는 긴 흑발의 남자.

율리안이었다.

그의 수행원이 축 늘어져 덜렁거리는 짐승 하나를 들고 온다.

황금 뿔의 사슴이었다.

연인이 없는 사교계 여인들의 등이 뻣뻣해졌다. 율리안은 평생 여자에게 눈길 돌려본 적이 없기로 유명했다.

‘만약 내가 그의 선택을 받게 된다면…….’

그래서 그럴까?

율리안의 우승은 아무런 접점이 없는 여인네들의 마음까지 동하게 했다.

물론 그들도 율리안이 최근 어떤 하녀와 염문설을 뿌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하녀가 지금 왕자비의 옆을 보필하고 있는 마리엘라라는 것도.

그래도 그녀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설마하니 이 자리에서 하녀에게 눈의 왕관을 씌워줄 리는 없다고 여긴 것이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율리안의 등 뒤로, 사냥대회 참가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의 시선은 단 한 곳으로 몰려 있었다.

위풍당당하게 전진하는 겨울의 기사, 율리안 폰 바이르.

사교계의 여성, 남성 할 것 없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율리안을 주목하고 있었지만, 정작 주인공인 율리안은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겨울의 기사가 되었다는 것에 강한 의문을 품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괴롭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다가, 눈을 감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몇 초의 시간이 지나고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얼굴 위에는 굳은 결심이 가득했다.

마리엘라는 그의 표정 변화를 세세히 관찰했다.

이건 또 처음 보는 면모였다. 그녀는 어쩌면 이것이 율리안의 가장 여린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서 불길함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가 그녀의 세 번째 딜레마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어머.”

누군가 짧은 감탄사를 뱉었다. 동시에 그녀 뒤쪽의 아가씨들이 다시 술렁였다.

마리엘라는 왜 그런 반응이 나왔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눈앞에 매우 명확한 답이 있었으니까.

겨울의 기사가 된 율리안이 마리엘라가 있는 곳을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다소 맹목적인 성향을 띈 움직임이었다.

망설임 없이 마리엘라를 향해 말을 몰던 율리안은 곧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알폰스 후작 부인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백금으로 만든 창을 받았다가 다시 부인에게 바쳤다.

부인은 되돌려 받은 창으로 그의 양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대와 그대의 여인에게 무한한 영광이 있기를.”

간단한 의례였다.

부인은 창을 뒤에 있던 기사에게 넘기고, 뒤에 있는 또 다른 기사에게 눈의 화관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율리안에게 건네주었다.

겨울 사냥대회에 처음 참관해 본 아가씨들의 눈에 부러움이 뚝뚝 흘렀다.

창과 화관을 교환하는 것은 권위와 사랑을 맞바꾸겠다는 의미가 있었다.

화관을 받은 율리안이 망설임 없이 마리엘라가 있는 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절도와 단호함을 모두 갖춘 움직임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하나였다. 과연 여자에게 관심 없기로 소문난 율리안이 누구에게 ‘눈의 화관’을 바칠 것인가.

요제프 역시 조용히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율리안은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마침내 목표지점에 도달한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화관의 주인이 될 자의 손등 위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겨울의 영광을 우리의 영원한 여주인에게.”

그가 선택한 화관의 주인은 마리안 왕자비였다.

마리안은 찌뿌둥한 표정으로 눈의 화관을 받았다. 금방이라도 쟤가 왜? 라고 뱉어버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

사냥터에 침묵이 맴돌았다.

분위기를 추슬러야 할 마리안은 멀뚱멀뚱한 태도로 화관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크흠.”

옆에서 데이지가 헛기침을 하며 마리안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마리안이 인사치레의 말을 했다.

“……제 체면을 생각해 주시는 것은 바이르 공작밖에 없군요.”

“그렇게 여겨 주신다면, 언제나 영광입니다.”

통속 소설 좀 읽어봤다 하는 여자들은 금단의 사랑이라며 꺅꺅 소리 지를 만한 대화였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손톱만큼의 호감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저 통상적인 대화와 통상적인 예절만이 존재할 뿐.

‘나 참.’

율리안의 영리한 선택에 요제프가 피식 웃었다.

‘융통성 없기로 유명했던 바이르 공작이 이런 잔머리를 쓰다니. 이걸 축하해 줘야 할지, 원.’

요제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곰곰이 되짚을수록 기분이 더러워졌다.

요제프는 고개를 돌려 마리엘라를 바라보았다. 그의 본성을 모르는 사람들은 왕자가 자신의 아내를 지켜보고 있다고만 여겼다.

그의 눈은 한 사람만을 집요하게 쫓고 있었다.

차가운 갈색 눈동자, 함부로 말을 뱉지 않겠다는 듯 꾹 다문 입술이 매력적인 이곳의 유일한 하녀.

요제프는 저 무덤덤한 얼굴 뒤의 진심이 궁금했다.

‘그래서, 마리엘라는?’

관계는 두 사람이 맺는 것이다.

한쪽이 일방적인 마음을 품었다고, 다른 쪽이 그것을 받아주어야 할 의무는 없다.

‘사랑하는 마리 아가씨의 마음은?’

요제프는 깨달았다.

겨울의 기사에 도전하겠다며 활을 든 순간부터, 저를 지독하게 괴롭혔던 불안의 본질이 실은 저것 하나였음을.

“왕가의 여인 중, 눈의 화관을 받은 자는 단 두 명뿐이었답니다.”

“이제 왕자비 전하께서 받으셨으니 세 명이 되었군요.”

“공작님께서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이지요.”

“이곳에서 가장 귀한 분이니까요.”

마리안이 눈의 화관을 받자마자, 온 여인들이 다가와 그녀에게 찬사를 쏟아 부었다.

그들이 건넨 말 속에는 아부와 악의가 적절히 섞여 있었다.

평소였다면 재치 있게 받아칠 말을 마리안의 귓가에 속닥였을 마리엘라지만, 그 역할을 데이지에게 양보했다.

“…….”

마리엘라는 무리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중이었다.

똑.

그녀의 귓가에 물방울 떨어지는 환청이 들렸다.

환청에 대한 연관 작용으로 율리안의 턱 끝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이 떠올랐다.

율리안은 몇 달 전, 그녀를 구하기 위해 렝 백작의 영지가 있는 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적이 있었다.

‘죽고 싶은가 보지?’

연모하는 이에게 건네는 말이라기에는 다소 폭력적이고 거친 말.

애정이라고는 조금도 엿볼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언어였으나, 그녀의 상태를 살피던 그 눈빛은 다정하고 세세했다.

똑.

물 떨어지는 소리가 다시 한번 그녀의 귓가를 울렸다.

‘……한 방울.’

똑.

‘또 한 방울.’

이번엔 리덴부르크 백작가에서의 기억이 떠오른다.

물이 가득 찬 양동이.

그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양동이의 옆면을 타고 흘러가는 가는 물줄기들…….

며칠 전 연무장에서 했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 보았다.

“……단 하나의 빗방울.”

과거, 율리안이 그녀에게 했던 말들이 두서없이 쏟아져 나왔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있으면 무조건 나를 불러.’

‘너의 모든 것은 내 소관이야. 요제프가 내게 널 맡겼으니 나는 널 성심성의껏 돌봐줄 의무가 있어.’

‘아…….’

우직하고 외곬적인 모습과 겁먹은 아이 같았던 눈망울까지.

그녀는 율리안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는 그녀가 있는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직접 눈을 마주하는 것보다 더 적나라하게 그의 속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여태까지 모인 정보들로 지금의 그의 마음을 정의 내렸다.

율리안 폰 바이르는 마리엘라 호반을 사랑한다.

가면 속에 숨겨뒀던 스스로를 더 이상 어쩌지 못할 정도로 열렬히.

<4권에 계속>  <공금/갠소> 우리끼리만 보기!!! by S.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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