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아가씨와 기사 (1) (12/21)

10. 아가씨와 기사 (1)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다.

왕성 룩센투크 지붕에 눈이 소복이 쌓인 어느 날, 고향으로 돌아가 요양 중이었던 마리안 왕자비에게서 편지 한 통이 왔다. 몸이 많이 좋아졌으니 돌아오겠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마리엘라는 곧바로 율리안에게 다가가 소식을 전했다. 율리안이 또 어떤 수로 마리안을 해코지할까 껄끄럽긴 했으나, 지금으로서는 충실히 첩자 노릇을 하는 것 외에는 별 방도가 없었다.

보고를 들은 율리안은 말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쫓았다.

창밖에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을린 피부와 우락부락한 덩치를 가진 남자들.

마리엘라는 그들을 보며 아버지가 돌보던 라산 사냥터를 떠올렸다. 그곳을 들락날락하던 이들과 저들의 행색이 엇비슷했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저들은 왕가에서 주최하는 사냥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수도로 올라온 자들이니까.

“부산스럽군.”

시골 쥐 마냥 룩센투크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는 자들을 내려다보며 율리안이 한마디했다.

그녀는 그의 말이 가리키는 게 ‘마리안이 돌아왔을 때의 룩센투크의 정세’인지, ‘저 창밖의 바글거리는 사람들’인지 헷갈렸다. 그러나 굳이 그의 의중을 묻지 않았다.

율리안의 머릿속에 마리안이 깊이 박히면 박힐수록 그녀의 상황이 불리해진다.

마리엘라는 그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창밖의 사람들’을 주제로 이야기를 이끌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죠. ‘겨울의 기사’를 뽑아야 하니까요.”

겨울의 기사는 겨울 사냥대회의 우승자를 가리키는 별칭이었다.

이런 로맨틱한 별명이 붙은 것은,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상품이 메달이나 훈장 따위가 아닌, 화관이었기 때문이었다.

화관의 이름은 눈의 화관.

겨울의 기사는 가장 사랑하거나 존경하는 여성에게 눈의 화관을 씌워줄 자격을 갖는다.

백조 깃털과 목화솜, 은을 덧씌운 겨우살이 나뭇가지로 만든 이 화관은, 사교계 여성들이 가장 선망하는 물건 중 하나였다.

율리안의 얼굴 위로 성가시다는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마리엘라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질문했다.

“활을 잘 쏘시나요?”

“검술보다는 아니야.”

그가 시선을 창밖에서 책으로 되돌리며 중얼거렸다.

“예전부터 활은 나보다…… 요제프가 더 두각을 보였지.”

그녀는 그 말을 듣지 못한 척했다. 그리고 동시에 들어온 정보를 머릿속에 새겼다.

같은 날 밤이었다.

마리엘라는 요제프의 처소에 방문해, 그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마리안이 요양을 떠난 두 달, 왕성은 이상하다시피 만큼 평안했고,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폭풍 전야의 아슬아슬한 고요가 아니라, 정말로 평화가 찾아온 듯했다. 마리엘라는 오랜만에 찾아온 느긋한 시간이 반가운 한편,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율리안이라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율리안은 마리안을 쫓아내는 것이 자신의 최종 목적이었다는 듯,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가자마자 정치와 관련된 모든 일에 무관심하게 굴었다. 납득가지 않는 행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베르단을 집어삼키고 싶다면 지금 기세를 확장시켜야 해. 율리안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마치 처음부터…….’

그녀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가까운 곳에서 불쑥 질문이 들어왔다.

“눈의 화관을 보여줄까? 지금 여기에 있는데.”

답이 정해져 있는 제안이었다.

뜬금없는 소리에 마리엘라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눈의 화관이요?”

“응. 보여주고 싶어서. 어차피 다른 여자 머리 위에 올라갈 테지만.”

끝에 붙는 말이 퍽 무심하다.

그녀는 문득, 낮에 율리안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율리안은 요제프가 자신보다 활을 더 잘 쏜다고 했다. 진짜 소드 마스터는 아니긴 했지만, 율리안의 검 솜씨는 수준급이었다. 난다 긴다 하는 기사들마저 껌벅 속일 만큼 기본기가 탄탄했다. 그런 율리안이 요제프의 궁술 실력을 칭찬했다. 그녀는 그의 활 솜씨가 궁금해졌다.

“전하는 참가 안 하세요?”

“참가는 해야지. 왕가에서 주최하는 행사인데.”

“연약하고, 멍청한 왕자님 연기를 계속하겠다는 건가요?”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요제프가 픽 하고 웃었다.

“그것도 그렇고.”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주욱 훑었다.

이마 가장 가까운 곳부터 머리카락 끝까지.

느긋하고 여유로운 움직임이 묘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평소와 다른 것을 원하는 것 같다.

그녀의 등이 저도 모르게 꼿꼿해졌다.

그가 손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화관을 받아 어디다 쓰겠어. 네 머리에 얹어 주는 순간 사교계는 물론, 정계가 발칵 뒤질힐 텐데.”

“별 관심이 없다는 뜻이군요.”

“줄 사람이 없으니까.”

똑 떨어지는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슬슬 이 대화가 불편해졌다.

그녀는 시선을 딴 곳으로 옮기며, 자연스레 대화 주제를 변경했다.

“마리안이 내일 온다고 했죠.”

요제프는 그녀의 의도를 간파했으나,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 않고 그대로 따라가 주었다.

“오는 도중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렇겠지.”

불길한 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훽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따끔한 시선에 요제프가 양손을 들어 보이며 항복을 표했다.

“농이야. 별일이 생길 터가 있겠어?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실력이 뛰어난 기사들만을 선발해 호위로 보냈는데.”

“부탁이 있어요.”

“뭔데?”

“다시 마리안의 하녀로 지내고 싶어요.”

그것은, 두 달의 고심 끝내 내놓은 그녀만의 수였다.

마리엘라는 요제프도 율리안도 믿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사람들의 욕망은 다채롭고 세밀하다. 겉보기에 엇비슷해 보여도, 깊게 파고들면 같은 색을 띤 것은 하나도 없다.

원하는 것이 합치한다고 쉽게 믿어선 안 된다. 첨예하게 벼려진 욕망만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룩센투크에서 손톱만 한 차이점은 걷잡을 수 없는 간극을 만들어낸다는 걸 새겨둬야 했다.

마리안이 리덴부르크가로 떠나고, 남겨진 시간 동안 그녀는 수없이 많은 가능성을 재고했다. 율리안이 요제프, 마리안, 자신을 해할 가능성과 요제프가 마리안을 버리거나 자신을 떠날 가능성 그리고 자신이 저 두 사람을 배신할 가능성까지. 수없이 많은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그녀가 권력을 쥐는 쪽이 모든 상황에서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아주 당연한 생각이었지만, 그녀가 평민으로 태어나 하녀로만 살아왔다는 것을 상기해 본다면 아주 획기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마리엘라는 더 이상 두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상황상 어쩔 수 없는 처지지만, 다가올 미래까지는 좌우되지 않으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마리안이 필요했다. 물론, 그것은 마리안을 그 둘의 위험에서 확실히 구하기 위한 수이기도 했다.

“알았어. 따로 율리안을 불러 말해보도록 할게.”

요제프가 별 의심 없이 그녀의 의견을 수용해주었다.

“아,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조건씩이나?”

그가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며 그녀를 놀렸지만,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절대 제 의견이라고 말씀하시면 안 돼요.”

“왜?”

“섭섭해하실 테니까요. 그동안 율리안과 쌓은 유대가 좀 각별했거든요.”

‘너무 각별해서 문제였지.’

마리엘라는 불편한 진실을 속으로 삼켰다.

아무것도 모르는 요제프가 은근한 질투심을 내비쳤다.

“섭섭해. 아가씨의 입에서 나오는 ‘각별’이 날 지칭한 게 아니라니.”

이번에는 그녀가 픽 웃었다.

“그러게 평소에 잘 좀 해보시지 그랬어요, 왕자 전하.”

* * *

다음 날이었다. 마리엘라는 아침부터 복도 창가를 서성였다. 마리안이 오는 것을 바로 알아채기 위함이었다.

‘내가 다시 돌아간다고 하면 기뻐하겠지?’

황폐한 땅 위에도 씨앗은 발아하는 법이다.

궁지에 몰린 처지의 그녀였지만,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가슴 속에 설렘이 맴돌았다. 그녀는 율리안을 보좌하면서,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창밖을 힐끔거렸다.

그러나 마리안 왕자비보다 먼저 도달한 이가 있었다.

“……마리엘라?”

‘망할.’

햇볕이 내리쬐는 복도에서 익숙한 얼굴의 중년 남성을 발견한 마리엘라의 얼굴이 일순 구겨졌다.

그녀의 이름을 부른 남자의 정체는 가르트 남작이었다. 과거, 그녀는 그의 정부가 되려 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못 본 척 돌아설까 하다가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작은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마리엘라는 무릎을 굽혀 그에게 예를 갖췄다.

“오랜만이네요, 남작님.”

그가 대뜸 그녀의 손을 잡았다.

“왕자비를 따라 왕성으로 갔다는 소식은 들었어도, 이리 만나게 될 줄이야. 우리가 운명이긴 운명인가 보구나!”

다소 연극적인 투로 말하는 그를 보며 마리엘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남자, 여전히 자기애가 강하구나.

“사람 일이라는 게 참 얄궂군요. 여기서 불시에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왜 그동안 편지 한 통 없었나! 연서 한 통이면 내 바로 달려갔을 것을.”

‘가지가지 하네.’

마리엘라는 눈앞의 남자가 성가셨지만 그것을 티 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상냥하게 웃어 보이며 적당히 상황을 무마한 대답을 꺼냈다.

“룩센투크에 발 디딘 순간부터, 왕자비 전하를 위해 모든 생을 바치기로 결심했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결혼의 신성함만 못한 것을!”

‘네가 나랑 결혼하려고 했냐. 정부로 들이려 했지.’

입가의 미소가 점점 사그라진다. 그녀는 일부러 난색을 표하며 남작에게 붙잡힌 손을 빼내려 했다.

“하녀인 제겐 주인을 끝까지 모시는 것이 더 중하답니다. 안타깝지만 반가운 재회는 가슴속에 묻고, 우리 사이는 여기까지인 것으로 해요.”

남작이 악력으로 그녀의 손을 붙들어 매며 말했다.

“어딜 그리 바삐 떠나려고. 즐거운 회포를 다 풀지도 못하였는데.”

“저는 왕성의 하녀인지라.”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가 책임지면 되지.”

가르트 남작의 머릿속이 뻔히 보였다.

남작은 룩센투크 안에서의 마리안의 위세를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그에게 왕자비는 그저 ‘리덴부르크가의 철없는 막내딸’인 것이다.

‘직접 만나면 저런 소리 못할 텐데.’

마리엘라는 고작 아쉬운 소리 몇 번 할 각오만이 되어 있는 이 남자가 가소로웠다. 그녀가 입을 열어 그의 착각과 오만을 지적해 주기 전에,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소란스럽군.”

그녀의 새로운 주인, 율리안이었다.

그가 무표정으로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바이르 공작 각하.”

가르트 남작이 마리엘라를 붙잡았던 손을 풀고, 율리안에게 인사를 했다.

율리안은 대꾸 없이 마리엘라의 손을 빤히 보았다.

“지방에서 올라온 탓에 소문을 못 들었나.”

“예?”

다소 멍청한 대답에 싸늘한 목소리가 날아온다.

“율리안 폰 바이르의 하녀와는 접촉하지도, 눈을 마주치지도, 말을 섞지도 말라고.”

“친, 친밀한 사이라 잠시 대화를 나누었을 뿐입니다.”

“그래? 내 눈에는 전혀 그래 보이지 않던데.”

봐줄 생각 없다는 듯한 율리안의 태도에 가르트 남작이 절절맸다.

중년 남성이 자식뻘의 남자에게 벌벌 기는 꼴이 다소 이상해 보였지만, 대륙에서 유일한 소드마스터로 이름난 율리안의 위상을 생각해본다면 그리 납득이 안가는 풍경은 아니었다.

마리엘라는 순식간에 제3자가 되어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신분으로 여성을 짓누르려는 시도는 곤란해. 그대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왔다면 신사의 예를 갖추길 바라네.”

“정말 그런 것이 아닙니다. 두고 보면 아실 겁니다. 빨리 그렇다고 말해주게, 마리엘라.”

“아는 사이이기는 합니다.”

굳이 거짓을 말할 필요가 없던 마리엘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적당히 응수해줬다.

그녀의 말에 남작이 기세등등해졌다.

“거짓이 아닙니다.”

“…….”

“그럼 이만 갈 길이 바빠서.”

비록 율리안의 차가운 시선에 바로 꼬리를 말고 도망쳤지만.

떠나기 바로 직전, 남작이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꼭 눈의 화관을 그대에게.”

말을 들어보니, 사냥대회 때문에 수도로 상경한 것 같았다.

‘저런 놈도 참가할 수 있다니.’

그녀는 후다닥 도망친 남작의 초라한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어이없어했다. 다른 한편으로, 마리안의 훼방으로 남작의 정부가 되지 못한 것에 크게 감사했다.

그때, 그녀의 머리 위에서 공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고개를 들어보니 그가 낯선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까보다는 덜 차갑지만, 여전히 경계심을 놓지 않고 있는 얼굴.

‘뭐지?’

마리엘라는 의아함을 티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대꾸했다.

“가르트 남작이라고…… 뭐 과거에 이래저래.”

“빙빙 돌리지 말고 정확히 설명해.”

“과거에 귀족의 정부가 되고자 했을 때, 의도적으로 만났던 남자예요.”

“…….”

직설적인 화법에 그가 침묵했다

정확히 그날부터였다.

율리안이 검 대신 활을 손에 쥐고 연무장에서 종일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은.

* * *

휙. 휙.

여기저기서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난다. 길게 늘여진 과녁에 빗발처럼 꽂히는 화살들.

과녁판을 확인 한 기사들의 희비가 교차했다.

이들 대부분은 연식이 어린 자로, 혹여 자신이 겨울의 기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품은 신입기사들이었다.

파릇파릇한 새싹들 사이로, 유독 눈에 띄는 실력의 사내가 하나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율리안 폰 바이르. 대륙의 단 하나뿐인 소드 마스터이자, 교황의 양아들, 요제프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자이다.

율리안이 쏜 화살은 열의 아홉은 과녁의 정중앙을 맞추었다. 완벽에 가까운 점수이건만, 그는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리고는 계속 새 화살을 꺼내 들었다.

그가 그렇게 연습에 열중할수록 마리엘라의 심정은 착잡해졌다.

‘지금 나랑 뭘 하자는 거지?’

마리엘라는 그의 마음이 의심스러웠다. 가르트 남작이 눈의 화관을 입에 올리자마자 사냥 연습에 몰두하기 시작한 일 하나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증거로 들이밀 수 있는 일화가 수도 없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엊그제 오후, 바레뎃샤의 고위 신관이 율리안을 방문했을 때였다.

“교단의 위기를 개인의 기회 삼아 활개를 치는 이들이 없지 않습니다. 하여…….”

신관이 말을 하다 말고 마리엘라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바로 남자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교황의 오랜 부재로 혼란스러워진 교단 때문에 조언을 구하러 율리안을 방문한 신관은 그녀가 자신의 말을 귀동냥하길 원하지 않았다.

“따로 시키실 일 없으시면, 잠시 밀린 일을 하고 와도 될까요?”

마리엘라는 눈치껏 자리를 피하려 했다. 이 기회에 마리안을 만날 생각이었다. 요즘 마리안의 행동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마리안은 리덴부르크가에서 돌아온 뒤부터 그녀를 피하고 있었다. 마리엘라는 갑작스레 거리를 두는 친구에게서 서운함보다는 수상함을 먼저 느꼈다.

오랜 시간 마리안을 지켜본 놀이 친구의 감으로, 그녀는 마리안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을 간파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캐내겠어.’

불시에 방문하여 진실을 파헤칠 생각이었다.

문밖으로 나가려는 그녀의 발목을 잡은 것은 율리안의 무심한 한마디였다.

“왕자비를 만나러 가나?”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되물었다.

“네?”

그는 같은 말을 되풀이해주는 친절 대신, 단호한 어조로 명을 덧붙였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어딜 가지 말고 제 곁에 붙어 있으라는 뜻이었다.

그녀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마리엘라는 일부러 어물쩍대며 제 의견을 관철했다.

“하지만…….”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쯧, 하는 혀 차는 소리와 잔소리뿐이었다.

“수도로 상경한 지 반년이 넘었거늘. 이곳은 네가 자고 나란 리덴부르크 시골 영지가 아니라, 왕성 룩센투크라는 것을 항상 상기하도록. 나는 고작 하녀 때문에 정치적인 일에 엮이고 싶지 않다.”

눈에 보이는 뻔한 심술이었다.

그녀가 왕자비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그에게 득이 되었으면 득이 되었지, 해가 될 리가 없다는 걸 누가보다 잘 알면서.

그 외에도 자잘한 일들은 수없이 많았다.

이른 아침부터 늦저녁까지. 거의 종일 그의 옆에 붙어 있는데도 계속 더 많은 것들을 요구했다.

그는 그녀의 자투리 시간까지 독점하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다른 정치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라면 이해라도 하지.

그냥 계속 함께 있기만을 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곤란한 것은 마리엘라였다.

처음에는 은근하고 비유적이던 요청들이 날이 갈수록 직접적이고 뚜렷하게 변하자, 주변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마리엘라는 사람들이 저와 공작 사이를 두고 수군거렸을 것이라 확신했다.

* * *

‘마음을 품은 건지, 새로운 함정을 파는 중인 건지…….’

여전히 활쏘기 연습이 한창인 연무장.

마리엘라는 율리안의 옆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그의 행보에 의구심을 품었다.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정도만 걷는 고귀한 검사, 어둠을 무서워하는 어린아이, 친구를 벼랑으로 모는 악인, 그러면서도 요제프와 그녀를 소중히 여기는 모순점을 가진 자…….

약하면서 악하고, 악하면서 다정하며, 다정하면서 서늘한 이.

그가 제게 보여준 수많은 모습 중, 진심은 무엇이고, 진실은 무엇인가.

‘흠…….’

양극단을 널뛰는 그의 모습 속에 일정한 패턴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녀는 속단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단속했다.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해.’

그녀는 요제프를 살며시 떠볼 궁리를 했다.

그때였다.

피 융-

예고 없이 들리는 바람 가르는 소리.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고요를 침범한 소음에 화들짝 놀랐다. 과녁만을 노려보던 공작의 시선이 어느덧 그녀에게로 옮겨 붙어있었다.

메마르고 날카로운 눈빛이 그녀의 눈동자를 파헤친다.

불순한 생각이 읽혔나 싶어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는 별생각 없다는 듯, 툭 시선을 거둔 뒤 다시 무심하게 시위를 당겼다.

피 융-

모두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그 소리가, 다시금 연무장을 울렸다.

* * *

“그게 왜 궁금한데?”

마리엘라가 율리안에 관해 질문하자 요제프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굴었다.

“그냥. 그냥요. 두 사람을 다 모시다 보니 둘이 어떻게 우정을 쌓았는지 의심이 가더라고요.”

“흐음.”

돌아오는 그의 시선이 탐탁지 않다. 그녀는 뻔뻔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왜요?”

“관심이 지대해.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잔정이 깊은 편인가 봐?”

“도대체 절 어느 정도의 냉혈한으로 보신 거죠?”

“기분이 별로야.”

“안심하세요, 왕자 전하께서 걱정하실 만한 일은 하나도 없었으니.”

그녀는 생긋 웃으며 그를 달랬다.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기는.”

“모르면서 아는 척하기 전에 툭 까놓고 말해보시죠.”

“너와 율리안 말이야. 둘 사이의 기류가 미묘하단 말이 다시 왕성을 떠돌아다니던데.”

“…….”

마리엘라는 다시 침묵했다.

요제프는 턱을 괴고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나는 너를 믿고, 내 친구 율리안을 믿어. 그런데 왜 너희 둘 사이는 못 믿겠지?”

아주 오래전부터 신경이 쓰였는데, 티 내지 못하고 있다가 이번 기회를 삼아 우르르 터트리는 모양새였다.

그녀는 애써 담담한 얼굴로 그의 시선을 그대로 맞받아쳤다.

“왕자 전하의 인성이 글러 먹어서 그래요. 남 뒤통수치는 게 취미시니 도리어 남을 의심하는 게 습관이 되신 거죠.”

그녀는 몇 마디 말로 상황을 대충 넘겼다.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모르겠다. 율리안이 무슨 생각과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요제프는 의심쩍다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몇 초간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하던 그는, 이내 호탕하게 웃었다. ‘속아주겠다’라는 의미였다.

“하하. 마리엘라. 농이 참 늘었어. 이제 왕성 사람 다 되었네.”

며칠이 지났다.

요제프가 활을 손에 쥐고, 연무장을 들락날락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마리안 왕자비를 위해 ‘눈의 화관’을 따고자 한다고.

사교계는 ‘겨울의 기사’ 자리를 두고 벌이는 죽마고우 간의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지만, 이 일의 실질적 당사자인 마리엘라는 모든 것이 피곤하기만 했다.

* * *

어느 날 밤이었다. 왕성의 물품 관리 담당자를 만난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신을 벗고 도둑처럼 걷는 소리였다.

“?”

그녀는 뒤를 돌아 소리가 나는 곳을 살폈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면서 뛰어가는 갈색 머리 하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뭐지?’

왠지 모르게 저 사람의 뒤를 밟아야겠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점점 멀어져가는 하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그녀는 조용히 하녀의 뒤를 밟았다.

갈색 머리 하녀가 향한 곳은 왕성의 북쪽이었다. 그곳에는 보초를 서는 기사들을 위한 휴게실이 있었다. 기사와 밀애를 하는 하녀들은 종종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곳으로 오곤 했다.

마리엘라는 너무나도 뻔한 목적지에 실망했다. 남들의 연애사는 그녀의 알 바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발걸음을 돌릴까 고민하고 있는데, 별안간 저쪽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릴리!”

“미하엘!”

“…….”

마리엘라의 걸음이 멈췄다. 익숙한 애칭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격하게 껴안는 두 사람을 훔쳐보았다. 갈색 머리 하녀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하녀가 그녀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붉은 머리의 귀엽게 생긴 기사의 얼굴뿐이었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하녀의 얼굴에 입맞춤을 퍼부은 기사가 하녀를 향해 다정히 안부를 물었다.

“릴리! 머무는 방이 춥지는 않은가요? 아직도 못된 왕자비가 당신을 구박하곤 하나요?”

더 확인할 것이 없었다.

갈색머리 여자. 릴리. 왕자비.

세 가지 퍼즐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으니.

머릿속에서 친구의 구김 없는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을 피해 다녔던 근래의 행적도.

‘이…… 사고뭉치가.’

주먹이 꽉 쥐어졌다. 안 그래도 정세가 혼란스러운데 이 일은 또 어떻게 막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한숨을 푹 쉬고는 주머니를 뒤졌다. 휴대용 반짇고리가 손에 잡혔다. 그녀는 그것을 바닥에다 패대기쳤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두 남녀가 화들짝 놀라 떨어졌다.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그녀가 어둠 속에서 몸을 드러냈다.

잔뜩 짜증이 난 표정이었다.

“……여기서, 지금 뭣들 하시는지 궁금하군요.”

“헉!”

여자가 놀라 숨을 들이켰다. 예상한 대로 여자의 정체는 마리안이었다.

마리엘라는 하녀 복장을 한 마리안과 젊은 기사를 번갈아 보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요새 들어 만나기가 힘들어졌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설마하니 안 보이는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이야.”

마리엘라는 일부러 신분이 드러나지 않는 중의적인 표현만을 사용했다. 눈앞의 기사가 마리안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발 저 철없는 왕자비가 자기 신분만은 드러내지 않았기를, 자신이 뒷수습할 수 있는 만큼의 사고만 치기를.

그녀는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마리안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이토록 당황한 모습은 태어나 처음 보는 것이었다. 마리엘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마리안을 응시했다. 마리안이 무슨 말을 할지 먼저 듣고 보자는 판단이었다.

그때, 마리안이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왕, 왕자비님!”

“왕……자비님이요?”

그 말을 들은 기사가 사색이 되어 마리엘라를 바라보았다.

마리엘라가 무슨 말을 할까 두려운 마리안이 재빨리 덧붙여 말했다.

“저희 왕자비님께서는 종종 하녀 복장을 하고 바깥을 돌아다니세요. 나라의 어머니라면 응당 가장 낮은 곳의 삶을 굽이 살피셔야 하니까요.”

나름 그럴듯한 변명이었다.

‘얼씨구?’

마리엘라는 한쪽 눈썹을 슬쩍 올렸다.

졸지에 왕자비역을 맡게 된 현실이 기가 찼다.

그 모습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는지, 두 사람이 움찔했다.

마리안은 막 태어난 강아지처럼 벌벌 떨었다.

이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마리안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냈던 마리엘라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건 자신에게 겁에 질려서 나오는 반응이 아니었다. 기사에게 정체를 들킬까 긴장한 것이었다.

붉은 머리의 기사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마리엘라의 시선이 마리안에게서 남자에게로 옮겨졌다.

곱슬곱슬한 옅은 붉은색의 머리카락과 호박 보석을 닮은 노란 눈동자가 인상 깊은 남자였다. 코를 중심으로 퍼져있는 주근깨 때문인지, 유독 소년 같은 느낌이 강했다.

‘이름이…… 미하엘이었던가.’

그녀는 남자가 자신이 아는 사람인가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도 떠오르는 정보가 없다. 영향력 있는 가문의 자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래, 일단 대충 내 선에서 처리할 수 있겠어.’

두 사람을 헤어지게 한 뒤, 기사를 먼 곳으로 보내버리면 되니까.

문제가 생각보다 쉽게 풀릴 것 같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마리엘라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그때였다.

마리엘라의 기분을 살피던 마리안이 갑자기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그녀는 마리엘라의 치맛자락을 붙잡으며 애원했다.

“왕자비님, 제발 저희의 사랑을 못 본 척 넘어가 주세요!”

“…….”

마리엘라는 당황스러움과 어이없음을 담아 마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이어서 하는 마리안의 말이 그녀의 뒷목을 잡게 했다.

“사랑이 죄는 아니잖아요!”

그러더니 갑자기 뚝뚝 눈물을 흘린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마리안은 자존심이 센 편에 속했다. 습관적으로 징징거리긴 했지만 그건 그냥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방법에 불과했고, 진짜로 울어버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울지 마세요, 아가씨.”

미하엘이 마리안을 안아서 달랜다.

마리엘라는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연인들의 꼴값을 마주한 사람치고는 매우 진지한 얼굴이었다.

‘진심인가?’

그녀는 머릿속으로 최악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마리안이 저 기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을 가능성.

마리안은 세상을 쉽게 살아왔던 사람이었다. 백작가의 막내딸로 태어나 일평생 부족한 것을 모르고 자랐으며, 왕자비 자리에 오르고 나서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타인을 휘둘렀을 뿐, 반대의 경우는 거의 겪어보지 못했다.

그녀의 인생은 행운으로 점철되어 있었고, 바로 그것이 마리안의 최대 약점이었다.

타인의 악의가 얼마나 무서운지 정확히 모른다는 것.

마리엘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일어나세요. 바닥이 차니까.”

“허락해주실 때까지는 절대 못 일어나요!”

마리안이 잠긴 목소리로 저항했다. 그러나 마리엘라는 넘어가 주지 않았다. 동정심에 눈감아주기에는 감당해야 할 위험이 너무 많다.

“제가 허락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잖아요.”

“그, 그래도 안 돼요! 모르는 척해주신다고 약속해주세요. 제발. 네?”

“약속하면, 뭐가 달라지나요? 당신의 신분과 사회의 규칙을 생각해 보세요.”

결혼의 신성함 따위를 읊고 싶은 게 아니다. 마리엘라는 어릴 적부터 귀족의 정부가 되기를 목표로 했던 사람이었다. 고리타분한 도덕성으로 타인을 재단할 생각 따윈 없다.

문제는 이곳이 왕성 룩센투크라는 것이었다. 또, 제 눈앞에 무릎 꿇은 여자의 신분이 왕자비라는 것이었고.

왕자비의 사랑은 엄청난 파장을 만들어낼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그녀의 선은 물론, 요제프의 도움을 받아도 해결하지 못 할지도 모른다.

마리안이 미하엘의 품에 안겨 울었다.

젊은 기사는 사악한 용으로부터 사랑하는 아가씨를 지키겠다는 태도로 마리엘라에게 항변했다.

“왕자비 전하의 걱정이 무엇인지는 잘 아오나, 그것은 저와 저의 가문이 떠안을 문제입니다. 그 어떤 위협도 마리엘라 양과 저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건방지고, 어떻게 보면 치기 어렸으며, 또 어떻게 보면 믿음직스러운 말이었다. 그러나 마리엘라가 주목한 것은 다른 곳에 있었다.

“마리……엘라요?”

그녀가 발밑의 마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울음을 그친 마리안이 민망한 표정으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마리엘라는 자초지종을 꼭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든지, 꼭.

* * *

왕자비의 처소, 방 안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마리엘라가 마리안을 몰아세웠다.

딱딱하고 차가운 어조였다.

“설명해 보시죠.”

“아니, 그러니까, 그러니까 있잖아…….”

마리안이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말꼬리만 늘였다. 어물쩍 넘기려는 모양새인 것을 눈치챈 마리엘라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쓸데없이 말 돌리면 그대로 돌아갈 거예요.”

“앗, 아니…….”

그녀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이내 모든 것을 실토했다.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것은, 마리안이 요양을 위해 리덴부르크가로 간 일과 관련이 깊었다.

마리안은 친정에 돌아가 칩거 생활을 했다. 그녀가 진짜로 몸이 안 좋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그녀가 감명 깊게 읽은 통속 소설의 줄거리가 남편에게 버림받고, 세상에 상처받은 주인공이 오랜 은둔생활 끝에 처절한 복수를 행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마리안은 남편에게 버림받은 직후의 공작부인 역할에 심취해서 방 밖을 나서지 않았다.

혹여 나갈 일이 있다면 검은 베일을 쓰고 다녔다. 어찌나 자신의 역할에 심취했는지, 왕성에서 그녀와 마주할 일이 없었던 신입기사들은 그녀의 얼굴을 모를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던 그녀는, 몸이 찌뿌둥해짐을 느꼈다. 오랜만에 돌아온 본가가 그대로 인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한 달 동안 열심히 구축해 놓은 ‘가련하고 비극적인 여인’이라는 이미지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하녀로 변장했다. 밤이 늦었으니,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며.

“그리고…….”

“그래서요?”

날카로운 눈으로 채근하는 마리엘라의 표정에 마리안이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다 미하엘을 만났지……. 바로 사랑에 빠진 건 아니야. 믿어 줘. 처음에는 그냥 새로운 친구를 사귈 겸 놀려 주려고 했는데, 보다 보니, 어쩌다가…….”

마리엘라가 눈을 치켜뜨자, 마리안이 손뼉을 짝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노력했다.

“아, 맞다. 너 줄 거 있어! 생선가게 로라가 네게 전해 달라고 했어.”

마리안이 서랍에서 두꺼운 책 하나를 꺼냈다. 제목을 포함해, 글자 하나 없는, 볼품없고 오래된 책이었다.

마리엘라는 관심 없는 투로 책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종이 뭉치를 대충 훑어보았다.

마리안이 눈치를 보며 부가 설명을 덧붙였다.

“어떤 할머니의 유품이라던데. 이름을 까먹었어. 그 할머니가 너에게 남긴 거래.”

도대체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도망간 친인척들이 매우 많았고, 그중에는 오늘내일하는 늙은이들도 있었다.

그녀는 ‘할머니’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을 떠올려 보다가,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했다.

“이런 거로 말 돌리려 하지 마세요.”

“아, 아니, 나는 말 돌리려고 안 했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큰 사고를 치신 거죠? 이건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는 걸 아셔야 해요.”

“그게…… 찌르르, 하는 게 안 느껴지잖아.”

“예?”

마리엘라는 또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마리안을 보았다.

“왕자 전하에게는 그 어떤 설렘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내 사랑, 피앙세, 작은 물고기, 아기 고양이…… 온갖 달콤한 애칭을 다 들어봤지만 미하엘이 해주는 투박한 언어만큼 와 닿지 않아. 마리엘라, 넌 사랑을 해본 적 있어?”

“해볼 기회를 아가씨가 다 막았잖아요.”

“아무튼, 이건 사랑이 아니야. 아닌 것 같아.”

마리엘라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면 어쩔 거고, 맞으면 또 어쩌시려고요. 아가씨는 더 이상 아가씨가 아니에요. 명실상부한 이 나라의 왕자비라고요. 잊지 마세요. 그 자리가 지금은 칼 등처럼 느껴져도, 후엔 칼날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나도 알아. 그래서 내 진짜 정체까지는 밝히지 않았잖아……. 나중에는 말할 거지만.”

마리엘라의 목소리가 커졌다.

“나중에 밝힌다고요?”

“사랑하는 사이에 비밀이 있으면 어떻게 해.”

“사랑 좇다가 목 잘리고 싶으세요?”

“겁주려고 그러지!”

마리엘라는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대체 이 답도 없는 왕자비를 어떻게 갱생시켜야 하나.

어쩌면 마리안을 설득시키는 것보다, 아까 본 그 기사를 조종하는 게 더 쉬울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놈은 몇 살인데 그 나이 먹고 사리 분별을 못 하는지.’

붉은 곱슬머리의 기사를 떠올렸다.

“그 미하엘이라는 남자는 어디 가문 출신이죠? 나이는요? 누구와 친하게 지내고, 누구의 신임을 얻고 있죠?”

그녀의 질문에 마리안이 경계심을 내비쳤다.

“미하엘에게 해코지하지 마! 아직 열아홉 살밖에 안 된 애란 말이야!”

“열……아홉이요?”

기사의 나이를 들은 뒤, 비난의 화살이 다른 쪽으로 옮겨갔다.

‘저 나이 먹고 사리 분별을 못하다니.’

다시 한번, 리덴부르크 백작가의 형편없는 가정교육에 회의감이 들었다.

도대체 애를 어떻게 키우면 저렇게 인생을 되는 대로 살까?

그녀가 한심하다는 눈빛을 감추지 않자, 마리안이 베개로 얼굴을 가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사고를 작작 치셨어야죠. 대책 없이 일만 벌이는데 어떻게 좋은 시선이 나가죠?”

마리안이 입을 삐죽 내밀며 징징거렸다.

마리엘라는 그것을 대충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낸 뒤, 그다음 질문을 했다.

“그런데, 전하의 시녀는요?”

“응?”

“데이지 아가씨가 함께 따라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데이지 아가씨는 아무것도 모르시나요? 아니면 알면서 말리지 않으셨던 건가요.”

쨍그랑.

어디서 접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니 데이지가 파리한 얼굴로 깨진 도자기를 치우고 있었다. 마리엘라는 저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안 말렸다는 뜻이군.’

안 봐도 뻔했다.

마리엘라는 역시 마리안의 곁에는 자신이 붙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 *

햇살 좋은 오후였다.

햇볕이 내리쬐는 왕자의 집무실.

율리안과 요제프는 나란히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이건 승인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요제프가 서류 하나를 가리키자, 율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을 대고 거절해. 그럼 적당히 알아먹을 테지.”

“역시 그렇게 해야겠군.”

두 사람은 진지하게 업무에 임했고, 일과 관련되지 않는 한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지 않았다.

팔락팔락,

서걱서걱.

넓은 집무실 안, 종이 넘기는 소리와 서류에 서명하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오늘 안에 끝내야 하는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 때였다. 율리안이 요제프를 슬쩍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묻고 싶은 게 있어.”

“음?”

“내 하녀 말인데.”

마리엘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요제프는 살짝 서늘해진 눈으로 제 친우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그가 예상한 바로 그 말이 율리안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

“왜 갑자기 거처를 옮기려는 거지?”

“왕자비의 곁에 그녀가 있는 것이 옳다 여겨서.”

율리안이 질문을 끝내자마자 요제프가 대꾸했다. 다소 무미건조하고 냉랭한 투였지만, 그것이 요제프의 최선이었다.

칼 같은 그의 대꾸에 율리안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거절해도 되나?”

“왜, 무슨 마음이라도 생겼나?”

“별건 아니야. 그만큼 일 잘하는 하녀를 찾는 게 쉽지 않아서.”

요제프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태연자약하게 굴면서 친구의 제안을 잘라냈다.

율리안은 지금 그가 날이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더 손 빠르고 눈치 좋은 사람을 붙여 줄게. 그러니, 마리엘라는 그만 포기하도록 해.”

율리안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는다. 동시에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요제프는 이 일에 관심 없는 척 서류를 펄럭였지만 슬쩍 눈을 돌려 율리안의 표정을 살피는 중이었고, 율리안은 평소처럼 딱딱하게 굴었지만 목소리 끝에서 강한 소유욕이 느껴졌다.

“…….”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본능적으로 연적을 감지한 이들의 신경전이었다.

* * *

마리안의 사랑놀이가 발각된 다음 날 밤이었다.

마리엘라는 자신의 방 침대 위에 앉아 장부를 뒤적이고 있었다. 왕실의 물품 관리인에게서 받은 서쪽 별관의 지출 장부였다. 어마어마한 두께였지만 상관없었다. 그녀가 체크해야 하는 것은 지출 내역 전체가 아니었으니까.

마리엘라의 손이 빠르게 종이를 넘겼다. 그녀는 눈으로 빠르게 정보를 찾아냄과 동시에 입으로 그것을 읊었다.

“백……팔십육, 백구십, 백팔십구, 백팔십사, 백구십이…….”

그것은 율리안의 처소에서 한 달 동안 사용되는 양초의 수였다.

마리엘라는 율리안의 생각을 정확히 간파하기 위해서 거짓을 솎아내기로 했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율리안.

만약 그 모습이 자신을 방심시키기 위한 연기였다면, 지난 몇 년간 양초의 구입량이 들쑥날쑥해야 했다. 하지만…….

‘연기가…… 아니라고?’

그녀의 얼굴에 혼란이 가득 차올랐다.

그녀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율리안이 사용한 양초의 양은 일정했다.

매일 밤, 수많은 촛불로 방을 채웠다는 뜻이다.

“…….”

마리엘라는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처음 그를 악몽에서 구했던 그 날이 떠오른다.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과 눈썹 끝에 맺힌 처연함을.

‘……그 눈빛도 진짜였을까?’

주인 잃은 강아지 같은 눈으로 제 눈치만 보던 과거 율리안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버림받을 것이라는 예측과 버림받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교차된 그 새까만 눈동자.

그녀가 냉랭히 선을 그으려 할 때마다 그 올망졸망한 눈동자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곤 했다. 자신에겐 그녀를 움직일 힘도 권리도 없다는 듯이.

여린 소년의 얼굴을 했던 율리안의 모습들을 줄지어 떠올리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감정에 흔들리는 스스로가 어리숙하게 느껴졌다.

‘잊지 마. 등 뒤의 흉터도 진짜였어.’

그녀는 사실과 추측을 분리해내려 노력했다.

‘감정에 흔들리지 마. 판단에 날을 세워야 해. 모든 것을 믿기엔 주어진 현실이 너무 척박하니까. 이건, 미화로 끝내도 되는 과거의 인연이 아니잖아.’

율리안이 어둠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악몽에서 구해줬다고 그녀에게 감정을 품었다는 건 너무 앞서나간 생각이다.

사랑에 빠진 남자를 연기하는 중일 수도 있고, 잠깐 머물렀다 증발해버린 일시적인 호의였을 수도 있다.

‘확실하지 않은 건 모두 배제시켜야 해. 섣부르게 이용하려 하다 도리어 당할 수 있으니까.’

그녀는 장부를 침대 밑에 집어넣은 뒤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오늘의 수확은 여기까지. 어떤 것들은 고심할수록 패착을 가지고 오니까.

이럴 땐 가만히 기다려야 한다. 진실이 입안으로 굴러들어올 때까지.

* * *

며칠 후였다.

별관의 화병을 닦고 있는 마리엘라의 등 뒤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렸다. 외출했다 돌아온 율리안이 하는 일 없이 책상 위 집기들을 뒤적이는 소리였다.

그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뒤 한번 돌아보지 않는 그녀를 흘깃 보았다.

반들반들하게 닦은 하얀색 화병 표면 위로 그가 하는 몸짓이 그대로 비쳤지만 그녀는 못 본 척했다.

“요제프가 널 왕자비에게 돌려보낼 생각이던데.”

“그래요? 처음 듣는 소식이네요.”

심중을 떠보려는 말에 그녀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마른걸레를 든 손이 쉴 새 없이 부지런하게 움직인다. 율리안은 작고 야무진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한 번 더 말을 흘려보았다.

“그가 갑자기 돌변한 이유를 아나?”

그걸 모르고 멍청하게 속내를 줄줄 말할 마리엘라가 아니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은 일을 대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글쎄요. 왕자 전하야 워낙 변덕스러우셔서.”

“…….”

율리안이 말을 안으로 삼켰다.

청소를 끝낸 마리엘라가 뒤를 돌아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뒤늦게 주인의 반응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멍청한 심복처럼 굴었다. 물론, 의도된 행위였다.

“무슨 일이 생겼나요?”

그녀의 시선에 율리안이 고개를 떨궜다.

“……아니다.”

내리까는 눈, 힘없는 목소리, 꽉 다문 입술, 의미 없이 책상 가장자리만 만지작거리는 손. 율리안은 그녀에게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반응을 하나하나 눈에 넣어 두었다.

“그럼 저는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창틀을 닦을 걸레를 가지고 와야 해서요.”

그리고 적당한 핑계를 대 자리를 떠났다.

서쪽 별관에는 돌아다니는 사람이 몇 없었다. 마리엘라와 왕성 사용인들의 관계가 좋지 않음을 알아챈 율리안이 따로 조치를 취해 놓은 덕분이었다.

아무도 없는 복도.

그 한가운데에 우뚝 멈춰 선 마리엘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들키는 줄 알았어.’

요제프와 율리안, 두 사람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는 그녀의 계획은 이제 막 밑그림을 그리려는 참이었다.

지금 여기서 마리안에게 돌아가려는 시도가 걸린다면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어쩌면 탈출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차단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다행히 공작은 이 일을 정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아. 갑자기 뒤통수를 칠 수도 있지만…… 뭐, 일단은.’

걱정거리가 사라지자,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확장되었다. 그녀는 아까 전, 우물쭈물하던 율리안의 반응을 떠올려 보았다.

그는 평소와 다른 서툰 면모를 드러냈다. 감정으로 표현해야 할 것을 이성으로 누르고, 이성으로 억제해야 할 일을 감정적으로 표현했다. 스스로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모습.

‘도대체 뭘까. 공작의 진심은.’

그녀가 한참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소리 없이 다가온 누군가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몸부림을 쳤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소리를 지르려는데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요제프였다.

“진정해, 나야.”

예상보다 과한 반응에 요제프가 난색을 표했다.

마리엘라는 흐트러진 머리를 다듬고 그를 매섭게 바라보았다.

그가 민망한 듯 볼을 긁적였다.

“요 며칠 부쩍 바빠 보여서 내 직접 왔지.”

“여기는 전하의 처소가 아니라, 바이르 공작이 머무는 곳 근처예요.”

조심하라는 뜻이었다.

“하나뿐인 친우의 눈치라도 봐야 한단 말이야?”

“그 누구라도 우리 사이를 알면 안 된다는 뜻이에요.”

“왜?”

요제프가 어린아이 같은 무구한 눈동자를 하고 물었다.

“저는 일개 하녀고, 왕자 전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율리안과 자신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다시 활개를 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요제프의 행동은 소문에 따른 질투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지만, 찔리는 부분이 있는 만큼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율리안의 정체를 왕자에게 들켰나?’

마리엘라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떤 식으로 봐도 해석할 수 있고, 동시에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 표현이 필요했다.

그녀가 적당한 꾀를 찾아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을 때, 그가 김빠지는 소리를 했다.

“이를테면 잘생기고 건장한 흑발의 공작님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던가.”

“…….”

마리엘라가 말없이 그를 흘겨보았다. 요제프는 부끄러워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럽게 굴었다.

“율리안을 돌보느라 날 너무 등한시하는 것 같아서. 내 처소에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말이야.”

“누가 보면 제가 자진해서 바이르 공작의 하녀가 된 줄 알겠어요.”

그녀의 톡 쏘는 말에 그가 딴소리를 했다.

“율리안은 다 컸어. 작위를 물려받은 성인이야.”

“누가 뭐라던가요?”

“그냥, 내가 사랑하는 아가씨가 유독 율리안에게만 약한 것 같아서. 그래서 내 마음이 조금 아프지 뭐야.”

요제프가 망설임 없이 본심을 꺼냈다. 평소와 같이 친절하고 나긋한 미소를 지으며. 눈웃음 사이로 드러난 형형한 눈동자가 그의 뿔난 심경을 대변했다.

마리엘라는 할 말을 잊고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역시 요제프는 율리안과 다르다. 쉴 새 없이 재고 따지며 어느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분간해낼 필요가 없었다.

적과 아군의 구분이 뚜렷하며, 품 안의 이에게는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람. 요제프는 제 사람에게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였다.

밑바닥의 밑바닥에 있는, 질투라는 치졸한 감정까지.

“왜 말이 없을까, 우리 마리 아가씨가.”

“…….”

“응?”

그가 아이처럼 대답을 졸랐다.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틀어 시선을 외면했다.

율리안의 영역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서쪽 별관의 복도.

그곳에서 진득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요제프를 마주하고 있자니,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러버린 사이처럼 느껴졌다.

“오해예요. 전하의 처소를 전처럼 자주 방문하지 않은 건 요즘 들어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고…….”

그가 더 말해보라는 듯 눈썹 한쪽을 까딱 올렸다.

그녀는 그사이에 평정심을 되찾았다. 마리엘라는 태평함에 발칙함을 섞어서 요제프를 도발했다.

“무엇보다, 전 두 사람 다 특별하게 여기지 않아요. 제 관심사는 마리안 왕자비 하나거든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요즘 마리엘라의 온 신경은 마리안에게 쏠려 있었다.

정확히는 마리안과 미하엘의 밀회에.

* * *

마리엘라는 그동안 요제프와 율리안에게 할애하던 자투리 시간을 전부 마리안에게 사용했다. 그녀의 새로운 일상을 읊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서쪽 별관의 일을 마치고 왕자비의 처소로 달려간다. 문을 열면 익숙한 투정이 들려온다.

“아, 왜 나가면 안 되는데! 하루라도 안 보면 메말라 죽을 것 같은데. 진정한 사랑을 알면 이럴 수 없어, 마리엘라.”

옆에서 데이지가 곤란한 기색을 내비친다.

그러나 오랜 시간 마리안의 놀이 친구이자, 전속 하녀로 살아온 마리엘라에게는 그녀를 달래는 건 눈감고도 할 수 있는 손쉬운 일이었다.

요제프와 율리안의 신경전에 떠밀리는 것보다 백배는 더 나았다.

“누가 영영 만나지 말래요? 안전한 밀회 장소를 구할 때까지 자중하라고 했죠.”

“그게 그거잖아!”

탕!

마리안이 읽던 책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마리엘라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마치 아이를 혼내는 엄마 같은 모습이었다.

“왕자비 전하의 얼굴을 아는 기사가 모르는 기사보다 훨씬 많다고 몇 번을 말해요. 거길 계속 들락날락거리는 건 적진 한가운데에 맨몸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마리안이 분을 못 이겨 씩씩댔지만, 마리엘라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너무해! 어떻게 네가 우리 사랑을 방해할 수 있어? 너라면 날 이해해 줄 줄 알았는데.”

“삐지는 건 이 일을 해결하고 나서 하세요. 제가 시킨 대로 말하셨죠? 의원에게 햇빛을 보면 머리가 아프다고 하라는 거요. 곧 의원이 그에 맞는 처방을 내릴 거예요. 약은 몰래 버리세요. 지금 왕자비 전하께 필요한 처방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것뿐이니.”

“도대체 미하엘은 언제 만나게 해줄 건데!”

징징거림이 그치지 않을 것 같자 마리엘라가 조금 더 강하게 나갔다.

“대답하세요.”

“……응, 시키는 대로 했어.”

마리안이 바로 꼬리를 내리고 깨갱 했다. 마리엘라는 얕은 한숨을 쉬고는 그녀를 달랬다.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세기의 사랑에 적합한 장소를 찾는 중이니.”

인내심 없는 마리안을 달래기 위해, 내일이라도 구해 올 것처럼 굴었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제프와 율리안의 감시를 피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왕자비와 왕성의 기사가 쉽게 들락날락할 수 있을 만큼 접근성이 좋은 곳이어야 했으니까.

* * *

사냥대회 개최 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영광스러운 ‘겨울의 기사’가 되기 위해, 부지런히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어야 할 기사들은 연무장 끝에 옹기종기 모여 숨을 죽이고 있었다.

피 융-

연무장 정중앙에 나란히 서서 살기 넘치는 얼굴로 활쏘기 연습을 하는 두 남자 때문이었다.

요제프 하이젠 데르샤바크와 율리안 폰 바이르, 베르단 왕국의 왕자와 공작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서로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시선이 오고 간다. 두 사람 사이에 서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맹하고 순하기로 유명한 왕자와 검술 빼고는 모든 것에 무관심한 공작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기사들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두 사람의 궁술 연습을 지켜보았다.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사이에 잘못 끼었다간 엿 된다.’

휙휙.

고요한 연무장.

바람 가르는 소리가 기사들의 귓가를 울렸다. 마치 그것이 그들의 귓가를 직접적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의 화살이 허공을 가로지를 때마다, 기사들의 어깨가 미묘하게 움찔댔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연무장을 벗어나려면, 왕자와 공작이 있는 곳을 지나쳐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눈치는 보이고, 연습은 못 하고, 나갈 수는 없고…….’

기사들은 울상이 된 서로를 확인하며 말없이 전우애를 다졌다.

같은 시각, 원망의 대상인 두 사람은 활쏘기를 멈추고 과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과녁의 중앙을 정확히 꿰뚫은 화살들.

둘은 서로의 실력을 칭찬했다.

“여전히 활을 잘 쏘는군.”

“너야말로 실력이 더 늘었는데. 자칫 잘못하다간 따라잡히겠어.”

말 속에 뼈가 있었다.

서로를 의식하고 있음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대화였다.

하녀 마리엘라의 거처에 관해 짧은 언쟁을 벌인 이후,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골이 생겼다. 덮어놓고 모른 척했던 서로의 마음을 정확히 인지한 순간, 억지로 잠재워 놓았던 경계심이 끓어 넘쳐 버린 것이다.

질투.

그것은 이성으로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의 가장 미련한 부분 중 하나였다.

멀지 않은 곳.

마리엘라가 두 사람의 경쟁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율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렝 백작가의 영지, 가르트 남작, 서쪽 별관의 지출 내역……… 그리고 지금.’

수많은 증거가 속삭인다. 율리안은 그녀에게 진심이라고.

마리엘라는 얕게 고개를 저으며 현실을 부정했다.

‘아니야. 부족해.’

한번 믿음을 배신당했던 탓일까, 율리안에 대한 꺼림칙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없던 거로 쳐 버릴 수는 없지. 만약 저 태도가 진심이라면 엄청난 패를 손에 쥐게 되는 거야.’

문득, 그녀가 리덴부르크 백작가에 있었던 시절의 일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백작의 저택은 넓었고, 아직 보수가 덜된 구역들이 있었다. 성을 완벽히 고치려면 돈이 많이 들고, 백작가의 예산은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화려한 저택의 보이지 않는 곳은 늘 양동이가 가득했다.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을 받아내기 위함이었다.

바로 그 양동이에 대한 기억이 그녀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똑, 똑.

귓가에 물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태양 빛을 쬔 지붕 위의 눈이 물방울이 되어 떨어지는 소리였다. 동시에 물이 가득 찬 양동이의 표면을 따라 또르르 흘러내리는 광경이 자동으로 상상되었다.

별것 아닌 과거의 기억이었지만, 마리엘라에게는 큰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율리안의 얼굴을 확인했다.

율리안은 침착하게 과녁을 응시하고 있었다.

고요가 그를 감싼다.

곧이어, 숨을 다듬은 그가 활을 들었다.

검무를 보는 듯한, 수려한 움직임이었다.

핑-!

화살이 율리안의 손을 떠났다.

그의 기다란 검은색 머리카락이 반동으로 나풀거렸다.

그는 점수를 확인하고 뒤를 돌았고, 먼 곳에서 그를 지켜보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찰나, 서로의 시선이 묶였다.

먼저 시선을 거둔 것은 율리안이었다.

‘하나. 딱 한 가지만 더 확인하자.’

그녀는 율리안을 따라 고개를 돌린 요제프에게 티 나지 않게 작은 인사를 건네며, 생각했다.

양동이에 물이 가득 찼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힘들게 양동이를 들어 뒤엎을 필요는 없다. 이제 필요한 것은 단 한 방울이다.

‘……단 하나의 빗방울.’

똑, 똑.

물방울 소리는 계속되었다.

* * *

같은 날 밤이었다.

마리엘라는 돌돌 말린 무언가를 옆구리에 끼고 왕자비의 처소를 찾았다. 그녀가 처소의 문을 열었을 때, 마리안은 침대 위에 누워 책을 들고 빈둥대고 있었다.

“장소를 정했어요.”

“정말?”

마리안이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마리엘라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옆구리에 끼고 온 것을 책상 위에 펼쳤다.

왕성의 설계도였다.

데이지와 마리안이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장소를 찾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에요. 기사들의 눈에 띄지 않고, 하녀들이 함부로 들락거리지 않으며-”

‘요제프와 율리안이 출몰하지 않고…….’

“혹시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해 도피로도 있어야 하죠.”

“응, 알았어. 네 고생은 잊지 않을게.”

마리안이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엘라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은 듯했다.

마리엘라는 단호하게 고개를 한 번 저어 보였다.

“수고로움을 알아달라는 말이 아니에요. 적발당하면, 당장은 도피로로 도망가 상황을 모면할 수 있겠지만, 두 번 다시는 같은 장소를 쓰지 못하니 더 조심하라는 뜻이죠.”

“그것도 알겠어. 절대 경거망동하지 않을게. 그래서 어딘데?”

여전히 마리엘라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휴. 마리엘라는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설계도 한쪽을 가리켰다.

“여기예요.”

장소를 확인한 데이지가 난색을 표했다.

“여긴…….”

마리엘라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음을 확신했다.

왕성 룩센투크에서 이보다 더 접근성이 좋은 곳은 없을 것이다.

‘은밀하면서도 접근성이 높은 곳. 신분이 낮은 자가 쉽게 오고 갈 수 없으며, 신분이 높은 자가 방문을 기피하는 곳.’

답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선왕 요하네스의 처소.

두 사람은 말없이 왕자비를 바라보았다. 마리안 역시 생각지 못한 장소에 당황한 기색이었다.

“너무……”

마리안이 말을 길게 끌었다.

아무리 좋은 장소를 물색해도 그녀가 반대한다면 물거품이 된다.

마리엘라는 무덤덤한 얼굴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재밌겠다!”

마리안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통속 소설 속 로맨스와 동일시하고 있었다. 당장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위험성을 단순히 사랑 이야기를 장식하는 스릴로 여겼다.

“날이 밝으면 미하엘에게 사람을 보내 새로 찾은 장소를 알려 주세요.”

“응, 응. 그래야지!”

밝게 대답하는 꼴이 어딘가 불안하다.

“당연히 직접 가시진 않으시겠죠?”

마리엘라가 그녀를 째려보며 물었다.

마리안이 시선을 피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

“아무나 보내면 안 되죠. 입이 무거운 자로 보내야 해요. 미하엘은 절 왕자비로 알 테니 제가 직접 갈 수는 없고, 왕자비 전하는 당연히 안 되고,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두 사람의 시선이 데이지에게로 향했다.

데이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들의 시선을 외면했다.

* * *

다음 날이었다.

메마른 나뭇가지 위로 둥그런 보름달이 대롱대롱 걸린 밤.

주인을 잃어 쓸쓸한 분위기가 감도는 선왕 요하네스의 처소에 인기척이 들려왔다.

“미하엘!”

“마리엘라!”

멀찍이 떨어져 두 사람의 감격스러운 재회를 지켜보던 마리엘라의 기분이 미묘해졌다.

얼굴도 잘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사랑스럽게 부르는 모습이 퍽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마리안의 속임수가 빚어낸 결과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기분이 이상한 것은 이상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손을 잡고 호들갑을 떨었다.

왕자비의 드레스를 입은 마리엘라가 하녀 복장을 한 마리안에게 다가가 핀잔을 줬다.

“조용히 해요. 누군가 여길 발견하길 원하는 건 아니죠?”

“헙!”

그 소리에 마리안이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았다.

마리엘라는 촛대를 들고 방 안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뭘까. 통로를 움직이는 비밀 장치가.’

그녀는 눈에 띄는 대로 다 건드려보았다. 책을 꺼내거나 밀어보기도 하고, 서랍을 열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달칵, 책장 옆 촛대를 돌리자 가까운 곳에서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책장을 슬쩍 밀어보았다. 아주 적은 힘에도 부드럽게 열렸다.

“…….”

그녀는 넋을 놓고 자신을 보는 연인들을 향해 룩센투크의 비밀을 소개해주었다.

“비밀통로예요. 왕이 가장 믿는 시종의 방과 연결되어 있을 겁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이곳으로 숨으세요. 하지만 통로 반대쪽으로 가지는 마세요. 이 밀회를 들키고 싶지 않다면 말이죠.”

둘 중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미하엘이었다. 주근깨가 돋보이는 열아홉의 기사가 그녀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왕, 왕자비 전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픽 웃고는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래요. 감사는 왕자비 전하에게 해야죠.”

“…….”

마리안이 민망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마리엘라는 들고 있던 촛불을 입바람으로 끈 뒤, 책장을 반대쪽으로 밀어 원래대로 해 놓았다. 그녀는 문제덩어리 왕자비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기사를 지나쳐, 문가에 위치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들고 온 책을 들었다. 달빛에 글자를 비추어 읽을 생각이었다.

“이야기 계속 나누세요. 전 여기서 시간을 보낼 테니.”

그 말을 기점으로 연인들의 닭살 돋는 대화가 다시금 시작되었다.

“세상에 미하엘! 얼굴이 반쪽이 되었어요.”

마리안이 미하엘의 양 뺨을 붙잡고 말했다.

마리엘라는 책을 읽다가 눈동자만 움직여 그의 얼굴을 확인해 보았다. 마리안의 말대로 어딘가 수척해 보이는 얼굴이다. 사랑하는 연인을 오랜 시간 보지 못한 탓인가 보았다.

‘첫사랑인가? 하긴, 열아홉이랬으니.’

순박한 노란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제이 도련님을 기다렸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비웃음은 아니었으나, 듣는 이의 기분에 따라 오해를 살 만한 태도였다. 다행히도 눈앞의 연인들은 서로를 애타게 쫓느라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맙소사, 릴리. 손이 상처투성이네요.”

자신의 뺨을 매만지던 마리안의 손을 보고는 미하엘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거요?”

마리안이 민망한 표정으로 손을 빼내려 했다. 마리엘라는 그녀의 손이 왜 저렇게 되었는지 아주 잘 알았다.

저건 미하엘을 주겠다고 손수건에 수를 놓았던 흔적이었다.

‘데이지가 하루 다섯 시간을 넘게 붙어 자수를 가르치려 했지만 실패했다지.’

마리엘라는 숨을 죽이고 마리안이 무슨 대답을 할지 지켜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흥미로움이 가득 담겼다. 그러다 눈동자를 굴리던 마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마리안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흑.”

갑자기 우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하녀 일이 고되다 보니.”

‘아이고야.’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는 표현이 모자랐다.

마리엘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왕자비님의 놀이 친구였는데…….”

미하엘의 고개가 마리엘라 쪽으로 돌아갔다. 그는 원망과 비난이 섞인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무표정으로 응수하는 마리엘라의 태도에 금방 꼬리를 말았다.

그의 품에 안긴 마리안이 자그마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는 잡일을 하러 온 하녀인걸요.”

참으로 가련하고 갸륵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

마리엘라의 입에서 기함하는 소리가 나왔다.

그녀는 오늘 마리안의 새로운 재능을 찾았다.

‘대체 그 잘난 능력으로 왜 시집을 가셨어요, 왕자비 전하. 바이올세네츠 국립 연극단이 필요로 하는 인재는 당신이 딱인데.’

마리안은 연기의 대가였다.

* * *

룩센투크에는 연무장이 총 세 개 있다.

검은 늑대 기사단과 율리안, 요제프 왕자 등 소위 말하는 ‘귀하신 분들’을 위해 마련된 제1연무장, 푸른 늑대 기사단과 붉은 늑대 기사단이 주로 이용하는 제2연무장 그리고 가장 세력이 약하다고 일컬어지는 하얀 늑대 기사단과 견습 기사들을 위한 공간인 제3연무장.

신입기사 미하엘은 제3연무장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7점, 8점, 6점…….

그의 궁술 실력은 검술만큼 뛰어나지 않았다. 미하엘은 입을 꾹 다물고 등 뒤에서 화살을 하나 더 뽑았다. 과녁의 정중앙을 응시하고 활시위를 당기려 할 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팡팡 쳤다.

같은 기사단의 선배들이었다.

“열정이 아주 불타오르는데? 화관을 얹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나 봐?”

덩치는 산만 한 남정네들이 개구쟁이 소년 같은 얼굴을 하고 미하엘을 놀려댔다.

“우리 막내한테 숨겨 둔 연인이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 아니었나요?”

“이름이…… 릴리라고 했던가?”

그는 부끄럽다는 듯 뒷목을 긁적였다.

“릴리는 애칭이고요, 본명은 마리엘라예요.”

“…….”

순식간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미하엘의 선배들은 저들끼리 눈빛을 교환했다.

미하엘은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했나 싶어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선배 기사 중 하나가 목소리 끝을 떨며 물었다.

“……마리엘라? 리덴부르크 출신의 하녀 마리엘라?”

“어,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침묵이 다시 한번 연무장을 덮쳤다.

이번에는 미하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사랑하는 연인에 관해서는 지나치게 용감해지는 면이 있었다.

이제 막 기사 작위를 받은 새파란 소년이 까마득한 선배들을 노려보며 대답을 종용했다. 하얀 늑대 기사단의 기사들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피하며 말을 흐렸다.

“어…….”

결국 보다 못한 부기사단장이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야…….”

조심스레 이어지는 부기사단장의 말. 그 말이 순진한 소년 미하엘을 미쳐 날뛰는 말처럼 만들었다.

미하엘은 단번에 제3연무장을 빠져나왔다.

그의 목적지는 단 한 곳. 요새 들어 율리안이 주둔하다시피 한다는 제1연무장이었다.

제1연무장은 제3연무장의 반대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복잡하고 기다란 룩센투크의 복도 위로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딜 때마다 하얀 늑대 기사단원들이 해주었던 말이 머릿속에 울렸다.

‘그 하녀 유명하지. 예쁘장한 얼굴도, 텃세에 절대 굽히지 않는 성미도, 왕자비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도 유명하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바이르 공작께서 마음에 품고 있는 하녀라는 소문이지.’

‘너도 들어 본 적 있을걸?’

‘율리안 폰 바이르의 공작의 하녀와는 접촉하지도, 눈을 마주치지도, 말을 섞지도 말라.’

‘서, 설마요…….’

미하엘이 몸을 뒤로 빼며 부정하자, 바로 반박이 날아 들어왔다.

‘설마는 무슨. 그 하녀의 이름이 바로 ‘마리엘라’야. 갈색머리에 하얀 피부, 커다란 눈을 가진 리덴부르크 백작가 출신의 하녀.’

미하엘은 한달음에 제1연무장으로 달려갔고, 막 연무장을 빠져나가는 율리안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그의 등 뒤로 한 무리의 추종자들이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곳에 마리엘라는 없었다. 그 시각 그녀는 마리안의 곁에 붙어서, 미하엘을 겨울 사냥대회에 불참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설득하는 중이었다.

미하엘 슈리츠는 복도 끝에 우두커니 서서 멀어져가는 율리안을 응시했다. 기사인 그에게 율리안은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존재였다. 검술로 유명했던 바이르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임과 동시에 대륙 유일무이의 소드 마스터였으니 말이다.

겨우 왕성 기사단으로 들어온 신입 기사에게 율리안은 우상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가볍게 뛰어넘는 감정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미하엘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멀어져가는 공작이 과녁의 정중앙처럼 느껴졌다. 그는 두려움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모르는 체하고는 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바이르 공작님!”

미하엘의 목소리는 화살처럼 날아가 공작에게 꽂혔다.

율리안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 자신을 호명한 자를 쳐다보았다. 그의 모든 행동은 천천히, 부드럽게, 또 어떠한 적의나 악의 없이 이루어졌지만, 미하엘은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율리안이 의아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날 불렀나?”

“맞, 맞습니다.”

미하엘의 목소리가 떨렸다.

율리안이 그에게 다가왔다. 미하엘의 얼굴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얼굴 위로 내비친 두려움을 비유하는 것이 아니었다. 율리안의 커다란 키가 그의 얼굴에 어둠을 드리우게 했다. 미하엘의 키는 또래에 비해 작은 편이 아니었지만, 율리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두꺼운 검은색 망토를 걸친 율리안의 모습은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마왕을 연상케 했다.

“왜 불렀지?”

“저, 저는…….”

미하엘은 등 뒤의 털이 바짝 서는 것을 느꼈다. 늑대를 마주한 것 같은 공포가 그를 감쌌다.

도망칠까?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 진주 같은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던 사랑하는 연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고, 그의 내면에서 곰 같은 힘이 솟아났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 용기를 쥐어짜냈다.

“저, 저는, 꼭 겨울의 기사가 될 겁니다!”

사냥대회에서 꼭 율리안을 이기겠다는 선언이었다.

발칙한 선전포고.

율리안을 따르는 자들이 그를 비웃었다.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신입 기사의 얼굴을 붉게 달아오르게 했다.

미하엘은 덜덜 떨리는 몸 상태를 숨기려 하며 율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몸이 굳었다.

“…….”

율리안은 말없이 어린 기사를 응시하고 있었다.

미하엘이 결의에 찬 눈으로 말했다.

그에게서 죽을 걸 알면서도 마녀를 향해 뛰어드는 성기사와 같은 기세가 엿보였다.

“그래서, 꼭 제 아가씨께 ‘눈의 화관’을 씌워드릴 겁니다. 실력은 한참 모자랄지라도, 사랑하는 마음만은 뒤처지지 않으니까요.”

무슨 말을 하건 율리안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그렇군.”

그는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뒤를 돌았다. 다소 성의 없는 태도였다.

율리안의 추종자들이 그를 따랐다.

저벅저벅.

미하엘의 귓가에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율리안이 멀어져가는 소리였다.

무인들은 모두 호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가끔 ‘기사도 정신’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핑계로 검을 꺼내 들고 결투를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들은 지거나 죽을 것을 알고 있을 때도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순박하고 순진한 소년, 미하엘 슈리츠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었다. 바로 지금이 그러했다.

“마리엘라에게요!”

그가 율리안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미하엘의 도발은 성공했다. 모든 부분에서 무감하기로 유명한 율리안의 발걸음을 멈춰 서게 했으니.

* * *

그다음 날이었다. 평소처럼 율리안의 처소에서 잡일을 하고 있는데, 그가 불쑥 말을 꺼냈다.

“인기가 많더군.”

문득 생각나서 뱉어봤다고 하기엔 너무 갑작스러웠다.

마리엘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누가요? 공작님이요? 뭐, 그럴 것 같긴 하다만 굳이 그걸 제게 말씀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제가 공작님의 인기를 알아 무엇에 쓰죠.”

“아니, 나 말고.”

“?”

그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실제로도 무슨 대화를 하는 건지 이해가 잘 안 가긴 했다.

율리안은 그 태도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읽던 책을 가볍게 책상 위로 던졌다.

“아니다. 됐다.”

“?”

마리엘라의 갈색 눈동자에는 여전히 물음표가 가득했다.

그는 책상에 턱을 괴고 불만 많은 얼굴을 지었다. 그러더니 조심스레 그녀를 떠보았다.

“미하엘이란 기사를 아나?”

“…….”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진심으로 짜증 난다는 감정을 드러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안이 두 명으로 늘어났어.’

* * *

사냥대회가 하루 남은 밤이었다.

선왕 요하네스의 처소에 마리엘라와 마리안, 미하엘이 모였다. 마리안과 미하엘은 처소 깊숙한 곳에 있었고, 마리엘라는 문가에 가까운 소파에 앉아 보초를 서고 있었다.

오늘의 만남은 평소와 달랐다. 사랑에 감춰져 있던 잔혹한 현실을 고지할 시간이었다.

마리안이 손 등으로 미하엘의 뺨을 매만지며 말했다.

“부탁이 있어요, 내 사랑.”

“무슨……부탁이요?”

미하엘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 모습에 마리안의 마음이 같이 흔들렸다. 그녀는 휘청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뱉어냈다.

“사냥대회에 출전하지 않았으면 해요.”

평소였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을 미하엘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와 마리안의 사이에는 율리안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있었고, 그는 자신이 공작을 이길 수 없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마리안의 말을 들은 그가 즉각적으로 몸을 틀었다. 마리안이 다급히 그를 붙들었다.

“사정이 있어요. 왕자비……님과 얽힌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룩센투크가 겉으로 보기에는 잔잔해 보여도, 그 밑에서는 아주 치열하게 정쟁 중인 건 아시죠?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

그는 입을 꾹 다물고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마리안이 그녀답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다독였다.

“많이 서운한가요, 내 사랑.”

“그게 아니에요.”

“그러면요?”

“…….”

미하엘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미 그의 머릿속은 바이르가 점령하고 있었다.

그의 빚어 놓은 것 같은 외양과 태산 같은 굳건함, 엄청난 명예, 지위, 재산 등이 쉴 새 없이 떠올랐다.

볼품없는 영지를 지닌 남작가의 셋째 아들인 미하엘 슈리츠는 절대 그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바이르 공작은 릴리를 정부로 둘 사람이 아니야.’

그는 슬픈 눈으로 연인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내가 떠나는 것이 그녀를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그가 체념하고 있을 때였다.

마리안이 발뒤꿈치를 들어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

“내게 속마음을 털어놓아요, 미하엘. 말을 해주지 않으면 난 아무것도 몰라요.”

그 가벼운 입맞춤이 그의 두려워하는 마음을 따듯이 덮어 주었다.

미하엘은 크게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릴리, 혹시 바이르 공작과…….”

“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이름에 마리안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그리고 그때였다.

“쉿.”

문가를 지키던 마리엘라가 다급히 그들을 향해 뛰어 들어왔다.

저벅저벅.

멀지 않은 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났다.

“통로로 숨어요, 빨리!”

마리엘라가 비밀 통로를 열었다. 두 사람은 황급히 그 안으로 숨었다. 마리엘라는 남아 있는 두 사람의 흔적을 지우느라 미처 숨지 못했다. 세 사람은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그냥 지나가기를, 제발.’

그러나 발걸음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이윽고 문이 열렸다.

“이런.”

달빛이 침입자의 후광을 비췄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 생각지 못한 사람이 있네.”

침입자의 이름은 요제프였다.

* * *

마리엘라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요제프는 현재 가장 조심해야 하는 두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가 굳어 아무 말 못 하는 동안 요제프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으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여긴 무슨 일이지? 그것도 그런 드레스를 입고.”

그의 말을 듣고 뒤늦게 자신이 마리안의 드레스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냈다. 모시는 윗사람의 드레스를 입고 돌아가신 선왕의 처소에 숨어들어 책을 읽는 하녀.

누가 봐도 이상한 모양새였다.

‘이럴 때일수록 뻔뻔하게 나가야 해.’

마리엘라는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냥 좀 궁금해져서요.”

“뭐가?”

“유리 구두를 신은 재투성이 아가씨의 심정이요.”

대충 듣고 흘려 넘긴다면 별것 아닌 말이지만, 곰곰이 곱씹어 본다면 꽤 도발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재투성이 아가씨가 유리 구두를 신고 선 곳은 왕자의 옆자리니까.

요제프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납득이 안 가는 얼굴이었으나, 기분만은 좋아 보였다.

“너답지 않은 모습인데, 마리엘-”

“일단, 나가서 대화할까요? 정원을 걷고 싶네요.”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려 하자, 그녀가 얼른 말을 끊었다. 비밀 통로에 숨어 있을 미하엘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문가와 비밀통로 사이는 거리가 꽤 되었다. 마리엘라는 자신과 요제프의 대화가 비밀통로에 숨은 두 사람에게까지 들리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혹시 몰랐다. 그녀는 최대한 조심하고 싶었다.

“갑자기?”

요제프는 오늘따라 지나치게 적극적인 마리엘라의 태도가 의아한 모양이었다.

“얼마 없는 기회니까요. 보세요, 이렇게 베일을 쓰면.”

마리엘라가 마리안의 얼굴을 가리던 검은 천을 집어 들었다.

마리안 왕자비와 왕자비의 하녀 마리엘라. 두 사람은 얼굴 생김새뿐만 아니라 키와 몸집까지 흡사했다. 옷을 비슷하게 입으니 누가 누구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마리엘라가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아무도 우릴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이건 왕자비의 드레스니까요.”

요제프는 말없이 그 모습을 응시하다가 방긋 웃었다.

“그럼, 좋지.”

그가 자연스레 팔꿈치를 내밀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거절하거나 면박 주지 않고 말없이 그에게 팔짱을 꼈다. 그와 이 이상 가까워지는 것은 곤란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등 뒤에 시선을 넘기지 않으려 조심하며 선왕의 처소를 빠져나왔다.

* * *

마리엘라와 요제프는 한참을 말없이 정원을 걸었다.

마리엘라의 기분이 심란했다. 드레스를 입고 요제프와 다정히 걷고 있는 모습이 과거의 그녀가 그렸던 제이 도련님과의 미래와 유사했다.

지금은 꿈꿀 수조차도 없는 환상이다.

비슷한 감정을 느낀 건지 요제프 역시 말이 없었다. 침묵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것 같자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요즘 연무장에 자주 모습을 보이시던데.”

“아아.”

“제가 들었던 왕자님의 말과는 다르네요.”

“무슨 말을 했었지, 내가?”

“겨울의 기사 자리에는 관심도 없다고요.”

“흠.”

그가 턱을 매만지며 기억을 더듬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렇게 궁술 연습에 열성이시죠? 당신의 ‘연약한 왕자님’ 모습까지 버려가면서.”

진심으로 궁금해서 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냥 이 순간을 적당히 넘길만한 이야깃거리가 필요했다.

그녀는 요제프가 우스갯소리를 하며 웃어넘길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직접적인 표현들로 그녀를 당황케 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지만, 모든 것을 투명하게 내비치지는 않았다. 그가 보여주는 마음은 언제나 장난이라는 방패와 함께했다. 마리엘라는 이번에도 요제프가 비슷한 반응을 내보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녀의 예측은 빗나갔다.

“마리 아가씨.”

팔짱을 풀어낸 그가 두세 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것은 마치 그녀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요제프 왕자의 이미지와 선을 긋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무어라 대꾸하기 전에 그가 먼저 반응했다. 그는 말투와 얼굴색을 싹 바꾸고는 처음 보는 사람을 연기했다.

다정하고 수더분한 제이 도련님도, 오만하고 깐깐한 데르샤바크 왕자도 아닌 생판 다른 사람. 그러나 완전히 거짓된 모습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것은 요제프의 내부에 있는 수많은 본색 중 하나처럼 느껴졌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부드럽고 우아하게 인사를 건넨 뒤, 자리에서 일어나 싱긋 웃었다.

그녀는 그를 보며 특정 인물을 떠올렸다.

‘미하엘.’

지금 요제프가 보여주는 행동은 기사를 닮았다. 이제 막 기사 작위를 받은 정의감과 기사도 정신이 투철한 젊은 기사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어쩌면 이것이 아카데미 재학 시절의 요제프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짧게 했다.

“아가씨의 기억은 반쪽짜리예요. 그날 밤 난 겨울의 기사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

“다른 여자 머리 위에 올라갈 화관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지.”

요제프가 얼굴색을 갈아 끼었다. 데르샤바크 왕자의 퉁명스러움으로. 그는 마리엘라의 머리 위를 바라보더니 픽 웃었다.

“다른 여자 머리 위에 올라갈 화관과 마리엘라 호반의 머리 위에 올라갈 화관은 의미가 완전 다르니까.”

마리엘라는 입을 다물었다. 방금 한 말의 의미가 뭐냐 꼬치꼬치 캐물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딴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그와 정리해 두어야 할 게 있다는 걸 깨달았다.

“부탁이 있어요.”

“뭔데?”

“앞으로는, 절 마리라고 불러주셨으면 좋겠어요.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만 사용하지 말고, 항상 그렇게 불러주세요.”

미하엘을 염두에 둔 요구였다. 어쩌다 미하엘이 요제프와 그녀의 대화를 목격하게 되더라도, 호칭이 미리 정리되어 있다면 둘러대기 편하니까.

그녀의 말에 요제프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마리안이 싫어할 텐데?”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마리안은 이미 ‘마리 아가씨’에 담긴 의미 따윈 잊어버렸으니.”

‘정확히는 사랑놀이에 정신 팔린 거지만.’

갑자기 요제프가 마리안에게 눈에 띄게 싸늘하게 굴어도, 마리안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할 것이다. 이제 그녀의 관심사는 미하엘이지 요제프가 아니었으니까.

“…….”

그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깊은 녹색 눈동자 속에 둥그런 보름달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연못 수면 위로 밤하늘이 비치는 것처럼.

“왜 ……그렇게 보시죠?”

당혹감을 감추지 않은 그녀의 말에, 그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걸 내 마음대로 받아들여도 되나 싶어서.”

“받아들이고 말고 할 게 뭐 있어요, 그냥-”

그 순간이었다.

요제프가 성큼 다가와 베일을 넘기고, 입을 맞추었다.

입술과 입술을 맞댄 것은 아니었고, 볼에 가벼운 미온만 남긴 버드키스였다. 어린애 소꿉장난 같은 스킨십이었으나, 마리엘라의 심장은 세차게 뛰었다. 순간의 로맨스에 크게 휘청거렸다. 물론 바로 중심을 잡긴 했지만.

요제프가 손끝으로 제 아랫입술을 가볍게 훑었다.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하는 말이 미묘하게 자극적이었다.

“짜릿하네. 고작 입맞춤 따위에 이렇게 동할 줄은 몰랐는데.”

그녀는 똑같이 비뚜름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제 손등에 입맞춤 한 번 하고자 하는 이들이 베르단 내에 널린 건 아시죠?”

마리엘라의 너스레에 요제프가 씩 웃었다.

“알다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그녀에게 향해 있지 않았다. 그가 바라보는 정확한 지점은 마리엘라의 등 뒤. 정원 너머로 보이는 서쪽 별관이었다.

별관 꼭대기, 유독 밝은 창을 가만히 응시했다.

갑자기 창에 커튼이 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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