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균형 (11/21)

9. 균형

왕성에서 공문이 내려왔다.

피에르에서 벌어진 교황 습격 사건과 관련해 국가 보안을 강화할 계획이라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왕가의 인증을 받지 못한 외국인은 주어진 시간 내에 베르단을 떠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하는 내용이었다.

공문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 외지인들은 일주일 안에 보증인을 대동하여 왕가의 인증을 받으라고 적혀 있지만, 이는 그저 쓰여 있는 말일 뿐 외교관과 그들의 가족을 제외하고 쉽게 허가증을 내주지 않을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사실상 추방령이었다.

“백작님, 큰일 났습니다!”

공문이 내려온 그 날 아침, 렝 백작의 수하가 헐레벌떡 그의 방으로 달려와 소리쳤다.

그 소리에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던 남자의 고개가 돌아갔다.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한 사람 마냥 창백한 안색과 깔끔하게 올린 머리 짙은 밤색 머리카락. 멀끔한 외모와 중후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남자의 이름은 아서 렝, 대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렝 상단의 수장이었다.

렝 백작은 소란을 피우는 제 수하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 겉옷을 마저 입고, 상의 단추를 마저 잠그며 말했다.

“메를린 앞에서 소란피우기는. 내 유모가 날 아직 열두 살 꼬맹이로 보는 것은 자네의 탓이 커, 칼.”

백작의 말에 칼이라 불린 남자의 고개가 돌아갔다.

문가에 바짝 붙은 소파 위에 단아한 미소가 아름다운 중년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여인의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는 희끗희끗한 흰 머리가 하나둘씩 보였다.

칼은 얼음처럼 굳어 여인에게 인사했다. 주인의 유모에게 대하는 것치고는 다소 깍듯한 대우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메를린 님.”

“어서 오세요, 칼.”

메를린이 상긋이 웃으며 그를 반겼다.

“쯧.”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작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벼운 힐난 속에 신경질적인 날카로움이 깃들어있었다.

칼이 말없이 입을 다물 때, 메를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렝의 옷매무새를 마저 가다듬어 주며 그의 주의를 돌렸다.

“걱정할 것 없단다, 아서. 너는 내게 영원히 열두 살 어린아이일 테니. 그나저나 오늘도 약속을 어겼구나.”

“약속이요? 무슨 약속 말입니까.”

그가 익살스러운 얼굴과 함께 슬그머니 발뺌을 했다.

“하루 다섯 시간은 숙면을 취할 것. 집사 말을 듣자 하니, 오늘 아침 6시에 침실로 향했다던데. 지금은 아침 8시고.”

“저런, 침실에 또 쥐새끼가 들락날락했나 보군요. 고양이를 하나 키워야겠어요.”

뻔뻔스러운 대답에 메를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말 돌리기는. 언제까지 그렇게 열두 살 아이처럼 굴 속셈이니.”

“유모도 참.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것은 어른의 권리랍니다.”

“나이가 들더니 잔머리가 늘었구나. 그렇다고 곱게 물러날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메를린은 이 저택 안에서 가장 온화한 말투를 쓰는 존재로 유명했지만, 성격마저 그렇지는 않았다.

그녀는 강철보다 강한 여자로, 하고자 하는 말은 꼭 하며 지키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지켜내는 사람이었다.

이십여 년 전, 전대 백작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하여 저택의 모든 것이 와해할 뻔할 때 그것을 지켜낸 것도 그녀였고, 십칠 년 전, 성마전쟁으로 인해 랭 백작이 징집되었을 때,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그를 기다린 것도 그녀였다.

열넷에 모시던 아가씨를 따라서 이곳으로 넘어온 렝글루드 출신의 하녀 메를린은 어느덧 오십을 훌쩍 넘은 중년의 여성이 되어 아서 렝의 어머니 겸 이곳의 안주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둘의 나이 차이는 열다섯에 불과했지만, 메를린은 그를 자식처럼 여겼다.

“밀린 업무가 많아 그랬어요, 메를린. 일을 빨리 끝내고 두어 시간 뒤에 다시 눈을 붙일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네 약속은 거짓말이 아니길 바란다, 아서.”

믿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렝 백작은 그녀의 말을 잘 알아들었으면서 아닌 척 시치미를 뗐다.

“그럼요. 설마 누가 감히 유모에게 거짓을 고한답니까. 팔팔한 제 걱정은 그만두시고 돌아가 쉬세요, 메를린. 그래야 저도 빨리 일을 끝마칠 수 있죠.”

“확인하러 다시 오마.”

그의 유모는 다정하지만, 단호한 말과 함께 방을 나섰다.

메를린이 떠난 자리. 렝 백작은 날 선 눈으로 자신의 수하를 응시했다.

칼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시급한 일이라도 메를린이 있을 때는 입을 다물도록 해.”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왕성에서 보낸 공문 때문인가?”

칼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쯧. 그런 시답지 않은 일에. 렝 백작이 혀를 찼다.

“왕가의 인장을 받으러 백방으로 수소문해봤지만 통하지 않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어찌할 게 뭐가 있나. 버려야지.”

무심한 어조에 칼의 고개가 올라갔다.

“예?”

“피에르에서 교황이 습격당한 것이 문제였다면, 그날 바로 대책을 세웠겠지. 인제 와서 그런 공문이 내려온 것이라면 속이 뻔하지. 왕성의 누군가가 일부러 훼방을 놓은 거야.”

“브랫 백작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사건의 뒤에 누가 있든 별 관심이 없단 투였다. 칼은 백작의 의중을 알 수 없어 조급해졌다. 아니 그보다 상단에서 안정적으로 꾸려나가고 있는 일을 이렇게 허무하게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컸다.

“그렇다면 일이 잠잠해질 때까지 장인들을 피에르 수도 지점으로 옮기면…….”

렝 백작이 칼의 말을 끊었다.

“자네, 버리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나? 그건 하던 일을 그만두고 없었던 일로 하자는 뜻이네. 한 템포 쉬어가자는 말이 아니라.”

“하지만 이건, 앞으로 저희 상단의 주력 상품이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충성심이 높고 순종적이기로 유명한 칼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물러설 수 없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백작의 선택에 반론을 들었다. 렝이 서류 너머로 그를 응시했다.

“잠재력일 뿐이지. 그러니 지금 접어야 해. 앞으로 흑마법사 관련된 일이 터질 때마다 이런 식으로 나올 텐데, 그때마다 가능성 운운하며 손해를 감내해낼 건가?”

위엄이 가득한 두 눈동자가 칼을 향한다. 칼의 손바닥에 땀이 뱄다. 동시에 그에게 오기가 생겼다.

“지금부터 다른 대책을 마련해내면 되는 일 아닙니까.”

“다른 대책 뭐? 브랫 백작처럼 정계에 손을 뻗어 보자고? 정치는 장사보다 변수가 많아. 브랫 백작이 지금 얼마나 난처한 상황에 처했는지 알면 그런 말은 안 나올 텐데.”

“…….”

더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칼은 장사에 뼈가 굵은 사람이었지만, 정치에는 까막눈이라 보아도 좋았다. 그리고 그 까막눈의 눈에도 현재 베르단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쯤은 보였다.

있는 것이라고는 사냥터뿐인 시골에서 올라왔다는 왕자비가 모두를 좌우하고 있다지. 모두가 그녀의 편이 아니고, 그녀 역시 모두의 편이 아니라고 했다.

짧은 침묵.

아서 랭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서류를 마저 읽으며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켰다.

“긴말하지 않겠다. 일주일 안에 피에르에서 넘어온 장인들과 관련된 사업 모두 정리해.”

“그렇다면 보석 세공만이라도…….”

백작은 끝까지 단호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구멍 난 주머니에 술을 채우는 취미는 없으니까.”

* * *

공문을 보낸 지 수일이 지났다.

요제프는 마리엘라를 불러 현 상황을 일러주었다.

“렝 백작이 관련된 사업을 모두 정리했어.”

현실을 입에 올렸을 뿐인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갑작스레 밀려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매만지는 그의 앞에서 마리엘라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주춤한 게 아니라 영영 접었다고요?”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요제프 역시 백작의 선택이 이해되지 않았다.

모든 준비를 다 끝내 놓았다.

그가 자주 가는 곳에 자신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수하들도 심어 놓았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왕자의 연줄을 생각보다 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텐데 왜 저런 짓을 했을까.

“그렇대.”

“…….”

이번에는 마리엘라의 골이 아팠다.

대체 렝 백작이라는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아니, 질문의 방향이 잘못되었다.

‘백작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그녀는 그동안 이중 첩자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요제프에게서 듣고 건네받은 모든 정보를 율리안에게 숨김없이 건넸다는 뜻이다.

그런데 율리안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녀와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다. 그는 그녀를 한배를 탄 동료보다는 자신의 말에 복종해야만 하는 하수인처럼 부렸다. 주도적인 인생을 살아왔던 마리엘라에게 이만큼 답답한 일이 없었다.

율리안은 모든 것에서 의뭉스럽게 굴었고, 덕분에 그녀는 살얼음판 같은 왕성을 더더욱 살금살금 걸어야만 했다.

‘차라리 렝 백작이 모습을 드러내면 뭐든 더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욕망이 드러나지 않는 자는 이래서 피곤하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 후 바로 질문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글쎄.”

왕자가 방긋 웃었다.

“만약 이게 영토 전쟁이었다면 계속 공격했을 거야. 보통 이렇게 빠르게 도망친다는 건 두 가지 상황을 의미하니까. 하나, 적은 우리에게 맞설 힘이 없다. 둘, 적에게 모든 걸 뒤집을 만한 수가 있고, 그걸 위해서 그들은 우리를 특정 장소까지 유인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걸 역으로 이용했겠지. ……하지만, 이것은 갖거나 빼앗기거나 하는 싸움이 아니라 회유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이니.”

흠.

그가 힘을 빼고 턱을 괴었다.

자꾸 말을 질질 끄는 그의 어법에 안달이 난 것은 마리엘라 쪽이었다.

“그만두실 건가요? 다른 후보를 물색해볼까요?”

“아니, 그 반대로 갈 거야. 함정이든 뭐든 끝까지 가주지. 어차피 그쪽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모를 테니 상관없어. 미친개처럼 물어뜯어 그가 머리를 조아리고 내 발밑에 서게 할 거야.”

‘글쎄. 과연 모를까.’

마리엘라는 모든 것에 회의적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요제프는 혼자 골똘히 생각해 보다가 아이디어를 냈다.

“불안감을 조성해보자. 혹시 모를 위기 상황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나라 밖에서 들여오는 철기를 잠시 압수하면 어떨까.”

그녀가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

“귀족파의 반발이 심할 텐데요. 괜히 응집력만 높여 줄 수 있어요. 그건 너무 위험해요.”

“마녀 핑계를 대면 되지. 그들이 지겹도록 우려먹었던 바레뎃샤를 이용하자고.”

총총총.

그가 들고 있던 체스 말 하나를 장난감 병정놀이를 하는 것처럼 가지고 놀았다. 그가 쥐고 있는 나무 조각의 이름은 나이트였다.

‘렝 백작이군.’

그녀는 나이트 밑바닥에 적힌 이름이 무엇일지 확신했다.

“검, 칼, 배를 정박할 때 쓰는 닻까지. 국경을 건너 들어오는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두 왕성 창고 안에 넣어둬야겠어. 교황 습격 사건으로 발발할지 모르는 4차 성마전쟁을 대비해서 말이지.”

요제프가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다음 계획을 선포했다.

승리를 확신하는 얼굴.

마리엘라는 그의 당당한 모습이 뒤집히는 순간을 예측해 보았다.

모든 것이 무산되고 베데르가 재상이 될 때 그는 분노할까, 황망해할까, 두려워할까.

‘부디 무너지기는 않기를.’

그녀는 그가 단단한 심지를 가진 사람이기를 희망했다.

그것은 배신자가 가지는 일말의 양심이자, 최후의 뻔뻔함이었다.

* * *

첫 번째 공문으로 렝 백작의 상단이 발칵 뒤집힌 지 겨우 열흘이 지났다. 렝 백작이 피에르의 장인들과 관련된 사업을 완전히 정리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 번째 공문이 내려왔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교황께서 무사 귀환하시는 그날까지 나라 밖에서 수입해오는 모든 철기를 임시로 국가가 보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칼은 또 헐레벌떡 백작의 침실로 달려갔다.

아서 렝 백작은 제 오른팔의 설명을 들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쪽에서 재밌는 게임을 시작하는군.”

첫 번째 공문에는 긴가민가했던 렝 백작은 두 번째 공문을 보고 확신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움직여 이득을 취하려 한다.

‘정확히 누가 그러는 건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내려면 조금 더 기다려 봐야겠지만.’

렝 백작은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두꺼운 벨벳 커튼 때문에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서재.

그곳에서 눈을 감고 있는 창백한 피부의 퀭한 눈매의 남자. 얼핏 보면 동화 속 여자들을 잡아가 피를 빨아 먹는다는 흡혈귀 같은 모습이었다.

그의 눈가에 서린 근심인지 짜증인지 알 수 없는 찌푸림만이 그를 사람답게 보이게 했다.

렝 백작은 생각했다.

이것은 알력 싸움이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렝 백작가의 전쟁.

적이 원하는 것은 그가 예측한 것보다 더 거대하고 깊숙한 무언가 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우회적으로 접근할 리가 없다.

그는 고민에 빠졌다.

무릎을 꿇고 상대가 원하는 도구가 되어 줄 것인가, 끝까지 버텨 상대를 꺾어낼 것인가.

“흠…….”

아서 렝이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신음을 뱉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와 그에 따를 것으로 예측되는 결과물들을 하나하나 나열해보던 그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가 자신의 수하에게 물었다.

“현재 국고에 압수당한 품목들이 무기에 사용될 수 있는 금속들이라고 했나?”

“예. 검이나 화살촉, 창 같은 무기류뿐만 아니라 촛대나 작은 동상 같은 것들까지 모두 포함된다고 하더군요.”

“그래.”

렝 백작은 말없이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칼은 그가 공문을 무를 방법을 고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렝 상단의 도움을 받은 자 중, 룩센투크에 입성할 수 있고, 정책을 뒤집을 수 있는 권력자들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우리 백작님이 나서는 것을 싫어하셔서 그렇지, 마음만 제대로 먹는다면 정계의 판도를 뒤집을 수 있을 정도의 거물이시지.’

어쩌면 지금이 바로 렝 상단의 어마어마한 재력를 바탕으로 정계에 입성할 적기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펼쳐질지도 모르는 거대한 미래를 생각하며 긴장한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렝 백작의 대답만 기다렸다.

그러나 렝 백작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의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접도록 하지.”

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난번처럼 쉽게 접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한 달도 되지 않아 모든 사업을 접어야 한다고요!”

그의 반발에도 렝 백작은 평온했다.

“덩치가 클수록 넘어지기 쉬운 법이야. 우린 잔가지가 너무 많아. 날을 잡아 가지치기를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 마침 하늘이 시기를 정해 줬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백작님!”

“칼, 렝 상단의 주인은 나야. 또박또박 말대꾸할 시간이 있다면 빨리 나가 일을 서둘러줬으면 좋겠는데.”

“일꾼들이 난동을 피울 겁니다!”

“그러든지 말든지.”

그가 품 안의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체크했다.

“열두 시간 준다. 서둘러.”

“진짜 너무하십니다!”

칼은 속으로 화를 삭이며 백작가의 서재를 빠져나왔다.

* * *

늦은 밤이었다. 요제프가 오랜만에 마리엘라의 방을 방문했다. 렝 백작과 관련된 소식을 전달해주기 위함이었다.

“관련 사업을 철수할 준비를 한다더군.”

마리엘라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또?”

요제프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끝까지 가보자는 거지.”

탁, 탁.

왕자는 손 위의 작은 공을 천장을 향해 던졌다 받는 것을 반복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손장난은 그가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쉬운 상대는 아닐 테지만, 어려운 상대도 아닐 것이라고 예상했던 아서 렝.

그는 지금 왕국의 단 하나뿐인 왕자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래서 내가 또 다른 수를 써 놨어.”

요제프의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가 오기로 번뜩였다.

“지금 아샤칼 서쪽 지역에 전염병이 유행 중이거든. 건강한 이들이라면 감기처럼 잠깐 앓고 지나갈 병이지만, 노약자에게는 치명적이지.”

마리엘라가 잠시 생각해보다가 물었다.

“피에르 서쪽에서 유행한다는 전염병과 렝 상단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죠?”

“처음에 렝 상단이 무엇으로 이 나라에 자리 잡았는지 생각해봐.”

그녀는 기억을 더듬었다.

말년에 노름에 빠져 전 재산을 탕진한 아버지 때문에 백작 작위와 건강한 몸뚱이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아서 렝.

그는 잡일과 용병 생활로 밑천을 모아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자잘한 성공과 큰 실패를 반복하던 그를 지금 이 자리까지 올려 준 것은 원단 사업이었다.

렝 상단이 피에르에서 수입해오는 화사한 꽃무늬 패턴의 원단은, 합리적인 가격과 가격 대비 괜찮은 품질로 입소문을 탔다.

그의 상단에서 수입해 온 원단은 평민들에게는 특별한 날을 위한 드레스를 만들어 입을 만한 고급 옷감으로, 귀족들에게는 테이블보나 커튼처럼 한철 기분 내기 좋은 인테리어용 천으로 각인되었다.

평민과 귀족, 전혀 다른 두 시장을 사로잡은 렝 상단은 원단 사업으로 반응을 얻은 시기를 기점으로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왜?’

마리엘라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연관성을 도무지 모르겠는데요.”

“아, 내가 중요한 걸 말 안 해줬군.”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의미 없이 혼자 공을 던지고 받던 요제프가 손장난을 멈추고 마리엘라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비밀스러운 것을 공유하듯 작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병에 걸린 환자 몇을 피에르와 맞닿은 국경 지대 쪽으로 옮겨 놓았지. 렝 상단이 원단을 실어 나르는 길목에 말이야. 그들이 사용했던 물건 몇을 천 사이사이에 끼워 넣기도 했고.”

“…….”

마리엘라가 말없이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병이 퍼지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그가 싱긋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대화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초여름, 생장하는 어린잎 마냥 상큼하고 싱그러운 모습이라고 칭송할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난 길어야 2주라고 봐.”

마리엘라는 다시금 요제프의 본성을 깨달았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그녀는 자신의 주변에 정상적인 도덕관념을 지닌 자가 없음을 한탄했다.

겨우 계획 몇 개를 주워들었을 뿐인데, 벌써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 * *

베르단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렝 상단의 물건을 구입하는 이는 모두 며칠 내로 열병에 시달리다가 픽 쓰러져 명을 달리하게 된다는 소문이었다.

소문을 접한 칼은 크게 당황했다. 유언비어였지만 그렇다고 마냥 가볍게 여길 수만은 없었다. 주요 거래처 고객 다섯이 며칠 새에 비슷한 증상으로 귀천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이상함을 느낀 칼이 최근 렝 상단의 물건을 구입한 구매자들을 무작위로 선정해 그들의 근황을 쫓았다. 놀랍게도 열 명 중에 한두 명꼴로 집안에 열병 환자가 발생한 것으로 밝혀졌다.

칼은 백작을 찾아갔고, 백작은 긴급회의를 열었다.

“아직까지 정확한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특정 상품 때문에 발생한 알레르기성 증상이라고 하기에는 근 십 년 동안 멀쩡히 저희 제품을 사용해 오던 고객들에게도 병세가 보여서…….”

“그뿐만 아닙니다. 상단의 일꾼들도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고 있어요.”

“정확히 무슨 일을 하던 자들이지?”

“피에르에서 원단 수송 업무를 하던 이들입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그래요.”

“거기서 문제가 발생한 거로군.”

“정말 저주일까요?”

“마녀들을 깨끗이 처리한 것은 우리 베르단뿐이지 않습니까. 피에르나 아샤칼에 잔존 세력이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부하들의 말에 렝 백작이 코웃음 쳤다.

“그럴 리가. 걔넨 돈 많고 시간 남아돌 때도 그 짓거리는 안 했어. 첩첩산중에 숨어 목숨이라도 겨우 부지하는 인생들인데 무엇이 지루해 그딴 짓을 벌이나? 경거망동하지 말고 진상조사나 시작해. 접촉이나 호흡으로 전염되는 병이라고 확정 짓고 대책을 강구하지. 베르단의 이름난 의원들을 모두 데려와. 우리 상단의 일꾼들부터 진료받을 수 있게 해. 그리고 칼.”

“예.”

“당분간 원단 수입과 판매를 멈춘다.”

“예?”

“피에르에서 수입해오는 원단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천과 나무를 불태워. 그릇이나 보석, 장신구 같은 것들은 약초를 달인 물에 담가 소독하도록 하고.”

칼이 꿍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봤자 핀잔만 듣고 얻는 것이 없다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석에서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했다.

“하오나 그렇게 되면 상단에 타격이…….”

렝 백작의 비수 같은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이미 타격은 충분히 받았다고 보는데. 모르는 척 무역을 강행하는 것이 더 악수가 될 수 있어.”

“…….”

회의장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렝 백작은 부하들의 반응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또한 상단의 주요 경로를 변경하도록 한다. 우리가 지나온 길목의 마을들은 이미 병이 진행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에게는 자신의 선택이 옳다는 확신이 있었다.

* * *

이번에도 렝 백작은 흔들리지 않았다.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곧은 심지였다.

소식을 전달받은 요제프가 실소했다.

“정말 재밌는 자군. 예측할 수가 없어. 어떻게 생각해, 마리엘라.”

그는 구태여 그녀 앞에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조급해하거나 겁먹을 필요는 없는 싸움이죠. 그들은 어디서 화살이 날아오는지도 모르고 있어요. 섣불리 움직여 모습을 드러내는 것보다 가만히 기다려 제풀에 지치게 하는 게 좋아요.”

‘과연 정말 모르고 있느냐가 문제겠지만.’

도통 율리안의 속내를 모르겠다. 며칠 전 그녀가 렝 백작과 접촉했냐고 질문했을 때, 그는 ‘아직 때가 아니니 기다려야 한다.’라는 대답을 했다.

역시 그 말은 거짓말일까.

그는 끝까지 자신을 믿을 생각이 없는 건가.

‘그렇다면 나와 마리안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지?’

생각이 복잡해지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깨 위에 커다란 짐이 놓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티 낼 수는 없다. 특히 요제프의 앞에서는.

그녀는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얼른 거두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고민에 빠진 척 연기했다.

요제프가 그녀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

“맞아, 바로 어제까지는 그랬지.”

“네?”

그녀가 이해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베데르 백작의 인내심이 극에 달했어. 알폰스 후작이 대답을 유보하기 위해 병가를 낸 틈을 타고 점점 세력을 확장하는 중이야. 복병이지.”

순식간에 진중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요제프는 한쪽 팔로 턱을 괴고 남는 손으로 가만히 테이블 상판을 매만졌다. 그리고 심어둔 심복에게서 건네 들은 그들의 대화 내용을 떠올렸다.

어젯밤, 베데르 백작이 국왕파에 속한 귀족들을 모아 은밀한 만남을 가졌다.

대부분은 그를 지지하는 젊은 귀족들이었지만, 몇몇은 알폰스 후작의 편에 서서 그에게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었다.

“언제까지 유약한 왕자와 되바라진 왕자비에게 끌려다닐 생각이십니까.”

베데르는 늙고 부유하며 명예로운 노귀족들을 모아 강력하게 주장했다. 마치 진격만을 외치는 용맹한 기사 같은 모습이었다.

“유약하다니, 되바라지다니!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니오, 베데르 백작.”

“우리가 돈 몇 푼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장사치들도 아니고, 천박하게 굴지 마시게.”

나이든 이들은 언제나 새롭고 날카로운 것들을 불편해한다. 알폰스와 뜻을 같이하던 노귀족들은 저마다 불쾌한 심기를 드러내며 한마디씩 했다.

베데르를 지지하는 젊은 귀족들에 비해 그들의 수는 적었으나, 그들이 지닌 명예와 권력의 급은 월등히 높았다. 노귀족들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네, 그러시겠지요.”

그러나 베데르 백작 역시 이런 작은 난관에 웅크릴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잊으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지탱하는 가장 큰 기둥이라는 것을요. 이 나라를 건국했을 때, 가장 큰 일을 한 가문은 리덴부르크 백작가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어르신들과 저희의 가문입니다.”

“크흠.”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주는 베데르 백작의 말에 노귀족들이 헛기침을 했다.

그들의 마음이 동요하고 있음을 확인한 베데르는 슬쩍 미소 지었다. 그는 팔을 바깥쪽으로 뻗는 제스쳐를 취해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다.

“데르샤바크 왕가가 굳이 권력을 나누겠다 한다면, 그것을 넘겨받는 것은 왕자비가 아니라 우리여야 합니다.”

분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국왕파의 중심, 요제프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말이다.

* * *

붉은 사과 독서클럽의 서재는 온통 붉은색으로 가득했다.

바닥은 민무늬의 새빨간 카펫, 창가에는 검붉은 벨벳 커튼, 벽지 역시 비슷한 색감으로 꾸며져 있었다.

어딘가 음험하고, 동시에 고결한 느낌을 주는 방.

그곳에서 율리안과 베데르 백작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알폰스 후작은 어떻게 되었지?”

율리안이 질문했다. 묘하게 하대하는 투였다.

대외적인 이미지와 전혀 다른 그의 태도에도 베데르 백작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게 당연한 일이라는 듯 굴었다.

“지병을 핑계로 칩거 중입니다.”

“흠.”

그의 대답을 듣고 율리안이 말없이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허공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보아하니,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제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한 대책이겠지.’

베데르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급히 말을 덧붙였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율리안의 시선이 다시 베데르 백작에게 향했다.

베데르는 칭찬받을 일이 있다는 듯, 부끄러움과 과시욕이 뒤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미리 손을 써 놓았습니다.”

* * *

이른 아침, 수도에 있는 알폰스 후작의 저택에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봉투에 아무런 표식이 없어, 어딘가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편지였다.

알폰스는 발신인 불명의 편지의 앞뒤를 넘겨보다 꺼림칙한 표정으로 봉투를 개봉했다.

편지에는 한 줄의 문장만이 적혀 있었다.

열흘 드리겠습니다.

“…….”

베데르 백작이다.

알폰스는 단박에 편지의 발신인과 그의 목적을 파악했다.

‘바리 신이시여…….’

늙은 후작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베데르가 자신이 없는 틈을 타 국왕파를 장악했다는 사실은 소문으로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베데르의 행보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의 행동 자체가 이해 안 갔던 것은 아니었다. 국왕파가 그동안 보여 왔던 지지부진한 모습이 젊은 혈기를 지닌 베데르의 입장에서는 답답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젊음의 한때, 어린아이 장난질일 때만 허용되는 불평불만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왕성 룩센투크를 지킨 알폰스는 알았다.

모든 권력은 잠재적 반역이다. 의지가 실체화를 거쳐 권력이 되는 순간, 그것은 곧 왕실에 대한 죄가 된다.

국왕파를 이탈하다 못해, 새 무리를 형성해 이끌게 된 베데르는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그저 ‘새로운 적’일 뿐.

잠시 신음에 잠겼던 알폰스 후작은, 바로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자각했다.

‘우선 전하께 알려야 해.’

그는 하인을 불러 자신이 받은 이 편지를 왕자 전하께 은밀히 전할 것을 명령했다.

* * *

같은 날 저녁이었다.

마리안 왕자비는 시녀 데이지를 데리고 바깥나들이를 나왔다.

자신이 후원한 연극을 보기 위해서였다.

바이올세네츠 국립 연극단의 간판 여배우 비비안이 주연을 맡은 이 연극은, 그리 유명하지 않은 통속 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 마리안 왕자비의 강력한 추천으로 만들어졌다.

취향이 외골수적이어서 그렇지, 마리안의 작품 보는 눈은 나쁘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을 담은 예술성과 인간의 본능을 건드리는 통속성이 적절히 섞인 연극은 사교계 귀부인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며 연일 호평을 받고 있었다.

그동안 에드먼드 파칼과의 신경전으로 바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느라 왕성 룩센투크를 떠날 줄 몰랐던 그녀가 느닷없이 외출을 하게 된 것은 요제프의 역할이 컸다.

어느 날 그가 넌지시 연극의 이름을 꺼냈고, 덕분에 마리안은 깜박 잊고 있었던 자신의 취미생활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담요를 몇 장 챙겨 갈까요?”

이제 막 마차에 내린 그녀의 뒤를 데이지 이브노말이 급히 따라왔다.

데이지의 양 볼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이렇게 귀부인들이 많은 곳에 영예로운 ‘왕자비의 시녀’로 등장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기뻤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럼.”

마차에서 내려 국립 극장까지 가는 짧은 거리. 그녀는 그곳에서 아주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해 냈다.

“어머, 소피아 백작 부인.”

바로 베데르의 부인인 소피아 백작 부인이었다.

소피아는 젊은 귀부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그녀와 함께한 대부분의 부인들은 그녀의 남편인 베데르의 정치적 동지들이었다.

마리안과 척을 질 준비를 하고 있는 젊은 국왕파 귀족들의 가족이란 말이었다.

소피아 백작 부인은 마리안의 얼굴을 보자마자 낯빛이 어두워졌다.

마리안이 주최한 음악회에서 벌어졌던 수치스러운 일과 남편의 공격적인 정치 행보 때문에 그녀가 별로 반갑지 않았던 탓이었다.

사실 이 상황에서 소피아 백작 부인이 껄끄럽기는 마리안도 마찬가지였어야 하나, 마리안은 인생의 모든 순간순간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고 이용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소피아 백작 부인은 안면이 좀 있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왕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소피아 백작 부인이 난처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살짝 숙였다.

“왕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다른 귀부인들이 왕자비에게 예를 갖췄다.

“이런 곳에서 예를 차릴 필요는 없어요.”

마리안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얼굴로 적당히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의도 따윈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행동이었으나, 지레 겁먹은 귀부인들에게 그 모습이 곧이곧대로 보일 리가 없었다.

“연극을 보러 오셨나 봐요?”

그들은 이 일상적인 질문을,

‘힉. 왕자비께서 국왕파 내부의 새로운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돌려 말하고 계셔!’

이렇게 해석했고,

“그렇다면 1층에서 관람을 하시겠군요. 로열층은 저 때문에 전석 예매 금지되었으니까요.”

자연스럽게 뒤따라오는 말 몇 마디를,

‘그래봤자 자신과 급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으라고 경고하시는 거야!’

저렇게 해석해 버렸다.

잔뜩 긴장한 것은 소피아 백작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소피아는 최대한 부드럽게, 그리고 아무런 문젯거리가 되지 않게, 최대한 말을 골라 했다.

“아……. 네, 그렇죠. 하지만 아무도 불평불만을 하지 않는답니다, 전하.”

긴장은 사람을 실수하게 만든다.

한 번만 반대로 꼬면 금세 의미를 툭 풀어 버릴 수 있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의도치 않게 마리안을 대놓고 비꼬는 꼴이 된 소피아는 사색이 되었다.

다행히 마리안 왕자비는 백작 부인의 비아냥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마리안은 부인의 무례한 말을 지적하는 대신, 평소처럼 그녀를 대했다.

악의 없이.

그러나 오해의 소지는 가득하게.

“그렇겠죠, 이 극의 최대 후원자는 저니까.”

“……!”

‘지금, 왕자비께서, 내게…… 주제 파악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건가……?’

불행히도 백작 부인 역시 마리안 왕자비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소피아를 포함한 귀부인들이 잔뜩 겁에 질려 얼어붙었다. 가난한 남작가의 딸로 태어나 사교계에서 오랜 시간 등한시된 덕에 이런 분야에서 까막눈인 데이지에게도 그들의 속마음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여전히 마리안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부인들과 소소한 한담을 나누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그나저나 안타깝군요. 이 작품은 소품에 신경을 많이 쓴 작품이라 2층 로열석에서 관람해야 진가를 알 수 있는데.”

“저, 저희는 1층에서 관람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전하.”

소피아 백작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거절했다.

“그러지 말고 저와 같이 로얄석에서 관람하세요.”

“네? 제, 제가 혼자 온 것이 아니라…….”

“네, 알아요. 그 귀부인들에게도 로열석을 드리죠. 물론 그들은 소피아 백작 부인처럼, 저와 같이 앉는 영광을 누릴 수는 없겠지만.”

“귀부인들에게는 우리와 반대쪽 좌석을 주도록 해.”

왕자비가 데이지를 보며 명령했다.

마리안의 목적은 ‘아는 사람과 즐겁게 취미 생활하기’였지만, 사람들은 그날 저녁의 일을 두고 ‘마리안 왕자비가 국왕파의 불순분자들을 제거하려고 칼을 뽑았다.’라고 말했다.

오 분도 되지 않는 짧은 대화.

그녀는 이 대화를 통해 알폰스 후작의 부재와 베데르 백작의 공격적인 행보로 소란스러워졌던 국왕파 정세를 말끔히 정리해 버렸다.

* * *

마리안이 극장에서 사고를 쳤다는 소리가 마리엘라의 귓가에 들어오자마자, 율리안이 그녀를 호출했다.

늦은 시간, 마리엘라는 율리안의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다는 반성의 얼굴을 하고 섰다.

율리안이 그런 마리엘라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지?”

“면목이 없습니다.”

“네 잘못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아.”

‘그럼 뭘 어쩌라는 거야.’

마리엘라의 마음속에서 삐죽삐죽 날 선 말이 튀어나왔지만, 그것을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율리안은 요제프와 달랐으니까.

율리안과 요제프는 절박함의 깊이도, 오고 갔던 감정의 온도도 달랐다.

그녀가 지금 율리안에게 가진 감정은 경계, 의심, 거북함뿐이었다.

“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마리엘라를 앞에 세워두고, 율리안이 작게 신음했다. 그는 무언가 고민에 빠진 얼굴로 작게 말을 흘렸다.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역시 마리안 왕자비는 그냥 내버려 두기에는 껄끄러운 존재야.”

마리엘라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물론 전대 재상처럼 쉽게 제거할 수는 없지. 너와 요제프의 얼굴을 봐서라도 말이다.”

어쩌면 좋을까?

덧붙이는 말에 마리엘라가 다급하게 빌었다.

“제가 해결해 볼게요. 제게 기회를 주세요.”

“기회?”

그녀의 말에 그가 단박에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여태까지는 기회를 안 줬단 말인가?”

“…….”

마리엘라는 대답 대신 볼 안쪽을 깨물었다.

하녀 신분인 그녀가 해낼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지금처럼 율리안이 자신을 불신해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 상황에는 더더욱.

궁지에 몰린 그녀의 얼굴을 관찰하듯 빤히 바라보던 율리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마리안을 직접 해결할 기회를 주겠다.”

“예?”

불안한 기운이 저 멀리에서부터 슬금슬금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율리안은 책상 위에 턱을 괴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명령했다.

“당분간 왕자비에게 요양의 시간을 줄까 하는데.”

“그 말뜻은…….”

“열흘 뒤, 내가 신호를 보내면 마리안을 쓰러지도록 만들어. 모두가 그녀의 건강이 심상치 않다 느낄 수 있게.”

“……!”

마리엘라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예상한 것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었다.

율리안은 말을 잃은 마리엘라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녀의 얼굴 위로 스친 당혹감과 곤욕스러움에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뭘 그리 망설이는 거지? 마법을 쓰면 되지 않나.”

“…….”

그 말에 마리엘라가 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숱 많은 검은 속눈썹이 갈색 눈동자 속에 숨긴 당혹감과 초조함을 감춰주었다.

“주문을 모른다면 수식이 담긴 책을 빌려주지. 그것도 불안하다면 가르쳐 줄 수도 있다.”

“…….”

그녀의 계속되는 침묵에 율리안이 대화 방식을 달리했다.

“모시고 살던 아가씨에게 해를 끼치는 건 양심에 찔리나? 그 아가씨의 어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죽였으면서 말이지.”

보는 이가 있었다면 숨을 들이마셨을 정도로 무례한 언행이었지만, 정작 말을 뱉은 율리안의 표정은 지루하고 따분한 것을 마주한다는 듯, 세상 무심한 얼굴이었다.

마리엘라는 공작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고개를 들어 반박했다.

“그 두 개는 전혀 다른 일이죠.”

율리안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래.”

마리엘라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팍 찌푸려졌다. 율리안은 요제프와 비교해, 두 배는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다.

지그리트 후작이 샹들리에에 깔려 죽은 지 몇 주가 지났다. 마리엘라와 율리안이 서로의 정체를 밝혀내고, 같은 배를 타게 된 지 수 주가 지났단 뜻이었다.

한 달 반 넘게 지나갈 동안 그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머물며 지켜봤지만, 아직 진짜 목적 하나도 제대로 파악해내지 못했다.

그럴 법도 했다. 질문하면 거짓이라도 뱉어내는 요제프와 달리 율리안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녀에게서 정보를 받아가기만 할 뿐, 정보를 공유하지는 않는다. 사소하게 내비칠 법한 감정 하나도 무덤덤한 표정 속에 숨겨버린다.

‘경계를 하는 거야. 내가 그에게 그러하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실마리들.

마리엘라는 그와 함께할 때마다 깊은 갑갑함을 느꼈다. 스스로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복잡한 표정의 그녀를 앞에 두고 율리안은 자기 할 일을 했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책상 위 서류들을 다시 검토했다.

이중 반은 친우 요제프에게서 넘어온 것이고, 나머지 반은 율리안의 개인적인 서류들이었다. 그는 종이들을 넘기며 말했다.

“정 걸린다면 명을 물러줄 수도 있어.”

마리엘라의 얼굴에 살짝 화색이 돌았다. 가뭄 뒤 봄비 같은 소리였다. 그러나 뒤이은 말이 그녀의 기분을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다.

그는 시선을 여전히 서류에 둔 채로 어깨를 살짝 으쓱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네가 과연 그걸 용납할지가 궁금하군. 내 흑마법이 혹시라도 마리안을 해하게 된다면, 과연 그게 고의가 아니었다는 걸 네가 믿을까.”

“……지금 절 시험하시는 건가요?”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율리안은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널 어떻게 할지, 어디까지 받아들일지 고민하는 중이긴 하지. 네가 마냥 고분고분 순종하는 종이 아님을 알고 있으니까.”

“증명해드리죠.”

마리엘라가 악에 받친 눈을 하고 말했다. 어딘지 모르게 싸늘한 분위기가 그녀를 감돌았다.

미묘한 변화를 감지해낸 율리안이 고개를 들어 다시 그녀를 보았다. 그의 한쪽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무엇을?”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마리엘라는 더는 주춤거리거나 무언가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저에게, 제 자신의 안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말이에요. 전 근본 없는 짐승이라 스스로를 위해서라면 주저 없이 사람을 사냥하고, 사랑을 팔아넘길 수 있답니다, 주인 나리.”

명백한 빈정거림에 그가 입술을 끌어 올렸다. 겁먹은 하녀의 발칙한 변모가 썩 흥미로운 듯했다.

“기대하마.”

마리엘라는 공손한 대답이나 인사도 건네지 않고 몸을 틀어 그의 처소를 빠져나왔다.

‘요제프를 이용해야 해.’

서쪽 별관의 어둡고 긴 복도.

길을 밝혀줄 램프나 양초 하나 없이 혈혈단신의 몸으로 어둠 속을 걸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공작의 눈을 피해 계획을 망칠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더는 그녀에게 동정심과 양심은 없었다.

* * *

마리엘라는 비밀 통로를 이용해 요제프의 처소에 들어갔다. 아무런 통보 없이 그를 만나러 가는 것은 드문 일이었고, 그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첫 방문이었다.

율리안이 심어둔 눈을 피하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 이었다.

율리안은 요제프와 마리엘라의 처소에 각각 숨겨진 비밀통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마리엘라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그녀의 방을 통해서 요제프의 처소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율리안에게 알리지 않았다.

요제프는 처소에 없었다.

‘개인 서재나 집무실에 있나 보지.’

그녀는 동요하지 않고 그의 침대 한가운데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몇 시간을 기다렸을까.

어둠이 짙은 새벽, 요제프는 그보다 더 깊은 피로와 고뇌를 끌고 침실로 들어왔다. 그는 형형한 눈빛과 다소곳한 자세를 하고 침대 한가운데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마리엘라를 보고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피곤한 기색을 지우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금 날 유혹하는 거야?”

평소였다면 재치 있게 받아쳐 주었겠지만 마리엘라는 그의 장난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일직선으로 그를 곧게 응시하며 본론에 들어갔다.

“할 말이 있어서요.”

“뭔데?”

그가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두 사람은 비슷한 눈높이에서 서로를 마주 볼 수 있게 되었다.

“렝 백작과 관련된 일이에요.”

“일단 들어는 볼게.”

별로 끌리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마리엘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반응을 빤히 살피다가 말했다.

“절 백작가로 보내주세요.”

“왜?”

“직접 백작의 약점을 캐겠어요.”

“…….”

그는 자신의 귀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정말로 그녀의 말이 이해 가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마리엘라의 요구가 지나치게 과하다는 걸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다.

장난기 섞인 표정에 불쾌감이 살짝 서려 있었다.

모두 그녀가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렇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마리엘라는 초조함을 숨기고 담담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오롯이 받아냈다.

율리안은 어떻게든 그녀를 이용해 마리안에게 해를 끼치려 할 것이다. 그건, 그녀가 그를 배신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일 수도 있고, 그녀를 함정에 빠트려 제거하기 위함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녀는 그의 명을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

백작 마님과 관련된 악행이 들통난 이상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죽음밖에 없으니.

‘왕자의 명령을 제외한다면 말이지.’

첩자라는 신분이 이렇게까지 쓸모 있을 줄은 몰랐다.

애초에 율리안이 그녀에게 내준 가장 큰 임무는 요제프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것이었다. 마리엘라에게는 요제프의 의심을 피해 그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 의무가 있었다.

왕자의 명을 받아 렝 백작의 저택으로 가게 된다면 율리안도 별수 없이 그녀를 보내줄 것이다. 요제프와 렝 백작 사이를 이간질하라는 식의 새로운 임무를 받아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직접 마리안을 쓰러지게 만들 일이 없다는 것이 중요했으니.

자신의 흑마법으로 마리안을 위험에 빠트릴지도 모른다는 율리안의 말은 가벼운 협박에 불과하다. 그녀가 저항하거나 그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별다른 짓을 하지 않는 한 마리안의 안전은 보장되어 있다.

‘조금 삐꺽거리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썩 나쁘지 않은 계획이야. 요제프가 예상대로 움직여만 준다면.’

그녀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직시했다. 뿌옇게 퍼졌다가 또렷이 모이는 초점 한가운데는 화를 꾹꾹 억누르는 듯한 표정의 요제프가 있었다.

‘아…….’

마리엘라는 속으로 탄식을 뱉었다. 율리안과 관련된 일에 심혈을 기울이다 보니 간과해버린 사실이 있었다.

그녀를 향한 요제프의 마음.

그녀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요제프가 헛웃음을 지으며 스스로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내가 그토록 네게 간청해왔던 건 사랑도, 정착도 아닌 네 안위 하나였는데.”

“…….”

드러난 눈이 한없이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런 날 찾아와 렝 백작가에 잠입하겠다는 말은, 내 마음을 기만하겠다는 것과 같은 뜻이라고 받아들여도 되나?”

마리엘라는 자신이 요제프가 그어준 선을 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스로와 마리안의 안위를 위해서 요제프와 등을 지기로 결심한 그녀였지만, 그와의 사이가 소원해지길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를 이용하려면 그의 사랑뿐만 아니라, 신용까지도 독차지해야 한다.

그녀가 다급하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아무 의도도 없었어요. ……그저, 이대로 지지부진하게 흘러가는 일에 안달이 나서.”

습관적으로 아련한 표정이 튀어 나왔다. 라산 사냥터에서 스킨쉽 하나 없이 귀족들을 꾈 때 자주 쓰던 수법 중 하나였는데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

요제프가 조금 진정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리엘라는 자신의 연기가 그에게 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가기로 했다. 붙잡은 그의 손에 살포시 뺨을 가져다 대며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

“불안하고, 답답해서. 그래서…….”

우는 척은 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가면 들통날 것이 뻔하니까. 사실 방금 전 행동도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후회하는 중이었다.

흘러내려 오는 갈색 머리카락에 바쁘게 돌아가는 눈동자를 숨기며, 마리엘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속을까?’

그가 넘어가 줄까?

만약 그렇다면 그건 알면서도 넘어가 주는 걸까, 아닐까.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사랑의 설렘에서 오는 박동은 아니었다.

“…….”

요제프는 자신의 손등에 뺨을 기댄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차분하고 정적인 표정.

그가 지금 어떤 생각,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 쉽게 짐작해 낼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는 곧 ‘어쩔 수 없지’ 하는 얼굴을 하고는 그녀에게 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 손으로 마리엘라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었다. 허리를 살짝 숙여 귓가에 안도할 만한 말을 속삭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네가 그 일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알아. 렝 백작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마. 그의 약점을 찾았으니까.”

‘뭐?’

마리엘라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건 또 예상 밖의 일이었다.

* * *

도리 그레이드는 그레이드 남작가의 차녀였다.

그녀의 신분이 과거형인 것은, 그녀의 오빠가 아버지가 남겨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도박으로 탕진하고 파산해버렸을 뿐 아니라, 영지와 작위를 물려줄 만한 후계자가 생기기 전에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급사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보통 이런 애매한 경우에는 지역 사교계에서 어떻게든 도움을 주지만, 안타깝게도 쓸모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한심한 손위 형제가 죽은 시기가 3차 성마전쟁이 끝난 직후였던 터라, 그녀는 누구의 도움도 얻지 못하고 일자리를 찾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눈썰미가 좋은 편으로, 요리와 설거지와 바느질을 하는 법 따위를 빠르게 터득했다.

그녀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모셨던 귀족들은 대부분 그녀의 처지를 동정해 귀족 아가씨의 머리 손질 같은 비교적 쉬운 일을 맡기곤 했으나, 더러는 그녀의 몰락을 오락거리로 삼겠다는 듯이, 힘들고 모진 일들만 건네주기도 했다.

그럴수록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버텨냈다. 당장 들이닥친 가난을 모면하는 것이 급선무였기도 했고, 그들이 어떤 대우를 해주든 본질적으로 다 같은 취급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를 고용한 이들이 따듯하게 맞아주나, 무시하고 핍박하나, 그녀는 항상 같은 생각만을 품었다.

‘나는 그레이드 남작가의 차녀인데.’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밤마다 자신의 본래 지위와 현재 신분 사이의 괴리감에 잠을 못 이루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녀의 것이었어야 했던 것’과 ‘그녀가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만 보였다.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주문처럼 외던 생각이 그녀의 영혼을 파먹기 시작한 것이다.

도리 그레이드가 자신의 현실과 과거와 욕망을 구분하지 못해 미쳐가기 일보 직전이었던 그 순간, 누군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지금 그 자리는 그대의 혈통이나 능력에 비해서 너무나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지 않으신가요.”

푸른 늑대 기사단의 조셉 남작.

그는 그녀가 모시는 도련님의 오랜 친우였다.

항상 먼발치에서 접해왔던 그가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네?”

되묻는 그녀에게 그는 무심한 어조로 비슷한 말을 반복했다.

“당신은 조금 더 중요한 자리에 설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

여전히 뜻 모를 소리. 조셉은 침묵하는 그녀에게 요제프의 친서를 건네주었다.

“저희 왕자님께서 당신의 충성을 필요로 하십니다.”

데르샤바크 왕가의 인장이 찍힌 편지.

도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의 큰 오빠가 제정신인 사람이라 그녀의 신분이 여전히 그레이드 남작가의 아가씨였어도 이런 귀한 분의 편지를 받아볼 일이 있을까.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소중히 매만졌다. 그리고 속으로 결심했다.

진가를 알아봐 준 왕자 전하께 모든 것을 바치겠노라고.

* * *

몇 달 후, 그녀에게 편지 한 통이 왔다.

‘렝 백작의 약점을 찾아낼 것’

편지에 적힌 것은 단 한 줄이었다. 도리는 모시던 마님과의 인연을 정리하고 단박에 렝 백작가로 향했다. 마침 백작가에서 말솜씨 좋고, 너무 어리지 않은 하녀를 구하고 있었다.

두꺼운 커튼이 쳐 있는 음울한 집무실.

그녀는 그곳에서 렝 백작을 처음 만났다.

키가 작은 편이 아닌 그녀도 움츠리게 만들 정도의 장신,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에 퀭한 눈. 그 안에 빛나는 늑대 같은 황금색 눈동자. 여러모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은 자였다.

그는 대충 의자에 걸쳐 앉아 추천서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올백 머리와 깔끔하게 차려입은 정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시정잡배 같은 모양새였다.

“우리 상단의 단골이신 포두 백작 부인의 추천서군.”

“네, 백작 부인께서 직접 이곳에 가 보라 말씀하셨어요.”

“성실하고, 눈치가 빠르며, 자기 주제를 알고, 온순한 하녀라…….”

그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욕정이 담긴 눈빛은 아니었다. 적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짐승의 경계 같은 것이었다.

꿀꺽.

도리는 마른침을 삼키었다.

“그런 완벽한 하녀를 왜 내보낸 거지? 일 잘하는 일꾼을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나라면 평생 붙들어 놓고 있을 텐데.”

“부인께서 요즘 부쩍 병환에 시달리시는 터라……. 평소에도 제 앞날을 많이 걱정하셨답니다.”

“손녀딸 같은 마음으로 널 보냈다는 거군.”

“제가 감히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흠.”

그가 탐탁지 않다는 얼굴을 하고 얼굴을 한껏 우그렸다가 결정을 내렸다.

“좋아. 널 고용하도록 하지. 네가 할 일은 별것 없어. 내 유모의 곁을 지키며 그녀의 말 상대가 되어 주면 돼.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가 없는 모든 시간을 무료하지 않게 보내주면 되지.”

백작의 전속 하녀가 아니라는 것이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아무것도 없이 부딪친 것치고는 꽤 만족할 만한 성과였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펴 보이며 무릎을 굽혔다.

“맡기신 일 성심성의껏 하겠습니다.”

“널 쓰기로 마음먹은 건 네가 성실하고, 눈치가 빠르며, 온순해서가 아니야. 물론, 포두 백작 부인의 얼굴을 봐서도 아니지. 네가 주제 파악을 잘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 알지?”

귀족 출신이라고 으스대지 말고 메를린의 비위를 잘 맞추라는 뜻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펴며 그가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해주었다.

도리는 속으로 자신이 아는 그녀에 대한 정보를 읊었다.

메를린.

아서 렝의 유모.

렝 백작보다 열다섯 살이 많으며, 그의 모친의 고향인 섬나라 렝글루드에서 왔음.

‘백작이 그녀를 어머니처럼 모신다고 했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어쩌면 그녀를 통해 백작의 약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 *

메를린은 다정한 말투와 온화한 미소를 가진 여자였다.

“도리 양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그녀는 자신의 하녀인 도리를 낮잡아 보지 않고 존중해 주려 했다.

“부인께서 원하시는 대로 불러주세요.”

그녀가 입은 옷은 무채색에 자수 하나 없는 단순한 디자인이었으나, 천의 보드라움이나, 빛을 받을 때 나는 은은한 광택을 보아, 웬만한 귀족 아가씨들의 평상복보다 값이 나가 보였다.

솔직히 좀 당황스러웠다. 어머니도, 피앙세도 아닌 고작 하녀 출신의 유모에게 이런 호화로움을 허락하다니.

‘하긴 여긴 렝 백작가이니까.’

메를린의 방을 채운 우수한 품질의 생활 잡화들은 렝 상단의 재력을 엿볼 수 있게 했다.

“그래요, 도리 양. 지금 당장 산책하러 나가고 싶은데, 도리 양의 기분은 어떤가요.”

도리 그레이드는 잡생각에서 빠져나와 메를린을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마침 저도 딱 같은 생각이었어요, 부인.”

그녀는 메를린이 쓸 겉옷과 양산을 챙겨 산책하러 나갈 준비를 했다. 아부와 비위 맞추기의 달인인 그녀에게 평민인 메를린의 말 상대가 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었다.

도리가 렝 백작가에 고용된 지 한 달이 넘게 지났다.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처음의 예상과는 달리, 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서 렝은 안개 같은 남자였다. 그에게는 숨겨둔 여인도, 목숨 바쳐 지켜야 하는 자식도 없었다. 술과 도박을 좋아했지만, 딱 적정선을 지켰다.

‘절제할 줄 아는 건 약점이 아니야.’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아서 렝이 정보나 사람 따위를 얻기 위해 술과 도박을 ‘좋아하는 척’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한 혈육을 둔 자의 경험에서 오는 확신이었다.

아서는 술에 진탕 취해 비척거리며 돌아오는 일이 잦았고 때때로 도박장에서 거금을 잃곤 했지만, 중요한 일이 있는 날에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고 도박장에서 잃은 돈도 딱 그의 손에서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었다.

‘결국 도박은 아니라는 거지.’

집안의 사용인에게조차 약점을 보이지 않는 그의 철두철미함에 질렸다.

그녀는 한숨 끝에 머리를 굴렸다.

왕자 전하의 필요에 딱 맞는 정보를 구해서 그에게서 꼭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갈망이 그녀 안에서 들끓었다.

‘포기하면 안 돼. 왕자 전하께 실망을 안겨 드릴 수는 없어.’

그녀는 아서 렝의 생기 없는 얼굴을 떠올렸다.

약점은 곧 욕망이다.

욕망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타고 남은 재 같은 인간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도통 짐작해낼 수가 없었다.

대체 그의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이 저택 어딘가에 있을 거야.’

요제프에게 받았던 첫 편지.

데르샤바크의 인장 모양새를 되짚으며, 도리 그레이드는 무너져가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가 넋두리를 끝내고 문고리에 손을 댄 바로 그때, 누군가가 한발 앞서 문을 열어 재꼈다.

자그마한 몸짓에 어울리지 않는 기세의 메를린이었다.

나이 오십이 넘는 노부인이 오늘따라 풍채 좋은 여장부처럼 공격적인 기운을 띠고 있었다.

“마침 잘 왔어요, 도리 양.”

메를린은 그녀가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말했다.

“시간이 나면 절 따라오시겠어요?”

그녀의 뒤에는 칼의 심부름을 도맡는 어린 소년 하나가 있었다.

메를린의 가쁜 걸음이 멈춰 선 것은 렝 백작의 집무실 앞이었다. 방 안에서 백작의 오른팔인 칼이 그를 뜯어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백작님, 주무셔야 합니다. 이제 삼일 밤낮을 지새워도 멀쩡할 정도로 젊지 않습니다.”

“아니. 지금 당장 악마가 마중 나오더라도 이 일은 끝마치고 죽어야겠어. 가서 잠을 깨울 차라도 좀 가지고 와.”

급격히 변한 정세에 따른 손해를 메우기 위해 백작은 삼일 밤낮을 상단 일에 몰두했다. 보다 못한 칼이 크게 혼이 날 각오를 하고 메를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녀가 문 앞에 서자, 뒤를 따랐던 칼의 심부름꾼이 서둘러 문을 열었다.

“아서.”

그리고 그가 그렇게 무서워하는, 하나뿐인 유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아하고, 부드럽지만, 어딘가 단호함이 서려 있는 목소리였다.

칼과 말다툼을 벌이던 아서 렝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띠고 그녀를 맞았다.

“메를린.”

그 나름 굉장히 따듯한 반응이었으나, 메를린은 전혀 그렇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다소 화가 난 발걸음으로 그를 향해 걸어갔다.

“아서, 내가 뭐라 그랬지? 무엇보다 건강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했지.”

“하지만, 유모, 나는…….”

백작이 항변하려 하자, 메를린이 단호하게 침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서. 지금 당장 침대 위로 올라가 눈을 감으렴. 이불을 덮고 말이야.”

“메를린, 나는 이 가문은 물론 상단을 통째로 먹여 살려야 한다고요.”

아서 렝이 툴툴댔다.

도리는 그의 변모가 당황스러웠다. 첫 만남에서의 차가운 모습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의 어리광이었다.

메를린은 끝내 그를 침대 위로 올라가게 했다. 그녀는 그의 턱 끝까지 이불을 덮어 주고는 말했다.

“어른이 되더니 못된 것만 배웠구나.”

“남들은 그걸 ‘유능’이라고 부르던데.”

백작이 입꼬리를 당겨 슬쩍 웃으며 대꾸했다.

메를린이 어처구니없다는 의미의 웃음을 터트렸다.

“끝까지 말대답하기는. 네가 잠들 때까지 여길 지킬 생각이다.”

“유모…….”

그가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유모가 한 발 더 빨랐다.

“그리고 앞으로는 내 사람을 보내 널 감시할 거야. 더는 저택의 하인들의 입을 막아 내 눈을 가리지 못하게.”

“유모의 사람?”

“도리 양 말이다.”

메를린이 도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좋았어!’

도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인고의 시간 끝에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그의 약점을 직접 캐낼 기회가.

‘이번에는 어떻게든 그의 약점을 찾아내겠어. 그게 안 되면-’

그녀는 유모의 손길 아래 쫑알쫑알 대는 렝 백작을 슬쩍 바라보았다.

‘내가 직접 그의 약점이 되겠어.’

최후의 수단으로 그를 유혹할 계획까지 세우며, 도리 그레이드는 요제프 하이젠 데르샤바크에 대한 충성심을 불태웠다.

* * *

아서 렝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메를린의 눈과 손이 되기는 참 쉽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아서 렝은 하루 종일 그녀를 없는 사람처럼 여겼다. 그러다가 메를린과 약속한 취침 시간을 어기게 된 날에는 슬쩍 그녀를 보며 아이 같은 부탁을 하곤 했다.

“딱 한 번만 비밀로 해주면 안 되나.”

“안 됩니다.”

“자네는 내가 고용했어.”

“그렇게 말씀하셔도 안 됩니다. 절 쫓아내시면 부인께 다 이를 거예요.”

그는 그 말에 입을 살짝 삐죽였다.

중년의 남자가, 그것도 저렇게 곧 죽을 것처럼 어두운 안색의 남자가 저런 표정으로 떼를 쓰는 건 언제 봐도 생소했다.

“약아빠졌군.”

그는 툴툴대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그녀는 근처에 서서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가 눈을 감은 채 말을 걸었다.

“……내가 잠드는 것도 보나.”

“네, 다 지켜보다 갈 거예요.”

“정말 끔찍한 충성심이야.”

혼잣말인 듯 아닌 듯 작게 중얼거리며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떻게 보면 협박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말로 그가 잠에 빠져들었는지 확인하고 방을 나섰다.

그렇게 별것 아닌 일상들이 이어졌다.

새벽에는 그가 너무 일찍 일어나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점심에는 제대로 끼니를 챙겼는지 확인하고, 정해진 시간에 잠을 자는지 지켜본다.

억지로 그의 기분을 맞추려 노력하거나 상냥한 미소를 유지할 필요도 없었다. 렝 백작은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무슨 말을 하는지 별 관심이 없었고,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상단과 관련된 모든 이들을 벌벌 떨게 한다는 렝 상단의 주인이 그녀에게는 귀족가의 어린 도련님처럼 느껴졌다.

그의 ‘약점을 찾아야 한다’는 점이 다른 도련님과는 사뭇 달랐지만 말이다.

같은 일상이 반복되던 어느 날. 도리는 차가 담긴 쟁반을 들고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에는 커다란 창이 나 있어 아름다운 정원을 한눈에 내다볼 수 있었지만 대부분 두꺼운 벨벳 커튼으로 닫혀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창가의 커튼이 모두 거둬져 있었다. 백작은 뒷짐 지고 창밖의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도리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메를린님께서 보내신 꽃차입니다. 눈의 피로를 덜어주는 데 좋으니 하루에 한 잔은 꼭 마시라고 하셨어요.”

“유모가? 그래……. 거기다 두고 가.”

“네.”

도리는 근처 탁자에 쟁반을 올려두고 자리를 지켰다.

다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던 백작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뭐하지? 떠나지 않고.”

“저, 메를린 님께서 백작님이 차를 다 드시는 걸 보고 가라고 하셔서요…….”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난감한 상황에 빠진 하녀를 연기했다.

그녀의 말에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참. 메를린은 날 너무 잘 알아서 탈이야.”

“차를 따르겠습니다.”

렝 백작은 찻잔을 받아 들고는 말했다.

“유모의 건강은 좀 어떤가. 의사의 충고대로 햇빛이 잘 드는 곳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차도가 좀 있나?”

요즘 메를린은 가벼운 폐병을 앓고 있다.

“아직 차도……는 잘 모르겠고. 가벼운 산책 정도는 하실 수 있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래.”

걱정이 가득 서린 목소리.

아무리 생각해도 유모에게 보이는 관심치고는 과하다.

도리는 속으로 메를린이 그의 친부모라도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었다더니, 애정 결핍인가.’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즈음이었다.

“…….”

백작은 한 손에 찻잔을 든 채로 창밖 어딘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응시한다고 넘겨버리기엔 그의 표정이 오묘했다.

환상 속의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듯한, 몽환적인 눈빛.

그에게서 절대적인 무언가를 숭배하는 광신도와 비슷한 분위기가 풍겼다.

도리 그레이드는 저 시선의 정체를 알았다. 첫사랑, 그 열병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년의 눈이었다.

‘뭐지?’

도리는 찻잔을 건네준다는 핑계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곁눈질로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확인한 그녀는 속으로 탄성을 뱉었다.

‘아…….’

새하얀 양산을 쓰고 정원을 걷는 무채색 옷의 여자가 정원 한가운데에 있었다. 꽤 먼 거리였지만, 도리는 한눈에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메를린이었다.

흰머리가 희끗희끗 난 렝 백작의 유모.

그녀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찾았다.”

그 소리를 들은 아서 렝이 되물었다.

“방금 뭐라 했나?”

“죄송합니다. 혼자 헛생각을 하다 그만.”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힐끔힐끔 창가를 훔쳐보았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드디어 왕자 전하께 도움 되는 정보를 알아냈다.

아서 렝의 약점.

그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

* * *

계획이 모두 틀어졌다.

요제프로부터 렝 백작의 약점을 전해 들은 순간, 마리엘라는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일단 방금 알게 된 사실은 모두 율리안에게 전달해야 했다. 숨겨서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마리안을 직접 공격하는 일을 피하려다 두 사람 다 죽음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었다.

‘최선의 방법이 물거품이 되었으니…….’

어두운 복도를 바쁜 걸음으로 걸으며 마리엘라는 생각했다.

‘이제 차악을 노려야 해.’

하지만 무엇이 차악이지?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그녀를 비웃듯 시시각각 변모하는 왕성 룩센투크의 정세. 주어졌다 사라지는 선택지들 사이에서 차악을 골라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은 할 수 있는 것부터.’

생각에 잠겨 멋대로 걷다 보니 금세 목적지에 다다랐다.

금방이라도 그녀를 짓누를 것 같은 커다란 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 뒤 그것을 열어젖혔다. 양초가 내뿜는 빛들로, 낮처럼 밝은 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서쪽 별관의 풍경이었다.

그녀는 그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율리안을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세요, 공작님. 바리 신께서 당신에게 엄청난 계시를 내리셨어요.”

스르륵 눈을 뜬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무렇지 않게 신성모독을 하는군.”

그녀는 방긋 웃으며 적당한 말로 받아쳤다.

“제가 아무리 그분을 모욕한다 한들, 저의 주인이신 바이르 공작님만 하겠어요?”

마리엘라는 말장난으로 시간을 끄는 대신 바로 본론을 꺼냈다.

율리안은 침대 위에 걸터앉은 그 자세 그대로 마리엘라의 보고를 들었다. 요제프가 찾아낸 렝 백작의 약점부터 그가 그것을 어떻게 이용할 계획인지 까지.

모든 것을 들은 그가 질문했다.

“독을 쓰기로 했다고?”

“네. 즉각적으로 증세가 나타나는 강한 독을 쓰겠다고 하더군요. 폐병과 비슷한 증상을 보여 아무도 독이라고 의심하지 않는 독이 그의 손에 있다고 했어요. 그 어떤 의원도 치료하지 못할 때, 구원자처럼 등장할 계획인 거죠.”

베데르가 알폰스 후작에게 내어준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 안에 해결책을 촉구하겠다는 의지였다.

요제프는 극적인 효과를 좋아한다. 상대가 의심하거나 경계하지 못하도록 느긋하고 온화하게 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면 그들이 대처하지 못할 만큼 빠르고, 공격적인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 그의 특기이자 취미였다.

그녀의 보고를 들은 율리안이 물었다.

“독약의 종류는?”

“거기까지 물어보면 적발당하지 않겠어요?”

“아무것도 안 한다면 여기서 죽겠지.”

주어를 생략했음에도 누가 죽게 될 것이 훤히 보였다. 익숙해진 협박에 그녀가 작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독약의 종류는 모르지만, 해독제를 같이 보내게 했으니까요.”

“해독제?”

“렝 백작의 유모는 나이가 꽤 있는 데다가, 타고나길 병약한 몸이라 그런 강한 독을 썼다가 손도 못 쓰고 죽을 수도 있다고 그를 설득했어요.”

“그래서 그 해독제는 어디에 있지?”

“렝 백작가에 새로 들어온 하녀가 있을 거예요. 그 하녀의 반지를 살피세요.”

“그렇군.”

그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이 정보를 어떻게 이용하는 게 알맞을지 재는 중일 것이다.

그녀는 공작의 내리깐 속눈썹과 살짝살짝 움직이는 붉은 입술을 바라보며 그의 기분을 살폈다.

‘지금 말을 꺼내도 될까?’

그녀는 적당한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율리안에게 권모술수를 통해 왕성에서 쟁취해내고 싶은 것이 존재하듯, 그녀 역시 원하는 것이 있었다.

그녀 자신과 마리안의 안위.

마리엘라는 한 번 더 공작의 눈치를 본 뒤 입을 열었다.

“언제 렝 백작에게 접근할 계획이시죠?”

물론, 이미 거절당했던 본론을 다시 한번 꺼내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마리안을 공격하는 일에 자신을 빼달라는 요청 말이다.

욕망과 목적을 정확히 드러내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었다.

같은 편이라면 언젠가 그것을 이용해 그녀를 제 뜻대로 다루려 할 것이고, 적이라면 반대로 제거하려고 할 것이다.

“…….”

그가 쓰윽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마리엘라는 순간적으로 율리안이 그녀의 속을 꿰뚫어버린 것 같아 뜨끔했으나, 그렇다고 뒤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녀는 태평함을 연기하며 시간을 벌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율리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대답했다.

“곧.”

“그를 우리 편으로 만들 방법은요?”

“그럴 필요가 없지.”

“왜죠? ……아.”

습관적으로 되묻던 그녀는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율리안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요제프가 알아서 방법을 마련해 줬으니까.”

오랜 시간 동안, 요제프가 적을 찾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율리안은 자신의 모습을 숨기는 것에 능할 뿐만 아니라, 상대의 수 위에 올라타는 간특함까지 가졌다.

그녀는 그의 묘안에 감탄하면서 동시에 의구심을 가졌다.

“그래도 정치에 관심 없는 아서 렝에게 재상 직위를 맡기려면 더 많은 수가 필요할 텐데요. 그가 원하는 것은 백작가 바깥에 없어요. 백작은 절대 그곳에서 나오려 하지 않을 거예요.”

“나도 알아.”

“…….”

말문이 막혔다. 더 질문하자니 무언가를 캐내는 모양새라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대꾸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율리안이 손을 내저으며 그녀를 쫓아냈다. 그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만 나가 봐. 네가 방해한 잠을 좀 청해야겠으니.”

* * *

‘바리 신의 영예, 베르단의 영속, 데르샤바크의 영광.’

알폰스 후작은 같은 문장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그건 무너져가는 그의 정신을 붙들 최후의 방법이었다.

베데르 백작에게 서신으로 열흘의 기한을 통보받은 뒤로, 제대로 된 잠을 잘 수 없었다. 눈을 감으려고 할 때마다, 왕성 룩센투크가 불타오르는 환영이 보였다.

그가 요제프에게 갖는 생각은 복합적이었다. 알폰스 후작은 데르샤바크 왕가에 평생의 충성을 맹세한 자로, 왕가의 유일한 후계자인 요제프에게 충성했다. 하지만 그는 요제프의 능력은 믿지 않았다.

그에게 왕자는 ‘데르샤바크의 혈통을 물려받은 자’였다. 그에게 통치자로서의 위엄이나 통솔력, 상황 판단력이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의 끝없는 악몽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유약한 왕자가 노련한 베데르 백작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잘못된 지각.

요제프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너무나 능숙하게 숨겨왔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바리 신의 영예, 베르단의 영속, 데르샤바크의 영광.’

그는 계속 같은 말을 속으로 외었다. 붉게 충혈된 눈을 느리게 끔뻑끔뻑하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의 정신이 몽롱해지고 고개가 까딱까딱 넘어가기 시작했다. 피곤이 극에 달한 것이다. 겨우 잠을 자나 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어디선가 한 번 겪은 듯한 기시감. 그가 발작하듯 몸을 움찔했다. 문밖에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후작님, 후작님을 만나길 청하는 분이 계십니다.”

“내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저, 그게…….”

알폰스의 타박에 우물쭈물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후작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아무래도 집사를 바꿔야 할 때가 온 듯했다. 그가 노기를 드러내려 할 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곤란하신 상황에 빠진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혼란스러운 왕성의 정세를 두고 볼 수 없어 직접 왔습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알폰스 후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목소리를 듣고 예상한 얼굴이 그의 바로 코앞에 있었다.

룩센투크의 모두가 아는, 그러나 감히 이곳에 직접 오시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이.

먼젓번의 불청객들과는 격이 다른 손님이었다.

* * *

며칠이 지났다.

요제프에게 편지 한 통이 왔다. 발신인은 도리 그레이드로, 그가 렝 백작가에 심어둔 첩자였다.

드디어 적기가 찾아왔다. 요제프는 렝 백작가로 향할 준비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마리엘라를 불렀다.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다녀올게.”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한 뒤 왕성을 나섰다.

물론 비밀리에 떠난 나들이였다.

왕자에게 작별의 키스를 받은 마리엘라는 지체 없이 율리안에게 달려가 보고했다.

“요제프가 출발했어요.”

“우리도 준비를 하지.”

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출복으로 갈아입기 위해서였다.

율리안의 환복을 돕던 마리엘라가 망설임 끝에 말문을 열었다.

“저…….”

“뭐지.”

“부탁드릴 게 있어요.”

그가 우물쭈물하지 말고 말을 해보라는 듯 눈썹을 까딱 올렸다.

“제가 아직 흑마법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러는데, 괜찮다면…….”

그녀는 불안한 듯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다 겨우 말을 이었다.

“분수에 넘치는 청인 것을 알지만, 하루 전에 미리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연습도 하고 마음도 다잡을 수 있게요.”

그 말을 들은 율리안이 픽 웃었다.

“모시던 주인을 죽인 하녀치고는 퍽 조잡스러운 걱정이군.”

“그건 시간과 장소가 정해진 살인이 아니었으니까요. 치열한 계산보단 악과 깡이 필요한 일이었죠.”

그가 말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눈치를 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안 되나요?”

“그래. 어려울 건 없지.”

계산을 끝낸 그가 가벼운 고갯짓과 함께 승낙했다.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찰나, 율리안이 그녀에게 선포했다.

“내일 낮.”

그녀가 순간 멈칫하며 되물었다.

“네?”

“요제프가 돌아온 직후, 긴급회의가 열릴 거야. 회의라기보다는…… 국왕파의 농성에 가깝겠지만.”

말을 살짝 끈 그가 씩 웃어 보였다. 사악한 것을 계획하는 듯한, 위태로운 미소였다.

“왕자비가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게 될 거고, 상황에 관여하려고 할 거야. 모두가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을 바로 그 순간.”

마리엘라의 갈색 눈동자와 율리안의 검은색 눈동자가 마주한다.

율리안이 그녀의 수를 다 간파했다는 듯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한다.

“그 순간이 바로 네 쓸모를 증명할 적기지.”

“…….”

마리엘라는 곧바로 침묵했다.

룩센투크는 리덴부르크 백작의 성과 다르다.

몇 가지 잔꾀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운이나 선의에 모든 것을 기댈 수도 없다.

까딱 잘못하면 죽음뿐.

곳곳에 사악한 뱀들이 입을 벌리고 있으니까.

* * *

렝 백작가는 놀라울 정도로 실용성에 치중한 곳이었다. 동양에서 수입해 온 도자기나 벽면을 장식하는 회화는 물론 흔하다는 헌팅 트로피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빈곤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바닥에 깔린 카펫은 왕성의 것보다 두툼하여 구름을 밟는 듯했고, 햇빛이 미처 드리우지 못한 곳에는 은은한 향이 나는 고급 초를 걸어 재력을 과시했다.

‘쓸모와 기품을 모두 취했군.’

렝 백작의 응접실로 향하는 짧은 길.

티 나지 않게 저택 이곳저곳을 살펴본 요제프가 저택 주인의 안목에 대해 간단하게 평했다.

곧이어 그가 응접실 문 앞에 다다랐다. 커다란 문이 열리자, 아서 렝이 한쪽 무릎을 꿇고 그에게 예를 갖춰 인사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왕자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누가 되진 않았는지 걱정이군요.”

“전하의 방문을 누가 감히 불편해하겠습니까. 그저 모든 것이 은덕이지요.”

평범한 대화로 시간 사이사이를 메꾸며, 두 사람은 각자 자리에 앉았다.

요제프는 사람 좋게 웃어 보였고, 렝 백작은 딱 필요한 만큼만 예를 지켰다. 언뜻 보면 문제 될 것이 전혀 없는 평범한 군주와 신하의 관계였지만, 둘 사이에는 그 두 사람만 느낄 수 있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오시는 길이 불편하지는 않으셨는지요. 아무래도 구석진 곳에 있는 영지라 길이 덜 닦인 곳이 많습니다.”

“어떤 길은 수도보다 더 매끄러웠습니다. 렝 상단의 영향력을 여실히 알 수 있었어요.”

“과찬이십니다. 상단 일을 하다 보니, 중요한 길목을 신경 써서 관리해놓았는데 그것이 왕자 전하께서 불편함 없이 여행하실 수 있게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좋은 곳입니다. 공기도 좋고, 자연 경치도 나쁘지 않군요. 기온도 왕성보다 따듯하군요. 앞으로 자주 방문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요.”

“그렇습니까.”

“백작께서 이곳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

뼈 있는 말에 렝 백작이 침묵했다.

요제프는 렝 백작이, 최소한 자신을 적대시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해냈다. 아마도 상단과 관련한 일에 훼방을 놓은 것이 그라고 확신을 한 듯했다.

왕성에 굴러다니는 멍청한 족속들과는 뼛속부터 다른 자다.

그는 이 예민하고 사나운 야생마 같은 남자를 어떻게 길들여야 할지 감을 잡았다.

‘지속해서 의심을 사느니, 군림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말을 질질 끌어 봤자 유약한 이미지밖에 남기지 않는다. 요제프는 단번에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듣자 하니 길러준 유모와 특별한 사이라고 하던데.”

유모.

그 단어를 꺼냄과 동시에 응접실의 공기가 냉랭하게 식었다. 아서 렝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가 바로 뚝 떨어졌다. 그는 양손을 깍지 낀 채로, 양팔을 팔 받침대 위에 얹었다. 그리고 등을 뒤로 젖혀 소파 등받이에 기댔다.

‘힘을 과시하는군. 걸리는 게 많은 사람이 취하는 태세지.’

요제프는 렝 백작의 몸짓 언어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렝 백작의 얼굴에서 노기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코로 숨을 한 번 크게 내쉰 렝 백작이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가족 같은 사이입니다. 아니, 사실 그보다 더 특별한 사이죠. 제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제 곁을 지켜주었던 유일한 존재입니다.”

“저런, 그런 소중한 사람이 갑자기 병상에 눕게 되었으니……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렝 백작의 시선이 흔들렸다. 백작은 빠르게 고개를 틀어 다른 곳을 바라보는 척했지만, 이미 요제프에게 모든 것을 들켜버린 후였다.

“백방으로 알아보는 중입니다. 세상은 넓고 명의는 많으니까요.”

“중병은 시간의 문제라던데. 세상은 넓고, 명의는 많지만, 적합한 의원을 구할 때까지 환자의 몸이 버텨줄지 조금 의문이군요.”

“원하시는 게 뭡니까.”

렝 백작이 태도를 바꾸었다.

그의 욕망이 튀어 오른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살리고 싶다.’라는 간절한 소망.

요제프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간 영리하고 신중한 선택들로 자신의 골머리를 썩였던 일들을 생각하면, 이번 일은 너무 쉬워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역시 사람을 움직이려면 약점을 잡는 것이 최고군.’

그는 이미 통달하고 있던 사실에 대해 다시금 감탄했다. 물론, 여유로운 말과 행동으로 렝 백작을 살살 약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요구하려는 게 아니라, 알아보려는 겁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그가 말을 끝내자마자, 렝 백작이 빠르게 되묻는다.

요제프는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었다. 그러고는 양손을 깍지 끼고, 팔을 팔 받침대 위로 올렸다. 아까 전, 렝 백작이 보였던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한 것이었다.

그의 행동에 백작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요제프는 자신이 우위를 점했다고 확신했다. 거만하고 오만한 태도로 그가 말했다.

“그대가 내 호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

“…….”

백작은 입을 다물었다.

“왕성에 폐병에 정통한 의원이 있지.”

요제프는 메를린의 건강 악화와 자신은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굴었다.

렝 백작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독을 썼다는 건 무덤까지 갖고 갈 생각이었다. 권위적인 은인이 되고 싶은 거지, 악독한 폭군이 될 생각은 없었으니까.

렝 백작은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멍하니 테이블 위를 응시하다가, 불안한 듯 턱을 매만지며 시름에 잠겼다가, 고개를 들어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든 결심을 마친 듯, 흔들림 없는 눈을 하고 물었다.

“대가는 무엇입니까.”

“그대에게 영광스러운 자리를 내릴까 하는데.”

왕성 룩센투크에서 재상 두 명이 연달아 죽었다는 것은 나라 밖까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머리 좋은 렝 백작이 그걸 넘겨버릴 일은 없었다. 왕자가 자신에게 재상 자리를 맡길 생각이라는 것을 눈치챈 백작이 빙 둘러 물었다.

“전하의 꼭두각시가 되라는 말입니까.”

“모든 상황을 통제할 생각은 없어.”

요제프는 선심 쓰는 군주인 양 굴었다.

렝 백작이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는 인형이 되란 말씀이시군요.”

“거기까지 부정하진 못하겠군.”

요제프가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했다.

“…….”

백작이 다시 시름에 잠겼다.

그가 일부러 대답을 끌고 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요제프는 느긋했다.

얼마나 시간을 끌든, 그 안에서 무슨 묘책을 생각해내든, 결론은 하나로 도달할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여유롭게 렝 백작의 표정 변화를 관찰하며 말했다.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을 터인데.”

그 말에 백작이 반응했다. 렝 백작은 그것이 자신을 향한 압박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그가 침을 꿀꺽 삼킨 후에 말했다.

“……조건이 있습니다.”

“들어보지.”

분명 별것 아닌 조건일 것이라 생각한 요제프가 선뜻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3차 성마전쟁 이후, 귀족들이 사병을 소유하거나 용병을 고용할 수 있는 숫자가 확 줄어든 것을 아시지요.”

“알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것을 제한하는 법은 그의 아버지가 만들었으니까.

요제프의 아버지, 요하네스 하이젠 데르샤바크는 전쟁을 통해 흑마법사와 귀족, 두 세력을 모두 억압해 왕실의 권력을 높이 세우려 했다.

그러다 역풍을 맞아 본인은 그레타에게 저주를 받고 왕실의 권력은 하염없이 낮아졌지만, 전쟁의 결과에 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왕가는 귀족들에게 권위를 나누어주는 대신 사병을 둘 권리를 빼앗아갔다.

고조부 바욘 1세부터 조금씩 추진해왔던 일이 마지막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덕분에 같은 나라의 귀족이 사병으로 반란을 일으킬까 전전긍긍할 일은 없었다.

“요즘 국경 지대에 도적이 많아 골칫거립니다. 나라 법을 지키며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어요. 우선 그것을 풀어주십시오.”

국경의 도적 역시 요제프가 잘 아는 일이었다. 그곳에 도적이 성행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 자신이니까.

그는 이제 막 문제점을 자각한 것마냥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척했다.

“얼마나?”

여기까지는 여유로웠다. 여기까지는 말이다.

두루뭉술한 요제프의 대답을 들은 렝 백작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숨기려 다급하게 무심함을 연기하는 패배자에서, 모든 패를 드러내고 상대의 목을 물어뜯을 준비를 끝마친 사자로.

“글쎄요, 한 백이십 년 전의 법을 참고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

이번 침묵은 요제프의 몫이었다.

렝 백작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이어 말했다.

“바욘 2세 말입니다.”

바욘 2세까지만 해도 영주들은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사병을 가지고 있었다.

렝 백작이 말하고자 하는 말은 명확했다. 반란을 일으킬 권리를 자신에게 달라는 말이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잃을 위기에 처한 남자가 취할 자세는 아니었다.

요제프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역할극은 여기까지 할까요.”

탁.

렝 백작이 테이블 위로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알이 큰 반지 하나가 그들 사이에 놓였다.

* * *

요제프와 율리안. 마리엘라를 괴롭게 하는 핵심 원인인 두 사람이 왕성을 비웠다. 그녀는 그들이 근처에 없다는 것만으로도 숨이 탁 트이고, 긴장감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침대에 몸을 누이고 푹 쉴 수도 있었지만, 그 대신 마리안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마리!”

마리안은 마리엘라를 격하게 반겼다. 그녀는 데이지에게 차와 다과를 내오도록 했다.

데이지는 다른 하녀들에게 왕자비의 명을 전하며 기분이 묘해짐을 느꼈다.

하녀를 위해 테이블을 꾸리는 시녀라니.

‘보통 하녀가 아니긴 하지만…….’

그녀는 범상치 않았던 두 번째 만남을 떠올리며 헛헛하게 웃었다. 말로 표현하거나 생각으로 정의 내리기 힘든 감정이었다.

그 감정의 끝에 자괴감과 자조감이 끈끈하게 맞붙어 있었다.

왕자비와 시녀와 하녀.

전혀 다른 신분의 세 여자가 한 테이블에 앉았다.

마리엘라는 데이지의 감정을 눈치챘으면서도 모르는 척 굴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 데이지가 그녀에게 가진 감정에 악의는 있으나 적의는 없었다. 둘, 지금은 저딴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첫 번째 이유보다 두 번째 이유가 비중이 큰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아, 제가 할게요. 이건 제 일이니까요.”

마리엘라는 영리한 하녀다. 그녀는 눈치 없이 데이지가 따라주는 차를 마시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찻주전자를 들었다. 마리안과 데이지에게 차례대로 차를 따른 다음, 자신의 잔도 채우고 자리에 앉았다.

마리안이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얼굴이 반쪽이 된 것 같아. 공작이 괴롭히는 건 아니지?”

마리엘라가 싱긋 웃었다.

“통속 소설 작작 읽으세요. 백작님이 왕성에서도 그러고 있으면 그것들을 모조리 찾아 불태우라고 하셨어요.”

마리안이 입을 삐죽댔다.

“아니, 왜 맨날 나만 가지고 그래.”

“사고를 치시잖아요, 사고를.”

두 사람이 한창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무렵이었다.

똑똑.

누군가 처소의 문을 두드렸다.

문가에 가장 가까이 앉았던 데이지가 고개를 돌렸고, 그다음이 마리엘라였다.

“왕자비 전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시종장의 목소리였다. 마리안이 답했다.

“들어오세요.”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다급한 표정의 시종장이 걸어 들어온다. 그의 한쪽 손에는 편지가 한 통 쥐어져 있었다.

“…….”

시종장은 담담한 얼굴로 마리엘라에게 편지를 건넸다.

“공작께서 이것을 부탁하셨습니다.”

‘공작? 시종장도 바이르 공작의 편인가?’

율리안의 마수가 대체 어디까지 뻗쳐 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녀는 서둘러 편지를 뜯어보려 했다. 마리안과 데이지의 관심이 편지의 내용으로 향했다. 그러자 시종장이 덧붙여 말했다.

“은밀히 열어 보시라고 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편지를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종장은 마리엘라에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보내는 눈짓은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어서 빨리 편지를 확인하라는 뜻이었다.

마리엘라는 시종장이 자리를 뜨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급한 일이 있어 먼저 가볼게요.”

“벌써? 조금 더 있다 가지…….”

“아뇨. 하녀의 신분을 망각할 수는 없죠.”

마리안이 만류했지만, 그녀는 단칼에 그것을 끊어 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자비의 처소를 벗어난 구석진 곳.

그녀는 주변을 살핀 뒤 얼른 편지를 뜯어보았다.

어제저녁부터 도리 그레이드가 보이지 않습니다.

“…….”

손끝으로 짚어가며 편지를 다시 읽었다.

편지의 내용은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일단, 이 편지는 푸른 늑대 기사단에게서 온 것이다. 푸른 늑대 기사단은 요제프의 친위대 같은 존재였다. 요제프가 마리엘라에게 그들의 필체를 모두 외우게 했기 때문에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건 요제프에게 가야 할 편지야.’

이것으로 알 수 있는 정보가 있었다. 시종장은 여전히 요제프의 편이다. 그가 이것을 굳이 ‘공작의 편지’라 한 것은 그녀를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빼내기 위한 술수였을 뿐이었다.

율리안의 손길이 거기까지 뻗치지 않은 것에 대해 일단 안심이 되었다.

그녀는 한 번 더 편지 속 문장을 읽었다.

도리 그레이드.

이번에는 그 이름에 눈길이 갔다.

그녀는 곧바로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녀가 얼굴도 본 적 없는 자의 이름이었다.

‘메를린이었던가.’

렝 백작이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

먼 타국에서 건너왔다는 중년의 여성.

요제프는 첩자를 시켜 메를린이 독을 섭취하게 했다. 메를린에게 쉽게 독을 먹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려면 첩자는 여자여야만 할 것이다.

‘도리 그레이드는 백작가에 보낸 첩자의 이름이겠군.’

이제 마지막 문장만 남았다.

보이지 않습니다.

그녀는 그 문장 끝의 온점을 빤히 바라보다가 편지를 품 안에 숨겼다.

‘요제프가 보낸 첩자에게 문제가 생겼어. 아마 존재를 적발당했겠지.’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뛰듯이 걸었다.

‘그렇게 된 원인은 나일 테고.’

눈에 닿지 않는 곳에서, 일이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것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라고 생각했다.

율리안의 손에서 잠시 벗어날 기회.

* * *

요제프에게 갔어야 할 편지가 마리엘라에게 왔다. 그녀는 요제프의 최측근으로, 그가 가장 믿는 자 중 하나다. 율리안이 그녀를 죽이지 않고 곁에 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왕자와 가장 가까운 첩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마리엘라의 가치는 온전히 요제프에게 달려있다.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가 계속 그녀를 믿게 해야 한다.

‘편지를 받고도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바로 의심을 사겠지.’

왕성을 비울 명분이 생겼다.

율리안이 명령 외의 짓을 벌였다고 몰아세우면, 요제프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무슨 행동이라도 하는 시늉을 해야 했다고 둘러대면 되었다.

설마 그녀가 마리안에게 저주를 걸기 싫어서 자리를 피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터였다.

‘율리안은 마리안을 내일 낮에 쓰러질 수 있도록 저주를 걸라고 했어. 나 때문에 모든 계획을 흐트러트릴 수 없으니, 내일 낮까지 적당한 이유를 대 시간을 벌면 이 일을 회피할 수 있다는 뜻이야.’

시간이 없다. 율리안이 왕성으로 돌아오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녀는 발을 더 바삐 움직였다. 저 멀리 걸어 나가는 시종장의 등이 보였다. 마리엘라는 하녀의 신분도 잊고 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시종장님!”

느긋하게 걷던 시종장이 뒤를 돌아본다. 그녀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 헉헉대며 말했다.

“남들의 눈을 피해 빌릴 수 있는 말이나 마차가 있나요? 최대한 빨리 달릴 수 있었으면 하는데요.”

시종장은 그녀와 요제프의 사이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딱 적정선을 지켜서 말했다.

“물론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말을 탈 줄 모르고, 마차를 탈 신분으로는 안 보이는군요.”

대화를 이해하려면 앞뒤 상황과 어조를 파악해야 한다. 마리엘라는 고개를 내려 자신의 구두와 옷을 내려다보고는 두 번째 요구를 했다.

“왕비님의 드레스도 빌리고 싶네요.”

그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따라오시죠.”

그리고 그녀를 이끌었다.

* * *

독과 약을 담아 도리 그레이드에게 보낸 반지가 탁자 위에 놓여 있다.

요제프는 느긋한 모습으로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렝 백작이 어금니를 짓씹으며 말했다.

“저를 두고 재미있는 게임을 하셨더군요.”

“게임의 이름은 ‘해와 바람과 나그네’라네.”

“나그네가 모든 것을 눈치챌 거라는 변수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나그네 혼자서는 눈치챌 수 없다는 걸 알지. 왔다 갔나?”

요제프가 교활한 얼굴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사실 이것은 위장이다.

저쪽 진영의 ‘진짜 적’과 그가 대등하다고 믿게 만들기 위한 위장.

요제프는 지금 가지고 있던 약점을 놓쳤고, 역으로 함정에 빠졌다. 상황을 모면하기는 글렀으니 적의 정보라도 알아내고 돌아가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렝 백작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다. 요제프의 의도를 곧바로 파악한 백작이 낮게 웃었다.

“글쎄요.”

고작 몇 마디가 오갔을 뿐이지만, 두 사람은 모든 상황을 완벽히 파악했다.

요제프는 깔끔하게 모든 것을 포기했다. 더 이상 이자에게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는 머리를 굴리거나 과장되게 꾸며내는 대신 직설적으로 물었다.

“죽였나?”

그가 보낸 첩자, 도리 그레이드에 관한 질문이었다.

렝 백작이 단호하게 한 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저는 아주 조심스러운 사람이라-”

렝 백작의 손이 테이블 위로 향했다. 그는 올려두었던 반지를 머리 위로 들어 이리저리 구경하는 시늉을 하며 말을 끝맺었다.

“모든 것은 천천히, 아주 느긋하게 즐기면서 합니다.”

아직 살아 있으나, 돌려줄 생각은 추호도 없으며, 끔찍한 고문 후에 죽일 예정이라는 말이었다.

요제프는 잘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리 그레이드의 목숨 따위,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다는 태도였다.

잠시의 정적.

차가 식어 맑은 색을 드러냈다.

백작은 우아하게 그에게 차를 권했다.

“더 드시겠습니까?”

요제프가 어깨를 으쓱했다.

“무엇 하러?”

그의 드러난 민얼굴에 렝 백작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깔끔하시군요.”

“내가 좀 미련이 없는 편이지.”

요제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데리고 온 호위 기사들과 백작가의 기사들이 서로를 주시했다.

여차하면 검이라도 뽑을 기세였다.

요제프는 손을 들어 자신이 기사들이 괜히 앞서 나가지 않도록 했다.

굳이 저들을 자극해 유혈 사태를 일으킬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해서 얻게 되는 것도 없고.

그는 쓸데없는 일은 하지 않는 실리주의자였다.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예를 갖춰 자신을 마중 나온 렝 백작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참으로 아까운 인재다.

왕성에서 만나 맞부딪칠 것으로 생각하니 하염없이 아쉬웠다.

“살펴가십시오, 전하.”

“충고 하나만 해도 되나?”

“경청하겠습니다.”

“곧은 것은 꺾어지기 마련이야.”

그 말에 렝 백작이 표정 변화 없이 대꾸했다.

“글쎄요.”

두 사람이 시선을 마주했다.

“태풍이 오면 나무는 꺾어진다는 말이 있지만…… 아직 전하는 태풍이 아닙니다.”

“…….”

“저도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는 요제프에게 귀엣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

요제프의 기사들이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지만, 요제프의 저지로 검을 뽑지는 못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아서 렝은 왕자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흔들면 열매가 떨어질 거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소중한 걸 바깥으로 내세우기보다, 속으로 품어내는 사람이니.”

다시는 메를린을 건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요제프의 입에서 두 번째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대답 없이 말 위로 올랐다.

“이만 가지.”

그리고 기사들을 이끌고 떠났다.

패배한 자 특유의 독기가 그의 두 눈동자 너머로 형형했다.

렝 백작은 그 자리에 서서, 요제프의 뒷모습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쉽지 않은 상대였다. 지금은 여차저차 막아 냈다지만 그다음도 가능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몸집을 더 줄여야겠군. 더는 저자가 탐내지 않게.’

그다음을 대비하고 있는 렝 백작에게 그의 오른팔, 칼이 다가와 조용히 소식을 전했다.

“근처 영지에서 낯선 마차 하나가 돌아다닌답니다. 타고 있는 것은 여자 하난데, 근처의 귀부인은 아니라더군요. 이번 일과 관계된 자일까요?”

여자.

오랜 용병 생활로 날카롭게 연마되어있던 본능적 감각이 번뜩였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여자가 요제프와 긴밀한 관계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잡아 와. 우리도 그쪽의 약점을 잡고 있어야겠으니.”

렝 백작이 자신의 수하에게 명령했다.

* * *

덜컹덜컹.

마차가 평소보다 과하게 들썩인다. 마차를 끌고 있는 말이, 적정 속도를 초과하여 달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리엘라는 빠르게 변하는 창밖의 풍경을 응시하며 엉켜있던 머릿속을 정리했다.

‘율리안은 처소 책상 위에 쪽지를 남겼으니 됐어. 이제 남은 것은 요제프가 어느 길을 통해 돌아오느냐.’

그녀는 아까 외운 이 근처의 지리를 떠올렸다.

요제프가 언제, 어느 길을 통해 수도로 복귀할지 예측해야 했지만, 주어진 시간과 정보가 너무 적었다. 거기다 렝 백작의 영지 주변은 잘 닦아놓은 길이 너무 많았다. 그것들은 죄다 변수로 작용했다. 머리를 굴리면 굴릴수록 한숨만 나왔다.

쉬운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렝 백작의 영지에 직접 발을 들여놓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러나 그녀는 처음부터 그곳에 갈 생각이 없었다. 렝 백작의 영지에는 두 가지의 위험 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하나는 율리안의 계획이 진행되기 전에 요제프를 만나 그를 ‘진짜로’ 돕게 될 가능성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렝 백작의 수하들에게 목숨을 위협받게 될 가능성이었다.

그녀는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적당히 근처 영지를 배회했다가 요제프를 만나면 다급한 얼굴로 이러이러한 편지가 왔었노라 고하고 일을 끝마칠 생각이었다.

‘중간에서 엇갈리는 것도 나쁘진 않지. 어차피 내겐 마부라는 증인이 있으니까. 왕자를 위해 발 벗고 뛰는 모양새는 갖췄어. 하지만 좀 더 극적인 연출을 하고 싶은데…….’

과욕을 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마차가 갑자기 급정차했다. 아무 대비도 하고 있지 않던 그녀는 자리에서 튀어 올라 앞좌석에 이마를 받았다.

‘뭐야?’

그녀가 마차 문을 열어 마부를 다그치려 한 찰나였다.

훽.

불현듯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보다 조금 둔탁한 소리였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검을 휘두르는 소리인 것은 분명했다.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자각하지 못한 틈에 검을 든 누군가가 마차에 접근한 것이다.

마리엘라의 몸이 굳었다. 그녀는 불안한 예감을 안고 천천히 고개를 바깥으로 돌렸다. 말에서 내려 이상한 걸음걸이를 하는 마부가 보였다.

자세히 살피니 그는 목을 부여잡고 허우적거리는 중이었다.

그의 목에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살수?’

그녀는 라데치 정신병동에서 마주했던 암살자를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지금이 그때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도망치거나 숨을 곳이 많았던 정신병동과 달리, 지금 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마차 하나뿐이었다.

허허벌판 위에 마차 한 대.

지금 문을 닫고 잠금쇠를 걸어 잠근다고 해서 생존 확률이 높아질 리는 없을 것이다.

‘귀부인인 척 연기하자. 도적이라면 몸값을 뜯어내기 위해 며칠은 더 살려 둘 거야.’

그녀는 침착해지려 애쓰며 마차에서 내렸다.

공포에 질린 얼굴로 바닥을 기는 불쌍한 마부를 한 번, 검을 들고 자신의 앞에 선 낯선 남자들을 한 번 번갈아 바라보았다.

남자들은 말을 타고 있었으며 가지각색의 무기를 소유하고 있었다. 딱 봐도 기사의 행색은 아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동네 건달이라면 옷차림이 좀 더 자유분방해야 하건만, 입고 있는 천의 재질이나 색감 등이 미묘하게 통일되어 있었다.

마치, 어딘가에 고용된 존재처럼.

‘용병이야.’

마리엘라는 단박에 그들의 정체를 파악했다.

저들은 렝 백작가에 고용된 용병이다.

첫 번째 의문이 풀리자 두 번째 질문이 뒤따라왔다.

‘하지만 여기는 백작가의 영지가 아닌데, 왜?’

그녀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진다.

더 이상 혼자 자문자답할 시간이 없다. 최대한 이런저런 말을 걸며 그들의 목적을 파악해야 했다.

“마차를 세운 목적이 뭐지?”

그녀는 건방진 귀족 아가씨 연기를 했다.

남자들은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가장 맨 앞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아이고, 젊은 아가씨가 씩씩하기도 하지.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눈 하나 깜박 안 하다니.”

그녀는 곧바로 그들을 설득하려 했다.

“돈이 목적이라면-”

그러나 누군가가 그녀의 말을 말끔히 잘랐다.

무리의 맨 뒤에 있던, 상대적으로 젊고, 나약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였다.

“이런 당찬 아가씨가 우리 저택에도 한 명 있었죠. ‘도리 그레이드’라고.”

요제프가 렝 백작가에 보낸 첩자의 이름이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

첩자의 이름을 댄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남자의 이름은 칼 바첸. 렝 상단의 핵심 간부이자, 아서 렝의 오른팔이었다.

“저희 주인께서 당신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

“순순히 따라오시겠습니까?”

그녀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겁먹은 얼굴도, 앙칼진 눈빛도 모두 보류했다.

지금 무슨 행동을 하든 독이 된다. 아서 렝을 안다는 것도, 왕성에서 왔다는 것도, 그녀의 신분이 일개 하녀라는 것도 모두 숨겨야 했다.

그녀가 말없이 그들을 응시하자 칼이 자신의 부하들에게 턱짓했다. 용병 둘이 말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중 하나의 칼집에 피가 묻어 있었다. 아마 그가 마부의 목을 베었을 것이다.

그녀는 방금 숨을 거둬 서서히 식어가는 마부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마부의 몸에 난 자상을 보아하니 용병의 검 실력이 왕성의 기사들에 비해 뒤처지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지워버리는 것이 나았다.

그들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을 때였다.

“멈춰!”

멀리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우렁찬 고함이 들렸다.

빛으로 빚어 놓은 것 같은 신성한 얼굴과 바람에 나부끼는 검은 머리.

율리안이었다.

대륙에 하나뿐인 소드마스터, 절대 권력을 행사 중인 교황의 양아들, 마녀에게 멸족당한 바이르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 당장 떠오르는 큼지막한 수식어가 세 개나 되었다.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를 알아보았다.

‘바이르 공작이 갑자기 왜?’

칼은 곤욕스러웠다.

율리안은 순식간에 마리엘라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가 탄 말이 마리엘라와 용병 사이를 갈랐다. 졸지에 그의 등 뒤에서 보호받게 된 그녀가 물끄러미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정보 사이에, 이물질이 끼어 시야를 흐리는 느낌.

“율리안 폰 바이르 공작이다. 그대들의 주인과 아주 막역한 사이지. 이번 일을 도운 게 누구라고는 듣지 못했나 보지?”

“백작님의 수하, 칼 바첸입니다. 다시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실례지만 저분과 공작님과의 사이를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이웃 영지에서 길을 잃은 아가씨를 정중히 모시라는 백작님의 명이 있어서 말입니다.”

“내 수족이다.”

율리안이 차갑게 답했다.

칼은 아쉬운 듯 눈을 굴리더니, 곧 상황에 순응하고 뒤로 물러섰다.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저희 백작가는 은혜를 잊지 않으니까요.”

그녀가 긴장했던 것이 우스워질 정도로 너무 쉽게 상황이 끝났다.

칼과 용병들이 물러나고, 해가 어둑어둑 저무는 저녁이 다가왔다.

우습게 보이지 않기 위해 꼿꼿이 자리에 서 있었던 마리엘라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쳐 마차에 등을 기댔다. 다리에 힘이 풀렸기 때문이었다.

율리안이 말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잡고 냉담한 눈빛으로 얼굴을 훑었다.

마리엘라는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운 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천천히 몸을 더 들이밀었다.

그녀는 벗어나고 싶었지만 시선조차 피할 수 없었다.

“내가 분명 말했지. 내 명 밖의 일을 하면 손발을 잘라버릴 거라고.”

피 냄새가 흥건한 위협적인 말.

그러나 그녀가 주목한 건 말의 내용이 아니었다.

이마 위, 턱 끝, 목선에 방울방울 맺힌 땀방울.

의도치 않게 터져 나온 감정들.

“…….”

그녀는 그것들을 응시하며 속으로 그의 동선을 예측했다.

율리안은 그녀가 떠나자마자 룩센투크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녀가 남긴 쪽지를 발견하자마자 한달음에 이곳까지 달려왔을 테고, 그녀가 있는 곳을 찾아내기 위해 렝 백작가 근처의 영지를 들쑤시고 다녔을 것이다.

‘왜?’

의문이 들었다.

왜 율리안은 자신을 구하러 왔는가.

그것도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면서.

“죽고 싶은가 보지?”

“…….”

날카롭고 차가운 말을 귓등으로 넘기며 그녀는 계속 생각했다.

그가 보여주려는 것과 보여주는 모습이 다르다. 그 간극이 마리엘라를 혼란스럽게 했다.

* * *

마리엘라는 율리안과 함께 복귀했다.

두 사람은 요제프의 의심을 대비해 미리 알리바이도 맞춰두었다.

그녀의 복잡다단했던 하루는 ‘요제프에게 편지의 내용을 전하러 가다 강도를 만났고, 그곳을 지나가던 율리안의 도움을 받아 돌아올 수 있었다.’라는 간단한 문장으로 은폐되었다.

율리안은 곧 있을 사냥대회에 대비해, 사냥 연습을 하느라 근처 숲을 방문한 것으로 해 두었다.

“헛짓거리할 생각 말고, 그대로 네 방으로 돌아가.”

어두운 복도, 율리안이 피곤한 얼굴로 그녀의 등을 밀었다.

마리엘라는 차오르는 의구심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꾸벅 인사했다.

“좋은 밤 보내시길, 공작 각하.”

“…….”

그는 대꾸 없이 뒤를 돌았다. 싸늘한 반응이었다.

그녀는 기분 상해하는 대신, 그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저 남자의 진짜 속내가 뭐지.’

율리안에게서 요제프와는 정반대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요제프가 사람의 손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영악한 뱀 같은 느낌이라면, 율리안은 낡고 텁텁한 나무 상자 같다.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나마 짐작해낼 수 있을 때는 상자가 흔들릴 때뿐.

‘쉽게 마음을 내주지 않으니,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젓고는 방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또 다른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걱정했어.”

요제프였다.

그가 그녀를 한 품에 안았다. 다소 우악스러운 포옹이었다.

마리엘라는 빠져나가려고 버둥대는 대신 축 늘어진 몸으로 답했다.

“율리안 공작이 전서를 보냈을 텐데요. 저를 발견해서 데려간다고요.”

“아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니까.”

시각과 촉각이 다르듯이.

입안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울렸다.

그는 그녀를 한 번 더 강하게 껴안은 뒤에야 품에서 놓아주었다.

“잘 돌아왔어.”

그녀가 다친 곳이 없나 확인하며 요제프가 말했다.

“운이 좋았죠.”

마리엘라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대충 으쓱하며 답했다. 물론 이것은 어제 있었던 일에 관해 최대한 적게 꼬투리 잡히기 위한 수였다.

평소와 같이 무심한 그녀의 태도에 요제프가 싱긋 웃더니 가벼운 몸짓으로 침대 위에 앉았다.

“두 번 다신 그런 위험한 짓 하지 말란 잔소리는 해봤자 귓등으로도 안 듣겠지?”

그녀가 그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 그의 뺨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아시니 다행이네요.”

요제프는 앉아 있었고, 그녀는 서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눈높이가 조금 더 높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요제프는 한 마리의 순종적인 강아지 같았다. 평소에 그녀에게 보여주는 모습과 상반된 면모에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왜 웃어?”

“그냥 기분이 이상해서요. 반년 전까지만 해도 전, 귀족의 정부가 되기 위해서라면 못 하는 것이 없었던 시골의 비천한 하녀였는데.”

그녀는 그를 향한 호감을 숨기지 않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

앞으로 어떤 일을 벌이든, 누구의 편에 서든, 이 한 가지는 명확했다.

요제프의 눈을 사랑으로 가려 놓아야 한다. 일이 쉽게 풀리려면 그 방법이 제일이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서로의 신변을 드러내지 않고 시시하고 일상적인 대화만 나눴던, 반년 전의 여느 날처럼.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가 너무나 다정해 지난 몇 개월 사이의 다사다난했던 일들은 모두 증발해 버린 것 같았다.

허름한 방, 일렁이는 촛불, 서로에게 호감인 남녀. 모든 것이 과거와 흡사했다.

“……그레이드 양에게 조금 먼 핏줄의 외조카가 하나 있다더군. 그 아이에게 보상금을 치러주려고 해. 그녀의 시신을 가족묘에 이장하는 조건으로 말이지.”

‘결국, 죽었군.’

그녀는 머릿속으로 이름밖에 모르는 ‘그레이드 양’을 떠올렸다.

불쌍한 여자.

그녀는 자신의 죽음이 왕자의 가장 친한 친우와 가장 사랑하는 여자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걸 짐작하기나 했을까.

안타깝긴 했지만 후회하진 않았다. 그녀가 죽지 않았다면 다른 이가 죽었을 테니까.

왕성 룩센투크에서는 모두가 체스 말이다.

이용당하기 싫으면 이용해야 하고, 죽기 싫으면 죽여야 한다.

말을 휘두르는 왕자 역시 이 잔혹한 게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마리엘라는 요제프의 손등을 토닥였다.

“그렇게 자책하실 필요는 없어요.”

“자책? 내가 왜?”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턱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한 표정에 그녀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곧이어 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마리엘라, 이건 죄책감의 값이 아니야. 아직 내 편인 사람들을 단결시키는 수법이지.”

돌아오는 말이 너무나도 요제프다워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소름 끼친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리엘라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다. 그가 그녀의 삐져나온 옆머리를 다정히 넘겨주며 말했다.

“아무튼, 아서 렝을 끌어들이는 건 실패했어. 그와의 눈치 게임에서 장렬하게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래서 그다음은 어떻게 할 계획이시죠?”

“지혜롭고 현명하신 우리 왕자비에게 모든 것을 걸어야지. 마리안의 횡포가 재상이 될 아서 렝을 잡아낼 수 있을까?”

그녀가 질색을 하며 물었다.

“농이죠?”

“진심이야.”

그가 위험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

마리엘라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돌아온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요제프가 그녀의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그는 아이처럼 칭얼거리며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줘, 마리엘라. 내가 푹 잘 수 있게.”

“여전히 어리광이 심하시네요.”

그녀의 무뚝뚝한 대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품을 파고들었다.

“한 번만 봐줘.”

내일부터 시작될 고된 싸움을 위해 깊은 휴식을 취해야 하니까.

“…….”

그건 그녀가 질 수밖에 없는 마법의 말이었다.

그녀는 잔말 없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말 대로 그에게는 휴식이 필요했으니까.

앞으로 다가올 끝없는 패배를 대비한 깊고 긴 휴식이.

* * *

날이 밝았다. 마리엘라는 요제프의 명을 받아 마리안을 모시고 산책하러 나갔다. 산책 시간을 질질 끌다가, 정오가 될 때 즈음 성으로 돌아왔다.

왕자비의 처소로 향하는 많고 많은 길목 중, 왕자의 집무실을 지나치는 복도를 선택했다. 물론 모든 것은 요제프의 계획하에 진행된 일이었다.

“왕자 전하, 이 일을 이대로 넘겨버리시면 안 됩니다.”

“지난번 같은 과오를 벌일 수는 없습니다.”

“제발 저희의 말을 귀 기울여 주십시오.”

왕자의 집무실 밖이 소란스러웠다.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국왕파의 귀족들이 모두 모여 농성 중이었다. 그들은 먼발치에서 왕자비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배짱을 부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무실 문이 열렸다. 귀족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들어갔다.

“저것들이 대낮부터.”

그 꼴을 본 마리안이 탐탁지 않다는 얼굴을 했다.

마리엘라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굴었다.

“다른 길로 갈까요?”

“흠…….”

마리안의 입가가 삐죽삐죽하다. 마리안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드레스 자락을 잡고 집무실이 있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니.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와야겠어.”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이 위풍당당했다.

“제발 사고만 치지 마세요.”

마리엘라는 핀잔을 주는 척하면서 마리안을 따랐다. 그녀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 * *

“저들의 간악한 수법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선왕께서 어찌 지키신 나라이신지 생각해주십시오.”

집무실에는 갑자기 들이닥친 대신들의 피 끓는 토로가 이어졌다.

베데르 백작은 귀족들의 뒤에서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알폰스 후작은 불편함을 잔뜩 드러낸 얼굴로 고개를 한쪽으로 돌려 딴 곳을 보았다.

그들보다 먼저 요제프를 찾아와 집무실을 방문했던 율리안은 졸지에 구석으로 밀려났다. 율리안은 팔짱을 끼고 서서 그들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완벽한 제 삼 자의 자세였다.

요제프도 율리안처럼 심드렁한 태도로 일관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요제프는 책상에 바른 자세로 앉아 그들의 말을 경청하는 몸짓을 보이며 말했다.

“경의 말이 맞습니다. 선왕을 생각한다면, 국정 운영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야 하지요.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으니 조금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군요. 대체 ‘저들’이 누구죠? 간악한 수법으로 이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는 자들이 왕성에 있단 말입니까?”

국왕파 귀족들이 헛기침을 한다. 아무리 그래도 귀족파를 적이라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평판을 떨어트리는 짓일 뿐만 아니라, 상대 진영이 꼬투리를 잡고 파고들 빌미를 주는 행동이었다. 그들은 급히 말을 정정했다.

“저희의 말은 이번 재상은 꼭 저희 중에서 뽑으셔야 된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거센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집무실 안에 있던 이들 모두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어머.”

하나도 놀라지 않았으면서 입가에 손을 올리고 놀란 척을 하는 가증스러운 여자를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마리안 왕자비 말이다.

“…….”

귀족들의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지난번에도 이와 비슷한 일을 한번 겪었던 것 같은 기시감 때문이다. 모두들 본능적으로 ‘궁형 사건’을 떠올렸다. 그들의 안색에 불편함이 서렸다.

궁형 사건 때는 마리안과 국왕파에게 ‘귀족파’라는 공통된 적이 있었지만 오늘은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들이 그녀와 붙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눈치 없이 마리안을 반기는 이가 한 명 있었으니, 바로 요제프였다.

“어서 오세요, 나의 물망초. 하늘거리는 드레스가 당신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하는군요.”

“아이참.”

그가 벌떡 일어나 마리안을 무대 중앙으로 이끌었다.

마리엘라는 마리안의 뒤를 따르는 척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근처로 갔다. 이동하는 도중에 구석에 서 있던 율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율리안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동선을 따라 움직인다. 그녀는 급히 고개를 숙여 그의 시선을 피했다.

요제프와 손을 잡고 걸어올 때는 부끄러움 가득한 여인의 얼굴을 하던 마리안의 표정이 집무실 중앙에 다다르자마자 돌변했다.

그녀는 잔악한 폭군의 눈을 하고 그곳에 모인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죠? 오늘은 따로 회의가 없는 날로 알고 있었는데요.”

요제프가 마리안의 질문에 해맑게 대답했다.

“저에게 조언을 하러 달려온 충신들이지요!”

“조언이요?”

마리안의 한쪽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그녀의 시선이 근처에 있던 어느 늙은 귀족에게 돌아갔다.

늙은 귀족은 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했다.

“그것이 아닙니다. 저, 저희는 그저 왕자 전하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고자…….”

“담소라…….”

마리안이 미묘한 눈빛으로 말끝을 흐렸다.

꿀꺽.

귀족들은 모두 그녀의 입술을 응시했다. 그들은 모두 저 조그만 입에서 무슨 기상천외한 말이 나올지 두려워했다.

“정말 섭섭하군요. 저만 쏙 빼놓고 이런 정겨운 시간을 가지다니 말이에요.”

국왕파 귀족들이 말없이 서로 시선만 교환했다.

요제프가 마리안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추며 그녀를 달랬다.

“서운해할 것 없어요. 지금부터 이런 자리가 있을 때마다 참석하면 되는 문제니까요.”

“그것참 반가운 제안이네요. 적적하던 차에 정말 잘 됐어요.”

그녀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봄꽃같이 잔망스럽고 화사한 미소였으나, 귀족들에게는 단두대에 서린 이슬보다 서늘하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저도 들어볼까요?”

자연스럽게 요제프의 자리에 앉은 마리안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당당함을 넘어선 공격적인 태도였다.

“예?”

“담소 말이에요. 저 때문에 대화가 끊긴 것 같은데, 계속하세요. 저는 가만히 듣다가 대화에 참여하겠어요.”

입 잘못 놀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국왕파 귀족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마리안의 참여로 일이 참 곤란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침묵할 수도 없었다. 귀족들의 시선이 아까 전 요제프에게 ‘간악한 수법’ 운운했던 늙은 귀족에게 향했다.

졸지에 대표 발언자로 몰린 늙은 귀족이 난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재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만…….”

“아, 재상이요?”

마리안이 턱을 살짝 추켜세우며 중얼거리자, 대신들이 벌벌 떨었다.

“다, 다른 의미는 없었습니다.”

누군가의 의미 없는 변명에 그녀가 살짝 웃었다.

“저도 다른 뜻으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답니다. 계속 이야기해보세요, 남작.”

“제가 생각해보았을 때, 다음 대 재상은…….”

“예, 재상은요. 더 말씀을 해보세요. 저는 지금 두 귀를 열고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이게 그냥 담소라면 말이지요.”

“…….”

노귀족이 입을 다물었다.

다들 정치에 일가견이 있는 왕자비가 인정사정없이 귀족들을 몰아붙인다고 여겼지만, 마리엘라의 평은 달랐다.

‘담소란 단어에 꽂혔군.’

마리엘라가 아는 마리안은 꼬투리 잡기의 귀재였다. 마리안은 특히 단어 하나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에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마리엘라는 공손한 얼굴을 하고 주변의 분위기를 살폈다.

한 치 앞을 모르고 날뛰는 마리안과 마리안이라는 든든한 지원군을 끼고 기세등등한 요제프, 관망하는 척하면서 모든 상황을 주무르고 있는 율리안 그리고 그들 모두와 얽혀 있는 자기 자신.

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복잡해졌는지 모르겠다. 자신은 그저 귀족의 정부가 되고 싶었던 백작가의 하녀일 뿐이었는데…….

마리엘라가 속으로 자기 신세를 한탄하고 있을 때, 여태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베데르가 앞으로 나섰다.

“재상은 저희 중에서 골라주셨으면 합니다. 지난번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니까요.”

요제프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베데르 백작께서 저를 생각해 미리 인재를 찾아두신 거군요! 누구를 생각 중이신 건지 말씀해주시면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작금의 상황에 적합한 사람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베데르가 굳은 얼굴로 문가를 슬쩍 보았다.

저 문을 통해서 누군가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것이라는 암시로 보였다.

마리엘라와 요제프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한다.

‘렝 백작이겠지.’

그러나 뒤이어 나온 이름은 두 사람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알폰스 후작입니다.”

‘뭐?’

마리엘라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문가 근처, 다른 국왕파 귀족들과 멀찍이 떨어져 고개를 돌린 채로 서있던 알폰스 후작이 떨떠름한 얼굴로 요제프의 얼굴을 곧게 응시했다.

‘지금 이 선택이 요제프 전하를 배신하는 행동은 아니야.’

알폰스는 속으로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똑바로 걸어왔다.

뚜벅, 뚜벅, 뚜벅.

알폰스 후작의 진중한 발걸음 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커다랗게 울렸다.

“요제프 전하.”

그가 요제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알폰스 후작.”

요제프가 웃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마냥 속없는 척 굴고 있지만, 이것은 요제프의 마지막 수였다.

그가 평소에 알던 알폰스 후작이라면 이쯤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물러날 것이다. 후작은 원래 어리석어 보일 정도로 대쪽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오늘의 알폰스 후작은 평소의 모습과는 달랐다.

‘바리 신의 영예, 베르단의 영속, 데르샤바크의 영광.’

알폰스 후작은 요제프의 말에 결정을 철회하고 물러서는 대신에 눈을 감고 저 세 문장을 되새겼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알폰스 후작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요제프 하이젠 데르샤바크 전하.”

“…….”

“부끄러운 일이지만, 감히 청하옵니다. 제게 재상직을 주십시오.”

요제프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후작의 눈동자 안에 무언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열정이나 욕망과는 확연히 다른 결의 무언가.

* * *

갑작스레 변모한 알폰스 후작의 태도를 설명하려면 며칠 전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요제프가 첩자를 통해 약점을 알아낸 그날 밤으로.

마리엘라와 왕자가 독을 쓰니 마니 설전을 벌였던 그때, 율리안은 후작의 저택을 방문했다.

“곤란하신 상황에 빠진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혼란스러운 왕성의 정세를 두고 볼 수 없어 직접 왔습니다.”

후작은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공작께서 어떻게…….”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후작이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율리안은 당황하지 않고 후작을 움직일 수 있는 말을 던졌다.

“교황 성하의 뜻입니다.”

마침내 알폰스 후작이 발을 내디뎠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시내 중심가였다. 정확히는 붉은 사과 독서클럽 건물 앞.

율리안은 익숙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알폰스 후작은 제가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인지 긴가민가한 얼굴을 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어두운 복도.

믿을 것은 율리안이 들고 있는 램프 하나뿐이었다.

곧은 자세로 빠르게 앞서 걷기만 하던 율리안이 거대한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문손잡이 위에 손을 올린 그가 천천히 뒤돌아 알폰스 후작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왕자비는 마녀 혐의를 벗어났지만, 왕성에서 발견된 푸른 반점의 시체의 범인은 찾지 못한 게.”

“예?”

알폰스 후작이 벙벙한 얼굴로 되물었다.

영문을 모르는 노인과 모든 것을 통달한 듯 한 젊은이. 참으로 이상한 그림이었다.

“시체의 피부에 물감으로 얼룩을 만든 게 아닌 이상, 이 왕성 어딘가에 흑마법사가 있다는 뜻인데 말입니다.”

“…….”

난데없는 말에 의아함을 보였던 알폰스 후작이 가만히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왕자비의 마녀 혐의가 사라졌다고 살인을 한 흑마법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의 내면에서 그 사건을 내버려 두면 안 되겠다는 정의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을 때쯤, 율리안이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방 안에서 빛이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빛에 그가 눈이 질끈 감았다 떴다.

“바, 바이르 공작. 이게 무슨…….”

그리고 경황없는 얼굴로 율리안에게 대답을 촉구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그의 눈앞에는 그가 아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귀족파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율리안은 동요하거나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들을 소개했다.

“소개하겠습니다. 알폰스 후작. 이 모임의 대외적 이름은 ‘붉은 사과 독서클럽’이지만, 진짜 명칭은 따로 있지요. 맞춰보시겠습니까.”

알폰스 후작은 넋 놓은 표정으로 율리안과 테이블에 앉은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귀족파와 율리안, 후작은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왕자 전하의 최측근과 귀족파의 귀족들은 그동안 어떠한 접점도 보이지 않았다. 바꾸어 말한다면 애써 숨기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바이르 공작이 대체 왜?’

알폰스는 지금 이것이 꿈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가 끔벅끔벅 눈꺼풀만 움직이자, 성질 급한 누군가가 재빨리 설명했다.

“저희의 또 다른 이름은 ‘흑마법사 대책 본부’입니다. 교황 성하의 명을 받고 비밀리에 구성한 조직이지요.”

후작의 시선이 다시 테이블 위의 귀족들로 향했다.

“하나 당신들은…….”

그는 그곳에서 익숙한 얼굴을 보고 몸이 굳었다.

베데르 백작이었다.

“압니다. 대부분 귀족파로 구성되어 있지요.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저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

후작의 얼굴은 여전히 멍했다.

율리안이 그를 설득했다.

“지난 세 번의 전쟁 때문에 왕가는 마녀로부터 나라를 지킬 힘을 잃었습니다. 왕성의 흑마법사를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해서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나는……. 그러니까, 저는…….”

후작의 입에서 쉽게 그러겠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한시가 급했지만, 율리안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후작을 재촉하는 대신 부드럽게 못 박았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요. 이 모든 것은 교황 성하의 뜻입니다.”

후작이 무엇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리 신의 영예, 베르단의 영속, 데르샤바크의 영광.’

율리안의 입가가 올라갔다.

그는 꼿꼿한 후작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정확하게 알았다.

* * *

국왕파의 귀족들이 득실거리는 집무실.

베데르 백작은 세 치 혀를 이용해 망설이고 있는 요제프의 등을 떠밀었다.

“재상직을 할 만큼 덕망 높고 영예로운 사람은 알폰스 후작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그의 청을 헤아려주십시오.”

“맞습니다.”

“저희의 생각도 그러합니다.”

다른 귀족들이 백작의 말을 옹호한다.

마리엘라는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예측이 흐트러진다.

원인은 단 하나. 율리안의 의도적인 훼방이었다.

“마리엘라.”

모든 것이 혼돈에 빠진 이때, 마리안이 조용히 마리엘라를 불렀다. 마리엘라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마리안의 곁에 다가갔다.

“지금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나 지금 좀 헷갈리려고 해.”

마리안의 속삭임에 마리엘라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진심이었다. 알폰스 후작에 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마리엘라는 고개를 들어 율리안을 보았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한다.

속을 알 수 없는 새까만 눈.

심연의 중심이 저러할까.

끝없는 나락 속에 두 사람만 남은 것 같았다.

‘율리안이 날 속였어.’

렝 백작을 재상으로 만들겠다는 말은 처음부터 거짓이었다. 그는 그녀를 믿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양손을 꽉 쥐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배를 탄 상대인데.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써먹다니.

배신감과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마리엘라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감지해내지 못한 마리안이 두 번째 질문을 했다.

“그럼 내 기분대로 해도 되는 거지?”

“기분이 어떠신데요?”

“더러워. 뭐라 설명은 못 하겠지만 쟤네가 편 먹고 날 엿 먹인 느낌이야.”

아주 정확한 판단이었다. 마리엘라는 그 와중에 본능적으로 적군과 아군을 구분해낸 마리안의 본능적 감각에 감탄했다.

그녀가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좋을 대로 하세요.”

‘어차피 곧 쓰러지게 될 테니까.’

그녀는 율리안을 계속 주시했다. 그가 신호를 보낼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다.

시간에 맞춰 사람을 실신하게 만들어야 한다니.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준비를 단단히 해 놓은 것과 별개로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두려웠다.

긴장감으로 손에 땀이 뱄다.

“알았어. 그럼 내 마음대로 한다?”

마리엘라의 허락에 자신감을 찾은 마리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이목이 순식간에 집중되었다.

“이게 무슨 꼴이죠? 제게 담소를 나누는 것뿐이라 말씀하신 게 고작 십오 분 전입니다. 갑자기 재상이라니. 지금 저를 기만하시나요?”

베데르가 그녀에게 맞섰다.

“선을 넘지 마십시오. 마리안 왕자비 전하. 지금 전하께서 귀한 몸이시라는 것은 잘 알고 있으나,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왕가의 피를 이을 자를 속에 품은 것과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뜻은 동음이의어가 아니니까요.”

마리안이 입가를 올렸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뜻의 비소가 아니라, 꼬투리를 잡을 것을 찾았다는 의미의 환한 미소였다.

“유감이군요. 그건 그대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소 과장되고 익살스러운 제스처를 내보였다.

“아, 그게 아니면 저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계시나 봐요? 혹시 본인들이 이 나라의 주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

“왕자비 전하.”

“하실 말씀이 있다면 해보시지요, 백작.”

두 사람의 신경전이 팽팽했다.

왕자비의 등 뒤에 선 마리엘라는 바쁘게 이쪽저쪽을 보는 척하며 빨리 율리안이 신호를 보내길 기다렸다.

째깍째깍.

어디선가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그녀답지 않게 초조해 보이는 모습에 율리안이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그는 조용히 눈짓을 했다. 마리엘라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엘라는 마리안에게 더 가까이 접근했고, 그녀의 허리춤을 쿡 찔렀다.

“선을 넘은 건 제가 아니라…… 아!”

척추를 타고 빠르게 올라오는 통증에 마리안이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갑자기 식은땀이 삐질삐질 나고 머리가 멍해졌다.

‘뭐지?’

마리안은 말을 하다 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시비를 겨루던 이들이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창백해진 왕자비의 안색에 당황한 것이다.

하늘이 노래지고 시야가 뒤집힌다. 마리안은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몰랐다.

“아…….”

짧은 비명과 함께 마리안의 몸이 힘없이 뒤로 쓰러졌다.

“왕자비 전하!”

마리엘라는 괜히 소란을 피우며 마리안의 몸을 받았다. 곧 바로 요제프와 율리안이 다가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요제프가 다급한 목소리로 문밖의 시종에게 명령했다.

“의원을 데려와!”

왕성의 의원이 명을 받아 급히 집무실로 달려왔을 때, 방안은 소란 그 자체였다.

소파에 누워있는 왕자비, 귀족들은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우왕좌왕하고, 왕자비의 하녀는 파들파들 떨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대고, 왕자는 쉼 없이 부인의 손발을 주무르고 있었다.

의원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마리안 왕자비의 상태를 살폈다.

“흠…….”

의원의 이마 주름이 깊게 파였다.

“심각한 병인가?”

요제프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의원은 고개를 한 번 젓고는 공손하게 답했다.

“몸이 허약해지셔서 벌어진 일일 뿐, 생명에 지장은 없습니다. 공기 좋은 곳에 요양을 몇 달 하시면 곧 나으실 겁니다. 다만…….”

“다만?”

이번에는 율리안이 물었다.

의원은 말하기 껄끄럽다는 듯 입술 위를 침으로 축였다.

잠깐의 시간 후, 의원이 아주 조심스레,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태기가 느껴지지 않는군요.”

당연한 일이었다. 마리안과 요제프는 입 한번 맞춘 적 없는 사이니까.

하지만 그녀가 아이를 뱄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다른 귀족들에게는 그 말이 다르게 다가왔다.

“…….”

그것은 마리안의 거짓 임신으로 이득을 보았던 요제프에게도 엇비슷한 영향력을 끼쳤다.

그게 바로 율리안이 원한 모든 것이었다.

싸늘해진 분위기.

의원이 요제프의 눈치를 보며 중언부언했다.

“자세히 알아봐야겠지만 아무래도…….”

요제프는 굳은 얼굴로 의원의 말을 끊었다.

“알았다. 돌아가 보도록.”

그의 대외 이미지와는 다르게, 차갑고 단호한 모습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는 방금 준비해 둔 모든 것을 잃었다.

마리엘라는 저 기분을 알았다.

절망의 중압을 이겨내고 내디딘 첫걸음이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이었을 때의 황망함이란.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반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자신만만하던 요제프를 이렇게 몰아세운 것이 다른 사람도 아닌 마리엘라 본인이라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게 요제프는 조용했다. 쇼파 위에 곱게 누워있는 마리안을 바라보는 표정이 지나치리만치 잠잠했다.

그의 고요한 초록색 눈동자는 비석 위에 서린 녹색 이끼를 연상시켰다.

“다들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군.”

율리안이 친우를 대신해서 상황을 정리했다. 그는 몇 마디 말로 몰려든 귀족들을 쫓아냈다.

모두가 떠나고 네 사람만 남은 방.

황량한 분위기 속에서 마리안의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그래도, 너의 마리안이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렇지?”

요제프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농을 던졌다. 마리엘라는 그를 바라보던 고개를 급히 돌렸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율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

세 사람의 침묵과 시선이 오묘하게 엇갈렸다.

갑자기 마리엘라가 벌떡 일어났다.

“저는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깜박하고 못 한 일이 있어서요.”

그녀는 쓰러진 마리안을 등 뒤에 두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을 선택한 것이다. 매우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모르겠어.’

그녀는 혼란에 휩싸였다.

‘내가 어떻게 하는 게 옳은지, 대체 뭐가 맞는 건지.’

열어둔 창을 타고 넘어온 늦가을의 거센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그와 동시에 혼란스러운 감정이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마리엘라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선다. 그녀는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왕성의 정원은 변함없이 화사했지만, 정원을 품은 룩센투크는 끊임없이 변동한다. 그 안에서 균형을 잡고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인간들을 비웃듯.

요 며칠간의 기억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말을 타고 달려온 율리안의 모습과 희망을 잃은 요제프의 눈동자. 그리고 그것들에 흔들리는 마리엘라 자신.

그녀가 지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진짜로…… 하나도 모르겠어.’

모든 것이 휘청거린다.

각자의 중심을 잃은 채로.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순간이 새로운 균형점이 탄생하는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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