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8. 혼돈 (10/21)

<공금/갠소> 우리끼리만 보기!!! by S.R

리덴부르크가의 수상한 아가씨 3권

8. 혼돈

지그리트가 샹들리에에 깔려 죽은 지 삼 일이 지났다.

삼 일간 요제프는 사태를 수습하려 애를 썼지만 상황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교단은 교황의 생사만 알려줄 뿐, 그가 얼마나 위독한지는 입을 다물었다. 친우 율리안의 힘을 빌려 보려 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그럼 지그리트 후작이 죽은 게 우리 탓이라는 건가?”

“그게 신의 뜻이 아니고 뭐겠소!”

신하들은 다시 마음껏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귀족파와 국왕파가 다시 치열하게 싸웠다. 왕자비 유폐 사건 이후 요제프 쪽으로 기울던 권력의 추가 샹들리에 사건으로 다시 수평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요제프는 그곳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일곱 살 아이처럼 방긋방긋 웃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속은 용암보다 더 뜨겁게 부글부글 끓었지만 그것을 알아차린 자는 아무도 없었다.

“머리가 많이 아프겠어, 요제프.”

회의가 끝나고, 사촌 에드먼드가 뒷짐 지고 다가왔다. 그는 벌써 이 왕성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했다.

요제프는 속셈이 뻔한 에드먼드의 행동이 매우 거슬렸다.

귀족파가 이렇게까지 빠른 회복세를 보인 것은 다 에드먼드 때문이다. 계승자라고는 왕의 외아들만 있는 탓에 딱히 다른 선택지가 없던 상황에서, 그보다 열 살은 많은 계승 서열 2순위의 등장은 가뭄 뒤의 단비보다 반가운 일이었다.

왕자비와 척을 진 귀족들은 에드먼드의 뒤로 줄을 서려 할 것이다.

요제프로서는 최악의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왕성이 많이 혼란스럽기는 하죠.”

그가 싱긋 웃으면서 에드먼드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곳은 얼마나 머무르실 계획인가요? 왕성 관리인이 룩센투크 별관을 내줘야 하는지 묻더군요.”

그 말에 에드먼드가 턱을 매만지며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글쎄……. 내가 좀 요양이 필요해서 말이야. 높은 곳에서 좋은 공기를 마시면서 좀 쉬어볼까 하는데.”

과연 그가 말하는 ‘높은 곳’이 어디일까.

요제프는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는 눈웃음 사이로 살의를 내던졌다.

이미 왕국을 다 가졌다는 듯한 여유롭고 오만한 에드먼드 파칼의 태도. 그는 분명 요제프를 우습게 보고 있었다.

‘이것 참, 죽여 버릴 수도 없고…….’

왕위 계승자가 단둘뿐인 상황에서 암살은 위험하다. 분명 어떤 식으로든 말이 나올 것이었다.

에드먼드 파칼의 모친은 아샤칼 왕실과 피가 닿아있을 정도로 고귀한 신분이었고, 덕분에 그는 아샤칼의 넓은 땅과 더불어 그곳의 공작위까지 가지고 있다.

그가 아버지의 성과 국적 대신 어머니의 유산들을 물려받은 것은 베르단이 줄 수 있는 것보다 아샤칼이 줄 수 있는 것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일 테고.

제일 좋은 방법은 그가 알아서 이곳을 떠나는 것뿐인데, 저 욕심 많은 혈육이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요제프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문제들은 자꾸 몸짓을 불리는데, 그는 이렇다 할 해결방법을 도출해내지 못하고 있다.

장막 뒤에 있을 적의 정체를 밝혀내기는커녕, 적이 내어준 자잘한 퀴즈에 절절매는 중이었다. 요 며칠 무리를 했더니 심장 부근이 바늘에 찔린 듯 아파왔다.

‘일단 조금 쉬어야겠어.’

그는 에드먼드를 적당히 상대한 뒤 처소로 향했다.

한숨 자고 난 뒤 눈을 뜨니 의자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당장 칼을 들어 그의 목을 긋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무심한 표정의 여인의 이름은 마리엘라였다.

“몸은 좀 괜찮은지 보러 왔어요.”

퉁명스럽고 벽이 있는 말투.

요제프는 보이는 것 너머의 진심이 다정하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불안하고 위태로운 상태를 감추려고 일부러 평소처럼 굴었다.

“고작 내 몸 하나 살피려고 우리 마리 아가씨께서 직접 행차하시다니, 이것 참 영광이야.”

“농으로 넘기려 하지 말아요, 난 지금 심각하니까. 조사는 진척되었나요? 회의장의 샹들리에 말이에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물증은 하나도 없고 심증만 가득하지.”

“교황 성하는?”

“그것도 아직이야. 급히 대사들에게 연락을 취했고, 비밀리에 교단의 고위 신관과 성기사단 사이에 우리 쪽 사람을 심어뒀지만, 따로 돌아오는 소식은 없어. 건재하시기를 간절히 희망해야지. 새 교황이 선출되려면 시간이 걸리고, 그사이에 왕권이 흔들릴 수 있으니까.”

“지금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건 에드몬드 파칼 하나로군요.”

“가장 골치 아픈 것도 그쪽이야. 3차 성마전쟁 때 꽁지를 빼고 도망가기에, 그대로 아샤칼에서 천년만년 살 줄 알았더니 이제 와 홀랑 넘어와서는 슬금슬금 왕위를 넘보는군.”

마리엘라가 날카롭게 질문했다.

“죽일 건가요?”

“쉽지 않아. 날 제외한 유일한 왕위 계승자고, 또 그의 뒤에 누가 있는지를 모르니.”

“귀족파의 짓일까요?”

“그렇다고 볼 수밖에. 이제부터는 진짜 몸조심해야 해, 마리엘라. 다시는 내 시야를 벗어나지 않겠다고 약속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녀가 말없이 그의 눈을 빤히 보았다. 짙은 갈색 눈이 맑은 초록색 눈동자 안으로 들어와 그곳을 헤집어 놓는다.

그녀는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을 쭈뼛거리다 곧 시선을 팽하니 돌리고는 그를 거부했다.

“제 몸은 제가 알아서 해요.”

요제프가 씩 웃으며 물었다.

“지난번처럼?”

“…….”

찔리는 게 많은 마리엘라는 입을 다물었다.

“내 말 명심해, 마리엘라. 네 자유는 모두 내가 허락한 거야. 한 번만 더 내 명을 어겼다간 그동안의 모든 걸 빼앗길 수도 있다는 걸 기억해.”

힘이 가득 실린 강압적인 말. 그러나 마리엘라의 귀에 그것은 잃을 게 많은 사람의 애원처럼 들렸다.

꿀꺽.

그녀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대충 이 분위기를 모면할 만한 말을 골라 던졌다. 시선은 여전히 다른 곳에 향한 채였다.

“우리의 관계는 단순한 동업자 아니었나요? 서로 목적만 달성하면 각자 갈 길 가는.”

그 말을 들은 요제프가 비소를 보냈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해?”

“…….”

두 번째 침묵.

둘은 다시 눈을 마주했다.

이번에 시선을 파고든 쪽은 요제프였다. 그는 자신의 말에 잔뜩 긴장한 그녀를 보다가 푸스스 웃었다. 한숨과 두려움과 사랑과 그 외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인 웃음이었다.

요제프가 그녀의 손끝을 잡았다. 그리고 간절한 눈으로 말했다.

“약속해. 약속해줘. 너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지 않겠다고.”

“최선을 다할게요.”

“최선으로는 부족해.”

“알았…….”

그의 비위를 맞춰주려던 그녀의 말이 멎었다. 그녀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그의 손을 내쳤다.

“안 돼요, 왕자 전하.”

“…….”

“갑자기 이렇게 무너지지 말아요.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요. 나와 마리안이 살아남으려면 당신이 굳건해야 해. 우릴 지켜줄 수 있는 건 지금 당신밖에 없어요. 날 지키고 싶다면 평소처럼 생각하고, 평소처럼 행동해요. 그렇지 않으면 저쪽에서 원하는 대로 움직일 뿐이니까.”

예상을 한참 벗어난 말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본심을 뱉어버린 마리엘라는 뒤늦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요제프는 눈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의 기다란 속눈썹 아래로 대롱대롱 달려있는 근심과 고난이 그대로 엿보였다.

그가 다시 눈을 치켜뜨고 특유의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이자, 마리엘라는 크게 안도했다.

“정말 자기 생각만 가득 담겨있는 말이로군.”

원래의 요제프가 돌아온 것이다. 그녀도 평소의 마리엘라처럼 그를 맞았다.

“이 상황까지 와서 거짓말은 못하겠거든요. 못하겠으면 차라리 미리 와서 말해줘요. 패물을 팔아서 야간도주라도 해야 되겠으니까.”

“그 말을 들으니 정신이 좀 들어. 백 마디 위로보다 더 큰 힘이 되었어.”

“그것참 다행이네요. 그래서 그런데, 다음 재상으로는 누굴 생각하고 있죠?”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빠르게 질문했다.

* * *

늦은 밤, 율리안은 책상에 앉아 교단에서 온 편지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의 바로 앞에는 왕자가 직접 임명한 공작의 전속 시녀, 마리엘라가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들은 말을 되새기며 중얼거렸다.

“렝 백작이라……. 좀 어렵게 되었군.”

그것은 왕자가 생각하는 차기 재상에 관한 정보였다.

3일 전, 숨겨왔던 과거를 율리안에게 모두 걸린 이후, 마리엘라는 율리안의 첩자가 되었다.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같은 흑마법사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이상하게 율리안은 그녀에게 관대하게 굴었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첩자가 되라고 했을 뿐, 그녀가 귀족파에게 끼친 피해에 대해 처벌은 하지 않았다.

율리안의 부정적인 반응에 마리엘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어렵죠? 먼저 움직여 그를 이쪽으로 끌어들인다면 승산이 있잖아요. 어차피 그는 귀족파의 손을 들어줄 텐데.”

그러나 율리안은 단호했다. 그는 편지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답했다.

“아니, 쓸데없는 짓이야. 그자에게는 믿음이 없거든.”

마리엘라는 그제야 그의 가장 큰 무기가 교단 ‘바레뎃샤’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신에게 자신의 순결한 영혼을 바치기 위해 살아가는 것 같던 신실한 청년의 정체는 백 마리 구더기가 득실득실 들끓는 썩은 독이었다.

“당신은 교단의 편인가요, 왕가의 편인가요.”

“나는 항상 나 자신의 편이야. 종교니, 충성이니 하는 건 날 지키기 위한 갑옷일 뿐.”

“당신에게 교단은 그저 이용가치가 있는 집단일 뿐이군요. 이제야 당신이 교황의 그늘 아래 숨은 이유를 알겠어요.”

율리안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너는 그런 걸 왜 자꾸 캐묻지? 사랑하는 요제프는 하나하나 가르쳐줬을지 몰라도 나는 그런 친절은 베풀지 않아. 그만하고 네 일이나 집중해.”

마리엘라가 손발을 꼼지락거리며 변명했다.

“그냥 대화가 나누고 싶었던 것뿐인데요.”

그가 필기를 하다 말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내가 그걸 믿을 정도로 바보로 보이나?”

“아니시죠, 그럼요.”

‘어린 나이에 교황이라는 적장의 밑에서 살아남을 정도로 똑똑하고 대단하신 바이르 공작님이신걸요.’

그녀는 속으로 율리안을 비아냥거렸다.

탁탁.

율리안이 추려낸 편지들을 책상에 부딪쳐 가지런하게 정리했다.

“진짜 궁금한 게 있어요. 이것 하나만 말씀해주시면 더 이상 아무 질문도 안 할게요. 약속해요.”

“입 다물어. 듣고 싶지 않으니까.”

“선왕을 죽인 것은 당신이었나요?”

“…….”

그가 편지를 추려내는 것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리엘라는 방긋방긋 웃으며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오해는 하지 마세요, 순전히 제 궁금증 때문에 하는 질문이니까. 제가 리덴부르크 백작 부인을 죽였듯, 당신 역시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요제프가 거기까지는 말 안 했군.”

“네?”

알 수 없는 소리에 그녀의 목소리가 커졌다.

“나는 요하네스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쪽 별관에서는 선왕 요하네스의 이름을 따서 만든 요하네스 호수가 한눈에 보였다. 수많은 여자를 흑마법사로 몰아 물에 빠트려 죽여 놓고, ‘마녀를 소탕했다’라며 자축하며 만든 인공 호수였다.

그가 냉담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데르샤바크 왕가는 곧 멸문할 거야. 그레타의 저주를 풀지 못한다면.”

‘저주라니?’

처음 듣는 소리였다. 마리엘라가 당황해 말을 더듬거렸다.

“그게,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죠?”

“이대로 두면 요제프는 곧 죽어. 심장이 굳고 온몸의 장기가 썩어들어가면서 고통스럽게.”

마리엘라는 제가 방금 들은 말이 율리안의 단순한 장난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무거운 그의 분위기와 표정이 모든 것을 일러주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요제프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간다.

그 당시에는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던 요제프의 말들.

‘축복과 저주는 동전의 양면이야.’

‘슈바르딩 지방을 갔었어. 정보를 얻었거든.’

‘대마법사 그레타가 마지막으로 그곳에 모습을 보였다는 정보.’

“…….”

그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요제프 역시 숨기고 있던 진실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 * *

데이지 이브노말은 왕자비의 시녀가 된 자신의 선택이 옳은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가졌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마리안 왕자비의 모습이 소문과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날카로운 눈빛과 카리스마 넘치는 언행으로 대신들을 휘어잡는다는 마리안 왕자비의 실체는, 시간만 나면 통속 소설을 읽어대며 헤벌쭉거리는 한량에 가까웠다.

왕국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왕자의 성격도 너무 맹하다.

거기다 부부 금술이 꽤 좋다는 소문과는 달리 왕자와 왕자비는 서로에게 관심도 없어 보인다.

‘도대체 사람들은 뭘 보고 왕자비를 무서워하는 거지?’

데이지는 왕자비만 보면 벌벌 떠는 귀족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마리엘라라는 하녀, 골칫거리를 나한테 맡기고 저는 알짜배기를 찾아 도망간 것은 아니겠지.’

오해는 점점 깊어져 이런 쓸데없는 가정까지 만들어냈다.

데이지는 자신의 앞날에 깜깜한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왕자비가 본가에서 직접 데리고 왔다는 하녀를 제치고 왕자비의 제일가는 측근이 되고자 했던 원대한 꿈이 요새 들어 주춤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리안의 가능성을 의심하기만 했던 그녀에게, 마리안의 진가가 드러나는 순간이 다가왔다.

그날은 날씨가 유독 화창했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 마리안은 선선한 바람과 따스한 햇볕을 만끽하고자 데이지를 데리고 정원을 산책했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설계된 산책로를 걷던 중이었다.

“처음 뵙는군요.”

그가 마리안의 앞에 나타났다.

에드먼드 파칼. 왕위 계승 서열 2위. 요즘 베르단 수도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남자.

그는 등 뒤에 지인을 두 명 매달고 있었는데, 각각 귀족파의 수장인 브랫 백작과 베르단 오른쪽에 붙은 작은 나라, 그리너드에서 파견된 외교관 세드릭 아렐 후작이었다.

데이지는 그를 보자마자 놀라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마리안은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그녀는 입가에 만개한 미소를 띠며 그를 불렀다. 마치 자주 보아온 먼 친척을 부르듯이. 적당히 친밀함과 하대를 섞어서.

“파칼 남작.”

그 말에 에드먼드 파칼의 표정이 굳은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는 곧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마리안을 상대했다.

“잘 모르시는 것 같군요. 제 직위는 공작입니다.”

마리안은 아무것도 모르는 양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어머, 그런가요? 제가 알기로는…… 아버지의 공작령을 제대로 물려받기도 전에 아샤칼로 홀랑 떠나버렸다던데. 이런 경우에도 직위를 인정해 주나요? 으음, 제 개인 교사인 바하츠만 후작은 그렇지 않다고 했던 것 같은데. 3차 성마대전 이후에 후계자가 나타나지 않은 영지는 모두 국가 소유지로 변환시켰다고 배웠거든요. 아시죠? 17년 전에 이곳에서 전쟁이 벌어졌다는 거. 남작께서는 그전에 베르단을 떠나셔서 모르실까 봐 드리는 말씀이에요.”

마리안은 눈웃음을 살살 치며 그 말을 덧붙였다. 누가 봐도 대놓고 약 올리는 태도였다.

데이지는 지나치게 공격적인 왕자비의 태도에 깜짝 놀랐다. 지난번에도 몇 번 귀족들을 상대로 날 선 언행을 취하는 것을 목격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거기다가 상대는 왕위 계승서열 2위의 에드먼드 파칼이었다. 데이지는 이러다가 졸지에 계승 전쟁이라도 벌어지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에드먼드는 헛기침과 함께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누가 그런 무례한 소문을.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전 그저 어머니의 고향에서 어머니의 임종을 지킨 것뿐입니다.”

그의 어조는 여전히 유들유들하고 능글맞았지만, 대화 속에는 뼈가 숨겨져 있었다.

그러든 말든. 마리안은 칼 같이 제 할 말만 했다.

“애틋한 사정이야 제 알 바는 아니고. 저는 사실만 직시하고 싶은데요. 이곳에서 정식으로 물려받은 영지는 돌아가신 파칼 공작께서 가지고 계셨던 남작령 하나였으니, 당신은 파칼 남작으로 불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나요.”

에드몬드와 마리안의 시선이 첨예하게 맞부딪쳤다.

마리안은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데이지는 그녀에게 내일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몸을 사렸다.

침묵으로 위장한 대립은 계속되었다.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한 브랫 백작이 큰 용기를 내고 둘 사이를 끼어들었다.

“저, 왕자비 전하. 저희가 갈 곳이 바빠…….”

그리자 불똥이 그에게로 튀었다.

“어머, 브랫 백작. 백작께서 아직 여기 계셨네요. 절 보기만 하면 꽁무니가 빠지도록 달음박질하시기에 이번에도 그런 줄 알았더니.”

“아니, 그것이…….”

“안타깝네요. 평소처럼 하셨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마리안은 그를 향해 싱긋 웃었다. 그녀는 땀을 뻘뻘 흘리는 브랫 백작을 지나쳐, 다시 에드먼드를 응시했다.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에게서 넓은 정원을 압도할 만한 살기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조금 헷갈리신 것 같습니다. 여기가 어딘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만, 마리안은 오랜만에 만나는 적수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저만 보면 시선을 피하거나, 줄행랑칠 생각만 하는 신하들에게 따분함을 느끼던 차에 혜성같이 등장한 에드먼드의 존재가 아주 달가웠던 것이다.

왕자와의 운명적인 사랑을 꾸며내는 것이 물 건너간 이 상황에서, 그녀를 통속 소설 속 주인공처럼 느끼게 해주는 일은 치열한 정쟁밖에 없었다.

‘화려한 나비 같은 사교계 뒤에 존재하는 거미보다 추악하고 비열한 정치 싸움의 중심!’

제3자가 되어 스스로의 모습을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내 보자, 매우 만족스러운 절경이 나왔다.

마리안의 온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들끓었다.

그녀가 오만하게 고개를 까딱 돌렸다.

“서열을 정리해 볼까요, 파칼 남작. 베르단에서 그대가 가질 수 있는 작위는 남작 자리밖에 없습니다. 제가 틀렸나요? 아니면 그대가 지금 이곳을 아샤칼과 혼동하고 있는 건가요. 국적을 확실히 해주셨으면 하는데.”

마리안은 지금 에드먼드에게 베르단의 남작으로 남아 왕위 계승의 가능성을 지킬 것이냐, 아니면 공작의 명예와 품위를 유지하는 대신 아샤칼의 사람이 되어 베르단을 물려받을 기회를 날려버릴 것이냐에 관한 선택을 종용하고 있었다.

그가 당연히 전자를 선택할 것을 알고 있으면서 던진 올가미였다.

‘감히 백작가 여식 따위가.’

에드먼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는 명백한 무시였다.

고작 남작 따위가 성안에서 기세등등해지지 말라는 의미가 담긴.

상황이 심각해지자 여태까지 뒷짐 지고 가만히 있던 세드릭이 나섰다.

“왕자비 전하, 정말 송구스러운 일이지만, 로즈 아가씨와의 약속이 삼십 분 뒤에 있어서요. 은혜를 베푸시어, 신사의 체면과 숙녀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 누구의 기분도 거슬리지 않고, 상황을 부드럽게 풀어나가게 만드는 영리한 부탁이었다.

마리안은 그의 청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그녀가 살짝 비켜서자 얼굴이 잔뜩 굳은 에드먼드가 먼저 지나갔다. 그는 지나가면서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경고했다.

“한적한 지역에서 올라오셔서 그러신지 아직 모르시는 게 많으신가 봅니다. 저는 왕자 전하를 제외하고,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유일한 존재로, 계승서열 2위입니다. 왕자비 전하.”

그는 그렇게라도 자신의 무너진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회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리안을 제대로 몰랐기에 내보일 수 있었던 오기였다.

마리안이 슬쩍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맞받아쳤다.

“제외하고? 말 속에 본심이 엿보이네요, 파칼 남작. 제 남편만 없었다면 본인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란 헛된 망상을 품는군요.”

“왕자비 전하.”

그가 뒤돌아 그녀를 응시했다.

브랫 백작이 사색이 되어 에드먼드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모든 것이 늦었다.

마리안은 들고 있던 부채를 펼쳤다.

촤락.

가벼운 소리와 함께 화려하게 장식한 보라색 부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그것으로 가볍게 바람을 일으키며 여유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녀는 조용히 생각했다.

어떻게 그를 보내버려야 잘 조졌다고 소문이 날까.

왕위 계승서열 2위.

에드먼드 파칼이 가지고 있는 패는 확실히 그녀에게 걸리적거렸다. 이번 기회에 확 눌러버릴 필요가 있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기막힌 아이디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계승 서열.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1순위가 아닌 이상 다 쓸모없는 거지요. 2순위가 3순위가 되고 3순위가 4순위가 되는 건 한순간이니까.”

마리안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만족스러운 점심 식사 덕분에 살짝 통통하게 나온 아랫배가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

그 자리에 있던 남자 셋이 입을 다물었다.

그날 저녁이었다.

마리안 왕자비가 왕세손을 임신했다는 소문이 베르단 사교계에 퍼졌다. 그와 동시에 에드먼드 파칼의 등장으로 귀족파를 향해 기울어졌던 권력의 저울이 다시 왕정파 쪽으로 넘어갔다.

‘역시 우리 마리안 님이셔! 왕자비 전하는 다 계획이 있으셨구나!’

데이지는 자신이 가졌던 모든 의구심을 내던지고 마리안에게 자신의 인생을 걸 것을 속으로 다짐했다.

* * *

마리안과 에드먼드 간의 소동을 들은 요제프가 폭소했다.

‘미쳐버리겠네, 정말.’

그러나 그의 등 뒤의 마리엘라는 똥 씹은 표정으로 꼬이고 꼬인 실타래를 어떻게 풀 것인가 걱정했다. 안 그래도 율리안 때문에 머리가 아픈데, 마리안이 또 일을 던져줬다. 그녀는 이 일로 율리안이 왕자비를 제거하고자 마음먹으면 어쩌나 걱정했다.

“난 가끔 마리안의 성장 배경이 궁금해. 도대체 어떻게 자라면 사람이 저렇게 겁이 없을까. 나도 어찌 처리할 줄 몰라 골치 아픈 사촌 형을 이런 식으로 엿 먹이다니, 정말 큰 상이라도 하나 내려야겠어.”

진심으로 행복해 보이는 요제프를 보며 마리엘라가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지금 웃고 계실 때가 아니실 텐데요.”

“왜?”

“마리안의 배에 아이가 들어섰다는 소문이 사교계에 파다해요.”

“나도 알아. 그래서 지금 이렇게 웃고 있잖아?”

“그냥 소문이 아니잖아요. 에드먼드 파칼부터가 이 소문을 사실이라고 믿고 있을 텐데, 도대체 뒷수습을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그게 그렇게 어려운 문젠가?”

요제프의 말이 맞다. 회임 소동을 처리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아무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유산했다고 넘겨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정적도 제거할 수 있고 뒷수습도 완벽히 끝낼 수 있었다.

“문제는 왕자 전하가 아니라 왕자비 전하죠. 마리안이 진짜 임신하겠다고 난리 치면 어떻게 할 계획이시죠? 한번 날뛰면 아무도 못 말린다는 건 숱한 경험으로 아실 텐데요.”

오랜 시간 마리안을 지켜봐서 알았다. 마리안은 결코 평범한 방법을 수용하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시한폭탄을 끌고 올 것이 분명했다.

요제프가 마리엘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리엘라는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했나, 혹 그 실수 속에 율리안과의 관계가 드러날 만한 것이 있었나 싶어 몸을 살짝 뒤로 뺐다. 찔릴 것이 너무 많아 그랬다.

“나 지금 약간 감동했어.”

“대체 이 대화의 어느 포인트에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던 거죠?”

“내가 당연히 사랑하는 마리 아가씨를 향한 정조를 지킬 거라고 생각하는 부분?”

그 말에 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당신이 저번에 말했던 걸 그대로 수용한 것뿐이에요.”

“수천 번 말해도 끝끝내 부정당하는 마음들이 있지. 척하면 척 알아듣는 아가씨가 있으니 난 얼마나 행운아야.”

“지금 절 놀리는 건가요.”

“아니. 절절한 사랑 고백을 하고 있는 중이지.”

요제프가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피부 위로 느껴지는 따듯한 온기.

마리엘라는 자신의 손 등을 매만지는 요제프의 손길을 느끼며, 가만히 그의 시선을 받아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사랑으로 잔잔하게 반짝인다.

“나는 항상 네게 진심이야. 알아줬으면 해, 마리엘라.”

“알아요.”

그러나 말과 다르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마리엘라도 안다. 지금 이것은 기회다. 왕성에서의 생존율을 높이려면 그의 마음을 꽉 붙들고 있어야만 한다. 알고 있지만…….

‘데르샤바크 왕가는 곧 멸문할 거야. 그레타의 저주를 풀지 못한다면.’

정말 모르겠다.

왜 율리안의 그 말이 이리도 마음에 박히는지.

왜 그게 자꾸 그녀의 발목을 잡는지.

* * *

요제프와의 밀회를 끝내고, 마리엘라는 율리안의 처소로 달려갔다. 사교계에 퍼진 소문을 해명하기 위해서였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마리안은 임신하지 않았어요.”

모든 것이 뒤틀어진 지금, 마리엘라가 1순위로 생각하는 것은 마리안과 자신의 안위다. 그녀는 마리안이 율리안에게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교단에 보낼 편지를 쓰고 있던 율리안은, 쓰던 편지를 서랍 안으로 집어넣으며 답했다.

“알고 있어.”

“그럼 다행이고요.”

마리엘라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율리안이 그녀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콧등 아래로 내려쓴 안경 너머로 그의 눈동자가 삐죽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베데르 경으로 하지.”

“네?”

“재상 말이야. 적당히 요제프의 세력을 꺾어 놓을 만한 자가 필요했는데 다행이야. 그는 신실한 사람이니까, 교단을 끌어들이면 쉽게 넘어올 거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커튼을 젖혀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인공적으로 만든 호수 위에 밝은 보름달이 떠 있었다.

“독서클럽의 인원을 충당할 때가 왔어.”

그는 작게 중얼거린 후 뒤를 돌아 마리엘라에게 명령을 내렸다.

“앞으로 상황 보고는 꾸준히 하도록 해. 나는 요제프와 달라. 먼저 나서는 일 없이 철저히 내 지시에 따라 수족처럼 움직여주길 바라. 그렇지 않으면 손발이 잘려나갈 테니까. 어쩌면 저 호수에 빠져 익사하게 되는 첫 번째 마녀가 될지도 모르지.”

무시무시한 말.

그러나 마리엘라는 그런 말에 쉽게 겁먹지 않았다.

“이제 막 수도에 적응하려는 촌구석 여자애를 놀리시기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 * *

마리안 왕자비와 에드먼드 파칼의 신경전은 계속되었다.

마리안은 에드먼드를 볼 때마다 면박을 주곤 했는데,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왕성을 자주 찾으시네요, 파칼 남작.”

그녀가 귀족들이 있는 곳에서 대놓고 그를 깔보면 에드먼드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하. 제 옆에 있는 아렐 후작은 안 보이시는군요.”

그 말을 들은 마리안은 고개를 옮겨 슬쩍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졸지에 논란의 중심이 된 후작은 곤란하다는 얼굴로 하하, 웃고 있었다.

밝은 갈색 머리에 조금 탁한 녹색 눈을 가진 아렐 후작은, 하얀 피부, 옅은 주근깨, 쳐진 눈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전형적인 온순하고 선량한 사람의 외양이다.

마리안은 그가 좋았다. 그의 영혼이 맑고 따듯해 보여서가 아니었다. 세드릭은 ‘호수의 주인 나탈린’에 나오는 달의 신처럼 생겼다.

달의 신은 태양신의 이복 남동생으로 나탈린과 태양신 사이를 중재해 주는 중요 등장인물이었다. 그는 ‘오해를 대신 풀어주는 주인공의 친구’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답답한 장면이 연출될 때마다 조곤조곤한 말투로 모든 사건을 해결해주어 마리안의 속을 뻥 뚫어주었다.

‘나 쟤 좋아. 쟤랑 친구하고 싶어.’

왕자님과의 로맨스는 진작 저버린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설 속 주인공의 인생을 살고 싶다는 욕망마저 저버린 것은 아니었다.

평소였다면 적군이고 아군이고 구분하지 않고 모두를 돌려 깠을 그녀지만, 이번에는 슬쩍 세드릭을 감싸고돌았다.

“입장이 좀 다르죠. 세드릭 아렐 후작님은 그리너드에서 정식으로 파견된 외교관이지만, 남작께서는 아무런 직위가 없으시잖아요. 제 남편의 먼 친척이라는 지위, 그게 전부인 것을.”

마리안이 대놓고 그를 ‘파칼 남작’이라고 부르며 무시하자, 룩센투크의 신하들을 비롯한 베르단 수도 사교계의 인식이 슬그머니 기울었다.

에드먼드 파칼에 대한 이미지가, 요제프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범접할 수 없는 존재에서 전쟁을 피하고자 아버지의 작위도 제대로 물려받지 않고 도망친 겁쟁이 남작으로 변했다.

공작의 외동딸이었던 어머니와 왕의 하나뿐인 동생이었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한평생 하찮은 취급을 받아본 적 없던 에드먼드는 이 상황이 당혹스러웠다.

그는 실추된 이미지를 되찾고자, 수도의 파티란 파티, 모임이란 모임에는 모두 참석해 자신의 직위는 남작이 아니라 공작이라고 정정했다.

제국 렝바토의 멸망과 동시에 탄생한 왕국들은, 대륙의 정세를 제대로 휘어잡지 못하고 고만고만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중 가장 강력한 나라가 베르단이었다. 비록 3차 성마전쟁의 폐해로 힘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상태지만, 베르단은 아직 건재했다. 길고 깊었던 영광의 시대와 비옥한 영토가 베르단을 버티게 하는 중심축이었다.

아샤칼은 그 베르단의 아성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나라였다. 베르단이 한창 마녀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을 그때, 아샤칼은 그리너드를 침략해 그리너드 왕실의 공주와 왕자를 볼모로 삼고, 그리너드를 자신의 속국으로 만들면서 급격히 부강해지기 시작했다.

베르단이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강국이라면, 아샤칼은 이제 막 팽창하기 시작한 강국이었다.

그런 아샤칼의 공작이라는 것은 굉장한 영예였다. 에드먼드 파칼의 말에 설득당한 사람들이 다시 그를 추앙의 눈빛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때, 같은 파티에 참석한 마리안이 지루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공작, 아샤칼로 언제 돌아가시나요? 고향의 음식이 그리워질 때는 언제죠?”

“…….”

마리안은 간단하게 국경선을 그어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간단하고 완벽한 배척이었다.

에드먼드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왕자비에게서 강한 위기감을 느꼈던 것이다.

“왕자비를 그대로 둬선 안 되겠어!”

“그대로 두는 것이 좋을 겁니다. 네, 아마도요…….”

발끈한 에드먼드에게 브랫 백작이 자신 없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그럼 그 버릇없는 여자가 망아지처럼 날뛰는 꼴을 봐야 한단 말인가!”

“그 여자는 망아지가 아니라…….”

‘독수리입니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독수리요.’

브랫 백작은 턱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에드먼드를 말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괜히 반대했다가 에드먼드의 호의를 잃을까 조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본디 브랫 백작은 오만하고 호전적인 성격의 남자였으나, 지난 몇 달 동안 급격하게 기울어버린 귀족파의 정세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

뭐, 백작이 용기를 내서 에드먼드를 적극적으로 말렸다고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결심을 굳힌 에드먼드는 타인의 소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려 했다.

한 번도 고난을 겪지 않았기에 한 번도 실패해본 적 없는 자만이 부릴 수 있는, 철없는 만용이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지.”

그렇게 에드먼드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우선 그는 마리안의 이미지를 ‘모함이 심하고 사치스러운 여자’로 만들어 그녀의 권위와 명예를 야금야금 좀먹으려고 했다.

에드먼드는 돈과 인맥을 총동원해 쉽게 구할 수 없다는 보석, 드레스, 향수, 향신료 등을 마리안에게 바쳤다.

‘사치품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지.’

시골에서 왔다는 볼품없는 계집애의 안목을 순식간에 높여 그녀가 왕실 재정을 위협할 정도로 소비하게 만들 계획이었다.

그런데 마리안의 반응이 생각과는 달랐다.

“향수로군요.”

그녀는 덤덤하게 향수병을 내려다보았다. 길가의 돌멩이를 바라보는 듯한 무심함이었다.

‘뭐지?’

이상한 낌새에 에드먼드 파칼은 살짝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네, 장미꽃 백 송이로 딱 한 방울이 나온다는 피고브 지역의 향수입니다. 일 년에 딱 다섯 병이 나오기 때문에 돈만 있다고 모두 다 가질 수 없지요.”

“이걸 왜 저한테 주시는 거죠?”

“베르단의 귀족으로서 왕자 전하 내외에게 충성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예상했던 질문이다. 에드먼드는 익숙하게 준비해놓은 답변을 늘어놓았다.

“충성이라…….”

마리안이 조용히 그가 뱉은 단어를 곱씹었다. 잠시 후, 그녀는 뜬금없이 자신의 고향 이야기를 꺼냈다.

“저희 리덴부르크가에 유명한 사냥터가 있는 것을 아시나요?”

“글쎄요. 처음 들어보는군요.”

에드먼드는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말을 아꼈다.

“제 고향에는 라산 숲라고, 굉장히 유명한 사냥터가 하나 있어요. 그곳은 백 종류의 네발짐승과 백 한 종류의 날 짐승이 있는 거로 유명하지만, 진가는 따로 있죠. 라산 숲은 베르단뿐만 아니라, 온 대륙에서 쉽게 구하기 힘든 귀한 약초와 식물들이 많이 자라는 곳이랍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그는 왕자비의 의중을 감 잡을 수 없었다.

시부뚱한 에드먼드의 얼굴을 보고 마리안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파칼 남작, 약초가 되는 것은 모두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하여 저희 영지에 사는 아이들은 모두 숲에서 난 것을 잘 건드리지 않는답니다.”

“아, 예……. 그러시군요.”

팔랑.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마리안은 파칼 남작의 등장으로 덮어놓았던 책을 다시 들었다.

『궁중 예법과 도덕』 책 표지에는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러나 속 안의 내용물은 제목과 영 딴판이었다. 마리안이 데이지를 시켜 통속 소설의 표지 바꿔치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에드먼드 파칼을 앞에 두고, 왕자비가 우아하게 책을 읽는다.

그녀가 또 저를 무시한다고 생각한 에드먼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였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마리안이 그에게 말을 툭 던졌다.

“향이 강한 것엔 독을 감추기 쉽다지요?”

마리안과 에드먼드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에드먼드 파칼은 자신에게 기회가 닥쳤다고 생각했다.

이 버릇없는 시골 여자를 끌어내릴 기회.

“지금 그 말에 책임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왕족을 암살하는 것은 반역이다.

왕자비가 겁도 없이 그가 반역을 꾀했다는 말을 꺼냈다. 이는 그 자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을 정도로 위험한 발언이었다.

그는 기쁨을 숨기고 일부러 그녀를 도발했다. 마리안은 다시 책에 눈을 돌리며 심드렁히 답했다.

“못 질 건 뭐죠.”

“그렇다면 제가 전하를 독살하려 했다고 사람들 앞에서 말해보시지요. 당장 의원을 불러 저 향수 안에 독이 들었는지를 알아보라 할까요?”

“아무것도 안 나오겠죠.”

파칼 공작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 저랑 말장난하시는 겁니까?”

위협적인 목소리에 마리안이 눈을 치켜떠 그의 표정을 확인했다.

탁.

그녀가 책을 덮고 그를 향해 조소를 보냈다.

“하나 그다음, 또 그다음에 무엇을 섞을지 제가 어찌 알지요? 본디 사람이란 익숙한 것에 의심하지 않는 법인데.”

“…….”

말도 안 되는 꼬투리 잡기였다. 그러나 되돌아 생각해보면 그럴듯한 말인 것 같기도 했다.

파칼 공작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는 지금 자신이 그녀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아울러 눈앞의 왕자비가 그저 자존심만 높은 버릇없는 여자인지, 영악하고 영리해 철저히 경계해야만 하는 존재인지 헷갈렸다.

그때 마리안이 간단하게 자신의 말을 정리해주었다.

“끝까지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는군요, 파칼 남작. 그대가 죽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겠지만, 제가 죽게 된다면 많은 것이 바뀔 것이라는 이야기였어요. 리덴부르크의 아이들은 라산 사냥터의 버섯을 함부로 캐지 않는답니다. 어느 것이 독이 있는지 모르니까요. 그러니 파칼 경도 그렇게 행동하시죠. 최대한 얽히는 일 없이. 내가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

“…….”

마리안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었다. 무작정 고집을 부리고 밀어붙이는 듯한 여태까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면모였다.

‘그래서 브랫 백작이 미적댔던 거였군. 저 여자가 보통이 아니어서.’

에드먼드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무슨 말을 뱉어도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그런 에드먼드에게 마리안이 상큼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제가 또 친절을 발휘해야겠군요. 퇴장할 시간이에요, 파칼 남작. 문은 저쪽이니까 조심히 가세요.”

아무도 모르겠지만, 오늘 마리안은 입이 좀 트인 상태였다. 그녀는 지난밤, 데르샤바크 왕가로 시집올 때, 마리엘라가 사다 준 통속 소설을 읽었다.

하루아침에 여왕이 된 여자 주인공이 세 치 혀로 정적들을 제거하고 사랑을 쟁취하는 내용의 작품성을 갖춘 소설이었다.

그 덕택인지, 아무 생각이 없는 머릿속과 다르게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역시 난 이 자리에 딱이야.’

패배를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떠나는 에드먼드 파칼의 모습을 보며 마리안이 자화자찬을 했다.

그가 떠나고, 데이지가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정말 라산 사냥터에 독버섯이 그렇게 많나요?”

“나도 몰라. 예전에 친구가 얘기해 주었던 게 기억나서 한 말이야.”

“친구요?”

“응, 마리엘라.”

마리안이 지나치게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밤이 되었다.

마리엘라는 율리안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고, 마리안 때문이었다.

“오늘 낮에 왕자비가 또 한 건 했더군.”

“죄송합니다.”

‘내가 책을 잘못 선물해줬어.’

왕성에서 벌어질 일들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무서운 일들이니 말조심하라는 의미로 선물해준 책인데 이런 식으로 쓰일 줄 몰랐다.

마리엘라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꾹 눌러 담고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지금 마리엘라와 마리안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것은 율리안이다. 그의 심기를 거슬려봐야 좋을 것이 하나 없었다.

“네가 죄송할 건 없지. 그래서 요제프는 요즘 뭘 하고 다니지?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해.”

“어제와 같아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죠.”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불신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아무것도?”

“네. 정말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아요. 적어도 제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왜지?”

“개인적인 의견을 좀 섞어도 될까요?”

율리안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인형같이 새초롬하다고 느껴졌던 그의 눈매가 이제는 공격적으로 느껴졌다.

“한번 해 봐.”

말과는 다르게 못 미덥다는 얼굴이었다.

“지금 왕자 전하는 겁을 집어먹은 상태예요.”

곧바로 가당치 않다는 반응이 날아왔다.

“요제프가? 내가 그의 오랜 친구라는 걸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한 번만 더 농간을 벌이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다.”

마리엘라는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아뇨, 제 생각이 맞아요. 지금 요제프는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어요.”

“그럼 이걸 설명해봐. 그는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빈 것과 다름없는 왕성을 굳건하게 지켜왔어. 성인이 되기 전부터 약아빠진 이리 새끼들의 눈속임을 할 줄 알았던 자다. 이제 와 뭘 그렇게 두려워한다는 거지?”

“……잃을까 봐 두려운 거죠.”

“무엇을?”

“당신과 나를.”

“…….”

율리안의 눈동자가 떨렸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마리엘라는 그것을 바로 포착해냈다.

‘바이르 공작이 동요하고 있어.’

조금 전 대화의 흐름은 그녀가 일부러 머리를 굴려 유도해낸 것이다.

마리엘라는 율리안의 처소에 숨겨져 있는 금서들을 몰래 훔쳐내 자신의 방에서 읽었다. 흑마법사에 대한 부족한 지식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나고 자란 리덴부르크 백작령은 마녀를 사악한 요정의 일종으로 여길 정도로 흑마법에 관해 무지했다.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를 잡아내려면, 흑마법에 관한 지식을 익혀 두어야 한다.

최대한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책을 훔친 지 몇 주, 마리엘라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바로 율리안이 소유하고 있는 금서가 죄다 저주와 그 저주를 푸는 방법에 관한 책이라는 사실이었다.

납득이 가지 않았다. 어차피 요제프는 죽는다. 그의 말을 따르자면 ‘곧. 심장이 굳고, 장기가 썩어들어가면서 고통스럽게.’

율리안의 목적이 그의 가문을 몰살시킨 데르샤바크 왕가에 대한 복수심이든, 풍요로운 베르단 왕국을 집어삼키는 것이든 뭐든 굳이 저주를 더 걸어 안 그래도 얼마 안 남은 왕자의 수명을 깎을 필요는 없다.

흑마법에 관련된 금서를 룩센투크로 몰래 가지고 들어오는 위험성을 감수해내면서 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마리엘라는 그의 이상한 행적에 의문을 가졌고, 곧 위험한 추측을 했다.

공작은 지금 해제 마법을 독학하려는 거다.

마리엘라는 조금 전 율리안이 내비친 표정을 통해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더했다. 그녀는 무표정 안에 생각과 진심을 감추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왕가에 걸린 저주는 정말 아무도 풀 수 없나요?”

“알량한 마법으로 요제프를 구해주고 싶은가 보지? 네 힘으로는 부족할 텐데.”

“왜죠? 요제프의 눈은 금방 나았잖아요.”

“그거야 요제프의 눈을 멀게 했던 장본인이 바로 나였으니까. 실수였긴 했지만. 정말 마법에 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군.”

“리덴부르크 시골 영지에서 나고 자란 아이가 뭘 배울 수 있었겠어요?”

“행운이라고 생각해. 그 덕에 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니까.”

“행운이요…….”

그녀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율리안은 마리엘라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발견하지 못한 채로 저주와 해제에 관한 설명을 했다.

“저주는 저주를 건 사람이 가장 완벽하게 풀 수 있어. 마법은 잘 짜인 시 같은 거야. 은유와 상징이 넘쳐나지. 대강 이해를 할 수는 있겠지만 정확한 의미는 오직 발화한 당사자만 알고 있단 뜻이지. 저주의 핵심이 뭔지 알아야 해. 그래야 그걸 수 있는 해제 주문을 정확히 걸 수 있어.”

상당히 불친절한 설명이었다. 그러나 율리안의 책을 훔쳐다 본 전적이 있는 마리엘라는 쉽게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언젠가 읽었던 책의 내용을 기억해냈다.

마법의 근본은 주문이다. 주문이 노출되는 순간, 그 마법을 해제하는 방법 역시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녀가 주문을 적발당하는 것은 군대의 전술이 노출되는 것과 같다. 그 때문에 어린 마녀들은 주문을 속으로 외는 훈련을 혹독하게 받는다.

마리안이 마녀로 몰렸을 당시, 찾아 읽었던 책의 구절도 그의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믿는 저주와 마법학적 의미에서의 저주는 다르다. 저주는 인간의 육체에 해를 입하는 마법을 통틀어 일컫는다. 해제 주문은 마법으로 입은 해를 없애거나 치료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

마리엘라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해했어요, 저주와 해제는 잠금쇠로 잠그고 푸는 것 같은 개념이 아니라, 독과 약의 관계로 이해하면 되는군요. 독의 반대 효과를 가진 약을 밀어 넣어 증상을 중화시키는 것처럼, 저주와 반대되는 마법을 걸어야 한다는 말인 거죠?”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알아낼 수 있나요? 요제프에게 걸린 주문이요.”

“어떤 주문이 걸렸는지 알아내는 주문들이 있긴 하지. 대부분이 하급 마녀가 건 주문들만 알아낼 수 있다는 게 흠이지만.”

“그렇다면 아무도 저주를 풀지 못하겠군요. 그 저주를 건 사람은 대마법사 그레타니까.”

맥이 빠졌다. 요제프에게 한 줄기 희망이 비치나 했는데.

마리엘라는 갑작스레 밀어닥친 공허와 절망을 숨기려 눈꺼풀을 살짝 아래로 깔았다.

율리안이 그녀를 슬쩍 보더니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직 나도 몰라. 가르쳐 줄 스승과 가족들이 다 죽었으니. 다만, 흑마법의 역사가 깊고, 각 흑마법사 가문들의 연구가 활발했으니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

“그래서…….”

마리엘라는 말을 하다 말고 화들짝 놀랐다.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율리안 앞에서 말실수라니.

그녀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율리안이 대충 넘어가 주길 바랬지만, 그랬다면 그의 이름이 율리안 폰 바이르가 아닐 것이다. 신실한 청년을 연기하기 위해 새벽 5시부터 일어나 예배를 드리는 남자가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그래서?”

“별말 아니었어요.”

“그래서?”

“그냥 주제넘은 생각이 떠올랐을 뿐이에요. 공작님과 제가 친했다고 착각했던 그 순간의 습관이 툭 튀어나온 거죠.”

그녀가 꽤 영특하게 말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캐물었다.

“그래서?”

“휴.”

마리엘라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적당한 거짓말을 생각해낼 틈을 벌기 위해서다. 그녀가 깜짝 놀라 말을 숨길만 하면서도 본심과는 전혀 상관없는 소재가 필요했다. 그녀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고, 곧 괜찮은 답을 찾았다.

“솔직히 조금 멍 때렸어요. 넋 놓고 있으면 생각이 딴 길로 새기도 하잖아요. 공작님의 스승과 가족이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까, 문득 당신이 어둠을 무서워하는 이유가 이것인가 하여……. 주제 넘는다고 생각하면 벌을 받겠습니다.”

그녀는 율리안이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흑마법사에게 가문의 멸문과 관련된 발언을 했으니 펄펄 뛰는 것이 당연하다.

‘그깟 채찍 맞고 말지.’

그러나 절대 진심을 말해 줄 수 없던 그녀는 그 정도면 괜찮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

그녀의 말에 율리안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리엘라는 한참 동안 그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는 끝까지 말이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마리엘라가 조심스레 먼저 물어보았다.

“하녀장에게 제 죄를 고할까요?”

그러자 대답이 한 박자 느리게 돌아왔다.

“……아니다. 됐으니까 돌아가.”

“네?”

“돌아가라고 했어.”

마리엘라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는 그녀를 내쫓아 버렸다.

어둡고 휑한 복도.

익숙한 그곳을 저벅저벅 걸으며 마리엘라는 율리안에 대해 생각했다.

‘대체 본심이 뭐지……?’

혼란에, 혼돈이 더해진다.

율리안은 그녀를 온몸으로 경멸하는 고귀한 귀족 나리처럼 굴었다가, 어느새 어둠을 극도로 무서워하는 눈이 멀건 남자로 변모했고, 마지막에는 제일 친한 친구를 배신한 사악한 흑마법사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제는…….

‘그래서 당신이 그걸 찾는군요. 요제프를 구하려고.’

마리엘라는 아까 미처 다 뱉어내지 못했던 말을 떠올렸다.

* * *

마리엘라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책을 읽었다. 율리안의 방에서 훔쳐낸 금서였다.

……마법에서 타고난 마력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주문이다. 주문을 얼마나 정교하게 짜내는가가 흑마법사의 능력을 좌우한다.

위대한 마녀들은 죽기 전 자신의 주문을 가문에 남기고, 후손들은 그것을 연구해 선조의 주문을 발전시킨다.

마녀들은 가문의 주문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자신의 약점을 노출시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가문의 주문은, 그 가문에 속한 모든 마녀의 근간이다.

만약 당신이 어떤 가문의 주문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그 가문의 모든 마법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해제마법을 만들 수 있다.

마법의 약점이 해제마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서로 상충하는 마법들이 있다. 불을 다루는 마법은 물 마법에 약하고, 방어 마법은 정신 마법에 약하다. 따라서……

그녀가 거기까지 읽었을 때였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지?’

마리엘라는 살짝 긴장한 채로 문을 열었다. 의도치 않게 휘말린 일이 너무 많아, 이제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문 앞에는 딱딱한 얼굴의 시종장이 서 있었다. 그는 사무적인 어조로 주인의 명을 전했다.

“왕자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 * *

비밀통로를 통하지 않고 요제프의 방에 간 것은 오랜만이었다.

시야를 가릴 정도로 커다란 망토를 벗자마자 보인 것은 침대 위에 나른하게 누워있는 요제프의 모습이었다.

요제프는 눈을 감고 누워 있었지만 잠이 든 상태는 아니었다. 협탁 위에 올려 둔 양초에서 나오는 불빛이 그의 얼굴선을 은은히 비추었다.

“부르셨다고요.”

그녀의 말에 요제프가 스르륵 눈을 떴다. 그가 그녀를 향해 은은한 미소를 띠어 보였다.

“잠이 안 와서. 공주님의 굿나잇 키스라도 받을 수 있을까 하여.”

그녀는 망토를 벗어 팔에 두르고는 침대 바로 옆에 있는 스툴 위에 앉았다.

“열 살짜리 꼬마도 그런 얘긴 안 해요.”

“괜찮아. 난 어리고, 나약하고, 겁이 많은 스물일곱이니까.”

“아이고.”

그녀는 헛웃음을 지었다.

“해줄 거야?”

푹신한 가을 이불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리고 있는 모습과 조르는 듯한 모양새가 아홉 살짜리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픽 웃다가 금방 정색했다.

“아니요.”

공주를 깨우는 키스는 들어봤어도 왕자를 재우는 키스는 듣도 보도 못했거든요.

덧붙이는 말에 요제프가 푸스스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는 명령하거나 화내는 대신,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그럼 다른 방식으로 잠이 오게 해줘.”

“어떤 방식으로 해 드릴까요.”

“다정하게.”

“다정하게?”

“아이를 위해 토닥이는 어머니처럼, 손주를 위해 옛이야기를 해주는 할머니처럼,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난롯불, 부드러운 이불, 따듯한 차, 연인의 목소리……. 온기를 가진 모든 것들처럼, 다정하고 포근하게.”

마리엘라는 말없이 왕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일렁이는 촛불 때문에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그림자가 졌다. 반쯤 감긴 눈꺼풀과 살짝 잠긴 목소리. 누가 봐도 몽롱하게 잠에 취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마리엘라는 이것이 역설적으로 그가 깊은 불면증을 앓고 있다는 방증임을 알았다. 눈이 저절로 감길 정도로 피곤하지만, 절대로 잠이 들 순 없는 각성 상태.

그녀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흐트러진 그의 머리칼을 정리해주었다. 몸을 일으켜 뺨에 키스라도 해줄 듯 가까이 다가서더니, 입맞춤 대신 경고를 날렸다. 물론 장난이 많이 섞여 있었다.

“그렇게 빙 둘러 말하면 제 방으로 돌아갈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요제프의 잠에 푹 잠긴 눈이 다시 떠진다. 그는 푸스스 웃더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악력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네 이야기를 해줘, 마리엘라.”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마리엘라는 스르륵 스툴 위에 앉았다.

시야가 달라졌지만, 서로를 향한 시선은 끊길 줄을 몰랐다.

“나는 너를 더 알고 싶어.”

“이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텐데요.”

“그것보다 더. 누구보다 잘.”

“…….”

그런 생각을 했다.

율리안이 알아낼 수 있었던 정도라면 요제프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이미 그는 그녀의 과거를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를 대하는 것이 껄끄러웠다.

그를 농락하는 것은 아닌가 고민하는 이 순간까지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과정이 될까 봐.

이미 한 번 뒤통수를 친 전적이 있는 남자라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마리엘라는 그를 믿었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막연하게 그에게 신뢰가 갔다. 그가 제게 보이는 모든 것이 진실인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것을 입증해 줄 증거는 없었지만.

그 옛날, 그녀가 그를 처음 믿었던 그 순간처럼.

요제프는 그녀의 침묵을 그저 머뭇거림이라고 잘못 해석했다.

“너무 어려우면 주제를 정해줄까?”

“들어보고 결정하죠.”

“너는 어떻게 했어?”

“뭐가요.”

“이렇게, 힘들 때. 너는 어떻게 이겨냈지? 어떻게 그렇게 강하고 굳건한 나무처럼 서 있을 수 있는 거야?”

그녀는 단박에 인상을 썼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아 보였다.

“룩센투크에서 멀쩡히 살아남은 전하가 할 말이 아닌데요.”

“제이 도련님이라고 불러줘.”

요제프가 사랑스러운 미소를 띠며 마리엘라의 팔을 가볍게 흔들었다.

“사랑 놀음에 미치셨군요.”

“영혼을 팔아도 좋아. 우리…… 마리 아가씨니까.”

그가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작은 마찰음이 둘 사이를 울리다 사라졌다. 마리엘라는 그가 입 맞춘 손 등을 치마 천으로 쓱쓱 닦았다. 그리고 섭섭하다는 얼굴의 요제프를 향해 직설적으로 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해봐.”

“지금 이건 개수작의 일부인가요, 아니면 진짜로 나약해져서 힘드신 건가요.”

요제프가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둘 다.”

“둘 다?”

마리엘라의 한쪽 눈썹이 아주 살짝 올라갔다.

그가 팔을 뻗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쉽게 내팽개치지 못하게 깍지를 꼈다. 그리고 엄지손으로 그녀의 손등을 살살 훑었다.

“내가 시력을 잃고 리덴부르크 영지를 떠돈 게 일 년도 안 됐어. 그때 소중한 사람들을 한 번 잃어버렸고, 두 번째 선례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중이지. 어떻게 나약해지지 않을 수 있겠어. 부모도, 동료도 잃고 남은 것은 너와 율리안 둘뿐인데.”

진심을 담은 요제프의 말이 마리엘라의 양심을 쿡쿡 찔렀다.

그녀는 요제프에게 죄스러운 마음을 느낌과 동시에 이 상황이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를 이렇게까지 약하게 만든 원인인 두 사람이 바로 그가 없애야 하는 불구대천의 적이라니.

아무것도 모르는 요제프는 연가를 부르는 어린 소년처럼 굴었다.

“그러니 마리엘라 네 이야기를 해줘. 다정한 목소리로 날 재워주렴. 내 모든 불안과 공포를 꽁꽁 묶어 깊숙한 곳에 묻어줘. 난 할 수 있고, 너는 절대 다치거나 죽을 일이 없다고 내가 믿을 수 있게 해줘.”

누구보다 강인한 나의 아가씨.

그가 그녀의 손톱 위로 잔 입맞춤을 쉴 새 없이 남겼다.

그에게는 그것이 사랑의 표현이었으나, 마리엘라에게 그것은 짙은 화상처럼 느껴졌다.

죄책감 때문일까.

말없이 빈 허공을 응시하던 그녀가 조심스레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할머니가 한 분 계셨어요. 키가 작고, 인자하게 생긴.”

그것은 그녀의 진짜 기억이다.

진창의 진창까지 굴러떨어졌을 시기,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소녀가 풀뿌리를 부여잡고 다시 기어 올라가기까지의 이야기.

가족들이 모두 죽고, 혼자가 된 마리엘라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안락한 집을 방문했다. 그곳의 분위기가 그녀에게 마음에 안정을 주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안락한 집은 백작가 사람들에게 미운털이 박힌 마리엘라가 숨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마저도 마냥 순탄하지는 않았다. 창백한 뺨의 여자가 죽은 이후, 안락한 집의 문은 단단히 잠긴 채 열릴 줄을 몰랐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 쭈그려 앉아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휴식의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분노와 두려움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데 갑자기 덜컥, 안락한 집의 문이 열렸다. 어찌나 놀랐는지 눈물이 쏙 들어가고 딸꾹질이 나왔다.

처음에 마리엘라는, 아버지에게 교살당한 ‘창백한 뺨의 여자’가 유령이 되어 자신을 죽이러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이 열리고, 그 안에 서 있는 것은 아름다운 외모를 한 부인이 아니라, 키가 작고, 눈매가 매서운 노파였다.

노인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고는 말했다.

‘쯧. 거기서 계속 떨고 있는 꼴이, 썩 보기 좋진 않구나.’

‘…….’

분명 호의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마리엘라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호반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고, 이 집은 ‘창백한 뺨의 여자’가 마지막으로 있던 곳이니까.

그런데 이어지는 말이 조금 이상했다.

‘따듯한 수프라도 하나 내주랴?’

마리엘라는 물음표가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노인은 부루퉁한 표정 그대로 살짝 비켜서 집 안을 보여주었다.

‘보다시피 음식을 너무 많이 해서.’

집 안, 벽난로에 달린 냄비 안에 수프가 가득 차 있었다. 오랫동안 맡아 보지 못한, 따듯한 가정의 냄새였다.

그녀는 홀린 듯 집 안으로 들어와 노인이 건넨 수프와 빵을 받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굶은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노인은 스스로를 안락한 집의 관리인이라고 소개했다.

그 순간 마리엘라의 부산한 손놀림이 뚝 멈췄다. 아무리 생존을 위해 이것저것 발버둥 치는 중이라지만, 최소한의 염치가 있었다.

그녀는 왜 더 먹지 않느냐는 노인의 말에 머뭇거리며 질문했다.

‘왜 저한테 잘 해주시죠? 저는 숲지기 호반의 살아남은 아이예요.’

그 말에 노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노인이 앉은 안락의자가 움직이는 소리와 장작 타는 소리만이 안락한 집을 감쌌다.

노인은 시간을 끌만큼 끌다가 느릿느릿 대답했다.

‘널 보고 있으면 내 과오가 생각나는구나.’

‘…….’

‘어린아이를 사지로 내몬 적이 있어. 그 아이가 딱 너만 했지. 그래, 딱 너만 한 나이였어.’

‘…….’

그래서 그게 대체 저랑 무슨 관계인 거죠?

마리엘라는 묻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아직 어린 소녀였다. 어른의 지지와 보호 없이는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어린 소녀.

순식간에 가족을 모두 잃고, 각박한 세상의 풍파를 온몸으로 맞서야 했던 마리엘라에게 노파가 보내주는 인정은 값진 것이었다.

이렇게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고 싶었다.

타인의 타인을 향한 죄책감에 기대서라도…….

마리엘라는 노인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노인의 깊게 팬 주름 사이사이로 짙은 후회가 가득 엿보였다.

‘……앞으로 가끔 찾아와도 돼요?’

그녀는 일부러 불쌍하고 순진한 표정을 짓고 물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다른 무엇보다 온기가 고팠다.

그게 없으면 더는 세상을 살아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네가 원한다면.’

노인은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답했다. 여전히 퉁명스러운 어조였다.

* * *

“후우.”

국정 논의를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온 알폰스 후작은 소파에 몸을 반쯤 묻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요즘 왕성 룩센투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국왕파와 귀족파는 딱 반반으로 나뉘어 권력 한 톨이라도 상대 진영으로 넘어갈까 잔뜩 날을 세우는 중이었고, 동시에 본적을 버리고 상대 진영으로 넘어가면 어떨까 하고, 속으로 쉼 없이 이해득실을 계산했다.

그동안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양 진영의 핵심 인물조차 자잘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크게 흔들리는 듯했다.

아마도 전쟁 이후로 고착된 권력 체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 판단한 듯했다.

이긴 쪽이 모든 것을 장악하게 될 싸움.

어디까지 치열해지고, 어느 수준까지 비열해질지 예측할 수 없었다.

알폰스는 자신들이 지금 끊어지기 직전의 팽팽한 줄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진영을 나눌 필요 없이 다 같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게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불안감이 시시때때로 들었다.

마치 십칠 년 전, 3차 성마전쟁을 시작했을 그 시기를 보는 듯했다.

친절한 얼굴 가죽을 뒤집어쓰고, 등 뒤로 쇠붙이를 손에 쥐고 있던 전쟁 직전의 상황을.

‘정말 끔찍한 나날들이었지.’

잠시 지옥 같던 과거를 떠올리던 그는, 고개를 젓고는 브랜디 한 잔을 따랐다.

전쟁으로 그는 아들 셋을 잃었다.

첫째와 셋째는 산채로 불에 타서 죽은 탓에 형태조차 찾을 수 없었고, 고작 열일곱이었던 막내 아이는 검붉은 피를 토하며 그와 그의 아내 앞에서 죽어갔다.

죽은 막내의 몸에는 푸른 반점이 가득했다.

아내는 장례식이 진행되는 내내 아이의 얼굴 위에 떠오른 푸른 반점을 지워보겠다는 듯 강박적으로 같은 곳을 문질렀다.

세 아이를 떠나보내고, 부부는 술과 약에 의존해서 매일 밤을 버텼다. 그들은 서로를 말리지 않았다. 그저 침묵 속에 방관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신을 놓고 미쳐버릴 것을 알았기에.

그가 술을 끊게 된 것은 십여 년 전쯤.

선왕 요하네스가 쓰러지고, 어린 요제프가 병세가 짙은 부친 대신 통치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알폰스는 요제프의 녹색 눈을 보고 힘없이 바스러진 제 자식들을 떠올렸다.

치기와 혈기, 그리고 두려움이 공존했던 자식들의 맑은 눈동자.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신인가, 국가인가, 왕가인가.

그는 제 자식들의 시작과 끝을 헤아리려 했고, 그것은 저들끼리 뭉치고 얽혀 알폰스의 마음속 성역이 되었다.

후작은 그날 이후 술을 끊었고, 바리 신의 영예, 베르단의 영속, 데르샤바크의 영광에 목숨을 걸기로 맹세했다.

허상으로 바스러진 제 자식들을 위하여.

그것들을 헛된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하여.

“정말 끔찍한 나날들이었어.”

그런 순간이 있다. 입 밖으로 감정을 토해내지 않으면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순간이.

알폰스는 씁쓸한 표정과 함께 술잔을 입에 댔다. 그날 이후 처음 마셔보는 브랜디였다. 낯설면서 익숙한 향이 목을 타고 코끝을 간질였다. 절망의 향이었다.

‘그런 비극은 다신 일어나선 안 돼.’

후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예감이 들었다.

피바람이 다시 불어 닥치리라는 예감이.

그는 미래를 보는 예언자라도 된 마냥 먼 곳을 빤히 응시하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미신도 뭣도 아닌 불안함 따위에 흔들리다니, 나도 늙었군.’

그는 이마를 짚은 채로 한참을 웃다가, 들고 있던 브랜디 잔을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저것이 원인인 것 같았다. 술은 아무것도 아닌 감정도 쉽게 증폭시키곤 하니까.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려 할 때 누군가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오게.”

후작이 대수롭지 않게 그를 불러들였다.

문이 열리고, 그는 수없이 많은 사람의 기척에 뒤를 돌았다.

“늦은 밤 죄송합니다만.”

그리고 선두에 선 자와 눈을 마주했다.

“워낙 중요한 일인지라.”

베데르 백작이었다.

그가 젊은 국왕파 귀족들을 이끌고 알폰스 후작의 저택을 방문한 것이다.

무언가 큰 결심을 한 것이 분명했다.

후작은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갈무리했다. 오랜 시간 왕성 룩센투크를 들락날락했던 자의 관록이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반드시 그 이유가 있겠지. 앉게.”

“아니요. 가능한 한 짧게 끝내고 싶습니다만.”

베데르 백작은 단칼에 후작의 제안을 거절했다.

두 사람은 서서 대화를 나누었다.

“왕자비 전하께서 룩센투크에 들어오고 반년이 되어갑니다. 그 반년 동안 왕성의 규칙은 수도 없이 무너졌습니다. 우리와 귀족파 사이의 선이 지워지고, 남편과 부인 간의 위계도 무너졌지요. 왕자 전하와 귀족들의 관계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재상을 정해야겠습니다.”

알폰스 후작의 얼굴 위로 불쾌감이 깃들었다.

그들은 마리안이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고 도를 넘었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도를 넘고 있는 것은 그들이었다.

“그건 전하와 상의하에 결정할 일이 아닌가.”

알폰스 후작의 명백한 거절에도 베데르 백작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마지막 말을 덧붙이는 걸 깜박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굴었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말입니다.”

왕자비를 배제시키고, 왕자의 배후에서 권력을 잡겠다는 말이었다.

“…….”

알폰스는 대답 대신 눈을 백작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그를 따라온 다른 귀족들의 얼굴도. 그들의 태도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굳건했다.

후작은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그도 안다. 베르단 수도에서 진짜 데르샤바크 왕가의 편인 사람들은 몇 없다는 것을.

늙은 귀족들은 대토지를 가진 자기들의 권위를 지키고자 할 뿐이고, 젊은 귀족들은 자신들이 귀족파의 주 세력이 되지 못함을 알기에 이곳에 붙었을 뿐이다.

숫자가 비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귀족파가 국왕파보다 우세했던 이유는 국왕파의 근본이 허영이었기 때문이었다.

알폰스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어쩔 수 없다는 것 역시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들을 끌어가고자 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변모했다.

후작은 직접적인 원인이 마리안 왕자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리안이 국왕파의 기세를 올려놓자 그들 내면의 욕망이 깨어났다. 패배주의에 물들어있던 국왕파의 젊은 귀족들이 권력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바리 신이시여.’

알폰스 후작은 속으로 신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을 받아야겠습니다.”

베데르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알폰스 후작이 천천히 손을 올려 이마를 짚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쉰 후에 모호한 말을 내주었다.

“……내게 시간을 좀 주게.”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이었다.

알폰스 후작은 날이 밝자마자 요제프를 찾아갔다. 국왕파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열의 조짐에 관해서 그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사실이 베데르 및 국왕파의 귀족들 귀에 들어가면 안 되었기 때문에 비밀스럽게 알현을 청했다.

“어서 오세요, 알폰스 후작.”

요제프는 언제와 같이 부드럽고 친절하게 후작을 맞이했다.

후작은 자신이 전달할 말들이 선량하고 소심한 왕자의 마음에 괜한 불안감을 조성하면 어떡하나 걱정스러웠다.

그렇다고 어물쩍 돌려 말하거나 모르는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알폰스 후작이 진중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어둡고 무거운 대화가 이어졌다.

이야기를 다 들은 후, 요제프는 고개를 잘게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군요.”

혼잣말하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미미한 반응이었으나 그 안에 내포된 의미는 어느 무엇보다 무거웠다.

휴식은 끝났다. 잔악한 룩센투크의 현실을 통해, 요제프는 두려워하는 존재에 대적할 힘을 얻었다.

* * *

요제프는 바로 마리엘라를 소환했다.

쪽지를 받고 그의 서재에 도착한 마리엘라의 눈에 보인 것은 한쪽 벽을 가득 채운 대륙의 지도와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서류뭉치였다.

나약함을 딛고 침대에서 일어난 요제프가 서류들을 정리하며 그녀를 반겼다.

“이게 다 뭐죠?”

“렝 백작과 관련된 거의 모든 정보?”

“그를 급히 재상으로 세우시려고요?”

“일이 그렇게 되었어. 베데르 백작이 국왕파의 젊은 귀족들을 선동해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는군.”

“골치 아프게 되었군요.”

“오히려 좋은 일일지도 몰라.”

요제프가 그녀를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어딘가 홀가분해 보이는 미소였다.

“율리안이 내게 슬쩍 일러줬어. 교황께선 무사하시다는군. 공식적인 발표가 없는 이유는 이번 사건이 잔존 흑마법사 세력이 벌인 일인지 조사하기 위함이라나.”

‘율리안의 정보라…….’

그녀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그것참…… 다행이네요.”

“그렇지. 덕분에 한시름 놨어.”

그는 정리된 서류 몇 가지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교황 로베르트 가르뎅의 생사는 확인되었고, 에드먼드는 당분간 마리안에게 맡기기로 하고, 이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마리엘라는 그가 내미는 종이를 받아 읽었다.

“아서 렝……. 어머니 쪽의 이름을 따랐군요. 생각보다 젊네요.”

“실제로 보면 더 그래. 한때 사교계 모든 아가씨의 결혼 희망 대상이었지.”

“지금은?”

그녀의 질문에 요제프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것도 없어. 자택에 틀어박혀 일만 한다더군.”

“흠.”

그녀는 깔끔한 그의 여자관계에 의문점을 가졌다.

“결혼한 전적도 없고.”

중얼거리듯 던진 말을 요제프가 받아 이었다.

“여자와 염문을 뿌린 적도 없지.”

“남자를 좋아하나요?”

“밝혀진 바 없어.”

마리엘라는 다시 머리를 굴렸다.

율리안은 요제프만큼 자신을 믿지 않는다. 그는 아서 랭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어떤 수를 써서 그와 요제프의 결합을 훼방 놓을 것인지 일러주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도.

율리안이 하녀 마리엘라에게 첩자로서 요구한 일은 단 한 가지. 요제프가 그녀에게 하는 모든 말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뿐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간단한 일이지만, 실상을 파고들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최대한 왕자의 편인 것처럼 굴면서 공작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야 했음으로 단어 사용 하나하나에 주의를 가해야 했다.

그녀는 렝 백작을 분석하는 척하면서 동시에 아무 정보나 도움이 되지 않을 말을 흘렸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부류일 수도 있겠군요.”

“그럴 수도 있지.”

“도미닉 남작처럼 접근할 수는 없겠어요.”

“그래도 단언하긴 일러. 약점을 최대한 캐야지. 겉으로 드러나는 게 없다고 쉽게 포기하기엔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가 몇 없어. 일단 사람을 심어놓았으니 기다려보도록 하자.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그때 가서 알겠지.”

그녀는 대충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애정 문제는 일단 그렇게 넘기고, 두 번째 계획은 뭐죠?”

“돈줄을 틀어쥘 거야. 교황 성하께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을 핑계로 피에트와의 무역에 제재를 걸어야겠어.”

“왕성을 들락날락하는 귀족의 반이 상단 일에 뛰어든 상황에서 그게 가당키나 한가요?”

“렝 백작의 주요 거래 품목 위주로 틀어쥐어야지, 일단은.”

“흠…….”

마리엘라가 대꾸 없이 주어진 서류를 읽었다.

브랫 백작과 렝 백작은 베르단에서 가장 큰 상단을 가진 사람이지만, 두 사람의 상단은 주 소비계층이나 판매 물품 등이 다르다.

탄탄한 자금과 인맥을 바탕으로 상단 일을 시작한 브랫 백작의 주력 상품은 피에트에서 나는 고급 주류와 동양에서 그리너드를 타고 넘어오는 비단이었다.

반대로 밑바닥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올라온 렝 백작이 소유하고 있는 상단의 주력 상품은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생필품들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다양한 물건을 판매하는 렝 백작의 상단은 물줄기가 많은 강과 같아서 수출품 하나를 막는다고 쉽게 휘청거리지 않았다. 지난번과 같은 꼼수로 뒤흔들기 어렵다는 말이었다.

지난번 재상을 정할 때, 그녀가 렝 백작을 반대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욕망이 드러나지 않아 다루기 힘든 사람만큼 위험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은 요제프가 말을 덧붙였다.

“덩치가 큰 다른 상단처럼, 아서 렝의 상단 역시 부유한 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급화 라인들이 있지. 다른 상단과 다른 점이 있다면, 브랫 백작이나 다른 장사치들은 ‘물건’을 가지고 와서 장사를 한다면 아서 렝은 사람을 데리고 장사를 한다는 거야.”

“장인을 직접 데리고 와 일대일 맞춤 제품을 제작, 판매한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맞아. 나는 그자들을 모조리 추방할 거야.”

“네?”

“국경 지역에서 벌어진 교황 습격 사건의 배후가 마녀인지 아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지금, 마녀와의 전쟁으로 오랜 기간 몸살을 앓았던 베르단이 외지인을 경계하게 되는 건 당연한 선택이지 않겠어?”

확실히 적절한 명분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던 마리엘라에게 작은 궁금증이 생겼다.

“하지만 전체 수익의 십 분의 일도 안 되는 수입인데요. 고작 이런 일로 흔들릴까요?”

“그렇게 조금 팔아서 그만큼 남겨 먹었다는 거니까. 거기다가 이쪽 분야에서 렝 백작의 상단은 독보적이야. 가능성이 큰 사업을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는 않겠지. 생각이 있다면 먼저 손을 뻗을 거야.”

“부디 그렇게 되기를 바라야겠군요.”

그녀는 거짓으로 그를 안심시킬 말을 했다.

양심의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적당히 왕자의 편인 척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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