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보이지 않는 존재
안센 지그리트 후작은 요즘 생각이 많아졌다.
지금까지 그의 인생은 승승장구, 그 자체였다.
별 볼 것 없는 백작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작위 하나 못 물려받을 신세였던 그는 의도적으로 옆 마을의 후작 영애를 꾀어 엄청난 지참금을 받고 결혼했다.
결혼 첫날 밤, 그의 아내는 앞으로 두 사람이 꾸려나갈 사랑이 가득한 가정생활에 가슴 부풀었지만, 그는 지참금으로 기사 작위나 하나 얻어 볼 생각이나 하며 잠이 들었다.
결혼 이후, 그는 아내의 친정에서 받아온 돈을 베르단 수도에 펑펑 뿌려대며 고위 귀족들에게 줄을 대보려 했다.
능력 없고 게으르지만 명예욕과 권력욕은 넘치는 전형적인 한량의 표본 같은 행동이었다.
그렇게 한심하게 살아가다 어떻게 고위 귀족과 연이 닿았다. 드디어 그럴듯한 작위 하나 얻어 보나 싶은 순간 3차 성마전쟁이 발발했다.
그의 연줄이 되어줄 수도의 귀족은 흑마법사 가문과 잘못 얽혀 교단에 의해 숙청당했다. 그가 돈을 쏟아부었던 다른 귀족들도 신세는 비슷했다. 더는 남은 재산이 없었다. 처가에 손을 벌려 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푼돈과 쓴소리뿐이었다.
절망적이던 그의 앞에 한 줄기 희망이 내려왔다. 아내의 오빠이자 늙은 지그리트 후작의 외동아들이 전쟁에 휘말려 급사한 것이다.
아내가 후작가의 첫째 딸이었던 덕분에, 그는 졸지에 장인어른의 성과 함께 후작 자리를 물려받았다.
지그리트 후작령은 강가 근처의 넓은 평지를 가지고 있어 부를 축적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후작령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후작가의 가풍 자체가 정치에 별 뜻이 없었던 덕분에 지그리트 후작가는 베르단 정계에서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안센 지그리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는 지금이 왕성에서 한 자리 차지할 적기라고 판단했고, 후작가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바탕으로 정계에 입성하기 위해 베르단 수도로 돌아갔다. 마침 베르단은 수도의 고위 귀족 반 이상이 전쟁으로 멸문해 사람이 부족한 상태였다. 지그리트 후작은 별 무리 없이 룩센투크의 출입증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이후의 삶은 별것 없었다. 국왕파에 발을 담그고 깔짝거리다가 가세가 기우는 것 같자 얼른 귀족파로 본적을 옮겼다. 그곳에서도 생각한 만큼 높은 자리로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왕성에서 귀족파가 득세하는 추세였던 덕분에 원하는 만큼 콩고물을 얻어먹을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마리안 왕자비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며칠 전이었다.
지그리트 후작은 친구인 도미닉 남작과 함께 브랫 백작의 비위를 맞추며 룩센투크의 회의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브랫 백작은 요바튼 공작이 죽은 뒤 어수선해진 귀족파를 다독여가며 이끌어갔고, 자연스레 귀족파의 수장으로 자리 잡는 중이었다.
그는 귀족들을 이끌고 득의양양하게 왕성 복도를 걷다가 적수를 만났다. 시녀를 데리고 정원 산책을 하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마리안 왕자비였다.
브랫 백작은 그녀를 보자마자 바로 방향을 틀어 최대한 그녀를 못 본 척하려고 했지만, 왕자비가 한발 빨랐다.
“오랜만이네요, 브랫 백작.”
그녀가 백작을 콕 집어 인사를 건넸다.
줄행랑을 치려던 백작은 걸음을 멈추고, 호탕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자연스러웠지만, 그것이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기 위한 허세라는 것을 그곳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하하. 왕자비 전하.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마리안이 그를 빤히 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럼요. 백작과 우연히 마주치지 않았다면 더 행복하고 즐거울 뻔했죠. 이상하게 브랫 백작 얼굴만 보면 그때가 생각나요. 제가 북쪽 탑에 갇혀서 나오지 못했던 그때가.”
“왕자비 전하,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백작이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그는 그녀를 유폐시키려고 했던 것은 자신이 아니라 요바튼 공작이라는 말을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마리안에게 저지당했다.
“오해요? 제가요? 설마 그럴 리가요. 잊으신 것 같지만, 한 달 전만 해도 전 왕성의 정원이 아니라 어디 구석진 곳에 유폐된 신세였답니다. 매우 슬프고 절망적이었어요. 그걸 그냥 오해라고 퉁 쳐버리시면, 저는 없는 기억을 만들어낸 사람이 되어버리죠.”
“아니, 그것은…….”
“아니면 백작께선 제가 미쳤다고 말하고 싶으신 건가요? 이번엔 그 핑계로 절 쫓아내 보시려고요?”
백작은 침묵했다. 그의 뒤에 섰던 다른 귀족들은 모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대답이 없으시네요. 쫓겨날지도 모르는 왕자비는 무시해도 된다, 이건가?”
지그리트 후작은 마음속으로 왕자비에 대한 정보를 새겼다.
마리안 왕자비는 귀여운 외모와 우아한 말투를 가지고 사람을 극한까지 몰고 가는 것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 제가 회의시간이 늦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먼저 가보겠습니다, 전하.”
브랫 백작이 시계를 확인하는 척하더니 허둥지둥 자리를 빠져나왔다. 지그리트 후작도 그의 뒤를 따랐다.
“조심하세요, 다들.”
등 뒤에서 마리안 왕자비의 목소리가 들린다.
“전 두 눈 똑바로 뜨고 여기에 있으니까요.”
뒤를 돌아보니, 왕자비가 눈을 부릅뜨며 무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안광이 어찌나 섬뜩한지, 눈을 감아도 그 위에 그려질 정도였다.
지그리트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브랫 백작의 뒤를 쫓았다.
“무서운 여자야.”
브랫 백작이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지그리트는 자신이 괜히 귀족파로 본적을 옮긴 건 아닌가, 후회를 했다.
그가 죽을 때까지 승승장구할 줄 알았던 귀족파는 마리안 왕자비라는 암초를 만나서 하염없이 침몰 중이었다.
* * *
“아무래도 오랫동안 외무장관을 맡았던 브랫 백작이…….”
“백작께서 이 베르단 수도에 입성하신 것이 이십 년은 되셨는지 묻고 싶군요. 가문을 이어 대대로 국왕을 모신 알폰스 후작이 적격이지요.”
국왕파 신하들에게까지 밀릴 정도로. 지금 왕성은 차기 재상을 누구로 할지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었다.
여태까지는 왕성 룩센투크 안에서 제일 입김이 강했던 귀족파가 밀어붙이는 자가 그대로 재상이 되곤 했지만, 지난번 마녀사냥의 실패 이후 둘의 세력은 비등해졌다.
어느 쪽에서 재상을 배출해내는 지가 앞으로의 승패를 좌우할 것이었다.
“재상은 충성심만으로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오!”
“그러나 충성심은 기본이어야 하죠. 지난번 같은 일을 또 벌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사안이 사안인지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간 것 아닙니까. 설마 저희가 왕가에 불경한 마음을 품고 그랬겠습니까?”
“그쪽에서 주도한 것은 틀림없지요.”
브랫 백작의 처남이자 지그리트 후작의 죽마고우인 도미닉 남작이 국왕파의 노신들과 싸우다 열세에 밀렸다. 아무래도 지난번 왕자비 사건이 주는 타격이 컸다.
그는 재빠르게 목표물을 바꿨다.
남작은 몸을 틀어 요제프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왕자 전하, 이건 무의미한 말싸움밖에 되지 못합니다. 현명하신 전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왕자는 여태까지 귀족파의 손아귀에 올라가 있었다.
도미닉 남작은 경험에 근거해 그가 이번에도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줄 것이라 믿었다. 그의 등 뒤로 신하 몇이 무릎을 꿇었다.
이에 질세라 국왕파의 귀족들이 나섰다.
“전하, 저들은 자신의 과오를 모두 지우려 합니다. 그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올바른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전하, 결단을……!”
모든 신하가 입을 모아 외쳤다.
“음…….”
요제프는 턱 밑을 매만지며 시간을 끌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느릿느릿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신하들을 달랬다.
“너무 어려운 문제군요. 베데르 경의 말도 맞는 것 같고, 힐베르크 경의 말도 맞는 것 같고. 흠……. 이 문제는 조금 더 고민해 볼 필요가 있겠어요. 일단 넘기고, 다음 안건으로 갑시다.”
결정을 내리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
신하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모두 입을 다물었다. 방긋방긋 웃는 천치 같은 요제프의 배후에는 무시무시한 마리안 왕자비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지그리트는 괜히 초조해졌다. 요제프가 시간을 끌면 끌수록 국왕파에게 유리해진다. 이제 곧 교황이 베르단으로 돌아올 것이고, 대관식이 진행될 것이다. 귀족파 출신의 재상이 없다면, 앞으로 모든 것은 국왕파가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것이었다.
똑똑한 사람은 아니지만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은 귀신같이 셈하는 지그리트 후작은 조용히 상대 진영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알폰스 후작이 듬직해 보였다.
‘그냥 저쪽 편에 계속 머물렀어도 좋았을 것을.’
지그리트 후작은 당분간 이 답답한 상황이 해결되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 * *
귀족파를 위협하는 것은 마리안 왕자비뿐만이 아니었다. 요 몇 주간 국경 지역의 치안이 심상치 않았다.
“담다르디 지방으로 가는 길도 도적 떼에게 점령당했답니다.”
“담다르디도? 거긴 완전 샛길인데?”
“샛길이라 더 위험합니다.”
끙. 귀족파 귀족들이 앓는 소리를 했다.
베르단은 제국 렝바토의 분열과 함께 탄생한 국가였다. 넓은 땅을 가진 유지가 기사들과 군주의 계약을 맺고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만들었다.
인근 세 국가와 비교하여 광활하고 비옥한 평지를 가지고 있어 ‘황금의 땅’이라는 별명이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광산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황금이나 보석, 철기 같은 것들은 수입해야만 했다.
귀족파의 귀족들은 그 점을 이용해 부를 축적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주로 교류하는 나라는 베르단 북쪽에 위치한 피에트였다. 피에트는 산이 많고 평지가 부족한 데다가, 더운 날보다 추운 날이 더 많은 나라로, 영지민들을 굶기지 않으려면 베르단에서 건너오는 곡식이 꼭 필요했다.
귀족들은 베르단의 곡식을 싸게 구입해 피에트에서 나는 귀금속, 철기, 주류 등과 교환했다. 그 밑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인 그리너드를 방문해 동양에서 넘어온 비단 등을 수입해오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귀족파 사람들의 주 거래국은 피에트였다.
베르단과 피에트는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에 상단은 육로를 통해 거래품을 옮겼다. 그런데 요 몇 주간 피에트로 향하는 모든 길에 도적 떼가 득실거렸다. 도적들에게 물건을 약탈당한 귀족들이 벌써 열두 명이나 되었다.
“그것들이 브랫 백작의 상단처럼 큰 상단은 건드리지를 않으니…….”
“브랫 백작은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왕실에서도 관심이 없어.”
“이 손실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모두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지그리트 후작은 혼자서 멍하니 땅을 응시했다. 그는 장인어른으로부터 넓은 토지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상단을 운영할 필요가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매해 돈이 들어오는데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뛰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역시 가만히 있길 잘했지.’
그는 과거 자신의 선택에 박수를 보냈다. 피에트 국경의 도적 떼 문제는 친구들의 고민거리였지 그의 근심 걱정은 아니었다.
그때까지는 그러했다.
“자네, 모은 돈이 꽤 될 테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도미닉 남작이 그의 어깨를 잡더니 말을 꺼냈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린가?”
“사실 말은 못 했지만, 내 상단도 도적 떼들에게 당했네. 꽤 큰 투자라서 손해를 많이 봤어.”
“파산할 정도인가?”
“아직 그 정도는 아니지만, 이 상황이 계속되다간 그렇게 될 걸세.”
“그렇다면 브랫 백작을 찾아가 보지 않고? 아무리 그래도 매형이니 어떻게든 대책을 세워주실 것인데.”
그 말에 남작이 머뭇거렸다.
“……실은, 내게 사정이 좀 있네.”
“무슨 사정?”
“술을 좀 들여오려 했거든.”
“저런.”
지그리트 후작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브랫 백작은 베르단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상단의 소유주였다. 그의 상단은 보석, 비단, 차 등 가리지 않고 많은 것을 판매했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주류였다. 브랫 백작은 이런저런 루트를 통해 술을 제조하는 피에트 고위 귀족들과 연을 맺었고, 그들과 단독 계약을 했다. 아직도 피에트의 술은 브랫 백작의 상단이 독점하다시피 했다.
도미닉 남작의 태도로 추측해보건대, 도미닉 남작은 자신이 브랫 백작의 처남인 점을 이용해, 그 빈틈을 노려보려고 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매형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한 것이고.
“잠시만 빌려주면 돼. 아주 잠시만. 치안이 잠잠해지면 바로 갚을 수 있네.”
“얼마가 필요한데 그러나.”
지그리트는 일단 친구의 말을 들어보고자 했다. 최대한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도미닉 남작이 요구하는 돈이 터무니없이 많았다. 정확한 금액을 들은 그가 난색을 보였다.
“미안하지만, 그 정도의 돈은 없네.”
“없다니? 없는 척하는 게 아니고?”
도미닉은 얼굴색을 바꿔 그를 쪼아댔다.
“요 몇 해 해충이 득실거려서 수익이 얼마 안 되네. 영지에 있는 성을 보수하느라 돈을 좀 쓰기도 했고, 아내가 아프기도 해서…….”
“속이 정말 훤히 보이는 소리군. 자네는 친구가 위기에 처했다는데, 자기 재산만 지키고 싶은 모양이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자네가 위험에 처했을 때 내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나?”
“기억하지, 다 기억하고말고. 자네 혹시 술 취했나? 갑자기 언행이 왜 그래?”
도미닉이 계속해서 빈정대자, 지그리트도 살짝 기분이 상했다.
“분노가 일어서 그러네! 친구가 막다른 길에 몰려 재기할 돈을 좀 빌려달라는데, 그것 하나 망설이는 비열한 친구를 뒀으니!”
도미닉 남작은 얼굴을 붉히며 지그리트를 비겁한 사람으로 몰아갔다. 그렇게 해서라도 지그리트가 그에게 돈을 좀 내어줬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그리트 후작의 마음은 굳건했다.
‘헛소리. 링글렌 양에게 갖다 바칠 돈을 구하는 중이라는 걸 누가 모르는 줄 알고?’
링글렌은 베르단 수도의 블루데크 극단 소속의 여배우였다. 블루데크는 바이올세네츠 국립 극단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잘나가는 극단이었다. 링글렌은 이제 막 조연에서 주연으로 올라가는 라이징 스타였고, 의상비와 생활비를 대줄 후원자를 찾고 있었다.
여자를 밝히기로 유명한 도미닉 남작은 링글렌을 꾀기 위해 그녀의 주연 데뷔작 의상과 소품 비용을 모두 대주기로 약속하였다. 일개 남작이 감당하기에 꽤 큰돈이었지만, 피에트에 보낸 마차가 돌아오면 무리 없이 해결될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갑자기 도적 떼 때문에 일이 틀어진 것이다.
남작이 주문한 소품과 의상 제작은 완료되었으나 그에 대한 지급일이 미뤄지고 있었다. 졸지에 창피를 당한 링글렌이 남작에게 잔뜩 화가 나 있다는 이야기가 사교계를 떠다녔다.
‘여기서 넘어가면 안 되지, 절대 안 되지.’
지그리트는 도미닉이 아무리 자신을 설득하고 회유하려고 해도 절대 넘어가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 * *
며칠이 지났다. 도미닉 남작과 지그리트 후작 사이는 여전히 냉랭했다. 정확히는 도미닉 남작이 일방적으로 지그리트를 무시하는 중이었다.
지그리트 후작은 입장이 참 곤란해졌다. 국왕파 소속이었던 그를 귀족파로 이끈 사람이 바로 도미닉 남작이었다. 브랫 백작의 처남인 남작의 지지가 없으면 그의 입지가 애매해진다.
‘그렇다고 여배우에게 갈 것이 뻔한 돈을 빌려줄 수도 없고.’
후작의 머리가 지끈거린다. 인생에서 위기가 닥칠 때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져 행운으로 얼렁뚱땅 해결되어왔던 덕분에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야. 그냥 주고 끝내는 게 나을 수도 있겠어. 돈 때문에 모든 걸 망칠 수는 없지.’
그는 도미닉 남작이 제시했던 금액을 떠올렸다.
‘다시 생각해도 부담되는 금액이군. 이번 한 번 만이라면 어떻게든 조달해 준다지만, 앞으로 계속 이러면 어떡하지. 한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잖아.’
기울었던 마음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룩센투크의 회의장, 귀족파와 국왕파의 신하들이 서로의 재상 후보자들을 헐뜯으며 팽팽히 싸우고 있는데, 지그리트 후작 혼자 개인적인 일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깊이 고심하던 그는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당황했다.
‘내 착각인가?’
알폰스 후작이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지그리트는 혹시나 해서 자리를 슬쩍 옮겨 봤다. 알폰스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왔다.
‘뭐지?’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좋은 뜻은 아닐 것 같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알폰스 후작의 눈이 태양처럼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부모를 죽인 원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회의가 파하자마자, 알폰스 후작이 그를 향해 걸어왔다.
“지그리트 후작, 시간 좀 있나?”
“하하. 제가 좀 바빠서.”
본능이 경고한다. 지그리트는 망설임 없이 줄행랑을 쳤다.
그러나 알폰스 후작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알폰스는 스토커처럼 그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지그리트!”
“아내가 오늘은 일찍 오라고 당부하는 바람에.”
그때마다 지그리트는 다양한 변명을 대며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낼 알폰스가 아니었다.
“후작님, 알폰스 후작님에게서 편지가 왔는데요.”
“정말 미쳐 버리겠군, 집에서까지!”
시종의 말에 지그리트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도미닉 남작일로도 충분히 생각이 어지러운데 알폰스 후작이 더 복잡하게 만든다.
“대체 알폰스 후작은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박쥐같이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해서 화가 난 거라면 십오 년 전 그때 그랬어야지! 왜 인제 와서 그러는 거야, 왜!”
미친 사람처럼 물건을 내던지며 소리를 지르고 나니, 분노가 가라앉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지그리트 후작은 벽에 바짝 붙어 질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시종을 향해 방의 정리를 명한 뒤 집을 나섰다. 시내로 나가 차를 한 잔 마시며 앞으로의 일을 찬찬히 고민해보기 위함이었다.
느긋하게 카페에 앉아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툭툭 쳤다. 뒤를 돌아보니 그 자리에 알폰스 후작이 있었다.
“으악!”
지그리트는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알폰스 후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뭘 그렇게 놀라지?”
“하하. 저희가 즐겁게 인사를 나눌 사이는 아니니까요.”
지그리트 후작의 어색한 웃음에 알폰스 후작은 담담함으로 대꾸했다.
“곧 그렇게 될 걸세.”
“무슨…… 말씀이신지?”
지그리트가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알폰스 후작은 진중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안센 지그리트. 내 그동안 그대를 자꾸 찾은 것은 그대에게 중히 제안할 것이 있어서야.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어. 자네는 오늘 들은 이 말을 누구에게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네.”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지그리트 후작은 손바닥을 펴 보이며 거절 의사를 밝혔다.
“듣지 않겠습니다. 저는 보기보다 입이 가벼운 사람이라서요.”
그러나 상대의 의사를 듣고 일을 멈췄을 사람이라면 여기까지 끈질기게 쫓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알폰스 후작은 지그리트 후작의 의사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제 할 말을 했다.
“지그리트 후작, 우리 국왕파는 그대를 지지할 준비가 되었다네.”
“예?”
뜬구름 잡는 말에 지그리트 후작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우리의 재상이 되어주겠나?”
“……예?”
너무 뜬금없는 말이라 안센 지그리트는 예의도 내다 버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알폰스 후작의 얼굴에 침까지 튀겼다. 알폰스는 묵묵히 얼굴에 묻은 침을 닦아냈다.
‘그래, 본인도 어이가 없겠지.’
알폰스 후작이라고 저런 말을 뱉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스토킹하는 사람처럼 그를 졸졸 쫓아다니고 싶지도 않았다.
그에게도 다 사정이 있었다.
* * *
며칠 전이었다.
재상을 뽑는 문제로 양 진영에서 한창 소란스러웠던 때.
요제프가 알폰스 후작을 은밀히 불렀다.
“다들 다음번 재상과 관련한 문제로 정신없으신 것 같네요.”
그 말을 들은 알폰스 후작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무심한 척하고 있지만 그는 내심 자신이 재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 점을 왕자에게 정확히 지적당한 것 같아 부끄러웠다.
알폰스 후작의 그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요제프는 특유의 해맑은 미소를 내보이며 그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사실 제게도 생각이 있답니다. 다음 재상으로 지그리트 후작을 세울까 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알폰스 후작이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만도 했다. 지그리트 후작은 본디 국왕파였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능력보다 원하는 게 훨씬 많은 욕심쟁이였던 그는 왕과 귀족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자, 언제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냐는 듯, 얼굴색을 바꾸고 귀족파로 넘어갔다.
“전하, 지그리트 후작은 담이 작고, 욕심이 많으며, 사리 판단을 정확히 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다른 이면 몰라도, 후작은…….”
지그리트 후작이 재상이 되면 안 되는 이유를 만 개는 댈 수 있었다.
알폰스 후작은 요제프를 설득하려 했다. 그런데 요제프가 중간에서 그의 말을 끊었다.
“압니다. 그래서 그를 등용하려는 것입니다. 오해는 하지 마세요. 경을 배척하고자 벌인 일이 아니에요. 다만, 이 기회를 타 약간의 장난질을 치자는 것이죠.”
“장난이라니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저쪽은 역풍으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요. 마리안의 편지 덕분에 앞으로 흑마법사의 ‘흑’자도 꺼낼 수 없게 된 데다가, 안정적인 구심점 역할을 해주었던 요바튼 공작은 갑작스레 자살했죠. 새로운 일을 벌이려 해도 마리안의 반격이 무서워 섣불리 나서지 못할 겁니다. 그들의 세력은 순식간에 움츠러들었어요. 하지만…….”
요제프는 말을 길게 끌었다. 그는 숨을 한 번 고른 뒤 천천히 앞의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입니다. 곧 그들은 다시 일어설 거예요. 어쩌면 이번 일을 반면교사 삼아 더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할 수도 있겠죠. 그러니 우리가 이쯤에서 손을 써야 해요. 여기서 더 성장하지 못하게 못을 박자는 것이죠.”
“그것이 지그리트 후작을 재상 자리에 올리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겠습니다.”
“지그리트 후작은 우리 쪽에 있다가 저쪽으로 넘어간 변절자라고 알고 있어요. 그런 자들이 저쪽에 꽤 된다는 것도. 그러니 그걸 이용합시다.”
“그 말씀은…….”
“현재 저들의 중심축은 브랫 백작입니다. 마리안의 활약으로 위협을 받은 저들은 단결하고자 할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래저래 곤란해지는 건 우리죠. 그러니 그러지 못하게 흩어놓고자 해요.”
요제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진 채로 창가를 향해 몇 발자국 걸었다. 알폰스 후작의 눈이 요제프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창가에 다다른 그는 몸을 반쯤 돌려 알폰스 후작을 내려다보았다. 내리쬐는 햇빛이 그의 등 뒤에서 후광을 만들었다.
“지그리트 후작을 이용해 저들 내부에 파벌을 만들 겁니다.”
“…….”
알폰스 후작은 넋 빠진 얼굴로 왕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여태까지 그가 알고 모셨던 왕자가 아닌 것 같았다.
강인하고, 냉철하며, 상황 판단이 명확한 군주가 그의 눈앞에 있다.
베르단의 위상을 최고위조로 높였던 위대한 왕, 바욘 2세가 현신한 것 같았다.
‘여태까지 내가 모시던 주군은 어디 갔는가. 아니, 사실 이것이 왕자 전하의 본 모습이었던가?’
알폰스 후작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불현듯 요제프가 방긋 웃었다. 그는 천사 같은 미소를 내보이며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가 저의 아내, 마리안의 의견입니다. 어떠신가요?”
물론 거짓말이다. 오늘의 이 수는 마리엘라와 요제프가 몇 날 며칠을 머리를 맞대고 고심한 끝에 내놓은 것이었다.
* * *
마리엘라가 한 달 동안 마냥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마리엘라와 요제프는 끊임없이 현재의 정세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가 율리안의 전속 하녀가 된 지 이 주 정도 되었을 때, 요제프가 선언했다.
“믿을 만한 소식통에게서 교황의 대륙 순회가 거의 다 끝나간다는 편지가 왔어. 대충 삼 주 뒤면 베르단 수도에 입성할 거야. 내 머리 위에 왕관을 얹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소리지.”
“확실한가요?”
“확실해. 이제 때가 왔어.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었던 일을 이제 다시 거행할 거야.”
그녀는 요제프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재상을 뽑겠다는 말이군요. 정확히 누굴 염두에 두고 계신 거죠?”
“그건 우리가 여기서 골라야 해.”
달칵. 요제프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나무 상자의 잠금쇠를 풀었다. 상자 안에는 체스판과 말들이 있었는데, 일반적인 체스 게임의 것들과 모양이 조금 달랐다.
체스판의 가로 칸이 다른 것들보다 많았고, 각 체스 말의 숫자도 통상적인 것들과는 달랐다. 그리고 말 앞에는 조그마한 글씨로 무언가가 적혀있었다.
‘신하들의 이름이군.’
마리엘라는 체스 말 하나를 들어 그 앞에 적힌 것을 확인하고 제 자리에 놓았다.
‘룩은 공작, 비숍은 후작, 나이트는 백작, 폰은 남작인 건가.’
직관적인 표현 방식에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그녀는 제 쪽에 있는 체스 말 중 퀸과 킹을 들어 보았다. 각각의 말에 마리엘라와 요제프의 이름이 적혀있다. 다시 손을 뻗어 맞은편에 있는 퀸과 킹에게 새겨진 이름을 확인했다. 퀸에는 브랫 백작의 이름이, 킹에는 물음표가 새겨있다.
그녀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이것 참, 퀸이 되어서 영광이라고 해야 할지.”
“카드 모양으로 만들 수도 있어.”
거기에도 퀸이 있으니까. 요제프가 장난스러운 태도로 그녀에게 윙크를 해 보였다. 마리엘라는 웃어넘기는 대신 정색하며 물었다.
“우리가 게임을 하는 중이었던가요?”
“전쟁과 게임은 항상 결이 같잖아. 좀 즐겁게 해보자는 거지.”
그녀의 시선이 체스판 위로 옮겨진다. 규칙 없이 뒤죽박죽으로 놓여있는 말을 주르륵 훑어보다가 요제프 쪽의 말 하나를 집었다.
“그렇다면…… 저는 지그리트 후작을 선택하겠어요.”
“실망이군, 나는 렝 백작을 골랐는데.”
요제프가 자기 앞의 말 하나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며 말했다.
지그리트 후작과 렝 백작은 귀족파에 속해 있었다. 아무래도 원하는 결과는 비슷한 것 같은데 그 결과물까지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 다른 것 같았다.
마리엘라는 팔짱을 낀 채로 체스판 위의 말, 그리고 요제프의 얼굴을 번갈아 본 뒤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게임을 시작할 때군요.”
“전쟁을 시작할 때지.”
요제프가 그녀를 따라 웃으며 말을 받아쳤다.
그렇게 길고 긴 언쟁이 시작되었다.
“왜 지그리트 후작이지?”
“혼자 튀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상단을 가지고 있거나, 상단에 투자 중이죠. 그렇지 않다면 정말 별 볼 일 없어서 있으나 마나 한 존재들이에요. 국왕파에 끼어들 자격조차 못 돼서 귀족파에 붙어 있는 사람들. 그런데 지그리트 후작은 둘 다 아니죠. 후작은 상단에 관심도 없어요. 넓고 기름진 영지를 가지고 있어 수익이 충분하니까. 이번엔 제가 묻죠, 왜 렝 백작이죠?”
“브랫 백작에 직접적으로 맞설만한 사람이니까.”
그는 짧고 굵게 답했다. 마리엘라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렝 백작은 브랫 백작 다음가는 상단을 운영 중이었다. 브랫 백작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나라의 정세에 최대한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었다. 상단으로 쌓은 부를 통해 베르단을 통째로 먹으려 하는 브랫 백작과 다르게, 렝 백작은 오로지 상단을 굴리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다. 태생적으로 권력에 별 관심이 없는 걸로 보였다.
요제프는 아마 랭 백작을 끌어들여 브랫 백작과 맞서게 한 다음에, 랭을 정치에서 물러나게 할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러나 마리엘라가 원하는 그림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귀족파를 이끄는 브랫 백작의 몰락. 거기서 더 나아가야만 했다.
“그걸로는 부족하죠. 우리의 목표는 귀족파 속에 숨어 왕가를 주무르려는 ‘진짜 적’을 찾으려는 것 아닌가요. 브랫 백작은 처음부터 전하의 적수가 아니었어요. 렝 백작의 손을 사용해 치워버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도대체 뭐죠? 전대 재상이었던 요바튼 공작도 원래는 변방에서 조용히 국경을 지키고 있었던 자였다면서요. 무슨 수를 쓰는지는 몰라도, 우리의 적은 설득에 재능이 있는 것이 분명해요. 렝 백작을 재상으로 세운다면, 렝 백작의 뒤에서 그를 움직이려고만 할 거예요.”
요제프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턱을 괴며 물었다.
“그럼 지그리트 후작은 다르다는 건가?”
“당연하죠. 지그리트 후작은 새로운 세력을 만들 테니까. 정당성도, 권력도 없는 후작은 자기와 비슷한 자들을 모으려고 할 거예요. 국왕파에 붙었다가 귀족파에 붙었던 자들. 귀족파에 붙었다가 국왕파로 넘어가고 싶어 하는 자들.”
가만히 듣고 있던 그가 허점을 짚었다.
“지그리트를 움직이려면 써야 하는 수가 너무 많아. 십수 년 동안 이곳에서 별 볼 일 없는 삶을 살았다는 건 그만큼 약점을 쌓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해. 원래 권력은 악마에게 허물을 내어주고 취하는 거니까. 거기다가 그에게는 우리 패로 쓸 수 없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
“그래도 어쩔 수 없죠. 잡아야 하는 자가 있으니까. 아시잖아요, 굴 안에 숨은 여우를 잡으려면, 굴 앞에 불을 지르는 수밖에.”
마리엘라의 두 눈이 호전적으로 번뜩였다. 일개 하녀가 내보이기에는 너무 과한 자신감이었다.
요제프는 그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꺼낸 수를 샅샅이 훑어보고 냉철히 분석했다. 조금이라도 수지가 맞지 않으면 당장에 쳐 낼 준비가 되어 있는 사업 파트너를 보는 듯한 태도였다.
“도미닉 남작은 어떻게 하려고? 잊었는지 모르겠는데, 도미닉 남작은 브랫 백작의 처남이야. 지그리트 후작의 가장 친한 친우이기도 하고. 혈연과 지연은 나라를 무너트리는 폐단이지만, 그만큼 끊기 어렵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런 점이 마리엘라에게 제이 도련님의 모습을 상기시켜주었다.
마리엘라가 제이 도련님을 마음에 품었던 이유는 그가 그녀에게 사랑을 표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의 신분이 고귀해서도 아니었고, 그의 얼굴이 잘생겨서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모두 부차적인 것이었다.
‘당신이 어떤 외양을 했든, 어떤 신분이고 어떤 과거를 가졌든. 그런 건 상관없어요. 그런 것은 다 헛것이에요.’
제이 도련님의 그 말은, 마리엘라의 많은 것들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호반 가족의 생존자, 리덴부르크가의 하녀, 고귀한 백작 영애의 등에 흉터를 남긴 재수 없는 고아…….
많은 짐을 등에 지고 십삼 년을 살았던 그녀는 해방감과 함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북받쳐오는 어떤 환희를 느꼈다.
그리고 그 환희를 다시 한번 느낀다. 지금 이 자리, 요제프를 통해서.
그녀의 입꼬리가 자신감으로 한껏 올라갔다.
“바로 그래서 제가 지그리트 후작을 추천드렸던 거예요. 브랫 백작을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는 건 지그리트 후작뿐이니까.”
“남작의 약점이라도 찾았나?”
“그가 지금 블루데크의 여배우에게 푹 빠졌다는 소문, 들어본 적 있으시죠?”
그 말에 요제프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목숨을 걸 만큼의 사랑이라는 말은 못 들었는데.”
“그보다 더 대단한 게 걸렸죠.”
“그게 뭔데?”
“남자의 자존심.”
“이해가 잘 안 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백작가의 하녀로 일하면서, 정부를 둔 남자들이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보았어요. 그들의 끝은 항상 재정적인 파탄이었죠. 왠지 아세요? 그들은 처음부터 정부를 ‘인간’ 취급하지 않거든요. 애완동물이 원하는 걸 못 주는 사람이 되기 싫은 거죠.”
“흠…….”
요제프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빠졌다. 그런 그를 설득시키기 위해, 그녀는 얼른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생각보다 많은 남자를 무시하기 위한 여자를 찾다가 무시 받는 신세가 된답니다. 다른 말로 정리하자면 ‘자만심의 말로’죠.”
“듣다 보니 찔리네. 나 들으라고 일부러 하는 소린가?”
마리엘라는 요제프의 장난에 반응해주지 않고, 제 할 말을 이었다.
“또, 무시 받게 된 사람은 무시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찾아 화를 내게 되죠. 원래 원망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법이니까. 귀족파 내에서 입지는 도미닉 남작이 지그리트 후작보다 높다는 걸 잘 알고 계시죠? 하지만 금전적인 상황은 정반대에요. 지그리트 후작은 넓은 토지를 가진 대지주죠. 반면 도미닉 남작의 영지는 변변찮은 수입을 못 내고 있어요. 자잘한 장사로 그럭저럭 먹고사는 정도니 이 점을 노려야겠어요. 두 사람의 정치적 입지가 동등하지 못하는 것과 두 사람의 수익을 내는 근본이 다른 점을 말이에요.”
“그래서, 그걸 어떻게?”
가장 중요한 문제점이었다. 기다렸던 질문을 들은 그녀가 그를 보고 싱긋 웃었다.
“그건 왕자 전하께서 알아서 하셔야죠. 쇤네의 능력은 여기까지니까요.”
그 말에 요제프가 크게 웃었다.
“너만큼 당돌한 하녀는 아마 없을 거야.”
“전하께서 숙제를 잘 해오실 거라고 믿어요.”
“나만큼 숙제를 성실히 해오는 학생도 없고.”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을 떨었다. 이번엔 마리엘라가 크게 웃었다.
며칠 후, 요제프는 완성한 숙제를 들고 왔다.
“상단이 자주 다니는 길목을 중심으로 도적단을 만들 거야. 마침 피에트와 맞닿은 국경 쪽에 마녀사냥으로 가족을 잃고 숨어 사는 이들이 많다더군.”
머리를 끄덕이면서 듣던 마리엘라가 한 가지 의문점을 제시했다.
“좋은 생각이에요. 하지만 궁금한 게 있어요. 그들이 굳이 귀족파만 공격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그러니까, 국경의 기사들을 공격하거나 반란군을 조작하려 하면 어떻게 하죠? 원한이 깊은 자들이라면서요.”
“그건 네가 수도의 일을 잘 몰라서 그래. 성마전쟁이 끝난 직후, 많은 이들이 자신의 신실함을 과장해서 내보였지만, 귀족파는 더했지. 거의 마녀사냥의 앞잡이 수준이었어. 초기 마녀사냥은 진짜 마녀를 찾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후기 마녀사냥은 그렇지 않았거든. 자신의 이익을 위한 고발이 넘쳐났지. 수도 밖에 넓은 땅을 가진 국왕파들은 그럴 이유가 딱히 없었어. 그들의 이익은 이 도시 밖에 있었고, 그건 마녀사냥과 하등 관계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장사치인 귀족파는 많이 달랐지. 영지는 국왕에게 작위를 받은 귀족만 가질 수 있는 거지만, 장사는 아니잖아?”
“억울한 이가 많았겠군요.”
“아주 많았지.”
그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
전쟁을 기회 삼아 피어나는 인간의 악행이란.
마리엘라는 상황에 맞춰 드러나는 비열함을 혐오했다. 요제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깐의 침묵 후, 요제프가 입을 열었다.
“은밀히 사람을 보내서 무기를 조달하고, 기본적인 검술 교육을 해야겠어.”
“대지주인 지그리트 후작은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을 테지만, 도미닉 남작의 다른 지인들은 모조리 파산 위기를 겪겠군요.”
“맞아. 그리고 대상단을 거느린 이들은 건드리지 못하게 명령을 내릴 거야. 원망은 아래로 향하고 질투는 위를 향하지.”
이 사건이 귀족파를 무너지게는 못해도 흔들 수는 있을 것이다. 그들 사이에도 계급과 계층이 있다는 걸 자각하게 될 테니까.
두 사람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몇 날 며칠 동안 지속되었던 지겨운 언쟁이 드디어 끝났다. 이제, 모든 것을 행동에 옮길 때였다.
* * *
화창한 가을, 마리엘라는 별관 근처 정원에서 꽃을 따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마리!”
뒤돌아보니 마리안이 그곳에 있었다. 마리안의 시녀인 데이지도 열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쉿.”
마리엘라는 마리안의 손을 잡아채고 목소리를 낮췄다.
“왕성에선 그렇게 부르지 않기로 약속했잖아요.”
“지금 그게 중요해? 내가 이렇게 오랜만에 널 만났는데! 그동안 뭐 하고 지냈어. 편지에 답장도 없고. 잘 지냈는지, 무슨 일은 없는지, 계속 걱정했잖아.”
마리안은 능숙하게 마리엘라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려보냈다. 그녀는 마리엘라의 손을 잡고 징징댔다.
마리안의 말을 들은 마리엘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편지요?”
“응, 편지! 그동안 많이 바빴어? 왜 답장이 없었어?”
마리엘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먼발치에 있는 데이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데이지가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안 봐도 알겠어.’
왕자비의 총애를 나눠 갖기 싫은 데이지가 편지를 빼돌린 것이다. 단순한 수작질에 헛웃음이 비죽비죽 새어 나왔다.
“아무튼, 이걸 주려고 왔어!”
한참을 마리엘라의 팔을 잡고 쫑알쫑알하던 마리안이 가방에서 조그마한 상자 하나를 꺼냈다. 마리엘라가 상자의 포장을 푸니 그 안에 처음 보는 음식이 있었다.
“과자?”
“동양에서 건너온 거래! 하나 먹어봤는데 너무 맛있어서 너 주려고 챙겨놨어. 아무도 주지 말고 꼭 혼자 먹어. 꼭이야.”
손자에게 맛있는 걸 몰래 건네는 할머니 같은 모습이었다.
“율리안인지 뭔지 그 공작 새끼가 괴롭히면 바로 말해! 나도 이제 이 왕성에서 한자리하는 것 같아. 아무도 날 건들지 못하더라고.”
“아, 예……. 정말…… 믿음직스럽네요.”
마리안이 제 허리에 손을 얹고는 떵떵거리자, 마리엘라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 * *
마리안과 헤어진 뒤, 마리엘라는 율리안의 처소로 돌아왔다. 율리안은 교단과 관련된 일로 잠시 왕성을 비운 상태였다. 아무도 없는 별관은 고요하기보다 황량하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손바느질을 했다. 마리엘라는 자그마한 주머니를 만들었다. 자세히 보면 구멍이 송송 보이는, 얇고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주머니였다.
이것으로 향낭을 만들 계획이었다. 낮에 정원에서 따온 꽃을 말려, 향을 조금 입히고, 잠이 잘 오는 약초를 몇 개 배합해 그 속에 넣으려고 한다.
‘율리안이 이 향낭으로 편한 잠을 잘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녀는 바느질을 하다 말고 기억을 더듬었다.
잠이 잘 오게 하는 향을 뿜는 꽃과 약초에 대한 지식들이 머릿속을 떠다닌다. 숲지기였던 그녀의 아버지가 가르쳐줬던 지식이었다.
가족이 그렇게 몰살당한 후, 그녀도 이 향낭의 도움을 받아 잠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겨우 하루하루 버텼던 나날들이 있었다.
이젠 먼 과거처럼 느껴지지만.
“하아.”
그녀가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머릿속이 이래저래 복잡해졌기 때문이었다.
바느질을 하고, 포푸리를 직접 만드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율리안의 잠자리를 걱정하는 것은, 그녀가 대신들의 시선 때문에 그의 침대맡을 지키기 못해서만은 아니다.
앞으로 일주일 뒤면 교황이 베르단 수도로 돌아온다. 그 안에 마리엘라는 요제프와 준비했던 계획들을 성사시켜야만 했다.
재상을 바꾸고 귀족파를 뒤흔든 뒤, 진짜 적을 찾아내서 제거해내야 한다. 그런 다음 바로 대관식이 진행될 것이다.
요제프가 완벽한 권력을 얻게 되면, 마리엘라는 온전한 자유를 가질 수 있다.
‘덫은 다 쳤어. 이제, 짐승이 잡힐 때까지 기다리면 돼.’
불안감과 기대감 그리고 알 수 없는 공허가 뒤섞인 공기가 그녀의 주변을 가득 메운다. 그녀는 숨을 훅 들이마셨다가 훅 내쉬었다. 손끝에는 아직 바느질이 덜 된 주머니들이 가득했다.
‘남은 시간 동안 주변의 사람들을 챙겨 놓자.’
마리안, 요제프, 율리안…….
그녀의 머릿속에 세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마리안은 어떻게든 데려갈 생각이다. 욕망을 위해서라면 살상도 개의치 않는 짐승보다도 못한 자들 사이에서 철없는 데다 독단적이기까지 한 마리안을 내버려 두고 떠날 수가 없다.
마리안을 빼돌릴 계획도 대충 세워놓았다. 역병이 들어 왕자비가 죽었다고 공표한 다음, 베르단을 벗어나 아샤칼로 내려갈 생각이다.
상업적 교류가 활발한 피에트나 그리너드랑 다르게 호전적인 성향이 강한 아샤칼은 아직도 베르단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샤칼 시골에서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면 아무도 그들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요제프는 뭐, 알아서 잘살 것이다. 마리엘라는 그를 믿었다. 그는 필요에 따라서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는 남자니, 마리안과 그녀가 떠난다고 해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좌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율리안이었다. 율리안은 마리안과 요제프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마리안처럼 데리고 갈 수도 없고, 요제프를 대할 때처럼 가책 없이 훌훌 털어버리고 떠날 수도 없었다.
마리안과의 행복하고 평화로운 인생 2막을 떠올릴 때마다 어둠에 대한 두려움으로 잠 못 이루는 율리안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외면했었다면 모를까, 이제 와서 율리안을 저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마리엘라는 향낭을 만들었다. 포푸리의 향이 다할 때를 대비해, 향낭을 만드는 방법도 적어놓고 갈 생각이었다.
제가 없어도 율리안이 잠을 잘 잘 수 있도록.
그래서-
‘……떠날 때 미련이 남지 않도록.’
마리엘라는 시선을 창가로 옮겼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제 곧, 밤이 올 것이다. 모든 것을 단숨에 뒤집어엎을 밤이.
* * *
안센 지그리트는 머리가 복잡했다. 도미닉 남작과 알폰스 후작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그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왜 이 좋은 제안을 거절한다는 건가? 언제까지 브랫 백작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닐 생각이란 말인가. 잘 생각해보게.”
알폰스 후작은 한심하게 바라보는 표정을 지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긋이 바라보는 눈동자 아래로 엿보이는 지독한 혐오감.
그게 지그리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지그리트 후작은 영리한 자는 아니었지만 바보 역시 아니었다.
그는 국왕파의 귀족들이 자신처럼 근본 없는 자를 멸시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재상직을 제안한다는 것은 그보다 더 큰 목적이 있음을 의미했다.
지그리트는 대놓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알폰스 후작은 그를 지렛대 삼아 땅바닥에 깊숙이 박힌 커다란 돌덩이 같은 귀족파의 중심 세력들을 끄집어내 치워버리고, 동시에 그를 구심점 삼아 국왕파의 세력을 확장시키고 싶다는 말을 했다.
대화의 중간중간, 회의감에서 온 깊은 한숨이 곁들어져 있는 것을 보아하니 한 치의 숨김도 없는 진심인 것 같았다.
“이유가 있어 불러들이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우가 미적지근하지는 않을 것일세. 일국의 재상을 우리 멋대로 뒤흔들 수 없는 일이고, 또,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왕자 전하께서…… 그럴 분이 아니지 않는가.”
알폰스 후작이 머뭇거리면서 할 말을 다했다. 자신의 주군을 나쁘게 말한다는 것에서 온 죄책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지그리트 후작은 다시 머리를 굴렸다.
국왕파가 이루고자 하는 일은 지그리트 자신이 지금 재상이 되어야만 이룰 수 있는 것일 테다. 그 말은 곧 지금이 아니면 두 번 다신 이런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머리가 크게 뎅, 하고 울릴 정도로 엄청난 제안이다. 뿌리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이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란 말이지.’
지그리트는 어젯밤 도미닉 남작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우리의 우정이 고작 돈 몇 푼만도 못한 것이었군 그래. 자네는 나에 대한 은혜는 다 저버렸어!’
남작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그를 몰아세웠다.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불쾌함보다는 두려움이 그를 덮쳤다. 지그리트는 땀을 뻘뻘 흘리며 도미닉 남작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이미 머릿속에서는 수표를 쥐여 줄걸 하는 후회가 가득했다.
‘라데치 정신병동의 비용을 내가 대는 것처럼 해주고 있다는 걸 잊지 말길 바라네!’
도미닉 남작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사실상 그의 마지막 경고였다.
“끄응…….”
지그리트 후작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재상이 되면 좋지. 그렇지만 도미닉 남작을 거스를 수는 없어. 나는 그와 떨어질 라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으니까. 이것 참 곤란하네. 남작은 브랫 백작의 처남이니 무슨 말로 회유해도 국왕파에는 붙지 않을 터고……. 괜히 상황을 꼬느니 깔끔하게 거절하는 것이 제일 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도미닉이 언제까지 내게 빌붙을지 모르는데 나도 빠져나갈 구멍을 따로 만들어 두어야 하는 건 아닐까?’
전혀 상관없는 두 일이 하나의 일처럼 여겨지면서 그의 생각은 꼬여만 갔다.
“왜 대답이 없나? 이 사람아, 설득하는 나도 속이 타네. 어서 빨리 기면 기다, 아니면 아니다 대답을 해주길 바라네.”
“조금 더, 조금만 더 생각해 본 뒤 말씀드리겠습니다.”
결국 지그리트 후작이 할 수 있는 것은 또 대답을 유예하는 것뿐이다. 지그리트는 알폰스 후작이 저를 붙잡을까 두려워 허둥지둥 자리를 빠져나갔다.
* * *
링글렌은 블루데크 연극단의 떠오르는 주연급 여배우였다. 노을을 연상하게 하는 아름다운 주황색 머리카락, 동글동글 귀여운 코와 두툼한 입술, 청중을 벅차오르게 하는 뛰어난 연기실력까지. 그녀는 아름다움과 재능을 모두 겸비한 준비된 스타였다. 모두가 그녀의 차기작을 기대했으며, 그녀가 주연을 맡을 연극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두 달 전까지는 말이다.
무대 소품비와 의상비가 밀리자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녀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보는 눈이 없어 파산 직전의 남작을 꼬였다고 하고, 나아가 남작 정도가 그녀에게 걸맞은 남자라며 그녀의 수준을 결론지었다.
덕분에 링글렌은 밀린 의상비를 대줄 다른 후원자를 구할 수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 남들이 바라보는 그녀의 격이 그 정도로 떨어졌으니까.
귀족들이 극단의 배우를 정부로 삼는 것은 그들을 자신의 액세서리로 취급하기 위해서다. 이 시대에서 배우의 명성은 곧 가치였다. 이 상황에서 링글렌이 매달릴 수 있는 것은 도미닉 남작뿐이었다.
“도대체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예요!”
링글렌은 극장 후문으로 슬쩍 모습을 드러낸 남작을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남작이 변명을 할 틈도 주지 않고 쏘아붙였다.
“의상실에서 연락이 왔어요. 이번 주까지 의상비를 완납하지 않으면 무대 의상을 모두 다른 극단에 내다 판다는군요. 내 아이디어로 만든 내 드레스를!”
“링글렌, 진정하고 이 손 좀 놓아…….”
남작이 뻘뻘거리며 그녀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솔직히 말해요, 날 가지고 놀려는 거죠? 날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던져놓고 자기는 쏙 빠지려는 계획이었던 거야.”
“아니야, 내가 그럴 리가 있겠어?”
“베르단 사람들이 다 알아요. 다들 날 비웃는단 말이에요.”
그녀가 우는소리를 하며 그의 품에 안겼다.
링글렌은 알았다. 무능력한 남자들은 회피성이 강하다. 그런 남자를 쥐어짜 내려면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라 ‘믿는 척’해야 했다. 이 세상에 믿을 것이라고는 이 남자밖에 없는 척해야,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다.
그녀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감을 되찾은 도미닉 남작이 그녀를 토닥이며 회유의 말을 했다.
“내게 다 방법이 있어. 이미 손도 다 써놨다고. 지금은 일이 꼬여 잠깐 어렵게 되었지만, 내가 어디 그저 그런 귀족 나부랭이들과 같은가? 내 매형은 현 외무장관인 브랫 백작이고, 내 제일 친한 친우는 알부자라고 소문난 지그리트 후작인걸. 조금만, 조금만 기다리면 해결될 거야.”
* * *
깊은 밤, 요제프가 마리엘라를 급히 소환했다. 재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교황이 도착하기까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어. 그런데 아직까지 지그리트 후작은 요지부동이야.”
마리엘라가 자신의 팔뚝을 매만지며 고민하다가 대책을 세웠다.
“도미닉 남작을 더 흔들어보죠. 우선 블루데크 극단의 링글렌을 주연급에서 삐끗하게 만드는 것부터 해요. 가질 뻔했다가 못 가지는 것만큼 화가 나는 일은 없으니까.”
“그다음은?”
요제프가 매서운 눈으로 더 구체적인 방법을 요구했다. 마리엘라가 바로 대답했다.
“왕자비의 이름으로 무도회를 열죠. 그리고 블루데크 연극단의 링글렌과 바이올세네츠 연극단의 비비안 양을 동시에 초청하도록 해요. 두 사람 사이가 안 좋다니까. 물론 지그리트 후작과 도미닉 남작도 초대하도록 하고요.”
원래 대관식 전까지 왕성에서 공식적인 연회를 벌이는 것은 금기시되어 왔다. 그러나 지난번 왕자비 유폐 사건 때 이미 규칙을 한 번 어긴 데다, 사교계의 귀족들을 불러 모아 왕자비의 입지를 공고히 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에 반대할 만한 명분이 부족했다. 그녀는 그 점을 노린 것이다.
그녀의 말을 들은 요제프가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려던 마리엘라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뭐예요, 그 웃음은.”
“조금 의외라서. 본격적인 정치 싸움에 마리안을 끌어들일 줄은 몰랐거든.”
“이기려면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죠. 저야말로 의외였어요.”
“뭐가?”
“알폰스 후작을 재상으로 올릴 생각을 안 하시는 거요. 그는 당신의 가장 충성스러운 추종자 아닌가요.”
“귀족파를 흐트러뜨리려면 이 방법밖에 없으니까.”
요제프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마리엘라는 그런 그를 말없이 빤히 보았다.
“뭘 그렇게 봐?”
“그에게 요직을 넘길 생각이 없으시잖아요.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 말에 그가 슬그머니 웃었다. 밝고 해사했지만 어딘가 잔악해 보이는, 뱀의 독니가 떠오르는 미소였다.
“정말 영특해, 마리엘라. 하나를 가르치면 하나를 아는 것이 아니라, 열, 백, 나아가 천을 알아내려 하니 뭘 가르치고 싶어도 두려워서 그럴 수가 없네.”
그녀는 이 기회에 그전부터 궁금했지만, 상황상 미처 묻지 못했던 것들을 질문하기로 했다.
“왜죠? 알폰스 후작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능력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그러자 대답이 준비된 것처럼 튀어 올랐다.
“그는 날 모르니까.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존재에게 충성하는 것은 벽에 대고 키스하는 것과 별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그의 말의 요지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리엘라는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당신의 본질이 어떠하든, 그의 충성심이 굳건한 것은 변하지 않을 텐데요. 알폰스 후작은 오직 데르샤바크 가문에만 충성하는데 왜 그를 밀어주지 않으려는 거죠.”
“그건 결국 그의 마음일 뿐이니까. 얼마나 많은 기사가 자신의 로망에 취해 충성을 맹세하고 충성을 저버리는지 알아? 충성의 본질은 자기만족이야. 다들 허공에 대고 이상향 속의 멋진 자신의 모습을 쫓지. 그게 다야. 그럴싸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면 바로 척을 지려 할걸.”
마리엘라의 표정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왕자가 상념에 잠긴 표정으로 대화의 마무리를 지었다.
“모든 결심은 오만이야. 오직 행동만이 진실을 말하지.”
“…….”
마리엘라는 자신도 그렇게 보이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지금의 이 한마디가 무슨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니까.
* * *
계획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른 아침, 율리안이 머무는 별관에 왕자의 시종 몇이 찾아와 상관의 명을 전했다.
“하녀를 보내 달라고?”
공작은 경전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그들을 맞았다.
“무도회에 일손이 부족하다고 하십니다.”
“아무나 골라 데려가.”
“그렇다면, 마리엘-”
시종이 그녀의 이름을 채 부르기도 전에 공작이 막아섰다.
“내 하녀는 빼고.”
읽고 있던 경전 너머로 시종을 내려다보는 눈빛이 매섭다.
시종이 안절부절못하며 공작을 설득하려 했다.
“전하께서…….”
“네가 말하는 전하가 누구지. 마리안 왕자비? 요제프 왕자?”
보다 못한 마리엘라가 앞으로 나섰다.
“지난번 유폐와 관련한 오명을 씻기 위해 왕자비께서 직접 연 무도회예요. 고집을 부려 빠질 수는 없어요.”
율리안의 태도는 굳건하다.
“나는 널 지키라고 명받았어.”
마리엘라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는 결국 최후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요제프 전하께서 원하세요.”
“…….”
져주지 않고 끝까지 그녀와 맞설 것 같았던 율리안이 일순 입을 다물었다. 그는 마리엘라와 요제프가 밀애를 속삭이는 사이라고 오해하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각하, 저는…….”
“알았다. 알겠으니까, 거기까지 해.”
그녀가 부드럽게 그를 다독이려고 하자, 그가 듣기 싫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면서도 솟아오르는 감정을 주체 못하고 그녀에게 슬쩍 물었다.
“무도회가 벌어지는 딱 하루만 일하면 된다고 했지. 너는 가서 무슨 일을 하지?”
* * *
파티가 시작되었다. 가장 큰 화젯거리는 단연 마리안 왕자비였다.
“어머, 이게 누구람. 제가 위험에 처했을 땐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시더니, 막상 자기 가문도 얽혀있자 입 싹 다물던 슈핀터 남작 아니신가요. 그때 왔던 따님은 몸 건강히 잘 있나요? 유폐되었던 저 ‘대신’ 왕자비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했던 그 맹랑한 아가씨 말이죠.”
마리안이 방긋 웃으며 남작에게 인사를 건넸다.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는 폭격에 슈핀터 남작이 땀을 훔쳤다. 그는 국왕파의 사람이었다.
“고개 더 숙여, 눈 마주칠 일이 없게.”
“왕자비에게 걸리면 뼈도 못 추린데.”
“재상이고 뭐고 없다잖아.”
“쉿, 듣겠다.”
떼로 몰려들어 사람을 깔아뭉개기 일쑤였던 사교계 젊은 남녀들도 그녀의 앞에서는 온순한 양이 되었다.
베르단 수도 사교계는 뒤늦게 마리안 왕자비의 위세를 느끼는 중이었다.
모두가 왕자비를 직접 대면하길 꺼려하는 이 와중에, 왕자비를 직접 만나길 원하는 사람이 있었다.
블루데크 극단 소속의 여배우, 링글렌이었다.
‘왕자비께서 내 진가를 알아보신 것이 틀림없어.’
링글렌은 이것이 자신에게 온 두 번째 기회라고 확신했다. 왕자비가 여는 첫 번째 무도회에 극단의 다른 유명 여배우를 제치고 오직 자신에게만 초대장이 왔다.
배역에서 쫓겨나, 절망에 빠졌던 링글렌은 단꿈을 꾸기 시작했다. 왕자비의 권력에 기대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겠다는 꿈이었다.
“링글렌 양이시죠? 초대에 응해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저희 왕자비께서 자그마한 선물을 하나 준비했답니다.”
마리엘라는 그런 링글렌의 속을 꿰고 있었다. 그녀는 링글렌을 따로 불러, 그녀에게 진주로 만든 브로치를 하나 건넸다. 그녀에게 용기와 자만을 북돋아 주기 위함이었다.
링글렌은 특유의 새침한 표정으로 왕자비의 선물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대우가 익숙하다는 표정이었으나, 슬쩍슬쩍 올라가는 입꼬리가 본심을 전해주고 있었다.
“마리안 왕자비 전하는 어디 계시지? 직접 찾아가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는데.”
링글렌의 두 눈이 야망으로 빛났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기대보다 처참한 법이다.
마리안은 심드렁한 태도로 그녀를 맞았다.
“링글렌? 내가 그런 이름의 배우를 초대했던가.”
다소 무례한 언행은 덤이었다.
마리엘라는 슬쩍 링글렌의 얼굴을 확인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링글렌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지금 당혹스러움을 감추려 애쓰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마리안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왕자비 전하를 뵈옵니다.”
링글렌에게 익숙할 목소리.
아까 전과는 다르게 마리안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어서 와요, 비비안! 안 그래도 그대를 만나서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어요.”
바이올세네츠 국립 연극단의 여배우, 비비안이었다.
사실 마리안은 연극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나고 자란 리덴부르크 백작가에는 그렇다 한 극단이 없어서이기도 했고, 그녀가 다른 문화 예술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통속 소설만 고집스레 파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마리안이 비비안을 좋아하게 된 것은 마리엘라의 영향이 컸다. 며칠 전 마리엘라는 마리안에게 기분 전환을 하라며 연극 관람을 추천했다. 마리안이 즐겨 읽는 소설을 각색한 연극이었다. 비비안은 그 연극에서 꽤 비중 있는 조연을 연기했고, 그 인물은 마리안이 통속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등장인물 중 하나였다.
“…….”
링글렌이 말없이 비비안의 어깨 부근을 확인한다. 비비안의 드레스 위에는 그녀와 같은 브로치가 달려있었다. 링글렌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다른 배우였어도 재수 없었을 턴데 하필이면 비비안이라니!’
그녀와 비비안은 연극계 밑바닥 시절부터 앙숙으로 이름 높았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예를 갖춰 왕자비에게 인사를 한 뒤에 서둘러 군중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마리엘라는 조용히 링글렌의 뒤를 밟았다.
링글렌은 부산히 고개를 사방으로 돌리며 빠르게 걸었다. 마치 누군가를 급히 찾는 듯한 모양새였다.
‘보나마나 도미닉 남작이겠지.’
그것이 바로 마리엘라가 원하는 결과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마리엘라는 무도회장과 연결된 테라스에서 도미닉 남작의 품에 안겨서 훌쩍이는 링글렌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링글렌. 지그리트 후작이 우릴 도와줄 거야. 후작은 나를 저버릴 수 없어. 자신의 치부를 기억한다면 말이야.”
자신을 다독이는 남작의 말을 듣고 링글렌이 소리를 질렀다.
“거짓말 말아요!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거죠? 남작님 말만 믿었다가 전 모든 걸 잃었어요. 정말 모든 걸 잃었다고요!”
“아니야, 진짜야. 후작은 날 배신할 수 없어. 내가 그의 약점을 쥐고 있거든.”
도미닉 남작의 호언장담을 듣고 링글렌의 화가 가라앉았다. 그녀가 그의 품에 다시 안기며 슬그머니 물었다.
“얼마만큼 대단한 약점인데요?”
“지그리트 후작의 모든 것을 뒤흔들 수 있을 만큼의 약점.”
‘그렇군.’
커튼 뒤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마리엘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몸을 돌려 무도회장 쪽으로 사라졌다.
왕자비가 주최한 무도회에 왕자가 빠질 수는 없었다. 요제프는 마리안의 옆에 딱 붙어 그녀만 바라보는 자상한 남편 역할을 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천사 같은 춤 솜씨군요, 나의 마리안. 춤의 님프가 와도 그대만큼 아름답게 추지는 못할 거예요.”
마리엘라는 온갖 미사여구를 끌어와 자신의 아내를 찬사 하는 왕자의 등 뒤에 서 작게 속삭였다.
“지그리트 후작과 도미닉 남작 사이에 뭔가가 있어요. 도미닉 남작이 지그리트 후작의 약점을 쥐고 있는 듯해요.”
마리엘라의 보고를 받은 요제프의 얼굴은 아무런 변화 없이 평온했다. 그는 다정한 미소를 입가에 띤 채로, 그녀에게 답했다.
“그렇다면 그걸 찾아야겠군.”
낮고, 서늘한 목소리였다.
* * *
무도회가 열린 다음 날이었다.
이른 아침, 지그리트 후작이 도미닉 남작의 저택을 방문했다. 후작은 마차 두 대를 더 끌고 왔다. 도미닉은 저 마차 안에 있는 것이 금화임을 확신했다.
‘청구서들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군그래.’
전날 저녁, 도미닉 남작은 자신의 오랜 친우, 안센 지그리트에게 두툼한 편지를 하나 보냈다. 라데치 정신 병동의 청구서들이었다.
일부러 홀수 달의 청구서만 골라 보냈다. 짝수 달의 청구서는 제가 쥐고 있으니 이 청구서를 없앤다고 해서 증거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도미닉 남작이 파산 직전의 위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무도회에 참가한 것은 자신이 보낸 편지에 대한 지그리트 후작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어젯밤 지그리트는 아내의 병세를 핑계로 무도회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순간 남작은 후작의 마음이 자신에게 돈을 빌려주는 쪽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부탁한 돈을 들고 왔네.”
그래서 오늘, 눈앞에 쌓여있는 수백 개의 금화를 보고도 담담할 수 있었다.
“잘 생각했네. 이제 더는 우리의 우정을 의심할 필요가 없겠군.”
도미닉은 자신이 후작에 비해 기우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인 양 굴었다.
그것은 그의 습관이었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매형의 곁에 머물면서 군림하는 자의 힘은 능력이나 인성이 아니라 군림 그 자체에 있다는 사실을 터득했고, 그것을 잘 이용해가며 여태까지 살아왔다.
“그리고 이건 국경의 도적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자네가 쓸 생활비.”
지그리트가 손짓하자, 그의 하인이 벨벳으로 된 무거운 주머니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공기의 기류가 미묘하게 바뀐다.
도미닉 남작은 조심스럽게 주머니를 풀어 헤쳤다. 많은 양의 금화가 번쩍거리면서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네.”
놀라 눈이 동그래진 도미닉 남작에게 지그리트 후작이 진중한 모습으로 부탁했다.
“라데치 정신병동에 있는 그 남자를 죽여주게.”
‘이제 더는 나를 협박하지 못하겠지.’
지그리트 후작은 바보가 아니었다.
뚜렷한 죄목 없이 저지르는 살인은 큰 죄다.
지그리트는 도미닉 남작과 같은 배를 탐으로써 자신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타개할 계획을 짰다.
“자네가 꼭 해줘야만 하는 일이네. ……우리의 우정을 위해서.”
그는 도미닉 남작이 지금까지 들먹였던 ‘우정’을 역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 * *
오늘따라 마차가 유난히 들썩거린다. 마차 안에서 책을 읽던 율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가벼운 검정색 망토를 걸치고 있었는데, 망토 위에는 루비와 에메랄드로 만든 브로치가 달려있었다. 붉은 사과의 형상을 한 브로치였다.
마리엘라는 창밖을 보는 척하면서 조심스레 맞은편에 앉은 율리안의 안색을 살폈다.
“왜 그러지?”
시선을 느낀 율리안이 물었다. 여전히 책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였다. 마리엘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며칠 휴가를 받고 싶은데요.”
탁.
그 말을 듣자마자 율리안이 책을 접었다. 그녀의 눈을 올곧이 바라보는 시선 끝이 뾰족하다.
하지만 마리엘라는 딱히 움츠러들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율리안의 날 선 행동들이 어린아이의 질투 내지는 투정처럼 느껴졌다.
“무엇 때문에?”
“그냥 답답해서요. 고작 하녀인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우습게 느껴지시겠지만, 왕성 생활은 숨이 좀 막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정말 갑갑하다는 듯 눈썹을 아래로 살짝 내렸다. 율리안의 동정심을 사기 위해서였다.
교황이 베르단 수도로 입성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사흘에서 나흘 정도. 그전에 빨리 지그리트 후작의 약점을 찾아야 했다.
마리엘라는 직접 지그리트 후작의 영지를 방문해보기로 했다. 지그리트 후작의 영지는 수도에서 거리가 있었다. 하룻밤 만에 오고 갈만한 지역은 절대 아니었다.
교단의 백마법사를 이용한다면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몰래 다녀오는 주제에 그런 사치를 부릴 수는 없었다.
“언제부터?”
“가능하다면 오늘 밤부터.”
“…….”
그녀의 말에 공작이 침묵한다. 마리엘라는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안 되나요?”
“……내가 왕자비였다면. 아니, 요제프였다면, 그대의 반응이 조금 달랐겠지.”
그렇게 말하는 율리안의 얼굴은 꽤나 씁쓸해 보였다. 그녀는 내리깐 속눈썹 사이로 엿보이는 아련한 눈빛이 당황스러웠다.
“고작 휴가일 뿐인데요.”
“…….”
그러나 율리안의 울적함은 가실 줄 몰랐다.
‘나 참…….’
마리엘라는 민망하다는 듯 볼을 몇 번 긁적였다. 그러고는 가지고 온 가방을 뒤져 상자 하나를 꺼냈다.
“받으세요.”
율리안은 마리엘라의 얼굴 한 번, 내밀어진 상자를 한 번 번갈아 가며 쳐다보더니 이내 말없이 상자를 받았다. 그리고 상자에 달려있는 들쇠를 풀었다.
달칵.
율리안의 손바닥만 한 작은 상자 안에는 요정의 주머니 같은 향낭이 가득 담겨있었다. 몇 개의 향낭 위에는 자그마하게 수도 놓여 있었다.
J. 그의 이름 앞글자였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물건의 정체를 밝히라는 뜻이었다.
“제가 없을 때도 별 탈 없이 주무시라고 만든 향낭이에요. 잠들기 전에 머리맡에 두고 자면 좋아요. 효과가 사라지거나 향이 날아가면 그다음 걸로 바꾸시고요.”
“직접 만들었나.”
“그럼 남 시켜서 만들었겠어요. 제 직책이 하녀인데요.”
남들이 들었다면 어디 하녀 따위가 이렇게 건방지게 구냐며 얇은 나뭇가지로 등을 때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마차 안이었고, 마차 안에는 율리안과 마리엘라 둘밖에 없었다.
끊길 줄 모르는 공작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마리엘라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이건 공작님만을 위해서 만든 거예요.”
공작이 상자 안으로 손을 뻗어 향낭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그의 이니셜과 겨우살이나무 꽃이 새겨져 있는 향낭이었다.
“왕자비 전하는 물론 왕자 전하도 받아본 적 없는 물건이니 영광인 줄 아세요.”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본다. 감격과 의심이 뒤섞인 새까만 눈동자.
율리안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녀를 특별히 여길 이유는 수십 가지가 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하나도 없다는 걸.
그는 그녀의 과한 호의를 의심하고 있었다. 속이 뻔히 보이는 표정에 마리엘라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그녀는 조카를 놀리는 못된 삼촌처럼 일부러 시치미를 뗐다.
“싫으세요? 그냥 다시 가져갈까요?”
“아니다.”
그가 급히 상자를 닫았다. 그녀가 정말로 뺏어갈까 봐 걸쇠까지 완전히 닫은 그는 조심스럽게 상자의 겉 테두리를 매만졌다. 성물을 대하는 것과 같은 태도였다.
“귀한 선물을 받으셨으면 그에 준하는 대가가 있어야죠.”
그녀의 말에 그가 다시 고개를 든다. 마리엘라는 방긋 웃으며 당당하게 요구했다.
“휴가 주세요, 휴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녀는 결국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 * *
마리엘라는 왕자에게서 받은 돈으로 고급스러운 마차와 귀족 영애들이나 입을 법한 값비싼 옷 몇 벌을 구매했다. 그리고 시중을 들어줄 소매치기 소년 한 명과 마부를 고용해 지그리트 후작령으로 떠났다.
지그리트 후작령은 다른 영지와는 다르게 온순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는 지그리트 후작이 영지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수도 정계를 기웃거린 덕분에 생긴 아이러니한 현상이었다.
후작은 영지에서 나온 곡식들로 자신의 재산을 축적할 뿐, 농민들을 억압하거나 수탈하지 않았다. 그럴 생각을 못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몰랐다.
영지에 관심이 없는 후작을 둔 덕에, 또 중간 관리인을 잘 둔 덕에, 후작령의 농민들은 다른 영지의 농민들보다 풍족하고 안전하게 삶을 영위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평화로운 마을에도 시정잡배는 존재하는 법이다. 그녀는 후작령에 도착하자마자 고급스러운 여관을 통째로 빌렸다. 그리고 데리고 온 소매치기 소년을 시켜 이 동네의 뒷골목을 장악한 자들과 접촉했다.
“후작가에서 밉보여서 쫓겨난 자들을 이 여관으로 데리고 와. 도둑, 거짓말쟁이, 험담꾼, 입 가벼운 놈들, 뭐든 가리지 않아. 그들이 내가 찾는 정보를 주면 당신들에게는 추가로 금화 하나를, 정보 제공자에게는 은화 열 개를 주지.”
그렇게 그녀는 지그리트 후작가에서 쫓겨난 사용인들을 모았다. 원한이 남았으면 남았지, 충성심이 있을 리 없는 자들을 싹싹 긁어모아 그들의 입에서 정보를 캐내려는 계획이었다.
물론 속이 텅 비고, 영양가가 없는 썩은 과일 같은 자가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집단에서나 부족하고 모자란 놈들은 있으니, 그들이 데리고 온 사람 중 반 정도는 쳐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다.
“일단, 그 보석은 제가 훔친 게 아니었다고요.”
‘패스.’
마리엘라는 하녀의 이름 위에 펜을 죽 그었다.
그녀는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하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지금 마리엘라가 하고 있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적당한 타이밍에 말 끊고 내쫓아 버려야지.’
“휴.”
하녀를 내보내고, 마리엘라가 한숨을 푹 쉬었다.
벌써 열다섯 명째다. 여태까지 총 열다섯 명을 만났는데, 그중 열다섯 명이 썩은 과일이었다. 지그리트가의 사용인들은 그녀의 생각보다 더 지그리트 후작에 무관심했다.
‘엄청난 대어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그마한 송사리 정도는 잡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낙심하던 그녀는 곧 고개를 빠르게 저으며 정신을 다잡았다.
‘약한 생각할 시간이 없어.’
썩은 과일들은 줄지어서 나타났다. 그렇게 열일곱. 서른일곱 명의 지원자 중 서른두 명을 내보냈다.
마리엘라는 여기까지 온 것이 모두 헛일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때, 노부인이 나타났다.
“나, 난 억울하게 쫓겨났어요.”
노부인은 낡았지만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거쳐간 모든 사람이 다 그런 말을 했답니다, 노부인.’
마리엘라는 기대감을 저버린 상태였다.
부인은 혼자서 주절주절 말을 늘여놓았다.
“삼십 년의 세월을 그 집 아이들을 돌보는 데 허비했어요. 난 오래된 물건 버리듯 잘라낼 수 있는 그런 흔한 하인이 아니에요. 고작 소문 하나를 옮겼다고 그 집 부인을 젖먹이 때부터 돌본 나를…….”
“잠깐. 소문이요?”
마리엘라는 들고 있던 서류를 급히 넘겼다. 그러고 보니 앞서 만난 몇 사람이 소문이 어쩌고 하는 소리를 한 것이 기억났다.
‘쫓겨난 시기가 달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마리엘라는 그 소문에 단서가 있음을 직감했다.
노부인은 후작가의 유모였다. 귀족들이 유일하게 조금이라도 대우해 주는 사용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의 유모다. 누구나 자신을 돌봐준 존재에게 애착을 갖기 때문이다.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쫓겨날 일이 없었을 후작가의 유모가 고작 소문 하나 때문에 쫓겨났다는 점이 이상했다.
“네. 고작 소문 하나였답니다. 단언하건대, 귀족 나리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그런 저급하고 불순한 소문이 아니었어요.”
“무슨 소문이었죠?”
“어느 날부터 후작가에 나타나기 시작한 귀신에 관한 소문이었죠.”
“정확히 어떤……?”
“푸른 발의 귀신이 작은 보르도를 잡아먹었다.”
노부인이 뜻 모를 소리를 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예?”
“후작가에서 살해당한 보르도의 아들과 관련된 소문이죠.”
“보르도가 누군지부터 듣고 싶은데요.”
‘아, 이런 내 정신 좀 봐.’
마리엘라의 지적에 노부인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오랫동안 지그리트 가문을 지켜온 집사의 이름이죠. 아주 완벽한 집사였어요. 우직하고, 공평하고, 충성스러웠죠.”
흥미가 생겼다. 마리엘라는 노부인의 이야기가 촉박한 시간을 소비하면서까지 들을 가치가 있는 이야기인지 알아보기 위해 질문을 하나 했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부인께서 쫓겨난 건 정확히 언제였죠?”
“십오 년 전이죠. 전대 후작님께서 돌아가시고, 지금 후작이 직위를 물려받은 지 얼마 안 되는 날이었어요.”
노부인이 쫓겨난 건 남작과 후작이 급격히 가까워진 시기와 일치한다. 마리엘라는 자신이 단서를 잡았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은화 다섯 개를 꺼내 노부인의 앞에 올려놓았다.
“소문에 대해서 자세히 들어보고 싶은데요.”
노부인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전대 후작이 사망하고 안센 지그리트가 후작가를 물려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밤이었다. 시끄럽고 화려한 파티가 계속되던 밤에 갑자기 집사 보르도의 하나뿐인 아들이 갑자기 실종되었다. 이제 겨우 열네 살이 된 어린 소년이었다.
보르도는 사색이 되어 아들을 찾았지만, 소년은 끝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보르도는 그날 이후 말을 잃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모두가 집사 보르도를 방치했지만, 정이 많았던 노부인은 그의 병문안을 갔다. 그녀는 홀로 쓸쓸히 죽어가는 보르도에게 후작가에서 벌어진 이런저런 일들을 전해주었다.
그 안에 문제의 ‘소문’이 끼어들어 있었다.
소문은 실종된 보르도의 아들과 관련된 것이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날 밤은 유독 이상하고 불길했다고 말했다.
보르도의 아들이 실종된 날 밤, 후작가는 다른 이유로 시끌벅적했다. 경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부랑자 한 명이 성안에 몰래 들어온 것이다.
부랑자는 성의 구석진 곳에서 안센 지그리트 후작과 도미닉 남작을 만났고, 두 사람을 죽이려고 하다 도리어 후작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근처에 있던 경비들이 급히 부랑자의 시신을 수습했다. 며칠 후, 시신 수습에 관여한 경비들은 모조리 병에 걸려 급사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지그리트의 저주’라고 불렀다.
3차 성마전쟁에 참여한 전대 지그리트 후작의 아들이 마녀의 저주를 받은 탓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 자리에 있었던 지그리트 후작은 방에 틀어박혀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그가 그럴수록 소문은 점점 더 확산되어만 갔다.
확산된 소문은 다른 소문과 결합되었다.
또 다른 소문은, 실종된 집사의 아들과 관련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후작가에 내려진 마녀의 저주와 보르도의 아들의 실종사건이 연결되어있다고 믿었다.
그 와중에 작은 보르도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던 목격자가 나타났다. 그는 소년이 한쪽 발이 매우 크고 푸른색을 띠었던 남자에게 끌려가고 있었다고 말했다.
‘푸른 발의 귀신이 작은 보르도를 잡아먹었다.’
소문은 과장되고, 요약되어서 만인에게 퍼졌다.
노부인에게 소문을 전해 들은 집사의 표정이 일순 생기로 번뜩였다.
그리고 다음 날, 보르도는 기적적으로 일어났다. 그는 말끔한 차림으로 수도로 떠날 준비를 했다. 수도에 자리 잡은 안센 지그리트 후작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 그의 손에는 편지 왕가의 문장이 달린 편지가 한 장 들려있었다.
노부인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그 표정이 너무 단호해 그럴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노부인은 갑작스레 해고 통보를 받았다. 집사 보르도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보르도가 돌아오면 해명을 하리라 이를 갈았지만 보르도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다. 그것이 십오 년 전의 일이었다.
“음…….”
이야기를 다 들은 마리엘라는 얕은 신음을 냈다.
무언가 알 듯 말 듯했다. 허황된 소문 말고, 좀 더 자세한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몰라요.”
그녀의 질문에 노부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마리엘라는 바로 침묵했다.
이렇게 되면 애써 모은 정보가 쓸모없어진다. 어떻게든 그다음 단서를 찾아야 하는데, 그러기엔 시간도, 인력도 없었다.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질 때쯤, 노부인이 빙그레 웃으며 슬쩍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나만 아는 정보가 하나 있죠.”
“그게 뭐죠?”
“사라진 보르도의 아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
노부인은 자신의 얼굴에서 수다쟁이 특유의 가벼워 보이는 표정을 싹 지웠다. 그리고 목소리를 진중하게 내리깔고는 말했다.
“진짜 왕이 오셨다.”
* * *
노부인이 떠나고 텅 빈 방. 마리엘라는 넓은 방에 홀로 앉아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톡, 톡, 톡, 톡.
그녀가 손톱으로 책상 위를 두드리는 소리가 방 안을 울린다.
마리엘라는 눈을 깜박이며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결론이 나자 들고 왔던 가방을 뒤적여 양피지를 하나 꺼냈다.
요제프가 건네준 마법 양피지였다. 그것은 흑마법사가 남기고 간 마법의 산물로 암암리에 고위 귀족들 사이에서 쓰이는 물건이라고 했다.
마리엘라는 펜을 꺼내 양피지 위에 글자를 적었다. 잉크를 묻히지 않은 펜으로 썼는데, 종이 위에는 검정색 글자가 새겨졌다.
무언가를 찾았어요.
보는 즉시 연락 주세요.
곧이어 글자가 종이에 흡수되듯, 흩어졌다. 그리고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빈 양피지 위에 글자가 두둥실 떠올랐다. 요제프의 글씨체였다.
뭐지?
마리엘라는 감탄하는 대신, 빠르게 그다음 문장을 적어나갔다.
십칠 년 전 실종된 후작가의 집사가 뭔가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가 뭘 알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필요한 정보가 있어요.
3차 성마전쟁 때 전사한 전대 후작의 아들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찾아주세요.
답장은 금방 왔다.
[ 왕가는 그런 정보를 일일이 기록하지 않아.
최선을 다해보겠지만 기대는 하지 마. ]
기록이 있을 거예요. 왕가에서 편지를 보냈다고 했으니까.
[ 달랑 편지만 왔나? ]
그건 저도 모르죠.
[ 내 말은, 시신이나 유해가 같이 전달되었냐는 말이야. ]
시신은 없었어요.
[ 그렇다면 답은 하나군.
3차 성마전쟁과 관련해 왕가에서 편지를 보낸 경우는 딱 하나야.
부상병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지. ]
마리엘라가 놀라 숨을 들이켰다. 요제프의 말은 진짜 후계자가 살아있었다는 뜻이었다. 지금도 살아있지는 않을 테지만.
“‘진짜 왕이 오셨다’와 ‘푸른 발의 귀신이 작은 보르도를 잡아먹었다’라…….”
그녀는 노부인이 했던 말을 입으로 따라했다. 그리고 다시 펜을 들었다.
요청을 변경하겠어요. 그가 무슨 부상을 입었는지 조사해주세요.
‘푸른 발’로 일컬어질 수 있는 증상이 있는지.
[ 무슨 상황인지 설명이 더 필요한데. ]
마리엘라는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압축해 전달했다. 작은 보르도의 실종부터 그 아비의 실종까지.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던 왕자가 한참의 시간 후에 답장을 보냈다.
정보 교환이 끝난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했다.
집사 보르도의 아들이 실종된 그날, 후작가의 진짜 후계자가 돌아왔을 것이다.
그의 다리 한쪽은 마녀의 저주를 받아 푸른색을 띤 채 퉁퉁 부은 상태였을 것이고, 그의 행색은 부랑자처럼 냄새나고, 더러웠을 것이다.
마리엘라는 추측에 상상력을 더했다.
나이는 어렸지만 영리했던 보르도의 아들은 진짜 후계자를 바로 알아봤고, 그가 성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도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안센 지그리트 후작에게 그 모습을 들켰다.
작위를 진짜 주인에게 빼앗길 위기에 처한 후작은 그 자리에서 그들을 죽이고 진짜 후계자의 정체를 일개 부랑자인 것처럼 속여 시신을 처리했다.
소년의 시신은 아마 성안의 어딘가에 대충 묻어두었을 것이다.
‘도미닉 남작은 그 살인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였을 것이고.’
푸른 발의 귀신과 관련된 소문은 그냥 난 것이 아니었다.
아들을 잃어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본디 똑똑한 사람이었던 집사 보르도는 단박에 진실을 파악했을 것이다.
그는 모든 서신을 관리하는 집사였고, 왕가에서 보낸 편지에는 분명 ‘마녀의 저주를 받아 한쪽 다리를 쓸 수 없는’ 후계자를 집으로 돌려보낸다고 적혀있었을 테니.
괴상한 소문과 집사 보르도의 행동이 모두 이해가 갔다. 도미닉 남작과 지그리트 후작의 이상한 서열까지도.
서걱서걱.
펜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양피지 위에 검은 글자가 떠올랐다. 요제프가 보낸 서신이었다.
도미닉 남작이 지금까지 으스댈 수 있었다는 건 증거가 그의 손에 있다는 뜻이야.
사람을 시켜 따로 조사해 볼 테니 그만하고 돌아와.
그 길로 짐을 챙겨 여관을 나왔다. 마차 위로 한 발을 내디디려는데 무언가 그녀의 발목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마차 문을 잡은 채로 아까의 추리를 이어갔다.
증거 인멸이 안 되었다는 말은 증인이 아직 살아 있다는 말과 같다.
오랜 시간 동안 후작가의 집사였던 자라면 이 근방 귀족들은 모두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을 텐데, 그동안 그 흔한 목격담 하나가 없다는 게 이상하다.
‘이 근방에 있는 거야. ……오랜 시간 동안 증인을 가둬둘 수 있는 곳이.’
머릿속으로 이 근방의 지형을 그렸다. 지그리트 후작령과 도미닉 남작령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한량이었지만 담이 작은 후작과 매형인 브랫 백작을 빼면 별 볼 것 없지만 빠져나갈 구멍 하나만큼은 확실히 챙겨놓는 얍삽한 성격인 도미닉 남작. 그 둘은 분명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는 곳에 보르도를 숨겨 놓으려 했을 것이다.
그녀는 머릿속의 지형을 베르단 수도까지 확장시켰다. 그리고 지그리트 후작가와 도미닉 남작가, 베르단 수도를 이어 삼각형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지그리트 후작과 도미닉 남작과의 연결점. 두 사람 사이에 중첩되는 공간.’
그녀는 마차 위로 올린 한쪽 발을 거뒀다. 그리고 마부에게 새로운 명령을 했다.
“목적지를 변경해야겠어. 다른 곳을 여행하고 싶거든.”
“그러시죠. 어디로 떠날 깝쇼.”
마부는 낡은 가죽 주머니를 뒤적여 지도를 꺼냈다. 낡은 주머니와 대조되는 깔끔한 새 지도였다. 지도에는 베르단 중부 지역의 수많은 영지와 교회나 큰 여관 같은, 중요 시설들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정해놓은 삼각형의 공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몇 분 후, 그녀는 자신의 조건에 딱 들어맞는 장소를 찾아낼 수 있었다.
“여기.”
그녀는 마부가 들고 있는 지도 위로 손가락을 집었다.
라데치 정신병동.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그런 글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 * *
마리엘라는 날이 밝자마자 데리고 온 소년을 정신병동으로 보내 병동에 집사 보르도가 있는지 확인했다. 소년에게 그의 신분을 ‘지그리트 후작가’에서 온 어린 시종으로 꾸미라는 말도 덧붙였다.
한 시간 후, 소년이 돌아왔다. 소년은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없다고?”
마법의 양지피를 통해 요제프와 필담을 나누고 있었던 마리엘라는 고개를 들어 소년에게 되물었다.
“네. 보르도란 이름의 환자는 병원에 없다고 했어요.”
“흠.”
그녀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보르도가 여기에 없던가, 후작이 보르도의 이름을 숨겼던가. 둘 중 무엇이 맞는지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교황께서 돌아오기까지 이틀도 채 남지 않았는데.’
그녀는 속으로 시간을 계산했다. 왕성으로 돌아가는 일정을 빼더라도 모든 것이 빡빡했다. 그녀가 입술만 깨물고 있을 때, 요제프에게서 답장이 왔다.
좋은 소식이 왔어. 교황께서 개인적인 일정으로 피에트에 더 머물다 오신대. 일주일 정도는 더 걸릴 것 같다는군.
반가운 소식이었다. 마리엘라는 생각의 방향을 틀었다.
라데치 정신병동 안에 보르도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낼 것인가.
그녀가 아무 말도 없이 혼자 고민에 빠지자, 이를 부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한 소년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다시 한번 알아볼까요?”
“아니야. 됐어. 이건 내가 알아서 할게. 넌 들어가서 쉬어.”
그녀는 방긋 웃으며 소년을 내보냈다. 그럴듯한 아이디어가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 * *
“우리 병원에서 일하고 싶다고? 추천서는 있고?”
라데치 정신병동의 관리자, 벤야민은 자신을 찾아온 아가씨를 앞에 두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야무진 손을 보니 일은 잘할 것 같은데, 지나치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조금 걸렸다.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미친놈이 넘치는 이곳에서 순진함은 큰 실수와 직결된다.
‘그렇다고 내치기에는 당장 손이 급하고.’
관리자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얕게 고민했다.
“추천서는 따로 없는데……. 안 되나요?”
“아니야. 추천서가 없으면 교육시키면 되지. 우린 항상 일손이 부족하니까. 언제부터 나올 수 있지?”
벤야민은 좋은 관리자였지만,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그의 앞에 선 여자가 어딘가 수상한 행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입은 옷과 구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재질과 디자인이었지만,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새것이었다. 당장 돈이 급해 일을 구하러 온 사람이 옷과 구두를 새로 샀을 리가 없었다.
벤야민은 이것을 캐치해내지 못했고, 아무 의심 없이 침입자를 일꾼으로 고용했다.
침입자의 이름은 마리엘라, 왕성에서 온, 왕자의 첩자였다.
마리엘라는 싹싹하고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당장 일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내일부터 나와. 교육이 끝나면 그때 제대로 된 일을 줄게. 교육은 열흘 정도 할 거야. 내용이 많지만 어렵지는 않아. 네가 똑똑하다면 나흘이면 끝나겠지.”
“저…….”
그녀는 비굴함과 절박함을 적절히 섞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가 정말 일이 급해서 그러는데 오늘부터 고용해주실 수는 없으실까요?”
“주간직은 교육이 필요해.”
환심을 사기 위해 어색하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지만, 관리자의 반응은 냉담했다. 마리엘라는 민망하다는 듯 뒷목을 긁었다.
“아, 그렇군요…….”
“하지만 야간이라면 마련해 줄 수 있지.”
그가 그녀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오늘 밤부터라면 근무가 가능해.”
양심을 쿡쿡 쑤시는, 사람 좋은 미소였다.
저녁이 되었다. 야간 관리자가 그녀에게 환자의 명단을 넘겨주었다.
“환자 명단이야. 이름을 외울 필요는 없고, 몇 호수에 사람이 있는지만 익히면 돼. 탈출이나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주요 업무지.”
라데치 정신병동의 야간 근무자가 된 마리엘라는 주어진 명단을 찬찬히 살폈다. 정말 보르도라는 이름을 가진 환자는 없었다.
‘단순히 이름을 바꾼 건가? 아니면 이 병원에 입원한 적이 없는 건가.’
지금으로선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환자들의 입원 시기나 돈을 대는 이의 이름을 알면 수월할 테지만, 그런 게 신입에게 허락될 리가 없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야간 관리자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걷던 마리엘라가 질문했다.
“말해봐.”
“여기는 정신병동이잖아요. 그런데 미치지 않은 사람도 수감시킬 수 있나요? 그러니까, 제 말은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정말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지 않나 해서요.”
야간 관리자가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단호한 얼굴을 하고, 뒤를 돌아, 신입에게 경고했다.
“그런 경우는 없어. 알아둬야 할 게 있는데, 미친 사람들은 자신이 정상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확고히 믿는 사람들이거든? 그들이 자신은 정상이라고 소리를 질러대도 무조건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 버려야 해. 특히 319호의 늙은이는 믿으면 안 돼.”
“319호요?”
마리엘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 연기를 했다.
“머리가 하얗게 센 할아버지 한 분이 계시는데, 구체적이고 절절한 망상으로 신입들을 꾀어내지. 자기가 귀족의 비밀을 알고 있어서 갇힌 거라나, 뭐라나. 십오 년 동안 탈출 시도만 다섯 번이야. 으, 그 할아버지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야간 관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몸을 돌려 다시 갈 길을 갔다.
찰그락, 찰그락.
그녀의 허리춤에 달린 열쇠 꾸러미 소리가 스산한 복도를 울렸다. 표정이 굳은 신입 하나가 관리자의 뒤를 조용히 따른다.
‘319호.’
마리엘라는 얻어낸 정보를 조용히 속으로 읊조렸다.
* * *
안센 지그리트는 커다란 창문이 달린 서재 한가운데에 서서, 달빛을 맞으며 위스키를 홀짝거렸다. 그의 왼손에는 그의 오랜 친우인 도미닉 남작이 보낸 편지가 들려있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사람을 고용해 보냈네. 오늘 밤 안에 모든 것이 끝날 테니 더는 염려 말게.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랜 시간 동안 그의 가슴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던 커다란 돌덩이가 사라진 기분. ‘홀가분하다’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던 걸까.’
그는 창밖을 보며 다시 술을 홀짝였다.
“하하하.”
천하를 가진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보면 미친놈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웃음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구름이 낀 달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밤이야.’
오늘 밤, 그의 약점이 사라진다.
* * *
라데치 정신병동의 319호에는 왜소한 덩치의 노인이 한 명이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보르도. 그는 지그리트 후작가의 집사직까지 맡았던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현재는 정신병동에 갇힌 늙은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는 서서히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지도 못한 채, 십오 년 동안 강제로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생동감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노인은 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어지는 것만 받아들이며 억지로 생을 연명했다. 남은 시간은 모두 잠으로 버텼다.
늦은 밤, 보르도는 얕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억지로 꿈을 붙잡는 노인의 귓가에 낯선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하는 낡은 경첩 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등 뒤가 서늘한 느낌이 든다.
보르도는 스르륵 눈을 떴다.
달빛이 가득 들어오는 창문. 그림자 진 누군가가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남자였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남자는 보르도와 자신이 안면이 있는 관계인 양 굴었다. 친밀한 어조에 보르도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여전히 남자의 얼굴이 분간되지 않는다.
“누구…….”
막 잠에서 깨어난 탓에 쇠를 긁는 것 같은 걸걸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남자는 대꾸 없이 그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보르도가 질문을 끝내기도 전에, 그의 목 뒤에서 베개를 빠르게 빼내, 그것으로 그의 얼굴을 꾹 눌렀다.
순식간에 호흡을 차단당한 보르도가 본능적으로 버둥거렸다.
남자는 일말의 흔들림 없이 양팔에 가한 힘을 더했다.
그가 손톱 끝으로 침대 프레임을 긁는 소리와 억, 억 하는 숨넘어가는 소리가 동시에 들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르도의 손끝이 축 처졌다.
남자는 그 이후에도 몇 분 더 베개를 누르고 있다가, 노인의 목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 그의 심장 박동이 완전히 멈췄다는 것을 확인한 후 손을 뗐다.
축 늘어진 시신을 앞에 두고 별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한 남자는, 턱 끝에 맺힌 땀을 닦았다. 그리고 노인이 자연사한 것처럼 보이게, 베개를 다시 시신의 목 뒤에 놓고, 축 늘어진 팔과 다리를 담요 안으로 가지런히 집어넣었다.
그는 많은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암살자였다.
이번 고객은 조금 번거로운 주문을 했다. 대상을 질식사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다른 방법보다 많은 체력을 소모하므로 많은 암살자가 기피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
일도 마무리되었으니 나가볼까 하던 찰나였다. 복도에서 이 방을 향해 조용히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노인을 죽이느라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인기척이었다. 암살자는 성급히 몸을 숨겼다.
멀지 않은 곳에서 달칵, 달칵, 하는 열쇠 소리가 들린다.
끼이익-.
두 번째 침입자가 들어왔다.
라데치 정신병동의 직원복을 입은 젊은 여자의 정체는 마리엘라였다.
“보르도씨……?”
암살자가 문 뒤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마리엘라가 죽은 보르도에게 다가갔다.
“지그리트 후작가에서 오랜 시간 집사로 일하셨던 분 맞으시죠? 저는 마리엘라라고 해요. 윗분의 명령을 받고 작은 보르도의 실종 사건을 조사하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남자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고객의 주문서를 생각했다.
라데치 정신병동 319호에 수감되어 있는 노인을 죽일 것.
거기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최대한 자연사인 것처럼 보여야 함.
그리고 하나 더.
제일 중요한 것은 꼬리가 잡히지 않는 것.
목격자까지 완벽하게 처리하라는 뜻이었다.
남자는 불필요한 살생은 싫어하는 편이었다. 도덕적인 이유에서는 아니었고 그저 일을 생활까지 확장시키기가 싫어서였다.
‘추가금을 요구하지 뭐.’
그는 가볍게 목 운동을 하며 앙큼한 침입자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마리엘라는 보르도에게 다가갔다. 보르도는 아무런 대답도, 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으니까.
“혹시 주무시고 계신 거라면…….”
보르도의 어깨에 손을 올린 마리엘라가 놀라 숨을 작게 들이켰다.
노인의 풀려 있는 눈과 입.
마리엘라는 이불을 들춰 보르도의 손을 확인했다. 엉망으로 부러져 있는 손톱 끝이 처참하다. 그녀는 바로 그의 손을 만졌다.
‘아직 따듯해. 그렇다는 건…….’
마리엘라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응시했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남자의 실루엣이 시야에 잡힌다.
‘암살자!’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지금 그녀의 허벅지에는 작은 단도가 하나 있었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챙겨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단도로 훈련을 받은 전문가를 이길 수는 없다.
그녀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다. 암살자의 공격을 받고 반격을 할 것이냐, 그냥 일단 무작정 도망칠 것이냐. 물론 전자도, 후자도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녀가 고민에 빠진 사이 남자가 그녀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그녀가 비명을 지를 틈도 주지 않고, 그녀의 목을 틀어쥐었다.
그 순간, 마리엘라는 몸을 살짝 틀었다. 그리고 손에 쥐어진 칼로 암살자의 허벅지를 빠르게 두 번 찔렀다.
“윽.”
암살자가 허벅지를 부여잡은 틈에 그를 밀쳐내고 복도로 도망쳤다.
“하아, 하아.”
잠깐이었지만, 남자의 손에 잡혔던 목이 너무 아프다. 마리엘라는 거친 숨을 내쉬며 건물의 구조를 살폈다.
라데치 정신병동은 밤이 되면 건물을 통째로 잠가 버린다. 남자가 자신을 따라오는 지금, 어디로 도망칠 것인가에 대한 선택지가 그녀 앞에 놓여 있다.
3층 창문과 복도, 어느 쪽을 택해야 하나.
‘이곳은 정신병동이니 창문으로 탈출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거야.’
그녀는 재빨리 복도를 향해 뛰었다. 그녀의 목적지는 한 곳이었다.
1층.
1층에 경비를 담당하는 이와 병동 야간 책임자가 있을 것이다. 아무리 훈련받은 암살자라고 한들, 혼자서 건물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일 수는 없었다. 마리엘라는 희망을 품고 1층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희망은 언제나 예상을 배신하는 법이었다.
“이게 무슨……!”
직원들이 모두 널브러져 있었다. 누구는 책상에 엎드린 채로, 누구는 간이의자 위에, 누구는 그냥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죽은 것은 아니었고, 그냥 정신을 잃은 상태인 것 같았다.
마리엘라는 뒤늦게 복도에 가득 찬 연기가 수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옷소매로 호흡기를 막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절뚝이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어디로 향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였다.
그녀가 지금 있는 곳은 계단을 기준으로 오른쪽 복도에 있는 직원실이었다. 직원실과 이어진 몇 개의 방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인데, 남자는 벌써 직원실 문 앞까지 다다랐다.
똑똑.
암살자는 여유 넘치게 문을 두드렸다.
마리엘라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도망칠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어디로 숨어야 하지? 어디로?’
예측이 깨어지니 다급함이 더해졌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좌우를 둘러보다가 암살자가 있는 곳과 반대쪽 문을 열어 그 안으로 들어갔다. 환자들과 직원들의 옷 등을 모아 놓은 곳이었다.
그녀는 끝에 있는 커다란 빨래 바구니를 뒤집었다. 바닥에 널린 옷가지 일부를 다른 통에 분산시켜 넣은 뒤, 아까 비워놓은 빨래 바구니에 들어갔다. 머리 위는 남은 옷가지들로 채워 넣었다.
탁, 스윽. 탁, 스윽.
암살자가 다리를 끌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
그녀는 손으로 자신의 코와 입을 막았다. 숨소리를 죽이기 위함이었다. 잠시 후, 암살자가 그녀가 숨어 있는 방에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볼 수 없고, 그저 소리에 의존해야만 하는 상태. 일 초, 일 초가 지옥 같았다.
마리엘라는 눈을 질끈 감고 믿지도 않는 신에게 자신의 생존을 강하게 빌었다.
탁, 스윽. 탁, 스윽.
걸음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암살자는 찬찬히 이 방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이따금 푸욱, 하는 알 수 없는 소리도 들렸는데 그녀는 그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 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들린 순간 모든 것을 깨달았다. 암살자는 바구니를 일일이 뒤지지 않았다. 긴 장검으로 깊게 찔러볼 뿐이었다. 안에 사람이 있다면 확실하게 죽을 수 있게.
등 뒤로 소름이 쫙 끼쳤다.
탁, 스윽. 탁, 스윽.
암살자가 다가오는 소리가 점점 더 선명해진다. 그가 마리엘라가 있는 바구니를 칼로 찌르려는 순간,
챙!
어디선가 날카로운 쇠붙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소리는 그녀가 숨은 바구니 근처에서 났다가, 어느 순간 멀어지고, 먼 곳에서 들렸다가 갑자기 가까워졌다. 우당탕탕, 하는 무언가를 다급하게 집어 던지는 소리도 간간이 났다.
그러다가 들리는 달음박질 소리.
‘잡아!’ 하는 성인 남자의 고함.
빨래 바구니 속에 숨은 마리엘라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밖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방금 검 소리는 왜 났던 건지, 저 밖에서 싸우고 있는 것은 자신의 편인지, 아닌지, 병원의 경비들이 깨어났는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들리는 것은 폭력적인 소리뿐.
아무것도 알 수 없었던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빨래 바구니 속에서 덜덜 떨며 날이 밝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휙!
그녀가 뒤집어쓰고 있던 빨래 더미가 가볍게 들추어졌다. 마리엘라의 동공이 긴장으로 확장되었다.
“나 참.”
램프를 든 누군가가 혀를 쯧쯧 차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위험할까 봐 수도로 올라오라고 했더니 아예 잠입을 해버리다니.”
익숙한 얼굴.
“대체 이 사고뭉치를 어쩌면 좋지?”
요제프였다.
요제프는 바구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장난스러운 표정 속에 힐난이 가득 담겨있다.
“그 조그마한 머릿속엔 청개구리가 사나 봐.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내 속을 썩일 리가 없지.”
“여긴 어떻게 왔어요?”
“서로 비슷한 생각을 한 거지, 뭐. 그 소심한 인간이 사람을 숨긴다면 여기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눈으로 마리엘라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목 위의 붉은 손자국이 그의 눈에 띄었다. 요제프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목을 매만졌다.
“여긴 어쩌다가 그랬어? 올라가자. 올라가서 치료부터 받아.”
탁.
마리엘라가 그의 손을 쳐냈다. 그녀는 붉어진 눈으로 침착하게 상황을 보고했다.
“보르도가 죽었어요.”
“알아.”
‘안다고?’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 없었다.
판을 뒤집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 죽었는데 어떻게 그는 저렇게 태연자약할 수 있을까.
“암살자를 캐면 역으로 그들을 잡을 수 있을까요?”
“음…… 그건 안 될 것 같은데.”
“왜요?”
“내가 죽이라고 명령을 내려서.”
“왜죠?”
그녀의 질문에, 역으로 그가 되물었다.
“사랑하는 마리 아가씨께 감히 이런 짓을 저질렀는데, 내가 참아야 될 이유라도 있나?”
당황스러울 정도로 뻔뻔하고 오만한 태도.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모래성이 팍, 하고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넋 나간 표정으로 비척비척 걷다가, 이내 벽에 등을 기대고 힘없이 주저앉았다. 허탈함이 그녀의 주변 공기를 휘감았다.
가만히 서서 눈으로만 그녀의 움직임을 쫓던 요제프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 위로 둘러 주었다.
마리엘라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몸이 얕게 떨리고 있었다. 긴장감이 풀리니 온몸의 근육이 아우성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암살자를 살려둔들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었을 거야. 보통 그쪽에서는 이런 사태를 대비해서 표적 외의 모든 정보를 차단시키거든.”
그녀는 잠자코 그가 건넨 겉옷을 둘렀다.
“……그럼 이제 어떡하죠.”
‘이게 어떤 기회였는데.’
갑자기 무너진 계획 때문에 머릿속이 멍했다. 부디 요제프에게 다른 해답이 있길 바라며 던졌던 질문이었지만, 그는 그녀가 원하지 않는 대답만 했다.
“돌아가야지.”
“안 돼요.”
그녀가 거세게 도리질을 했다.
“아직 확실한 증거는 하나도 없잖아요. 후계자의 유해라도 들고 올라가야 해요.”
신경질적이고 강박적인 대답에 요제프가 잠시 침묵했다.
마리엘라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사고가 멈춰버린 머리를 억지로 굴렸다.
“후작가 근처 공동묘지를 싹 뒤집죠.”
“근처 숲에 매장했을 가능성도 있어.”
“그럼 숲도 뒤지면 되잖아요.”
“일주일 안에?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그 안에 후작이 대처하면 어떻게 반응할 거지? 그와 적이 될 건가?”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어떻게든 시도는 해봐야, 어떻게든…….”
요제프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진짜 후계자의 시신을 찾았다고 하자. 백골이 된 시체를 가지고 무슨 장사를 하게? 그가 살해당했다는 증거를 어떻게 찾을 생각이야? 고향으로 오던 길에 강도를 만나서 죽었다고 둘러대면 무슨 말을 할 수 있는데?”
“아직 시신의 상태가 어떨지 모르잖아요. 찾고 나서 고민해도 늦지 않…….”
“마리엘라 호반.”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요제프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짐승 우리 같은 룩센투크 한복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가 어떻게 수를 둬왔는지 아나?”
태어날 때부터 제왕의 자리를 약속받은 자처럼, 엄숙하고 권위 있는 목소리. 그녀는 그 목소리를 이겨내지 못하고 침묵했다.
“나는 항상 상상해.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가지려면 어떤 우연과 행운이 내게 닥쳐야 하거든. 누군가는 우연히 죽어야 하고, 누군가는 꾐에 속아 몰락해야 하고, 누군가는 또 호시탐탐 기회를 엿봐야 하니까.”
“…….”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상상하고, 또 실체화해. 행운이 해주길 바라는 일을 직접 하고, 내 실체를 행운 속에 숨기는 것. 그게 내가 여태까지 살아남은 비결이야. 하지만 마리엘라,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뭔지 알아?”
“…….”
“숨죽여 기다리는 거야.”
마리엘라가 요제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말에 감명을 받았다기보다는 너무 지쳐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요제프는 진지한 연설을 늘어놓는 것을 그만두고 장난스러운 표정과 함께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그의 얼굴에서도 지친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
“행운이 항상 내 편인 것처럼 보이면 곤란하잖아? 참고, 참고 또 참아서 기다려야지만 다디단 열매를 먹을 수 있어. 요즘 넌 너무 조급해 보여. 진정하고 머리를 좀 식히는 것이 좋겠어.”
그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리엘라는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러나 아직 그녀의 마음속에는 미련이 있었다.
“하지만…….”
요제프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그녀의 미련을 끊어 냈다.
마리엘라가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그의 뒤를 따르자, 그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그리고 아직 감을 채 못 잡은 것 같은데 이건 실체를 가지고 하는 싸움이 아니야. 없으면 만들어내면 되는 거고, 그게 아니더라도 방법은 많아.”
꿍꿍이가 있는 소년처럼,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 * *
“자네 그 소문 들었나?”
“지그리트 후작가에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 말인가?”
“십칠 년 전 억울하게 살해당한 부자(父子) 귀신이 성안을 떠돌아다닌다더군.”
“푸른 발의 귀신이 후작령의 사람들을 잡아먹고 다닌다던데.”
“마녀가 내린 저주 때문이래.”
요즘 사교계는 지그리트 후작가와 관련된 소문으로 떠들썩하다.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모이기만 하면 같은 주제로 떠들어댔다.
‘귀신’과 ‘저주’라는 흥미를 돋우는 자극적인 소재 때문인지, 소문은 하루가 되기 전에 몸을 불렸다.
“근데, 그건 들었나? 3차 성마전쟁 때 전사한 줄 알았던 후작 부인의 오빠가 실은 살아 돌아갔다더군.”
“에이, 설마. 그럼 왜 안센 지그리트가 그 자리에 올랐겠어.”
“자네 외동이지? 지위를 물려받기 위한 형제간의 암투를 이렇게 모르다니. ‘왜’가 아니지. ‘어떻게’지. 나는 참 궁금해. 안센 지그리트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자기 자리를 지켰을까.”
“방법은 뻔하지.”
“죽였겠지.”
사람들은 허황된 소문에 감춰진 ‘진짜 사건’을 파헤치기 원했고, 저마다 머리를 굴려 소문의 진상을 추리하기 시작했다.
‘귀신’으로 시작된 소문은 순식간에 ‘살인’으로 까지 이어졌고, 마지막에는 ‘후작가의 후계 싸움’과 연결되었다.
“지그리트 후작가 하니 그 생각이 나요. 내가 아는 사람이 정신병동을 크게 운영하고 있는데 말이야. 최근 거기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대요.”
“무슨 일인데요?”
“오랜 시간 동안 갇혀 있던 환자 하나가 감쪽같이 사라졌대요. 창문은 열리지 않고, 문은 바깥에서 잠갔는데, 어느 날 밤, 갑자기 사라졌다더군요.”
“병동에서 환자가 탈출하는 것은 흔한 일 아닌가요.”
“중요한 건 따로 있어요. 그 환자가 자신의 이름을 ‘보르도’라고 했다는 거예요.”
“보르도?”
“지그리트 후작가의 그 부자(父子) 귀신?”
“네. 신기하지 않나요? 우연일 수도 있지만, 시기가 참. 거기다가, 그 환자가 항상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있었다네요.”
“무슨 말?”
“자신의 아들이 살해당한 건 지그리트 후작이 자신의 처남을 살해하는 순간을 목격했기 때문이라고.”
붉은 사과 독서클럽의 성실 회원인 율리안을 따라 나온 시내.
거리 어디를 가도 심심찮게 들려오는 지그리트 후작과 관련된 소문을 들으며 하녀 마리엘라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제프의 짓이군.’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빠르게, 또 정확하게 말이 나돌 수가 없다.
‘이걸로 뭘 어쩌려는 거지?’
마리엘라는 과연 그의 설계가 제대로 된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늦은 밤, 오늘도 마리엘라는 요제프의 처소를 찾았다.
그녀는 그의 방에 들어오자마자 따지듯이 쏘아붙였다.
“준비해둔 수라는 게 고작 소문이에요? 따로 찾아둔 증거나 증인이 있는 게 아니고?”
체스 말을 닦고 있던 요제프는 거친 기척에 시선을 한 번 주고는 다시 거두었다.
후.
그가 입바람을 불어 체스 말 사이에 낀 먼지를 제거한 뒤 말했다.
“이 바닥에서 소문만큼 무서운 게 어디 있다고. 증거가 없으면 뭐 어때. 중요한 건 그 사건이 진짜였다는 거지. 두 사람을 이간질할 만한 요소를 찾았으니, 우린 이 싸움에서 이긴 거야.”
더는 요제프가 믿음직스럽지 않다. 마리엘라는 조용히 그를 흘겼다. 그녀는 요제프라면 단두대 위에 올라가도 끝까지 저렇게 여유로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삼 일 남았어요. 그 안에 모든 게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한쪽 팔을 등받이 위에 올리고, 다리는 꼰 자세였다. 고귀한 왕족 앞에서 내보일만한 태도는 아니었지만, 요제프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이 평소와 같은 일상인 것처럼 굴었다.
“뭐가 그렇게 급해? 하루만 더 기다려. 분명 후작은 그 안에 우릴 찾아올 테니까.”
속을 알 수 없는 뱀 같은 미소가 그의 얼굴 위에 드리워졌다.
* * *
“도미닉!”
안센 지그리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항간을 떠도는 소문의 출처가 도미닉 남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을 협박해 돈은 돈대로 받아놓고 약속은 지키지 않은 남작에게 크게 실망했다. 그래서 무작정 남작의 저택으로 쳐들어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도미닉 남작!”
아무 반응이 없자 한 번 더 소리쳤다. 뒤늦게 도미닉 남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인가?”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살필 상황이 아니었다.
지그리트 후작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이 상황에 지금 그런 태연한 소리가 나와?”
“자네…… 취했나?”
“차라리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 항간에 떠도는 소문들, 자네도 익히 알겠지.”
그 말을 들은 도미닉 남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남작은 후작의 시선을 피했다. 찔리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도미닉 남작은 지그리트 후작에게 어마어마한 거금을 받는 대신, 후작의 약점이었던 후작가의 집사 보르도를 몰래 암살해주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일이 생겼다. 그가 보낸 암살자가 보르도와 동시에 실종된 것이다.
남작은 그 소식을 지그리트에게 숨겼다. 자신이 보낸 암살자 때문에 보르도가 탈출할 기회를 얻은 건 아니냐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도 모르는 일일세.”
“지금 나와 농을 하자는 건가? 십오 년 동안 잠잠하다가, 갑자기 이 사달이 났는데 대체 원흉이 누구란 말이야!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건가? 하! 자네를 위해 사람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나를?”
두 사람의 언쟁은 심화되었다.
지그리트는 자신의 치부가 만인에게 공개되어 몰락할까 두려웠고, 도미닉은 그가 다시 돈을 토해놓으라고 요구할까 봐 두려웠다.
두 겁쟁이는 내면의 두려움을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말 잘 꺼냈네. 분명 편지에는 나흘 전에 살수를 보낸 것으로 되어있는데, 왜 그다음 이야기가 없지? 그 집사는 어찌 되었나.”
“그건…….”
지그리트가 핵심을 찌르자 도미닉 남작의 말문이 막혔다. 순식간에 기세를 잡은 후작이 그를 향해 경고를 던졌다.
“오늘 밤까지 그 집사 놈을 죽인 증거를 내게 가지고 오세. 그렇지 않으면 자네와 나의 우정은 끝이 난 거로 알겠네.”
그건 후작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 사건’의 증인인 보르도가 시체로 발견되기만 한다면 소문은 소문으로 남게 된다. 진실을 덮을 수만 있다면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추문이야 감내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도미닉 남작이 평소 그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가였다. 도미닉은 지그리트를 자신보다 한참 아래에 있는 자라고 여겨왔다. 가진 거라고는 운으로 얻은 작위밖에 없는 무능하고 소심한 남자라고 뒤에서 비하하기도 했다. 그렇게 우습게 보아왔던 지그리트가 돌변해 자신을 짓누르려 한다는 것이 남작의 자존심을 긁었다.
남작은 웅크려 드는 대신 맞서 싸웠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
안타깝게도 지그리트도 바로 깨갱 하고 꼬리를 말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벼랑 끝에 몰려 있었고, 자신을 곤란하게 하는 것은 고양이든, 늑대든 물어뜯을 준비를 한 상태였다.
“협박? 이건 그냥 여태까지 자네가 내게 한 것을 그대로 돌려준 것뿐인데?”
그 말에 도미닉 남작이 비죽 웃었다.
“지그리트 후작. 이것 하나만 명심해 줬으면 좋겠어. 우리의 우정이 파멸에 이르렀어도 나는 자네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집사가 죽든 말든 그게 그리 중요한가? 그 사건의 또 다른 목격자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지그리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뒤늦게 아차 싶은 것이다.
“도미닉 자네……!”
남작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후작에게 작별인사를 고했다.
“잘 가시게. 지그리트 후작.”
그리고 뒤돌아 사라졌다.
“…….”
서열은 다시 뒤집혔다.
안센 지그리트는 넋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남작이 사라진 곳만 보다가, 이내 힘없는 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남작가를 나온 지그리트 후작이 향한 곳은 자신의 저택이 아니었다.
“자네가 여기 웬일인가.”
잠옷 차림의 알폰스 후작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하고픈 말이 있어서 말이죠.”
“그게 뭔가?”
“일전에 제게 하셨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습니다만.”
권력이 필요했다.
15년 전 살인 사건의 증인이자 브랫 백작의 처남인 도미닉 남작을 단두대 위로 올려놓을 수 있는 권력이.
* * *
날이 밝자, 요제프는 신하들을 소집했다.
신하들은 저마다 긴장한 얼굴을 하고 왕성 회의장에 모였다.
왕자가 직접 소집을 명령한 것은 딱 두 번 있었다. 하나는 오늘이고, 다른 하나는 왕자비를 마녀로 몰았을 때였다.
귀족들은 오늘 왕자 전하께서 또 무슨 폭탄선언을 하실지 근심을 안고 왕성으로 향했다.
리덴부르크가의 외동딸이 왕자비의 자리에 앉고 나서 모든 무게 중심과 규칙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귀족파는 물론, 국왕파의 대신들마저 그 사실이 내심 불편했다.
요제프는 신하들을 앞에 세우고 입을 열었다.
“오늘 경들을 이렇게 부른 것은 중대발표를 하기 위함입니다.”
신하들은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발표라 하시면…….”
“네, 재상이 결정되었습니다. 오랫동안 경들의 속을 썩였던 문제가 이렇게 해결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왕자는 오늘도 어김없이 순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무해한 미소를 띠었다.
“지그리트 후작을 재상으로 임명하고자 합니다.”
여기저기서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다 같이 동요했다. 상상도 못했던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지그리트가?”
“브랫 백작이 아니라?”
“알폰스 후작이 아니라?”
웅성웅성.
소란은 진영을 가리지 않았다. 어느 진영에서 보아도 지그리트는 탐탁지 못한 사람이었다.
양쪽은 자신들의 수장을 말없이 압박했다.
“크흠.”
모든 것을 알고 있던 알폰스 후작은 짐짓 모르는 척하며 꿋꿋이 그 자리에서 버텼다. 이번 건에 관해서 나서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어쩔 수 없이 귀족파의 브랫 백작이 앞으로 나섰다.
“전하, 나라의 기둥인 재상은 신중히 뽑으셔도 모자란 것인데, 이렇게 갑작스레 결정하시는 것은…….”
한마디로 마음에 안 든다는 소리였다. 요제프가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요제프는 감히 자신의 결정에 반발하는 신하에게 불쾌해하는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저 방긋 웃으며 특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꾸해줬다.
“그럴 리가요? 나의 마리안이 아주 딱 좋은 선택이라고 했는데.”
“…….”
그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요제프는 마리안이 참 쓸 만한 패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처음 그녀를 왕성으로 데려왔을 때는 저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모두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왕자의 등 뒤에 있는 왕자비의 존재감에 모두가 굴종했다.
요제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동자를 하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 말이 없다는 것은, 다들 제 결정을 따른다는 의미겠지요? 그럼 지금 바로 재상 임명을 하겠습니다. 지그리트 후작, 앞으로 나오세요.”
* * *
비슷한 시각, 마리엘라는 지각을 한 율리안의 뒤를 졸졸 쫓으며 그에게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쉬셔야 해요. 쉬셔야 한다니까요? 굳이 그 몸으로 회의장에 참석할 이유가 있나요?”
율리안은 지금 심한 감기에 걸린 상태였다. 한눈에 봐도 상태가 안 좋았다.
마리엘라는 고작 재상 발표 하나 때문에 율리안이 이렇게 무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그를 회유해 안락한 침대 위에 눕혀놓고 싶었다.
그러나 율리안의 태도는 굳건했다. 그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쉴 새 없이 잔소리하는 자신의 하녀에게 몇 마디 했다.
“머리가 울린다. 그만해.”
“열이 펄펄 끓으니까 그렇죠! 그냥 방으로 돌아가자니…….”
율리안이 쓸데없는 소리라는 양 고개를 작게 도리질했다. 그는 그녀의 말을 다 듣지도 않은 채 문을 지키고 있는 시종에게 어서 문을 열라는 손짓을 했다.
회의장 문이 열렸다.
마리엘라는 설교를 멈추었다.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건국왕의 검을 들고 재상의 맹세를 하는 지그리트 후작과, 그 옆의 요제프.
……그리고, 정확히 그 둘을 향해 떨어지는 샹들리에였다.
“제이!”
놀란 마리엘라가 그의 애칭을 불렀다.
그 말에 요제프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간다.
율리안은 품 안의 검을 빼 들고 요제프를 향해 달려나갔다.
쾅!
커다란 샹들리에가 굉음을 내며 바닥 위로 추락했다.
소름 끼치는 고요가 이어졌다.
회의장 바닥 이곳저곳에 흩뿌려진 유리 조각들, 떨어진 샹들리에를 중심으로 조금씩, 조금씩 퍼져나가는 누군가의 핏물.
요제프는 놀란 얼굴로 율리안의 등 뒤에 서 있었고, 율리안은 검을 든 채로 샹들리에가 떨어진 곳을 응시했다. 그의 검 끝에 검은빛의 검기가 일렁이다가 사라졌다.
기사들이 서둘러 요제프에게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다들 전하를 호위해!”
기사들이 검을 빼 들고 요제프를 보호하려 했다. 샹들리에의 추락이 반란의 전초전인지, 단순한 사고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귀족들은 그들 나름대로 난리였다. 그들은 샹들리에에 깔린 후작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세상에, 지그리트 후작!”
“의료진! 빨리 의원을 불러!”
요제프가 자신의 기사들에게 후작의 상태를 살피라고 고갯짓했다. 기사 하나가 다가가 후작의 맥박을 짚고는 말했다.
“소용없을 겁니다. 즉사했습니다.”
“이게 무슨.”
모두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고인가 음모인가.
다들 넋이 나간 얼굴로 눈만 깜박이고 있을 때, 발 빠른 소년 하나가 외부에서 전달된 특보를 들고 회의장으로 달려왔다.
“큰일 났습니다! 교황께서 타고 계시던 마차가 불순분자들에게 공격을 당했답니다. 교단 고위 사제들과 기사들이 급히 파견을 나갔지만, 현재 피해 상황 파악은 불가능하답니다. 최악의 경우 교황 성하의 사망까지…….”
“뭐?”
소년은 바닥에 떨어진 샹들리에와 처참하게 죽은 후작의 시체를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회의장 안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현재 베르단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교황 로베르토 가르뎅이었다.
그런 교황의 생사를 알 수 없다니!
장내가 순식간에 어수선해졌다. 충격적인 일들의 연속. 그러나 소동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특보를 들고 온 소년의 등 뒤에서 원숙하게 생긴 청년 하나가 나타났다.
여유로운 걸음새의 그는, 눈앞에 벌어진 사태에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아니 대체 이게 다 뭐야? 오랜만에 방문한 룩센투크는 참 많은 것이 변해있군.”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요제프가 남자를 알아보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드몬드?”
그 소리에 남자가 요제프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남자는 지나가는 이의 시선을 빼앗을 만큼 매력적인 미소를 내보이며 왕자에게 인사했다.
“그래, 나야. 네 이종사촌 형, 에드몬드.”
회의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
열린 문 뒤쪽에 서 있던 하녀 마리엘라는 조용히 생각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샹들리에 사고, 귀족파의 배신자 지그리트 후작의 죽음, 교황을 향한 테러와 아샤칼에 살고 있다던 왕위 계승서열 2위 에드몬드 파칼의 등장까지.
우연이라 하기에는 모든 것이 척척 맞아떨어진다.
“…….”
마리엘라와 요제프는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누군가가 손을 쓴 거다.
귀족파의 뒤에 서서 요바튼 공작, 브랫 백작은 물론 전대 재상들을 쉽게 좌지우지했던 누군가.
장막 뒤에 서서 모두를 주무르는 거대한 존재가 그들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놀아주는 것은 여기까지니 인제 그만 자신의 주제를 자각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 * *
왕성이 발칵 뒤집혔다. 신하들은 모두 자신의 목이 제대로 붙어 있는 건지, 또 눈과 귀는 제대로 달려 있는 건지 확인하느라 바빴다.
회의는 자연스럽게 파했고, 그들은 너무 많은 정보 때문에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왕성을 떠났다.
초저녁, 사태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율리안이 마리엘라에게 명령했다.
“몸 상태가 별로야. 오늘 밤은 내 처소에 머무르며 내 간호를 하도록 해.”
갑작스레 흉흉해진 왕성에서 홀로 남은 마리엘라가 걱정된다는 투였다. 마리엘라는 거절하지 않고 그냥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밤이 되었다. 율리안은 침대 위에 누워 경전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마른 천을 들고 처소 안의 작은 세공품 등을 닦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일일까.’
마리엘라는 구석진 곳에 놓여 있던 체스 상자를 집어 체스 말 하나하나를 조심스레 닦으며 낮의 사건을 되새김질했다.
그녀는 지금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낮에 있었던 일들을 통해, 스스로의 무능함을 전면으로 맞이하게 된 탓이었다. 신분이 낮아 힘이 없었을 뿐, 스스로가 남들보다 뛰어나다 자부해왔던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이 정도의 무기력감은 십삼 년 전, 가족들이 백작가의 치정극에 휘말려 허망하게 죽은 그날 이후 처음 겪는 일이었다. 패배감이 그녀의 뼈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려 했다.
마리엘라는 빠르게 고개를 저어 자신을 지배하려는 감정에 대항했다.
급히 정신을 차리니 제 손에 들려있는 체스 말이 보였다. 하필 비숍이었다.
‘룩은 공작, 비숍은 후작, 나이트는 백작, 폰은 남작.’
자연스레 요제프와의 체스게임이 떠올랐다.
지그리트 후작을 재상으로 만들기 위해 나누었던 수많은 대화, 퀸에 새겨져 있었던 자신의 이름, 그리고 상대편 킹에 새겨져 있던 물음표까지.
‘이건 아니야.’
마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테이블 위의 체스 말들을 모두 쓸어버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잘 세공된 체스 말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율리안이 반응했다.
“뭐지?”
“별일 아니에요. 그냥 뭘 좀 떨어트렸어요.”
마리엘라가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체스 말들을 주우며 조용히 생각했다.
처음부터 체스 게임으로 룩센투크 정세를 시각화하면 안 됐다.
‘편견, 관습, 규칙 따위에 얽매이지 말아야 했는데…….’
가슴 속이 답답했다. 세상이 그녀에게 여기까지가 한계라고 선을 그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벽 너머의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평생 차근차근 계단을 쌓아 올라가고 있던 마리엘라에게 그것은 사형선고와 다름없었다.
숨이 턱 막혔다.
어디로든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녀는 바닥을 정리하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율리안의 허락을 구했다.
“저 잠깐,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바이르 공작 각하.”
그녀는 공작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급하게 별관을 뛰쳐나왔다.
마리엘라가 그렇게 달려 도착한 곳은 왕자의 개인 서재 근처였다.
그녀는 먼발치에서 불빛에 반짝이는 서재의 창을 바라보다가 스스로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실질적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요제프였다. 그녀는 고작 왕성을 탈출할 기회를 잃게 된 것뿐이었지만, 요제프는 왕위를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하는 커다란 문제가 세 개나 되는 데다가, 도대체 어디서 정보가 새어나갔는지도 영리하게 캐야 했다.
머리가 터져나간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괜히 자극하지 말고 돌아가자.’
그녀는 억지로 발걸음을 돌렸다.
평소에는 아무런 감흥 없이 거닐었던 복도에 역대 재상들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은은한 달빛이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비추고 있었다.
마리엘라는 걸음을 멈추고 역대 재상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그들의 모습은 각양각색이었다. ‘재상’ 하면 떠오르는 외양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당장 다음 날에 눈을 뜰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로 늙고 병들어 보이는 노인도 있었다.
마리엘라는 그들의 행색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그녀 내면의 불안함과 조급함을 서서히 닦아냈다.
그리고 그때였다.
등 뒤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렸다.
“잠이 안 오는 밤이야. 그렇지?”
그녀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요제프였다.
요제프는 뒷짐을 지고 조금 전까지 그녀가 바라보고 있었던 초상화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살짝 내려앉은 속눈썹 사이로 그녀가 외면하고 싶어 했던 인간적인 근심과 피곤함이 엿보였다.
그녀는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딱딱하게 굴었다. 그를 감정적으로 밀어내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랬다.
“짐작 가는 사람은 있나요?”
그 말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 어떤 것도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됐어.”
“그렇군요.”
그리고 침묵. 그녀는 조용히 그의 눈치를 살폈다. 시선은 열네 번째 재상에게 머물러 있었지만 모든 신경은 오른쪽의 요제프에게 향했다. 그의 기운을 북돋아 주고 싶었지만, 그와 감정을 공유하는 사이로 발전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대화의 주제를 바꾸는 것이었다.
“이게 뭐죠?”
마리엘라가 초상화 속 남자의 가슴팍에 달린 것을 가리켰다.
그것은 훈장과 비슷한 모양을 띠고 있었는데, 베르단 왕가의 문장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국가에서 내린 훈장은 아니었다.
“교단에서 내려주는 거야. 해마다 가장 신실한 귀족들을 선별해 그 증표로 브로치를 전달하는데, 우린 저걸 ‘영광의 피’라고 부르지.”
“그렇군요.”
또 대화가 끊겼다.
마리엘라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자연스럽게 이어질 다음 대화 주제를 생각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바욘 2세의 통치 시절 재상들인가요.”
“맞아. 그리고 여기부터 여기까지가 우리 조부님의 재상들이고, 여기부터 여기까지가 우리 아버지, 그리고 여기부터가 나의 재상들이지.”
그녀는 잘게 고개를 끄덕이며 초상화들을 찬찬히 응시했다.
그저 초상화일 뿐이었지만 시간대별로 주욱 나열해서 보니 이 나라의 흐름을 알 수 있었다. 바욘 2세 통치 중반까지만 해도 역대 재상들의 가슴팍에 ‘영광의 피’ 브로치는 몇 없었다. 있더라도 예복 곁가지에 장식의 일부처럼 대충 달아놓았다.
그러나 중후반을 넘어가자마자 ‘영광의 피’는 점점 왕실에서 내린 여러 훈장을 제치고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요제프의 아버지, 요하네스의 시대까지 내려오면 아예 ‘영광의 피’를 달고 있지 않은 재상은 보이지 않았다.
교단 바레뎃샤가 흑마법사를 밀어내고, 왕권을 집어삼키는 과정이 그대로 엿보였다.
“내가 내 재상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설명해 줄까?”
분위기를 전환 시키고자 요제프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마리엘라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요제프가 치워버린 재상의 초상화들을 주욱 훑어보았다. 그들 가슴 정중앙에 빛나고 있는 ‘영광의 피’. 무미건조한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보던 그녀는 문득, 익숙하면서 낯선 것을 발견했다.
영광의 피 바로 옆에 위치한 루비와 에메랄드로 만든, 붉은 사과 모양의 브로치.
선왕 요하네스의 급격한 병세 악화를 기점으로, 새로 뽑힌 재상들의 가슴팍에 하나같이 저 붉은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그녀는 저것이 무엇인지 안다.
‘붉은 사과 독서클럽.’
율리안이 매주 참석하는 독서 모임의 상징.
갑자기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며 무심코 넘겼던 것들이 착착 쌓이기 시작했다.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긴 했다.
붉은 사과 독서클럽은 정치색을 가리지 않는 클럽으로 유명했다. 워낙 기세가 좋은 모임이었으니 그 안에 율리안이 껴 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우연이 계속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왕자의 사람 중, 살아남은 자는 율리안 하나다.
마리엘라가 요제프와 각별한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도 그고, 그녀가 지그리트의 후작의 뒷조사를 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는 위치에 있던 것도 그다.
요제프는 그가 교황의 영향 아래의 사람이기 때문에 정치색 없이 중립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했지만, 요제프의 사람들은 율리안을 자신의 편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람이 믿음을 주기 시작하면 정보가 새어나가는 건 한순간이야.’
마리엘라는 팔짱을 끼고 더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휙휙 돌아갔다.
귀족파를 좌지우지하는 장막 속의 적.
그녀는 자신의 적에 관해 간과하고 있던 사실이 하나 더 있었음을 깨달았다.
왕자가 처음 시력을 잃었을 때 마지막으로 보았다는 검은빛, 그리고 왕성 물푸레나무 밑에서 발견된 푸른 반점의 시체,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 지그리트 후작을 향해 떨어진 샹들리에.
처음부터 그것들이 가리키는 것은 단 하나였다.
‘……저쪽 진영에 흑마법사가 있는 거야.’
생각이 확장되었다.
율리안의 검 끝에 일렁이던 연기 같던 빛.
처음부터 그녀는 그것을 보고 검기의 형태가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검기가 검을 둘러싸는 것이 아니라,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마치 마법사의 지팡이 끝처럼.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백작가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남성 흑마법사의 마법이나 소드 마스터의 검기를 직접 눈앞에서 본 적이 없었다.
알지 못하는 것이라 그냥 넘긴 것이 화근이었다.
마리엘라는 스스로의 안이함에 화가 났다.
이건 명백한 조롱이었다.
눈앞에서 적이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요제프.”
“갑자기 내 이름은 왜 이렇게 절박하게 부르지, 우리 마리 아가씨가.”
마리엘라는 그의 장난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신 심각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지난번 마녀들의 방계 가문을 조사했을 때 자료, 아직 폐기하지 않았죠?”
요제프가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있지. 그런데 그게 왜?”
“저 좀 보여주세요. 지금 당장.”
마리엘라는 자신의 추측을 요제프에게 그대로 전하지 않았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데다가, 요제프와 율리안의 우정이 두터웠기 때문이었다. 감정은 판단을 흐리게 하고, 인간의 사고는 언제나 편견, 관습, 규칙에 얽매인다. 고작 체스 말 때문에 그녀의 생각이 가로막혔던 것처럼.
‘아무것도 확정 지으면 안 돼.’
마리엘라는 스스로에게 되뇌고 또 되뇌었다.
그녀는 침착하려 애썼다.
하지만 점점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는 느낌.
거기에서 오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은 그녀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 *
동트기 직전의 새벽이었다.
밤새 요제프의 자료를 찾은 마리엘라는 지친 몸을 이끌고 율리안의 처소로 돌아왔다. 그녀는 소파에 누워 쪽잠을 자는 대신, 침실 쪽으로 다가가 잠이 든 율리안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침대 위에 바르게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의 이마 위로 손을 얹었다. 어제 오전까지만 해도 펄펄 끓던 열은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마리엘라는 헛웃음을 지었다.
적일지도 모르는 이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니. 스스로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성으로 멈출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만약, 그가 진짜 적이라면…….’
마리엘라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최악의 상황이 다가왔을 때, 무슨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다가는 요제프와 마리안의 목숨이 위험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율리안의 심장을 찌르고 싶지도 않았다.
가장 최선은, 모든 것이 오해인 것이었으나,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그녀는 요제프가 찾아낸 자료들을 통해 율리안의 모친 ‘바네사 바이르’의 처녀적 이름이 ‘바네사 랏데르시’임을 찾아냈다.
랏데르시는 정신 조종 능력이 뛰어난 흑마법사 가문으로, 한, 르베르크, 파르니 가문과 함께 4대 흑마법사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바네사는 랏데르시 가주의 친언니였다.
그 말은 그녀가 마녀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덩달아 그녀의 아들인 율리안이 흑마법사일 가능성도 커졌다.
‘흔들리지 마, 아직 모든 건 그냥 가능성이니까.’
추측으로 감정을 소비하며 우왕좌왕할 여유가 없다. 조금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마리엘라는 잠든 율리안의 머리맡에 있는 향낭을 발견했다. 손으로 들어 향을 맡아보니 벌써 그 향이 희미해졌다. 그녀는 협탁 서랍에서 새 향낭을 꺼내려 했다. 수심이 깊은 그녀의 눈동자에 협탁 옆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율리안의 검이 보였다. 그가 무슨 상황에서도 항상 들고 다니는 검이었다.
순간, 마리엘라의 머릿속에 어떤 발상이 스쳐 지나갔다.
‘무게.’
남성 흑마법사는 여성 흑마법사보다 마력을 다루는 것이 불안정하다. 그들은 필수적으로 나무 지팡이가 필요했다.
만약, 마리엘라가 본 그것이 정말 마법이었다면, 율리안은 지팡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멍청하게 대놓고 지팡이를 들고 다닐 리가 없었다. 그녀가 남성 흑마법사였다면 아무도 찾을 수 없게 지팡이를 숨겨 놨을 터였다.
‘예를 들면 저 검 같은 곳에.’
마리엘라의 손이 홀린 듯이 율리안의 검을 향해 다가갔다.
나무와 철의 무게는 다르다.
‘이 검의 무게를 재어보면 어떨까?’
그녀의 생각이 거기에 다다랐을 때였다.
눈을 뜬 율리안이 재빠르게 다가와 그녀의 목 뒷덜미를 잡고 침대 위로 던졌다. 순식간에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간 그가 그녀의 양손, 양다리를 결박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털이 잔뜩 선 짐승의 눈동자.
마리엘라는 그럴싸한 변명으로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그냥 검을 좀 닦으려는 것뿐이었어요.”
‘속았을까?’
그녀가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새까만 눈동자가 죽음의 그림자처럼 느껴졌다.
그는 감정이 없는 인형처럼 그녀를 빤히 응시하다가 물었다.
“왜?”
“잠이 안 와서요. 가만히 밤을 새우느니 뭐라도 일을 하면서 버티는 게 낫잖아요?”
“왜?”
“검을 닦은 지 오래된 것 같아서요. 아니, 이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요?”
“왜?”
무슨 말을 해도 같은 질문이 이어졌다.
마리엘라는 어떤 말로 이 상황을 모면할까 궁리하다가 생각을 멈추었다.
그녀가 아는 율리안은 순진하고 순수한 청년이었다. 그는 여자와 손만 마주쳐도 귀가 붉어지곤 했었다. 침대 위에서, 그것도 이렇게 무감한 표정으로 그녀를 몰아세우는 건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지금 그는 평소의 율리안이 아니었다. 그러니 평범한 하녀 마리엘라의 모습으로 대적할 생각은 접는 것이 옳았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서 쓸데없는 표정을 거두어 냈다. 약간 신경질적이고 많이 날카로운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마리엘라의 본 모습이었다.
“검의 무게를 재야 했으니까.”
“…….”
율리안의 표정이 단박에 굳었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자신이 지금 아주 위급한 상황이라는 것도.
그녀는 아주 옛날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양 여유롭게 굴었다.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요, 바이르 공작. 당신이 요바튼 공작을 죽인 사람이라는 것도, 뒤에서 귀족파를 좌지우지한다는 것도.”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요제프의 오랜 친우인데, 너무 위험한 추측을 하는 건 아닌가?”
율리안이 한쪽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리며 그녀를 약 올렸다. 진짜 진실을 알고 있는지 떠보는 것 같기도 했다.
마리엘라는 그것에 넘어가지 않으려 애썼다. 그녀는 자신이 모든 우위를 점령하고 있는 것처럼 차분하고, 또 발칙하게 굴었다.
“부정해봤자 소용없어요. 저를 죽이려고 해도 소용없고요. 제가 왕자 전하와 각별하다는 사실은 아주 잘 알고 계시죠? 그 누구보다 영특하다는 것도요.”
그녀는 아주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도발의 정점을 이었다.
“그냥 인정하세요, 율리안. 당신이 3차 성마전쟁 때 살아남은 흑마법사라는 걸.”
“…….”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무언가에 크게 흔들리는 사람처럼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바라보고는, 이내 그녀의 몸을 결박했던 손을 떼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마리엘라는 얼른 몸을 일으켜 조심스레 뒷걸음질 쳤다.
침대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남녀가 서로를 응시했다.
차갑고 날카로운 고요.
그것을 먼저 깬 것은 율리안이었다. 율리안은 그와 대적하려는 그녀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누가 해야 할 소리인지 모르겠군.”
그가 고개를 살살 저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네가 마녀라는 걸 알고 있어, 마리엘라.”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마리엘라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계신 거죠? 방금 선을 넘는 발언을 하셨어요, 바이르 공작.”
의구심이 들었다.
율리안은 무슨 근거로 자신을 마녀라고 결론지은 걸까.
짧은 기간이었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의 곁을 지켰다. 그녀가 아는 그는 확신이 서지 않은 일에 성급히 뛰어들지 않는, 조심스럽고 철저한 사람이었다. 이렇게까지 나온다는 것은 그녀의 뒷조사를 했다는 것이다.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불안감이 발등을 타고 뒷목까지 올라왔다.
지금 그는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나.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 그를 도발해 보았지만, 율리안의 반응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나야말로 같은 말을 해주고 싶다만.”
평상시보다 더 느리고 부드러운 어조였다.
규칙과 규범만이 세상 전부인 것 마냥, 일차원적이고 각이 진 태도만을 고수했던 율리안은 사라지고 여유롭고 유들유들한 얼굴의 낯선 남자만이 남았다.
본색을 드러내자마자 위압적인 분위기로 그녀를 찍어 누르던 요제프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것이 더 위험했다.
마리엘라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율리안이 절대 휘말리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 개탄스러웠다.
그녀는 일단 다른 주제를 끌어들여 이 상황을 피해 보기로 했다.
“검안에 지팡이를 숨긴 건 영리한 선택이었어요. 용케 교황의 눈을 피할 방법을 찾아냈군요. 어머니가 랏데르시 가문 출신이었으니 교단의 눈을 피하려면 검술에 능한 척하는 편이 낫죠. 시시때때로 방출되는 마력을 숨기려면 그것이 검기인 척하는 편이 제일 안전했겠죠.”
“…….”
율리안은 그녀의 말을 끊거나 끼어들지 않았다. 그저 팔짱을 끼고 어디 할 테면 해보라는 표정으로 잠자코 서 있을 뿐이었다. 당혹스러웠지만 민망해할 틈이 없었다. 마리엘라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잠깐이나마 당신에게 마음이 기울었던 사람으로서 하나만 물을게요. 왜 요제프를 배신한 거죠? 전쟁 때문이라면 말도 안 돼요. 그건 그가 일으킨 게 아니고, 그가 가담한 게 아니잖아요. 전쟁이 끝났을 때 요제프는 겨우 열두 살이었어요. 당신도 그랬고.”
위기를 피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속에 아예 없었던 말은 아니었다.
그것은 율리안이 귀족파의 우두머리일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녀의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던 의문이었다.
율리안은 커다란 손으로 스스로의 목과 턱을 매만지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 몸짓을 했다.
그의 심연같이 새까만 눈동자 속에는 죄책감 따위의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곧이어, 권태롭고 지겹다는 속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낸 그가 되물었다.
“지금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바이르 가문을 그렇게 만든 건 왕가가 아니잖아요. 왕자 전하는 그와 관련해 알고 계신 것이 아무것도…….”
갑자기 그가 그녀의 말을 끊고 물었다.
“요제프가 그랬나, 데르샤바크 왕가는 결백하다고?”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불쾌감이 가득 담겨있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제가 뭘 잘못 알고 있나요?”
율리안은 가만히 스스로의 턱을 매만졌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한쪽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마리엘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욘 2세가 교황청을 이곳으로 옮긴 이래, 왕가와 교단은 누구보다 탄탄하고 끈끈하게 관계를 진행해갔어. 아무리 교단이 기세등등해졌다고 해도 데르샤바크의 땅 위에서 데르샤바크의 허락 없이 가문들을 몰살시키진 못해.”
“그 말은…….”
“모든 비극은 요하네스 왕의 동의하에 이루어졌다는 말이지. 현명하지 못한 질문들이었어, 마리엘라. 티타임에서 보여줬던 재치와 슬기는 모두 어디에 간 거지? 왜 네가 마녀라고 확신하고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이 더 나았을 텐데.”
“그건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에요. 난 마녀가 아니니까요.”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번 부정했다.
픽. 갑자기 율리안이 혼자 웃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리며 냉소적으로 비아냥거렸다.
“귀족과 평민의 차이는 어마어마해. 백작 부인이 명을 달리했을 때는 모두가 경의를 표했지만, 보잘것없는 하인들 몇 죽을 때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 해서, 모두가 놓친 진실이 있지.”
‘……망할.’
심장이 몸에서 떨어져 나간 듯한 기분.
마리엘라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그가 무슨 정보를 찾아냈는지 깨달았다. 무덤까지 안고 가려 했던 그녀의 치부를 발굴해낸 것이다.
그녀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다.
“리덴부르크 백작 부인이 죽기 전에, 백작가 하인들이 먼저 떼죽음을 당했는데 다들 비슷한 증세로 사망했더군. 누군가 백작 부인을 죽이기 전에 먼저 실험을 해본 것처럼 말이야. 수상한 죽음이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어. 전염병이라 여겨 장례사를 통하지 않고 시체를 태웠기 때문에 장례사의 의심도 피할 수 있었고.”
“병으로 죽은 사용인들이 너무 많아 기억도 안 나는데요.”
미묘하게 달라진 그녀의 태도에 율리안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기억이 안 날 수가 없을 텐데.”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죽은 자들에겐 푸른 반점 말고도 다른 공통점이 있었거든.”
“…….”
“모두 너를 건드린 적이 있던 자들이더군.”
그녀는 멍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깊숙한 곳에 묻어 놓았던 기억이 깨어나 활개를 친다.
어디선가 망토가 펄럭이는 환청이 들린다.
이윽고 눈앞에 그려지는 은색 로브.
검은 밤과 매서운 눈발.
마리엘라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십삼 년 전 그날, 백작부인이 입고 온 망토에 달린 흰여우 털과 그 위에 하나둘 쌓이기 시작하는 꽃잎 같은 눈송이들, 바람에 천이 이리저리 휘몰아치는 소리, 집안을 근근하게 비추던 촛불의 밝기, 두 눈을 가려주던 어머니 손의 온기까지. 어느 것 하나 빛바랜 것이 없이 선명하다.
그중 그녀를 가장 오래 괴롭힌 것은 은색 망토였다. 그녀는 아직도 그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턱 막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백작 부인과의 기억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얽혀있었다.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백작가의 하인들이었다.
그들은 그녀가 백작 부인의 은색 망토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행동으로 옮겼다.
기억이 두서없이 쏟아진다.
망토가 펄럭거리는 소리가 점점 다가온다.
여성용 망토를 뒤집어쓴 우락부락한 남자들, 성벽의 우둘투둘한 촉감, 흥분과 희열에 가득 차 저들끼리 떠들어대는 저열한 말, 작은 손으로 풀뿌리를 쥐어뜯으며 했던 맹세…….
‘그만.’
마리엘라는 약해진 마음을 억지로 단단히 묶으며 더 이상 과거의 기억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했다.
이십오 년의 세월 동안 평민으로 살아가면서 그녀가 온몸으로 깨달은 것은 세상은 약자에게 무너질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절망과 좌절은 생존과 안전이 보장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일개 하녀인 마리엘라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런 선택을 했다.
“남의 끔찍한 기억을 잘도 드러내시는 군요, 바이르 공작.”
그녀가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율리안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알 바가 아니라는 태도를 유지했다. 그가 까딱, 고개를 한쪽으로 틀며 제 할 말을 했다.
“너는 내게 많은 것을 질문했지만, 내가 네게 묻고 싶은 것은 하나야.”
시선은 여전히 무서울 정도로 그녀 하나만을 쫓고 있었다.
“백작부인을 죽일 땐 통쾌했던가? 마녀 마리엘라.”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숨바꼭질은 끝났다.
모호한 말장난도 이제는 끝이다.
마리엘라는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힘이 빠진 얼굴. 몇 달 전 요제프의 말이 그녀의 귓가에 아른거렸다.
‘너는 왜 아무렇지 않아? 마리안의 어머니는 너희 가족을 죽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이고, 그녀의 아버지는 네 가족의 사형을 직접 명한 사람이고, 그녀는 너에게서 날 빼앗았어. 이 중에 하나만 해도 철천지원수로 여길 것인데, 그 집안은 네게 세 가지 악행을 모두 저질렀지. 화가 나지 않아? 내가 너라면 왕자비에게 충성을 다하는 대신에, 칼을 들고 등 뒤를 노릴 텐데.’
그녀는 그 말에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요제프의 무얼 믿고 진실을 말해준단 말인가.
그녀의 과거는 그녀가 이루어낸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릴 텐데.
호반 가족은 착하고 신실한 사람들이었다. 죽은 가족들의 판단 기준으로 본다면, 그녀가 백작가로 옮겨간 뒤 했던 일들은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악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리엘라는 한 번도 그것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마리엘라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담담한 어조로 가장 밑바닥에 있던 진심을 읊었다.
“……다들 궁금해하더군요. 가족을 죽인 리덴부르크 백작의 막내딸을 어떻게 그렇게 살뜰히 챙길 수 있냐고. 누구는 제가 근본이 비천해 중요한 도리를 모른다고 했고, 누구는 제가 목숨 귀한 줄 아는 현실적인 성격이라 과거를 잊어버렸다고 했죠.”
율리안은 숨을 죽이고 그녀의 자백을 경청했다.
눈을 내리깔고, 그와 그녀 사이의 바닥을 응시하던 마리엘라가 순식간에 눈을 치켜떴다. 고양이 같은 눈매 사이로 진득한 살의가 묻어 나왔다.
“다 틀렸어요. 제가 복잡한 과거를 가지고도 맹목적으로 아가씨를 따르는 이유는 하나였죠. 제게 남은 것은 은혜 하나밖에 없거든요.”
“…….”
“당신 말이 맞아요, 율리안 폰 바이르 공작 각하.”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홀가분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의 마침표를 찍었다.
“제가, 리덴부르크 백작 부인을 죽였어요.”
마리엘라에게는 자신의 가족이 몰살당한 원인인 그날 밤의 일만큼 선명한 기억이 하나 더 있었다. 마리안의 어머니, 리덴부르크 백작부인이 마지막 숨을 뱉던 순간이었다.
그녀는 오열하는 마리안을 뒤로하고, 부인에게 다가갔다.
뼈만 남은 그 손을 잡으며 세상 어디에도 없는 충성스러운 하녀인 마냥 살뜰하게 굴었다.
‘안녕히 가세요, 백작 마님.’
그리고 아직 눈을 감지 않은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모든 악의와 진심을 담아서.
다정하고, 산뜻하게.
‘제 손으로 당신을 죽일 수 있어 얼마나 통쾌한지 몰라요.’
“…….”
“…….”
율리안과 마리엘라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정체를 숨기고 상대 진영을 노리고 있던 양쪽의 퀸과 킹이 각자 모습을 드러내고 서로를 완벽히 파악해낸 순간이었다.
<3권에 계속> <공금/갠소> 우리끼리만 보기!!! by S.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