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율리안 폰 바이르
요바튼 재상이 죽었다. 공식적인 사인은 자살이었다. 공작은 조사가 들어가기 전에 감옥에서 목을 매고 죽었다고 알려졌다.
마리엘라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요제프에게 달려가 진실을 확인했다.
“죽이셨어요?”
집무실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던 요제프는 그윽한 눈으로 마리엘라를 보았다.
“난 가끔 궁금해. 우리 마리 아가씨는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사람 목숨 귀한 줄 모르는 못된 모략가?”
“그래, 일단은 그 정도로 만족하도록 할게.”
요제프가 대놓고 서운한 티를 냈지만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마리엘라가 인내심이 부족한 아이처럼 요제프를 닦달했다.
“그럼 누구죠?”
“누구겠어.”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마리엘라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했다.
“설마.”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지.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의 손길을 뻗어준 자를 잊지 않고 은혜를 갚을 거로 생각하는 건 너무 단순한 생각이야. 인간은 허물을 싫어하고, 그중에서 가장 싫어하는 건 자기 자신의 허물이거든. 그러니 그것을 아는 자를 어찌하고 싶겠나.”
그녀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죽여 버리겠죠.”
가녀린 아가씨가 서슬 퍼런 말을 서슴없이 뱉는 모습은 꽤 소름 끼쳤다.
요제프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다음 남은 차를 마저 마셨다. 우아한 몸짓이었다.
“맞아. 짐승보다 못한 짓이지만, 못할 것도 없지. 이곳은 그런 자들만 득실거리는 곳이니까.”
* * *
이브노말 남작의 둘째 딸 데이지 이브노말은, 수도에 있는 먼 친척의 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머무는 중이다.
그녀는 왕자비의 시녀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가 한 번 떨어졌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응당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했지만, 그녀는 눈초리를 받아가면서까지 수도에 머물렀다. 이대로 이곳에서 버티고 있다 보면 언젠가 자신에게 기회가 도래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친척집의 하인들까지 자신을 깔보고 무시하는 느낌이 들었다.
데이지는 갈림길에 섰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야 할까. 아니면 여기서 소일거리라도 찾아야 하나.
고심하고 있을 때 불현듯 기회가 찾아왔다.
“데이지, 이건 네 거야.”
소포와 편지를 정리하던 이종사촌 언니가 갑자기 작은 꾸러미를 그녀의 품에 안겨주었다. 보낸 이의 이름은 물론, 작은 표식 하나도 없었다. 적힌 것은 오직 데이지 이브노말, 그녀의 이름뿐이다.
데이지는 고개를 갸웃하며 포장을 뜯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책 이름들이 가득 담긴 리스트와 함께, 쪽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짤막한 편지 한 장이 들어가 있었다.
이번 기회는 진짜니 놓치지 말아요.
편지 봉투 안에는 은화 두 닢이 같이 동봉되어 있었다.
“…….”
데이지는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곧 소포를 보낸 이가 누구인지 짐작했다.
그녀는 즉시 겉옷을 껴입고 시내로 달려갔다. 리스트에 적힌 책들을 몽땅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데이지 이브노말이 책을 왕창 구입하고 일주일 뒤, 베르단 귀족들에게 공문이 떴다. 왕자비의 시녀를 뽑겠다는 공고였다. 데이지는 망설이지 않고 그 일에 지원했다.
‘리덴부르크가의 신데렐라’라는 별명이 있는 마리안 왕자비는 최근 알 수 없는 이유로 유폐되었다가 복귀했다.
왕자비의 복귀 날, 많은 영애가 왕성 룩센투크에서 열린 비밀 무도회에 참가했지만, 아무도 그날 있었던 일에 관해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겁에 질린 얼굴로 바짝 기는 태도를 보였을 뿐이다.
덕분에 왕자비의 입지와 명성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드높아졌다.
데이지는 이번에는 더 쟁쟁한 가문의 귀족 영애들이 왕자비의 시녀 자리에 도전할 것을 알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기필코 붙을 자신이 있었으니까.
고대하던 선발 시험이 다가왔다.
“고귀한 여성이 되기 위한 덕목 세 가지는 뭐라고 생각하지?”
“자애와 기품 그리고 평판이라고 생각합니다.”
“흠……. 합격.”
그녀는 깐깐하기로 유명한 호트너 부인의 시험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 이제 남은 것은 왕자비의 선택뿐이었다.
데이지는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응접실 앞을 서성였다.
‘왕자비 전하는 어떤 사람일까. 소문에 의하면 엄청나게 똑똑하고 무섭다던데.’
데이지는 소문 속 마리안 왕자비의 모습과 익명으로 보내진 소포 속 통속 소설 리스트가 도대체 무슨 상관인지 도통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직접 부딪쳐보기로 했다.
“이브노말 남작가의 데이지 영애.”
어린 시종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데이지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요제프와 마리안, 호트너 부인 그리고 마리엘라가 있었다.
“이름이…… 데이지 이브노말? 참 예쁜 이름이군요.”
요제프가 서류를 읽어 내리며 방긋 웃었다.
다정한 칭찬에 데이지가 얼굴을 붉혔다. 살면서 저렇게 잘생긴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저 남자가 이 나라의 왕자 전하라니. 동화 속 이야기를 툭 떼다가 붙여 놓은 것만 같았다.
“여, 영광입니다.”
그녀가 말을 더듬으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데이지는 제게 말을 건넨 왕자를 보는 척하면서 그 옆의 왕자비를 살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를 직접 뽑는 사람은 마리안 왕자비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에게 잘 보여야만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마리안 왕자비는 몸을 반쯤 요제프 왕자 쪽으로 틀고 데이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질투심의 표현이라고 넘기기에는 얼굴에 드리워진 지루함이 너무 짙었다.
왕가로 시집온 여성들의 첫 단추는 직속 시녀다. 어떤 시녀를 뽑아 사교계를 어떻게 구성하느냐가 그녀들의 평생을 좌우했다.
충성을 맹세한 가신들이 왕의 체스 말이라면, 똑똑한 시녀들은 왕비의 체스 말이었다.
언제나 게임은 좋은 패를 쥐고 있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베르단의 역사를 통틀어 권력을 장악한 왕비 중 멍청한 시녀를 곁에 둔 자는 없었으며, 그 반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마리안 왕자비는 시녀를 뽑는 일에 무관심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쟁쟁한 가문의 영애들에게도 같은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마치 배부른 사자가 지나가는 염소를 멀뚱멀뚱 지켜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왕자비 전하, 남작 영애에게 질문하실 점은 없으신가요.”
보다 못한 마리엘라가 그녀를 쿡 찔렀다.
“음, 별로.”
마리안의 태도는 여전했다. 그녀는 딴 곳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밤은 언제 오고, 달은 언제 뜨려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데이지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녀는 왕자비의 옷차림을 다시 살폈다.
왕자비의 복장은 독특한 감이 없지 않았다.
사교계는 지금 밝은색의 화려한 드레스가 유행이었다. 하지만 마리안 왕자비의 옷은 짙은 안개가 떠오르는 혼탁한 회색이었다. 아무런 장식 없이 치렁치렁하게 내린 머리, 주문 제작했을 것이 분명한 월계수 모양의 금 브로치와 손목의 진주 팔찌.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 전 그 대사.
그녀의 머릿속에 『호수의 주인 나탈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 책은 호수의 요정인 여자 주인공과 태양의 신, 신관 간의 삼각관계를 다룬 통속 소설이었다.
그녀는 뒤늦게 익명의 누군가가 보낸 소포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데이지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호수의 주인 나탈린』속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고귀하신 분. 태양은 당신을 보자마자 당신의 아름다움에 취해 발밑에 납죽 엎드릴 겁니다. 아가씨는 해와 달을 모두 손에 쥘 수 있으세요. 그런 권리를 약속받고 태어나셨으니까요.”
나탈린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성스러운 시녀 아르다의 대사였다.
마리안의 눈이 동그래진다.
“어머.”
그녀는 뒤늦게 몸을 틀어 데이지를 바라보았다.
“나탈린을 아는 사람이 있다니. 오래전 절판된 책이라 구하기도 힘들 텐데.”
데이지는 씩 웃었다.
“진정한 독자라면 그 책을 모를 수가 없죠.”
두 사람 사이에 금방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지원자 중 가장 보잘것없는 가문 출신의 아가씨, 데이지 이브노말의 전속 시녀로 발탁된 순간이었다.
* * *
시녀 지원자들이 모두 떠난 응접실, 마리안과 호트너 부인이 언쟁을 벌였다.
“난 이브노말 남작 영애가 좋아요. 사람이 많이 붙는 것은 싫으니 그녀 한 명만 뽑기로 하죠.”
“너무 보잘것없는 가문이라 곤란합니다. 안 그래도 전하의 가문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자들이 많아요. 저를 믿으시고 브룩스가의 후작 영애를 시녀로 뽑으세요. 그래야 뒷말이 나오지 않을 겁니다.”
마리엘라가 뒤에서 그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다가 헛웃음을 쳤다. 너무 속이 보이는 수였기 때문이었다.
브룩스 후작은 귀족파의 사람이었다.
그의 딸은 당연히 아버지에게 유리한 행동을 할 것이 분명했다. 부인은 지금 왕자비의 입지를 챙기는 척하면서 자신의 사람을 심어 넣으려 하고 있었다.
호트너 부인은 웃음소리를 듣자마자 고개를 돌려 버릇없는 하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부인의 얼굴에는 불쾌함이 가득했다. 그녀는 핀잔을 줄 생각으로 하녀의 행동을 지적했다.
“방금 왜 웃었지.”
“저는 반대로 생각해서요.”
마리엘라는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저는 마리안 전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부인의 말이 항상 맞는 것만은 아니니까요. 호트너 부인, 지난번 음악회 때 소피아 백작부인을 초대한 자리에 궁정 작곡가 파비앙을 부른 사태는 기억하시죠?”
뼈 있는 말에 호트너 부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호트너 부인은 자신의 잘못이 이런 식으로 드러난 것에 크게 당황했다. 왕자 부부를 무시하고 있었던 비밀스러운 속마음이 적나라하게 공개된 것 같아 수치스러웠던 것이다.
“소피아 백작 부인? 그런 일이 있었나요, 마리안.”
요제프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부인의 허물을 덮어주어 일을 대충 마무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마리안이었다. 마리안은 살면서 ‘굳이’ 타인을 배려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호트너 부인의 미숙함으로 곤혹스러운 일이 있긴 했죠. 별일은 아니었답니다.”
마리안의 말을 들은 요제프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저런,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군요. 소피아 백작 부인은 우리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람이니까요.”
“왕자 전하, 그것이 아니라…….”
마리엘라가 호트너 부인의 말을 자르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교계에서 말이 꽤 퍼졌을 겁니다. 그날 모인 모든 사람이 수군거리던걸요.”
그녀의 수치심은 곧 분노로 치환되었다. 호트너 부인은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대신, 일개 하녀에게 허물을 지적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것을 택했다.
호트너 부인의 무시무시한 두 눈이 건방진 하녀를 향해 돌아갔다.
“이 주제를 모르는 것이 어디서 말을 끼어들어!”
짝! 소리와 함께 마리엘라의 고개가 틀어졌다. 어찌나 힘을 실어 때렸는지, 맞은 곳이 붉게 달아올랐다.
마리엘라는 통속 소설의 가련한 여주인공처럼 뺨을 부여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든 게 그녀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왕가를 위협하는 진짜 적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요제프에게 제공받은 정보나 책에서 찾은 지식으로는 부족했다. 좀 더 세세하고 다양한 것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녀는 왕성 사람들의 하염없이 가벼운 혀를 활용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거기에 커다란 장애물이 하나 있었다. 그녀가 왕자비가 아끼는 하녀로 유명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멍청한 하인이라 하더라도, 머리를 장식으로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닌 한 마리엘라가 있는 곳에서 떠들어대지는 않을 것이다.
마리엘라는 고심 끝에 자신이 왕자비를 떠나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리안이 쉽게 그녀를 보내줄 리 만무했기에 호트너 부인을 이용하기로 했다.
호트너 부인의 자존심과 자만심을 건드려 부인이 자신에게 분노하게 하고, 나아가 왕자비의 직속 하녀직에서 쫓겨나는 것. 거기까지가 그녀의 계획이었다.
“호트너 부인!”
마리안이 정색을 하고 소리 질렀다.
“건방진 하녀에게 알맞은 훈육을 했을 뿐입니다, 왕자비 전하.”
“아무리 부인이라도 제 하녀를 함부로 대하는 건 참을 수가 없군요!”
어느새 뺨을 맞은 하녀는 잊히고, 마리안과 호트너 부인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목소리를 높이며 격하게 싸웠다.
싸움에서 한걸음 물러난 마리엘라는 뒷짐 지고 구경하고 있는 요제프에게 눈짓했다. 그제야 그가 움직였다.
“진정해요, 마리안. 부인께선 마땅히 하실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는 왕자비의 어깨를 감싸면서 둘 사이를 중재했다. 그리고 왕자비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마리안, 마리엘라를 위해서 지금은 좀 참는 게 좋겠어요. 왕성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협력은 역사가 깊어요. 그들이 작정하고 괴롭히면 마리엘라가 매우 괴로워질 테니 그녀를 위해서 화를 숨기세요.”
마리안은 여전히 씩씩대며 호트너 부인을 노려보았다.
요제프는 호트너 부인에게도 한마디 했다.
“부인께서도 손찌검은 그만두시지요. 하녀는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
“저런 되바라진 아이는 왕자비의 곁에 두어선 안 됩니다. 당장 부엌으로 쫓겠어요.”
그 말을 듣고 마리안의 성질이 폭발했다.
“이 늙은이가 보자보자 하니까, 진짜!”
마리엘라가 쪼르르 달려가 마리안을 달랬다.
“왕자비 전하. 제 불찰입니다. 진정하세요.”
그녀는 요제프처럼, 목소리를 줄여 마리안만 들리게 속삭였다.
“여기서 화를 내시면 안 돼요. 왕성에서 제일 중요한 건 법도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잊지 말아야 해요. 이곳에선 평가가 곧 권위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마리엘라의 지나치게 침착한 태도에 마리안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요제프가 마리안을 감싸는 척 끼어들며 마리엘라에게 명령했다.
“마리엘라, 지금 당장 이곳을 나가도록. 처분은 내가 직접 내리도록 하지.”
“전하!”
마리안이 배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요제프에게 대항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네.”
마리엘라가 붉게 달아오른 뺨을 감싸며 접견실 밖으로 나갔다. 문밖에서 발표를 기다리고 있던 데이지가 그런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괜찮아요?”
“별 것 아니에요. 그나저나 축하해요, 이브노말 남작 영애. 영애께서는 이제 왕자비의 전속시녀가 되셨어요.”
손자국이 나 있는 한쪽 뺨과 무덤덤한 표정. 어느 것으로 보아도 축하에 어울리는 상황은 아니었다.
“네?”
“놀라는 척은 그쯤 해두세요. 내가 소포를 보냈다는 걸 잘 알고 있잖아요?”
마리엘라의 단호함에 데이지는 민망한 듯 볼을 긁었다.
“그렇죠.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원래 하녀들의 대화법은 이런가요?”
데이지는 왕자비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왕자비의 하녀에게 최대한 살갑게 굴었다. 그러나 그 하녀는 데이지의 친절함에는 관심도 없었다.
마리엘라가 진지한 얼굴로 데이지에게 충고했다.
“왕자비가 당신을 뽑도록 도운 건 그때의 은혜를 갚기 위함이 아니에요. 당신의 빠른 상황판단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에요.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
“알던 사이도 아닌 왕자비에게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하란 말은 하지 않겠어요. 다만, 어느 쪽이 승리할지 판을 잘 보고 줄을 서세요.”
그 말을 끝으로 마리엘라는 인사치레도 하지 않고 등을 보이며 사라졌다.
데이지는 넋 놓고 그녀가 떠난 곳을 바라보았다.
순간적이었지만, 평민 출신인 게 분명한 하녀에게 공작 영애에게서도 못 본 위엄을 엿보았다. 마리안 왕자비가 보통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그녀의 눈에 왕자비의 하녀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 * *
“요제프!”
율리안이 요제프의 집무실에 들이닥쳤다. 그는 매우 짜증이 난 것처럼 보였다.
그의 뒤를 낯이 익숙한 하녀 하나가 따랐다. 마리엘라였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서류를 처리하고 있던 요제프는 자신의 친우를 반갑게 맞았다.
“율리안, 대낮부터 활기가 넘쳐 보이네. 아주 바람직해.”
“지금 내가 우정이나 다지려고 온 게 아닌 건 알지?”
“모르겠는데.”
“대체 저 아일 왜 내게 붙였지?”
율리안이 마리엘라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왕자비의 전속 하녀직에서는 쫓겨났지만, 왕성의 봉급을 받는 하녀인 이상 직책을 갖고 일을 해야만 했다. 요제프는 하녀장을 시켜 그녀가 율리안의 전속 하녀가 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 율리안이 잔뜩 짜증이 난 것이다.
요제프는 율리안의 손끝을 따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부로 율리안의 직속 하녀가 된 마리엘라는 양손을 가지런히 배꼽 위에 붙이고 몸가짐이 단정한 하녀를 연기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지만, 그럴 수가 없어 입꼬리만 몇 번 씰룩거리고 말았다.
“호트너 부인과 일이 좀 있었어.”
“그건 네 선에서 해결했어야지!”
“내 손에서 벗어나는 일이어서 말이야. 조금 이해해줘, 친구.”
요제프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휙 틀었다.
“항상 이럴 때만 친구라지.”
“그럼 어떻게 해. 이 왕성에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는데.”
“…….”
“율리안, 왕성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는 너도 잘 알 거야. 나와 마리안을 제외하고 그녀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그래서 무례한 걸 알면서도 이런 결정을 내린 거야. 날 생각해서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
요제프는 가련한 똥강아지처럼 굴었다. 그의 말을 들은 율리안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율리안은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한 이들에게 유독 마음이 약한 모양이었다.
“……당분간만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사라졌다.
마리엘라는 그를 따라가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왕자는 시선을 다시 서류로 옮기고 마리엘라를 향해 저리 가라는 손짓을 했다.
“안 가고 뭐해? 네가 모시는 바이르 공작이 저쪽으로 가버렸잖아.”
슬쩍 올라간 장난스러운 입꼬리는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금 저랑 장난하세요?”
마리엘라가 원망이 담긴 눈빛을 보냈다. 그녀 역시 율리안 못지않게 이 처분이 불만족스러웠다.
“짐승만도 못한 것들이 득실거리는 왕성에서 안전하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전의 그늘 속에 머무는 것이 제일이지. 그러니 마리엘라, 투덜대지 말고 율리안의 시야 밖을 벗어나지 마. 나는 네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이니까.”
“이참에 공작부인 자리나 한번 노려봐야겠네요.”
그녀가 어마어마한 선전포고를 했다. 뱉은 말의 내용과는 다르게 표정은 무미건조했다.
요제프는 마리엘라가 그냥 하는 말인 것을 알면서도 날을 세워 반응했다.
“할 수 있으면 한번 해보든지. 그가 눈이 멀지 않는 이상은 어려울걸.”
도발의 탈을 쓴 경계.
그 모습에 마리엘라가 픽 웃었다.
“혹시 모르죠. 사랑은 멀쩡한 사람도 장님으로 만드니까.”
그녀는 일부러 요제프의 신경을 박박 긁은 뒤 자리를 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소소하고도 효율적인 복수였다.
* * *
율리안 폰 바이르는 3차 성마전쟁 때 멸문 직전까지 갔던 바이르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다.
그의 본가인 바이르 성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그는 주로 왕성 룩센투크의 서쪽 별관에 머물렀다.
그가 왕성 서쪽 별관에 머무는 이유는 교황 로베르토 가르뎅 때문이었다.
로베르토는 대륙의 유일한 소드마스터인 율리안을 특히 아꼈다. 부모를 잃은 그를 거두어 키우기까지 했다.
평소에도 자애롭기로 유명한 교황이었지만 그가 직접 아버지처럼 아이를 기른 것은 율리안이 유일했다.
그는 율리안에게 애착을 두고 교단 내에 율리안에게 걸맞는 자리를 만들어 주려고 노력했다. 그런 교황이 제일 경계하는 것은 율리안이 세속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길러낸 어린 사슴이 세상에 있는 여러 욕망들 때문에 신성한 의무를 저버리는 것을 걱정했고, 충성심이 높고 순종적인 율리안은 양아버지 같은 교황의 우려를 잠재우려 노력했다.
그가 작위와 성, 영지를 가지고 있는 어엿한 귀족이었음에도 한 번도 그것을 앞세우거나 드러내 정치에 끼어들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본가인 바이르 성에 들어가 살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는 교황이 있을 때는 교황청에서, 교황이 자리를 비울 때는 룩센투크의 서쪽 별관에 머물면서 율리안가를 서서히 잊어갔다.
왕성의 하녀인 마리엘라의 임무는 그가 별관에 머물 때 시중을 드는 것이다.
그녀가 요제프의 명으로 율리안의 직속 하녀가 된 지 사흘이 지났다.
그녀는 요즘 왕자가 자신을 율리안의 전속 하녀로 붙인 것은, 자신의 일을 방해하려는 속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무슨 객식구가 집주인보다 바빠?’
쉴 틈 없이 공작을 졸졸 따라다니던 그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는 하루 이십사 시간을 계획표로 꽉 채워놓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 계획표에는 일말의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새벽 다섯 시 기상. 다섯 시 반까지 나갈 채비를 하고, 여섯 시가 되면 예배당에 가서 두 시간 동안 아침 기도를 드리고 교황청 관련 업무를 서면으로 본 뒤, 여덟 시에 아침 식사, 그 직후 연무장에 가서 무술 수련, 점심 식사는 연무장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로 채운 뒤, 다시 수련. 세 시나 네 시쯤 되면 요제프 왕자를 찾아나 국내외 이런저런 사항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하고, 시내에 나가 독서클럽 방문, 해지기 전에 다시 왕성으로 돌아와 수련, 해가 지면 별관으로 돌아와 저녁 식사, 식사가 끝나면 목욕재계를 하고 독서, 잠들기 전에 깊은 기도를 드린 뒤 바로 취침.
마리엘라가 삼 일간 지켜본 그의 일과는 대충 이러했다.
‘정보 수집은 개뿔.’
하루를 정말 알차게 살아가는 율리안 공작 덕분에 그의 전속 하녀 마리엘라는 왕성의 사용인들과 친해지기는커녕, 그들의 뒷담화조차 엿들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호트너 부인을 자극해 뺨을 맞은 보람이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일터를 바꾸고 싶었다. 고되다고 소문난 뒷간 청소 일도 자신 있었다.
그녀는 문제를 일으켜 이곳에서도 쫓겨나는 건 어떨까 궁리하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요제프가 그런 것을 허락해 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처음 마리안의 품을 벗어날 계획을 그에게 제안했을 때, 요제프는 딱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안전한 범위 안에서만 놀 것.
마리엘라는 행동반경에 제한을 주는 왕자가 갑갑했지만, 너무나도 진지하고 엄중한 상대방의 태도 때문에 감히 불만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정말 미쳐 버리겠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한숨만 푹푹 쉬었다. 마리안의 곁에 있는 편이 더 자유로웠을지도 몰랐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눈 똑바로 떠. 난 요제프가 아니다. 그 정도 뻔한 술수에 넘어가지 않아.”
“제가요?”
그녀가 율리안의 전속 하녀로 배정된 첫날이었다. 새벽 예배 직후, 마리엘라가 미처 다 쫓아내지 못한 잠 때문에 살짝 풀려있는 눈을 하고 있자 율리안이 차갑게 한마디 했다.
마리엘라는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그의 헛소리를 철저히 무시할까 하다가 곧 마음을 바꿔먹었다. 지금이야말로 요제프의 진심을 캐볼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능글거리는 태도 때문에 도통 요제프를 믿을 수가 없으니, 그의 오랜 친구를 이용해야겠다.
“저와 요제프 전하와의 사이에 대해 오해하고 계시는 게 많으신 것 같군요.”
“오해?”
뻔뻔한 그녀의 태도에 율리안이 옅게 인상을 찌푸렸다.
“저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아는 것 하나 없이 상경한 어리석은 하녀를 마음씨 넓으신 요제프 왕자 전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시는 것뿐.”
“말도 안 되는 소리. 요제프가 하녀 한 명을 보호하기 위해 날 이용하는 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여태까지는 그런 적이 없었나요?”
“키워준 유모가 눈앞에서 죽어도 그냥 그러려니 했을걸.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서 내게 도움을 요청한 것은 네가 유일해.”
“……그렇군요.”
마리엘라는 눈을 내리깔았다. 긴가민가했던 진심이 점점 확연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생각했던 것만큼 통쾌하지가 않았다.
가슴 속에 돌덩이가 얹힌 것 같은 느낌.
‘요제프가 나를, 진심으로…….’
마리엘라는 마음의 무게를 통감하는 중이었다.
* * *
마리엘라는 그녀를 요망한 여우로 보는 율리안의 시선이 며칠이 지나면 수그러들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가 그에게 관심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이 드러나면 그의 날 선 태도도 사라질 것이라고.
그러나 그 판단은 잘못되었다. 율리안의 경계는 날이 갈수록 더더욱 심해졌다. 그는 매 순간, 그녀의 모든 행동에서 사악하고 음탕한 본심을 찾아내려고 했다.
마리엘라는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일단 참았다.
그렇게 사흘이 흘렀다. 겨우 삼 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24시간을 꽉꽉 채워 살아가는 바른 생활 사나이의 집요한 경계는 괄시에 익숙했던 이십 년 차 하녀도 질리게 했다.
이제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가 ‘무엇’을 포기했느냐는 것이었다.
“자꾸 그런 식으로 요사스럽게 구는데-”
“정말 사람 미쳐 버리게 하는 재능이 있으시네요, 공작 각하.”
“뭐?”
마리엘라는 평범한 하녀의 탈을 쓰고 생활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어차피 율리안은 요제프의 사람이다.
신의를 제1의 가치로 두는 대쪽 같은 성정의 공작은 그녀가 무슨 무례한 반응을 보여도 요제프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 탈선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 연무장 구석진 곳.
주변을 살펴 오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마리엘라는 작은 목소리로 율리안에게 쏘아댔다.
“요제프 전하랑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골백번도 말했을 텐데요. 백번 양보해서, 각하의 말 대로 제가 왕자 전하를 꾀었다고 칩시다. 그럼 도대체 제가 각하를 왜 꾀어야 하죠? 신분으로 보나 뭐로 보나 왕자 전하보다 공작 각하가 나으신 점이 없는데요. 아 설마…….”
그녀가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율리안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본인의 얼굴과 피지컬이 남들보다 훨씬 낫다, 그래서 여자들이 왕자보다는 나를 선택할 것이다, 뭐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은……?”
율리안이 팔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뒷걸음질 쳤다.
당황한 기색이 물씬 풍겼다.
“주제를 모르고 마구잡이로 떠들어 대는군.”
“귀가 붉어지셨어요. 바이르 공작 각하.”
마리엘라의 말에 그가 얼른 귀를 가렸다.
“넌 너무 건방져. 하녀 주제에 무례하다. 호트너 부인이 쫓아낸 것도 이해가 간다.”
딱딱하고 사무적인 어조였으나 붉어진 귀를 양손으로 가리고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살짝 귀엽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감상이었을 뿐, 그녀의 거침없는 행보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뭘 어쩌겠어요. 이게 다 공작 각하의 절친한 친구이신 요제프 전하께서 손수 길러놓으신 담력인걸요. 그리고 말 돌리지 마세요. 제가 또 말꼬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잡습니다.”
그 분야의 달인 밑에서 십몇 년을 수행한 몸이라.
덧붙이는 말에 율리안이 한 발자국 더 멀어졌다. 그는 무시무시한 것을 목격한 일곱 살짜리 남자아이처럼, 털을 잔뜩 세우고 그녀를 두려워했다.
마리엘라는 그런 그에게 다가가 쐐기를 박았다.
“앞으로 한 번만 더 저와 요제프 전하 사이를 입 밖으로 내신다면 저도 같은 짓을 하겠어요.”
“……같은 짓?”
“공작께서 주야장천 입에 담으셨던 짓.”
율리안은 그 말에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마치 도망치듯이 연무장으로 재빠르게 향했을 뿐이다.
그의 뒷모습이 묘하게 긴장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마리엘라만의 착각은 아니었다.
* * *
룩센투크의 제1연무장은 율리안을 동경하는 기사들의 인기 모임 장소였다. 기사들은 훈련을 핑계로 율리안을 힐끔힐끔 곁눈질했다.
검은 머리를 하나로 높게 묶고, 정갈한 자세로 진지하게 검을 휘두르는 율리안의 모습은 그 어떤 예술 작품보다 경이로웠다.
검을 한 번이라도 잡은 적이 있는 무인들에게 율리안은 살아있는 전설이자 기사의 정도였다. 기사들은 공작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들은 배우에게 꽃다발을 보내는 관객처럼 율리안에게 열광했다.
쓸데없이 남들 앞에서 검기를 드러내지 않는 담백한 모습이 그들의 마음속에 율리안을 향한 존경심을 키워냈다.
그런 그들에게 거슬리는 존재가 하나 생겼다.
“과도한 신체 접촉은 좀 피해주었으면 하는데.”
“물 한잔 건넨 것뿐인데요. 그런 걸 하나하나 계산할 수는 없어요, 공작님.”
마리엘라 호반.
소문으로는 왕자비가 친가에서부터 직접 데리고 온 하녀라는데, 문제가 생겨 공작에게 배치되었다고 했다.
기사들에게 마리엘라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감히 일개 하녀 따위가 존경하는 공작님 옆에 종일 붙어 다니는 것도 얄미워 죽겠는데,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사사건건 말대꾸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게 진짜 건방지게.”
그중 그녀를 가장 고까워하는 것은 검은 늑대 기사단의 기사들이었다.
검은 늑대 기사단은 원래 전쟁이 벌어졌을 때, 선두에 서곤 했던 섰던 최정예 기사단이었으나, 현재는 고위 귀족 자제들의 이름을 드높여 주는 명예직 정도로 여겨진다.
그들은 자신이 기사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품었으며 그 중심에는 베르단의 자랑스러운 소드마스터 율리안이 있었다.
“본때를 보여줘야겠어.”
오합지졸들은 자신의 자부심을 건든 하녀에게 칼을 갈았다.
그러나 율리안의 앞에서 그의 직속 하녀를 건드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들은 율리안이 훈련을 끝내고 씻으러 들어갈 때를 노리기로 했다.
“이봐.”
며칠을 숨죽여 기다린 끝에 드디어 기회가 왔다.
율리안이 몸을 씻으러 떠난 자리. 율리안의 광신도였던 검은 늑대 기사단의 기사 몇이 연무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리엘라를 불렀다.
“…….”
마리엘라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그들의 부름을 무시했다.
그러자 그들이 한 발 더 나갔다. 벌벌 떨 줄 알았던 하녀의 고고한 태도에 울컥 화가 난 것이다.
그들이 마리엘라를 둘러쌌다. 뒷골목 시정잡배 같은, 껄렁한 분위기가 가득 풍겨 나오는 몸짓이었다.
“이게 우리말을 무시하네?”
‘성가셔 죽겠네, 진짜.’
마리엘라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린 후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하고 겁 많은 하녀의 얼굴을 했다.
“저 말씀이신가요? 저는 바이르 공작님의 하녀인데, 왜 절 부르시는지…….”
“무슨 이유겠어?”
“저는 오늘 나리들을 처음 뵌 터라 무슨 연유인지 도통 짐작이 가질…… 꺅!”
누군가가 그녀의 머리채를 잡았다.
마리엘라는 연약한 소녀처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물론 전부 연기였다.
이래봬도 백작가에서 구를 만큼 구른 인생이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기사들의 위협이 전혀 무섭지 않았지만, 일단 무서운 척을 해줬다. 처음부터 피해자의 위치에 서야 뒷수습이 쉬웠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어떻게 끝낼까. 몇 대 맞고 철저한 피해자가 될까, 아니면 여기서부터 반격에 나서서 저들이 찍소리도 못하게 밟아줄까.
그 두 개를 적당히 섞는 방법도 있었다. 그녀가 속으로 반격의 강도를 조정하고 있을 때,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비켜.”
율리안의 목소리였다.
그를 발견한 기사들이 허겁지겁 양쪽으로 갈라섰다.
“바이르 공작 각하!”
“저희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 하녀에게 예의를 가르쳐 주려고…….”
그들은 앞다투어 변명을 해댔으나, 공작의 관심사는 그것에 있지 않았다.
율리안의 싸늘한 눈이 마리엘라의 머리채를 잡은 무뢰한의 거친 손 위를 머물렀다.
“손.”
그 말에 남자가 서둘러 하녀의 머리를 잡았던 손을 뒤로 숨겼다.
적막이 그들 사이를 감돌았다.
율리안은 한쪽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누가 그대들에게 내 하녀를 훈계할 권한을 주었지?”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 기사들이 우물쭈물했다.
“그것이…….”
그는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경고를 날렸다.
“나는 선을 넘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데.”
“알고 있습니다.”
기사들이 바짝 긴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율리안은 마리엘라를 자신의 등 뒤로 끌어당긴 후, 탐탁지 않다는 눈길로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이유를 불문하고, 한 번만 더 이런 소란을 일으키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리고 다시는 기사들이 이런 못된 장난을 치지 않도록 단단히 못을 박고 자리를 떴다.
공작은 화가 잔뜩 난 사람처럼 성큼성큼 걸었다.
그녀는 그를 따라 바삐 발을 옮기면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샤워를 끝내고 제대로 말리지 않아 촉촉이 젖은 기다란 머리카락. 가닥가닥 뭉친 검은 머리카락이 흑요석처럼 고고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돌연 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율리안이 뒤를 휙 돌아 그녀를 보았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있으면 무조건 나를 불러.”
혼내는 듯한 어조였다.
마리엘라는 그의 화가 난 눈동자를 덤덤히 바라보며 대꾸했다.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었어요.”
“그랬겠지.”
그러나 전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앞으로는 도와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난 네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 너는 내 아랫사람이고, 나는 네 윗사람이니까.”
살짝 웃음이 나왔다. 그가 조금 귀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정말 성격 파악하기 쉬운 사람이었다.
규칙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람.
마리엘라는 미소를 띠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책임감이 과하시네요.”
“나는 요제프의 하나뿐인 친우니까.”
“?”
그녀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율리안은 부끄럽다는 듯 다시 몸을 훽 하고 틀더니 말을 이었다.
“심심풀이인지 아닌지는 아직 잘 모르지만, 요제프가 널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것쯤은 알아. 내 친구의 유일한 숨통일지도 모르는 여자를 죽게 만들 수는 없지.”
“……죽을 만큼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는데요.”
“아무튼.”
드러난 율리안의 귀가 붉었다. 아무래도 율리안은 세간에 퍼진 냉철하고 차가운 이미지와는 다르게 감정을 잘 못 숨기는 타입인 것 같았다.
“풀어야 할 오해가 많긴 하지만, 이대로도 나쁘진 않네요.”
“뭐?”
“각하를 모시게 되어서 영광이라고요.”
마리엘라가 싱긋 웃었다.
* * *
마리엘라가 바쁜 것은 그녀가 모시는 율리안이 융통성 없는 바른 생활 사나이여서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일과를 끝내고, 자신의 방에 있는 비밀 통로를 사용해 요제프의 침실을 방문했다. 새로 얻은 정보를 교환하고, 그녀가 여태까지 무지했던 정치, 역사, 경제에 관한 수업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요제프의 반응이 이상하다.
“할 말 없어?”
“없어요.”
“있을 텐데.”
요제프의 시선이 집요했다. 꼭 그녀가 감춰둔 진실을 수색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마리엘라는 책을 필사하다 말고 한숨을 푹 쉬었다.
“연무장 일로 그러세요?”
“원한다면 그놈들 손목을 잘라줄게. 물론 수습은 잘해 놓을 테니 의심받을 염려는 놓고.”
그 말을 듣고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리엘라는 요제프가 왜 갑자기 이렇게 돌변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 것 같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목적은 하루빨리 이 거지 같은 곳을 탈출하는 것뿐이었다. 같은 남자와 두 번 사랑에 빠지는 우를 범하고 싶지 않았다.
“쓸데없는 데 힘쓰지 마세요. 제가 그러려고 율리안 공작의 하녀가 된 건 아니잖아요.”
“맞아. 그러려고 간 건 아니지.”
팔짱을 낀 요제프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건 또 무슨 흐름인가 싶어 그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기억해, 마리엘라. 네가 그곳에 있는 이유는 율리안이 아니라 나 때문이라는 걸. 너는 날 구하기 위해 그곳에 숨어든 거잖아?”
마리엘라가 대놓고 왕자를 비웃으며 말했다.
“비약이 굉장하시네요.”
“내 자신감의 원천이지.”
“자, 그럼 책 펴고 다시 수업 들어갑시다.”
이제 왕자의 모든 언행이 익숙해진 마리엘라는 그의 말에 감정적으로 휘말리지 않았다. 그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수업을 재촉했다.
* * *
연무장, 마리엘라는 그늘에 서서 기사들의 훈련을 가만히 구경했다.
기사들은 기합을 외치며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많은 수의 젊은 남자들을 보는 건 처음이라는 생각을 했다.
라산 사냥터에는 낯짝 두꺼운 중장년의 남자 귀족들이 득실거렸다. 왕성 회의장을 들락날락하는 귀족들도 대부분 나이가 있었다.
‘일 년 전이였다면 어떻게든 저 중 하나를 낚아채려고 머리를 굴렸을 텐데.’
그녀가 별 감흥 없는 얼굴을 하고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을 때, 율리안이 다가왔다.
그의 턱 끝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검을 들고 온 것을 보니 훈련을 끝마친 것 같았다. 그녀는 들고 있던 옷가지와 물통을 그에게 건넸다.
“오늘은 좀 일찍 끝내시네요.”
율리안이 마리엘라가 건넨 것을 받아 들며 다소 퉁명스러운 투로 말했다.
“자리를 비운 동안 누가 네게 해코지하면 바로 날 불러.”
“어느 누가 각하의 명을 무시하겠어요.”
그는 대답 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태평하게 고개를 돌려 다시 기사들을 구경했다.
연무장 사태 이후, 율리안과 마리엘라의 관계는 조금 호전되었다. 대화를 나눌 정도로 살가운 사이까지 발전한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쓸데없는 날을 세우지 않는 사이 정도는 되었다.
율리안의 대쪽 같은 성정을 생각해 본다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녀는 그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일을 정석대로 끝내려 하는 그 쓸데없는 아집을 좀 버린다면.
독서클럽이 위치한 시내로 향하는 마차 안, 마리엘라는 나긋나긋한 음성 속에 짜증을 가득 실어 율리안에게 말했다.
“공작 각하, 모르셨을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 제 진짜 직책은 서쪽 별관을 담당하는 것이랍니다.”
율리안은 요제프가 내려준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마리엘라를 보호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그녀를 끼고 살려고 했다.
그것은 연무장 사태가 벌어진 후 더욱 심해졌다. 조금이라도 여유 시간을 만들어 사용인들과 친해져야 하는 마리엘라의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율리안이 책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그래서?”
“제가 꼭 여기까지 따라다닐 필요는 없는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요.”
“생쥐처럼 별관을 들쑤시고 다니게 두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한다.”
마리엘라는 가끔 궁금했다. 도대체 저 공작님에게 자신의 이미지는 뭘까. 구제 불능의 말괄량이 취급은 처음이라 어이가 없었다.
그녀가 그를 빤히 바라보자, 시선을 느낀 율리안이 읽던 책을 덮었다.
“너의 모든 것은 내 소관이야. 요제프가 내게 널 맡겼으니 나는 널 성심성의껏 돌봐줄 의무가 있어.”
그녀는 억지로 눈을 접고 입꼬리를 올려 싱긋 웃었다.
“그럼요.”
‘어련하시겠어요.’
그리고 티 나지 않게 눈을 흘겼다.
본성은 참 착하고 순한 것 같다만, 이래저래 답답한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 * *
밤이 되었다. 마리엘라는 평소처럼 요제프의 처소에 가서 그에게서 이런저런 것들을 배웠다.
“요즘 정세는 어떠하죠?”
“우리가 예상하는 그대로지. 재상과 대관식 문제로 각자 날을 세우고 있어. 다들 초조할 만하지. 세력은 비슷해졌고, 교황이 돌아올 날은 멀지 않았으니까.”
“교황은 왕가의 손을 들어주시겠죠?”
“관행대로라면.”
“쓸데없는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납득이 안 가는 게 하나 있어요. 왜 교황이 있어야만 대관식을 진행할 수 있죠? 다른 나라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증조부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지. 베르단이 유난인 것 같긴 하지만 정치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교황과 대관식을 엮으면 자연스럽게 흑마법사들을 견제할 수 있으니까.”
마리엘라는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두어 번 잘게 끄덕였다.
요제프가 턱을 괴고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시선이 불편했던 그녀는 퉁명스럽게 굴었다.
“뭘 봐요.”
틱틱거리는 어조에 요제프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면 좋아. 우리 아가씨는 끝에 ‘요’자만 붙이면 공손한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큰일이야.”
몇 주 전이였다면, 위협적으로 느꼈을 그 말에 그녀는 뻔뻔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마저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은 대우라고 생각하는 터라.”
“이 나라의 유일한 왕자를 이겨 먹기까지 하다니, 정말 깜찍도 해라.”
“헛소리는 여기까지.”
더 장난을 쳤다간 선을 넘을 것 같았다.
지난번 진솔한 대화 이후 그녀 안에서 요제프의 이미지가 변화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마리엘라는 요제프에게 벽을 쳤다.
요제프는 굳이 그 벽을 깨부수거나 넘으려 하지 않았다. 말없이 그녀를 계속 바라보다가 나긋한 목소리로 대화의 새 주제를 끄집어냈다.
“있는 거라고는 넓은 숲뿐인 백작가에서 너 같은 하녀가 나왔을까. 안목도 있고, 어려운 문장도 금방금방 이해하고.”
요제프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마리엘라는 칭찬에 약한 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현실과 몽상을 엄격히 구분 지을 수 있고, 자신의 위치와 능력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얼굴색 하나 안 바꾸고 칭찬을 받아들였다.
“과찬이시네요. 원래 이 정도는 다들 해요. 전하께서 저만큼 친분을 지닌 하녀가 없으셔서 모르고 계셨을 뿐이에요.”
“음악은 좀 아나?”
“곁다리로 들은 것이 있어 분간은 할 줄 알아요.”
“연주는?”
“…….”
마리엘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의도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엿보고 싶지 않아도 엿보이는 본심이 불편했다.
요제프는 그녀가 왜 갑자기 침묵했는지 이유를 뻔히 알면서도 옆에서 계속 채근했다.
“악기를 연주하는 법도 익혔어?”
“요제프 전하. 까먹으신 것 같아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리자면, 저는 그냥 백작가의 일개 하녀였답니다. 혼자서 익힐 수 있는 것은 뭐든 할 수 있도록 노력했지만, 악기 연주같이 누군가가 가르쳐 줘야 하는 것은 하나도 하지 못해요.”
“내가 가르쳐 줄게.”
“정중히 사양할게요.”
“왜?”
“저는 왕성을 떠나려고 여기 있는 거지, 왕성에 자리 잡으려고 이러고 있는 게 아니랍니다. 이것도 잊으신 것 같아서 한 번 더 말씀드리는 거예요.”
다소 쌀쌀맞은 그녀의 말에 요제프가 방긋 웃었다.
“내 속이 너무 검었나?”
“너무 쉬웠죠.”
음악은 고귀한 사람들이 저들끼리 향유하는 문화였다. 귀족들은 음악을 모르는 사람을 무리에 끼워주려 하지 않았다. 사교계에 데뷔할 나이의 귀족이라면 악기 하나쯤은 능숙하게 연주할 수 있어야 했다.
악기 연주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말은 귀족 문화에 편승할 준비를 하라는 말과 같았다. 그래서 그녀가 그렇게 차갑게 굴었던 것이다.
요제프는 마리엘라를 자신과 비슷한 위치로 끌어올릴 생각을 하고 있다.
“…….”
그녀는 애써 왕자의 시선을 모르는 척했다. 그런데도 속으로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마리안이 유폐에서 풀려났던 그날 밤, 그날 새벽에 요제프를 찾아가 진심을 물어보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강하게 들었다.
* * *
며칠이 지난 저녁이었다.
율리안은 교단과 관련된 서류를 작성 중이었고, 마리엘라는 율리안 곁에서 요제프가 숙제로 내준 책을 읽고 있었다.
율리안은 그녀를 자신의 시야 안에 두기를 고집했지만, 그것만 지키면 나머지는 자유롭게 내버려 두는 편이었다. 덕분에 마리엘라는 틈날 때마다 책을 읽곤 했다.
오늘따라 읽고 정리해야 할 분량이 많았다. 그래서 늦은 시간까지 율리안의 처소에 머물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녀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서랍에서 엄청난 양의 초를 꺼냈다. 그러고는 꺼내놓은 초에 모두 불을 붙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방안이 낮처럼 환했다.
“?”
마리엘라는 이게 뭔가 싶어 책을 품에 안은 채로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율리안은 이 상황이 익숙한지 태연히 교단에서 온 편지나 읽고 있었다.
“안 가나?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율리안이 다소 까칠한 태도로 그녀를 쫓아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이 뭘 잘못했나 싶어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심기를 거슬릴 만한 일이 없었다.
‘뭐야.’
마리엘라는 쾅 닫힌 문을 보며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곧 한마디 변명도 하지 못하고 순순히 율리안의 처소를 빠져나온 것을 후회했다. 너무 급히 나온 바람에 책 한 권을 놓고 온 것이다.
* * *
“나는 좀 궁금해지네.”
덕분에 그녀는 듣지 않아도 될 핀잔을 듣게 되었다.
“공부가 하기 싫었던 걸까, 내어준 숙제를 못 한 게 부끄러웠던 걸까. 우리 마리 아가씨의 속내는 도통 알 수가 없으니 물어보는 수밖에.”
마리엘라는 방실방실 웃고 있는 요제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핀잔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핀잔을 핑계로 장난을 걸어 마음의 거리를 좁히려는 그의 시도가 거북했다.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깜박하고 별관에 놓고 온 건데 그게 이렇게까지 대역죄인 줄은 미처 몰랐네요. 돌아가서 가지고 올까요?”
“아니야. 그냥 한 말이니까 여기에 있어.”
요제프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졸지에 그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죠?”
“그냥, 궁금하게 생겨서. 오늘은 일적인 이야기 그만하고 사적인 대화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 내가 그 정도는 바라도 되잖아. 그치?”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마리엘라는 뒤에 덧붙여진 말을 듣고 다시 앉았다.
그녀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요제프의 양보가 컸던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궁금한 게 뭔데요?”
“그날. 가족이 다 죽은 그날 말이야. 너는 그때 울었어?”
“울 수 없었어요.”
무덤덤한 어조였다.
요제프는 고개를 돌려 마리엘라의 옆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지나치게 평온해 보였다. 감정을 숨기려고 날카로워지지도 않았고, 반대로 터져 나오는 감정을 어쩌지 못해 물기에 젖지도 않았다.
“울고 싶었겠구나.”
“…….”
그의 위로에 마리엘라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들고 온 램프를 들었다. 요제프가 그녀를 잡았지만, 그녀는 그 손마저 뿌리쳤다.
“어디가?”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놓고 온 책, 가지고 올게요.”
마리엘라는 다급하게 왕자의 처소를 빠져나갔다.
* * *
끼이익.
마리엘라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율리안의 처소 문을 열었다. 그녀의 한 손에는 램프가 들려있었다.
그녀는 램프의 불빛이 너무 밝아 율리안을 깨우지 않도록 소맷자락으로 표면을 덮어 빛을 차단했다. 발뒤꿈치를 세우고 앞발로만 살금살금 걸었다.
바닥을 살피며 주위를 살피니, 테이블 근처에 책 한 권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어 들고는 몸을 틀었다.
그때였다.
어딘가에서 쌕쌕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그녀 자신의 숨소리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뭐지?’
마리엘라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색의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는 곳. 저 너머에는 율리안의 침실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곳을 바라보았다.
소리가 점점 심해진다.
그녀는 조심스레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침대 근처 바닥에 엎드려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남자의 인영이 보였다. 마리엘라는 램프를 들어 남자의 정체를 확인했고, 곧 그를 향해 달려 나갔다.
“세상에, 공작 각하!”
율리안이 가슴을 부여잡고 헐떡이고 있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공작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공작님, 괜찮으세요?”
그는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집요하게 램프 불빛만을 쫓는다. 그러나 그것은 난데없는 상황에 직면한 그녀가 바로 알아볼 수 있는 신호가 아니었다.
마리엘라가 숨을 못 쉬고 헐떡이는 그의 상체를 일으켜 가볍게 품에 안았다. 어머니가 울고 있는 아이를 안 듯,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쉬이.”
그녀는 그의 등을 토닥이며 과거, 제이 도련님이 제게 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그를 진정시켰다.
“진정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진정하시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려고 노력해보세요.”
자신을 따라 하라는 듯,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시늉을 했다.
처음에는 어쩔 줄 모르고 바르작거리던 공작이 천천히 그녀의 호흡을 따라갔다. 그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눈으로 마리엘라를 올려다보며 그녀의 입 모양을 쫓으려 애썼다.
그 모습에 마리엘라는 낯선 감정을 느꼈다. 그녀가 애정을 가지거나 느꼈던 두 대상, 마리안과 제이 도련님과는 또 다른 빛깔과 결을 가진 감정이었다.
‘그날 그가 이런 심정이었을까.’
그녀는 율리안을 다독이면서 요제프 생각을 했다.
율리안의 다급하고 애절한 시선은 마치 어미를 잃은 아기 새 같았다. 새초롬하게 올라간 눈매 속 처연한 눈동자.
요제프가 사람을 홀리는 눈빛을 가졌다면, 율리안은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눈동자를 가졌다.
그녀가 그의 눈에 빠져들어 그를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을 때, 율리안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초를…….”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너무 작은 목소리라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네?”
그녀가 뒤늦게 귀를 기울였지만 더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의 숨이 다시 거칠어진다.
마리엘라는 율리안의 촉촉한 눈이 어딘가를 간절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램프?’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율리안은 밤에 제 방을 양초로 가득 채울 정도로 어둠을 싫어했다. 그녀는 방 안의 수많은 양초가 전부 꺼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녀는 후다닥 일어나 초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방 안이 밝아질수록 율리안의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모든 초에 촛불을 붙이고 돌아오니, 율리안이 민망한 표정으로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아마도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율리안이 뒤돌아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표정을 갈무리한 뒤 말했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지?”
“놓고 온 것이 있어 들렸어요.”
그녀는 일부러 그 뒤의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딱히 그를 배려하고자 한 행동은 아니었다. 경험상, 이런 일은 모르는 척해야 화를 입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흐트러진 침구를 정리했다.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이제 그만 주무세요.”
“…….”
이불을 덮고 침대 위에 앉은 공작이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무언가 망설이는 듯한, 겁에 질린 것을 애써 감추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마리엘라는 침실과 생활공간을 분리해놓은 커튼을 거뒀다. 방안 이곳저곳에 놓인 초에 불을 붙인 뒤,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저는 읽어야 할 책이 많아 다 읽고 가겠습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는 글자를 억지로 읽었다.
요제프가 처소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강하게 압박했지만 율리안의 그렁그렁한 눈동자가 눈에 밟혀 차마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그날, 그녀는 해가 밝을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 * *
대부분의 귀족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 그들은 평민들처럼 일할 시간이 부족해 아침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을뿐더러, 상류층들의 유흥거리인 무도회, 카드게임, 도박 등을 주로 밤에 즐기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아침은 가끔 눈이 일찍 떠졌을 때 먹는 별식이었다.
‘율리안도 그랬으면 좋았건만.’
이른 아침, 의도치 않게 독서로 밤을 새운 마리엘라는 뻑뻑한 눈으로 식사를 하는 율리안의 옆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공작은 어깨와 허리를 펴고, 바른 자세로 식사 중이다.
‘피곤해 죽겠네.’
그녀는 차오르는 하품을 겨우겨우 억누르며 다시는 동정심으로 쓸데없는 일을 벌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고요한 아침 식사가 끝났다. 율리안이 포크를 내려놓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그릇을 치웠다.
마리엘라는 그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식사 다 끝내셨어요?”
그 말을 듣고 율리안은 단박에 표정을 찌푸렸다. 그들의 관계를 생각하면 딱히 이상할 것 없는 모습이었지만, 어제 새벽의 일을 생각한다면 정 없고 쌀쌀맞게 느껴질 반응이었다.
민망할 법도 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대충 예상했던 반응이라 귀엽게 보였다.
원래 프라이드가 높은 사람일수록 남에게 기대는 것을 창피해한다.
그녀는 율리안이 속으로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아까부터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여기에 음식이 좀 튀었어요.”
“아…….”
마리엘라가 자신의 오른쪽 볼을 검지로 톡톡 치면서 말하자, 그가 서둘러 그녀를 따라 제 볼을 닦았다.
그 모습을 보고 마리엘라가 눈을 접어 웃었다.
“아니요, 그 반대쪽.”
그녀의 가벼운 장난에 공작의 귀가 붉어진다. 그는 반대쪽 뺨을 옷소매로 벅벅 닦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방으로 돌아가지.”
“알겠습니다.”
그녀는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 나갔고, 그녀는 그의 뒤를 따랐다.
‘덩치만 컸지 하는 짓은 아이와 다름없어.’
어젯밤 이후로 율리안이 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그가 그녀보다 두 살이나 많았지만, 그녀의 눈에 그는 돌봄이 필요한 어린아이 같았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요제프, 마리안과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제이 도련님을 돌보게 한 힘의 원천은 사랑과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이었다. 마리안 아가씨는 정과 은혜였고.
그런데 율리안은…….
그녀는 그를 뒤따라가다 말고 우뚝 섰다.
그리고 조용히 가슴 정중앙을 꾹 눌렀다. 애달픈 그리움 같은 것이 그녀 안에서 요동쳤다. 율리안은 모성애와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녀는 공작에게 동생의 잔상을 느꼈다.
십삼 년 전 죽은 어린 동생의 작은 손발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감정에 휘말리면 안 돼.’
마리엘라는 자신의 감정에 선을 그었다. 그리고 그것이 선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율리안이 말을 걸었다.
“안 오나?”
“잠깐 넘어질 뻔했을 뿐이에요.”
그녀는 대충 변명하며 서둘러 발을 옮겼다.
‘이곳은 룩센투크니까.’
살아남아 영광을 취하는 자보다 모든 것을 잡아먹히고 죽어가는 자가 많은, 지독한 적자생존의 공간.
이곳을 온전하게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것을 최대한 줄여야 했다.
권력도 뭣도 없는 일개 하녀 마리엘라가 감당할 수 있는 짐은 마리안 왕자비 한 명뿐이었다.
* * *
율리안은 오늘도 어김없이 검술 훈련을 위해 연무장으로 향했다.
마리엘라는 연무장 벽에 등을 기대고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새들을 구경했다.
남정네들의 검술 연습을 구경하는 것도 이제 질렸다. 책이라도 읽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은 곳이라 그럴 수 없었다.
그녀에게 허락된 것은 멍하니 서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것뿐이었다.
‘교황은 언제쯤 베르단 수도로 돌아올까. 그전에 수를 써서 저쪽 우두머리를 끌어내야 하는데……. 요제프도 나름의 계획이 있는 것 같지만, 아직 나한테 모든 것을 내보이지는 않는단 말이지. 나도 무작정 그의 계획에 얹어갈 수는 없는 처지고.’
한참을 궁리하던 중 연무장의 공기가 착 가라앉았다는 것을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훈련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춰서 어린아이처럼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는 공작이 보였다.
율리안은 자신의 손바닥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은 피가 그의 팔뚝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 피부가 계속되는 검술 연습으로 인한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터진 것이다.
마리엘라는 놀라 그에게 달려갔다.
그녀가 그의 손목을 잡자, 율리안이 호들갑 떨지 말라는 듯 태연하게 굴었다.
“흔한 일이다. 신경 쓸 것 없어.”
“아무리 뛰어난 검술사라도 곯은 상처는 이길 수 없어요. 감염되기 전에 약을 발라야겠네요.”
그녀는 약방으로 뛰어가 약을 받아왔다.
쓸데없는 일을 한다고 단박에 내칠 것 같았던 율리안은 잠자코 그녀의 치료를 받았다. 마리엘라는 꼼꼼하게 공작의 손바닥에 약을 바르고 깨끗한 붕대로 그 위를 덮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공작의 손가락이 가늘고 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생 펜만 잡았을 것 같은 예쁜 손가락이 험한 일을 하는 장정 못지않게 우둘투둘하다는 것도.
“굳은살이 많으시네요.”
“일평생 검만 잡았으니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고 있던 율리안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툭 뱉었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 픽 웃으며 붕대를 마저 감았다.
* * *
날이 어두워졌다. 율리안은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고, 마리엘라는 마른행주로 피 묻은 검을 닦고 있었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하녀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그녀들은 신속하게 수십 개의 초를 꺼내고, 익숙하게 불을 붙였다.
마리엘라는 그 모습을 보며 의구심을 느꼈다.
‘저 많은 초가 한 번에 꺼질 수가 있나? 여기는 실내고, 바람이 불어봤자 저것들을 모두 끌 수는 없을 텐데.’
지나친 우연이었다. 그녀는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어느 누가 율리안을 공격한단 말인가. 그를 위협해서 도움이 되는 일이 뭐가 있다고.
율리안은 교황의 숨겨둔 자식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교황과 교단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었다. 3차 성마전쟁의 완승 이후, 교단 바레뎃샤의 입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랐다. 그가 정치에 끼어들지 않고 철저히 중립을 지키는 것은 귀족파뿐만 아니라 국왕파에게도 행운이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시절, 마리엘라는 라산 숲에서 가끔 배가 터져 죽은 뱀을 보곤 했다. 덩치에 맞지 않은 먹이를 집어삼킨 대가였다. 마리엘라는 율리안이 바로 그런 존재라고 생각한다.
몸집이 크고 살코기가 많아 영양가 있고 탐나는 먹잇감.
그런 건 함부로 건들지 않는 게 좋았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배가 터져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이상하단 말이야.’
검을 다 닦은 그녀가 들고 다니는 작은 통에 행주를 집어넣었다.
오늘은 요제프와의 밀회가 없는 날이었다. 그녀는 숙소로 돌아가 부족한 잠을 채울 생각을 했다.
하녀들이 빠진 텅 빈 방. 마리엘라는 공작에게 다가가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각하, 그럼 저는…….”
맡은 일이 끝났으니 인제 그만 쉬러 가겠다는 말을 꺼내려는데, 문제가 생겼다. 고개를 들다가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율리안의 두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물기가 촉촉이 맺힌 공작의 눈동자는 멀쩡한 사람도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
그의 약한 모습과 그가 두려워하는 바를 알고 있는 그녀에게는 더욱 큰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그의 눈빛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말을 하다 말았다.
그의 얼굴 위로 남동생의 얼굴이 겹쳐진다. 십삼 년 전, 동생의 나이는 겨우 일곱 살이었다.
마리엘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색한 변명을 댔다.
“……왕성 봉급이 그렇게 후한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저 같은 하녀는 방을 환히 밝힐 만큼 충분한 초를 사는 것도 벅차니까요.”
율리안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싶었다. 다 집어치우고 냉정하게 뒤돌아 나가고 싶었지만, 이미 꺼내놓은 말이 있어 무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속 말을 이었다.
“컴컴한 방에서 초 하나 켜고 책을 읽으려니 제 눈이 점점 침침해지는 게 느껴지네요. 그런데 오늘은 이곳에서 책을 읽어도 괜찮을까요?”
“…….”
공작은 아무런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마리엘라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도리어 제가 조르고 있는 꼴이 퍽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용히 책만 읽다 갈게요.”
“……그렇게 하도록 해.”
그가 마지못해 승낙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어휴.”
‘큰일이야, 쓸데없는 오지랖이 많아졌어.’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쉰 후, 의자를 끌어 침실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았다. 커튼 너머로 침구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리엘라는 그날 이후로도 몇 번 더 잠든 그의 곁을 지켜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어느 순간부터 율리안은 자신의 일상에 마리엘라를 끼워 넣기 시작했다. 마리엘라가 요제프와의 수업이 있는 날이면 그녀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잠을 자지 않고 기다렸다. 그렇지만 절대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는 꼿꼿하게 굴었지만 속으로는 항상 그녀가 자신의 요구를 내칠까 안절부절못했다. 마리엘라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구는 율리안을 넓은 마음으로 포용해주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녀가 밤마다 율리안의 곁을 지키는 모습이 지속해서 목격되면서, 왕성 안에 두 사람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소문이 퍼진 것이다.
안 그래도 마녀사냥에 실패한 이후, 열세에 몰리고 있던 귀족파 신하들은, 옳다구나 하고 소문을 물어뜯었다.
결국 요제프가 마리엘라를 소환했다.
“요즘 내 친구랑 사이가 좋다면서.”
속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메마른 눈.
율리안의 물기 어린 눈과 느낌부터가 달랐다.
그녀는 그를 빤히 응시하면서 감회가 새롭다는 생각을 했다.
그럴 만도 했다. 둘은 거의 매일 만나는 사이였지만 항상 밤에만 몰래 만나곤 했으니.
“밤에 혼자 잠을 잘 못 자시기에 곁을 좀 지켜드린 것뿐이에요.”
사무적인 어조였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요제프는 율리안을 아이 보듯 구는 마리엘라의 태도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율리안이 어둠을 좀 무서워하긴 해.”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녀의 말에 요제프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야 모르지. 전쟁이랑 연관이 있지 않을까 막연하게 추측할 뿐.”
“전쟁이요? 3차 성마전쟁 말씀하시는 건가요.”
“바이르 가문은 마녀들의 공격을 받아 멸문 직전까지 갔어. 살아남은 건 율리안 혼자야. 전쟁이 한창일 때, 바이르 공작령은 치열한 전투지 중 하나였어. 전쟁에 참여한 성기사단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가문이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지.”
그녀는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잘게 끄덕였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도 끔찍한 과거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종의 전쟁 후유증이군요.”
“여기서는 흔한 일이야. 겉으로 티 내지 않지만 다들 마음속으로는 비슷한 병을 하나씩 가지고 있지. 귀족이든, 평민이든 할 것 없이 말이야. 전쟁이 끝난 지 십칠 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흑마법사 일에 유독 예민한 것도 그 때문이야.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어둠상자를 꺼내기 싫은 거지.”
“…….”
마리엘라은 잠시 말이 없었다.
요제프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네가 내 친구를 걱정해주는 마음은 알겠어. 하지만 마리엘라, 앞으로 그건 다른 하녀를 시키도록 해. 율리안을 돌보는 건 네 일이 아니니까.”
그 말에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납득이 잘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그거 허락 맡으려고 절 부르신 건가요?”
“설마. 워낙 대신들이 말이 많아서 보여주기 식으로 시간 좀 끄는 거야. 그 겸에 네 얼굴도 더 보고. 그러니까 나가면서 우는 시늉 좀 해줘. 내가 호되게 혼이라도 낸 것처럼.”
장난스레 덧붙이는 말에 마리엘라가 웃었다.
“나 참. 싱거우시네요.”
“진짜로 네게 화를 낼 수는 없잖아. 사랑하는 아가씨에겐 최선을 다해야지.”
“이미 그건 많이 늦으신 건 아시죠?”
율리안과의 염문설이라니. 어이가 없어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그게 다였다.
‘덕분에 귀찮고 피곤한 일을 피하게 되어서 다행이야.’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가슴 한편에서 시원섭섭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 * *
어둠이 찾아왔다. 율리안이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마리엘라가 그에게 다가가 다소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시키신 일은 전부 다 끝냈습니다. 인제 그만 돌아가 봐도 될까요?”
“…….”
그가 책을 읽다 말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묘하게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다. 어깨를 꾹 누르는 듯한 요제프의 중압감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마리엘라는 후자보다 전자에 약한 타입이었다.
‘넘어가면 안 돼.’
그녀는 일부러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율리안이 끝까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그녀는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를 건넸다.
“저는 그만 돌아가 보도록 할게요.”
슬쩍 고개를 드니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공작의 얼굴이 보였다.
공작은 살짝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충격을 받아서 그녀의 말을 즉각 파악하지 못하는 듯했다.
몇 초의 시간이 지나고, 그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아.”
그게 끝이었다.
‘아?’
마리엘라는 그의 대답을 속으로 따라해 보았다.
그 짧은 탄성에는 망설임과 시무룩함이 섞여 있었다. 만약 어린아이였다면 귀여웠겠지만, 안타깝게도 율리안은 성인이다. 그것도 그녀보다 두 살이나 많은.
그녀는 율리안이 융통성 없고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좋은 혈통을 타고나면 뭐 하나. 체면과 규범에 휘둘려 제 속마음 하나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하는데.
‘하지만 다행이지. 그 덕에 내 일은 수월해졌으니.’
마리엘라는 뒤돌아 율리안의 처소를 나왔다. 그녀의 예상대로, 율리안은 그녀를 잡지 않았다.
그날 이후, 그녀는 더는 율리안의 침대맡을 지켜주지 않았다. 동시에 시종일관 사무적인 태도로 그를 대했다. 가끔 그녀는 율리안이 애달픈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율리안과의 관계는, 해가 되면 해가 되었지 절대 득이 될 수 없었다.
그녀가 이렇게 단호해진 계기는 요제프의 경고였다. 그녀는 그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지금 남에게 잔정을 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했다.
왕성 룩센투크는 전쟁터와도 같았다. 마리안 하나만 감당하기에도 충분히 벅찼다. 쓸데없이 왕자의 친구에게 마음을 줄 여유가 없다.
그에게 내어 준 마음의 근저가 허망하게 죽은 동생에 대한 죄책감이라면 더욱더.
동정심은 위험한 감정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의 발목을 잡을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뒤바뀐 그녀의 태도에 율리안은 당황했다. 서운함도 내비쳤다.
그 딴에는 티 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눈에는 훤히 다 보였다. 오래 머무는 시선이나 실망했다는 듯 내려간 눈썹 등이 그녀의 눈에 걸렸다. 마리엘라는 끝까지 모르는 척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율리안은 평정심을 되찾았다.
두 사람 다 서로를 향한 마음을 접고 원래의 태도로 돌아간 거로 보였다.
그렇다고 둘 사이에 냉기가 돈다는 뜻은 아니었다. 둘은 적당히 서먹하게 지냈다. 그래서 두 사람을 가만 지켜보지 않으면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감을 알아챌 수 없었다.
이런 기류를 가장 먼저 알아챈 건 공작의 시중을 들던 시종들과 하녀들이었다.
“공작께서 새로 온 하녀를 다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지?”
“이젠 뭐, 관심에서 멀어진 것 같은데.”
“꼬시다. 그것이 여기가 어딘 줄도 모르고 나대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었는데.”
“지나치게 기세등등했지. 왕자비에 이어 바이르 공작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봐. 여기가 무슨 시골 백작가도 아니고.”
“그래봤자 쫓겨난 주제에 말이지.”
옹기종기 모여 저녁 식사를 하던 그들은 저들끼리 낄낄 웃었다.
별관의 시종과 하녀들은 평소 마리엘라를 고까워했다. 아니, 사실 왕성의 모든 사용인이 그녀를 미워했다. 텃세라면 텃세였고, 질투라면 질투였다.
그들은 시골 백작가에서 올라온 새 하녀를 호되게 혼내주고 싶어 했다. 그런 방식을 통해 자신들의 조그마한 권력이 건재한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이제 어쩌려는지 몰라. 왕자비도, 공작도 모두 떠난 지금 뭘 할 수 있을까.”
“아직 공작님이 떠난 것은 아니니 조심해야 해.”
“아니, 곧 그렇게 될 거야.”
이들 중 가장 고참 시종이 씩 웃었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마리엘라를 물 먹일 계획을 세웠다.
* * *
며칠이 지났다. 마리엘라는 탁자 위에 어지럽게 놓인 책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
그런데 갑자기 하녀 한 명이 그녀의 발에 걸려 넘어졌다. 율리안의 옷을 갈아입히는 일을 맡은 하녀였다.
“?”
너무도 속이 뻔히 보이는 움직임에 마리엘라는 넘어진 하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넓은 공간에서 굳이 그녀를 향해 다가와 다리 쪽을 발로 쳐 스스로 쓰러졌다.
그녀를 괴롭힐 꿍꿍이인 것은 분명한데, 그 시작이 너무 보잘것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다음 행동이 어떻게 될지 흥미롭기까지 했다.
하녀가 넘어지며 소란을 피우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하녀가 문을 열고 달려왔다. 그녀는 넘어진 동료를 일으켜 세우며 호들갑을 떨었다.
“세상에, 마슬린, 괜찮아?”
“팔목을 삔 것 같아!”
‘뭐야.’
싸구려 연극을 보는 것 같은 어색함에 있던 흥미가 싹 가셨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뒤를 돌았다. 그리고 제 할 일을 마저 하려고 하는데 뒤에서 불벼락이 떨어졌다.
“뻔뻔하게 사과도 안 하고 넘어가려고 해?”
조금 짜증이 나려고 했다.
마리엘라는 표정 관리를 하고, 다시 뒤돌아 그들을 마주했다.
“그럴 리가? 처음 넘어졌을 때 사과를 했는데 늦게 와서 못 들은 것 같네요.”
“너, 마슬린에게 일부러 발을 건 건 아니겠지?”
“이름이 마슬린이라는 것도 지금 알았는데 내가 굳이 왜 그래야 하죠?”
그녀가 처음부터 끝까지 당당하게 나가자 하녀 둘이 당황했다.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본론을 꺼냈다.
“그래, 그건 그렇다고 치고. 마슬린이 너 때문에 팔을 못 쓰게 된 것은 사실이니 책임을 져야겠어.”
‘부러진 것도 아닌데 무슨.’
어처구니없는 요구였다. 충분히 뒤집을 수 있었지만, 여기서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가 저들이 무슨 상황을 원하기에 저런 촌극까지 벌인 건지 궁금해서 가만히 있었다.
“당분간 네가 마슬린 대신 공작님의 의복 시중을 들어.”
‘의복 시중?’
마리엘라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진다. 정보가 부족하다. 이것만으로는 그들이 목적이 무엇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우리 말 안 들려?”
“……그렇게 하죠.”
그녀가 잠시 생각을 하느라 말이 없자, 하녀들이 그녀를 닦달했다. 그녀는 마지못해 대답하는 척했다.
‘고생 몇 번 하는 척한다면 적대감을 좀 줄일 수 있겠지.’
하녀와 시종들과 친해져야 하는 그녀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하녀 둘은 만족한다는 표정을 하고, 율리안의 처소 밖으로 사라졌다. 문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시종과 하녀들이 그들을 반겼다.
“어떻게 됐어?”
“그렇게 하겠대요.”
“분명 별 시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들은 저들끼리 킥킥 웃었다.
“율리안 공작은 옷을 갈아입을 때 아랫것이 자신의 몸을 보는 걸 세상 무엇보다 끔찍이 싫어하지. 그걸 시골 백작가 출신의 하녀가 아나 모르겠어.”
“그러게. 내가 일러주고 싶지만, 워낙 고귀한 출신이라 우리랑 말 섞는 것도 싫어할 테니.”
“분명 크게 혼날 거야.”
“혼나기뿐이겠어? 바이르 공작이 얼마나 무서운지 직접 겪어보면 알게 될걸.”
그들은 어서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 * *
율리안은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인생의 대부분을 교황의 손에서 자라왔던 터라 여자의 손이 몸에 닿는 것이 낯설었던 탓이다. 그래서 최대한 스스로 환복하려 했지만, 귀족들의 옷은 혼자 입고 벗기에 복잡한 구석이 있었다.
어둠이 베르단을 뒤덮었다. 율리안이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되었다.
마리엘라는 하녀들에게 넘겨받은 잠옷을 들고 율리안에게 다가갔다.
“늦었다.”
잔소리를 하려던 율리안은, 거울 너머로 비치는 마리엘라의 모습에 등을 움찔했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왜 네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마리엘라는 차갑고, 미묘하게 설렁설렁한 말투로 대꾸하며 율리안의 의복에 손을 댔다. 달라진 것 없는 그녀의 어조에 기분이 상한 율리안이 그녀의 손을 쳐냈다.
“됐어. 나 혼자 할 수 있다.”
“혼자 갈아입기 번거로우시잖아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고요한 별관, 끈과 단추를 푸는 소리가 유독 크게 났다. 그와 동시에 공작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마리엘라는 사무적인 태도로 율리안의 상의를 벗겼다. 그리고 옆에 준비해놓았던 그의 잠옷을 손에 들어 펼쳤다.
그에게 옷을 마저 입히려는 그때였다.
흉터투성이의 등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마리엘라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그녀는 단박에 알아챘다.
율리안의 등 뒤의 흉은 채찍질로 생긴 것이다.
인간을 겁주기 위해 소리만 크도록 개량된 채찍이 아니라, 진짜 말이나 소를 다루기 위해 만들어진 거친 채찍.
‘거기다 이건…….’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등을 만졌다.
율리안이 바로 뒤를 돌아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잔뜩 화가 난 표정이었다.
“지금 뭐 하는……!”
선을 넘은 마리엘라를 다그치려던 율리안은,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마주한 그녀의 눈이 서릿발같이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누가 이랬죠?”
상황이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마리엘라가 율리안을 몰아세웠다. 지금 그녀는 몹시 화가 많이 났다.
마리안 등의 흉을 볼 때처럼.
“…….”
율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한번 물었다.
“누가 당신 등에 저런 흉을 냈죠?”
“…….”
이번에도 그는 침묵했다.
마리엘라는 한숨을 한번 푹 쉬었다. 물어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기다려요, 흉을 지우는 데 도움이 되는 약을 내가 좀 아니까.”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잡은 그의 손을 풀어낸 뒤 밖을 나갔다.
어두운 복도를 걸으며 마리엘라는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을 억누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분노가 터져 나왔다.
‘난 저 흉을 잘 알아. 저건 어릴 때 맞은 자국이야.’
마리안의 등 뒤 흉터 자국과 모양이 똑같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율리안의 것이 더 끔찍하다는 것.
‘등 뒤의 흉터는 공작이 어둠을 무서워하는 것과 관계가 있을까?’
마리엘라는 공작이 3차 성마대전 때 대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추측해보려다 고개를 저었다. 이쯤에서 호기심을 멈춰야 한다.
남의 끔찍한 상처를 들추려는 것만큼 추악한 선의는 없으니까.
‘그나저나 큰일이야.’
그녀는 길을 걷다 말고 복도 한가운데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아직 동그란 원형을 갖추지 못해, 못생기게 일그러진 상태의 달이 환하게 그녀를 밝혔다.
‘지켜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어.’
마리엘라는 자신이 율리안에게 애착을 두게 되었다는 사실을 더는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