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금/갠소> 우리끼리만 보기!!! by S.R
리덴부르크가의 수상한 아가씨 2권
마리엘라는 방으로 돌아와 가지고 있는 모든 책을 꺼냈다.
흑마법사에 관해 알아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방법이 있을 거야.’
그녀는 조급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대롱대롱 흔들렸던 식구들의 발이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이 꼭 마리안의 미래가 될 것 같았다.
묻어버리려 했던 과거의 상처가 그녀의 현재를 건드렸다. 시야가 불안정하게 흔들려 글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글자들이 위아래로 심하게 요동쳐 어지럼증을 유발했다. 흔들거리는 마차에서 책을 읽는 것 같았다.
‘방법을 찾아야 해.’
마리엘라는 글자 하나하나를 손끝으로 짚어가며 억지로 책을 읽었다.
힘들다고 엉엉 울거나 포기하는 건 그래도 되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일이었다. 문제를 대신 책임 져주거나, 돌봐주는 이가 있는 사람들 말이다.
하녀인 데다 고아인 마리엘라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독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얼마 없는 지금, 지쳐 쓰러지는 것도 사치였다.
……마법을 행할 때 검은빛이 난다 하여 ‘흑마법’이라 일컬었다.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피를 타고 전해져오며, 주로 여성에게 발현된다. (매우 드문 확률로 남성 흑마법사가 태어나기도 한다.) 그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흑마법사를 ‘마녀’로 부르기도 한다. 흑마법사 가문은 대개 모계 사회 형태를 띠며……
가장 유명한 흑마법사 가문은 모두 베르단 수도에 집중되어 있다. 불의 원소를 잘 다루기로 유명한 ‘한’ 가문, 치료 마법의 대가들이 모여 있는 ‘르베르크’ 가문, 인간의 정신을 조종하는 능력이 뛰어난 ‘랏 데르시’ 가문, 방어 마법의 귀재 ‘파르니’ 가문이 바로 그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흑마법사’ 하면 커다란 챙이 달린 검은 고깔모자와 마찬가지로 검은색 망토, 그리고 기다란 나무 지팡이를 떠올리는데, 이는 모두 허구다. 실제 흑마법사들은 복장에 구애받지 않으며, 그들이 들고 다니는 지팡이는 마법의 정확도를 위한 보조도구였지, 마법을 발현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필수용품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법 지팡이가 꼭 필요한 예외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성별이 남자인 흑마법사다. 이들은 여성 흑마법사에 비해 타고난 마력이 부족하다. 때문에 힘을 모아줄 수 있게 특수 제작된 지팡이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이들의 수가 극히 적고……
그녀는 읽고 있던 책을 거칠게 덮었다. 그리고 책을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가지고 있는 책에서 마녀와 관련된 부분을 전부 읽었다. 그러나 대부분 자질구레한 잡지식이나, 남들도 다 알고 있는 큼지막한 내용만 적어놓았을 뿐이었다. 마리엘라가 필요로 하는 정보는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틀렸어.’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손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이걸로는 마리안을 구할 수 없어.’
패배감이 그녀의 온몸을 담요처럼 덮었다.
마리엘라는 침대에 웅크려 누웠다. 며칠 동안 잠도 거르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으며 책을 읽었던 터라, 육신이 쇠약해져 있던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다른 방법을 강구할 머리도 돌아가지 않았다.
허탈함에 잠시 침대에 누웠을 뿐인데 누적된 피로가 쏟아졌다.
‘이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깜박,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눈을 다시 떴을 때는, 해가 중천에 뜬 한낮이었다. 그녀는 뻑뻑한 눈꺼풀을 몇 번 깜박이며 흐릿한 시야의 초점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몸은 여전히 아기처럼 웅크려 누워 있는 상태였다.
귀족들과 대적할 방법이 없다는 허망함이 그녀의 얼마 남지 않은 생기를 앗아가 버렸다. 무기력하게 눈만 움직이던 마리엘라의 눈에 무언가가 걸렸다.
그것은 구석진 곳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 홀린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코르크 마개였다.
몇 주 전, 왕자가 축배를 들자며 들고 왔던 샴페인 병의 코르크마개.
마리엘라는 말없이 그것을 손에 쥐고 일어섰다. 샴페인을 들고 제 방에 방문했던 왕자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왕비나 왕의 처소는 그들이 신뢰하는 하인의 방과 연결되어 있거든. 비밀리에 일을 시킬 때도 있고, 뭐, 이런저런 사유로.’
“어쩌면…….”
그녀가 마른 입술로 혼잣말을 했다.
“어쩌면 요제프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 * *
덜컹덜컹.
어두컴컴한 시종장의 방. 불청객이 이곳저곳을 샅샅이 뒤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불청객의 정체는 마리엘라였다.
방의 주인인 시종장은 마리엘라가 몰래 넣은 수면 유도제 덕분에, 이 사단을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의자에 앉아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여기도 아닌가 보네.”
벽 구석구석과 장 손잡이, 책장 뒤, 침대 밑까지 구석구석 살펴본 마리엘라가 땀을 훔쳤다. 그녀는 혹시 자신이 놓친 것이 있지 않을까 싶어 방을 한 번 더 둘러보았지만 별다를 게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깊게 내 쉬었다. 이게 벌써 네 번째 방이었다. 왕자의 유모가 사용했던 방과 놀이 친구였던 시종의 방, 그리고 왕비의 전속 시녀가 사용했던 방까지 살폈지만 아무리 이리저리 둘러봐도 왕자의 방으로 향하는 비밀 통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미련이 남은 그녀는 시종장의 방을 쉬이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없었던 통로가 뚝 하고 떨어질 리 만무했다.
‘내가 왕비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녀는 왕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녀가 왕비라면. 그래서 다른 무엇보다 아끼고 사랑하는 아이를 낳았다면.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일단 비밀 통로가 있는 방을 고르긴 했을 것이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아이가 도망칠 수 있어야 하니까.
그렇지만 동시에 아무 방이랑 연결되게 하진 않을 것이다. 사람만큼 못 미더운 것이 없으니까.
아무리 오랜 시간 알고 지냈던 사이고, 믿음직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속 안에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거기다가 왕비의 측근이라 알려진 순간, 검은 속내를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나라면 아무도 안 믿을 거야.’
마리엘라는 지극히 저다운 생각을 했다.
이런 생각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하나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결론밖에 나지 않았다.
‘정말로 나 말고 아무도 못 믿을 것 같은데.’
그녀는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고개를 들어 옷장을 바라보았다.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 * *
한밤중,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는 왕비의 처소 한쪽이 소란스럽다. 끼이익, 무언가 밀려 나가는 소리와 슥, 슥 하는 마른 천끼리 마찰하는 소리도 들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음은 점점 커졌다.
탕!
거칠게 옷장 문을 밀어 재끼는 소리와 함께 여자 하나가 옷장에서 나왔다.
하녀 복장의 여자 이름은 마리엘라였다.
“후.”
그녀는 한숨인지 기합인지 모를 소리를 한 번 뱉고는 넓은 왕비의 처소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머리끈을 꺼내 머리를 질끈 묶었다.
“시작해 볼까.”
그 후의 일은 여태까지 했던 일의 반복이었다. 주먹으로 벽 이곳저곳을 두드리고, 옷장을 샅샅이 뒤졌으며, 침대 밑이나 책장 뒤쪽 같은 가구 뒤편을 살폈다. 그러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마리엘라는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묶기 위해 머리끈을 입에 물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거울을 보다가 왕비의 화장대가 무언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빈 보석함이 화장대 위로 노출되어 있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관리된 상태였다.
귀족 나리였다면 ‘이게 뭐?’하며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의 대부분을 하녀로 지낸 마리엘라는 알았다. 주인이 없는 빈방은 최대한 청소하기 쉽도록 자잘한 물건들을 먼지가 끼지 않는 곳에 넣는다. 장식장이나 서랍 안 같은 곳 말이다.
그런데 보석 하나 들지 않은 보석함이 쓸데없이 화장대 위에 올라가 있다고?
그것도 비뚜름하게?
마리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철두철미를 모토로 삼는 왕성의 하녀들에게는 더더욱.
그녀는 화장대 앞으로 다가갔다. 저도 모르게 희열이 섞인 미소가 지어졌다.
“찾았다.”
마리엘라는 조심스럽게 보석함을 들어봤다. 그녀의 예상대로 보석함은 화장대에 딱 붙어 들리지 않았다. 마치 화장대와 한몸인 것 같았다.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문고리를 돌리듯, 보석함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무언가 열리는 소리가 그녀의 등 뒤에서 났다. 마리엘라는 서둘러 뒤를 돌았다.
“?”
그러나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뭐지?’
마리엘라는 당황하여 주변을 살폈다. 주변은 아까 전 그 상황 그대로였다.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돌았다. 누군가 그녀를 가지고 노는 것 같아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휘이잉.
바람 부는 소리와 함께 촛대의 촛불이 일렁였다.
마리엘라는 촛불의 움직임을 통해 바람이 불어 왔을 것이라고 추측이 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왕비의 초상화가 있었다.
단아한 드레스를 입고 그녀를 바라보는 안나 투르지 데르샤바크 왕비.
그녀는 왕비의 얼굴을 응시했다.
온화하고 선한 얼굴이 요제프와 비슷하다. 아니, 정확히는 제이 도련님을 연상케 했다.
“…….”
마리엘라는 말없이 초상화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초상화를 조심히 밀어보았다.
스윽.
커다란 초상화가 매우 부드럽게 옆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보이는 검은 통로.
저 너머에 요제프가 있을지는 아직 정확히 모른다. 그렇지만 마리엘라의 마음속에 이유 없는 확신이 들었다.
‘이번엔 진짜야.’
마리엘라는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그리고 깊은 어둠을 향해 몸을 옮겼다.
램프 하나에 의지해 꽤 오랜 시간을 걸었다. 눅눅하고 어두운 터널 안을 걸으면서 마리엘라는 생각했다.
이 싸움의 관건은 요제프 하이젠 데르샤바크다.
그가 몸을 일으켜야 마리안이 살 수 있다.
어떻게 해야 요제프가 움직일까.
‘내가 다 해결할 수 있다고 허풍을 부릴까?’
그녀는 금방 고개를 저었다.
정치는 정보싸움이다. 왕자의 도움을 얻어 그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얻는다면 무언가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었고, 심지어 그 가능성마저 희박했다. 마리엘라는 마리안과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일에 도박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요제프의 약점을 잡고 뒤흔들면?’
약점은 별거 없었다. 상대방이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을 손에 쥐면 그것이 바로 약점이다.
그가 본색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과 3개월 동안 장님이 되어 리덴부르크 영지를 떠돌아다녔단 정보는 훌륭한 미끼가 되어줄 것이다.
‘운이 좋다면 그 틈에 마리안을 데리고 도망칠 수도 있겠지.’
마리엘라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앞의 생각보다 나은 것은 확실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최선의 선택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가 아팠다.
그녀가 세 수 앞을 내다보고 있으면, 어느덧 그 마음까지 간파해서 열 수 앞을 앞서는 요제프.
그는 그녀에게 세상에서 제일 다루기 힘든 사람이었다.
고민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 뒤, 조용히 눈앞에 문을 옆으로 밀었다.
익숙한 풍경이 그녀의 눈앞에 보였다. 감격해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였다. 요제프의 처소였다. 그녀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처소 안은 사람들의 조용한 말소리로 웅웅 울렸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목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걸었다. 공간을 가르는 커튼 하나를 거두어 내니 비로소 요제프의 얼굴이 보였다.
“누구냐!”
그녀의 기척을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챈 귀족 하나가 허리춤에 두르고 있던 검을 뽑아 그녀의 목에 겨눴다.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왕자를 응시했다.
“요제프 전하.”
요제프가 살짝 놀란 눈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리엘라?”
그리고 그는 턱짓으로 귀족이 검을 거두게 했다.
“마리엘라, 여긴 무슨 일이지? 이 일에 참견하지 말라는 의견은 충분히 전달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소 쌀쌀맞은 말.
커다란 테이블 상석에 앉은 왕자는 위엄과 권위를 완벽하게 갖춘 강력한 군주 같았다.
그녀는 그 모습이 살짝 낯설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는 요제프는 오만하고 두뇌 회전이 빠르고 잔악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잔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요제프는 공사 구분을 지나치게 뚜렷이 하는 사람 같다.
그래서 그녀를 도와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요제프 하이젠 데르샤바크 왕자 전하.”
마리엘라는 천천히 요제프에게 다가갔다.
사람들이 그녀를 막아서려 했지만, 요제프가 그것을 저지했다.
“왕자비를 구해주세요.”
그녀는 요제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여기까지는 그녀가 머릿속으로 계획한 대로였다. 단계별로 요제프를 설득할 생각이었다.
일단 무릎을 꿇고 낮은 자세로 나가야지. 그러다가 안 되면 목을 틀어쥘 말을 속삭일 거야.
왕자가 본성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몇 있을지 몰라도, ‘그레타와 연관된 무언가’를 찾으려고 슈바르딩에 갔다는 사실은 아마 거의 모를 테니까.
그녀는 거기까지 준비해놓고 왕자의 앞에 섰다. 사실 그 이상 대비할 겨를도 없었다. 충분한 시간도, 정보도 없었으니 뭘 어쩔 수가 없었다. 그저 잔뜩 긴장한 그녀의 본능이 알아서 되는대로 잘 뱉어주기를 간절히 소망할 뿐이었다.
“……제발.”
그러나 이렇게 눈물이 터져 나온 것은 그녀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 * *
마리엘라는 스스로의 행동에 크게 당황했다.
열두 살 이후, 그녀는 한 번도 남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여기서 눈물이 터져 버린 걸까.
매 순간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규정하고 또 규제하는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도저히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차라리 왕자가 차갑게 반응해주면 분위기 때문에라도 어떻게든 그쳐볼 텐데, 그는 그녀의 예상과는 조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냉정하고 잔악한 표정을 하고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당혹스러움과 따듯함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조용히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덕분에 그녀의 감정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소용돌이쳤고, 그녀는 이제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흐느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요제프가 방 안에 모인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잠깐 자리 좀 피해 줬으면 하는데.”
그의 신하들이 이 상황을 미처 이해하지 못해 주춤거렸다.
그가 방긋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전부 다 말이야.”
신하들을 전부 문밖으로 쫓아낸 요제프가 손끝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마리엘라.”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마리엘라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직전까지 요제프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었던 마리엘라는 끅끅대며 말했다.
“전하, 전 정말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마리안을 구할 수 있을지. 이건 너무 답이 정해져 있는 길인 것 같아서. 이건 너무, 이건 마치, 그러니까 이건…….”
“마리엘라, 진정하고 날 봐.”
쉬이, 착하지.
그가 마리엘라의 양 볼을 가볍게 쥐어 잡고 허리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그녀가 숨을 고를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요제프는 마리엘라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녀를 껴안았다.
등을 가볍게 토닥이는 넓은 손. 부드럽고 배려 가득한 위로를 받으며 마리엘라는 그런 생각을 했다.
잠깐, 아주 잠깐이지만 지금 그가 제이도련님처럼 느껴진다고.
요제프의 품은 포근하고 따듯했다.
“내가 널 너무 놀라게 했구나. 내가 너무 배려 없이 일을 진행시켰어.”
요제프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목소리로 그녀를 다독였다.
그건, 그녀가 처음 겪어보는 그의 모습이었다. 제이 도련님 시절에도 이렇진 않았다.
“용서해주렴, 마리엘라. 내가 널 너무 믿어서 그랬던 거야. 너라면 다 알아챌 거라고 생각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이건 정보를 얼마나 꼭꼭 숨기느냐가 승패를 가리는 게임이거든. 그래서 그랬어. 날 이해해 줄 수 있겠니.”
“……그게 지금 무슨 소리예요?”
마리엘라가 꼿꼿해진 등을 하고 물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물에 잠겨 있고, 뺨에는 눈물 자국이 가득했지만, 눈동자는 평소의 그 현실적인 모습 그대로였다.
책망하는 듯한 마리엘라의 질문에 요제프가 그녀의 풍성한 갈색 머리를 쓸어 올려 주며 말했다.
“난 마리안을 버린 적이 없어. 처음부터. 지금 내가 하는 모든 건 마리안을 구하기 위해서인걸.”
“…….”
그녀는 말없이 그를 빤히 보았다. 지금 그가 진심을 말하는 건지, 비난을 넘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좀 믿어. 안 그랬으면 왜 사람들을 몰래 모으고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겠어?”
“정말 마리안을 구할 수 있어요?”
흔들리는 마리엘라의 눈동자를 보고 요제프가 싱긋 웃었다.
“여태까지 내가 설명한 걸 어디로 들었담.”
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가득 담겨 있었지만 여태까지의 오만함은 담겨있지 않았다.
마리엘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정색하고 물었다.
“저는 지금 전하의 심중을 묻는 게 아니라 가능성을 묻는 거예요.”
“너무 당연한 말 아니겠니.”
이번에도 요제프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마리엘라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툭, 기대며 말했다.
“다만, 너의 도움이 필요해.”
* * *
“율리안, 제발 내 부탁을 들어줘.”
다음 날이 되었다. 요제프가 이른 아침부터 율리안을 비밀리에 소환했다.
그는 제 유일한 친우에게 시종 복장을 한 마리엘라를 데리고 지하 감옥으로 가, 하이든 리덴부르크 백작을 만나 달라는 부탁을 했다.
율리안은 그 말을 듣자마자 인상을 팍 쓰고 잔소리를 했지만, 소중한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마리엘라는 율리안의 뒤를 졸졸 따르며 어젯밤 요제프가 했던 충고를 떠올렸다.
“율리안에게 이 사건에 대한 정보를 흘리지 마.”
요제프는 그녀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상세히 일러주며 말했다.
“왜요?”
마리엘라는 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걘 교황의 양아들 같은 거거든. 성기사단을 통솔하는 단장이기도 하고. 그래서 정치적으로 완전히 중립이야. 나도 걜 참여시키지 않고. 그냥 우리끼리의 규칙이야. 친구로서의.”
“그럼 항상 전하의 서재에 같이 계셨던 건 뭐죠?”
“조언쯤은 해줄 수 있으니까. 율리안이 옳고 그른 것은 또 잘 분간해내거든. 그러니까 이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율리안에게 우리끼리 나누는 비밀이야기 같은 건 흘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녀는 무언가를 잠시 생각하다가 그의 생각을 깔끔히 결론지었다.
“친구를 의심할 가능성을 두기 싫으신 거군요.”
“맞아. 거기까지 생각하다간 내 영혼이 남아나지 않을 테니까.”
요제프는 굳이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특이한 관계야.’
그녀는 율리안을 힐끔힐끔 훔쳐보며 생각했다.
‘하긴, 그래서 저 도도한 공작새 같은 태도가 가능한 것일 수도 있겠네.’
그녀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잘게 끄덕였다.
율리안의 걸음이 멈췄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왕성 룩센투크의 지하 감옥. 그곳에 마리안의 아버지, 리덴부르크 백작이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백작을 확인한 그녀는 옷매무새를 간단히 정리하며 율리안의 귓가에 속닥였다.
“부탁이 있는데, 멀리 떨어져 계시겠어요?”
“…….”
율리안은 아무 대꾸 없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대화도 섞기 싫다는 태도였다.
그녀는 자기가 왜 그에게 변명 따위를 지껄여야 하는지 의문이었지만, 쓸데없는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아 대충 상황에 떨어지는 말을 지어냈다.
“백작께서 이런 상황이 자존심 상하실 것 같아서요.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아들으셨죠? 그러니까 배려 좀 하자고요.”
“그 넘치는 충성심은 너의 왕자비에게나 좀 보이지 그래?”
“그것도 진짜 할 말 많긴 한데……. 하, 됐어요. 아무튼 저리 가세요, 저리.”
그녀는 훠이, 훠이 새를 쫓아내는 시늉을 했다. 다행히 율리안은 별 불평 없이 자리를 피해주었고, 그녀는 리덴부르크 백작과 독대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백작님.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지만.”
며칠 새에 백작의 얼굴은 많이 상해 있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한 표정으로 감옥 바닥에 가만히 앉아 있던 그는 낯익은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 너구나.”
그녀의 일가족을 죽게 만든 남자.
리덴부르크 백작의 가장 약한 모습을 보니 속에서 분노가 차올랐다.
마리엘라의 목소리가 단두대의 칼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졌다.
“일개 하녀가 왕성 감옥을 들락날락하는데 하나도 놀란 기색이 없으시네요.”
“네가 보통 아이가 아니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알면서 아가씨 옆에 붙여 놓으셨던 건가요. 그렇게 애지중지하셨던 막내딸 옆에.”
“네가 마리안을 유독 아끼고 있다는 것 역시 알았다.”
“거참 뛰어난 혜안이시네요. 그럼 이것도 아시려나요. 저는 백작님을 증오해요. 리덴부르크 백작가의 영지를 빠져나오면서 가장 아쉬웠던 건 미처 백작님을 죽이지 못하고 떠나는 것 하나였어요. 아가씨가 시집을 간 다음에 손을 좀 보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신분 체계가 엄격한 이 나라에서 상당히 도를 넘은 말이었다.
그러나 백작은 하나도 동요하지 않은 채 오히려 되물었다.
“좋은 감정이 아닐 거라는 건 짐작했다. 그나저나 마리엘라, 이곳에 왜 왔느냐. 이 꼴이 된 나를 죽이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닐 텐데.”
그 말에 마리엘라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이곳에 온 것은 마리안을 살리기 위해서지 리덴부르크 백작을 책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녀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누르고 자신의 임무를 다하기로 했다.
“맞아요.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제가 여기까지 올 이유는 없죠. 왕자 전하의 명으로 왔어요. 당신과 한 가문의 연관성을 조사하라더군요.”
“왕자 전하께서?”
그는 그 말을 듣고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을 마주하며 마리엘라는 오만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가장 소중한 존재였던 가족을 파멸시킨 남자. 이 사람을 구해야 마리안이 산다.
‘내가 리덴부르크 백작을 살리기 위해서 이러고 있다니.’
허탈감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그녀는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티 내지 않으려 사무적인 태도를 내보였다.
“지금부터 몇 가지 질문을 할 거예요. 저는 짧고 빠르게 질문할 거지만, 당신은 길고 느리게 대답해줬으면 하네요. 거짓말은 안 돼요. 딸을 살리고 싶으시다면 최선을 다하셔야 할 겁니다.”
“그러지.”
“3차 성마대전 때, 리덴부르크가의 문장이 그려진 물자들이 수도로 올라가는 걸 목격한 이들이 있다고 해요. 사람들은 당신이 마녀에게 물자를 댔다던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부터 듣고 싶네요.”
“다 헛소리야. 물론, 내가 흑마법사 가문에게 뭔가를 보낸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건 그들에게만 보낸 것이 아니었어. 당시 나는 작위를 막 물려받아 기세등등한 상태였고, 연줄을 잡아 더 높은 곳에 오르겠다는 야망이 있었다. 그래서 수도의 모든 귀족에게 뇌물을 바쳤지. 하지만 그건 성마전쟁이랑은 상관없어.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보낸 것을 사람들이 착각한 것일 테지.”
“라산 사냥터에서 도는 정보들이 마녀들에게 흘려들어 갔다는 소리도 나오던데.”
“라산 사냥터에 오는 귀족들이 어디 국가 기밀을 알 정도로 높은 존재들이던가? 그들이 아는 건 온 천하의 사람들도 다 아는 하급 정보밖에 없어. 당연히 마녀들도 그들이 아는 정보를 알고 있었겠지. 그건 나랑 전혀 상관없는 일이야.”
납득이 가는 소리였다. 그녀는 왕자가 쥐여준 마지막 질문을 했다.
“그럼…… 당신이 백작 작위에 오르고 나서 보이기 시작했던 낯선 여자들은요. 사람들은 그들이 마녀거나, 마녀의 하수인일 것이라 말하던데요.”
“지금 그걸 질문이라도 하는 건가? 리덴부르크가의 영지에서 살았다면 내 여성 편력을 알고도 남았을 텐데.”
그녀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마리엘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작에게 등을 지고 자리를 떠나려는 찰나, 가슴 속에서 그녀를 충동질하는 감정이 일었다.
마리엘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몸을 훽 틀어 감옥 창살을 양손으로 쥐고 백작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제 개인적인 질문이에요. 그렇게 사랑한다면서 어째서 초상화 한 장도 남겨두시지 않았죠? 저는 기회가 될 때마다 백작님의 서재와 방을 뒤졌어요. 그곳에는 연서 한 장도 없더군요. 정말 그 여자를 그렇게 많이 사랑하신 게 맞나요.”
“…….”
청산유수였던 백작이 입을 다물었다.
마리엘라는 차갑게 그를 내려다보며 채근했다.
“왜 대답을 안 하시죠.”
“……내가 내 아내와 사랑해서 결혼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이런 말 하는 게 네게 우습고 가당찮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랑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야. 사랑은 본래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거지. 머리와 정반대로 노는 녀석이니까.”
백작은 한숨을 푹 쉬더니 말을 이었다.
“엘리자가 죽고. 나는 엘리자 생각으로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낮에도 그녀 생각을 하면 숨이 턱턱 막혀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었지. 연서와 초상화. 누구는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한다지만, 나는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잊어야만 했지. 그래야 내가 살아갈 수 있으니까.
“당신은 끝까지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군요.”
‘그렇게 간절한 사랑이라면 목매달아 죽어버리지.’
마리엘라는 턱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백작은 그녀의 말에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마리엘라, 그건 나만을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굳이 너한테 이런 말을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위선 같긴 하지만. 나에겐 그게 최선이었어. 너는 이걸 알아들을지 모르지만.”
더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다. 마리엘라는 창살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즐거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요. 덕분에 마리안을 구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래, 나도 너 같은 아이가 마리안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물론 같은 질문을 왜 두 번이나 반복해서 하는지는 도통 모르겠지만.”
“두 번?”
마리엘라가 고개를 살짝 꺾으며 되물었다. 이해가 잘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이내 이 질문에 대답을 할 사람은 리덴부르크 백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요, 그렇군요.”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는 마리엘라의 눈 끝이 칼처럼 예리하게 빛났다.
* * *
며칠이 지났다.
요양을 끝내고, 귀족들 앞에 선 요제프가 왕자비의 유폐 사실을 밝혔다. 귀족들의 원성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여러분의 뜻을 받아들여 왕자비를 유폐하지만, 그것이 곧 그녀가 흑마법사라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흑마법과 관련된 소문은 파장이 매우 큽니다. 리덴부르크 백작과 관련된 의문까지 조사를 끝마친 후 모든 것을 발표할 터이니 그동안 말이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신하들은 왕자비가 유폐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하지 않았다.
요바튼 재상이 모든 신하를 대신해 나섰다.
“왕자 전하께서 저희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사로운 정을 끊어내시고, 이 나라의 왕자로서 왕자비를 유폐하셨다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무슨 걱정 말인가요, 요바튼 재상.”
요제프가 물었다. 온화한 표정이었지만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어딘가 바짝 날이 서 있었다.
“조사를 끝마친 후 발표를 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조사라는 것이 왕실의 조사라면 그 안에 불순분자가 끼어들 가능성이 있을까 우려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마리안 왕자비께서는 왕실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대단한 분이었으니까요.”
요제프가 싱긋 웃었다.
“당연히 연락을 취해야겠죠. 교단에 요청해 신관을 부를 계획입니다. 일단 1차 조사는 왕성 기사단에게 맡긴 뒤 신관에게 결과를 발표하고, 사건 방향을 잡아 2차 조사를 시작할 계획입니다. 교단과 협동으로 말이죠. 일국의 왕자로서가 아니라, 바레뎃샤의 신도로서 그들의 결정을 무조건 따를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신, 교단에서 확정 내리기 전까지는 그 어떤 정보도 성 밖에 새어나가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왕자비를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흑마법사와 관련된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는 다들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깔끔한 결론이었다. 이에 관해서 요바튼 재상도 더는 트집을 잡지 않았다.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되어가고 있는데, 굳이 회의를 길게 끌 이유가 없었다.
“그럼, 소집을 파하겠습니다.”
요제프가 지친 얼굴로 그들을 쫓아냈다.
* * *
베르단 수도 사교계에 왕자비가 유폐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왕성과 연줄이 없는 자들은 조금이라도 관련된 자들에게 물어보았고, 고위 귀족의 딸들은 아버지를 붙잡고 소문이 사실이냐 캐물었다. 그들의 아버지들은 이렇다 할 확실한 대답 대신 허허 웃었다. 태어날 때부터 사교계와 맞닿아 있던 아가씨들은 아버지의 의사를 단박에 알아들었다.
그건, 소문이 맞는다는 걸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왕자는 신하들에게 왕자비가 흑마법사일 수도 있다는 말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하였지만, 그녀가 유폐되었다는 사실을 숨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귀족들은 머리를 굴려 빠져나갈 통로를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의 머리가 왕자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그런 오만함까지 요제프가 내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고위 귀족들의 긍정 아닌 긍정, 대답 아닌 대답을 타고 소문을 순식간에 온 나라의 사교계를 뒤덮었다.
그들은 종일 왕자비의 유폐에 대해 떠들어댔지만, 왕자비가 어떠한 연유 때문에 감금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것이 흑마법사와 관련된 일이라는 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이 예상하는 것은 하나였다.
“들었어요? 왕자비가 유폐되었다는 소문이요.”
“시골에서 왔으니 오래 못 버틸 거로 생각했어요.”
“사랑은 한철이죠. 촌스러운 건 영원하고.”
화려한 드레스 차림의 아가씨들이 저들끼리 모여 까르르 웃었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지만, 유폐까지 되었다면 전하께서 단단히 화가 나신 게 분명해요.”
“곧 그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을까요.”
“그렇겠죠. 베르단의 역사상 유폐된 왕비의 끝이 좋은 적이 없었으니 말이에요.”
그들이 예상하는 것은 하나였다.
마리안 왕자비는 곧 폐비가 될 것이다.
그건 그들에게 매우 기쁜 일이었다. 왕자비의 자리에 공석이 생겼다는 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는 뜻이니까.
“……역시, 그건 그런 의미인 거죠?”
“왕성 초대장이요?”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어요?”
아가씨들이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저들끼리 눈빛 교환을 했다.
누구는 받고, 누구는 받지 않았는지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왕자비의 유폐 소식이 알려진 지 며칠 후, 왕성에서 귀족 아가씨들을 상태로 초대장을 보냈다. 초대장에는 초대를 받은 본인과 하녀 한 명만 동석하라는 조건이 적혀 있었고, 무엇을 위한 초대인지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려 하는지 바로 짐작했다.
“초대장을 받은 여성들이 모두 결혼 적령기의 아가씨들인 데다가 쟁쟁한 가문 출신들이니.”
누군가가 적나라한 말을 꺼내자 다들 한 마디씩 덧붙였다.
“이번에는 가문을 보겠다 이거죠.”
“드디어 수도에서 왕자비가 나오겠군요.”
“아무튼, 굉장히 재밌어지겠네요.”
“저도 동감하는 바랍니다.”
‘그러나 가장 재미를 보는 건 나여야만 해.’
그들은 시커먼 속내를 숨기고 서로를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오늘도 사교계는 평화로웠다.
* * *
초대장에 명시된 날이 다가왔다.
이 나라의 재상인 한스 요바튼 공작은 왕성에 갈 채비를 했다.
오늘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날이었다. 마리안 왕자비와 관련된 1차 조사 결과가 발표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거울을 보며 모자를 고쳐 쓰고 있던 요바튼 공작의 눈에 익숙한 사람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막내딸 요안나였다.
“아버지.”
요안나가 부드럽게 웃으며 요바튼 공작을 불렀다.
그 부름에 공작이 뒤를 돌았다. 그녀가 말없이 공작을 껴안았다.
“아버지, 오늘 왕자 전하를 뵈러 가세요?”
한스 요바튼은 이십 년 전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두 번째 부인을 맞았다. 그의 두 번째 부인은 괄괄했던 첫 번째 부인과 다르게 사근사근하고 순종적인 여성이었다.
드센 성격을 가진 여자와의 첫 번째 결혼이 끔찍했던 재상은 두 번째 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러나 행복은 잠시였다. 그의 두 번째 부인이 자식을 낳다가 죽은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요안나였다.
요바튼 공작에게 요안나는 두 번째 부인과의 사랑의 증표이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막내딸이었다.
“전하와 논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지.”
“치, 맨날 중요한 일이래.”
“국정과 관련해서 중요하지 않은 일은 없으니까.”
“이를테면 새 왕자비를 뽑는 일 같은 거 말이죠?”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구나.”
재상은 시치미를 뗐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 진득하게 걸린 미소가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요안나는 아버지를 꼭 껴안았다.
“아버지 저는 이 나라의 왕비가 되고 싶어요. 그렇게 될 수 있게 도와주실 거죠?”
왕성은 재상의 막내딸 요안나 요바튼에게도 초대장을 보냈다.
요안나는 여성으로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르고자 하는 야망을 품은 소녀였다. 그녀는 아버지의 권력을 이용해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를 점령하고자 했다.
요바튼 재상은 속이 훤히 보이는 딸의 애교에 미소 지었다.
“그럼.”
그는 사랑스러운 막내딸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말했다.
“온 나라를 다 뒤져도 너만큼 고귀하고 아름다운 아가씨는 없을 거다.”
오늘은 왕자비를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를 논하는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왕성에서 명문가의 혼기가 찬 아가씨들을 비밀리에 초대한 날이기도 했다. 재상과 그의 막내딸이 왕성에서 마주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었다.
‘내 딸이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도 좋지. 어차피 마리안 왕자비가 없는 왕자는 우리의 꼭두각시일 뿐이니까.’
재상은 오늘 왕자가 왕자비를 폐위시키고 새 왕자비를 뽑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출신에 관한 잡음이 생기지 않게 대신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승인하에 새 왕자비를 뽑으려 하지 않을까 정도가 그의 예측 범위였다.
* * *
넓은 회의장에 베르단 왕국의 모든 신하와 교단에서 파견된 고위 신관 몇이 모였다.
왕자는 병색이 다 가시지 않은 얼굴로 그들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한 분도 빠짐없이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쓸데없는 잡담으로 시간을 끄는 대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먼저, 저희 측의 조사 결과부터 듣죠.”
그가 손짓하자, 왕자의 뒤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푸른 늑대 기사단의 단장인 조셉 남작이었다.
남작은 바로 발표를 시작했다.
“하이든 리덴부르크 백작의 조사 결과입니다. 마리안 디프네 데르샤바크 왕자비의 부친인 리덴부르크 백작은 3차 성마전쟁 때 흑마법사들과 한배를 탔다는 의혹을 받았습니다. 이에 왕자 전하께서 철저하고 공명한 수사를 명하셨고, 저희 푸른 늑대 기사단이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습니까?”
성질 급한 도미닉 남작이 기사단장을 재촉했다. 무례한 언행이었지만, 기사단장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백작은 흑마법사와 관련하여 총 두 개의 혐의를 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3차 성마전쟁 때 마녀들에게 전쟁 물자를 대주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리덴부르크 백작령의 명지인 라산 사냥터를 이용해 그곳에서 나온 정보를 마녀에게 전달하였다는 것입니다. 결론만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위 두 개의 혐의에 관해서 리덴부르크 백작은 결백합니다.”
그러자 곳곳에서 아우성을 쳐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남작은 자신의 말에 책임질 수 있소?”
푸른 늑대 기사단의 기사단장인 조셉 남작은 여전히 포커페이스였다. 그는 자신을 향해 빗발치는 비난을 듣고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전쟁 물자 건에 관해 설명드리죠. 하이든 리덴부르크 백작은 전대 리덴부르크 백작처럼 베르단 정계에 안정적으로 진입하기 위해 작위를 받자마자 수도의 고위 귀족들에게 뇌물을 바쳤을 뿐이라고 실토했습니다. 그가 뇌물을 바친 대상은 흑마법사가 아니라, 수도의 명문가들이었습니다. 덧붙여 그가 뇌물을 보낸 시기는 3차 성마전쟁 발발 이전이며, 따라서 저희는 사람들의 기억이 오염되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 말을 누가 믿을 수 있겠나!”
“그따위 거짓말은 나도 할 수 있어!”
비난이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귀족들은 혹여, 이 조사에 왕자의 편파적인 관점이 담겨 있는 건 아닐지 의심했다.
불신의 표정이 그들의 얼굴 위로 스쳤다.
“저희는 백작의 증언에 따라 백작이 뇌물을 바쳤다는 가문의 리스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리스트에 속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곳에 계시고요. 미처 그 부분에 대해서 수사를 하지 못한 것은 저희에게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왕자 전하께서 승인해주신다면 더욱 철저한 조사를 행할 수 있긴 하겠지요.”
“큼, 큼.”
비뚜름한 입가로 발표하는 기사단장의 말에 갑자기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지은 죄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너무 많은 뇌물을 받아왔던 터라 리덴부르크 백작의 것이 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귀족들은 혹시 모를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하여 말을 아꼈다. 덕분에 들끓었던 분위기가 잠시나마 가라앉았다. 그 틈에 기사단장이 말을 덧붙였다.
“참고로, 백작이 증언한 가문 중, 후계자가 없어 대가 끊긴 가문의 장부를 조사한 결과, 비슷한 시기에 막대한 금액의 재화가 들어왔음을 확인했습니다. 몇 개는 전대 리덴부르크 백작이 소유했던 것으로 알려졌던 보석들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저희는 백작의 증언이 신빙성 있다고 판단 내렸습니다. 더 자세한 증거가 필요하시다면 왕자 전하의 승인을 받아 귀족들의 장부를 조사하면…….”
“그, 그건 됐고! 그다음 의혹은 어찌할 것입니까. 백작이 마녀의 첩자라는 의혹 말입니다.”
이것저것 찔리는 것이 많았던 귀족들이 말을 돌렸다.
“리덴부르크 백작이 정보를 유출했다고 고발한 자들과 직접 대면해 조사한 결과, 그들이 새어나갔다고 주장한 정보들이 대부분 전쟁에 하등 쓸모없는 정보임을 확인했습니다. 이에 저희 푸른 늑대 기사단은 백작이 두 번째 혐의에서도 결백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흠…….”
“질문하실 것이 없다면, 이만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두 개의 혐의에 관하여 백작은 무고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평불만으로 가득 찼던 회의장이 조용하다.
귀족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왕자비를 끌어내릴 명분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너무 딱 맞아떨어져서 꼬투리를 잡을 것도 없었다.
요제프가 방긋 웃으며 회의에 참여한 신하들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아직도 왕자비가 의심되십니까.”
“말이야 지어낼 수도 있지요.”
누군가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그 무례함에 열을 내는 것은 왕자의 열성 추종자인 알폰스 후작밖에 없었다.
귀족파의 음모니, 국왕파의 짓이니 삿대질을 하며 편을 가를 것도 없었다.
다들 왕자비가 고꾸라지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사람들도 오늘만은 적대감을 가지고 왕자비 사건을 대했다. 오늘 그들의 딸이 왕성 초대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딸이 왕자비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려면 우선 왕자비가 폐위되어야 했다.
흉흉한 분위기를 타고 재상이 앞으로 나섰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왕자비가 마녀라고 의심받는 것은 그 핏줄이 한 가문이기 때문입니다. 리덴부르크 백작과 관련된 의혹은 부차적인 것일 뿐, 본질을 흐려선 아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은 귀족들의 욕망을 대변했다. 그의 뒤를 이어, 귀족들이 한 마디씩 보탰다.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흑마법사의 더러운 피를 왕가와 섞이게 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중요한 건 교단의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심판은 언제나 교단의 몫이었으니까요.”
귀족들의 시선이 대주교와 그를 보필하는 신관들에게 향했다.
교단에서 파견된 신관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담담히 조사 결과를 듣고만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어느 쪽에도 치우쳐지지 않는 공정한 판결을 내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교단은 한 번도 흑마법사라는 의심을 받은 이를 살려 보낸 적이 없었다.
재판에 넘겨진 이들의 결말은 똑같았다. 처형당하거나 살해당하거나.
침묵 끝에 대주교가 입을 열었다.
“바레뎃샤의 의견은 언제나 같습니다. 흑마법사는 사악하고 위험한 존재들입니다. 아주 조금의 가능성이 있다면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지금은 교황께서 부재중이시니 당장 재판을 벌일 수는 없지만, 돌아오시는 즉시 재판을 시작하도록 하지요.”
“하지만…….”
요제프가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주신 바리 앞에서 신분의 고하는 하등 상관없습니다. 모든 것은 공평하고 평등하게 이루어질 것이고 신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그렇게 아시고 저희를 믿어주시지요.”
신분에 상관없이 왕자비를 죽이겠다는 말이었다.
요제프가 다시 왕자비를 변호하려고 했다.
그때, 시종 하나가 다소 큰 목소리로 아가씨들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왕자 전하. 전하께서 직접 초대장을 보낸 귀족 아가씨들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전에 여러분께 부탁드릴 것이 하나 있어요. 제 마지막 부탁입니다.”
요제프가 간절한 표정으로 귀족들 앞에 섰다.
귀족들은 그가 애원으로 귀족들을 움직여 어떻게든 왕자비를 살리려 할 것으로 추측했다. 그들은 왕자의 애원에 절대로 넘어가 주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러나 왕자가 꺼낸 말은 그것이 아니었다.
“유폐된 마리안 왕자비가 제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자신의 죽음이 결정되면 모두의 앞에서 편지를 읽어달라고 청하더군요. 그 편지를 읽게 되면 마음을 조절하지 못하고, 제 권위를 이용해 조사에 영향을 끼칠까 두려워 아직 봉투도 뜯지 않았습니다. 왕자비의 운명이 결정된 지금, 여기서 편지를 읽어봐도 괜찮을까요?”
“하나…….”
재상이 제재를 걸려 했다. 똑똑한 왕자비가 무슨 수를 썼을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가 제대로 된 말을 꺼내기도 전에 왕자가 먼저 선수를 쳤다.
“이미 결정된 것들을 바꾸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일국을 이끌어갈 왕자이니 피눈물을 삼키는 한이 있더라도 교단의 결정에 순응해야지요. 제발 부탁이니 이 소원 하나만 들어주세요. 여러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듣기만 해주시면 됩니다.”
“흠…….”
신하들이 신음했다.
그들은 어차피 왕자비가 죽는 것이 확정된 지금, 저런 작은 부탁 하나쯤은 들어주어도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요제프를 항상 자신들보다 못한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요제프에게 그 정도 ‘선의’쯤은 베풀어도 되지 않나 하는 오만한 생각에 이르렀다.
가장 나이든 귀족 하나가 앞으로 나와 귀족들이 요제프의 청을 받아들임을 알렸다.
“그렇게 하시지요, 전하.”
“감사합니다.”
귀족들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왕자는 왕자비의 하녀를 부르라고 명했다.
문이 열리고 하녀 하나가 입장했다. 마리안 왕자비의 전속 하녀인 마리엘라였다. 그녀의 손에는 편지지 한 장이 들려있었다.
마리엘라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요제프 옆에 섰다.
“편지를 뜯어라.”
요제프가 명령했다. 마리엘라는 인장이 찍힌 편지를 뜯어 편지를 펼쳤다.
그녀는 요제프의 계획 속 그녀의 역할만을 들었을 뿐, 편지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듣지 못했다. 그 때문에 이 안에 무엇이 담겨 있을지 궁금했다.
편지를 펼치자 정갈한 글씨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단박에 그것이 마리안의 글씨체가 아님을 알아챘다. 어차피 처음부터 이 편지가 진짜 마리안에게서 나왔을 리가 없었기 때문에 상관없는 일이긴 했다.
“읽어.”
요제프의 말에 마리엘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요제프 하이젠 데르샤바크 전하, 건강은 되찾으셨는지요. 이 편지가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편지라 생각하니 마음이 참 아픕니다. 편지지 위에 많은 감정을 표현하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종이가 너무 작고, 드려야 할 이야기는 많으니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그녀는 여기까지 읽고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이다음 이어지는 내용이 조금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편지가 뒤바뀐 것이 아니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여기는 신하들과 교단의 고위 신관이 모인 공식 석상이었다.
마리엘라가 이도 저도 못 하고 요제프를 바라보자, 요제프가 편지를 마저 읽으라는 손짓을 했다.
결국 그녀는 망설이다가 편지를 마저 읽었다.
“힐베르크가의 로즈, 바튼가의 릴리스, 렘가의 카트린, 로렌스가의 마리아, 윈터가의 소피아, 프릿가의 노라, 로스가의 니엘, 바로튼의 엠마, 켈러가의 피오나…….”
그녀가 이상하게 여긴 것은 바로 이것이다.
편지는 뜬금없이 귀족가의 아가씨 이름들을 나열해 놓았다. 한바닥을 쓰고도 부족했는지 뒷장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대체 이게 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면서 입으로는 부단히 편지를 읽었다.
이 편지가 대체 뭔지 알아챌 수 없는 것은 이곳에 모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이 아리송한 편지의 정체를 추측해보려 애썼다.
“……마지막으로, 요바튼가의 요안나 아가씨.”
드디어 편지가 마지막에 다다랐다. 마리엘라는 요안나의 이름을 호명한 다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동안 길고 긴 이름들을 호명하느라 숨이 부족했던 것이다.
숨을 완벽하게 고른 그녀가 다음 문단을 읽으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마리엘라는 고개를 들어 이곳에 모인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많은 것들이 담긴, 심각한 표정이었다.
귀족들은 절로 그다음 문단의 내용이 뭔지 궁금해졌다.
모두가 왕자비의 편지에 집중하느라 고요해진 회의장.
왕자비의 하녀는 흔들리는 눈으로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왕자는 슬픔에 잠긴 애잔한 얼굴로 다음 장을 읽으라고 하녀를 재촉했다.
마리엘라는 마른 입술을 침으로 축이고 어렵게 다음 문장을 읽었다.
“이상, 흑마법사 가문과 연계된 귀족 아가씨들의 이름입니다. 부탁이니 폐하, 저를 심판하시려면 그들도 같이 교단의 재판을 받을 수 있게 해주세요. 제가 마녀라면 그들에게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전하 곁에 그런 위험분자를 놓아두고 떠날 수는 없지요.”
여기저기서 놀라 숨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편지 속 왕자비의 강수에 적지 않게 당황한 것이다.
“전하, 이제 영애들을 맞이하셔야 합니다. 다들 출신이 증명된 귀한 분들이시니,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시종 하나가 큰 목소리로 왕자를 재촉했다.
신하들은 뒤늦게 깨달았다. 마리안 왕자비의 편지 속 영애들과 오늘 초대된 아가씨들의 명단이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그들은 유폐된 왕자비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부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유폐된 왕자비와 함께 수장되기 위해 불렸다.
대책을 세울 시간도 주지 않고, 아예 오늘 하루에 모든 것을 해치울 계획인 것이다.
신하들은 마리안 왕자비의 영특함과 잔악함에 몸서리를 쳤다. 몇몇 귀족들은 딸아이의 앞날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가장 경직된 것은 재상인 요바튼 공작이었다. 재상은 평소에도 자신의 막내딸 요안나를 아끼고 사랑하기로 유명했다.
“그래요. 그렇다면 그들을 이리로 부를까요.”
요제프가 유약한 미소를 지으며 시종에게 답했다. 그리고 귀족들에게 시선을 돌려 친절하게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아직 저희끼리 나눠야 할 말이 남았으니까요. 자, 이제 노파를 들이세요.”
그의 명령에 회의장의 무겁고 커다란 문이 열렸다.
키가 조그마한 누군가가 허리를 푹 숙인 채로 들어왔다.
머리가 하얗고 피부가 까맣게 탄 노인이었다.
요제프의 옆에서 노인의 얼굴을 본 마리엘라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녀는 저 노파를 알았다. 리덴부르크 영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장례를 맡은 여자였다.
“어서 오세요, 로틀란. 그대가 리덴부르크가의 장례사라지요.”
노파는 벌벌 떨며 대답했다.
“그, 그러하옵니다.”
“십여 년 전에 죽은 리덴부르크 백작 부인의 시신도 그대가 수습했다지요.”
“맞, 맞습니다.”
“그대가 백작부인의 죽음을 두고 수상하다고 말했다 하던데.”
“그것이…….”
“지금은 누구를 재판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저 알아야 할 것이 있어서 부른 것뿐이에요. 안심하시고 솔직히 대답하시면 됩니다.”
노인은 대답을 망설였다.
평소였으면 이 사달에 왜 노파를 끌어들이냐고 한마디씩 했을 신하들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아까 그 사달을 겪어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탓이었다.
“로틀란, 그저 솔직하게 대답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백작 부인의 죽음이 왜 수상하다고 생각하셨나요.”
“……다른 시신과 외양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맹세코 그런 죽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요.”
“외양이 어땠죠?”
노인은 침을 꿀꺽 삼킨 후에 간신히 대답했다.
“온몸에 푸른 반점이 있었습니다. 그건 사람의 피부에서 나올 수 없는 색이었어요. 아직도 정확히 기억이 나요. 강물보다 더 깊고 푸르른, 그런 소름 끼치는 색이었습니다.”
“!”
오늘 하루, 더는 놀랄 일이 없으리라 생각한 귀족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되었다. 푸른 반점은 흑마법사에게 저주를 받아 죽은 자들에게 보이는 현상이다.
그것이 어찌하여 왕자비의 모친에게?
그들은 이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떡 벌린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리엘라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편지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뒤에 더 굉장한 것이 나왔다.
요제프의 능력은 어디까지인가.
경외감과 두려움이 동시에 들었다.
그녀는 마리안의 직속 하녀로, 백작 부인의 죽음을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목격했다. 확실히, 부인의 전신에 푸른 반점이 떠오르긴 했다. 요제프가 거짓을 꾸며내고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었다.
‘백작 부인의 죽음을 이렇게 써먹다니.’
그녀는 놀라 벌벌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기 위해 양손을 겹쳐 쥐었다.
지금 이곳에서 잔잔한 호수처럼 덤덤히 있는 존재는 왕자 한 사람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장악하고 관장하는 요제프.
그는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리엘라.”
“네.”
마리엘라는 최대한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마리안 왕자비와 그녀의 어머니 사이가 어떠했지?”
“저희 왕자비께서는 어머니이신 백작부인을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했습니다. 백작부인께서 돌아가셨을 때 3일 밤낮을 울며 식음을 전폐하셨을 정도입니다. 그날 이후 사교계에는 얼굴도 내비치지 않으셨고요.”
“그렇군.”
그는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얼빠진 얼굴을 한 신하들에게 물었다.
“이래도 마리안이 그대들 눈에 흑마법사로 보이는지 궁금하군요. 그녀가 진짜 마녀라면, 조금이라도 그런 능력이 있다면, 그토록 사랑한 어머니를 저주할 것이 아니라, 저주를 직접 풀었겠지요.”
“…….”
신하들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딸이 흑마법사와 연계된 귀족들은 더더욱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거운 침묵만이 흐르는 회의장에서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전하. 모든 결정은 저희 바레뎃샤에게 맡기시지요.”
교단의 대주교였다.
그는 엄숙한 목소리로 마녀재판에 관한 모든 권한을 자기들에게 넘기라고 말했다.
그 말에 귀족 중 하나가 발끈하여 질문했다.
“언급된 모두를 다 심판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바리 신께서는 공평하시니까요.”
공평하게 죽이겠다는 말이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재상이 점잖은 말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주신께선 자애를 베푸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끔은 심판이 곧 자애일 때가 있지요.”
그러나 재상의 시도는 실패했다. 대주교의 허리는 꼿꼿했고, 그 어떤 압력에도 굽혀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 * *
회의가 파했다. 왕자는 초대장을 받고 모인 귀족 영애들을 무도회장으로 안내하라고 명한 후, 시간이 되는 분들은 무도회장에 가도 좋다고 말했다.
모든 것이 일단락되었다.
요제프는 왕자의 개인 집무실로 향했다. 마리엘라는 그런 그의 뒤를 따랐다.
“어때. 내 말이 맞지?”
요제프가 소매 단추를 툭툭 풀며 말했다.
한껏 신이 난 그 얼굴에 대고, 마리엘라는 퉁명스럽게 굴었다.
“무슨 말이요.”
“마리안을 구할 수 있다고 했잖아.”
“눈 가리고 아웅 하지 마세요. 아직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라는 걸 알아요.”
마리엘라는 오늘에서야 요제프의 진짜 능력을 보았다.
그는 신하들에게 각인되어 있는 마리안의 이미지를 이용해 판도를 뒤집었다. ‘왕자비의 편지’를 빌어서 하고자 했던 말을 대신 전한 것은, 그의 본성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펀치를 날린 영리한 선택이었다.
그 이후에 백작 부인의 사인을 밝힌 것도 놀라웠다. 상대방이 이미 녹다운이 된 상태에서 한 번 더 주먹을 꽂아 넣을 줄은 몰랐다. 짐작건대, 요제프는 한번 밟기로 했다면 뿌리를 뽑아버리는 성격인 것 같았다. 깔끔하고도 잔인한 방법이었다.
이제 아무도 마리안이 마녀라고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의문이 가는 점이 몇 가지 있었다. 가장 큰 의문은 어찌하여 그 자리에 바레뎃샤를 끌어들였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냥 신하들만 부른 뒤에 딜을 보면 더 깔끔할 일이었다.
왕권과 신권은 다르다. 아무리 잘 구슬리고 권력으로 짓눌러도, 분명 대주교는 교단으로 돌아가자마자 자신이 아는 모든 사실을 고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다시 원점이 된다.
현재 이 시점에서 교황의 권위를 이길 수 있는 존재는 베르단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실망이야. 이토록 이 몸을 못 믿다니.”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녀의 질문에 그가 씩 웃으며 답했다.
“조금만 기다려.”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왕자의 시종이었다.
“요바튼 공작이 알현을 청합니다. 어찌할까요.”
요제프는 대답 대신 마리엘라를 보며 웃었다.
“커튼 뒤에 숨어있어.”
그는 그녀를 두꺼운 커튼 뒤에 숨겨 놓은 뒤, 재상을 불렀다.
“어서 오세요, 재상.”
집무실 의자에 앉은 요제프가 여유롭게 재상을 반겼다.
재상은 화가 난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윽박지르는 어조로 말했다.
“어찌하실 겁니까. 정말로 모두를 죽일 속셈이십니까.”
재상은 이 일에 왕자의 지분이 적지 않음을 깨달은 상태였다.
왕자는 잔뜩 화가 난 재상을 앞에 두고 태연자약하게 굴었다.
“속셈이라니. 조금 불경스럽군요. 거기다가 그 단어는 지금 재상에게 필요한 단어 아닙니까. 시간 내에 방법을 찾아내셔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을 구하죠.”
“……교단이 모두를 죽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자기 딸은 빼내겠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듣고 요제프가 실소했다.
“그렇죠. 아무리 교단이라도 수도의 모든 귀족을 적으로 돌릴 수는 없죠. 최대한 많은 이들을 빼내려고 할 겁니다. 제가 마리안의 편지를 공개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재상의 눈이 번뜩 빛난다. 그는 당장이라도 요제프의 목을 비틀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딸아이를 살리는 데 필요한 것은 협상이지 분노가 아니었다.
“공개하실 겁니까.”
“마리안이 재판을 받게 된다면.”
“…….”
“재판이 얼마나 잔악한지는 알고 계시죠? 재상, 저 역시 재상께서 얼마나 딸아이를 사랑하는지 알고 있답니다. 해서,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해 드리려고 합니다.”
요제프는 탁자 위에 양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여유롭고, 어딘가 위압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평소 회의장에서 보이곤 했던 아이 같은 해맑음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재상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하나는 재상께서 직접 신관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당연히 재상 자리는 반납하셔야 하고, 사교계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하실 가능성도 있지만……. 글쎄요. 그 모든 것들이 딸아이의 목숨값보다 비싸지는 않을 것 같군요. 신관을 죽이는 것은 중죄이지만, 포장만 잘하신다면 법망을 빠져나갈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 방법이 탐탁지 않았던 재상이 다른 방도를 물었다.
그 질문에 요제프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재상이 미끼를 정확히 문 것이다.
“당신들의 진짜 우두머리를 밝히세요. 당신은 그저 눈가림용으로 세워놓은 패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군지 이름만 댄다면 당신이 해야 할 그 모든 일을 우리 쪽에서 맡기로 하죠.”
재상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조금 전까지, 마리안 왕자비의 편지와 요제프가 얽혀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본격적일 줄은 몰랐다.
왕자비가 왕자를 일깨웠다고 생각했지, 처음부터 왕자가 모든 것을 내다보고 모습을 숨기고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제가 전하를 잘못 봤군요.”
“모두가 나를 잘못 보고 있지.”
요제프가 단박에 말투를 바꿨다.
그는 특유의 오만하고 강압적인 태도로 재상을 바라보았다.
“어찌할 거지, 재상.”
재상은 왕자의 책상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과일 바구니 사이로 과도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는 말없이 손을 뻗어 과도를 손에 쥐고는 칼집을 뽑았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왕자의 눈을 마주했다.
“대답은 행동으로 보여드려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신관을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요제프는 관심 없다는 투로 그의 행동을 승인했다.
재상, 한스 요바튼은 그 상태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요제프는 자신에게 인사하는 것도 생략하고 뒤돌아 나간 버릇없는 신하를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재상을 하나 보내네.”
“…….”
재상이 나간 것을 확인한 마리엘라가 커튼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둘의 대화를 엿들으며 왕자의 진짜 목적을 깨달았다.
그가 오늘 이 자리에 굳이 대주교와 바레뎃샤의 신관들을 부른 것은 재상을 이용해 자신의 진짜 적을 알아내려는 것이었다.
‘비록 실패했지만.’
머리가 아팠다.
이 교활한 남자의 본심이 뭔지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요제프가 마리엘라를 향해 방긋 웃었다.
“정말 쉽지? 신관은 죽고, 재상은 떠나고. 당분간 마리안을 건들 사람은 없을 거야. 너무 기쁜 일이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아 아쉬운 거겠지.’
마리엘라는 말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눈으로 그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태양이 부서지면서 만들어진 듯한 반짝이는 금발, 보석을 박아 놓았다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에메랄드빛 눈동자. 새하얀 피부와, 발그레한 뺨 그리고 붉은 입술.
이 아름다운 얼굴이, 가끔은 너무 무서워진다.
요제프는 눈을 살짝 감으며 마리엘라의 시선을 즐겼다.
조용한 집무실,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음악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를 듣고 요제프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아, 선율이 여기까지 들리네. 어때, 마리엘라. 나와 한 곡 추겠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리엘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는 춤을 출 줄 모르는데요.”
“그건 내가 가르쳐 줄게.”
그녀는 그의 맑은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요제프와 마리엘라는 아주 느린 박자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저에게 거짓말을 하셨죠.”
스텝을 밟으며 마리엘라가 말을 꺼냈다. 작고 조심스러운 목소리와 상반되는 날카로운 시선. 그것은 그녀가 그를 적으로 인식했음을 의미했다.
요제프는 여느 때처럼 방긋 웃었다. 그것은 그가 모르는 척 상황을 넘길 때 자주 쓰는 술수였다.
“난 거짓말이 업인 사람이라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세세하게 짐작이 가지는 않는데.”
“절 당신의 진짜 패로 쓰려고 옆에 둔 게 아니잖아요. 저에게 던져준 미션은 미끼였죠. 내가 이 쓸데없는 놀이에만 집중하게 만들려고.”
그 말을 들은 요제프가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가 정확히 그의 본심을 맞춘 것이다. 마리엘라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몇 초의 시간 후, 그가 쉽게 인정했다.
“맞아.”
“쓸데없이 솔직하시네요.”
“사랑하는 여인이 물어봤으니 대답해 줘야지. 그래서 그다음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두 사람은 여전히 춤을 추고 있었다.
무도회장에서 흘러나온 음악은 우아하고 고고했다. 두 사람의 춤 역시 고상하고 기품이 있었다.
그러나 마리엘라의 등은 꼿꼿했으며, 목 뒤의 털은 바짝 서 있었다. 눈앞의 이 남자와 결투 중인 것 같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절 이 성에서 나가게 해주세요. 아가씨랑 같이.”
음악이 격해진다.
요제프가 마리엘라를 한 바퀴 돌게 만든 후, 그녀의 허리를 확 잡아끌었다. 그 덕에 마리엘라의 허리가 뒤로 꺾어졌다.
“아직도 마리안을 아가씨라고 부르나?”
단단한 팔로 마리엘라의 허리를 지탱한 채로 그가 물었다.
“그럼 당신 부인이라고 칭해드릴까요? 아무튼 난 마리안과 함께 이 성을 빠져나가겠어요.”
허리를 일으킨 그녀가 스텝을 밟으며 요제프에게서 멀어졌다. 그가 그녀를 잡은 손을 당겼다. 그녀가 단번에 그의 품으로 돌아왔다. 마리엘라는 다음 동작을 이어가려 했지만 요제프가 그것을 허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선율에 맞춰 추악한 본심을 숨기는 시간은 이제 끝났다.
이제는 모든 것을 드러낼 때였다.
“내가 보내 줄 것 같아?”
요제프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리엘라는 지지 않고 그에게 맞섰다.
“당신이 마리안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이제 막 깨달았어요. 마리안은 당신의 대역이었던 거야. 당신 대신 귀족들을 치고, 또 대신 죽어줄 대역.”
그녀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요제프는 대답 없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마리엘라는 저 손 뒤에 숨겨진 얼굴이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지켜보고만 있는데 그의 어깨가 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참을 수 없다는 듯,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도.
“마리엘라.”
그가 손을 얼굴에서 치우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입이 찢어지라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광인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별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곳은 왕자의 집무실이었고 도망치기엔 한계가 있었다.
“나는 네게 거짓말을 아주 많이 했지. 내 진짜 적을 찾으라는 것도 진심이 아니었고, 마리안을 사랑해서 내 옆에 둔 것도 아니야. 하지만 그 속에 본심이 숨어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잖아?”
요제프는 계속해서 성큼성큼 다가왔다.
마리엘라는 열심히 그를 피하려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에 벽이 느껴졌다.
그의 얼굴이 점점 다가왔다.
서로의 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
그는 입맞춤 대신 경고장을 날렸다.
“똑똑한 아가씨야, 내 손 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아야지.”
심기가 잔뜩 뒤틀린 표정.
그것은 마리엘라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요제프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마리엘라는 겁먹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 등에 칼을 꽂을 거예요.”
“영광이야. 아가씨의 손에 내 피를 묻힐 수 있어서.”
장난으로 넘기는 그의 태도에 성이 났다.
“내 말은 농담이 아니에요.”
짜증을 섞어 말하니 요제프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두 사람 사이는 지나치게 가까운 상태였다.
그녀는 빠르게 뜀박질하는 심장 소리를 들키지 않길 바라며 숨소리를 조절하는 데에 신경을 기울였다.
여기서 지면 모든 것이 끝난다.
마리안의 안전도, 그녀 자신의 안락하고 무던한 삶도 모두 이 악마 같은 남자에게 저당 잡혀 끝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녀는 궁지에 몰린 생쥐처럼 필사적이었다. 그녀의 턱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요제프가 저도 모르게 픽 웃자, 마리엘라가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고개를 살살 저으며 그녀에게서 물러났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책상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자리에 가만히 서서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요제프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나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나도 진담으로 말해줄까? 마리엘라, 넌 그렇게 못해. 내가 너보다 월등히 위에 있기 때문이지. 원한다면 갖은 핑계로 널 서쪽 탑에 감금시킬 수도 있어. 그걸 원하나?”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요제프는 위협은 이쯤 하고 마리엘라를 잘 달래 마리안의 처소로 보내려 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왕자비의 일로 많은 고생을 했으니 몸이 많이 피로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리엘라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나랑 내기를 해요.”
“내기?”
“여태까지 같은 소꿉장난 말고, 진짜 계약.”
그녀가 요제프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당신의 적. 내가 찾을 거예요. 찾을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나와 마리안, 어떤 수를 써서라도 왕성에서 빼내 줘요.”
요제프는 어이가 없었다.
무언가 대단한 방법이라도 찾은 것처럼 눈빛을 빛내기에 무언가 했더니 결국 처음의 제안으로 다시 되돌아가자는 말이었다.
“그게 가능할 거라고 믿어? 수년간 그들을 쫓았지만 결국 머리카락 한 올도 잡아내지 못했어.”
회의적인 그의 말에 그녀가 지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러니까 내기죠. 단, 조건이 있어요. 나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세요. 정보, 사람, 금전적 지원 그 모든 걸.”
요제프는 가만히 턱을 매만졌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그녀를 바라보았다.
“꽤 구미가 당기게 하는군.”
긍정적인 반응에 마리엘라가 왕성에 온 뒤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당연하죠. 전, 왕자를 홀린 아가씨니까.”
누구보다 자신감이 흘러넘치는 모습이었다.
* * *
모든 것이 뒤집혔다.
유폐되었던 왕자비는 풀려나고, 재상은 신관 살해 혐의로 급히 감옥에 수감되었다. 귀족들은 주춤대며 왕가의 권위에 깊이 고개를 숙였고 자연스레 국왕파와 귀족파의 위치도 뒤바뀌었다. 국왕파 귀족들은 기세등등하게 굴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들 내부에서 미묘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는데, 이는 왕자비의 편지에 국왕파 가문들도 들어가 있었던 탓이었다.
국왕파의 귀족들은 자신들이 왕자비를 필요에 따라 버릴 준비가 된 만큼, 왕자비 역시 자신들을 필요에 따라 버릴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께름칙한 기분이 그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박혀버렸다. 왕가와 국왕파 귀족들 사이의 미세한 분열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든 사건의 주인공인 마리안 왕자비는 현재의 기쁨에만 충실했다.
“마리!”
그녀는 그저 자신의 친구인 마리엘라와 재회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왕자비의 체통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마리안이 달려가 마리엘라를 껴안았다.
평소라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을 마리엘라도 이번만큼은 마리안의 포옹을 그대로 받아주었다.
오랜만에 둘만 남은 왕자비의 처소.
마리안은 마리엘라의 빗질을 받으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속내를 전했다.
“너니까 말하는 건데, 난 여러모로 실망이야.”
“?”
마리엘라와 마리안이 거울을 통해 시선을 마주했다.
마리엘라는 왕자비가 무슨 소리를 하나 하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요제프 전하 말이야. 어쩜 그렇게 얄밉게 굴 수 있지? 갑자기 유폐되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마리, 너는 모를 거야.”
“왕자비 전하를 살리려 그러신 거란 거 알고 계시잖아요.”
부드럽게 설득하는 그 말에 마리안이 픽, 고개를 돌렸다. 부루퉁한 표정이었다.
“그럼 미리 말을 했으면 됐잖아. 이게 뭐야. 완전 개고생만 하고. 난 책에서도 그런 내용 있으면 다 넘겨버린단 말이야.”
“…….”
마리안의 어린아이 같은 생각에 마리엘라는 할 말을 잃었다.
마리안은 자신의 감정을 상대방의 상황보다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백작가의 금지옥엽 외동딸로 자라온 터라 눈치를 보거나 이해를 해줘야 할 상황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답답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이내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대책 없이 철없는 모습도 반가웠다.
“거기다가, 나는 이제 좀 의심스러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마리안이 말을 덧붙였다.
마리엘라는 마리안의 엉킨 머리를 푸는 일에 집중하며 물었다.
“뭐가요.”
“요제프는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타인의 애완동물을 멀찍이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뭔가 그런 느낌이 들어.”
“…….”
마리엘라의 손이 멈췄다. 이번에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리안은 가끔 동물적인 감각을 드러내곤 한다. 그게 자기의 안위나 이득과 연관된 일일 때만 드러난다는 게 흠이긴 했지만 말이다.
* * *
마리엘라는 일찍 방으로 돌아가 침대 위에 누웠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요제프의 활약과 본심, 뒤바뀐 정계 판도, 재상인 요바튼 공작의 고위신관 살해, 마리안의 복귀까지.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한계치에 다다랐다. 피로가 온몸을 잠식했지만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양손을 배꼽 위에 얹고, 시체처럼 천장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녀는 여전히 무언가가 틀어져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욕망과 견제가 넘치는 왕성 룩센투크에서 정보는 무기이자 독이다.
조금이라도 틀어진 정보를 쥐고 있었을 때 감당해야 할 대가가 얼마나 큰지는 며칠 전 직접 경험해 보아 잘 알았다. 의구심이 생기면 즉각 확인을 해야 한다.
마리엘라는 이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찬찬히 생각해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옷장 문을 열었다.
* * *
사람들을 모아 놓고 떠들썩하게 축배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밤.
요제프는 텅 빈 처소에서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어딘가 약간 지쳐있는 얼굴이었다. 그가 술잔을 다 비우고 그다음 잔을 위해 술병을 들었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요제프는 마저 술을 따르고,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로 불청객에게 인사를 건넸다.
“뭐야, 이 밤중에. 나를 유혹하는 것도 아가씨의 탈출 계획에 포함되어 있나?”
“궁금한 게 생겨서요.”
어둠 속에서 마리엘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뭔데?”
“물어보면 솔직히 대답해주실 건가요?”
“이미 다 들킨 마당에 숨길 게 뭐 있겠어.”
요제프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마리엘라는 그런 요제프를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굳이 그러신 거죠? 당신은 당신의 일로도 충분히 머리가 복잡한데 굳이 제게 주기적으로 일을 던져 줘가며 곁을 지키게 한 거죠? 그거 말고 방법은 많았을 텐데. 다정하게 사랑을 고백할 수도 있잖아요. 그게 아니더라도, 뭐……. 쉬운 길은 다양했을 텐데.”
“그래서 아쉬워? 지금이라도 달콤한 세레나데를 불러줄까?”
한참을 머뭇거리다 털어놓은 진심이건만, 요제프는 또 장난으로 넘기려 했다. 그녀가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재촉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대답이나 똑바로 해요.”
그가 술잔을 손으로 훑으며 대답을 유예한다.
“됐어요. 거짓말을 할 거면 말을 하지 마세요.”
한결같은 태도에 실망한 마리엘라가 등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등 뒤에서 요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네가 그걸 원했으니까.”
마리엘라는 즉각 몸을 틀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허탈하고 허망한 기운들이 서려 있다.
꿈을 꾸는 것보다 포기하는 것이 더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자꾸 내게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굴기에, 이유를 만들어 주는 것이 더 쉽고 빠르겠다고 생각했지.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걸 드러내면 적어도 그렇게 전방위로 날 새울 일은 없잖아?”
“그건…….”
그녀가 자신을 대변하려 입을 열었다.
그는 그녀가 변명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이해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타인의 마음을 그대로 믿는 것만큼 어려운 게 없으니까.”
“…….”
마리엘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이 차례대로 그려졌다.
‘가지 마세요.’
요하네스 왕의 장례식 날, 홀로 예배당에 남아 애처롭게 자신을 부르던 요제프의 모습.
‘잠깐이면 돼요. 잠깐만, 잠깐만 남아 저를 위로해주세요.’
마리엘라는 여태까지 그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원하시는 게 뭐죠?’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 같다는 생각도.
* * *
룩센투크의 지하 감옥에도 밤이 찾아왔다.
감옥 안, 요바튼 공작은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의 의복에는 검붉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일렁이는 횃불만이 전부인 황량한 장소.
그는 그곳에서 조용히 마음을 단련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소리 없이 인영이 드리워졌다.
공작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시야에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남자가 보였다.
“오셨군요.”
남자는 공작의 인사를 받아주는 대신, 대뜸 질문부터 던졌다.
“바레뎃샤의 고위 신관을 죽이기 전에 요제프와 독대했다지. 그가 무슨 말을 했나?”
공작은 기분 나빠하는 기색 없이, 허심탄회하게 답했다.
“제게 제안을 했습니다.”
“무슨 제안?”
“당신의 이름을 밝히라더군요.”
“……그렇군.”
망토를 뒤집어쓴 남자의 반응은 그것이 끝이었다.
“더 하실 말은 없으십니까.”
이번엔 요바튼 공작이 그를 붙잡았다.
“자네가 정보를 흘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그러니 그걸 물어보는 것은 시간 낭비지.”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믿음에 요바튼 공작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남자에게 경고했다.
“우리가 왕자를 너무 얕봤더군요. 요제프는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겨울잠을 자는 뱀처럼, 나무 밑동에 똬리를 틀고,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망토를 뒤집어쓴 남자는 덤덤했다.
요바튼 공작은 말을 더 이으려다가 상대의 표정을 보고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미 다 알고 계셨군요.”
“나는 모든 걸 다 알고 있어야만 하니까.”
요바튼 공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남자의 행동이 이해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더욱더 먼저 움직여야지요. 왕자가 그렇게 영특한 자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왜 그의 약점을 알리려 하지 않으십니까.”
그의 목소리가 텅 빈 감옥 안에 넓게 퍼졌다.
남자는 아무 반응 없이 그를 빤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걸 깨달은 요바튼 공작은 민망한 듯 목을 가다듬었다. 그는 곧 목소리를 낮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요제프 왕자가 데르샤바크 가문에 내려진 그레타의 저주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을요.”
* * *
마리엘라가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고 급히 떠난 후 요제프는 다시 혼자가 되어 의자 위에 앉았다. 그는 자신이 따라놓았던 술잔을 입에 대며 생각에 잠겼다.
흑마법사와 바레뎃샤.
절대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존재.
아니, 서로를 죽이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상극의 존재들.
그것들을 끌어들여 균형을 맞추겠다는 생각은 선조의 오만이었다.
오용이기도 했고.
그 때문에 오늘날 데르샤바크 왕조에 이런 결과물이 생기지 않았는가.
요제프는 넓고 푹신한 가죽 의자에 몸을 기댔다. 몸을 축 늘어뜨리고, 흐린 초점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어딘가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요제프는 그것이 환청임을 안다.
15년 전, 아버지를 따라 교단을 방문했던 그날 이후 그를 항상 따라다니는 끔찍한 악몽.
‘약과 독의 본질이 같듯, 축복과 저주도 결국 같은 것임을 아시오?’
이제는 줄줄 외울 것 같은 노파의 말.
요제프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럴수록 그날의 일은 더욱 뚜렷한 잔상으로 남는다.
‘모든 것은 과해질수록 해가 된다오. 요하네스 국왕. 그대는 선조 대부터 이어져 오던 우리의 언약을 배신하고 그대의 이익을 위하여 악의 편에 섰소. 그리하여 오늘, 우리의 언약은 다시 활개를 치리니. 이제 그대들은 영원한 안식을 벗어나기 위해 허우적거리게 될 것이오.’
저주를 내리는 노인의 담담한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대마법사 그레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