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왕자비 전하를 욕보이는 행동입니다!”
“데르샤바크 왕가를 욕보이는 것은 괜찮다는 말입니까?”
오늘도 국무회의는 엉망진창이었다.
요제프는 지루함을 꾹 참아내며 존재감 없는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귀족파와 국왕파는 한 치의 양보 없이 치열하게 싸워댔다.
평소와 같은 모양새였다.
탕!
누군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회의장 문을 열어젖히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모두의 시선이 문가로 향한다.
그곳에는 뒤에 하인을 잔뜩 달고 있는 드레스 차림의 귀족 여성이 한 명 있었다.
여성의 옷차림은 중요한 국무 처리를 하는 회의장과 어울리지 않게 가볍고 발랄했는데, 파스텔 톤의 화사한 드레스와 커다란 리본이 달린 밀짚모자가 눈에 띄었다. 커다란 모자에 얼굴이 가려져 있어, 아무도 그녀가 누구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또각. 또각. 또각.
경쾌한 구두 소리가 경건한 회의장을 가득 채운다.
“!”
여자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게 된 이들이 모두 경악했다.
“어머, 여기들 계셨네요.”
고개를 든 마리안이 그들을 보며 싱긋 웃었다.
장내가 일순 조용해졌다.
마리안 왕자비는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신경 쓰지 않고 뒤의 하인들을 불러 이것저것 지시했다.
회의장 맨 뒤쪽에 어울리지 않는 티 테이블이 차려졌다.
알록달록한 디저트들과 화려한 찻잔.
마리안은 피크닉용 간이 의자에 앉아 차를 홀짝 마셨다.
침묵과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 신경 쓰지 마시고 하던 일 하세요.”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러나 이게 별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브랫 백작은 왕자비가 하필 이곳에서 차를 마시는 것은 지난번 자신의 패배를 전시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우리 둘의 첫 만남을 기억하라’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그의 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화상을 입었던 허벅지가 아렸다. 이미 그에게 마리안 왕자비는 위협적인 존재로 각인되어 있었다.
백작이 겁을 먹어 새파랗게 질려 있는 동안, 다른 귀족파 신하들은 저들끼리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은 위기를 느꼈고, 어떻게든 마리안 왕자비를 이곳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함부로 나섰다가 브랫 백작 꼴이 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왕자비 전하. 이게 무슨 일입니까.”
보다 못한 요바튼 재상이 나섰다.
마리안은 과자를 오독오독 씹어 먹은 뒤, 한가하고 여유로운 말투로 대꾸했다.
“그냥 궁금해서 나와 봤어요.”
“여자는 본디 남자의 일에 끼어들지 않는 법입니다.”
타고난 한계를 자각하고 이만 처소로 돌아가라. 요바튼 재상은 그 말을 돌려 말하고 있었다.
도를 넘은 재상의 말에 마리안은 그저 방긋 웃었다.
“재상께선-”
곱게 휘어진 그녀의 눈꼬리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제가 뭘 궁금해하는지 알고 싶지 않으신가 봐요.”
“…….”
요바튼 공작이 입을 다물었다. 저도 모르게 마리안의 기에 눌린 것이다.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언쟁으로 시끄러웠던 회의장 안은 ‘팅팅’거리는 가벼운 마찰음밖에 들리지 않았다. 마리안이 티스푼으로 찻잔 안을 휘젓는 소리였다.
탁.
마리안이 티스푼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손장난을 그만두고 요바튼 재상을 빤히 바라보았다. 웃음기 하나 없는, 섬뜩한 표정이었다.
“재상의 얼굴이 궁금해서 와 봤지요. 감히 일개 재상이 왕자비의 자질 운운하는 꼴이 어떠한지 직접 보고 싶어서요.”
마리안은 재상처럼 돌려 말하지 않았다.
본디 귀족들은 상대를 공격할 때, 은유적이거나 비유적이지 않은 표현을 쓰는 것을 경박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 이 광경을 목격하고 있는 신하 중 왕자비가 수준 떨어지는 언행을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이 상황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하녀나 하인에게 돌려 말하는 귀족들은 없으니까.
그들은 왕자비가 요바튼 재상을 상대하며, 겸사겸사 자신들에게 경고장을 날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왕족과 귀족과의 차이는 주인과 하인과의 관계와 같으니 적당히 까불고 몸을 사리라는 경고장.
마리안은 계속해서 재상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타고난 사냥꾼 같았다. 천천히 깜박이는 커다란 갈색 눈동자는 여유로울 뿐만 아니라, 흥미로움이 가득했다.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때의 눈이다.
재상은 그 눈을 마주하며 긴장했다. 그는 낮고 중후한 목소리로, 천천히 반문했다.
“지금 왕자비의 몸으로 국정에 참여하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는 질문으로 함정을 팠다.
여기서 왕자비가 긍정하면 문제가 될 것이고, 부정하면 우스워질 것이다.
전자의 경우, 수천 년 동안 대륙에서 관습적으로 이어져 왔던 규칙을 깨겠다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 이 상황에서 조용히 물러나겠다는 것이니 말이다.
요바튼 공작은 왕자비가 대답을 유보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다못해 생각하는 시간이라도 가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을 깬 대답이 들어왔다.
“닥치세요.”
서릿발 같은 목소리.
재상은 순간, 자신이 뭘 들은 것인지 귀를 의심했다.
만약 이곳에 보는 눈이 많지 않았다면, 뒷목을 잡고 휘청거렸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충격적인 언행이었다.
그러나 그 언행의 주인공인 왕자비는 태연자약했다. 그녀는 예쁘게 차려 놓은 테이블을 앞에 두고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당장이라도 먹잇감을 찢어 죽일 준비가 되었다는 듯 형형한 두 눈을 못 본 척한다면 말이다.
“지금 다 큰 사내들끼리, 아녀자의 순결을 두고 흠을 논하는 자리가 아닙니까. 당사자인 제가 펄쩍 뛰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요? 벌벌 떨면서 구석에 숨어 있는 것이 더 수상하죠. ……찔리는 게 있다면 모를까.”
마리안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녀의 넘치는 자신감이 재상이 있는 곳까지 느껴졌다. 귀족파 전체가 주춤했다.
“……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감히 왕자비 전하를 우롱하다니!”
“저들을 당장 감옥에 가둬야 합니다!”
그녀의 기세를 탄, 국왕파 신하들이 뒤늦게 그녀를 지지하는 말을 한마디씩 뱉었다.
“그, 그러면, 모든 것을 그냥 두고 보자는 말입니까?”
“의혹이 있으면 푸는 것이 마땅한 것이지요!”
귀족파가 한발 늦게 반박했다.
회의장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들은 다시 언쟁을 벌였다.
아까와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귀족파의 언행들이 다소 순화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만!”
마리안 왕자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짜증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 소리에 귀족들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들이 왕자비 앞에서 무례를 범했음을, 그것에 왕자비가 화가 났음을 깨달은 것이다.
신하들의 몸이 요제프가 아닌, 마리안 왕자비 쪽을 향해 틀어졌다.
그들의 선두에 선 꼴이 된 마리안은 당황스러워하는 대신 가만히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우아하고, 고압적인 태도로 익숙하게 그들을 다뤘다.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말하죠. 지금 정합시다. 저에게 흠이 있다고 느끼시는 분은 오른쪽으로,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왼쪽으로 서시면 됩니다.”
마리안을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국왕파 대신들이 왼쪽에는 귀족파 대신들이 서 있었다.
국왕파 사람들은 당연히 왼쪽으로 이동할 것이다. 처음부터 그들은 왕자비의 흠을 논하는 것 자체를 반대했으니까.
문제는 귀족파였다.
처음부터 오른쪽에 섰던 것이라면 모를까, 왕자비의 흉흉한 눈을 마주하면서 오른쪽으로 이동할 만큼 담이 큰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왼쪽에 선 신하들이 슬금슬금 분위기를 살핀다. 누군가 먼저 나서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마리안 왕자비!”
재상이 목소리를 높여 왕자비를 불렀다.
그는 이렇게나마 자기편을 붙들고 판을 뒤집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미 회의장의 기세는 왕자비와 국왕파 쪽으로 뒤집혔다.
“요바튼 재상.”
왕자비가 차분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한 분이라도 오른쪽에 서시면 사람들을 꾸려 조사에 들어가게 하시죠. 순응하겠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어요.”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돌려 이곳에 참석한 귀족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귀족파 신하 몇이 움찔했다. 마리안은 그 모습을 찬찬히 눈에 담고는 말했다.
“제 인생을 쉽게 좌지우지하려는 만큼, 본인들의 인생도 그렇게 될 각오를 하고 계실 것이라 굳게 믿습니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띠었다. 연설하는 자들이 으레 지을 것 같은, 상투적이고, 가식적인 미소였다.
“왕실 여성의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평판을 떨어트리셨으니, 귀족 남성의 생명을 내놓으시지요.”
귀족파 사람들을 입을 다물고 머릿속으로 셈을 했다.
‘왕자비가 말하는 귀족 남성의 생명이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귀족들은 자신들이 소신을 지킬 경우 잃게 될 수도 있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친절하게도 마리안이 그것을 직접 설명해 주었다.
“추문은 확실히 밟아 둬야 뒤탈이 없는 법이죠. 형벌로 궁형을 겁시다.”
“그, 그 말은.”
‘궁형’이라는 말에 겁을 집어먹은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네. 잘라 봅시다.”
마리안은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다른 의미로 씨를 한 번 말려보죠.”
그리고 가위로 무언가를 싹둑, 자르는 듯한 앙큼한 손짓도 내보였다.
“…….”
“…….”
애매한 침묵이 회의장을 감쌌다.
귀족파와 국왕파 모두, 왕자비가 꺼내 든 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안은 소녀처럼 해맑게 웃으며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전하, 제 결백이 드러날 경우, 간사한 세 치 혀로 저에게 커다란 흠을 내려한 자들에게 궁형을 내려주세요.”
보석이나 드레스를 사달라고 조르는 것 같은 가벼운 아양이었다.
“…….”
요제프는 팔을 괴고 흥미로운 얼굴로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마리안의 어깨너머에 있는 마리엘라를 보았다.
‘이야, 통속 소설 외길 인생이 여기서 빛을 발하네.’
마리엘라는 뒤에서 조용히 감탄하는 중이었다.
마리안의 재능을 새롭게 발굴해냈다.
물론 몇몇 잔꾀들은 그녀가 일러준 방법들이긴 했다. 티테이블을 이곳으로 가지고 온 것이나, 귀족파와 국왕파의 위치를 바꿔서 찬반을 지정한 것 같은 꼼수들.
그러나 그것을 소화한 것은 온전히 마리안의 능력이었다. 확실히 마리안은 남을 짓누르는 것에 재능이 있었다.
그녀는 마리안이 꾸려낸 새로운 상황에 감탄하다가 먼 곳에 앉아 있는 요제프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가,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내려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네?”
마리안은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요제프를 졸랐다. 요제프는 사람 좋은 얼굴로 방긋 웃으며 말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역시 당신은 제 속을 훤히 아시는군요.”
“하, 하오나 전하……!”
귀족파의 누군가가 요제프를 설득하려 했다.
“자, 그럼 왕자 전하의 허락도 떨어졌고. ……시작해 볼까요.”
그러나 마리안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등 뒤의 하인에게 무언가를 가져오라고 손짓했다.
곧이어 하인이 무언가를 들고 나왔다. 커다란 모래시계였다.
“5분 드리겠습니다. 이 논쟁은 처음부터 그릇되었어요. 저의 순결은 저에게 직접 물으셔야지요.”
딱.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하인이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여러분의 소신 있고 용기 있는 선택, 지켜보겠습니다.”
완전히 남 일을 구경하는 어투였다.
국왕파가 느릿느릿 왼쪽으로 몸을 옮겼다. 귀족파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 보았다. 그러나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었다. 모래시계 속 모래가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스스스슥.
모래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 모래가 반도 안 남은 이 시점에 신하들은 모두 왼쪽에 몰려 있었다. 회의장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팔짱을 끼고 이 상황을 지켜보던 마리안이 천진한 목소리로 귀족파를 약 올렸다.
“이게 무슨 일이죠. 조금 전까지 제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건가요.”
명백한 도발이었지만, 귀족파는 모두 고개를 숙였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서로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귀족파 대부분은 상업의 발달과 함께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었다. 쉽게 말해 졸부였다. 십 년 가까이 나라를 쥐락펴락했지만, 운 좋게 상황이 딱 맞물렸을 뿐 그들이 잘나서 얻은 결과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길 것이 뻔한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에만 익숙했다. 한 발 잘못 내디디면 나가 떨어져버리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그들의 전문이 아니었다.
재상인 요바튼 공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왕가를 수호해 왔던 요바튼 가문의 가주였다. 요바튼은 소드마스터를 두 명이나 배출할 정도로 이름 높은 기사 가문이다. 그의 붉은 핏속에는 대대로 내려져 왔던 선조들의 호기로움이 가득했다.
그는 잔챙이 같은 귀족파 신하들이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먼저 나서서 대신 칼을 맞아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그가 앞장서 왕자비의 오른편에 선다면, 그들은 그의 뒤를 따를 것이다.
재상은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가 한 발자국을 내디디려 할 때였다.
탁.
누군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재상은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을 저지한 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몸이 굳었다. 그의 주군이었다. 귀족파의 진짜 수장, 무리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중인 지배자.
“……어찌하여?”
재상은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남자는 아무런 말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무겁게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재상은 넋 놓은 표정으로 남자가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다가, 주군의 명에 잠자코 따르기로 했다.
짝.
경쾌한 박수 소리와 함께 마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주어진 시간이 끝났으니 머릿수를 한번 세어 볼까요?”
아직도 경내는 고요했다. 숨소리 하나도 나지 않았다.
마리안은 갸륵한 표정과 연극적인 말투로 자신을 치장하고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왼쪽에는 사람들이 가득 찬 반면, 오른쪽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이 퍽 마음에 들었다. 진짜로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었다.
“아, 셀 필요가 없나요? 어차피 오른쪽엔 아무도 없으니까.”
마리안의 왼쪽에서 드문드문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렇게 간단하게 끝날 수 있는 것을 왜 이렇게 질질 끌었는지 모르겠네요. 여성의 명예는 쉽게 실추시켜도, 남성의 명예는 잃어버리기 싫으신 건가.”
마리안은 잔뜩 신나 귀족파를 조롱했다.
가만히 뒤에서 마리안의 독주를 지켜보던 마리엘라가 조용히 그녀의 뒤로 다가왔다. 이 이상 나가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무리 싸움인 정치에서 쓸데없는 트러블을 일으킬 필요는 없지.’
그녀가 마리안을 말리려고 할 때, 가장 높은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요제프가 몸을 일으켜 주의를 환기시켰다.
“회의를 파합시다. 중요한 안건이 이리 빨리 결론이 나니 마음이 참 후련하군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귀족파 대부분이 왕자에게 예를 갖춰 인사한 후, 앞다투어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국왕파 신하들은 오랜만에 보는 광경에 저들끼리 껄껄거리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텅 빈 회의장에 마리안과 요제프가 남았다.
둘은 서로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천천히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전하.”
“나의 공주님.”
나비처럼 붉은 카펫 위를 사뿐사뿐 걷던 마리안이 자신의 내면에서 벅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요제프에게 달려가 안겼다. 요제프는 능숙하게 그녀를 안아 살짝 들어 올렸다. 참으로 동화 같은 광경이었다.
마리엘라는 저 둘이 통속 소설 속 주인공 같다고 생각했다. 사랑밖에 모르는 순수한 왕자와 그런 왕자를 세상의 모진 풍파에서 지켜주려는 강단 있는 왕자비.
멋진 장면이다.
‘저 새끼 속이 시커멓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마리엘라는 마리안의 귓가에 달콤한 말을 속삭임과 동시에 저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요제프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요제프는 되바라진 마리엘라의 태도에 피식, 하고 작은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은 안 그래도 짜증이 가득한 마리엘라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전하, 오늘 회의가 일찍 끝났으니 같이 정원에 나가 티타임을 가져요. 악사들을 불러 작은 연주회도 열고요.”
아무것도 모르는 마리안은 요제프의 품에서 벗어나 그의 양손을 잡고 철없이 졸라댔다. 왕자는 잠깐 고민하는 척을 하더니 곧 그녀의 요구를 수락했다.
“자잘한 업무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뭐, 사랑하는 우리 ‘마리’를 위해서라면 뭐든 못할까요.”
‘저게 진짜.’
마리엘라는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 풀었다. 지금 왕자는 일부러 마리안을 마리라고 불렀다.
그녀는 눈에 힘을 줘 요제프를 노려보았다. 요제프는 능글맞은 얼굴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했다.
둘 사이에 다시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너무 신나요. 그럼 저는 먼저 가 있을게요. 하녀와 시종들을 시켜 준비해 두겠습니다. 전하께선 어떤 차를 좋아하세요?”
아무것도 모르는 마리안 왕자비만 잔뜩 신나 있었다.
“당신이 준비해 주신 것이라면 뭐든 좋아요, 나의 작은 별.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요. 의복을 갈아입고 갈게요.”
마리안은 처음으로 갖는 단둘만의 시간에 잔뜩 들뜬 얼굴을 하고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왕자비의 하녀들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마리엘라는 바로 왕자비를 따라나서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왕자를 응시했다.
요제프가 뒷짐을 진 채로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온다.
그가 그녀의 코앞에 도달했을 때, 마리엘라는 싱긋 웃으며 악담을 던졌다.
“사람이 어찌나 무능한지.”
요제프 역시 지지 않고 방긋 웃으며 맞받아쳤다.
“그게 내 역할인 걸 어쩌나.”
호화롭고 넓은 회의장.
두 남녀가 가깝게 서서 서로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고 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것은 다정한 웃음뿐이건만 어찌 된 일인지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둘이 서로를 향해 적나라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을 때, 적막을 깨고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요제프.”
율리안이었다.
“율리안.”
요제프가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율리안이 요제프를 향해 빠르게 걸어왔다. 다소 화가 난 듯한 발걸음이었다.
마리엘라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고 시선을 급히 바닥으로 숙였다.
율리안은 경멸하는 시선으로 마리엘라를 힐끔 보고는 요제프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붙은 먼지를 털어주었다.
그리고 정중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공격적인 말투로 그에게 충고했다.
“요제프, 결혼은 신성한 거야. 넌 왕자비에게 최선을 다해야 해.”
“그러지.”
요제프는 별다른 변명 없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율리안은 그 말을 믿겠다는 의미로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다시 뒤돌아 나갔다. 나가면서 마리엘라를 한번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리엘라는 율리안이 떠난 곳을 바라보며 요제프에게 넌지시 물었다.
“바이르 공작님은 인간관계가 많이 협소하신가 봐요.”
‘쟤 친구 없냐?’라는 뜻이었다.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요제프가 호탕하게 웃더니 바로 인정했다.
“우리 율리안이 교황님 손에서 자라서 매사 경건하고, 진지하지.”
그녀는 미묘한 표정으로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친한 친구가 전하뿐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우리 마리 아가씨는 말귀를 잘 알아들어서 좋아.”
“다시는 그런 호칭 쓰지 말라고 몇 번 말씀드렸을 텐데요.”
요제프는 얄밉거나 고압적인 말로 받아치는 대신, 조용히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 * *
늦은 밤이었다.
비밀 서재에 귀족파 사람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모여 있다.
그들은 지금 갑자기 등장해 자신들이 장악한 판을 야금야금 뒤집고 있는 마리안 왕자비 때문에 크게 당혹스러워하는 중이었다. 기 싸움에서 한두 번 졌다고 뒤바뀔 판도는 아니었지만, 이대로 계속 간다면 빠른 시일 내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들은 어느 때보다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귀족들은 어떻게든 상황을 타파하러 이런저런 대책들을 꺼냈지만, 그 안에 그렇다 할 해법이 없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지지부진한 의견은 이쯤하고, 진짜 방법을 내시오, 진짜 방법을!”
재상이 책상을 두 번 치며 고함을 쳤다.
그는 오늘 낮에 있었던 일에 크게 분노했다. 눈치만 보던 사람들에게 환멸을 느낀 것이다.
호전적인 성향인 요바튼 공작은 이득 볼 궁리만 하지 중요한 일에 목숨 걸 줄은 모르는 지지부진한 귀족들이 답답했다.
“방법이 있어야 말을 하지요.”
“그래서 지금 궁리를 하자는 것 아닙니까.”
끄트머리에 있던 귀족들 몇이 볼멘소리를 하다가 매섭게 노려보는 재상의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넓은 테이블 위를 가득 채웠다. 회의장에서의 끔찍한 고요가 재현되는 것 같았다. 아무도 의견을 내지 않았다. 야비하고 말 많기로 유명한 브랫 백작마저 가만히 앉아 눈치만 보았다.
그때, 침묵을 깨고 누군가 목소리를 건넸다.
“리덴부르크 백작을 이용하지.”
웬만해선 의견을 먼저 꺼내지 않는 남자였다.
귀족파의 수장. 요바튼 공작이 주군으로 인정한 사람.
재상을 비롯한 방 안의 귀족들이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가 읽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로 던졌다.
“리덴부르크 백작의 외가가 ‘한’가문 출신이더군.”
“한가문이요?”
누군가 놀라 되물었다.
한 가문은 가장 융성했던 흑마법사 가문 중 하나였다.
지금은 교황청에 의해 멸문당한 상태였고.
“그래. 거기다가 17년 전, 3차 성마대전 때 리덴부르크 백작가가 마녀들에게 자금을 대주었다는 의혹도 있어. 배를 통해 물자를 올려 내는 걸 목격한 증인들이 있다더군.”
남자의 근처에 있던 귀족들은 남자가 책상 위로 던진 서류를 집어 찬찬히 읽었다.
왕자비의 부친인 리덴부르크 백작과 한가문의 연관성과 의혹 등이 잘 정리된 보고서였다.
“하나…….”
그들 중 하나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부정적인 어조를 내비쳤다. 그러자 다른 귀족들이 줄줄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왕자비가 저리 영특한데 자칫 잘못하다가는…….”
“역풍을 맞게 되면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
쾅!
재상이 책상을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진위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야!”
재상의 호통에 귀족들이 겁을 집어먹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불만스러운 표정은 여전했다. 재상에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면서, 자신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공작이 불편했던 것이다.
남자는 그들의 그런 심리를 간파했다. 그는 그들을 나무라거나 달래지 않았다. 그저 재상을 두둔할 뿐이었다.
“맞아. 진위 여부는 하나도 상관없는 일이지. 중요한 건, 왕자비의 친정과 흑마법을 연관 지을 수 있다는 것뿐.”
머리 회전이 빠른 브랫 백작은 남자의 의도를 깨달았다.
그가 긴장한 얼굴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렇다는 건…… 마리안 왕자비를 마녀로 몰자는 것입니까?”
여기저기서 놀라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흡족한 질문을 들은 남자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의 붉은 입술이 오늘따라 잔악해 보인다.
“리덴부르크 백작가는 수도와 떨어져 있던 탓에 마녀사냥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하나도 몰랐다지?”
귀족들은 남자의 말을 경청했다.
남자는 너무 많이 생각해 익숙한 얼굴을 허공에 떠올려 보았다.
마리안 디프네 데르샤바크.
해맑고 구김살 없는 얼굴 아래 지혜로움을 숨기고 있다고 오해받는 여자.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친히 알려드릴 차례군.”
지금 그녀만큼, 그의 계획을 위협하는 존재는 없었다.
남자는 왕자비의 존재감이 커지기 전에 서둘러 그녀를 제거하기로 했다.
깔짝깔짝 대며 간을 볼 시간이 없다.
그는 단숨에 뿌리를 뽑고자 ‘흑마법사’라는 금기의 패를 꺼내기로 했다.
* * *
태양이 기세등등한 대낮이었다.
정원 구석에 있는 커다란 나무 그늘에서 두 남녀가 도란도란 티타임을 즐기고 있다.
마리안 왕자비와 요제프 왕자였다.
“차가 향이 참 좋네요.”
“그렇죠? 처음 맛보자마자 바로 전하가 생각났답니다. 이 좋은 차를 같이 즐겼으면 해서요.”
멀지 않은 곳에서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했다. 봄처럼 산뜻하고, 가을처럼 부드러운 음이 두 사람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마치 연인들이 서로의 귓가에 대고 사랑을 속삭이는 것 같은 음악이었다.
요제프는 턱을 괴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마리안의 커다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무언가를 잔뜩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아마 칭찬이겠지.’
요제프는 눈웃음 속에 냉소를 감췄다. 왕성에서 마리안처럼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내어주기로 했다.
“그렇게 저를 생각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사실 저는 이것이 맹물이어도 상관없어요. 당신과 함께하는 것은 무엇이든 최고의 것이죠. 특히 오늘은…….”
그는 말꼬리를 끌며 뒤에 서 있던 마리엘라를 힐끔 보았다.
살짝 올라가는 왕자의 입꼬리를 마리엘라만 포착했다.
마리엘라는 속으로 울컥했지만 그것을 겉으로 티 낼 수 없었다.
다시 시선을 마리안에게 돌린 요제프가 그녀의 볼에 붙은 잔머리를 정리해주며 다정히 말했다.
“……오늘은, 정말 잊지 못할 거예요. 나의 수호자.”
키우는 강아지에게 간식을 주는 것 같은 태도였으나, 전후 사정을 모르는 마리안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어머, 수호자요? 제 별명이 또 늘었네요, 요제프 전하.”
마리안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다소곳하게 웃어 보였지만, 사실 그녀는 지금 어느 때보다 들떠 있었다.
마리안은 지금 자신의 활약에 도취되어 있는 상태였다.
요제프와 마리엘라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각각의 이유로 마리안을 제지하지 않았다.
요제프에게는 지금 이 상황이 그저 남 일이었고, 마리엘라는 오랜 경험으로 마리안을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체득해왔기 때문에 효과 없는 일에 힘쓰지 않기로 했다.
“그대가 원한다면 계속 만들어 드리지요. 나의 작약 꽃, 작은 새, 봄 햇살, 카나리아.”
요제프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마리안의 손끝을 살짝 잡았다.
마리안이 장난을 치듯 손을 쓱 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차를 홀짝였다.
“차가 식어요, 요제프.”
장난스럽게 덧붙이는 말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두 사람이 거짓 없이 이어진 부부였다면, 행복한 추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만큼 모든 것이 완벽한 순간이었다. 나뭇잎 사이사이로 따듯하게 내리쬐는 햇빛과 선선하게 부는 바람을 타고 은은하게 풍기는 꽃향기, 왕궁 요리사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달달한 과자와 씁쓸한 향으로 맛의 균형을 잡아 주는 홍차까지.
“그렇군요. 모처럼의 티타임인데 차가 식으면 안 되지요.”
요제프는 마리안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따라 하며 똑같이 찻잔을 들었다.
우아하게 눈을 내리깔고 차를 마시던 마리안의 시선이 요제프를 슬쩍 바라보았다.
요제프는 그것을 못 본 척했다. 이 이상 이런 상황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쪽.
민망한 소리가 허공에 퍼졌다.
왕자비가 자신의 몸을 일으켜 탁자 너머의 왕자에게 입맞춤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요제프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틀어 마리안의 입맞춤을 피했고, 덕분에 마리안은 허공에 대고 ‘쪽’소리를 낸 바보 꼴이 되었다.
‘망했다.’
뒤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본 마리엘라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녀는 이 일이 가지고 올 파장과 자신이 해야 할 뒷수습을 생각해 보았다. 감정이 얽히면 모든 것이 복잡해진다. 그녀는 제발 모든 것이 무난하게 끝나기를 바라며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무안한 상황이 연출되고, 마리안이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요제프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어내며 급히 변명했다.
“미안해요, 마리안. 제가 하필 그 타이밍에 연주자들을 바라보는 바람에. 저는 단지 음악이 너무 좋아서…….”
“아닙니다, 전하. 제가 너무 마음이 앞섰나 봐요. 전하를 보니 순간 가슴이 뛰어서…….”
마리안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부끄럽다는 듯 어깨를 살짝 흔들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마리엘라는 마리안이 이 어이없는 상황에 분노하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마리안은 본디 마음이 티스푼 같은 사람이라, 별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고 앙심을 품곤 했다.
‘그만큼 마음이 쉽게 풀리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었단 말이지.’
마리엘라는 최대한 귀찮은 일을 피하고 싶었다.
마리안과 요제프 사이에 껴서 애매해지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모든 것을 무마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왕자가 마리안을 다정하게 껴안으며 입 맞추는 것뿐이었지만, 요제프는 그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해맑은 얼굴을 하고 차만 홀짝홀짝 마셨다.
“그나저나 풍경이 참 좋군요.”
이런 도움이 안 되는 말만 늘어놓으면서.
* * *
티타임이 끝난 직후였다.
“아니야!”
쿵쿵거리는 발걸음으로 처소로 돌아온 마리안은 침대 위로 엎어지며 중얼거렸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였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고!”
‘내 이 꼴 날 줄 알았지.’
마리엘라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녀는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왕자의 행동을 포장해서 그녀를 달래는 것은 못할 짓이다. 목숨이 달린 일이라 섣불리 진실을 일러줄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기만하고 싶지는 않았다. 미우나 고우나 상관없이 마리안은 그녀의 은인이자 친구였다.
그녀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마리안의 머리를 푸르며 말했다.
“그러고 있으면 담 걸려요. 머리 장식이랑 구두라도 좀 벗겨 드릴게요.”
“이럴 거면 나랑 결혼을 왜 했대?”
마리안의 뚱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키스도, 뽀뽀도 안 할 거면 왜 했냐고!”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옆에 있던 베개를 집어던졌다.
마리안의 머리 장식을 빼던 마리엘라가 놀라 그 자리에 굳었다. 마리안이 베개를 집어 던져서는 아니었고, 그녀가 한 말 때문이었다.
“……여태까지 아무것도 없었다고요?”
“없었어.”
“하지만…….”
마리엘라는 거기까지 말하다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이 첫날밤을 치르려고 한 그날 요하네스 왕이 승하했다는 것을 기억해냈기 때문이었다.
“이럴 거면 왜 나랑 결혼한 거지?”
“…….”
마리엘라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녀는 뒤늦게 의구심이 들었다.
‘요제프는 왜 마리안과 결혼했을까. 왕자비의 똑똑한 하녀를 이용해먹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진짜 자기편이 되어줄 인재가 필요한 것이었으면 다른 방법을 써서 어떻게든 조달해냈을 것이다.
마리엘라는 일개 하녀였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잔꾀를 잘 부려도 태생적으로 귀족으로 태어나 사람을 부리고 세력싸움을 벌이는 이들과 같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이렇게 평가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녀는 왕자에게 믿음을 주는 존재도 아니었다. 만약 마리엘라가 요제프였다면, 백작가의 하녀에게 이런 중대한 일을 맡기지 않을 것이다. 둘 사이에 심리적으로 쌓아온 관계도 탄탄치 않을뿐더러, 물질적인 욕망이 강해 다루기 쉬운 것도 아니었고, 정신적인 지향점이 있어 목숨을 걸고 왕자의 편에 설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회유와 협박만으로 움직이는 관계. 그것은 딱 귀족과 하인의 관계와 같았다. 매로 다스린 개는 언제라도 주인을 물 준비를 한다. 그녀도 온전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왕자를 배신하는 수를 쓰더라도 왕성을 떠날 것이다.
거기다가 마리안의 신분도 왕자비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진 거라고는 사냥터밖에 없는 일개 백작가의 딸이다. 결혼으로 얻을 수 있는 수많은 이익을 생각하면 수지가 안 맞는 장사다. 요제프는 얼굴이 잘났으니 권세가의 딸을 꼬드겨 자신의 입지를 탄탄하게 만들 발판으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 진짜 이유가 뭐지?’
마리엘라는 왕자비의 보석을 정리하다 말고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아는 요제프는 원하는 것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발걸음에는 매 순간 이유가 있었다.
그가 이 결혼을 통해 가지고 싶었던 게 뭘까.
‘사랑?’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자신의 생각을 완강히 거부했다.
‘아냐, 그건 아니야.’
제이 도련님과 요제프 왕자는 다르다.
지금의 그는 아무것도 안중에 없는 듯했다.
마리안도, 마리엘라도.
* * *
해가 막 지기 시작한 이른 밤이었다. 마리엘라는 평소보다 빨리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오늘따라 마리안이 빨리 잠이 든 덕분이었다. 오랜만에 책이나 읽으며 생각을 정리해볼까 싶었던 그녀에게 낯익은 불청객이 찾아왔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방에 불청객이 먼저 와 있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오신 거죠?”
마리엘라는 새초롬한 눈으로 그녀의 침대 위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정체는 요제프였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왕비나 왕의 처소는 그들이 신뢰하는 하인의 방과 연결되어 있거든. 비밀리에 일을 시킬 때도 있고, 뭐, 이런저런 사유로.”
“이 방에 비밀 통로가 있다고요?”
“우리 어머니의 처소와 연결되어 있지.”
그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름한 옷장의 문을 열어 보였다.
그는 옷장 문의 손잡이를 왼쪽으로 두 바퀴 돌리고, 옷장 가장 안쪽 면을 옆으로 밀었다. 그러자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통로가 나왔다.
열린 옷장 문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마리엘라는 잠에서 깰 때마다 듣곤 했던 원인을 알 수 없는 바람소리가 바로 저기서 났던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곳엔 왜 오셨나요? 왕자 전하.”
“축배라도 들려고.”
그가 침대 쪽으로 턱짓했다. 침대 모서리에 얌전히 놓여 있는 샴페인과 유리잔 두 개가 뒤늦게 그녀의 시야에 잡혔다.
“오늘 일의 진짜 주인공과 말이지.”
그는 옷장 문을 닫고 샴페인을 들었다.
그러나 마리엘라는 축배를 들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마리안이라는 또 다른 숙제가 남아 있었다.
“마리안이 당신의 사랑을 의심해요.”
“그래?”
요제프는 그녀가 꺼낸 화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굴었다. 그는 기포가 톡톡 튀는 샴페인 잔을 그녀에게 건넸다.
마리엘라는 경직된 태도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냥 흘러 넘길 생각은 말아요. 마리안이 전하를 의심하게 만들지 마세요.”
“마리엘라.”
요제프가 실소하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왕자비가 내 사랑을 의심하는 거랑 나랑 대체 무슨 상관이지? 그녀가 재상인가? 아니면 귀족들을 좌지우지할 만큼 이름난 가문 출신인가? 그것도 아니면 교황청과 연관이 있던가? 나는 내가 그녀의 눈치를 봐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지도, 표정을 날카롭게 굳히지도 않았다. 평소와 같은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이상하게도 그 안에서 위압감이 느껴졌다.
마리엘라는 눈을 내리깔고 침묵했다.
여기서 그의 화를 돋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안위를 걱정하는 거라면, 다른 쪽을 더 신경 써야 하지 않나? 가령 내 비위를 맞추는 거라던가.”
하지만 정말 그녀가 비위를 맞춰주길 바라는 얼굴은 아니었다.
‘뭘까.’
마리엘라는 왕자의 태도가 조금 미묘하다고 생각했다.
감정에 결이 있다고 한다면, 비슷비슷하게 흘러가는 흐름 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손 끝마디에 걸렸다. 마리엘라는 그 툭 튀어나온 감정이 요제프의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뭔지 아직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제가 너무 주제넘었네요.”
그녀는 일단 무릎을 굽혀 왕자에게 사죄했다.
“아니야, 그런 식으로 격식 차릴 필요는 없어. 일단 이리 와서 이 잔을 받아. 널 위한 축배인데 네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사과하지.”
그는 미안해하는 것 같지 않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잔을 건넸다.
마리엘라는 담담하게 술을 입에 머금었다. 허름하고 좁은 방에 고급 샴페인. 시골 출신 하녀인 마리엘라와 왕자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 같아 조금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가 요제프와 눈이 마주쳤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요제프는, 그런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적나라한 눈동자 속에는 그 어떤 웃음기도 없었다.
꿀꺽.
마리엘라는 긴장하며 술을 삼켰다.
그리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갑자기 낮의 일화가 떠올랐다.
그녀가 티 나게 자신의 시선을 피하자, 요제프가 방긋 웃었다. 그는 상냥하고, 장난스러우며, 지배욕이 가득하고 동시에 어딘가 살짝 지친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네게 원하는 건 단 하나야. 그냥 그대로 있어. 평소처럼 말이야. 나를 맨얼굴로 있게 해주는 건 이 세상에 너 하나뿐이니까.”
그것은 그가 스스럼없이 내보인 단서였다.
비슷비슷한 흐름을 거부하고 툭 튀어나온 감정에 대한 단서.
그의 생각을 알 것 같으면서 동시에 도통 모르겠다.
애매하고 미적지근한 기분이 그녀의 몸을 휩쓸었다.
마리엘라는 제 손에 마실 것이 쥐어진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샴페인을 한 모금 더 머금었다. 무겁고, 시큼하고 살짝 달콤한 향이 마리엘라의 입안에 맴돌았다. 그것보다 더 깊고 진하게 잔상을 남기는 생각이 있었다.
‘이럴 거면 왜 나랑 결혼한 거지?’
오늘 낮, 마리안이 중얼거렸던 말.
요제프의 진의를 향한 의구심이 마리엘라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 * *
왕성에서 시체가 발견됐다.
시신은 정원 구석진 곳, 커다란 물푸레나무 아래에서 앉은 자세로 발견되었다. 마치 주정뱅이가 술에 취해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자는 모습이었다.
발견자가 풀숲을 나뒹굴다가 시체를 발로 치지 않았더라면, 그것이 죽은 자인지 알아차리지 못했을 만큼 자연스럽게 앉아 있었다.
시신을 신고한 사람은 도미닉 남작이었다.
그는 귀족파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브랫 백작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잔챙이였다.
도미닉 남작은 왕성의 하녀와 정원에서 몰래 밀회를 벌이던 중 시신을 발견했다.
남작은 자신의 발길질에 스르륵 넘어지는 시체를 확인하고는 하얗게 질려서 기사에게 달려갔다. 상의를 반쯤 벗은 하녀의 존재는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왕성에서 죽은 사람이 발견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드문 일도 아니었다. 권력이 집중되는 곳은 늘 자의 혹은 타의로 죽는 자들이 즐비했다.
문제는 시체의 외양이었다. 죽은 이의 전신은 파란색 반점으로 가득했다.
인간의 피부에서 자연스레 나올 수 없는, 염료보다 쨍한 파란 색 반점.
그건 고인이 흑마법사의 저주로 죽었다는 뜻이었다.
‘왕성에 흑마법사가 숨어들었다는 말이기도 하지.’
보고를 받은 요제프는 손끝으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제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기사단장에게 명령했다.
“입단속 철저히 하라고 해.”
그러나 그의 명령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요제프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곧, 마녀가 왕성에 등장했다는 소문이 퍼질 터였다.
* * *
“너, 그 소문 들었어?”
“파란색 반점투성이의 시체 이야기?”
“응. 역시 너도 알고 있었구나.”
“지금 다들 그 얘기뿐이야.”
하녀들이 일하다 말고 저들끼리 쑥덕거렸다.
하녀들뿐만 아니었다. 왕성의 경비를 맡은 기사들, 국정을 논하는 귀족들까지. 모두가 파란 반점의 시체 이야기를 했다.
요제프의 예상이 맞았다.
왕성 내에서 마녀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괴담처럼 떠돌아다녔다.
누구는 3차 성마전쟁으로 딸을 잃고 정신을 놓아버린 마녀의 짓이라고 했고, 또 누구는 그때 우연히 살아남게 된 어린아이가 자란 것이라고 했다. 대마법사 그레타가 죽음에서 돌아온 거라는 말도 있었다.
소문은 각양각색의 이야기를 타고 퍼지고, 또 퍼졌다. 주어 없이 이야기를 해도 모두가 알아들을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소문이 성벽을 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문은 성안에서만 머물렀다. 왕가의 스캔들에 늘 귀를 기울이고 있는 수도의 사교계조차 왕의 정원에서 마녀의 저주를 받아 죽은 자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 사건과 그에 따라 불거진 소문을 알고 있는 것은 오로지 왕성과 연관된 사람들뿐이었다. 왕성에서 살고 있거나, 왕성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들은 저들끼리 수다스럽게 떠들어대긴 했어도, 성 밖에 나서면 입을 다물었다. 흑마법사와 관련된 일이라서 그랬다.
물론 그것은 교단이 몰고 올 피바람이 무서워서였지, 마녀가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일반 백성들이면 모를까, 왕성의 사람들은 마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레뎃샤를 믿었고, 교황을 믿었고, 하얀 돌의 역사를 믿었고, 하얀 돌을 만들어 낼 만큼 신실한 데르샤바크 왕조의 핏줄을 믿었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궁금해했다.
“왜 하필 지금 나타난 거지?”
“어째서 갑자기 왕성에서 사람을 죽인 거지?”
“마치 자신의 존재를 전시하려는 것 같아.”
궁금증은 다른 소문으로 해소되었다.
“분명 마리안 왕자비와 연관되었을 거야. 이 성에서 새 식구는 왕자비밖에 없잖아?”
“시골 출신이면 살아남은 것도 이해가 돼. 아래 지방은 무슨 일이 벌어진지도 모르고 평화롭게 살았다며?”
근거 없는 소문은 점차 확장되었다.
“그거 들었어? 마리안 왕자비가 마녀래.”
“대마법사 그레타의 수제자였다는데?”
“왕자 전하를 쉽게 죽이려고 왕자비가 되었다는 말도 있어.”
“그러고 보니 왕자비가 오시고 얼마 되지 않아 요하네스 전하께서 돌아가셨지, 아마.”
“마녀들의 복수를 하려고 온 건가.”
기사들이 마녀와 왕자비에 관해서 한창 떠들고 있을 때, 누군가 벌컥 창문을 열었다.
왕자비의 하녀 마리엘라였다.
마리엘라는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보초를 서던 기사들 말고는. 기사들은 바짝 쫄아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리엘라는 그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문을 닫았다.
소파에 앉아 통속 소설을 읽고 있던 마리안이 그녀에게 물었다.
“밖에서 누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
“그러게요. 저도 방금 들은 것 같아서 창밖을 내다봤는데 아무도 없더라고요.”
“분명 들은 것 같은데.”
마리엘라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기사들의 담화를 모르는 척해주기로 했다. 한두 마디 흘리는 말로 꼬투리 잡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안 보이는 곳에서는 나라님 욕도 한다는데, 뭐 어떤가.
물론 그것은 그녀가 마리안과 관련된 흉흉한 이야기를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베풀 수 있는 자비였다.
왕성을 떠들썩하게 만든 커다란 소문.
그러나 소문의 당사자인 마리안과 마리안의 최측근 하녀인 마리엘라는 아무것도 몰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소문의 속성은 그러한 것이니까.
* * *
요제프는 왕좌 바로 앞에 의자를 두고 앉아 신하들의 보고를 경청했다.
회의장에 모인 귀족들은 성실히 자신의 맡은 일을 했지만, 동시에 왕자의 눈치를 보았다. 왕성은 지금 푸른 반점의 시체 때문에 들썩거렸지만, 요제프는 아무것도 보고 받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다.
귀족파는 물론 요제프의 편인 국왕파 귀족들까지도 언제 말을 꺼낼까 눈치를 보았다.
그때였다. 누군가 중앙으로 걸어 나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헨드릭 남작이었다.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귀족파와 국왕파, 두 개의 파가 격렬하게 대립하는 현시점에 묵묵히 중립을 지키는 몇 안 되는 신하였다. 그의 업무는 왕실의 역사 기록 및 왕실 가계도 정리였다.
“말해보세요, 헨드릭 남작.”
요제프의 허락에 헨드릭이 굳은 얼굴로 말을 꺼냈다.
“송구한 말씀이지만, 신이 기록을 위해 리덴부르크 가문의 가계도를 정리해 본 결과.”
남작은 뒷말 잇기를 꺼려했다.
“말을 하셨으면 끝까지 하셔야지요, 헨드릭 남작.”
재상이 그를 채근했다.
요제프는 헨드릭이 재상에게 매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늦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헨드릭이 머뭇거리다가 다시 굳은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마리안 왕자비의 아버지, 데릴사위로 들어온 리덴부르크 백작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참 큰일이군! 그런데 대체 무슨 문제인지 궁금해지는군요.”
요바튼 재상은 눈에 뻔히 보이는 연기를 했다. 겁 많은 남작이 화두를 꺼낼 수 있게 분위기를 조성해낸 것이다.
헨드릭 남작이 달달 떨리는 턱으로 왕자에게 고했다.
“그의 외가가 한 가문 출신입니다.”
장내가 술렁였다.
귀족파, 국왕파 할 것 없이 당황한 얼굴이었다.
한 가문은 흑마법사 가문으로, 지난 100년 동안 베르단 수도를 좌지우지했던 세력가 중 하나였다. 대마법사 그레타와 대적해 일주일 이상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가문이라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그들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마녀들의 우두머리였으며 멸문당한 이후에도 파급력이 어마어마했다. 한 가문의 사생아란 소문만 돌아도 교단에서 마녀 심판을 받았다.
“지금 리덴부르크 가문이 한 가문과 연관되었다는 것입니까?”
“사악한 마녀의 피를 이었다고?”
“자세히 말씀해 보시오!”
양쪽에서 헨드릭 남자를 압박했다. 남작은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이 알아낸 것들을 전부 고했다.
“왕자비의 부친이자 현 리덴부르크 가문을 이끄는 하이든 리덴부르크 백작은 데릴사위로, 작위를 물려받을 수 없는 리프첸 가문의 넷째입니다. 그런데 리프첸 가문은 50년 전, 릴리 한을 아내로 맞았습니다. 릴리 한은 마녀로 발현되지 않은 한 가문의 방계 혈통이었지만, 아시다시피 흑마법사는 가끔 대를 넘어가서 발현되기도 합니다.”
“대를 넘어간다니? 그 말은 왕자비께서 흑마법사가 될 수도 있다는 소리인가?”
재상이 뒷짐 지고 헨드릭 남작에게 물었다. 남작은 재상의 시선을 피했다.
“그것이…… 감히 제가 이렇다 저렇다 확답을 내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닌지라.”
헨드릭 남작의 시선이 왕좌 바로 앞에 앉은 요제프에게 향했다.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왕자뿐이라는 말이었다. 모든 것을 왕자에게 떠넘긴 행위였다.
모든 귀족이 왕자를 바라보았다.
요제프는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항상 해맑게만 웃던 왕자도 자신의 부인이 마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는 저렇게 표정이 변하는군.’
요바튼 재상은 속으로 통쾌해했다. 그의 입가가 씰룩인다. 그는 표정을 갈무리하고 왕자의 앞에 섰다.
“전하, 이 기회로 미처 드리지 못했던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할까 하는데.”
왕자는 듣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손을 짧게 저었다.
“꼭 들으셔야 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재상은 왕자가 회의를 파하기 전에 미리 선수 쳐서 말을 이었다.
“실은 17년 전 3차 성마전쟁 때, 리덴부르크 백작가에서 마녀들에게 물자를 댔다는 의혹이 있습니다. 또한, 라산 사냥터에서 귀족들끼리 오가던 전쟁에 대한 정보가 마녀들에게 흘러갔다는 말도 있습니다.”
“불경하오! 전하, 지금 이건 왕자비를 모욕하려는 저들의 술수입니다!”
왕자의 추종자, 알폰스 후작이 호통을 쳤다.
재상은 후작의 호통에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조소를 보냈다.
“불경?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맞습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소.”
의외의 인물이 재상을 편들었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국왕파에 몸담았던 발렌 백작이었다. 발렌 백작은 고집이 세고 보수적인 노인이었다.
“흑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여성에게만 발현된다는 것을 다들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리덴부르크 백작이 한가문 출신이라면 상상하기도 끔찍한 일이지만, 그 피를 이어받은 왕자비까지 흑마법사일 가능성이 큽니다.”
같은 편인 발렌 백작이 요바튼 재상의 편에 서서 왕자비를 적대시하니 알폰스 후작이 당황했다. 후작이 붉어진 얼굴로 백작을 타박했다.
“아니, 발렌 백작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지금 무슨 말을 하고 계신지는 압니까? 백작은 지금 왕자비에게 마녀 심판을 하자고 말하는 겁니다.”
“내 생각은 변함없소.”
“백작!”
두 사람의 말싸움이 격해졌다. 후작은 자신이 지금 저들의 술수에 말려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과 몇몇을 제외한 다른 귀족들은 모두 같은 생각인 것도 알았다. 그의 얼굴이 더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지금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알폰스 후작, 진정하시지요.”
재상이 말리는 척하며 알폰스를 약 올렸다.
후작은, ‘이, 이……!’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가 이내 모든 것을 포기했다.
여기서 이렇게 싸워봤자 왕자와 왕자비에게 도움 하나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가 주먹을 쥐고 파르르 떨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다가오거나, 그의 편에 서지 않았다. 다들 흑마법사라는 단어의 무서움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지난 100년 동안 마녀들이 저지른 패악이 되살아날까 두려웠고, 그렇지 않더라도 교단이 다시 칼을 빼 들고 심판을 자행할까 두려웠다.
교단 바레뎃샤는 자애로움을 제1의 교리로 하는 종교였으나, 마녀와 관련되었다면 말이 달라진다.
고고한 귀족부터 허드렛일을 하는 평민까지. 교단의 칼은 신분과 성별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마녀의 뿌리를 뽑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상황이 요바튼 재상이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
모두 두려운 표정을 하고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이제 마침표를 지어야 했다.
재상은 거대한 전쟁을 앞에 둔 기사처럼 호전적인 얼굴을 하고 귀족들의 마음속에 깊이 박힐 연설을 했다.
“우리가 이렇게 진영을 가르며 싸운 지 오래된 건 잘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이 가장 중요한 도리를 모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십 칠년 전을 잊으셨습니까. 우리의 적은 마녀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지금에야 왕자를 지지하니, 마니 하며 격하게 싸우고 있지만, 17년 전에 그들은 모두 같은 편이었다.
백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들을 위협하는 또 다른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흑마법사. 또 다른 말로 하면 마녀.
힘으로 또 권력으로 모두를 압도했던 그들의 존재감을 회상하며 회의장의 귀족들이 침묵했다. 재상의 말이 그들이 기억 한구석에 던져 놓고 잊어버린 과거의 트라우마를 건든 것이다.
“갑자기…….”
침묵을 끊고, 왕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좋지 않군요.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합시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 도피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연약하고 무능한 모습이었다.
요바튼 재상은 물러서지 않고 그를 잡고 늘어졌다.
“회의를 파할 때 파하시더라도 이것 하나만은 결정 내려주시죠.”
“꼭 지금이어야 합니까, 재상.”
“긴급 사항입니다. 저는 당장 이 일을 교단에 알려야 한다고 봅니다. 정원에서 발견된 시체와 함께 말이죠.”
그의 말에 왕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몇 초간 재상을 바라보다가, 힘겹게 대답했다.
“안 됩니다.”
그 말에 회장 안에 모인 신하들이 놀란 눈을 했다. 항상 웃는 낯으로 그렇습니까, 그렇게 합시다, 따위의 말만 뱉던 요제프가 처음으로 거절의 의사를 내비친 것이다.
재상은 왕자의 대답에 뜻 모를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다시 한번 그를 설득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 저희는 왕자비께 해를 끼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왕실을 지키고, 나아가 이 나라를 지키겠다는 것이죠.”
그럴듯해 보이는 말이었지만, 모두 말장난이었다. 재상이 지금 주장하는 것은, 교단에 리덴부르크 백작가를 고발하고 왕자비를 마녀 재판에 회부하자는 것이었다.
3차 성마전쟁이 끝나고 17년, 바레뎃샤교는 마녀와 관련된 수많은 고발을 받았고, 수많은 여성을 마녀 재판에 넘겼다. 그들이 피고발인과 마녀 의혹을 받는 여자들을 다루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사형.
요바튼 재상은 지금 교단의 힘을 빌려 왕자비의 친가와 왕자비를 숙청하자고 말하는 것이었다.
“데르샤바크의 역사를 되돌아보십시오, 전하. 가끔은, 피붙이를 죽이는 선택을 해야만 할 때도 있습니다. 피눈물을 속으로 삼키며 나라를 지키는 것이 그 자리의 본분입니다.”
재상은 왕자를 설득하는 척하며 그를 압박했다.
누구보다 그것을 기민하게 받아들이는 알폰스 후작이 다시 눈을 부릅뜨고 나섰다.
“지금 왕자 전하를 협박하는 것이오?”
“협박이라니. 알폰스 후작, 말이 너무 심하십니다. 저는 그저 이 나라의 재상으로, 이 나라의 재상만이 할 수 있는 직언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재상이 날카로운 알폰스 후작의 말을 호탕하게 받아쳤다. 그는 다시 심각한 표정을 자아내며 왕자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전하,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베르단과 데르샤바크 왕가를 위해 선택하셔야 합니다.”
그의 뒤를 따라 많은 이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전하, 결단을!”
귀족파, 국왕파 나누지 않고 모든 신하가 한목소리로 같은 것을 주장한다. 지금 이 순간 이들의 마음은 하나였다.
왕자비의 죽음.
요제프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면서도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의 의견에 반한 자들을 하나하나 눈에 익혔다.
“아…….”
수백 개의 차가운 눈동자가 조용히 그를 압사시키고 있었다.
그들에 기에 눌린 듯, 요제프는 의미를 추측할 수 없는 짧은 소리를 뱉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 * *
“이것 봐, 마리. 이 꽃 정말 예쁘지 않아? 나중에 내 초상화를 그릴 때, 배경이 될 화병에 꽃아 놓으라고 해야겠어.”
“네, 왕자비 전하랑 잘 어울릴 것 같네요.”
마리엘라는 성의 없이 대충 대꾸했다.
둘은 지금 정원을 산책을 막 끝내고 처소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마리안의 품에는 그녀가 정원에서 직접 꺾은 꽃이 한가득하다.
“아니, 그렇게 설렁설렁 넘기지 말고, 좀 자세히 봐봐.”
마리안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회의장 앞 복도에서 소란스러운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전하께서 쓰러지셨다! 빨리 의원을 불러!”
시종장의 지휘 아래 시종들이 바삐 뛰어다녔다.
마리엘라와 마리안은 놀라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야? 요제프 전하께서 쓰러지셔?”
마리안의 품 안에 있던 꽃이 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그녀는 소란이 이는 곳으로 몸을 틀었다. 금방이라도 달려갈 태세였다.
마리엘라가 서둘러 마리안을 말렸다.
“일단 가만히 계세요, 왕자비 전하. 지금 가봤자 하실 수 있는 일이 없잖아요. 의원이 치료를 다 끝마친 다음에 찾아가셔도 늦지 않아요. 지금은 처소에 돌아갈 때입니다.”
마리엘라는 바닥에 떨어진 꽃을 주우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이 갑자기 쓰러질 리가 없어.’
그녀는 요제프를 알았다. 그는 모든 것은 계산하에 두고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분명 지금 이 일도 의도한 바가 있는 행동일 터였다. 그녀가 집중하는 것은 그가 쓰러졌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나한테 한마디 언질 없이 이런 연극을 벌였다는 건, 무언가 일이 터졌다는 거야.’
근거 없는 불안감이 찾아왔다.
마리엘라는 오늘 밤 은밀히 요제프를 찾아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 * *
요제프가 쓰러진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는 병을 치료하는 의원 외의 모든 이들의 출입을 금했다. 심지어 아내인 마리안 왕자비의 방문 역시 거부했다.
많은 신하가 요제프의 처소 앞에서 그를 기다렸지만, 그는 신하들의 알현을 거절했다. 문을 걸어 잠그고 모든 방문을 거절하기를 일주일, 문전성시를 이루었던 신하들도 더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전하의 상태가 어떠한지, 그것만 말해주세요. 왕자비 전하의 간곡한 부탁입니다.”
왕자비의 하녀인 마리엘라는 홀로 꿋꿋이 왕자의 처소 문을 두드렸다.
물론 정말로 왕자의 병이 위중한지 걱정되어서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요제프는 그날 이후 마리엘라의 방문 역시 거부하고 있었다. 그가 먼저 찾아오는 일도 없었다. 거짓말처럼 발길이 뚝 끊긴 것이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엄청난 일이 발생한 것 하나는 확실했다. 요제프는 지금 병을 핑계로 자신이 쥐고 있는 정보가 마리엘라에게 공유되는 것을 차단하고 있다.
자신도 모르는 일이 뒤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마리엘라를 안달 나게 했다.
왕자를 모시는 시종이 마리엘라의 정성에 감복했는지, 손짓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는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둘러 본 뒤에 그녀에게 슬쩍 귀띔해 주었다.
“위독한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넘어갈 만한 병 역시 아닙니다. 제가 말해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기다리면 다 원래대로 돌아갈 거예요. 왕자비께서 섭섭하지 않으시게 말 좀 잘 전해 주세요.”
마리엘라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왕자비의 처소로 돌아갔다. 사실 돌아가는 것밖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쉽게 넘어갈 병이 아니야? 기다리면 다 원래대로 돌아간다고?’
일과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면서 마리엘라는 낮에 시종이 했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시종의 표정은 왕자의 건강을 걱정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병을 사건으로 치환해야 해. 위급한 일은 아니지만, 쉽게 넘어갈 만한 일 역시 아닌 것. 그게 뭐지?’
마리엘라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어두운 지하의 복도를 걸었다.
왕성의 지하 1층은 하녀들이 주로 머무는 공간이다. 늦은 밤이라서 그런지, 지하 1층이 통째로 고요했다. 그래서 복도 끝에서 하녀들이 수다 떠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전하께서 허약하셔서 정말 걱정이야.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니.”
“예전에도 몇 달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지 않아? 부디 이번에는 금방 나으셔야 할 텐데.”
“하녀장님이 그랬는데, 어릴 때부터 자주 그러셨대.”
‘전에도 이런 적이 있다고?’
마리엘라는 하녀들의 수다를 귀 기울여 듣다가, 이내 무언가를 깨달았다.
‘내가 제이 도련님을 돌보던 그 몇 달도 그래서 그렇게 넘어간 거군.’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라의 유일무이한 후계자가 몇 달을 사라졌는데도 그 말 많고 탈 많은 신하가 군소리 없이 넘긴 것은 이러한 배경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귀족들을 단숨에 해치울만한 힘을 키울 때까지, 약하고 멍청한 왕자를 연기해야 했을 요제프의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항상 ‘그래요, 그렇군요!’만을 말해야 했을 테니, 진짜로 거절을 해야 할 때는 별 방법이 없었겠지. 그래서 그럴 때가 닥치면 병을 핑계로 처소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전적이 쌓이고 쌓여 사람들에게 연약하고 해맑고 무능한 왕자님이라는 오늘날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래도 석 달 동안 왕자의 부재를 몰랐다는 건 좀 너무한데. 나라가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람.’
그녀는 자신이 귀족파의 우두머리였다면, 이 일을 가만히 넘기지 않았을 거로 생각하며 하녀들의 대화를 계속 엿들었다.
“바이르 공작님도 참 대단해. 요제프 전하가 아플 때마다 모든 걸 제치고 달려와 간호하시잖아.”
“맞아. 전하께서 몇 달 동안 모습을 안 보이실 때도 항상 바이르 공작님만은 만나셨지. 그래서, 왜, 그런 소문도 있었잖아.”
하녀들은 목소리를 낮춰 서로의 귓가에 속닥거리더니 킥킥 웃었다.
마리엘라는 딱히 저들의 귓속말이 궁금하지 않았다. 요제프와 율리안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말이 돌았다는 소리겠지. 들으나 마나였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마리엘라는 그대로 몸을 반대로 틀었다. 왕자의 처소로 향하기 위해서다.
‘공작을 통하면 요제프를 만날 수 있어.’
그녀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녀는 꿀과 따듯한 물이 담긴 쟁반을 들고 왕자의 처소 앞에 서 있었다. 마리안이 병을 걱정해 보낸 것으로 꾸며, 기사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경비를 서는 기사들이 왕자 전하께서 들여보내 주시지 않을 것이라며 그녀에게 돌아갈 것을 권유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마리안 전하께서 오늘은 꼭 전해드리고 오라며 명령하셨어요. 저는 왕자비의 명을 수행할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야 합니다.”
충성심 있는 하녀를 연기하며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기다렸을까, 익숙한 이가 왕자의 처소를 빠져나왔다. 율리안이었다.
“뭐지?”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마리엘라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대답했다.
“왕자비께서 보냈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돌아가, 여긴 네가 연애놀음이나 하는 곳이 아니야.”
“왕자비께서 제게 명하셨어요. 따듯한 차를 전할 수 없다면, 병세의 위중함이라도 알아 오라고요. 전하께서 많이 아프신가요? 마리안 전하의 방문도 거절하고 계시니, 왕자비의 하녀인 제가 안달이 날 수밖에요.”
얼굴에 철판을 깐 마리엘라의 태도에 율리안이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마리엘라는 등이 섬찟한 감각을 느꼈다.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적의. 살기라는 표현이 더 가까운 것 같았다.
쟁반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꿋꿋이 버텨냈다.
율리안은 우아한 걸음걸이로 그녀를 스쳐 지나가며 충고했다.
“좋은 말로 할 때 잠자코 돌아가. 이건 너 같은 하녀 나부랭이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뭐지?’
마리엘라는 우두커니 서서 생각했다.
율리안은 ‘왕자의 친구’라는 직책으로만 유명한 이가 아니었다. 그는 전 대륙을 통틀어 유일무이한 소드마스터였고, 교황이 애지중지하는 성 기사단의 미래였다.
그런 그의 살기를 받아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후들후들 떨며 모든 것을 새하얗게 잊어버렸을 테지만 마리엘라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오늘 모습은 어딘가 이상하다.
숨기는 것이 있어 적의를 드러낸 것처럼 보였다.
털을 세워 몸을 부풀리는 어린 짐승처럼.
‘뭐가 있어. 굉장히 쉬우면서도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무언가.’
마리엘라는 자신이 그 무언가를 계속 놓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진실이 그녀의 주변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 * *
그날 이후 마리엘라는 왕자의 은거와 관련된 정보를 찾으려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지방에서 올라온 시골뜨기 하녀, 그것도 왕자비의 곁에 찰싹 머물러 있는 왕자비의 최측근에게 멍청하게 혀를 놀리는 자들은 없었다.
“마리.”
어느 날이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평정심을 유지하며 평소와 같이 행동하는데 마리안이 갑자기 그녀의 애칭을 불렀다.
“이제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마리,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오라버니에게 편지가 왔어.”
“편지요?”
마리엘라는 하던 일을 멈추고 마리안이 건네준 편지를 읽었다.
편지의 내용은 짧았다.
릴리, 수도에서 소환장이 왔어.
아버지를 수도로 소환하겠대.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해.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이 된다.
- 첫째 오빠가.
그 안에는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백작의 소환?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지.’
“아가씨, 뭐 알고 계신 거 없으세요?”
마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마리안을 아가씨라고 부를 정도로 당황했다. 죽음이 코앞에 있는 것 같은 초조함이 해일처럼 그녀를 덮쳤다.
“나, 나도 몰라.”
마리엘라가 너무 진중하게 묻자, 덩달아 놀란 마리안이 말을 더듬었다.
바로 그때였다. 마리안의 처소 문밖이 소란스러웠다. 절도 있는 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내 누군가 벌컥 문을 열었다.
여덟 명의 기사를 대동하고 왕자비의 문을 연 남자의 정체는 재상이었다.
“요제프 전하의 명입니다.”
마리안과 마리엘라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 상황이 요제프의 장난은 아닌 것 같았다. 재상은 진지하고 장엄한 얼굴로 왕자의 명을 정했다.
“마리안 디프네 데르샤바크 왕자비 전하. 지금 이 순간부터 왕자비 전하는 이 처소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습니다.”
“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마리안이 버럭 소리쳤다. 놀람과 분노가 섞인 목소리였다.
재상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제 할 말을 이어갔다.
“또한, 리덴부르크 백작가에서 직접 데리고 온 하녀의 출입도 금합니다. 왕자비 전하의 시중은 왕자 전하의 하녀들이 대신할 겁니다.”
“이게, 무슨……. 전하께선 지금 어디 계시지? 직접 뵈러 가야겠어.”
마리안은 황망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녀의 아군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들 굳은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감옥에 갇힌 죄수를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그럴 수 없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왕자비 전하는 지금 연금 상태니까요. 그럼, 마저 명을 수행하겠습니다.”
그는 마리안에게 깍듯이 인사한 뒤, 뒤의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끌어내.”
기사들의 우악스러운 손에 마리엘라의 양팔이 결박되었다.
그녀는 기사들에게 발악하지 않았다. 그저 뒤통수를 크게 맞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리!”
마리안이 다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마리엘라가 마리안을 달랬다.
“별일 아닐 거예요. 제가 노력해볼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알겠죠?”
그녀는 품 안의 아이를 어르는 듯한 말투로 마리안을 달랬다.
마리안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였다.
그렇게 두 사람을 갈라졌다.
기사는 마리엘라를 그녀의 방에 집어넣었다. 집어 던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무례하고 폭력적인 행동이었지만, 마리엘라는 불평이나 기분 나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녀가 담담하게 물었다.
“저는 어떡하죠. 저도 연금을 명받았나요?”
그 말에 기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웬 뚱딴지같은 소릴 하냔 표정이었다.
“전하께선 하녀 나부랭이를 신경 쓰실 정도로 한가하지 않으시다! 넌 그저 명령대로 왕자비 전하의 처소에 얼씬도 안 하면 그만이야.”
“아, 그러시군요.”
마리엘라는 그다음 질문을 이어 가려고 했다. 조금이라도 더 정보를 캐내려고 했지만 그 전에 기사가 자리를 떠났다.
쾅!
방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자극했다.
마리엘라는 이번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문을 응시하며 생각을 정리했을 뿐이다.
‘이건 내 잘못이야. 내가 영민하지 못했어.’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며칠 전 왕자를 찾아갔을 때, 시종이 했던 말을 흘려듣는 것이 아니었다.
그 말에 무언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요제프가 그들을 곤란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 여기고 안심해버렸다. ‘왕자비께서 섭섭하지 않으시게 말 좀 잘 전해주세요.’라고 시종이 덧붙였던 말 때문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요제프를 향한 긴장을 풀어버린 것이다.
‘그래선 안 되는 거였는데.’
시종의 말 속에 담긴 진짜 의미를 파악하기 전에 요제프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지 먼저 생각했어야 했다. ‘요제프의 병’을 ‘정치적 사건’으로 치환하기에 앞서 앞에 붙여야 했던 기본 조건이었다.
‘위독한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넘어갈 만한 병 역시 아닙니다.’ 이 말은, ‘요제프에게는 큰일이 아니지만, 마리안 왕자비에게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치명적인 사건이다.’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해석하면 모든 것이 말이 되었다.
마리안의 연금, 리덴부르크 백작의 소환, 율리안의 싸늘한 시선까지.
‘기다리면 원래대로 돌아갈 거라고 했지. 왕자비가 섭섭하지 않게 말을 잘 전해달라고 했어. 그때 이미 왕자는 결정을 내린 거야.’
그때 그 시종이 덧붙였던 말을 떠올리며, 마리엘라는 자신의 생각에 마침표를 찍었다.
‘……마리안을 버리기로.’
그건 그녀가 예상했던 가장 최악의 결과였다.
* * *
왕자비가 본인의 처소에 감금을 당한 지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왕성 안의 사람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냈다. 왕자비가 마녀라는 소문이 퍼질 때부터 이렇게 될 것이라 대강 예상은 하고 있었던 그들이었지만, 막상 그 일이 실제로 닥치니 서슬 퍼런 칼날이 제 앞에 들이닥친 양 두려워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고요도 오래가지 않았다. 나흘째 되던 날 밤, 허드렛일을 맡은 어린 하녀들이 부엌 바닥을 청소하다 말고 입을 열었다.
“봤어? 너도 봤어?”
“아니, 나 못 봤어. 너는?”
“난 봤지. 창틀 먼지를 터는데 멀리서부터 마차가 들어오더라고. 푸른 늑대 기사단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였어.”
성의 사용인들은 짝을 찾는 매미들처럼, 시끄럽게 재잘대기 시작했다. ‘푸른 반점 시체 사건’을 결말로 이끌, 새로운 화젯거리가 그들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왕가로부터 소환장을 받은 리덴부르크 백작이 왕성에 도착했다. 이 사건의 새로운 등장인물인 리덴부르크 백작은 왕가와 관련된 죄인들을 처리하는 푸른 늑대 기사단의 마차를 타고 등장했다.
“거기서 리덴부르크 백작이 나오더라고. 기사들에게 양팔을 결박당한 채로!”
“소문이 진짜 맞았나 봐. 왕자께서 왕자비를 가둬 놓으셨잖아.”
“맞아, 결국 리덴부르크가의 백작도 소환했고.”
“으, 소름 끼쳐. 왕자비가 마녀라니.”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거리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중 하나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그럼 그게 진짜 있는 걸까?”
“그거?”
“사랑의 묘약 말이야. 마녀들은 그걸로 남자를 꾄다는데.”
“그러게. 목석같기로 유명한 왕자 전하께서 갑자기 사랑에 빠져 결혼을 추진하셨을 때 무언가 이상하다 싶었어.”
“아, 나도 가질 수 있다면 한 병 갖고 싶다.”
“왜, 누구한테 써먹으려고?”
“바이르 공작?”
하녀들이 꺄르르 웃었다.
“그만 웃고 청소 마무리하자. 또 게으름 피운다고 하녀장님에게 꾸중 들을라.”
그들은 서둘러 부엌 청소를 마치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탁.
차가운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힌다.
무거운 어둠과 싸늘한 고요만이 가득한 공간.
갑자기 어디선가 끼이익-하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 뒤쪽에 있는 식료품 보관 창고였다.
왕자비의 하녀 마리엘라는 굳은 표정으로 식료품 창고에서 나와, 어린 하녀들의 수다를 천천히 되짚었다.
톡, 톡, 톡, 톡.
손톱 끝으로 부엌 테이블 위를 규칙적으로 두드리면서.
마리안이 처소에 연금되고 나흘이 지났다.
마리엘라는 자신은 연금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사흘 동안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
왕자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에 충격에 빠져서가 아니라, 이 저택의 사용인들이 왕자비의 하녀인 마리엘라 역시 왕자의 명으로 감금되었다고 믿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마리안을 구하려면, 요제프가 왜 마리안을 버리려고 결심하게 되었는지를 알아내야 했다 그러려면 그가 병을 핑계로 방에 틀어박혀 있는 이유를 알아내야 했고.
단서는 왕성 구석구석에 숨겨져 있을 터였다. 예를 들면 하녀들의 혓바닥 같은 곳.
리덴부르크 백작가에서 아주 오랫동안 하녀 일을 했던 그녀는 잘 알고 있다. 왕족이나 귀족 같은 귀한 신분을 지닌 사람들은, 평민이나 하녀 같은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깔보다 못해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한다는 걸.
그래서 그들은 중요한 정보를 하인들이 있는 곳에서 마구 떠들어대곤 했다. 그들에게 하인은 말 알아들을 줄 아는 짐승이지,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니까.
마리엘라는 유독 자신의 방 앞에만 오면 목소리를 줄이는 하녀들의 태도에서 그들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하나의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왕자비의 하녀 마리엘라는 자신의 방 밖을 나설 수 없는 벌을 받고 있으니, 그녀의 방 근처에서만 입을 다물면 아무 말도 새어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손쉬운 조건을.
그렇게 해서 그들을 안심시킨 다음에, 이제 막 왕성에 들어왔을 신입 하녀들이 할 만한 허드렛일을 몇 개 추렸다. 그리고 그것들 중 몸을 숨기기 적합한 장소를 가지고 있는 것을 찾았다. 저녁 식사를 조리한 후의 부엌 청소 같은 것 말이다.
모든 게 그녀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그녀는 모두의 눈을 피해 부엌 식자재 창고에 숨어 들어갔고, 그 속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방금, 그토록 듣고 싶었던 사건의 전말을 알았다.
마리안은 마녀로 몰렸다.
그래서 요제프는 왕자비를 버리려는 것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스케일의 사건이었다.
“마녀라니.”
마리엘라는 절망적인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인맥도 뭣도 없는 일개 하녀였다.
할 수 있는 것도, 알 수 있는 것도 적었다.
그녀가 아는 건 저게 사실이든 아니든 문제가 이 정도로 불거졌다면 왕자비는 백 퍼센트 죽는다는 것뿐.
마리엘라의 오랜 친구이자, 자매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마리안.
그녀는 지금 벗어날 수 없는 함정에 빠졌다.
‘마님, 제발…….’
‘네 자식들이 방금 도축된 새끼돼지처럼 대롱대롱 걸리는 걸 보고 싶은가 보지?’
그 시절, 자신의 아버지처럼.
<2권에 계속> <공금/갠소> 우리끼리만 보기!!! by S.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