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데르샤바크 왕가 (1)
마리안이 아프다. 요하네스 왕의 장례식에서 진을 다 뺐기 때문이다. 의사와 신관이 다녀왔지만, 모두 ‘단순한 감기몸살’일 뿐이라며 별다른 처방을 내리지 않았다. 마리엘라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이 펄펄 끓는 왕자비 옆을 지켰다.
늦은 저녁이 되자 요제프가 왕자비의 처소를 방문해 아내의 안색을 살폈다.
“당신이 아프니 내 마음이 찢어질 것 같군요.”
“요제프 전하…….”
마리안은 마른 입술로 겨우 그의 이름을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나의 작약 꽃. 그냥 그대로 누워 편히 쉬어요.”
왕자는 다정한 손길로 왕자비의 젖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쪽, 하고 동그란 이마 위에 가볍게 입맞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늘이 내려준 운명의 짝 같은 모습이었다. 서로를 위해 태어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부부.
……침대 아래로 내린 왕자의 손이 마리엘라의 손을 만지작거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저 미친놈.’
마리엘라는 마리안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몰래 손깍지를 끼는 왕자를 욕했다. 물론 속으로만. 혀 때문에 목을 내어 줄 수는 없으니까.
그녀는 어서 이 약삭빠른 왕자가 꺼져줬으면 하고 바랐지만 요제프는 마리안이 약을 먹고 잠이 들 때까지 그 곁을 지켰다. 마리엘라는 마리안이 혹시 이 관계를 눈치챌까 봐 잔뜩 긴장했다.
그는 아내가 잠들자마자 처소를 나섰다.
마리엘라는 왕자를 마중 나가며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으르렁거렸다.
“더는 왕자비를 기만하지 마세요.”
물론 이 말을 가만히 듣고 있을 요제프가 아니었다. 그가 피식 웃고는 조용히 물었다.
“왕자를 기만하는 건 괜찮고?”
가벼운 말 속에 위압이 가득하다. 마리엘라는 요제프의 말에 침묵했다.
그의 비죽 올라간 입꼬리가 얄밉기 그지없다. 한때 천사의 헌신이라고 생각했던 깎아 놓은 듯한 얼굴이, 이제는 악마의 얼굴처럼 느껴져 불편했다.
요제프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외면하는 마리엘라의 손을 들어 올려, 그 위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그리고 연인처럼 다정하게 속삭였다.
“병간호는 다른 하녀를 불러 맡기고 내 서재로 넘어와.”
“명령인가요?”
그녀가 날 선 눈으로 물었다.
그는 특유의 오만하고 위압감을 주는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반문했다.
“그럼 이게 부탁하는 거로 보이나?”
“…….”
처음부터 마리엘라의 패배는 정해져 있었다. 요제프는 마리엘라의 뺨을 감쌌다. 작은 새를 대하듯, 조심조심 부드러운 손길이었으나 마리엘라가 느끼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손아귀에서 농락당하는 지금의 상황이 불쾌했다.
그녀가 손을 뻗어 문을 확 열었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왕자의 시종들이 그들을 본다. 요제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손을 아래로 내리고는 밖으로 나섰다.
마리엘라는 부러 앙큼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먼저 들어가 계세요, 전하.”
그리고 문을 쾅 닫았다. 문 너머로 요제프가 호탕하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문에 등을 기댔다. 몰아쳐 왔던 긴장이 일순 해제되었다. 그녀는 깊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것이 그날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요하네스 왕의 장례식 마지막 날, 텅 빈 예배당에서 지쳐 잠든 왕자를 그녀가 발견했던 순간부터.
아니, 통속 소설에 푹 빠진 마리안이 그녀 대신 데르샤바크 왕가에 시집가겠다고 선언했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 로헨나 생선가게 뒤편에서 눈먼 거지를 주웠을 때부터일지도 모르지.
마리엘라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가만히, 그날의 대화를 되새김질했다.
* * *
“사랑하는 마리 아가씨, 제 편지를 읽기는 하셨는지.”
그 말을 들었을 때, 마리엘라는 섣불리 진실을 토로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했다.
이럴 땐 말수를 줄이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그녀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 남자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이제부터는 심리전이었다.
그녀는 당황한 마음을 숨기고 태연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요제프는 그녀를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아무것도 묻지 않았음에도 자기 생각을 술술 말했다.
“이상하긴 했어. 나의 마리 아가씨는 가식적인 면모가 느껴지긴 했지만, 그렇게 대책 없이 활발하진 않았거든. 오히려 미묘한 포인트에서 몸을 사리려고 하는 구석이 있어 수상했지.”
그녀는 아무 호응도 반응도 보내지 않고, 그저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스스로의 안이함을 후회했다.
되돌아보면, 요제프에게는 이상한 구석이 많았다. 죽어도 마리안을 ‘마리’라고 부르지 않는 거나,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초야를 치루지 않으려 하는 모습들. 또, 왕성에 발을 디딘 첫날밤에 우연히 엿보았던, 그 날카로운 눈빛까지.
‘그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그녀는 뒤늦게 후회했지만, 후회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몇 가지 시험도 해봤지. 녹이 슨 브로치 같은 것들 말이야. 시종 말로는 그게 뭔지 알아챈 기색이 아니라고 하던데.”
‘그래서 그랬군.’
마리는 왕자가 ‘녹슨 브로치 사건’으로 자신이 마리 아가씨일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침묵이 너무 길어지면 독이 되니까.’
그녀는 눈썹 끝을 아래로 쭉 내리고 이 상황이 어리둥절하고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횡설수설 말을 끌며 왕자의 정신을 쏙 빼놓을 계획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평생을 백작가에서 일했던 일개 하녀인걸요. 혹, 전하께서 착각하신 것 아닐까요? 저와 아가씨는 어릴 적부터 서로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으니 오해가 있으실 만도 합니다.”
그게 요제프의 함정인 줄도 모르고.
요제프는 할 테면 해보라는 얼굴로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긋 웃었다.
“왕성은 있는 거라곤 사냥터뿐인 시골 촌구석과는 달라. 수틀리면 등에 칼부터 꽂아야 하거든. 그러지 않으면 다음번에 칼을 맞고 죽는 건 내가 될 테니까.”
“여전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
그는 그녀의 말을 댕강 잘라냈다.
“내가 너라면 로빈부터 죽였을 거란 얘기야.”
“…….”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아이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채소가게에 세 들어 살던 로빈. 글씨를 읽고 쓸 줄 알고, 입조심 할 줄도 아는, 장래가 밝은 열두 살 소년.
마리엘라는 말을 잃은 사람처럼 침묵했다. 깜박, 깜박. 굳은 몸을 하고 허공을 응시하던 그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왕자를 바라보았다.
“……죽였나요?”
그의 입에서 로빈의 이름을 나왔을 때, 그녀는 자신의 모든 계획이 망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제프는 거미 같은 사람이었다. 겹겹이 함정을 파 놓고, 목표물이 그것을 피하기 위해 아등바등하기를 기다린다. 그때가 목표물을 잡아먹을 적기니까.
지금 그의 목표는 마리엘라였다.
그녀는 지금 당장 제 목숨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이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로빈은 죄가 없었다.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우연히 마리엘라의 눈에 띈 것과 하찮은 평민으로 태어난 것뿐이었다.
그녀의 눈꺼풀 위로 어떤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교수대에 목이 묶인 제 가족 옆에 새로 매달린 열두 살짜리 소년. 소년의 축 처진 발끝이 그녀의 눈앞에서 대롱대롱, 진자운동을 한다.
요제프는 대답을 유보하고, 마리엘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곧, 그의 입가가 천천히 호선을 그린다.
“설마. 내 손발이 되어준 아이인데. 그런 배은망덕한 짓을 할 수는 없지.”
긴장이 탁 풀렸다. 마리엘라는 그제야 멈췄던 숨을 뱉었다.
“어린아이는 이래서 좋아. 쓸데없이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어서. 그 소년은 그저 내가 은혜를 갚으러 온 줄로만 알더군.”
그는 툭툭,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물론 격려의 의미는 아니었다. 약 올리는 거라면 모를까. 마리엘라는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탁, 하고 앙칼지게 쳐 내고 싶었으나, 그럴 상황이나 신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며 물었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던 거죠.”
“본능적으로 말하자면, 처음 봤을 때부터. 확신을 가지고 움직인 건 그날 저녁, 마리안 아가씨가 시나몬 얹은 사과 파이를 맛있게 먹는 걸 보았을 때.”
‘젠장.’
마리엘라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그는 그녀가 시나몬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철저한 남자다.
그녀는 세 치 혀를 이용해 상황을 벗어나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요제프의 손아귀에서 버둥거리는 꼴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겁먹은 마음을 날카로움으로 포장하고 물었다.
“원하시는 게 뭐죠?”
그녀는 그가 원하는 것이 있어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보았다고 결론 내렸다. 그렇지 않으면 여태까지 그 불경을 가만히 내버려 둘 이유가 없다.
‘깔끔하게 이용당하고 완벽하게 버림받자.’
마리엘라 딴에는 큰 결심을 하고 뱉은 말인데, 받아들이는 왕자 쪽에서는 전혀 아닌 것 같았다.
“원하는 거?”
그가 그 말을 따라 하며 눈썹 한쪽을 올렸다. 그녀의 말이 그의 심기를 건든 것 같았다.
요제프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마리엘라의 어깨가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손에 쥐고는 허리를 숙여 그 향을 맡았다. 옅은 라일락 향기가 그의 코끝을 살랑인다.
그는 눈을 감고 향기를 만끽하다가 천천히 눈을 떠서 마리엘라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무서울 정도로 시린 녹안이 그녀의 모든 것을 꿰뚫어 버릴 것 같았다.
“난 원래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치는 걸 되게 싫어해. 그게 마음을 주었던 아가씨라면 더 하지.”
“…….”
위협적인 말이었다. 본능이 종을 울리며 그녀에게 경고했다.
위험해.
위험한 남자야.
그런데 이상했다. 마리엘라의 머릿속에서는 지금 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따듯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건, 제이 도련님이 그녀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었다.
딱 한 번 읽고, 태워 버린 편지의 글귀.
……편지로 적기에는 너무 길고 구구절절한 사연들이라
직접 만나서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직접 만나서, 아가씨의 따듯한 두 손을 잡고,
멀쩡해진 두 눈으로 아가씨의 눈을 마주하며 모든 것을 전하고 싶어요.
‘헛생각하지 마, 마리엘라.’
그녀는 볼 안쪽을 깨물며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지금은 로맨틱한 감성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다. 그녀가 자각해야 할 현실은 다음 두 줄뿐이었다.
편지를 태우고 나니 사랑하는 제이 도련님이 망나니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목숨 줄을 쥔 망나니가.
* * *
요제프가 마리안의 병문안을 온 그날 밤이었다.
똑똑.
마리엘라는 노크를 하고 왕자의 서재에 들어섰다.
“저를 왜 부르셨죠?”
그리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경계심 가득한 표정이었다. 요제프는 그 모습을 보고 쿡쿡 웃더니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녀가 다가서자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눅진하고 농밀한 손길이었다.
“생각을 좀 해봤어. 내가 너한테 ‘원하는 것’이 뭘까 하는 생각 말이야.”
마리엘라는 무표정을 연기하며 침묵했다.
“처음엔 그냥 이대로만 있어도 될 것 같았는데, 사람이라는 게 욕심만 가득한 동물이잖아.”
“그래서, 부르신 이유는?”
“너도 대충 눈치챘겠지만, 왕성 안에 내 적이 있어.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모든 상황을 좌지우지하고 있지. 나는 그놈을 잡고 싶어. 그래서 널 이용해볼까 하는데.”
마리엘라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왕자님의 적은 요바튼 재상 아닌가요?”
피식. 요제프가 너무 간단한 답을 내놓은 마리엘라를 비웃었다.
“내가 국정을 맡으면서 얼마나 많은 재상을 갈아치웠는지 아나?”
독살하고, 멀리 유배 보내고, 아프게 만들고……. 가끔은 그들의 가족을 시름시름 앓게 만들기도 했지.
덧붙이는 말투에 악의가 없어 더 섬뜩했다.
요제프는 방긋 웃었다. 그는 그녀의 손톱 끝에 자잘한 입맞춤을 퍼부었다. 마침내 그녀의 손을 해방시켜 준 그는, 손을 뒤로 숨기는 마리엘라를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너한테 원하는 건 이거야. 무리 속에 얼굴을 숨긴 내 진짜 적이 누군지 알아야겠어. 그걸 네가 찾아줬으면 하는데.”
일개 하녀가 수행하기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거절할 수가 없다. 지금 그녀의 목숨을 쥐고 있는 건 요제프니까.
마리엘라는 차분하게 물었다.
“촌뜨기 하녀에게 그런 큰일을 맡기시겠다는 건가요?”
나름의 최선을 다한 거절이었다. 요제프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말을 받아쳤다.
“너는 보통 하녀가 아니잖아.”
왕자를 홀딱 속여먹은 하녀지.
속삭이며 덧붙이는 말은 퍽 매혹적이었지만, 오가는 대화의 핵심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막막한 현실이 마리엘라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최선을 다하죠.”
요제프의 두 눈이 곱게 휘어졌다. 그가 손을 뻗어 마리엘라의 코끝을 가볍게 툭 쳤다. 강아지를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기억해, 마리엘라. 네 손에는 두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어. 하나는 너 자신이고, 또 다른 하나는 네가 극진히 모시는 왕자비지.”
“마리안은 건들지 마요.”
마리엘라가 굳은 표정으로 선을 그었다. 요제프는 그녀의 냉담한 태도에 전혀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그건 네가 가지고 올 결과물에 달려 있지.”
* * *
깊은 밤이었다. 새빨간 카펫과 검붉은 벨벳 벽지, 적갈색의 나무로 짠 거대한 나무 테이블이 인상적인 고급스러운 장소에, 요바튼 재상을 비롯한 귀족파의 핵심 인물들이 모였다.
그들은 기다란 나무 탁자 주변에 둘러앉아 진지한 얼굴로 한마디씩 했다.
“요제프 왕자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면, 알폰스 후작이 분명 우리를 치려고 할 겁니다.”
“그전에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그건 그렇지, 언제까지 교황 성하의 부재를 핑계로 대관식을 미룰 수는 없으니…….”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이 고심하는 표정을 한다.
다가오는 앞날이 걱정되지만, 딱히 큰 방도는 떠오르지 않는다는 얼굴들이다.
무거운 침묵.
그 사이에서 브랫 백작만이 여유로운 태도로 잘 다듬어진 자신의 손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작은 손톱 끝에 괜히 입바람을 한 번 불며 말을 꺼냈다.
“사실 그건 별 상관없지요.”
모두의 시선이 브랫 백작을 향했다. 백작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는 말했다.
“요제프는 본디 우유부단한 사람입니다. 분명 왕위에 올라도 얇은 귀를 어쩌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릴 게 분명해요. 우리가 잘만 설득하면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홀랑 넘어갈 겁니다.”
“그건 그렇지.”
귀족 몇이 고개를 끄덕인다. 요바튼 공작이 그를 주목한다. 백작의 입 끝에 미소가 걸렸다.
“알폰스 후작이야, 우리가 힘을 모아서 치면 되죠. 왕자의 무능함을 생각하면 그리 어려울 일은 아닙니다.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마리안 왕자비입니다.”
대신들이 신음에 잠겼다. 여기 모인 사람 대부분이, 그날 티타임에 참석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마리안 왕자비가 아무렇지 않게 브랫 백작을 쳐 내는 모습을 목도했다. 그 방법이 얼마나 정갈하고 우아했는지도.
“확실히 아내는 충신보다 가깝지요.”
“굉장히 영특해 보이더군요. 기도 꽤 세 보이고.”
“위험하군.”
브랫 백작이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였다.
“알폰스 후작을 치기 전에 마리안 왕자비를 먼저 치지요. 가만히 내버려 두면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커지게 될 것입니다.”
“흠.”
요바튼 재상은 브랫 백작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말투로 그의 의중을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그 말에 느리게 고개를 틀었다. 요바튼 재상은 다시 한번 물었다.
“해치울까요?”
“글쎄…….”
남자는 말을 끌 뿐, 명확한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탁자 위로 아무렇지 않게 괸 턱과 반쯤 내려앉은 눈꺼풀 그리고 무심한 말투. 남자는 새끼손가락을 통통 튕기며 잠시 생각에 잠긴 제스처를 취한다. 그러다가 눈동자를 쓱 굴려 자리에 앉은 대신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꿀꺽.
자리에 있던 귀족들이 모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요제프와 대면할 때보다 더 긴장한 표정들이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남자의 붉은 입술이 슬쩍 위로 올라갔다.
* * *
늦은 밤이었다. 마리엘라는 자신의 방 침대에 앉아 마리안의 역사책을 읽고 있었다. 리덴부르크 백작이 역사 선생을 붙여서 억지로 공부하게 만든 그 책이었다. 읽고 싶어서 읽는 것은 아니었고, 살아남고 싶어서 억지로 손에 든 것이었다.
마리엘라는 있는 거라고는 사냥터가 전부인 리덴부르크 백작가에서 상경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얼뜨기 하녀다. 정치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그녀가 정쟁의 중심인 왕성에서, 정체도 알 수 없는 왕자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정보 모으기였다. 그녀가 아는 한 가장 빠르게 정확한 정보를 터득하는 방법은 독서였다.
마리엘라는 손가락 끝으로 문자를 쭉 따라가면서 글을 읽었다.
……바욘 2세는 흑마법사를 전쟁에 끌어들여 제국 렝바토의 멸망 이후 혼란스럽던 대륙을 평정했다.
바욘 2세의 과감한 결단은 검의 전쟁을 마법 전쟁으로 뒤바꿔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찬사와 동시에 마녀들이 베르단 정계를 지배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흑마법사들에게 작위가 수여되자, 그들의 영향력 역시 어마어마한 속도로 팽창했다. 바욘 2세가 뒤늦게 그들을 저지하려 했지만,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었다.
혼란의 시기, 혜성처럼 등장한 대마법사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그레타. 열두 살의 어린 마녀 그레타는, 바욘 2세에게 ‘안식’이란 이름의 축복을 내려준다. 그레타의 안식 덕분에, 바욘 2세는 세상의 모든 흑마법을 무효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고, 왕권은 다시 안정을 찾아간다.
정권 말, 바욘 2세는 흑마법사들을 배제하기 위하여 바레뎃샤의 교황과 손을 잡고……
탕탕탕!
누군가 거세게 문을 두드렸다.
‘이제 좀 책에 집중하려고 했는데, 누구야?’
마리엘라는 짜증을 팍 내면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뜻밖의 얼굴을 마주했다.
“전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요제프의 시종이었다.
마리안 왕자비에게 녹슨 브로치를 건넸던 요제프의 최측근.
* * *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부르실 거면, 차라리 침실에서 만나죠. 그편이 더 설득력 있겠어요.”
마리엘라는 서재 문을 열자마자 왕자에게 한소리 했다. 잠옷에 숄 하나만 겨우 걸친 차림이었다.
일개 하녀가 왕자에게 내뱉기에는 신경질적인 어조였으나, 요제프는 기분 상해하는 대신 능글맞게 대꾸했다.
“그런가? 안 그래도 침대 옆이 시큰하니 시리던 참이었는데.”
“용건이 뭐죠.”
마리엘라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하하. 말이 점점 짧아지네. 죽는 게 무섭지 않은가 봐, 우리 마리 아가씨는.”
요제프는 방실방실 웃으면서 그녀의 기를 죽였다.
“…….”
마리엘라는 그의 권위 앞에 침묵했다.
요제프는 팔을 뻗어 근처에 있던 의자를 제 옆으로 옮겼다. 등받이가 없는 스툴이었다. 그녀가 그를 빤히 바라보자, 그가 말없이 의자를 툭툭 두드렸다. 그녀가 순순히 앉자,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굴었다.
“뭐 하고 있었어?”
요제프는 마치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친우를 대하듯, 격식 없는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 다정하고도 일상적인 말을 듣는 순간, 마리엘라는 자신의 기분이 급하강하는 것을 느꼈다.
왜 이 상황에서 감정이 상했는지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귀족가의 하녀로 지내면서, 이보다 더 모욕적인 상황을 수도 없이 겪어봤다. 그런데 왜 지금 요제프에게 화가 나는 걸까. 마리엘라는 스스로가 이해 가지 않았다.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전하.”
“흐음.”
요제프가 책상 위에 턱을 괴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가 있는 것이 불안하다.
“내가 기어오르지 말라고 해서 삐졌나?”
“그런 건 아닙니다. 하나 본분을 잊지 않으려고요. 저는 고귀하신 분들과 달리 생존이 제일인 일개 평민이니까요.”
“내가 실수했어. 사랑하는 마리 아가씨에게는 모든 불경을 허락해야지, 암.”
“…….”
장난스럽게 덧붙이는 말이 기분을 더 상하게 하는 걸 아는지. 마리엘라는 침묵했다.
“그래, 무슨 책을 읽고 있었지?”
요제프가 그녀가 있는 쪽으로 의자를 당기며 물었다.
“역사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끝까지 존칭을 유지했다. 자존심을 세우는 모습에 요제프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더는 그녀를 자극하지 않았다. 대신 말투를 조금 누그러트려 물었다.
“무슨 역사책?”
“베르단 왕국의 역사책을 읽었습니다. 바욘 2세부터 돌아가신 선왕까지의 100년의 역사를 담은 책이요. 전하의 눈을 멀게 한 자를 잡으려면 우선 최근의 정세를 읽어야 하니까요.”
“그래, 역사가 참 중요하지. 그래서 네 생각은? 역사의 흐름을 쭉 읽고 나니 누가 가장 의심이 되나?”
“송구스럽지만, 제가 본업이 있는 하녀다 보니. 또, 밤에는 이렇게 전하의 서재에 끌려와 대화를 나눠야 하는 처지라…….”
뼈가 있는 말이었다. 왕자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다. 기분이 살짝 상했단 뜻이다. 마리엘라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 요제프는 아무것도 못 알아들었다는 듯이 상황을 부드럽게 넘겨주었다.
“그럼 내가 속성 교육을 해줄게. 어디까지 읽었지?”
“바욘 2세가 교황청을 베르단 수도로 옮긴 것까지요.”
“좋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서재 구석에 놓여 있던 양피지 뭉치를 들고 와 책상 위에 넓게 펼쳤다. 그리고 책상 서랍에서 잉크와 펜을 꺼내, 양피지 위에 기다란 가로 선을 그은 뒤, 왼쪽에서부터 주요 사건들을 적어나갔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00년 전, 내 증조할아버지인 바욘 2세가 마녀들의 권리와 권위를 인정해 준다는 조건하에 흑마법사들을 전쟁에 기용했지. 전쟁은 승리했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어. 마녀들의 세력이 너무 커진 거지. 바욘 2세는 교단 ‘바레뎃샤’를 흑마법사들의 견제 세력으로 끌어들이기로 했어. 애초에 흑마법사들이 숨죽이고 살아왔던 건 바레뎃샤가 흑마법을 이단의 술법이라 규정하고 마녀들을 사냥해왔기 때문이거든.”
그녀가 오밤중에 왕자의 서재로 불려오기 직전 공부했던 구절이었다. 마리엘라는 양피지 위의 도표를 빤히 바라보다가 부족한 점을 지적했다.
“중간에 ‘안식’ 이야기는 빼먹으셨네요.”
“아 그랬나?”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미 그려진 도표 사이에 ‘그레타의 안식’을 적어 놓았다. 문득 마리엘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안식이 뭔가요?”
왕자의 대답은 지나치게 간단했다.
“흑마법사들의 모든 능력을 무효화 할 수 있는 축복.”
마리엘라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물었다.
“그러니까 그게 대체 뭐죠?”
“마법을 본 적이 없나 보네.”
“있는 거라고는 사냥터뿐인 촌구석 출신이라.”
그녀의 무성의한 대답에 요제프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자세한 건 우리도 몰라. 증조부께서 그레타와 단둘이 있는 곳에서 축복을 받았다고 하니까. 언어로 전해져 오는 것도 없고, 기록으로 남은 것도 없어. 다만 아는 게 하나 있지.”
“그게 뭐죠?”
“축복과 저주는 동전의 양면이야. 축복이 저주가 될 수도 있고, 저주가 축복이 될 수도 있지. 마법을 건 상대가 선의를 가지든 악의를 가지든 상관없이. 마법은 목적을 위해서만 움직이지 않거든. 그냥 마법사가 설계한 대로만 움직이지. 칼이나 도끼 같은 것을 생각해봐. 우리는 그것들을 유용하게 쓰지만, 때에 따라선 그것들에 크게 당하기도 하잖아.”
알 듯 말 듯한 요상한 설명에 마리엘라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그대는 마법을 모르니 그럴 만도 하지.”
왕자는 대충 손을 내 젓더니, 다시 양피지 위로 펜을 올렸다.
“바레뎃샤는 수도를 중심으로 흑마법사들의 목줄을 서서히 조여 왔어. 마녀들은 불만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종교를 건드릴 수 없기에 입을 다물었지. 그러다 터진 것이 ‘가르담다 사건’이야. 가르담다라는 시골 마을에서 바레뎃샤의 성직자가 어린 마녀를 강간,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어. 그들은 자신들의 이단 심판이라는 교리를 행했다고 주장했고, 교황청과 바욘 2세는 이 사태를 조용히 덮으려 했지. 자, 여기서 문제. 이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그녀가 곧바로 대답했다.
“교단이 더 큰 패악을 부리기 전에 흑마법사들이 힘을 모아서 교단을 쳤겠죠.”
“정답. 1차 성마전쟁은 이렇게 발발했어. 마녀들은 그동안 쌓였던 울분을 성직자와 성기사들에게 풀었지. 사실상 ‘학살’이라고 해도 무방했어. 그리고 그때였어. ‘안식의 축복’을 받은 바욘 2세가 대마법사 그레타를 데리고 왔지. 두 사람은 교단과 흑마법사 사이를 중재했어. 마녀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겠지만 뭐 어쩌겠어? 왕에게는 흑마법을 무효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되었지.”
“마녀들이 이를 박박 갈았겠군요.”
“그랬겠지. 2차 성마전쟁은 바욘 2세의 사후에 벌어졌어. ‘안식의 축복’을 받은 바욘 2세가 없으니 이제 흑마법사들의 세상이 왔다고 생각한 거야. 또다시 대학살이 시작되었어. 이번에는 중재해줄 자가 없었지. 대마법사 그레타는 그때 수련을 위해 침묵의 동굴에 들어가 있었거든. 모두가 흑마법사의 승리를 예상했지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어. 바욘 3세가 어딘가에서 ‘하얀 돌’을 구해 온 거야.”
“하얀 돌…….”
마리엘라가 홀린 사람처럼 그것의 이름을 입속으로 중얼거린다. 베르단의 백성들은 모두 하얀 돌에 관한 전설을 알고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사악한 마녀들의 전쟁에서 사제들과 기사들이 위기에 빠졌을 때, 선의 승리를 간절히 기도하던 바욘 3세의 손아귀에 그 돌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래, 하얀 돌. 안식의 축복에 비견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지.”
“하얀 돌과 안식의 축복 간의 차이점이 뭐죠?”
그녀가 질문하자, 요제프가 대답 대신 그녀의 두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리엘라는 그제야 그와 자신의 사이가 너무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몸을 슬쩍 뒤로 빼며 말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나요?”
“아니.”
요제프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녀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입맞춤을 해 준다면 차이점을 알려 주지.”
“그냥, 알아서 찾아볼게요.”
그녀가 그를 흘겨보며 밀어내던 그때였다. 어디선가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 선 율리안이 흉흉한 눈을 하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도덕하고, 불결한 어떤 것을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율리안?”
친구가 저를 벌레 보듯 보고 있는데도 요제프는 태연했다. 요제프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진다.
쾅! 율리안이 문을 거세게 닫고 사라졌다. 사춘기 소년 같은 격렬한 모습이었다.
“흠.”
왕자는 별 상관없다는 뉘앙스의 감탄사만 띡 던지고 다시 마리엘라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녀는 여전히 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안 가봐도 되겠어요?”
요제프는 말없이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 * *
“아니야!”
평화로운 어느 날이었다. 마리안이 예법서 필사를 하다 말고 펜을 집어던졌다.
“이건 내가 꿈꾸는 인생이 아니라고!”
‘얼씨구.’
마리엘라는 먼지를 털다 말고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마리엘라는 이런 일이 익숙했다. 철없고 인내심 없는 마리안을 설득해서 주어진 본분을 다하도록 만드는 일.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하던 일을 마저 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꾸했다.
“모르셨어요? 원래 인생은 그런 거랍니다. 꿈은 꿈나라에서 찾으시고, 어서 후작께서 내어주신 숙제나 마저 하시지요.”
“무슨 왕자비 인생이 이래!”
마리안이 소리를 질렀다. 오랜 시간 동안 그녀의 가슴 속에 쌓이고 쌓인 짜증과 울분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나 마리엘라는 마리안 쪽으로 시선 한 번 옮기지 않고 제 자리에서 제 할 일만 했다.
“그니까 왕자비죠. 이삭 줍고, 그물 고치고, 사냥하고 있으면 그게 왕자비겠어요?”
“난 이거 싫어! 격정의 로맨스도 없고, 화려한 무도회도 없고, 신나는 모험도 없잖아!”
마리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아무래도 투정이 더 길어질 것 같았다.
마리엘라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먼지떨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리안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그녀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자, 이제 꿈에서 깰 시간이랍니다, 왕자비 전하. 징징대는 건 여기까지 하시고, 어서 펜을 들어 내일 배울 내용 요약을 마저 하시지요.”
마리안은 조용히 펜을 들어 숙제를 마저 할 생각은 않고 잔꾀를 부릴 틈만 노렸다.
“휴식을 좀 취하고 싶어. 전하를 졸라 별장에 놀러 가면 어떨까. 호수에서 한적하게 나룻배나 타고 싶은데.”
‘귀족파가 어떻게든 대관식을 미루려고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있는 이 시기에.’
마리엘라는 빙긋 웃었다. 그녀는 가끔 마리안이 답답할 정도로 철없게 굴면 이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사근사근했으나, 그녀의 말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리엘라는 단호하게 말했다.
“펜 드세요.”
“칫.”
그제야 마리안이 미적지근한 태도로 펜을 들었다. 책상 위에 올려 있던 여분의 펜이었다. 여전히 입은 삐죽삐죽했다. 마리엘라가 그 옆에서 그녀가 필사해야 할 책의 페이지를 펼쳐 주었다.
“이거 끝나자마자 바로 무도회를 열거야. 아무도 날 막지 못해.”
“그러세요. 이걸 다 끝낼 수 있다면 말이죠.”
‘또, 호트너 부인이 허락한다면.’
그녀는 요하네스 왕이 서거한 지 한 달이 채 안 되는 이 시점에 호트너 부인이 화려한 무도회를 허락할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마리안은 이성보다 감정이 더 앞서는 사람이다.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를 가져다 대도, 불허를 내린 사람을 전심으로 미워할 것이다.
‘쓸데없이 나서서 뒷감당을 할 필요는 없지.’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제 일을 하러 돌아갔다.
* * *
요즘 마리엘라의 일상은 놀라울 정도로 규칙적이었다. 해가 뜬 아침에는 마리안 왕자비의 시중을 들고, 해가 진 늦은 저녁에는 요제프의 말벗이 된다. 그리고 그사이에 왕성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공부를 한다. 잠자는 것 빼고는 쉬는 순간이 없었다. 하녀로써 정말 끔찍한 일상이 아닐 수 없었다.
탕탕탕.
“네.”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깊은 밤, 오늘도 요제프는 마리엘라를 따로 불러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불러낸 장소가 그의 개인 서재가 아니라 침실이었다는 것이다.
저번에 만났을 때,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부를 거라면 침실로 부르라고 했던 그녀의 비아냥거림을 그대로 마음속에 담아 둔 것이 분명했다.
‘꼭 그런 말만 잘 지키지.’
마리엘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시종의 뒤를 따르며 그의 욕을 했다.
“너의 이야기를 들려주렴, 마리엘라. 내가 편히 잠들 수 있게.”
요제프는 얇은 잠옷 차림을 하고 있었다. 매일 번듯하게 차려입은 옷차림만 보아오던 마리엘라가 느끼기에 조금 색다른 모습이었다.
마리엘라는 침대 위에 누워 이불을 덮고 나른하게 저를 쳐다보는 왕자를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거절해도 되나요?”
왕자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우리 마리 아가씨의 뒷조사를 해도 된다는 허락으로 받아들일게.”
‘아, 머리 아파.’
마리엘라는 한마디도 져주지 않는 왕자가 얄미웠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치부가 있는 법이다.
마리엘라에게 그건 자신의 과거였다.
십삼 년 전, 그녀의 가족이 그렇게 허망하게 가 버린 이후, 마리엘라는 과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안 지 일 년도 안 된 놈에게 주절대야 한다니. 더군다나 자신을 속이고, 자신을 좌지우지하려는 남자에게.
정말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편히 누우시죠, 우리 요제프 도련님. 쇤네가 오늘 재밌는 이야기를 해줄 거니까요.”
그는 절대 갑이고 그녀는 절대 을이었으니까.
마리엘라는 이불을 요제프의 턱 끝까지 끌어 올리며 비굴하게 웃었다. 그리고 침대 옆에 마련된 스툴 의자에 앉아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었다.
열두 살, 갑작스레 가족을 잃은 순간부터 스물다섯, 왕자에게 코 꿰인 이 순간까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큼지막한 이야기들만 간단히 정리해주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가족이 교수대에 오른 이야기를 감쪽같이 숨길 수 있었지만, 그냥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얕은 수작을 부렸다가 왕자가 정말 뒷조사라도 하게 되면 큰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비참하고, 보잘것없는 인생담을 듣던 요제프가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을 표했다.
“이상하네.”
“뭐가요.”
마리엘라는 아무렇지 않은 척 퉁명스레 물었지만, 속으로는 크게 긴장했다.
한 번도 자신의 이야기를 남에게 해준 적 없었던 탓이기도 했고, 왕자가 혹시 이 이야기 속의 미세한 오류를 집어낼까 두려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너는 왜 아무렇지 않아?”
요제프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표정을 고수했다.
곧,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 위에 앉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가며 자신이 느낀 이상한 점을 정리했다. 마리엘라를 설득해내고야 말겠다는 태도였다.
“마리안의 어머니는 너희 가족을 죽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이고, 그 아버지는 네 가족의 사형을 직접 명한 사람이고, 그녀는 너에게서 날 빼앗았어. 이 중 하나만 해도 철천지원수로 여길 것인데, 그 집안은 네게 세 가지 악행을 모두 저질렀지.”
마리엘라는 저게 뭐 어떻다고 왕자가 저에게 따져대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만히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만 있는데 왕자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화가 나지 않아? 내가 너라면 왕자비에게 충성을 다하는 대신에, 칼을 들고 등 뒤를 노릴 텐데.”
‘아, 이거였군.’
뒤늦게 요제프가 하고 싶었던 말을 깨달았다.
그의 질문은 전혀 당혹스럽지 않았다. 십삼 년 동안 리덴부르크 영지에 사는 모든 사람이 궁금해했던 것이었으니까.
그녀는 십삼 년 동안 쉴 새 없이 반복했던 답변을 해주었다.
“마리안 아가씨는 절 살리려고 그 귀한 몸으로 채찍을 일곱 대나 맞으셨어요.”
“은혜가 대수인가? 난 언제나 복수가 먼저야.”
“…….”
참으로 요제프다운 말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여자도 정쟁에 쓰이는 패로 거침없이 쓸 줄 아는 남자가 할 법한 말.
동시에 그건, 마리엘라 마음 깊숙한 곳에 잠겨 있던 커다란 모순점을 지적하는 말이기도 했다.
마리엘라는 잠시 침묵했다. 숨기고 있던 치부를 들킨 기분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대답을 다시 골랐다.
“천민에겐, 천민의 삶이 있는 거랍니다. 고귀한 분들과는 다르죠. 대의보다 평범한 일상에 안주하는 게 저희의 삶이에요.”
그냥 넘어가 줬으면 했는데, 요제프는 그러지 않았다.
“글쎄. 가족과 연인에 대한 마음은 신분과 별 상관없는 거로 생각하는데.”
마리엘라는 그의 계속되는 질문세례가 불편했다. 누구나 피하고 싶은 현실 하나쯤은 있는 법이다. 그녀는 상황을 피하려고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이쯤하고, 온 김에 뭐 좀 물어볼게요. 제가 가장 중요한 걸 깜박했더라고요.”
“뭔데?”
“전하의 이야기를 좀 들어봐야겠어요. 어쩌다가 로헨나 시장까지 오게 되었는지, 눈은 또 어떻게 된 건지.”
이번엔 요제프가 침묵했다. 눈치껏 넘어가 주기에는 마리엘라의 상황이 여유롭지 않았다.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던 마리엘라는 왕자의 불편한 표정을 모르는 척하며 끈질기게 사건의 경위를 캐내려 했다.
“리덴부르크 영지는 어쩌다 오게 된 거죠? 라산 사냥터에는 왕자께서 방문한 흔적이 없었어요. 백작가에 청혼서를 보낸 그날. 백작가에서 온 기록을 뒤져 방문자 명단을 새로 정리했거든요. 왕자님은 공식적으로 사냥터를 방문한 적이 없어요.”
“당연하지, 나는 리덴부르크를 방문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으니까.”
“그럼 어디를 방문하신 거죠?”
왕자의 시선이 잠시 다른 곳으로 향한다.
그는 대답을 유보하더니,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상황을 넘기려 했다.
“노코멘트 해도 되나?”
“그럼 저도 다 때려치우고 교수대에 올라갈래요.”
그녀가 정색하자 요제프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농 한번 살벌하네.”
“알려주시는 게 없는데 어떻게 그들을 찾아내라는 거죠.”
“그래, 네 말이 맞아. 말해 줄 테니까 화 풀고 여기 앉아봐.”
요제프가 자신의 옆자리를 가볍게 쳤다. 마리엘라는 잠깐 망설이다가 그의 옆에 앉았다. 그러니까, 푹신한 침대 위에 다 큰 성인 남녀 두 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단 말이었다.
요제프는 침대 기둥에 몸을 반쯤 기댄 자세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슈바르딩 지방을 갔었어.”
“왜요?”
“정보를 얻었거든.”
“무슨 정보죠?”
“대마법사 그레타가 마지막으로 그곳에 모습을 보였다는 정보.”
‘그레타?’
마리엘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3차 성마전쟁은 15년 전에 끝났다. 흑마법을 부릴 줄 아는 마녀는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교단에서 싹 다 죽여 멸족시켰단 뜻이었다.
대마법사 그레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레타는 슈바르딩이 아니라 베르단 수도 근처에서 죽었다.
그런데 여기서 슈바르딩이 왜 나온단 말인가. 나샨툴라 위쪽에 있는 작은 산골 마을이 대체 왜?
그녀가 질문을 이어가기 전에 요제프가 먼저 선수를 쳤다.
“내가 눈을 어떻게 잃게 되었는지는 나도 정말 몰라. 내가 제일 믿는 사람들을 데리고 비밀리에 그곳으로 내려갔는데, 갑자기 검은 빛이 번쩍하더니 눈이 보이지 않았어. 말이 크게 날뛰었고, 나는 말 위에서 한참을 버티다가 어딘지도 모르는 숲에서 힘을 잃고 굴러 떨어졌지. 아마 그게 라산 사냥터였던 모양이야. 로헨나 시장터에서 그대가 날 발견했으니.”
“전하와 같이 슈바르딩 지역에 간 사람 중,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나요? 목격자 말이에요.”
“없었어. 돌아와 보니 모두 실종 처리가 되었더군. 급히 슈바르딩 지역으로 갔지만 그곳에도 아무것도 없긴 마찬가지였어. 시체도, 싸운 흔적도, 아무것도.”
요제프의 얼굴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마리엘라는 그가 그날 잃은 사람들이 그의 매우 소중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의 심정도 그때의 나와 같았겠지.’
그녀는 질문하는 것을 멈추고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처음으로 그에게 동질감이 들었다. 아주 약간이긴 했지만.
* * *
마리엘라는 왕자가 잠들 때까지 곁을 지키고 그의 처소를 빠져나왔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서려는데, 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율리안을 마주했다. 꽤 오랜 시간 이곳을 지킨 것 같았다. 그녀는 화들짝 놀랐지만, 놀란 티를 내지 않고 그에게 인사를 했다.
공작은 인사도 받지 않고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날.”
“네?”
“음식에 독약 대신 묘약을 넣었나 봐?”
“…….”
마리엘라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찔리는 게 있어서가 아니라 딱히 뭐라 할 말도 없고, 대꾸할 필요성도 못 느꼈기 때문이었다.
공작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커다랗고 힘줄이 툭툭 튀어나온, 서늘한 손이었다.
“나는 그대가 좀 더 현명했으면 해.”
그는 작고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조신하지 못할 거면 주제 파악이라도 잘해야지.”
그리고 휑하니 가버렸다. 아무래도 공작은 그녀와 요제프 사이를 무슨 간악무도한 불륜을 저지르는 사이로 인식하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마리엘라는 성가신 모기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뒤를 힐끔 보고는 말없이 앞을 향해 걸었다.
* * *
음악회가 열렸다. 호트너 부인의 절충안 덕분이다.
무도회를 열고 싶다는 마리안의 말에 호트너 부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요하네스 왕을 기리는 음악회를 열어보자고 제안했다.
초대 명단은 호트너 부인이 직접 작성했다. 호트너 부인은 여성들만 모이는 음악회를 기획했고, 격식 있는 가문을 추려 초대장을 보냈다. 총 합해서 서른다섯 명이었다. 조촐한 수였으나, 오히려 그래서 가치가 있었다.
“초대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저야말로 와주셔서 감사한걸요.”
마리안은 온화한 미소를 띠고 그들을 맞았다.
차분한 색감의 단아한 옷차림을 한 귀족들이 차례대로 지정된 좌석에 앉았다.
음악회의 순서는 간단했다. 지정된 자리에 앉아 왕실 음악단의 음악을 감상한 뒤, 음악이 끝난 뒤 간단히 준비된 음식을 먹으며 수다를 떤다. 그리고 저녁이 오기 전에 일정을 끝내고,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주최자인 마리안이나 초대된 귀족들에게는 간단한 일정이었지만,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마리엘라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응접실을 장식할 꽃부터 음악 감상이 끝난 뒤 차려질 음식까지. 모두 마리엘라의 책임이었다.
마리안 왕자비는 자신을 보좌할 시녀 한 명 없이 마리엘라만 주야장천 데리고 다녔다.
그 까닭에 일개 하녀인 마리엘라는 이 음악회를 뒤에서 지휘하는 보조 책임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호트너 부인은 음악회를 어떻게 꾸려야 하는지 감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마리엘라의 선택 하나하나가 불만족스러웠고, 하녀들은 평민인 마리엘라가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는 양쪽의 따가운 시선을 버텨내면서 일을 진행해야 했다.
바쁜 일이 끝나고, 한숨 돌릴 시간이 왔다. 연회장 안으로 시선을 돌리니 마리안이 간단한 인사말을 읽고 있었다.
“우선, 요하네스 전하를 기리는 자리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마리엘라는 흐뭇한 미소를 띠고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러고 보니 사실상 첫 사교계 데뷔네.’
리덴부르크 백작가의 영지는 수도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다. 물론 그 동네에서도 파티나 연회가 종종 벌어지긴 했다. 그렇지만 마리안은 자신의 원하는 삶에 비해서 너무 시시하다며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마리안은 무대 체질이었다. 그녀는 긴장도 하지 않고 멘트를 읊어갔다. 그러다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정중앙에 앉아 있는 백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오늘 선보일 곡은, 저희 궁정 작곡가이자, 악단의 총 책임자인 파비앙의 신곡입니다. 돌아가신 요하네스 전하를 위해 작곡한…… 소피아 백작 부인, 어디가 아프신가요?”
그녀의 말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소피아 백작 부인에게로 옮겨간다.
백작 부인은 파리해진 안색을 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아,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전하.”
“의원을 불러드릴까요, 부인?”
“아니요, 저는 괜찮…….”
부인은 정색하며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는 시늉을 하다가 휘청거렸다. 근처에 있던 다른 이들이 그녀를 부축했다. 호트너 부인이 달려왔다.
“의원을 불러야겠습니다. 마리엘라!”
“네!”
마리엘라는 빠르게 부름에 응했다.
“부인을 모시고 의원실로 가, 지금 당장.”
“예, 알겠습니다.”
마리엘라는 백작 부인을 모시고 연회실을 빠져나왔다. 그러면서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백작 부인에게 다가간 순간, 저 멀리서 귀부인들이 피식피식 웃는 소리가 언뜻 들렸다.
‘뭐지?’
백작 부인을 의원실에 데려다주고 돌아가는 길에 마리엘라는 아까 전 느꼈던 미묘한 분위기를 곱씹었다.
소피아 백작 부인은 국왕파의 대표주자 중 한 사람인 베데르 백작의 아내였다. 웃었던 사람은 귀족파 쪽의 아가씨들이었고.
두 세력이 사이가 안 좋긴 하지만, 타인의 병색에 그렇게 맥락 없이 웃었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그건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천천히 복도를 걸으며 이런저런 가설들을 세워 봤지만 모두 다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녀가 품은 의문에 대한 답은 곧 실체를 드러냈다.
“백작 부인의 얼굴이 참 볼만 했죠?”
“그렇게 사색이 된 걸 보니, 역시 꽤 깊게 만났던 사이였나 봅니다.”
“베데르 경께서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또 큰 사달이 나겠지요.”
“먼젓번처럼 말이죠?”
연주가 끝나고, 핑거 푸드를 먹으며 수다를 떠는 시간.
마리엘라는 부족한 음식을 체크하다가 귀족파 귀부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비소가 섞인 대화였다.
그녀는 그제야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궁정 작곡가 파비앙.’
소피아 백작부인은 오늘 음악회의 지휘를 맡은 파비앙과 염문을 뿌리는 사이였던 것이다. 아마 최근에 남편이 그 사실을 알게 되어 한번 크게 뒤집어엎은 것 같은데.
‘난감하네.’
오늘의 일은 마리안과 요제프에게 실이 되면 실이 되었지, 결코 득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백작 부부의 입장에서는 잊고 싶었던 가장 아픈 상처를 왕자비가 사람들 앞에서 다시 드러낸 꼴이니 분노할 것이 당연했다.
왕자 부부는 가장 큰 아군 중 하나였던 베데르 백작과 척을 질지도 모른다.
앞으로가 곤란하게 되었다.
분명 요제프는 그녀를 몰래 불러내 어떻게 된 일인지 추궁하겠지.
벌써 머리가 아프다.
‘잠깐.’
마리엘라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뒤를 휙 돌았다. 그녀의 눈에 호트너 부인이 들어왔다. 부인은 구석진 곳에 서서, 고약한 얼굴로 연회장 이곳저곳을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이곳은 왕성이다. 요제프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찔리기 전에 찔러야 하는’ 왕성. 불륜 스캔들을 낸 두 남녀가 어쩌다 한자리에 만나는 극적인 일이 우연히 일어날 리가 없다.
그녀는 음악회에 초대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국왕파 쪽에 속한 귀족들은 열다섯 명인데, 귀족파는 스무 명이다. 거기다가 국왕파는 소피아 부인을 제외하고는 나이가 지긋한 편인 데 비해 귀족파는 대부분 왕자비 또래.
그녀의 생각이 맞다면 초대한 귀족들의 머릿수부터 그들의 나이 분포까지 모두 의도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나이가 든 사람은 결혼에 대해서 보수적이니까 소피아 부인의 불륜을 더 고깝게 보았겠지. 그때만큼은 적군과 아군을 가르려 하지 않을 거야.’
백작 부인은 옹호해주거나 위로해 줄 이 하나 없는 전쟁터에 홀로 던져진 것이다.
부인의 충격은 배로 다가왔을 것이다. 자신이 왕자비로부터 멸시당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오늘 일을 그대로 남편에게 전할 일은 절대 없겠지만, 왕자비를 헐뜯는 말을 베데르 백작의 귀에 속삭일 가능성은 충분했다. 더 나아가 국왕파 귀부인들에게서 왕자비의 평판을 떨어트리려 할 수도 있다.
‘반대로 젊은 사람들은…….’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려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귀족파의 아가씨 둘이 왕자비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닥거렸다. 몇 분 후 마리안의 낯빛이 변했다. 저들이 소피아 백작 부인의 추문을 마리안에게 전달한 것이 분명하다.
‘자신의 기세를 과시하길 좋아하지.’
귀족 아가씨들끼리 말없이 눈빛을 교환하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혹 마리안이 무슨 말실수를 할까 싶어 그쪽으로 슬쩍 다가갔다.
“……그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막았을 터인데.”
마리안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왕자비 전하. 소피아 부인도 충분히 이해를 할 겁니다.”
“그럼요. 왕자비께서 수도에 오신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럴 수 있다는 걸 부인께서도 충분히 자각하고 계실 겁니다.”
다정하고 격식 있는 대화 뒤로 숨긴 조롱.
굳이 ‘왕성’ 대신 ‘수도’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마리안이 수도와는 먼 촌 동네에서 온 귀족이라는 것을 비웃기 위함이었다.
너같이 급 낮은 혈통에게 왕자비의 자리가 어울리기나 하냐며 괄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마리안이 자신들에게 겁을 먹어 잔뜩 움츠리기를 바랐다.
“나도 그렇게는 생각해요. 몰랐으니 내 잘못은 아니잖아요?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안타깝기는 해도.”
문제는 마리안이 그런 게 통할 인성이 아니라는 것이지만.
‘그 둘이 바람피우다 걸린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지.’
마리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도덕관념은 세간의 것과는 조금 결을 달리했다. 통속 소설 때문만은 아니었고, 그냥 타고난 성품이 그러했다.
“네?”
아가씨 둘이 얼빠진 표정을 한다. 마리안이 기분 나쁘다는 얼굴을 하고 아가씨들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그 표정들은 뭐죠? 설마, 말과 생각이 달랐던 건가요.”
“아, 아닙니다.”
“저희가 어찌 감히 왕자비 전하를 상대로 불손한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런 말을 하시는 걸 보니. 불손한 생각을 하셨나 봐요.”
리덴부르크 백작가의 하인들 사이에서, 마리안은 꼬투리 잡기 대마왕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제 저 아가씨 둘은 왕자비에게 탈탈 털릴 것이다.
마리엘라는 이제 그만 마리안이 사교계 적응을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것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리안은 그녀가 없어도 충분히 잘 해내고 있다.
이제 그녀는 다른 것으로 관심을 돌렸다. 누군가의 부름을 받고 슬그머니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호트너 부인의 행보가 수상했다.
“…….”
그녀는 표정을 굳히고 조심조심, 부인의 뒤를 밟았다.
호트너 부인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밀회는 왕성 구석진 곳에서 이루어졌다. 마리엘라는 재빨리 근처 방에 들어가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이제, 국왕파는 왕자비에게 등을 돌릴 것이고, 귀족파는 그녀를 비웃을 겁니다.”
‘역시나.’
그녀의 예측이 맞았다. 호트너 부인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의도적으로 왕자비를 곤란하게 만든 것이다.
마리엘라의 심장이 뛰었다.
어쩌면 예상보다 빠르게, 왕자의 진짜 적을 잡아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요제프의 눈을 멀게 만들고, 바하츠만 후작과 호트너 부인을 왕자비의 선생으로 붙인 영리한 사람.
요제프는 그것들 모두 요바튼 재상에게서 나온 생각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그 안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때문에 마리엘라는 귀족파의 진짜 수장을 찾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측했었다.
‘행운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말이지.’
그녀는 문틈 사이로 슬쩍슬쩍 고개를 내밀며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다.
“덕분에 그다음 단계로 가기가 수월해질 것 같군요. 부인의 공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뚜벅, 뚜벅, 뚜벅.
마침내 남자가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온다. 마리엘라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호트너 부인과 밀회를 한 남자의 정체는 브랫 백작이었다.
한껏 달아올랐던 마음이 푸스스 식었다.
‘그래.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호트만 부인에게 직접 얼굴을 드러낼 리가 없지. 그렇게 쉬웠으면 왕자가 날 이용하려 들지도 않았을 테고.’
마리엘라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실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 * *
그날 밤, 마리엘라는 왕자의 서재로 달려갔다.
요제프는 자신의 부름 없이 불쑥 서재를 찾아온 불경스러운 하녀를 혼내지 않았다. 그저 일상인 것처럼 반갑게 맞이했다. 살짝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브랫 백작이 허튼수작을 부렸더군요.”
“아, 그 음악회 사건? 나도 사람을 통해 들었어. 소피아 부인만 안됐지.”
능청스러운 대꾸였다. 갑자기 온몸의 힘이 팍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눈앞의 남자가 원망스러웠다.
“…….”
“왜 사람을 그렇게 보지?”
“다 알고 계셨으면 왜 손 놓고 보고만 계신 거죠?”
“나중에야 알았지, 벌어지기 전에 알았나.”
마리엘라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초리를 보내자 그가 싱긋 웃으며 그녀를 약 올렸다.
“그리고 그건 그대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니라.”
“그럼 왕자님의 일이 대체 뭔지요.”
“여기 그냥 가만히 있는 것?”
눈꼬리를 곱게 휘고 웃는 희멀건 얼굴에 마리엘라의 마음이 뒤집혔다. 정말이지 정을 붙이려야 붙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앞으로 정말 바쁘게 될 거야, 마리.”
“지금도 충분히 정신없이 바쁜걸요.”
이제 요제프는 마리엘라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익숙해졌다. 그는 그녀의 태도에 신경도 쓰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사랑하는 마리안 아가씨를 죽기 살기로 지켜야 할 테니까.”
“…….”
그의 말에 그녀의 표정이 굳는다.
“너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잖아. 오늘 일은 그저 간을 좀 본 것뿐이야. 우리에게 한 장의 예고장을 날린 것과 다름없지. 이제부터 왕자비를 공격하겠다는 매우 무례하고 직설적인 예고장 말이야.”
그녀가 목소리에 날을 세우며 기분 나쁜 티를 냈다.
“겁주려 하지 마세요.”
요제프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다들 그런 반응을 보이더군.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는 모양이야. 문제는…… 직접 겪은 이후엔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는 거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호선을 그으며 올라간 입매가 그녀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 * *
요제프의 처소에서 나와 돌아가는 길이었다.
‘긴장할 필요 없어. 괜히 놀리려는 거야.’
그녀는 심장 부근을 꾹 누르며 스스로를 달랬다. 하녀들이 머무는 방이 있는 지하로 막 들어선 참이었다.
“세상에, 이게 뭐야! 안네, 정신 차려봐. 안네!”
“누가 얘 좀 업어봐!”
“의원에게 데려가야겠어.”
하녀 하나의 방이 소란스러웠다.
‘……안네?’
마리엘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그녀는 왕성에서 처음 밤을 보냈을 때의 기억을 더듬었다.
‘손가락 하나만으로 이 왕성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데니스 경이다.’
웬 무뢰한 하나가 그녀의 가는 길을 막았고, 그녀가 마리안에게서 받은 자수 세트를 빼앗았다.
‘안네에게 주려는 거지?’
무뢰한의 무리가 그 이름을 입에 담았었다. 정황상 안네는 그 무뢰한의 애인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그녀의 마음속에서 불안함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확인을 해봐야겠어.’
안네라는 이름이 흔하다는 것을 알지만, 쉬이 넘기기엔 요제프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제가 상태를 좀 봐도 될까요. 저희 아버지가 약초사였어요.”
마리엘라는 사람들을 제치고 안네라는 하녀에게 다가갔다.
안네의 얼굴을 파랗게 질려 있었다. 마리엘라가 그녀의 입을 벌리자, 기도를 막을 수 있을 만큼 부풀어 있는 혀가 보였다. 혀의 뒷부분이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새까맣다.
마리엘라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사용인들이 그녀의 상태를 궁금해했다.
“괜찮은 거야?”
“죽는 건 아니지?”
그녀는 말없이 안네의 손가락을 살폈다.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얀 손가락 끝에 검은색 점 같은 게 콕콕 박혀 있었다. 그녀는 무엇이 이 여자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깨달았다.
‘바늘 자국.’
마리엘라는 마리안의 결혼 선물이었던 금으로 된 자수 세트를 떠올렸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바늘과 보석을 갈아 만든 듯한 천.
안네의 상태를 다 살핀 그녀가 안네의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배꼽 위에 올려 주었다.
“상태는 어때?”
마리엘라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의원을 불러도 소용없을 거예요.”
“뭐?”
“무슨 그런 재수 없는…….”
그녀의 말에 다른 사용인들이 불쾌감을 표했다.
마리엘라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안네의 상태를 진단했다.
“독이에요.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모르지만.”
혹시 몰라 그렇게 말을 덧붙였지만, 마리엘라의 생각은 하나였다.
‘이 여자는 암살된 거야. ……마리안을 대신해서.’
마리엘라는 요제프의 말이 허풍이나 장난이 아님을 깨달았다.
* * *
“날 음해하려는 세력이 있다고?”
마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마리엘라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악회 때 소피아 부인과 작곡가 파비앙을 동시에 부른 것은 다 계획된 일이었어요. 그러니까 앞으로 모든 행동을 조심하셔야 해요. 언제 어디서 그들에게 물어 뜯길지 모르는 일이니까.”
마리엘라는 그 사건에 호트너 부인이 연관되어 있다는 말은 일부러 꺼내지 않았다. 결혼 선물로 받은 자수 세트에 독이 있었다는 사실도. 감정을 숨기는데 서툰 마리안이 문제를 키울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진짜? 정말? 어떻게 해. 내가 정쟁 한 가운데에 섰다니.”
마리안이 갑자기 심장을 부여잡는 시늉을 했다. 마리엘라는 순간, 자신이 말을 꺼내지 말았어야 했던 것은 아닌가, 하고 후회했다. 마리안은 목숨이나 재산, 지위를 통째로 날릴 만한 위협을 받아 본 적 없는 고운 삶을 살았다. 연약한 그녀에게 잔혹한 현실은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일지도 모른다. 마리엘라는 이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주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했다.
그녀가 마리안의 정신 건강을 염려하고 있을 때, 마리안이 한껏 고양된 목소리를 내질렀다.
“나 약간 벅차올라. 소설을 볼 때마다 얼마나 대신 복수해주고 싶었는데!”
그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마리엘라는 그 모습을 보고 억지 미소를 지었다. 저 철딱서니 없는 얼굴을 마주하니, 가슴이 갑갑해져 왔다.
‘왜 우리 아가씨는 왕자비가 되어서도 현실감각을 못 갖추는 걸까.’
그녀는 역시 마리안에게 괜히 현 상황을 말해 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리엘라는 티 나지 않게 작은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의 일이 더 피곤해질 것 같다.
* * *
“그럼 그 일은 그렇게 결정 내리도록 할까요?”
“예, 전하.”
오늘도 왕자는 친절한 미소를 띠고 국무를 보고 있었다.
신하들은 왕자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척하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그를 조정하려 하고 있었다. 물론 요제프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 그다음 논의는…….”
그런데 갑자기 신하 하나가 앞으로 성큼 나오더니, 그의 말을 끊었다.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례하군.’
요제프는 기분이 상했지만 티 내지 않고 물었다.
“말해보세요, 브랫 백작.”
“송구스러우나, 마리안 왕자비와 관련된 일입니다.”
일순 요제프의 얼굴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사라졌다. 모두가 그것을 목격하였으나, 왕자가 왕자비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분노한 것뿐이라고 여겼다.
요제프가 다소 딱딱한 목소리로 백작에게 되물었다.
“……마리안 왕자비가 이 나라의 국정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저, 그것이…….”
브랫 백작이 왕자의 눈치를 보며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하였다. 물론, 진짜로 겁을 먹은 것은 아니었고, 그저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연기였다.
좌중이 무언가를 말할 듯 말 듯한 브랫 백작을 주목하고 있을 때, 갑자기 요바튼 공작이 성큼 앞으로 나왔다.
“왕자비의 순결과 관련된 일이라면 말이 달라지지요.”
그는 브랫 백작을 두둔했다.
“순결이라고?”
국왕파 신하들이 수군거렸다. 귀족파 신하들이 기세등등한 태도로 저들끼리 번갈아 가면서 말을 이었다.
“전하, 왕자비께서는 전하와 결혼하기 전에 세 번의 파혼을 겪었다 합니다.”
“한두 번도 과하다고 생각하는데, 세 번이라니요.”
“그 세 번의 파혼을 하는 동안, 무슨 일이, 어떻게 났을지 어찌 압니까.”
“앞으로의 후계 문제를 깔끔하게 하려면 이 문제를 엄히 논하고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호통이 들어왔다.
“무엄하다! 감히 왕자비 전하께 입에 담기도 무서운 의심을 하다니!”
알폰스 후작이었다. 알폰스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무례함에 깊은 분노를 한 것이다.
“이건 그런 말로 덮어두기만 해서 되는 일이 아니오! 왕가의 혈통이 걸린 일이오!”
“전하, 부디 저희의 충심을 의심하지 마소서.”
그러나 알폰스 후작의 호통 따위로 잠잠해질 귀족파가 아니었다.
그들은 때론 굳센 창처럼, 때론 얍삽한 뱀처럼 세게 나갈 때와 바짝 움츠릴 때를 구분하며 국왕파 귀족들을 막아섰다.
“그만.”
요제프가 그들 사이를 중재했다.
그는 딱딱한 표정을 얼굴 위에서 걷어내고, 피곤함과 당혹스러움이 섞인 감정을 연기했다.
“그건, 제가 생각을 좀 더 해보고 결정 내리겠습니다.”
“하오나 전하!”
귀족파 핵심이자, 화두를 던진 장본인인 브랫 백작이 소리쳤다. 그러나 요제프는 단호했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고, 다들 해산토록 하세요. 머리가 너무 아파 좀 쉬어야겠군요.”
그는 정말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힘없이 그들을 내쳤다.
모두 힘없고 능력 없는 왕자가 왕자비를 정말 사랑하나 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그들은 요제프의 진짜 속내를 몰랐다.
‘이제 곧 소문이 쫙 퍼지겠군.’
그의 손에 가려진 요제프의 입가가 호선을 그었다.
지금 이곳에서 이 상황을 가장 흥미로워하는 사람은 요제프였다.
* * *
남작의 둘째 딸 데이지 이브노말, 그녀는 수도에서 조금 먼, 아버지의 영지에서 살다가 며칠 전에 수도로 상경했다. 왕자비의 시녀를 뽑는 중이라는 공문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시골 촌구석에서 썩을 수는 없지.’
그녀는 왕자비가 총애하는 시녀가 되어서 사교계의 중심이 되는 화려한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것은 꿈일 뿐이었다.
‘후작 부인, 백작 부인, 공작가의 아가씨…….’
왕자비의 시녀 자리에 지원한 자들은 모두 쟁쟁한 가문을 등에 업고 있는 자들이었다. 데이지는 그들을 곁눈질하며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곳에서 자신의 신분이 가장 비천했다.
‘괜찮아, 나는 말을 꽤 잘하니까.’
그녀는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뛰어난 능력, 언변술을 떠올리며 억지로 자신감을 끌어 올리려 노력했다.
“다음.”
그러나 그것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다. 그녀가 제출한 인적사항을 확인한 호트너 부인이 가차 없이 ‘다음’을 외쳤기 때문이었다.
호트너 부인 뒤쪽에 앉아 있는 왕자비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부인…….”
그녀는 부인에게 기회를 한 번 달라고 호소했지만 호트너 부인은 가차 없이 그를 쳐냈다.
“다음!”
하녀 마리엘라가 쪼르르 달려와 데이지를 밖으로 안내했다. 데이지가 계속 뒤를 돌아보며 미련을 보이자 마리엘라가 그녀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그냥 가세요. 어차피 오늘은 아무도 뽑지 않을 거예요. 나쁜 인상을 남기는 건 좋은 인상을 남기기보다 쉬운 법이죠.”
그 말에 데이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리엘라를 따랐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회가 있다면 다음에 또 뵙기를.”
마리엘라는 데이지에게 예를 갖춰서 인사했다.
데이지는 그제야 자신을 데리고 온 자가 시녀가 아니라 하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마리안 왕자비에 대한 정보를 떠올려 보았다.
‘왕자비에게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란 하녀가 하나 있다지. 둘은 죽고 못 사는 사이랬어.’
그녀는 이것이 자신에게 다가온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다. 데이지는 서둘러 친절한 얼굴을 지어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일개 하녀라서 그렇게 존대를 하실 필요가 없어요.”
“아……. 혹시 그대가 마리안 왕자비께서 특별히 아끼신다는 그 하녀……?”
“왕자비께서 친가에서 데리고 온 하녀라면 제가 맞습니다.”
“이거 정말 천운이네!”
갑자기 데이지가 손뼉을 쳤다.
마리엘라는 갑자기 해맑은 소녀처럼 구는 데이지가 당혹스러웠다.
“실은, 왕자비께 따로 전해 드릴 말씀이 있어. 이미 귀족들 사이에 파다한 소문이지만 모르고 계실 것 같아 시녀 시험 응시를 핑계로 들어왔지.”
데이지는 마리엘라에게 귀를 좀 대 주라는 몸짓을 했다. 그리고 마리엘라의 귀에 무언가를 속닥였다.
데이지가 전달해 준 것은 마리안 왕자비의 처녀 시절 세 번의 파혼에 얽힌 추문이었다.
곧 그녀가 왕자비의 자리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의미가 섞인.
* * *
“뭐?”
마리안이 격양된 목소리로 되물었다. 마리엘라는 그녀의 머리를 마저 빗겨주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요바튼 재상과 그를 따르는 세력들이 세 번의 파혼을 문제 삼아 이혼을 종용하고 있답니다.”
“이것들이.”
마리안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다. 마리엘라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달랬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네보 후작과 이안 백작을 소환하죠. 그들이 왕자비께 좋은 말을 해 주실 리는 없겠지만, 오히려 그 부분이 사건을 진실하게 비춰줄 거예요.”
마리엘라의 말을 들은 마리안이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한참 동안 허공을 응시하며 머릿속을 정리하더니, 이내 마리엘라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네?”
“내가 해결할게.”
기세등등함과 흥분감이 잔뜩 섞인 마리안의 표정.
마리엘라는 왕자비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을 확신했다.
마리안은 지금 즐겨보는 통속 소설의 주인공이 될 기회에 기뻐하는 중이었다.
‘능력 있는 부모는 낙서를 하는 아이를 다그치는 대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폭을 선물한다지.’
마리엘라는 마리안의 타고난 성정과 넘치는 욕망을 이용해보기로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