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랑하는 마리 아가씨께
이 편지를 드립니다
‘결혼이라니.’
도련님이 떠난 후 마리엘라의 가슴은 두근거림으로 가득했다. 그냥 모든 게 설렜다. 그렇게 친절하고 정중한 귀족 나리도 처음이었고, 남자에게 청혼을 받는 것도 처음이었고, 또…….
‘당신은 제 세상의 전부니까요.’
‘……그런 달콤한 말을 들은 것도.’
마리엘라의 두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제이 도련님과 보내는 시간이 벌써부터 기대되었다. 그와 함께라면 하루하루가 따듯할 것 같다.
‘황혼이 되어도 다정히 손을 잡아 주시겠지. 변함없는 태도로 나를 존중해 주실 거야.’
그녀는 저도 모르게 꿈을 꾸었다. 도련님과 평생을 같이하는 단꿈.
그렇게 삼 주가 지났다.
그는 그녀에게 편지 한 통 보내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입바른 거짓말을 한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는 대신 다른 것에 궁금증을 가졌다.
‘도련님의 눈은 나으셨을까? 어쩌다 그렇게 된 거지? 대체 그분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지치고 힘들 때마다 그녀는 제이 도련님에 대한 궁금증을 속으로 하나둘씩 예상해 나가며 고된 기다림을 견뎠다.
그러는 동안에 하나의 커다란 의문이 하나 더 생겼다.
‘도련님은 대체 언제 오시는 걸까.’
그건 끝까지 그녀가 답을 낼 수 없었던 질문이었다.
* * *
석 달이 지났다. 그녀가 기다림에 무던해졌을 때, 리덴부르크 백작가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사랑하는 마리 아가씨께 이 편지를 보냅니다’로 시작하는 편지.
그것은 데르샤바크 왕가에서 보내온 청혼요청서였다.
데르샤바크 왕가에 왕자는 단 하나뿐이었다. 왕위 계승 서열 제1순위이자, 병상에 누워 사경을 헤매는 왕 대신 업무를 보고 있는 왕자 요제프 하이젠 데르샤바크. 그 말은 곧 이 편지를 받을 주인공에게 이 나라의 왕비가 될 기회가 주어졌단 뜻이었다.
리덴부르크 백작가는 훌륭한 집안이었으나, 왕가에 엉덩이를 들이밀 만한 집안은 아니었다. 왕비의 자리는 더더욱. 그러니 이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는 가문의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백작가에 아가씨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은 마리안 디프네 리덴부르크 하나였고, 그녀의 애칭은 ‘릴리’였다. ‘마리’가 아니라.
백작과 그의 아들들은 어른스럽지 못하게 손톱을 깨물며 고민했다. 거절을 하든, 수락을 하사건의 전말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어야 했는데, 알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이 알기론 마리안은 한 번도 백작가의 영지를 떠난 적이 없고, 왕자는 한 번도 이곳에 발 디뎠던 적이 없었다. 둘은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사이여야 했다. 그런데 떡하니 편지가 왔다.
편지를 잘못 보냈다고 답장을 보내기에는 걸리는 게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왕자가 정확히 ‘리덴부르크가’를 언급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마리안의 이름 앞 글자 두 개가 ‘마리’라는 것이다.
“둘만의 애칭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둘째 아들이 말했다.
“확실하지 않은 건 내뱉는 것이 아니다.”
첫째 아들이 동생에게 핀잔을 줬다.
“휴.”
설마 하녀 나부랭이가 리덴부르크가의 이름을 사칭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백작과 백작의 아들들은 한숨을 푹 쉬며 다시 회의에 들어갔다.
“그냥 물어보죠.”
참을성 없는 둘째 아들이 백작에게 말했다.
백작은 멍하니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안, 요제프 왕자님을 만나 뵌 적 있니?”
다음 날 아침, 백작은 그녀를 슬쩍 떠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마리안은 방실방실 웃으며 답했다.
“아니요, 그렇지만 꼭 만나 뵈었으면 좋겠네요. 왕자님이 아주 많이 잘생겼다고 그랬거든요.”
그녀가 덧붙이는 말에 백작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가 아버지 앞에 내숭을 떠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왕자를 만난 적이 없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편지 속 ‘마리 아가씨’가 누구지?‘
백작가가 발칵 뒤집혔다.
“…….”
난리 통 속에서 조용히 침묵을 유지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망할.’
마리안의 전속 하녀, 마리엘라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제이 도련님이 왕자님이었다니.’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녀는 남자가 후작이나 공작 정도의 작위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교계에서 무시를 많이 당할 뿐이지 귀족들 사이에서 신분이 비천한 평민을 배우자로 삼는 경우는 종종 있어서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었다.
애초에 정부가 되는 것을 반평생의 목표로 삼았던 마리엘라다. 평민 출신의 귀족 부인은 귀족들 사이에서 비웃음을 받지만, 귀족의 첩은 평민들 사이에서도 비난받는다. 그러니 도련님의 정식 부인이 되어서 얻게 될 수난쯤은 기꺼이 받아들이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왕가는 달랐다. 태초부터 고귀한 혈통으로 이루어진 집단. 너무도 고귀해 피 섞인 결혼도 마다하지 않는 자들. 만약 그들이 자신들과 같은 고귀한 왕족이 아닌 평민을 배우자로 맞는다면 백성들은 그들에게 돌을 던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터였다.
왕자가 백작가에 청혼서를 보낸 것만으로도 말이 나올 텐데 하물며 평민이라니.
왕자가 한눈에 반한 여자가 일개 하녀라는 게 밝혀지면 왕자의 위치가 불안정해질 뿐만 아니라 그를 속인 그녀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마리엘라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태연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이 사태가 조용히 넘어가기를 기다렸다.
* * *
“누굴까, 내 이름을 팔아서 왕자님을 꾄 애가.”
그날 밤이었다. 침구를 정돈하는 마리엘라를 마리안이 화장대 거울을 통해 가만히 응시했다. 마리엘라는 시선을 느꼈으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우연히 이름이 겹쳤을 수도 있죠.”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콕 집어서 우리 가문을 언급하던데.”
“왕자님께서 오해를 하셨나 보죠.”
“내 생각은 달라, 마리엘라.”
마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느긋하고 여유롭게 마리엘라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
마리엘라는 제 등 뒤에 서서 자신의 어깨에 붙은 잔먼지를 털어주는 아가씨의 손길에 소름이 돋았다.
“이 성에서 마리라고 불리는 사람은 너밖에 없지.”
그 말을 들은 마리엘라가 고개를 돌렸다. 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둘이 시선을 교환했다.
아가씨는 이게 문제다. 자기 이득과 관련된 부분에서 쓸데없이 눈치가 빠르다. 마리엘라는 자신을 꿰뚫어 보는 아가씨의 두 눈동자를 마주했다.
귀족을 사칭한 죗값은 무겁다. 왕가를 속인 죗값의 무게는 말할 것도 없다.
사형대냐 생존이냐.
운명이 그녀에게 갈래 길을 내주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살려주시나요?”
그녀의 말을 들은 마리안이 생긋 웃었다.
“난 한 번도 널 죽게 내버려 둔 적이 없잖아, 마리.”
결국 마리엘라는 아가씨께 제이 도련님과 있었던 일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의도적으로 리덴부르크가를 사칭한 것이 아니며, 그저 도련님께서 홀로 오해하신 거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마리안은 마리엘라가 강조하는 말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으로 의자에 앉아 턱을 괴었다.
“그래…… 아무도 모른단 말이지?”
“네, 아가씨. 애초에 그분이 왕자님이신 걸 알고 그런 것도 아니었고, 그저 곤란에 빠진 분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것이기 때문에 정말 아무도…….”
마리안이 마리엘라가 주절주절 늘여놓는 변명을 뚝 끊고 말했다.
“내가 갈게.”
“예?”
마리엘라는 말귀를 못 알아듣고 되물었다.
“내가 왕가로 시집가겠다고. 너를 위해서, 직접.”
“…….”
아가씨는 선심 쓰듯 말했다.
인자한 표정 뒤에 보이는 살짝 들뜬 눈동자.
마리엘라는 마리안의 속내를 알았다. 아가씨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에 뛸 듯이 기뻐하는 중이었다.
아가씨가 항상 들고 다니는 통속 소설의 주인공이 될 기회에.
* * *
다음 날, 마리안은 아버지를 찾아가 편지 속 ‘마리 아가씨’가 자신이 맞다고 인정했다. 처음 봤을 때 너무 허름한 모습이어서 남자가 왕자 전하인 줄 몰랐다고, 그래서 대충 이름을 뭉뚱그려 소개해서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거라고 말했다. 천연덕스러운 태도에 백작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 청혼서는…….”
“받아야죠! 그게 어떤 기횐데.”
마리안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적극적인 딸의 모습에 리덴부르크 백작은 살짝 불안한 얼굴을 했다. 그는 말없이 딸의 등 뒤에 있는 하녀 마리엘라를 바라보았다. 마리엘라는 눈을 내리깔아 백작의 시선을 피했다.
“기회는 기회다만……. 마리안, 상대는 왕가다. 왕가에 가서도 방종한 태도를 유지한다면 너는 물론 네 오라비들의 목숨도 부지할 수 없어.”
“설마 제가 거기까지 가서도 그러겠어요?”
마리안은 방긋 웃으며 당당하게 대꾸했다.
“흠…….”
백작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마리엘라는 백작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 세 번의 파혼과 그것에 얽힌 아가씨의 무례한 언행들을 되짚고 있는 거겠지.
“아니, 걔넨 부족한 애들이었잖아요. 잘생기고, 가문 좋은 왕자님한테는 절대 안 그런다니까요?”
아버지가 너무 깊게 고민하자 아가씨는 억울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백작은 다시 말없이 마리엘라를 응시했고, 마리엘라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엘라는 아가씨의 말대로 ‘왕자님에게는’ 절대 그러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문제는 그 외의 사람들이겠지만. 그 부분은 그녀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아가씨가 왕자비가 된다면, 마리엘라는 리덴부르크 영지를 떠날 것이다.
‘듣자 하니 왕비의 시중을 드는 자들은 평민이 아니라 고귀한 귀족들이라던데.’
자신과 아가씨의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하자,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마리엘라는 마리안과의 관계에서 보이지 않는 선을 긋기 시작했다. 떠날 때 서운함을 흘리지 않도록.
그날 밤, 백작가는 정중한 편지를 써서 왕가에 보냈다. 며칠 뒤 왕자가 자신이 아가씨를 보기 위해 직접 내려오겠다는 서신을 보냈고, 백작이 답신을 보내기 전에 리덴부르크가에 도착했다.
왕자님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낮잠을 자던 마리안은 급하게 일어나 몸단장을 했다. 마리안이 왕자님이 계신 안뜰 정원에 도착했을 때 왕자님은 뒷짐을 지고 먼 곳의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리엘라는 열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마리안이 요제프의 등 뒤로 다가가 그를 불렀다.
“왕자님.”
그녀의 부름에 남자가 뒤를 돌았다. 그의 두 눈동자가 정확히 마리안을 향하는 것을 보니 시력이 다시 돌아온 것으로 보였다.
“누구…….”
제이 도련님, 아니 요제프 왕자는 마리안을 보고 조금 놀란 눈을 했다.
아가씨는 천연덕스럽게 굴었다.
“저예요, 리덴부르크가의 마리안!”
“아…….”
왕자는 조금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마리안’이 도대체 누구인지 떠올려 보는 것 같았다. 곧 왕자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마리안의 정체를 대강 짐작해낸 것이다.
“마리 아가씨!”
그가 해맑게 웃으며 마리안을 껴안았다.
마리엘라와 헤어졌을 때 마지막으로 보여줬던 해사한 웃음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마리엘라는 그가 남겼던 마지막 말을 떠올려 보았다.
“…….”
그리고 그들의 연애놀음을 담담히 지켜본다. 기분이 이상했다. 왕자님을 구해준 것도 저이고, 왕자님께 청혼을 받은 것도 저인데, 왜 자신은 저 자리에 설 수 없을까.
그녀는 자신이 인어공주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동화책의 결말이 어떠했더라?
‘……물거품.’
거기까지 생각한 마리엘라가 주먹을 꽉 쥐었다. 끝까지 비참한 결말이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들을 외면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희망에 모든 것을 걸었다가 그것이 지면 같이 죽어버리는 건 너무 허무하다. 마리엘라는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도려내 버리기로 했다.
‘빨리 아가씨를 왕가로 시집보내 버리고, 이 지긋지긋한 백작가를 벗어나자.’
그동안 벌어둔 돈이면 어디서든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늙은 귀족의 정부 자리에 앉을 수 있겠지.’
그녀는 깨진 꿈을 내다 버리고 현실적으로 미래를 설계했다.
인어공주는 왕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를 희생해 물거품으로 사라졌다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마리엘라는 강인한 여성이다.
사랑 같은 것에 함부로 져주지 않는.
* * *
마리안의 뺨에 입맞춤을 퍼부은 요제프가 등 뒤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마리엘라를 발견했다.
그는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 움찔하며 시선을 피하는 그녀가 어딘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요제프가 마리안에게 물었다.
“뒤에 계신 저분은 누구신가요. 아가씨와 외양이 많이 닮은 것 같은데.”
“아……. 마리……엘라예요. 제 담당 하녀죠.”
하마터면 ‘마리’라고 그녀의 애칭을 부를 뻔한 마리안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마리안과 마리엘라, 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리엘라는 왕자가 당황한 마리안 대신 자신을 바라보게 일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인사했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전하.”
“어, 어릴 적부터 붙어 다녀,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답니다.”
마리안이 그의 옆에서 간단하게 덧붙였다.
“정말…… 그런 것 같네요.”
요제프는 마리엘라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덕분에 마리엘라도 그를 계속 바라보아야 했다. 덤덤한 척했지만 그녀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자신의 정체를 들켜서 교수대 위에 서게 될까 두려운 마음 반, 그를 코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서 오는 애달픈 마음 반. 그리고 아주 살짝, 아가씨가 얄밉다는 생각 한 스푼.
제이 도련님을 향한 마음을 버리겠다고 다짐한 그녀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 무 자르듯 쉽게 잘라질 수 있겠는가. 그녀에게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곁을 내줬던 남자를 기억에서 지워버릴 시간이.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서 보는 도련님은 더욱 반짝반짝했다. 그의 날렵한 콧대와 강인한 턱선, 곧게 뻗은 눈썹은 자칫 사람을 부리부리해 보이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짙은 속눈썹과 에메랄드색 눈동자, 상아같이 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이 부족한 부분을 완벽하게 채워 넣었다.
곱상한 소년과 듬직한 청년을 반반씩 섞은 외양이었다.
‘금발에 녹안 그리고 왕자님이라…….’
그야말로 마리안 아가씨가 딱 좋아할 만한 상이었다.
통속 소설 남자 주인공상.
마리엘라는 속상한 마음을 시니컬한 태도로 덮어 감추려 했다. 요제프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리엘라가 의아한 표정을 자아내자, 그가 방긋 웃었다.
“역시, 제 눈에는 마리 아가씨가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아, 진짜요? 몰라, 몰라.”
아가씨가 한껏 아양을 떨며 요제프의 가슴을 콩 때렸다.
‘그거 아니에요, 아가씨. 전 도련님 앞에서 그딴 태도 보인 적이 없었단 말이에요.’
마리엘라가 급하게 고개를 도리질했으나, 아가씨는 아예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제삼자인 마리엘라의 눈에 왕자의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간 의구심이 명확하게 보인다. 그녀는 자신이 나서야 하나 고민했다. 그 순간 요제프가 호탕하게 웃으며 마리안을 꼭 껴안았다.
“그럼요, 제 눈에 마리 아가씨만큼 아름다운 분은 없습니다.”
‘이것들이 사람을 앞에 두고.’
마리엘라는 어쩌면 제 마음이 빠르게 식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결혼 준비는 빠르게 추진되었다. 편지가 몇 번 오가고, 왕가의 가신들이 백작가를 들락날락했다. 지참금을 비롯한 모든 결혼식 의례들이 간소화되어 착착 진행됐다.
원래는 아래 계급인 백작이 왕성에 방문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왕은 침상에 누워 사경을 헤매는 중이었고, 왕자는 국정을 보느라 바빠 장인을 맞이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한 연유로 리덴부르크 백작은 팔자 좋게 제 성 서재에 앉아 모든 일을 지위할 수 있었다.
어른들이 허례허식에 신경 쓰는 동안 아가씨는 신부 수업에 매진했다. 그런데 그 신부 수업이라는 것이 조금 특이했다.
“……그리하여, 교황을 필두로 한 성기사단과 대마법사 ‘그레타’를 중심으로 한 흑마법사 세력이 격돌하게 됩니다. 이를 제3차 성마전쟁이라고 부르며, 마지막 성마전쟁 혹은 위대한 전쟁이라고도 부릅니다. 성마전쟁의 승리자는 ‘하얀 돌’을 가지고 있던 성기사단이며 ‘하얀 돌’의 역사는…….”
백작은 마리안에게 역사 교사를 붙여주었다.
왕실 예법은 귀족과 크게 다르지 않고, 바느질은 어차피 부리는 하녀들이 할 거고, 요리 역시 마찬가지일 테니, 왕실 정세에 기민하게 반응할 수 있게 역사 하나만 제대로 공부해 가라는 거였다.
마리엘라는 리덴부르크 백작을 싫어하는 편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그가 참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다고 아가씨도 똑똑하다는 건 아니고.
마리안은 열심히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바람과 반대로 꾸벅꾸벅 잘도 졸고 있었다.
마리엘라는 미묘한 표정으로 마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왕성에 들어가면 이제 정말 홀로서기를 해야 할 터인데, 자기 없이 살아갈 준비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은 그녀가 마냥 불안했다.
“아가씨, 집중하세요. 왕성에 들어가면 이런 걸 배울 시간도 없다고요.”
“아니, 재미없고 지루하잖아. 옛날이야기를 내가 대체 왜 알아야 하는 거야.”
“옛날이야기 아니에요. 3차 성마전쟁 끝난 지 15년밖에 안 지났어요.”
“진짜?”
“네. 우리는 지방이라 아무 일도 없었지만, 마법사들이 많이 살았던 수도는 정말 피바람이 불었대요. 귀족도 상관없이 숙청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졸지 말고 좀 집중하세요. 이건 아가씨 목숨 줄과 관련 있는 정보예요.”
“아, 그래도 재미없는데…….”
“집중.”
“흑마법사는 주로 여성의 피를 타고 이어져 내려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들을 간단하게 줄여 ‘마녀’라고 지칭하였으며, 이들의 역사는 수천 년을 기어 올라가…….”
교사는 아가씨의 반응과 상관없이 수업 진도를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밤이 되었다. 마리엘라는 양피지를 들고 아가씨의 방으로 은밀히 들어갔다.
그녀는 방에 있는 초랑 램프에 모조리 불을 붙이고, 침대 위에서 곤히 자고 있는 아가씨를 흔들어 깨웠다.
백작은 아가씨가 왕가에서 군림하려면 이 나라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가씨에게는 역사보다 먼저 배워둬야 할 것이 있었다. 바로 ‘마리 아가씨’ 되기. 이제 진짜 신부 수업을 할 때다.
“그 소년의 이름이 로나랬나?”
마리안이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양피지 위에 의미 없는 낙서를 하며 물었다.
“로빈이요. 외우세요, 채소가게 로빈.”
“아, 기억나, 기억나. 채소가게에서 왕자님을 주웠지.”
“아뇨, 도련님을 주운 건 채소가게가 아니라 생선가게예요. 제발 좀 제대로 외우세요.”
‘이러다가 저랑 같이 교수대에 오르시겠어요.’
마리엘라는 끔찍한 말은 적당히 생략해서 전달했다.
* * *
마리안이 왕성으로 가는 날이 다가왔다. 마리엘라는 그녀의 옆에 붙어 왕성에 가져갈 짐들을 정리했다.
‘이것만 해결하면 이제 진짜 끝이다.’
마리엘라는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저를 살리기 위해 여린 몸으로 채찍 일곱 대를 맞아주었던 아가씨였다. 제 자리를 홀랑 채가는 게 얄밉긴 했지만 이렇게 영영 헤어진다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서글펐다. 동시에 아가씨 없이 꾸리는 새 삶에 대한 기대감도 부풀었다. 아가씨가 있을 때 딱히 본인이 억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아가씨가 떠난다고 생각하니 자각하지 못했던 곳에서 싱그러운 바람이 훅 불었다. 자유의 바람이었다.
“이 책들은…….”
하녀들이 침대 밑에서 발견된 수십 권의 통속 소설들의 처분을 물었다. 마리안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답했다.
“아, 그건 마리 짐으로 부쳐줘. 내 거인 거 걸리면 곤란하니까.”
그 말을 들은 마리엘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아가씨 그게 무슨 소리세요.”
“너야말로 왜 그렇게 놀라? 우린 자매와 마찬가지잖아.”
“저희가 각별한 거랑 저 짐이 제 이름으로 붙여지는 거랑 무슨 상관…….”
‘설마.’
마리엘라는 불안한 표정으로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아가씨는 얄밉게 씩 웃어 보였다.
“너도 같이 가야지, 왕성.”
“…….”
아가씨를 바라보는 마리엘라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
마리엘라는 아가씨와 함께 마차를 타고 왕성으로 올라가며 그런 상념에 잠겼다.
‘어디서부터 문제였기에 세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꼬였을까.’
어쩌면 태생부터가 문제인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제프는 지나치게 다정한 인품의 소유자였고, 마리엘라 자신은 야망을 위해선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 그릇된 인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가씨는 통속 소설에 미쳐 개념을 팔았다.
그리하여, 이 꼴이 난 것이다.
“……신부는 신랑, 요제프 하이젠 데르샤바크 왕자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시겠습니까?”
“네.”
인생이 얽힌 세 사람이 한 결혼식장에서 만나고 있는 꼴이.
데르샤바크 왕자와 리덴부르크 백작 영애의 결혼식 날, 평민 출신의 하녀 마리엘라는 수많은 귀족가의 아가씨들을 제치고 왕자비의 드레스 자락을 잡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게 과연 그녀에게도 영광이었는가는 조금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다.
* * *
결혼식 당일 밤이었다. 마리엘라는 왕자님이 오실 때까지 아가씨의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고 있었다. 정확히는 불평불만 상대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수 세트를 선물로 보낸 거지? 이건 또 뭐야, 아기 인형? 아무리 내가 어리다고 해도 애착 담요 들고 다닐 나이는 지났는데.”
마리안은 귀족들이 보낸 선물을 보고 인상을 썼다.
보다 못한 마리엘라가 그들의 편을 들어줬다.
“왕자비님께 드리는 선물은 아닐 거예요.”
“그럼 더 기분 나쁘지! 결혼은 내가 했는데, 축복은 만들어지지도 않은 내 애가 받고 있다니.”
마리안은 소매를 걷으며 씩씩댔다. 금으로 만든 바늘과 보석을 뿌린 듯 반짝거리는 천. 딱 봐도 값비싸 보였지만, 그녀에게는 하등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마리안은 산더미같이 쌓인 선물을 노려보다가 이내 그것들을 처분할 방법을 찾아냈다.
“자. 이거 너 가지고. 이것도 너 가져.”
마리엘라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가 이걸 가져서 어디다 쓰죠?”
“시장에 내다 팔던지. 그나저나 전하는 언제 오시지?”
마리엘라는 대꾸 없이 마리안에게 바쳐진 선물들을 받았다.
그때였다. 늙은 시종 하나가 문을 두드렸다.
“전하께서 밀린 업무가 많아 오늘 밤, 들리지 못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아…….”
마리안이 탄성을 뱉었다. 많은 의미가 담긴 소리였다.
“대신, 왕자비께 이 선물을…….”
녹이 슨 브로치였다. 마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뭐야?”
“최근에 연못에서 건진 것입니다. 이렇게 전해드리면 아실 거라고…….”
마리엘라는 마리안의 허리를 쿡 찔렀다. 대충 아는 척하라는 신호에 마리안은 어설픈 연기를 했다.
“아아, 그거군. 알겠네. 그럼 들어가 보게.”
‘갑자기 말투가 왜 저래?’
마리엘라가 마리안을 흘겨보았다.
“왜 저런 낡아 빠진 보석을 준 거람. 흠, 이것도 너 가질래?”
시종이 떠나고, 마리안이 투덜거리며 침대에 누웠다.
마리엘라는 브로치를 화장대 깊숙한 곳에 보관하며 말했다.
“돌아가신 왕비님 유품이세요. 저번에 말씀드렸잖아요, 왕자님께서 어릴 적 연못에 어머니 보물을 뿌린 적이 있었다고.”
“아, 그 인어?”
“그래요, 그 인어. 아가씨, 제발 제대로 좀 외우세요. 지켜보는 제가 심장 떨려 죽겠어요.”
“평생 널 달고 다닐 건데 뭘 걱정해? 그런 걸 두고 쓸데없는 고민이라 하는 거야.”
“아무튼, 왕자께서는 나름대로 최고의 선물을 보내 주신 것이니 소박맞았다고 생각지 마시고 푹 주무세요.”
마리엘라는 마리안이 내심 속상해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이불을 덮어주며 다정하게 달래 주었던 것이다.
마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의 위로를 의아해했다.
“나 그런 생각 한 적 없는데?”
“네?”
“나 소박맞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이게 원래 후회물의 묘미 아니겠어? 남자 주인공은 된통 후회하고 여자 주인공 앞에서 무릎 꿇게 되어있는 거야. 두고 봐, 요제프 왕자. 내가 그 예쁜 두 눈에서 눈물 줄줄 흐르게 할 테니.”
마리안의 두 눈에 묘한 희열이 감돌았다. 마리엘라는 대꾸 없이 하하하, 웃었다. 자포자기가 섞인, 경직된 웃음이었다.
‘이놈의 아가씨가 또.’
아가씨의 개념 없음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마리엘라는 언젠가 저놈의 통속 소설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겠다, 결심했다.
* * *
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 살고 계시는 성은 일개 백작가의 성보다 더 거대하고 복잡했다. 마리엘라는 마리안에게서 받은 금은으로 만든 자수 세트를 품에 안고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복도에는 사람 하나 없어 쌀쌀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왕성에 감도는 으스스한 분위기보다 그녀를 더 초조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그녀는 왕성 한복판에서 길을 잃었다. 걷고, 또 걸어봤지만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느낌만 받았다. 도움을 요청할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길을 기억해내려 애쓰던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인상이 좋지 않은 왕성의 사용인들이었다.
“너구나, 그 버릇없는 하녀가.”
“누구시죠?”
마리엘라는 그들을 경계했다. 그녀의 태도를 겁먹은 것이라 착각한 하인들이 저들끼리 낄낄댔다. 가장 선두에 선 남자가 가슴을 펴며 허풍을 떨었다.
“손가락 하나만으로 이 왕성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데니스 경이다.”
왕성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에게 ‘경’ 따위의 호칭이 붙을 리가 없었다. 마리엘라는 그들이 저를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을 데니스 경이라 소개한 남자가 그녀를 향해 몸을 숙였다.
“듣자 하니 왕자비가 엄청나게 아낀다지?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기고만장한 눈이구나.”
남자의 시선이 그녀의 품 안에 있는 자수 세트에 향했다.
“꽤 괜찮은 물건을 가득 가지고 있네. 훔친 것이냐?”
그리고 그녀가 뭐라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그것을 빼앗아갔다. 마리엘라는 되찾으려 버둥거리는 대신 그를 노려보았다.
“이걸 통행세로 퉁 쳐주지. 다음에 볼 땐 조심해, 건방진 아가씨.”
남자는 그녀의 코끝을 툭 하고 가볍게 치고는 친구들과 함께 사라졌다. 그들이 비열하게 낄낄대는 소리가 복도에 가득 울려 퍼졌다.
“안네에게 주려는 거지?”
“그놈의 안네.”
마리엘라는 그들이 사라진 쪽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는 여전히 길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저들이 있는 쪽으로는 갈 수 없어.’
잊고 있던 피로가 급격히 몰려왔다.
‘일단은 불빛이 보이는 쪽으로 가자.’
그녀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마리엘라가 임의의 목적지로 설정해둔 ‘불빛이 나오는 곳’은 왕자의 개인 서재였다. 열린 창 사이로 누군가와 국정에 대해서 논의 중인 요제프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이의 얼굴이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왕국에서 가장 젊은 공작이라는 율리안 폰 바이르. 하얀 로브 차림으로 눈 먼 요제프를 데리러 왔던 사람. 칠흑 같은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인상 깊었던, 차가운 느낌의 남자였다.
왕성에 도착한 직후, 마리엘라는 자신의 얼굴을 본 적 있는 그를 경계했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마리안과 외모가 비슷해서인지, 그날 밤 유독 어둡고 컴컴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율리안은 마리엘라에게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럴 법도 했다. 율리안은 이 왕국의 유일무이한 소드마스터였고, 교황이 어릴 적부터 품에 안고 키워 온 교황의 양아들이었다. 그런 고귀한 이가 일개 하녀의 얼굴을 유심히 볼 리가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지.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줄었으니.’
그 순간이었다. 그녀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왕자와 눈이 마주쳤다. 오만하면서도 독기를 품은 눈동자. 심장을 꿰뚫린 것 같은 감각이 그녀의 온몸을 지배했다. 마리엘라는 서둘러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무슨 일이야?”
“아니, 밖에 고양이가 한 마리 돌아다니는 것 같아서. 날이 추우니 창을 좀 닫을까?”
곧 서재의 창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마리엘라는 그제야 기둥 너머로 힐끔, 왕자가 있는 곳을 확인했다. 창은 완전히 닫혀 있었다.
‘일단 여기는 빨리 빠져나가야겠어.’
그녀는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걸어 나갔다.
어쩌면 왕성 생활이 그녀가 예상한 것보다 더 고달플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녀의 온몸을 휩쓸었다.
* * *
“아가씨, 일어나 보세요.”
이른 새벽, 마리엘라는 마리안을 깨웠다. 그녀가 요제프에 관한 걸 다 외웠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어젯밤 우연히 왕자와 눈이 마주친 이후, 마리엘라는 불안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명확한 근거가 없는 두려움이었다. 감정보다는 이성의 말을 따르는 편이었던 그녀는, 오랜만에 본능으로 몸을 떨었다.
“그런 거 마리가 해주면 되잖아. 나는 그냥 잘래.”
“약한 소리 마세요. 목걸이 대신 밧줄을 목에 걸고 싶어요?”
그녀는 칭얼거리는 왕자비를 단호한 표정으로 쳐냈다.
마리안은 제 주제를 모르고 버릇없이 날뛰는 하녀를 혼내는 대신, 입술을 삐죽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마리엘라가 적어준 커닝 페이퍼를 읽었다.
“하암.”
이런 느긋한 하품과 함께.
마리엘라가 매서운 눈빛으로 제 주인을 바라본다. 마리안이 입을 삐죽이며 툴툴댔다.
“이거 그냥 하품만 한 거야.”
“왕자비께서 나샨타라 전당포에 가서 팔았던 물건이 뭐라고 했죠?”
“……목걸이?”
“다시 수업합시다.”
마리엘라가 마리안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종이를 펼쳤다.
* * *
아침이 밝았다. 마리안은 병상에서 깨어날 줄을 모르는 왕에게 문안 인사를 할 준비를 마쳤다. 문을 열자, 깔끔하게 차려입은 요제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아름답습니다, 마리안.”
“전하, 지난밤 잘 주무셨어요?”
정확히는 자신의 새 신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만. 마리안 왕자비가 자신의 새신랑을 향해 가볍게 인사했다. 왕자가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맞춤한다.
마리엘라는 두세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애정행각을 지켜보았다. 바로 몇 달 전만 해도 요제프의 옆자리는 자신의 것이었다.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지만 티 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속상해하는 대신 왕자를 좀 더 주시하기로 했다. 어젯밤 보았던 그의 서늘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너무 서운해하지는 마세요. 국정이 너무 바빠 시간을 내기가 힘들 뿐, 제 마음은 변하지 않아요, 나의 구원자.”
“서운하긴요, 전하께선 이 나라의 왕자시니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나라에 남편을 빼앗길 각오는 충분히 되어있었답니다.”
아가씨답지 않게 의젓한 말을 하며 그에게 안겼다.
마리엘라는 아가씨가 웬일이지, 하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 * *
데르샤바크의 성을 가진 자 중 가장 높은 자, 풍요로운 나라 베르단의 아버지, 요하네스 하이젠 데르샤바크 왕은 수척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방 안에는 고통을 없애는 용도로 피운 향이 가득하다.
“왕께서 깨어나지 않으신지 오래되셨어요. 아무 반응이 없어도 놀라지 마세요.”
왕자는 왕자비의 잔머리를 정리해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마리안은 침을 꿀꺽 삼키며 왕자의 손을 꽉 잡았다. 마리안은 유독 ‘가족’에 약했다. 그녀가 열다섯 살 때 갑작스레 병사한 어머니에 대한 깊은 그리움 때문이었다.
마리안은 축 늘어진 눈썹을 하고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왕자는 기운 없는 미소를 띠고는 자신의 손을 잡은 그녀의 손등 위를 토닥였다.
마리엘라는 그런 둘의 손을 슬쩍 보고는 시선을 다시 침대 위로 던졌다. 가죽만 남은 왕은 시체나 다름없다. 그러니 왕자가 새 신부 얼굴 한번을 제대로 못 보고 국무에 매달려 있지.
‘살아있는 게 나을까, 죽는 게 나을까.’
그녀는 병으로 돌아가신 백작마님의 마지막을 떠올려 보았다.
푹 꺼진 두 눈과 혈색 없는 얼굴 그리고 피부 이곳저곳에 두드러기처럼 난 파란색 발진이 아직도 그녀의 기억에 선명하다.
‘마리…….’
그날, 백작마님은 딸이 있는 쪽으로 손을 한번 뻗더니, 이내 숨을 거뒀다. 하루나 이틀 정도는 더 사실 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빠른 죽음이었다.
마리엘라는 눈물로 몸을 겨누지 못하는 아가씨를 대신해 백작 마님의 눈을 감겨드리고 그녀의 귓가에 마지막 인사말을 했다.
‘안녕히 가세요, 백작마님.’
사람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는 감각이 청각이라고 했다. 아마 백작마님은 그녀가 했던 말을 다 듣고 갔을 것이다.
‘엄마……! 엄마, 가지 마. 엄마!’
오열하는 아가씨를 지켜보며 마리엘라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을 가졌다. 백작부인은 그녀의 가족을 몰살시킨 주범이며, 또한 그녀의 생명을 구해준 아가씨의 소중한 가족이었다. 동시에 그녀가 감히 어쩌지 못하는 높디높은 신분의 귀족이기도 했다.
아가씨는 그녀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반 가족을 죽인 어머니나 아버지를 책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끔찍이 사랑했다. 납득할 수 없었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귀족에게 자신과 상관없는 평민은, 그냥 평민인 것이다.
마리안의 어머니가 죽던 날,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던 생각과 감정들은 아직도 그녀 곁에 남아 그녀를 괴롭혔다. 간단명료하게 좋아, 싫어만 외치면 되는 입장의 마리안은 끝까지 모를, 비천한 자의 고뇌였다.
* * *
데르샤바크 왕가에 시집온 왕자비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관례가 있는데, 바로 관료들을 이끌고 티타임을 갖는 것이었다.
관료와 왕가 새 식구가 서로 얼굴도 익힐 겸 ‘새 신부 환영 파티’를 할 겸 해서 모이기 때문에 별로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관료들이 논쟁거리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유지해야지요! 요하네스 전하의 병세가 깊어지자마자 슬그머니 없앤 세금이 몇 개입니까! 이것만은 아니 되오! 술, 담배, 사치품 그리고 귀족의 영지에 대한 세금만은 꼭 거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 세금을 없애자고 했소? 줄이자고 했소, 줄이자고만!”
관료들은 귀족파와 국왕파, 두 파로 나뉘어 치열하게 싸워댔다. 눈앞에 있는 왕자비는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누가 보면 여기가 전쟁터인 줄 알겠네.’
마리엘라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들이 싸우는 걸 지켜보았다. 그녀는 왕권이 얼마나 약하기에 대신들이 여기서 저 난리일까, 생각하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국왕파의 우두머리여야 할 왕자의 존재감이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슬그머니 눈동자만 움직여, 왕자가 무슨 반응을 보이는지 지켜보았다.
“그것참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지요.”
왕자는 해사한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이며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마리엘라는 귀족파와 국왕파의 주장을 모두 수용하겠다는 그의 태도를 괴이하게 여겼다. 대놓고 자기 밥그릇을 빼앗아가고 있는데 누가 저런 태도를 보인단 말인가. 그녀는 갑자기 왕자에게 의구심을 가졌다.
‘국정을 보느라 밤을 새우는 건, 실은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업무가 자신에게 너무 어려운 거 아니야?’
뒷자리에서 팔짱을 끼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귀족들을 노려보는 율리안을 보니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어젯밤 보았던 왕자의 날 선 눈빛을 떠올려 보았다. 얼음 성의 군주처럼 차갑고 무시무시했던 눈동자.
‘새로운 보금자리가 낯설어 신경이 예민해진 것뿐이었나.’
혹은 지나가는 하녀에게 보내는 귀족들의 평범한 시선을, 제가 곡해한 걸 수도 있다. 그녀는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왕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민망함에 볼을 긁었다.
한편, 마리안은 허탈함을 직통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통속 소설에서 나오던 정쟁의 실체가 기대보다 보잘것없었던 탓이었다. 목에 핏발을 세우고 서로 삿대질을 하는 귀족들에 대한 마리안의 평은 단 한 줄이었다.
‘싸우는 꼴이 꽤 볼품없네.’
그녀의 생각이 들통 난 것일까? 언쟁을 벌이던 귀족 하나가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왕자비께선 어찌 생각하시는지.”
브랫 백작이었다.
백작은 사치품과 관련된 중개 무역을 하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 그 논쟁을 끌고 온 것도 브랫 백작의 계략이었다.
“아.”
마리안이 작은 탄성을 뱉었다. 그녀는 손장난을 치던 것을 내려놓고 자신에게 질문을 한 백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왕자비께선 사치품을 싸게 구입하시는 게 좋으신가요, 아니면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구입하시는 게 좋으신가요.”
아니, 비슷한 질문인 척하며 명백하게 답이 정해져 있는 말을 던졌다. 브랫 백작 쪽에 있는 사람들이 조용히 입가를 가렸다.
“…….”
마리엘라가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저는-”
마리안이 대꾸를 하려는 찰나였다.
마리엘라는 조용히 그녀의 뒤쪽으로 다가가 실수인 척, 왕자비의 팔꿈치를 쳤다. 덕분에 마리안의 앞에 있던 찻잔이 엎어지며, 뜨거운 차가 브랫 백작의 허벅지를 적셨다.
“앗, 뜨거!”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펄펄 뛰었다. 의도치 않은 사고에 마리안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마리엘라는 제가 모시는 왕자비의 옷에 찻물이 묻었는지 확인하는 척하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가씨, 지금부터 제 말을 그대로 따라하세요.”
계책을 들은 마리안의 고개가 작게 움직였다. 어릴 적부터 마리안은 마리엘라를 손위 누이처럼 잘 따랐다. 마리엘라는 만족하는 얼굴을 하고 뒤로 물러났다.
이제 마리안의 무대였다.
“어떻게 해, 귀한 옷감이 다 상하겠어요.”
마리안은 걱정하는 척하면서 백작에게 다가갔다.
“빨리 찬물을 가지고 와!”
백작이 방 안에 있는 시종에게 소리쳤다. 시종이 그 말에 서둘러 움직이려 할 때, 마리안이 그를 막았다.
“아니, 찬물 말고 미온수를 가지고 오도록. 때가 잘 질 수 있게 비눗물을 타서.”
“지금 사람이 다쳤는데 비눗물이라니요!”
백작 근처의 누군가가 펄쩍 뛰었다. 마리안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대꾸했다.
“백작의 예쁘고 값비싼 사치품이 상하게 생겼는데, 찻물에 좀 데인 게 대수란 말인가요?”
혼란스럽던 분위기가 마리안의 말에 싸늘하게 식었다. 브랫 백작이 허벅지의 화상도 잊어버린 채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리안은 백작에게 눈웃음을 지어주었다.
“백작께서도 양해해 주실 거라 믿어요. 섣불리 찬물을 부었다가 귀한 옷감이 상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됩니다.”
“그, 그것이…….”
“고통스러우셔도 어쩔 수 없죠. 참으세요, 코르셋을 버텨내는 여인들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 하나가 비눗물을 탄 미온수를 들고 왔다. 마리안은 미온수에 손수건에 적셔 백작에게 건넸다. 직접 얼룩을 지우라는 의미였다.
“옷감이 상하지 않게 세탁을 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으니 말이에요.”
“…….”
브랫 백작이 머뭇거리며 그녀가 건넨 손수건을 받아 얼룩을 지우는 시늉을 했다. 그는 뒤통수를 한 대 크게 맞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백작이 사치품의 세금 문제를 왕자비에게 물은 것은, 여자를 사치스러운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다. ‘여자가 쓰는 사치품인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세금 감면에 찬성해야 하지 않나.’ 하는 의미로 던진 질문인 것이다.
그 무례하고도 공격적인 질문을 새 왕자비가 멋지게 받아쳤다. 더 나아가 선 넘지 말라고 경고를 날렸다. 너무 우아하고 자연스러운 방법이어서 뭐라 난리를 칠 수도 없었다.
백작은 입을 다물었다. 뜨거운 찻물과 비눗물을 차례로 뒤집어쓴 허벅지가 화끈거렸다.
마리안은 백작의 고통을 모르는 척, 엄한 목소리로 아랫사람들을 타박했다.
“아무래도 얼룩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네. 가지고 온 물보다 살짝 더 뜨거운 물을 가지고 오게. 백작께서 이 귀한 옷감이 상할까 잠 못 이루는 일이 없도록.”
하지만 그 타박의 실제 대상이 시종이나, 하녀들이 아니라 브랫 백작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귀족들의 경계심 섞인 시선이 마리안을 향한다.
마리안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지금 소설 속 한 장면을 제가 이루었다는 생각에 매우 기뻐하는 중이었다.
어색함과 긴장감이 가득 찬 정원.
귀족들 모두가 예사롭지 않은 왕자비의 등장에 긴장하고 있을 때, 오직 율리안만이 마리엘라를 주시했다.
* * *
며칠 뒤 정오였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 둘이 왕자와 왕자비를 찾아왔다. 오랜 시간 왕족들의 교육을 담당해왔던 호트너 부인과 지금은 정계를 은퇴한, 한때 나라의 법을 제정하는 위치에 앉아 있었던 바하츠만 후작이었다.
둘은 깐깐한 얼굴을 하고 차를 마셨다. 그들의 절도 있는 몸짓에 마리안의 허리가 꼿꼿해졌다. 마리엘라는 그녀의 뒤에서 조용히 차 시중을 들었다.
“재상께서 그러시더군요. 새로 오신 왕자비를 도울 예절 선생이 필요한 것 같다고.”
“새로 오신 왕자비께서 왕실의 법도를 모르실 테니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그건, 명백한 보복이었다. 며칠 전 티파티에서의 실수는 넓은 마음으로 양보해 주겠으니 시골 백작가의 아가씨는 그 출신에 걸맞게 놀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동시에 그 둘을 예절 선생으로 놓음으로써 왕자비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고, 또 제어하겠다는 목적도 이루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참 똑똑한 행동이었다.
‘재상이 누구지?’
마리엘라는 자잘한 간식들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으며, 그날 티파티에 참가했던 관료들을 떠올려 보았다. 적합한 사람이 생각나지 않았다. 눈이 빛나는 사람들은 작위가 낮았고, 작위가 있는 자들은 멍청한 소리만 했다.
‘그나마 나았던 것이 브랫 백작이었는데…….’
마리엘라는 미간을 찌푸리고 머리를 굴리다가 호트너 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호트너 부인은 중요한 자리에 딴생각을 하는 하녀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리엘라는 빠르게 손을 놀려 테이블을 정리하고 마리안의 뒤로 숨었다.
마리안이 가식적이고, 연극적인 목소리 톤으로 그 둘의 등장을 반겼다.
“얼굴도 뵌 적 없는 재상께서 제 생각을 많이 해주시는군요. 감동이어라.”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마리안이 웃으며 요제프를 쳐다보았다. 네 선에서 하라는 의미였으나 그걸 그대로 알아들을 요제프 왕자가 아니었다.
요제프는 평소처럼 싱글벙글 웃으며 활기차게 대꾸했다.
“재상께서는 참으로 생각이 깊으시군요!”
‘너는 이게 생각이 깊은 거로 보이냐.’
마리엘라는 요즘 매일매일 왕자의 자질을 의심했다. 제가 돌봤던 제이 도련님은 사려 깊고, 다정하고, 멋진 사람이었다.
……이렇게 모든 일에 다 ‘그래요!’를 외치는 예스맨이 아니라.
다른 의미로 그 순간이 그리워졌다.
“…….”
마리안은 말이 없다. 그녀의 등 뒤에 선 마리엘라는 아가씨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마리안은 꽃과 보석, 사랑 이야기와 잘생긴 남자 그리고 연회 같은 반짝반짝한 것들을 좋아했지만 예절과 규범, 도덕, 교육, 정치 같은 따분한 것들을 싫어했다.
“그럼, 내일 아침부터 수업 일정을 잡아도 되겠습니까.”
“저도 내일 아침부터 왕자비 전하를 보필하겠습니다.”
바하츠만 후작과 호트너 부인이 번갈아 가면서 쐐기를 박았다.
“부인과 후작께서도 각자의 생활이 있으실 텐데, 고작 저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모든 것을 희생하실 필요는…….”
마리안이 돌려돌려 최대한 늦게 왔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지만,
“그래 주신다면야 저희야 감사하지요!”
그 의견은 눈치 없는 왕자님에 의해 묵살 당했다.
‘이 결혼은 망했어.’
마리엘라는 조용히 주먹을 쥐는 마리안의 두 손을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 * *
그날 저녁이었다.
“으으!”
화려하고 고고한 것만 가득할 것 같은 왕자비의 침실에서 울분을 삼키는 신음이 들린다. 소음의 원인은 놀랍게도 왕자비다.
마리안은 분노를 삭이지 못해 애꿎은 베개에 대고 화풀이를 해댔다.
“내가 이러려고 왕자비가 된 줄 알아? 다들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아가씨, 목소리는 줄이세요. 밖에서 시종들 들어요.”
마리엘라는 누가 이 추태를 볼까 망을 보았다.
“나 이거 싫어, 싫단 말이야!”
마리안은 재상이 쓸데없이 일을 벌였다고만 생각했다. 재상이 그녀에게 붙인 두 선생은 앞에 그녀가 선보였던 티파티에서의 언행 때문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저 달달하고 화려해야 할 자신의 통속 소설 주인공 같은 인생을 방해받았다고만 느꼈다.
마리엘라는 아가씨가 저렇게 세상을 몰라서 어떻게 이곳에서 살아가나, 싶어 가슴이 갑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움직임에 재상이 반응했다는 사실이 흐뭇했다.
비록 재상에게 한 방 먹은 셈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항상 귀족들의 기분에 따라 처분이 달라지는 신세였던 제가, 그 반대의 위치에 설 수도 있다는 게, 그것도 아주 높은 분들을 움직이게 했다는 게 기뻤다.
‘앞으로 그런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기회가 되면 또 한 번 움직여보고 싶어.’
마리엘라는 피어오르는 욕망을 철저히 숨기며, 생떼를 부리는 아가씨를 차분히 달랬다.
“아가씨, 왕자비는 하기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에요.”
그냥 포기하라는 의미였지만 마리안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맞아, 내가 왕자비인데 제깟 게 뭐라고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아, 짜증.’
마리엘라는 가끔 이런 마리안이 싫었다.
‘스물다섯이나 되었으면 사회성을 좀 길러라, 이 개념 없는 친구야.’
그녀는 쓴소리 대신 방긋 웃어 보이며 왕자비의 잔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왕자 전하께서 이미 승인하셨기 때문에 돌릴 수 없어요. 전하께서 마음을 돌리신다면 모를까.”
“요제프 전하께서?”
“네, 요제프 전하께서 마음을 돌리셔야 해요.”
‘과연 그 예스맨이 그렇게 해 줄지는 의문이지만.’
마리엘라는 방긋방긋 웃는 요제프의 얼굴을 떠올리며 생각을 덧붙였다.
‘혹시 모르지, 귀족파 말도 예스, 국왕파 말도 예스 하시는데 아가씨의 말도 좋다고 받아들일지도.’
그 사이, 마리안은 마리엘라의 말 속에서 묘안을 찾아냈다.
“흠……. 맞아, 그 말도 일리가 있어.”
“예?”
마리안의 작은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한 마리엘라가 되물었다.
“전하를 꼬드겨야겠어! 그토록 사랑하는 부인 말이면 무조건 들어 주실 거야.”
마리엘라는 피식 웃으며 왕자비의 당찬 포부를 단칼에 꺾었다.
“언제 만나서, 언제 꼬드기시게요.”
“…….”
요제프는 며칠째 마리안을 소박 놓고 있었다.
둘은 때가 되면 만나는 시계의 분침과 시침처럼 정해진 시간에만 만났다.
문제는 그 몇 안 되는 시간조차 단둘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태까지는 수많은 시종과 하녀들이 뒤를 따랐고, 앞으로는 호트너 부인, 바하츠만 후작과 함께할 것이다.
“왕자님이 안 오시는데 어째!”
마리안은 울상을 지으며 장신구 하나를 집어 던졌다. 기분이 나쁘면 물건을 집어 던지는 건, 어린 시절 잘못 든 습관 중 하나였다.
‘어릴 때 저걸 반성 의자에 앉혔어야 했는데.’
마리엘라는 속으로 딸내미 교육을 거지같이 시킨 백작 부부를 원망하며 다시 마리안을 다정히 감쌌다.
“원하는 것이 있어도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이곳은 소문이 무서운 곳입니다. 혹여 행동을 잘못해서 악처라고 못 박히면 왕자비의 입지가 작아져요.”
“알고 있지…….”
마리안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지금 소설과 다른 현실에 좌절하는 중이었다. 통속 소설의 주인공은 언제나 활발하고, 사랑스러운 매력으로 통쾌히 문제를 해결했다. 이렇게 외롭고, 무능하고, 지루하고, 갑갑한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움츠러든 마리안의 등을 마리엘라가 다독여주었다. 그때, 마리안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방법이 있어!”
“네?”
“네가 갔다 오면 되잖아. 간식을 준비했다 그래. 정무를 보느라 출출하실까 봐 내가 신경 써서 준비했다고. 은근히 날 드러내 줘. 오늘 밤에는 내 침대에 오게.”
‘망할.’
마리엘라가 똥 씹은 표정 대신, 억지웃음을 표면 위로 드러냈다.
마리안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이 아가씨가 또 일을 만드네.’
언제나 그랬듯, 마리안의 뒤처리는 마리엘라의 몫이었다.
* * *
마리엘라는 왕자비의 명에 따라 간식거리와 따듯한 티를 들고 요제프의 개인 서재로 향하다 복도에서 낯익은 남자를 하나 만났다.
율리안이었다.
그는 신관으로 추정되는 누군가에게서 편지를 건네받고 있었다.
마리엘라는 가는 길을 멈추고 무릎을 살짝 굽혀서 그에게 예를 표했다.
“뭐지?”
율리안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앞에 섰다. 차가운 눈동자였다.
“네?”
“너, 왕자비의 하녀인 걸로 아는데 왜 이곳을 얼쩡거리지?”
“아……. 마리안 왕자비께서 왕자 전하의 건강을 염려하여 음식과 따듯한 차를 챙겨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공작이 힐끔, 그녀가 들고 있는 다과를 보았다.
“독이 들거나 하진 않았겠지?”
마리엘라의 심장이 이유 없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무런 증거 없이 의심스럽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목숨이 날아갈 수 있는 아랫것들의 습관이었다.
“저, 저는 아무런 연고 없이 리덴부르크 백작가에서 올라온 하녀고, 마리안 왕자비께서 아가씨였을 때부터 보좌하던 하녀인데 어찌 그러겠습니까.”
“그건 두고 볼 일이지.”
율리안은 호락호락하게 넘어가 주지 않았다. 그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리덴부르크가…….’하고 중얼거렸다.
마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공작의 얼굴을 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고,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뭐해, 빨리 가질 않곤.”
공작이 서재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마리엘라는 어이가 없었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음식에 독이 들었다고 딴지는 걸었던 건 저쪽이 아닌가.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어.’
마리엘라는 씩씩대며 그를 지나쳤다. 물론 속으로만. 고귀한 공작 각하에게 기분을 드러냈다가 목을 댕강 잘리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녀가 서재로 들어갔을 때, 요제프는 책상 위에서 쪽잠을 자고 있었다.
그의 한쪽 뺨에는 내일까지 서명해야 할 서류가 붙어 있었고, 머리맡에는 그것과 관련된 서재가 놓여 있었다.
국무 때문에 왕자비의 처소를 방문하지 못한다는 말이 지어낸 말은 아닌 모양이다.
마리엘라는 일렁이는 촛불 따라 얼굴에 그림자가 지는 요제프를 멀찍이서 바라보았다.
책상 위로 흩어진 숱 많은 금빛 머리카락부터 훤칠한 이마, 깔끔하게 솟은 콧대와 짙은 속눈썹까지. 마리가 알고 있는 남자, 기억 속의 제이 도련님이 그 자리에 있었다.
무덤덤해진 줄 알았던 그녀의 심장이 욱신거렸다. 동시에 이런 감정을 가지는 스스로를 불편하게 느껴졌다.
‘빨리 이것만 놓고 사라져야지.’
그녀는 왕자가 깰까,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그의 곁에 다가갔다.
쟁반을 놓고 자리를 뜨려는데, 눈 끝에 자꾸 요제프가 걸렸다.
왕자는 날씨에 비해 추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자는 자세가 불편해 보이기도 했고.
“…….”
마리엘라는 잠시 고민했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이 정도는.’
자기 합리화를 끝낸 그녀가 왕자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의자에 걸쳐있던 외투를 어깨 위로 덮어주었다.
그때 요제프가 스르륵 눈을 떴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리?”
깜짝 놀란 마리엘라가 뒤로 물러났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그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마리엘라였군요.”
“…….”
그러나 마리엘라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도련님이 그녀의 애칭을 불렀다.
왕자의 신분으로 돌아간 뒤, 처음으로 불린 이름이었다.
“왕자비께서 심부름을 보내셔서 왔다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마리엘라는 큰 죄를 지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아아, 마리안이.”
그의 시선이 마리엘라가 가지고 온 쟁반 위로 향했다. 쟁반 위에는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와 따듯한 차 그리고 꿀 한 컵이 준비되어 있었다.
“꿀이네요.”
“네? 아, 네.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거라고 하셔서…….”
“제가 참 좋아하는 건데, 잊지 않고 챙겨 주시는 군요, 마리 아가씨.”
요제프가 포근하게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
그녀는 침묵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마리안을 생각하고 하는 말일 텐데, 꼭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요제프에게 ‘리덴부르크가의 마리 아가씨’는 마리안 왕자비밖에 없다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데도 그랬다.
그녀는 자신의 본분과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왕자비께서는 언제나 전하를 기다리고,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돌리고 돌려 말했지만, 저 말은 결국 ‘왕자비의 침실을 잊지 말고 방문해 주세요.’라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들은 요제프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한 뒤,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내일 밤 찾아가겠다고 전해주세요, 마리엘라.”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녀는 무릎을 살짝 숙였다 일어났다. 그리고 서둘러 서재를 빠져나왔다.
마리엘라는 자신의 착각과 오만을 인정하기로 했다.
여태까지 왕자를 앞에 두고 무덤덤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깔끔히 정리되어서가 아니었다.
왕자가 모질어 보여서 모든 정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가 그녀를 없는 사람 대하듯 굴어서 겨우 견딜 수 있었던 것뿐이었다.
‘큰일이야, 내가 아직 미련을 못 버렸어.’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반만 인정했다.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 놓았던 그리움이, 오늘 밤을 빌미로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 * *
결심에는 잔상이 남는다.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생각이 남게 되고, 되돌아가지 않으려 하면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남게 된다. 그래서였을까?
“오늘도 아름다워요, 나의 작은 꽃.”
“아이참, 전하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익숙해지면 섭섭하죠. 항상 당신이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게 하는 것이 저의 의무인걸요.”
마리엘라의 머릿속에 요제프가 가득 차게 된 것은.
모든 게 평소와 같았다. 요제프는 아내에게 다정했고, 마리안은 그런 남편에게 폭 안겨 애교를 부렸다. 그리고 마리엘라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평소와 다른 것은 마리엘라의 머릿속이다.
그녀는 오늘 밤, 거사를 치를 두 남녀를 생각했다.
하나는 그녀가 평생의 충성을 맹세한 여자였고, 또 다른 하나는 그녀가 아직 사랑하는 남자였다.
“…….”
그녀는 주제 파악을 잘하는 여자였다. 그래서 항상 포기가 빨랐다.
요제프의 경우에도 그랬다. 마리안이 회유한 것이긴 했지만, 결국 도련님을 포기하자 마음먹은 것은 마리엘라 본인이었다. 평민의 신분으로 감히 왕자비의 자리를 노릴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마리엘라는 빠른 결정을 내렸던 그 날처럼 자신의 마음도 빨리 잘라지길 바랐다.
그러나 아무리 지우고, 끊어 내려고 애써도 요동치는 마음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을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오늘 밤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자꾸 착잡하고 심란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리엘라가 표정을 숨기는 것에 능숙한 하녀라는 점이다.
아무도 그녀가 왕자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밤이 되기 전에 장미꽃을 당신의 처소에 보낼게요.”
“아이참, 부끄럽게. 그렇다면 저는 그 장미꽃을 침대 위에 뿌리겠어요.”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그녀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고 있는 마리안 왕자비조차도.
마리엘라는 왕자의 귓가에 달콤한 말투로 속삭이는 마리안을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숙였다.
* * *
“걷는 법부터 연습해야겠군요.”
아침식사가 끝난 직후였다. 호트너 부인이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왕자비의 걸음걸이 교육을 선언했다. 마리안은 호트너 부인이 시선을 돌린 틈을 타, 마리엘라에게 토하는 시늉을 했다.
“걸음걸이에는 성격이 깃드는 법이죠. 왕자비께서는 설렁설렁 걷는 경향이 있어요. 혹시 사고 먼저 치고 수습은 아랫사람들에게 떠넘기시나요?”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부인.”
“그건 차차 지내보면 알겠죠. 지금 당장 훈련에 들어가야겠어요. 머리에 얹을 책이 필요한데…….”
호트너 부인이 방을 죽 둘러보며 책을 찾았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있는 방에는 소파와 테이블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너, 나가서 책 한 권만 가지고 와.”
호트너 부인이 마리엘라를 콕 집어 명령했다. 마리엘라는 요제프와 생각을 하느라 호트너 부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계속 이 마음이 커지면 어떻게 하지? 차라리 백작가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인내심 약한 호트너 부인이 버럭 호통 쳤다.
“거기!”
“예?”
“게을러빠져서 뭣 하는 거야? 당장 가서 책을 가지고 오라니까!”
“죄송합니다. 바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마리엘라가 책을 가지러 급히 뛰어갔다.
* * *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렇게 오지 않길 빌던 ‘오늘 밤’이 찾아온 것이다.
왕자비의 처소에서 하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들은 향초를 피우고, 침구를 정리하고, 꽃을 뿌리고, 왕자비의 옷차림을 살폈다.
“이만하면 됐어. 마리엘라만 빼고 다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의자에 앉은 마리안이 거만한 자세로 하녀들을 쫓아냈다. 그리고 의자를 끌어다가 제 옆에 놓고는 마리엘라를 보았다. 마리엘라는 못 당한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옆에 앉았다.
“많이 떨리세요?”
“아니, 그건 그냥 담담해. 아무렇지 않아. 근데 있잖아.”
마리안이 무언가 걸린다는 표정으로 마리엘라를 바라보았다.
“네. 말씀하세요, 아가씨.”
“괜찮을까?”
“뭐가요?”
“우리 말이야.”
마리엘라는 마리안이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 하는지 알아챘다. 그녀가 지금 제일 하고 싶지 않은 대화 주제였다. 마리엘라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발뺌을 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아니, 우리. 그러니까 너랑, 나. 아니면 요제프 왕자님과 나.”
“무슨 의미예요?”
“아니, 생각해 보니까. 원래 너를 사랑하는 남자잖아. 너를 살리려고 내가 대신 시집오긴 했지만, 그거랑 별개로 너는 괜찮은가 싶어서.”
“……그걸 지금 생각해 보시는 건가요?”
마리엘라는 예상을 초월해버린 왕자비의 무신경함이 놀라웠다. 아주 살짝 어이가 없기도 했다. 그러다가 곧 납득했다. 마리안은 처음부터 귀족가의 아가씨로 태어난 고귀한 사람이었다. 진심으로 마리엘라를 아꼈지만, 평민과 귀족이라는 근본적인 벽을 허물거나 넘을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십삼 년 전 발생한 그 일의 변주였다. 마리엘라를 살리기 위해 채찍을 맞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마리엘라의 가족을 그렇게 만든 본인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별개의 무고한 사람으로 인식했던 그 사건의 변주.
“내가 원래 생각이 깊은 편은 아니잖아. 아무튼, 갑자기 친구 남자 빼앗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좀 그래. 마음속에서 뭐가 자꾸 걸리는 거 있지.”
“괜찮아요, 아가씨. 아무 감정 없었어요. 마음을 주기에 석 달은 너무 짧죠.”
마리엘라는 마리안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키스는 했다며.”
“그건 그냥 ……정부가 되려고.”
“앗. 바로 이해했어. 너 약간 그런 타입이구나. 소설에서 악역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세상 쿨한 타입.”
마리안은 가끔, 현실의 인간을 통속 소설 속 캐릭터로 빗대어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마리엘라는 뜻 모를 소리를 하는 마리안을 빤히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별 이유 없었어요. 저도 늙은 남자는 별로거든요. 그래서 젊은 남자나 꼬셔보려고 했죠, 뭐.”
“그래도. 이렇게 되니까 조금 민망해, 마리.”
마리안이 마리엘라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애정이 가득 담긴 행동이었다.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에 하얀 피부와 도톰한 입술. 한쪽은 살짝 올라간 눈매, 또 다른 한쪽은 강아지 같은 동그란 눈매를 가지고 있다는 점만 빼면 두 사람은 비슷비슷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마리엘라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가, 이곳이 곧 있으면 큰 행사를 벌일 왕자비의 처소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어영부영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기다리며, 모든 것을 가만히 내버려 뒀다가는 속절없이 커진 마음에 골머리를 썩이게 될 거다.
대책이 필요했다.
간단하면서도 확실하게 왕자를 향한 마음을 뿌리 뽑을 대책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번뜩였다.
“……아가씨, 정 그러시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래요?”
“응? 뭔데? 마리 네 부탁이면 뭐든 들어줄 수 있어.”
그녀는 마리안 쪽으로 상체를 틀었다. 그리고 왕자비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 물었다.
“청혼서 가지고 계시죠.”
“청혼서? 응, 가지고 있지. 근데 그거 왜?”
“그거 저 좀 주세요.”
“왜?”
“읽고 불태워 버리게요.”
“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청혼서를, 그것도 왕자가 보낸 청혼서를 하녀의 손에 넘기고, 태우다니.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마리엘라의 표정이 너무 진지하고 다부져 보여서 마리안은 차마 딱 잘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냥 오는 길에 잃어버렸다고 하지 뭐.’
마리안은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며 편지를 건네주었다.
* * *
마리엘라는 마리안에게 받은 편지를 품 안에 숨기고 왕자비의 처소를 빠져나와 자신의 독방으로 갔다.
둘의 첫날밤을 곁에서 지켜보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빨리 편지를 태워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침대와 가재도구 몇 개뿐인 황량한 방. 빛이라고는 촛불 하나뿐인 그 쓸쓸하고도 차가운 곳에서 그녀는 요제프가 제게 보낸 청혼서를 펼쳤다. 리덴부르크가에서 일할 때는 감히 읽어볼 생각도 못했던 편지였다.
정갈하고 단정한 글씨가 제이 도련님의 차분하고 예의 갖춘 말씨를 생각나게 했다.
그녀는 찬찬히 글자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편지를 읽었다.
사랑하는 마리 아가씨께 이 편지를 드립니다.
편지를 받고 놀라시진 않으셨는지요.
아가씨의 자비와 은혜 덕분에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날, 마리 아가씨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저는 로헨나 시장을 떠돌다 굶어 죽은 흔하디흔한 걸인 중 하나로 남았을 테지요.
아가씨를 만난 건, 제 인생의 가장 큰 천운이었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 궁금하네요.
지난 석 달 동안 편지 한 통 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많이 걸립니다.
아가씨를 처음 만나고 석 달, 아가씨의 곁을 떠난 뒤 석 달.
반년의 시간 동안 제게는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편지로 적기에는 너무 길고 구구절절한 사연들이라
직접 만나서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직접 만나서, 아가씨의 따듯한 두 손을 잡고,
멀쩡해진 두 눈으로 아가씨의 눈을 마주하며 모든 것을 전하고 싶어요.
함께했던 나날,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던 진실과,
떨어져 있는 지금, 제 마음속에서 크게 차오르고 있는 진심까지.
마리. 마지막 헤어질 때, 제가 당신께 했던 말을 기억하시나요?
당신이 제 세상의 전부라는 말이요.
석 달 동안 편지 한 통 없던 주제에 이런 말 하는 것이
조금 염치없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지금도 그 마음은 여전합니다.
당신은 여전히 제 세상의 전부예요.
제가 곤란에 처했을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항상 제 곁에 있어 줄 사람이 당신이라는 것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어느 날 밤, 서로 담요를 뒤집어쓰고 앉아 도란도란 이어가던 끝말잇기가 어찌나 따듯하고 든든하던지요.
그날, 제가 두 눈을 잃은 것은
당신을 잡으라고 신께서 주신 기회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저는 이 기회를 양손으로 잡고, 영원히 놓치지 않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부끄럽지만 이 편지의 끄트머리에 작게 사랑의 진심을 전하려 합니다.
언제나 천사 같은 마음씨로 절 보살펴주던 리덴부르크가의 마리 아가씨,
저와 평생을 함께 해주시겠습니까?
부디 제 청혼이 아가씨께 부담을 주지 않길 바라며.
- 요제프 하이젠 데르샤바크 왕자.
마지막 온점 위에 마리엘라의 손끝이 길게 머물렀다.
요제프 하이젠 데르샤바크 왕자.
마리엘라는 그 부분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제이 도련님이 이 나라의 왕자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거나 원망스러워서가 아니었다. 그 글자 위로 고개를 올리기가 두려워서 그랬다.
짧은 편지 안에 가득 담긴 다정한 표현들이, 그의 마음들이 그녀의 결심을 뒤집어 버릴까 봐 두려워서.
마리엘라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멋들어지게 표현하려고 노력하거나 과장된 티가 전혀 나지 않는 담백한 편지가, 그 편지에 담긴 추억과 진심들이 그녀를 울컥하게 했다.
‘겨우 석 달이었는데. 석 달 동안 만난 날도 손에 꼽는데.’
별것 아닐 거로 생각했던 순간들이 인생의 가장 찬란한 기억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의 비참함이란.
또 그 비참함에서 오는,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황홀경이란.
마리엘라는 울었다. 소리도 내지 않고 시선을 여전히 ‘요제프 하이젠 데르샤바크 왕자’에 고정시킨 채로, 그저 뚝뚝 눈물만 흘렸다.
* * *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쓸쓸하고 쌀쌀한 방에서 그녀는 혼자 마음을 추슬렀다.
‘미련은 끊어 내면 되는 거야.’
눈물을 닦아내고 편지를 불태우려 밖으로 나가는데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다들 검은 옷차림을 하고는,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뭐지?’
마리엘라는 두리번거리며 바삐 움직이는 하녀와 하인들을 바라보았다. 선두에서 그들을 지휘하던 하녀장이 어물어물 서 있는 마리엘라를 발견하고 벼락같은 호통을 쳤다.
“거기 너,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아, 저는.”
그녀는 갑자기 꾸짖음을 들어 당혹스러웠다. 지나가는 하녀 하나가 그녀를 끌고 가며 속닥였다.
“소식 못 들었니?”
“뭘?”
“왕께서 승하하셨어. 얼른 돌아가서 옷부터 갈아입어.”
‘승하라니.’
마리엘라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등 떠밀려 누구의 방인지도 모를 곳에 들어갔다. 친절한 동료가 그녀의 품에 갈아입을 옷을 건네주었다.
“빨리 갈아입고, 네 구역으로 돌아가.”
문이 닫힌다.
마리엘라는 황망한 표정을 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왕이라면 요하네스 하이젠 데르샤바크를 일컫는 말일 터였다. 베르단 왕국의 주인, 요제프의 아버지.
왕이 죽었다. 왕자는 어떤 심경일까.
그녀는 말없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초승달이 막 나뭇가지 끝에 걸린, 초저녁이었다.
* * *
장례식은 이튿날 정오부터 시작되었다.
왕의 육신은 예배당에 안치되었다. 교단에서 급히 파견된 신관 둘이 왕의 시신이 썩지 않도록 마법으로 방부처리를 하였다.
많은 사람이 예배당에 모여 꽃에 둘러싸여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왕의 곁을 지켰다.
왕자와 왕자비는 왕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흐어엉, 불쌍한, 우리, 아버님…….”
마리엘라는 상복을 입고 울고 있는 마리안 왕자비의 곁을 지켰다.
마리안은 본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처럼 펑펑 우는 중이었다. 너무 울어 탈수 증세가 오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격하게 슬퍼했다.
매사에 무덤덤하고 퍼석한 마리엘라는, 가끔 마리안의 감정 과잉이 잘 이해 가지 않았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왕은 정신을 잃고 사경을 헤매는 중이었고, 마리안은 그런 왕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의례에 가까운 인사만 했을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몇 번 스쳐 지나간 늙은이의 죽음에 저렇게 몸도 못 가누고 펑펑 울며 슬퍼하느니, 차라리-
‘왕자 전하나 좀 위로해 주시지.’
하녀 마리의 시선이 왕자비의 어깨너머로 넘어갔다. 온몸으로 비애를 표현하는 마리안 왕자비 그리고 그녀의 옆에 조용히 앉아 아버지의 시신이 안치된 유리관을 바라보는 요제프 왕자.
마리엘라는 그의 얼굴이 많이 수척해졌다고 생각했다. 툭 건드리면 그대로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다.
누군가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주면 좋으련만. 이 넓은 예배당, 이 많은 사람 중에서 요제프를 지켜주거나, 포용해줄 사람이 마땅히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나서서 그를 위로해 주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를 위로해 주는 건 그녀의 일이 아닐뿐더러, 일개 하녀가 해주는 위로를 일국의 왕자가 달가워할 것 같지도 않았다.
‘마리안이 알아서 할 거야. 아가씨는 나보다 더 감성적이고 따듯한 사람이니까.’
그녀가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려는데, 순간 요제프와 눈이 마주쳤다.
“…….”
그대로 눈을 내리깔면 될 일이건만, 어찌 된 일인지 마리엘라는 쉽게 그의 시선을 끊어 내지 못했다.
무언가를 꾹 억누르는 듯한, 한계치에 다다른 것 같은 그의 두 눈동자가 그녀의 마음을 크게 건드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건 꾸중으로 끝나지 않을 텐데.’
지금은 상중이었다. 그것도 베르단 왕국에서 가장 존귀한 분의 상. 예절과 예법이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고 모든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앞으로 사흘간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스캔들이 된다. 대신을 끌어 내리고, 귀족의 작위를 빼앗을 수 있는 스캔들.
‘빨리 고개를 숙여야 해.’
그러나 몸은 쉽게 머리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마리엘라는 석상처럼 뻣뻣하게 굳어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깊고 무거운 눈동자.
수척함과 위압감과 예민함이 섞인 얼굴에서 마리엘라는 무슨 감정을 읽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저, 그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었다.
감히 표면 위로 드러내지 못하는 어떤 감정과 생각들이 왕자의 밑바닥에서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무심함을 연기하는 마리엘라의 품속에 숨겨져 있는 편지처럼.
“왕자 전하.”
덩치 큰 남자 한 명이 성큼성큼 다가와 요제프를 껴안았다. 덕분에 마리엘라는 왕자의 집요한 시선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한스 요바튼 공작입니다.”
호트너 부인이 기척도 없이 다가가 왕자비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 나라의 재상이죠.”
‘재상?’
그 말에 마리엘라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요바튼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오십대 중반의 몸집이 두둑한 남자였다. 장대한 기골과 호전적인 눈동자가 인상 깊었다.
그녀는 기억을 되돌려 티파티에서 만났던 관료들을 떠올려 보았다. 확실히 그곳에서 본 기억이 없다.
‘이 사람이 귀족파의 수장인가.’
그녀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여겨보았다.
왕자비에게 한 방 먹자마자, 바로 호트너 부인과 바하츠만 후작을 붙인 것은 예의와 명분, 경고와 이익을 모두 챙길 수 있는 최고의 수였다. 덕분에 마리엘라는 간접적으로나마 권력의 세계를 맛볼 수 있었다.
재상은 마리안과 호트너 부인에게 몇 마디 인사말을 건넨 뒤 자연스럽게 자리를 떠났다. 재상이 사라지자마자 호트너 부인이 들고 있던 손가방에서 작은 책을 하나 꺼내 왕자비의 손 위에 얹었다. 그리고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왕자비에게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례식은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아요. 전하께선 왕가의 유일한 안주인이십니다. 앞으로 정신 바짝 차리세요.”
마리안은 등 뒤에 선 호트너 부인의 지시를 받으며 장례식장의 총 통솔자가 되었다.
당장 내일 음식은 어떤 것을 내갈 것이며 장송곡을 연주할 음악가는 누굴 부를 것인지, 또 왕성을 방문할 귀빈들이 머물 숙소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그녀의 주된 임무였다.
마리안이 바빠지니 마리엘라도 덩달아 바빠졌다. 그녀는 넓은 왕성을 밤이 새도록 뛰어다녔다. 그러다 보니 고위 관료들의 대화를 심심찮게 엿들을 수 있었다.
“왕께서 돌아가셨으니 후계자는 누가…….”
“당연히 이 왕실의 하나뿐인 핏줄인 요제프 왕자님이 되셔야…….”
“하지만 왕세자로 책봉된 게 아니라 그건 조금…….”
“또한 교단의 인정을 받는 절차가…….”
대부분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녀도 엄연히 말귀를 알아듣는 인간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왕께서 승하하신 지금, 이 나라의 유일무이한 주인이 요제프라는 것도.
마리엘라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무표정을 고수하며 그들 사이를 지나갔다.
‘왕성에서 요제프의 입지가 좁은 것 같아. 내 생각보다 더.’
어째 이곳에서 지내면 지낼수록 왕자를 향한 마음이 커지는 것 같았다.
연민, 사랑, 동정, 애달픔……. 마리엘라가 가진 모든 인간적인 감정이 요제프를 향해 기울어진다. 마리엘라는 빠르게 고개를 내젓고 다시 결심했다.
‘편지를 빨리 태워버려야겠어.’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편지를 불태우기에는 성안은 너무 부산스러웠고, 마리엘라는 너무 바빴다. 그녀의 결심은 사흘이 지나서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 * *
왕의 마지막 가는 길은 성대하게 치러진 후 수도 끄트머리에 있는 성 안드레아 성당에 안치되었다.
마리엘라는 볼일을 본다는 핑계로 왕자비의 곁을 빠져나왔다.
호트너 부인의 매서운 눈동자 밑에서는 도저히 편지를 몰래 태울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장례식에 초대받은 손님들을 안내하면서 점찍어둔 장소가 한 곳 있었다. 왕자비의 처소에서 멀지 않은 데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은 방이라 오늘의 목적을 달성하기 정말 딱 맞는 장소였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그 방까지 걸어가, 주변을 살피고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불붙은 초 하나를 들고 타다 남은 장작과 재가 남은 벽난로 앞에 섰다.
그녀는 품 안에 숨겨 두었던 편지를 꺼냈다. 편지는 그녀의 눈물 때문에 울퉁불퉁해져 있었다. 여기저기 헤지고 엉망이 된 꼴이 꼭 미련이 덕지덕지 붙은 그녀의 마음과 같아서 심장이 찡했다.
마리엘라는 손끝으로 편지를 매만졌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안녕.”
그녀는 망설임 없이 불을 붙였다.
편지를 펼쳐, 왕자의 연서를 다시 읽어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미련은 사람을 무너지게만 했다.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다.
타닥타닥.
종이 타는 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거세게 때렸다.
편지가 타는 짧은 시간, 많은 것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생선가게 뒤편에서 요제프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가 자신에게 해사하게 웃어주는 순간까지.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가슴 저린 추억이었지만 절대 그 시절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가져본 적 없던 따스한 감정을 선사해주었다. 그냥 그것만으로 만족스러웠다.
‘이제 정말 안녕, 제이 도련님.’
행동으로 마음의 경계를 지어주는 것이 효과적일 때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연서를 불태우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마리엘라는 드디어 지난 반년 동안 남모르게 키워왔던 자신의 연심과 작별할 수 있었다.
* * *
그녀가 마리안에게 돌아갔을 때, 마리안은 오수에서 깨어나 요제프를 찾고 있었다.
“요제프 전하께서 어디 계시는지 아니?”
“찾아볼까요?”
“응. 내가 찾는다고 말 좀 전해줘.”
그녀는 마리안의 명을 받고 왕자의 침실로 향했지만 요제프는 그곳에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왕자의 서재를 방문했지만 그곳에도 요제프는 없었다. 집무실과 그가 침실로 쓸 만한 다른 방들, 연무장과 욕실까지 샅샅이 뒤져도 요제프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뭐지?’
당황스러웠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도 되었다.
연약한 요제프의 성정을 생각해 본다면 가능성이 영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가 갈 곳을 추리해 하나하나 둘러보다가, 왕성 내의 모든 방을 싹 뒤졌다. 마침내 그녀는 예배당에서 요제프를 찾아냈다.
그는 예배당 의자에 앉아 조용히 자고 있었다.
아마 아버지의 관이 놓였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 자리에서 깜박 잠이 든 것 같았다.
마리엘라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짙은 속눈썹 위에 피곤함과 중압감이 깃들어 있었다.
‘왕좌를 물려받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지.’
마리엘라는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은 뒤, 조용히 뒷걸음질했다. 담요라도 둘러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저번처럼 그를 깨우게 될까 두려웠다. 더는 그와 얽히고 싶지 않기도 했다. 편지를 태우자마자 새로 연심을 싹틔우는 한심한 짓은 사절이었다.
‘아가씨께는 그냥 못 찾았다고 둘러대야겠어.’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제 발에 제가 걸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소란스럽지는 않았지만, 예민한 요제프를 깨우기에는 충분한 소음이었다.
요제프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다시 한번, 그의 오묘하고 고요한 녹안을 마주한 마리엘라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동자는 처음 마주하는 사람도 사랑에 빠지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그녀는 옷차림을 정돈하는 척하면서 그의 시선을 피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또.”
“마리엘라군요. 괜찮아요, 잠깐 졸았던 것뿐이니까.”
요제프가 또 다정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이 혹시 그의 숨겨진 연인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마리엘라는 정말로 리덴부르크 백작가로 내려가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했다. 이건 미련의 문제가 아니었다. 저렇게 잘생긴 왕자가 일개 평민 출신인 하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또 저렇게 따스하게 불러주는데 어느 누가 설레지 않는단 말인가.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조금 전 편지를 태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마음은 요제프의 다정함에 조금 면역이 되어있었다.
‘착각하지 마. 전하께선 그저 모든 백성을 사랑하셔서 이러시는 것뿐이니까.’
지금 이렇게 이성의 벽을 세울 수 있는 것은 모두 그 덕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홀로 남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실 것 같아요.”
“잠시만요.”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서둘러 예배당을 빠져나오려는데 그가 그녀를 잡았다.
“가지 마세요.”
“예?”
그녀가 얼빠진 얼굴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애처로운 눈을 한 요제프의 모습이 보였다.
“생각 정리보다, 진솔한 대화를 할 상대가 필요해요.”
마리엘라는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갈지 잠시 고민하다가 곧 답을 찾았다.
“……바이르 공작님을 불러올까요?”
그녀의 말에 요제프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옅은 미소 하나에도 그의 심신이 얼마나 지쳐있는지 한눈에 보였다.
“율리안은 이런 대화에 적합하지 않아요. 저는 위로가 필요하지 충고가 필요하지 않거든요. 마리엘라, 그대도 알다시피 저는…… 저는 방금 아버지를 잃었어요.”
요제프가 축 늘어진 눈썹을 하고 그녀를 바라본다.
절망 때문에 버석한 눈동자.
마리엘라는 저 눈을 알았다. 그건 그녀가 가족을 잃었을 때 했던 눈이었다.
‘저 사람 지금 정말 힘들구나.’
마리엘라의 마음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러나 여전히 위로는 그녀의 몫이 아니다.
그녀는 서로 다른 신분이 얼마나 커다란 벽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와 그는 보잘것없는 위로 하나도 오고 갈 수 없는 사이였다.
거기다 요제프는 왕자다. 일개 귀족이 아니라.
태산을 넘는 것이 그와의 신분 차를 극복하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그녀는 지금이라도 달려가 그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평정심을 찾았다.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하며 대안을 찾아주려 노력했다.
“그럼, 왕자비 전하를 모시고 오겠습니다.”
그럴수록 요제프는 다급해졌다.
“잠깐이면 돼요. 잠깐만, 잠깐만 남아 저를 위로해 주세요.”
그는 마치 헤어짐을 고하는 연인에게 애걸복걸하는 남자처럼 그녀에게 매달렸다. 요제프의 연약한 모습에 마리엘라의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전하.”
요제프를 마음을 돌리려면 별수가 없었다. 마리엘라는 곤란한 표정을 숨기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단호하게 그를 부르자 요제프가 패닉에 빠진 사람처럼 중언부언했다. 사랑이 정말 간절한 자들만이 보이는 태도였다.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대신들 앞에 보일 수가 없어요. 제 하나뿐인 친구에게도, 절대로……. 그러니까 어디 가지 말아요. 모르는 사람이다, 생각하고 그냥 여기 있어 주세요.”
마리엘라는 당혹스러웠다. 곧 국왕이 될 자가 일개 하녀에게 무릎이라도 꿇을 것처럼 간절하게 구는 게 이상했다.
물론 아주 이해 못할 행동은 아니었다. 귀족가의 아가씨나 도련님들이 너무 곱고 귀하게 자란 나머지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나약하게 꺾어지는 모습을 그녀는 종종 보아왔다. 아마 왕자도 그런 케이스일 것이다.
굳이 그녀 앞에서 무너진 까닭은…… 아마 그녀가 하녀여서겠지.
인간 취급을 할 필요가 없는 하녀. 외로우면 베개를 껴안고 울듯이, 자신을 적절히 위로해 줄 무생물 같은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마리엘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의사를 에둘러 표현했다. 그것은 그녀의 의지가 깃든 말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입장 표명에 더 가까워 보였다.
“왕자 전하, 왕자비 전하를 부르겠습니다.”
요제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에 스스로의 얼굴을 묻었다. 마리엘라는 불안해 보이는 그의 상태를 살피며, 다시 한번 확인을 받듯이 못을 박았다.
“불러오겠습니다.”
그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마리엘라는 그의 상태를 확인한 후, 조심스레 뒤를 돌았다. 그녀가 예배당 문을 향해 한 발자국을 내디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멈춰.”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
그에게서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그녀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사람은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을 맞닥뜨리면 사고를 멈춘다. 그리고 사고가 멈춘 사람은 몸에 밴 습관대로 움직이게 된다.
마리엘라는 요제프의 이상함을 자각했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에 대한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했다. 그저 처음 계획했던 대로 예배당을 나서려고 할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발목을 요제프의 목소리가 잡아끌었다.
“내가 멈추라고 했을 텐데, 마리엘라 호반.”
마리엘라는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자리에서 굳어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포식자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몸이 마비되는 초식동물처럼.
온화하게만 느껴졌던 요제프의 녹색 눈동자가 위태롭게 빛난다.
그녀는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지만, 이미 모든 것이 늦었다.
“왜 안 된다는 거지? 그대는 나를 사랑하잖아. 사랑하는 남자가 아버지를 잃고 이렇게 무너졌는데 어째서 간단한 위로도 건네주지 않는 거야?”
“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혀 알아듣지…….”
그를 향해 애끓었던 마음을 들켰다. 당황한 그녀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그 와중에도 열심히 사실을 부정하려 했다.
피식.
요제프는 대놓고 그녀의 노력을 비웃었다.
그가 자신의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린 뒤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평소의 요제프를 아는 이라면 상상도 못 할, 능청맞고 빈정거리는 어조를 사용해서.
“아, 이제 알겠어. 지금 내 말투가 글러 먹어서 그런 거지? 그럼 이렇게 말하면 되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리엘라에게 다가갔다.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그녀는 도망갈 생각도 못 하고, 사색이 된 얼굴로 요제프가 다가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였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빠져나온 잔머리를 가볍게 매만졌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사랑하는 마리 아가씨, 제 편지를 읽기는 하셨는지.”
그녀는 뒤늦게 깨달았다.
다정하고, 예의 바르고, 방긋방긋 웃는 예스맨은 요제프의 진짜 모습이 아니었다.
오만하고, 영악하며, 잔인하고, 셈이 빠른 남자.
그게 바로 요제프 하이젠 데르샤바크의 본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