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왕자와 거지 (3/21)

2. 왕자와 거지

마리안이 마리엘라의 방 침대 위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마리안이 온 신경을 집중해서 읽고 있는 책은 여염집 아가씨들이 읽곤 하는 평범한 교양서가 아니었다. ‘황제 폐하의 은밀한 비밀’이라는 제목을 가진 통속 소설이었다.

백작 마님이 돌아가시고부터 마리안은 통속 소설에 빠지기 시작했다. 통속 소설을 향한 그녀의 집착은 타의의 추종을 불허했다. 리덴부르크 백작이 통속 소설 금지령을 내리자, 마리엘라의 방에 숨어들어 통속 소설을 읽을 정도였다.

어머니를 잃은 마리안이 안쓰러웠던 마리엘라는 그 사실을 적극적으로 숨겨주었다.

‘생각해 보면, 아가씨의 기상천외한 언행의 8할은 저 통속 소설에서 나오는 것 같단 말이야.’

마리엘라는 조용히 소설책을 노려본 뒤 가방을 챙겨 방문을 열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시장에 내려갈 생각이었다. 사냥터에서 귀족을 꾀고 다니느라 동네 친구들을 안 본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오늘 사냥터는 안 가는 거지?”

등 뒤로 마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가요.”

“내가 시집을 안 가면 너도 가선 안 돼.”

‘또 저 소리.’

요새 들어 시집 타령이 심해졌다.

“나는 너랑 평생 같이 살 거란 말이야.”

‘올해 들은 것 중 가장 끔찍한 소리네.’

마리엘라는 아가씨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놓고 간 것은 없는지 가방을 몇 번 뒤적거렸다.

“정말이야, 마리엘라. 나는 너 없으면 안 돼. 이 성에서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단 말이야.”

“물론이죠, 아가씨.”

‘전 시집은 안 가요. 정부가 될 거거든요.’

마리엘라는 방긋 웃는 얼굴로 아가씨가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해주었다.

다음 남자를 꾈 땐 아가씨의 물잔에 수면제를 타겠다고 결심하며.

* * *

리덴부르크 백작가는 사용인에게 한 달에 한 번씩 휴일을 준다. 마리엘라는 쉬는 날이 되면 마을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지긋지긋한 마리안 아가씨의 징징거림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기도 했지만, 가장 큰 원인은 백작가 사람들의 냉랭한 눈초리에 있었다.

가족이 모두 처형당하고, 혼자 살아남게 된 마리엘라는 백작가 사용인들에게 동정과 보살핌 대신 멸시와 무시를 당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마리엘라를 싫어하는 것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보살펴 줄 가족이 없는 그녀가 만만하기도 했고, 보잘것없는 그녀가 여기저기 활개를 치고 다니는 꼴이 마음에 안 들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마리안 아가씨와 관련되어 있었다.

마리엘라의 가족이 모두 사형대에 매달리던 그 날, 마리안은 어린 몸으로 채찍 일곱 대를 맞았다. 귀족가의 아가씨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형벌이었다.

마리안의 등이 터지고, 그녀의 옷에 피가 물들었을 때, 백작은 뒤늦게 자신의 결심을 꺾고 마리엘라를 살려 주었다.

백작가 사용인들의 눈이 매서울 수밖에 없었다. 귀한 아가씨의 등에 평생 갈 흉을 만들어 놓은 하녀. 그들은 주제를 모르고 목숨을 구걸한 마리엘라를 증오했다. 호반 가족이 얼마나 억울하게 죽었는가는 그들의 알 바가 아니었다. 오늘날까지도 마리엘라는 백작가 사용인들 사이에서 겉도는 존재다. 그녀를 반기고, 안쓰러워 해주는 사람은 모두 백작가 외부에 있다.

그래서 마리엘라는 휴일마다 시장 산책을 나섰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사람같이 생각해주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하여.

오늘은 생선가게 둘째 딸 로라와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생선가게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로라를 기다리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렸던 마리는 남자의 추레한 몰골에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저, 저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를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남자는 허공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갈 곳을 잃은 시선 처리를 보아하니 눈이 먼 사내 같았다.

마리엘라는 조용히 사내의 외양을 뜯어보았다. 조금 기이한 구석이 있는 사내였다. 머리와 옷은 마른 진흙과 먼지로 가득했고, 옷은 낡고 헤졌다. 신발 한쪽은 어디다 두고 왔는지, 양말만 신은 한쪽 발이 피투성이다. 거지라고 해도 이상할 것 없는 몰골.

“저, 정말 죄송하지만, 아가씨, 제가 지금 눈이 안 보여서…….”

하지만 마리엘라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 정중한 말투는 분명 귀족의 것이다.

옷이 유독 해지고 더러운 것은, 그런 옷감을 쓰는 계층이기 때문이다.

한쪽밖에 없는 신발이었지만, 그가 신고 있는 것은 밑창이 잘 다듬어진 고가의 승마용 부츠였다.

무엇보다 레이스가 달린 비단 양말을 일개 평민이 신고 다닐 리가 없다.

‘도적을 만난 건가? 아니면 가신의 배신?’

마리엘라가 남자의 처지를 가늠하고 있을 때, 로라의 어머니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녀는 남자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마리엘라에게 속삭였다.

“마리,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 있으렴. 거지한테까지 자비를 베풀 필요는 없단다.”

“괜찮아요, 아주머니. 저 사람이랑 할 얘기가 있어요.”

“저런 것들은 산짐승과 같아. 잘해줄수록 들러붙고, 은혜도 모르고 공격하지.”

하지만 저 사람은 거지가 아닌걸요.

마리엘라는 굳이 그 말을 거기서 꺼내지 않았다.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남들과 나누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아, 그래서는 아니에요. 저 사람…… 자세히 보니 아버지랑 알고 지냈던 것 같아서요.”

“너희 아버지랑? 그래, 뭐……. 네가 그렇다면 말리진 않으마. 아줌마는 일이 바빠서 들어가 있을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소리 질러. 아줌마가 달려 나오마.”

이제 생선가게 뒤편에는 마리엘라와 남자, 단둘만 남았다. 그녀는 남자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남자가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꼴이라서 죄송합니다. 놀라거나 불쾌하게 했다면 정말 죄송해요. 저는 단지 눈이 보지 않아서…….”

“알아요.”

“네?”

“당신이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딱 보면 알 수 있어요. 제가 여기 남은 건 궁금한 게 있어서예요. 어쩌다 그런 꼴이 되신 거예요?”

“아, 그건…….”

남자가 곤란한 낯빛을 했다. 말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어쩌면 이건 일생일대의 기회인지도 몰라.’

마리엘라의 마음속에서 욕망이 들끓었다.

말하기 꺼리는 태도를 보면 아직 남자의 생명을 노리는 무언가가 남아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그가 상당한 권력가나 재력가라는 것을 뜻했다.

‘늙은이의 애인보다는 젊은 사내의 애인이 낫고, 그냥 애인인 것보다 목숨을 구해준 운명의 여인인 편이 더 좋지.’

마리엘라는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잡아 보기로 했다.

“말씀하기 어려우시다면 말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를 도와주신다면 사례는 톡톡히…….”

“사례도 필요 없어요.”

“네? 그럼…….”

“원하거나 바라는 건 딱히 없어요. 고난에 빠진 자를 돕는 것은 신의 뜻이니까요.”

‘신실하고 다정한 여자만큼 잘 먹히는 건 없지.’

그녀는 차분히 머릿속으로 남자에게 내보일 자신의 이미지를 구상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귀족가 도련님.

이런 상황에도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을 만큼 교육을 잘 받은 도련님을 가장 홀리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자신이 가진 경험과 판단력을 이용해 남자의 이상형을 예측했다. 동시에 빠르게 자신과 남자의 앞날을 설계했다.

“우선 제 손을 잡으세요. 당신은 눈이 안 보이니까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아마 남자는 마리엘라는 평생의 은인, 운명의 짝 혹은 신이 내려주신 성녀라고 생각하겠지만, 마리엘라의 본심은 그런 낭만적인 것들과는 결을 달리했다.

‘어떻게든 이 남자의 정부가 되겠어.’

그녀는 눈앞의 거지꼴을 한 남자의 손을 꽉 잡으며 그렇게 결심했다.

* * *

마리엘라는 마을 어귀에 남자가 머물 집과 주기적으로 남자에게 먹을 것을 조달해 줄 꼬마 심부름꾼을 구했다. 그리고 그의 외양을 사람답게 다듬었다.

진흙과 먼지로 더러워진 몸을 씻고, 마리엘라의 도움으로 수염을 깎고, 새 옷을 입은 남자는 몰라볼 정도로 수려했다.

하얀 피부에 빛을 받아 찰랑거리는 금발, 짙은 눈썹과 깊은 눈매.

마리엘라는 자신이 만약 풍족한 집안의 귀족 아가씨였더라면, 이 남자와 사랑에 빠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완벽한 외모였다.

“씻으니까 좀 살 것 같습니다.”

남자는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방긋 웃었다. 그 해사한 미소가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양심을 쿡쿡 건드렸다.

마리엘라는 근처 약초 방에서 얻어온 약초를 빻아 남자의 발에 난 상처에 발라 주었다. 그러고 나서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의 휴일은 한 달 중 하루였다. 그 말은 곧 한 달에 딱 하루만 남자를 꾀는 데 쓸 수 있단 뜻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관계의 속도를 가늠해보았다.

‘최소한 오늘 안에는 통성명을 해야 해.’

“저, 도련님.”

“아가씨는.”

마리엘라가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남자가 차분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아침의 거지꼴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고고해 보였다. 마리엘라는 라산 사냥터 숲지기의 딸로서 수많은 귀족을 보아왔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눈앞의 이 남자만큼 자연스럽게 권위를 내뿜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어쩌면 이 남자가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름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제 신분을 잘 알고 계시는군요. 제 옷은 넝마와 같았고, 제 몰골은 추레하기 그지없었을 텐데요.”

“고귀함은 외양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무례한 짐작이었다면 용서하세요. 저는 도련님이 정확히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도련님께서 문장을 가지고 계시리라 짐작만 하고 있었답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우시네요. 정확히 제 신분을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아가씨가 맞았다는 것만은 인정하겠습니다. 저를 기꺼이 도와주신 자애로운 아가씨. 아가씨께서 아까 하려던 질문은 무엇이었나요?”

“아…… 별건 아니었어요. 도련님을 언제까지 도련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 이름을 여쭤보려고…….”

남자는 대답 없이 방긋 웃었다. 마리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비밀로 하셔야 할 까닭이 있으신 것 같으니 묻지 않을게요.”

“……제이.”

잠시 망설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네?”

“제이라고 불러주세요.”

“제이?”

“제 어린 시절 애칭이었거든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 수려한 얼굴에 그림자가 진다. 마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촛불에 일렁거리는 남자의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가 급히 정신을 차렸다.

“어, 그런데, 이름난 가문의 도련님이라면, 애칭도 어느 정도는 알려져 있을 텐데 저한테 이렇게 알려 주셔도 되실지…….”

“괜찮습니다. 그 이름을 알고 계시는 분은 이제 세상에 딱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아…….”

“그럼 우리 통성명을 해볼까요. 비록 제가 이렇게 누추한 신세이긴 하지만, 신사 된 도리로써 아가씨의 이름을 여쭤보지 않을 수가 없죠.”

마리엘라는 머리를 굴렸다.

갈림길이었다.

여기서 귀족이 아닌 것을 밝히느냐, 아니면 끝까지 숨겨내느냐.

전자는 바로 도련님에게 걸러질 위험이 있고, 후자는 나중에 들켰을 때 해야 할 뒷감당이 무섭다.

주어진 짧은 시간 내에 결정을 내리지 못한 마리엘라는 방긋 웃으며 어정쩡한 대답을 했다.

“마리예요.”

“리덴부르크가의 마리 아가씨로군요!”

남자는 머리가 좋았다. 라산 사냥터의 주인이 리덴부르크가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네. 뭐…… 그런 셈이죠.”

마리엘라는 피식 웃으며 그의 말에 수긍했다.

* * *

마리엘라가 로라네 생선가게 뒤편에서 남자와 만난 지 세 달이 흘렀다.

마리엘라는 남자를 살뜰히 돌봤다. 정확히는 마리엘라의 돈이 그를 잘 돌보았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었지만, 아무튼 그녀의 보살핌하에 관계는 무럭무럭 자라났다.

석 달 동안 둘은 다양한 대화를 하며 친분을 쌓았다. 그녀가 백작가에서 일할 때는 편지로 대화를 대신했다. 그녀의 편지를 그에게 읽어주고, 그의 편지를 받아쓰는 일은 꼬마 심부름꾼 로빈이 맡았다. 로빈은 사랑의 큐피드 역에 최선을 다했다. 오늘도 로빈은 편지를 가지고 왔다.

“흠.”

편지를 읽던 마리엘라가 고심에 빠진 소리를 냈다.

석 달 동안 많은 편지가 오갔지만 그녀는 그가 여전히 자신에게 벽을 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남자는 이곳에서 숨을 죽이다가 기회가 되면 훌쩍 사라질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안 되지.’

그녀가 마음에도 없는 자선사업을 하려고 돈과 노력을 쏟아부은 것이 아니다.

마리엘라에게는 목적이 있었다.

이 남자의 정부가 되겠다는 명확하고 뚜렷한 목적이.

‘이럴 때는 밀어붙여야 해.’

마리엘라는 남자와의 벽을 허물기로 했다.

“도련님.”

네 번째 휴일, 그녀는 그의 앞에서 심각한 목소리를 자아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한 달에 한 번밖에 시간을 내드릴 수가 없어요. 아무래도 남들 보는 눈이 있으니까요.”

“이해합니다, 아가씨. 아가씨의 혼처를 막을 수는 없는 법이죠.”

“무례를 무릅쓰고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건 뭐든 다 말씀드릴게요.”

“처음 만난 날, 왜 그런 차림으로 로헨나 시장을 돌아다니신 거죠. 시력은 어쩌다 잃으신 건가요? 어떤 사정인지 여쭤보고 싶어요.”

쏟아지는 그녀의 질문에, 남자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약간의 난처함과 씁쓸함이 섞인 웃음이었다.

“곤란한 질문이었나요? 죄송해요.”

마리엘라가 수그러든 목소리로 사과를 건넸다. 그러나 마주하는 표정은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무표정으로 남자의 반응을 살폈다.

남자는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탁자 밑에 숨긴 손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뒤로 물러서야 할까?’

그녀가 그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였다. 남자가 탁자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단추였다. 처음 만났을 때, 남자의 옷에 달려 있었던 것.

“이것을.”

“?”

마리엘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 단추를 윗지방 나샨타라에 가서 팔아주세요. 상아로 만든 단추라 쉽게 사 가려고 할 겁니다. 요구가 많아 죄송하지만, 아가씨의 이름으로 팔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추적하는 사람이 쉽게 찾을 수 있게요.”

“제가-”

제가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이 무엇이죠?

자신도 모르게 본심을 드러낼 뻔했다. 그녀는 헛기침하는 척을 하고 얼른 말을 바꾸었다.

“제가, 잘못해서 도련님께 해를 끼치면 어쩌죠.”

“해는 항상 제가 끼치고 있죠, 마리 아가씨. 그런 일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니까요.”

“하지만…….”

“저를 믿으세요. 절대로 아가씨에게 위험하거나 부담이 되는 일을 맡기지는 않습니다. 물론, 이게 번거로우시다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대화의 흐름이 또 이상하게 흘러간다. 마리는 이쯤에서 방향을 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아니에요. 하나도 번거롭지 않아요! 당장 다음 주에 나샨타라로 가는 배편을 알아볼게요.”

“제가 나약하고 못나 아가씨께 자꾸 폐만 끼치네요.”

“그런 말씀 마세요.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나, 그게 도련님의 탓은 아니잖아요.”

‘여기서 분위기를 잡아야지.’

마리엘라가 덥석 그의 손을 잡았다. 마주 잡은 손 사이로, 남자가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순진한 아가씨인 척 굴며 그의 손을 더 꽉 잡았다.

“힘내세요, 제이 도련님! 신께서는 극복 가능한 시련만을 주신다고 하잖아요. 도련님은 꼭 이 시련을 이겨내실 수 있을 거예요!”

“시련…….”

그는 입안으로 그 단어를 굴려보았다. 그러더니 곧 방긋 눈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마리 아가씨. 아가씨께서 도와주신다면 이 시련은 금방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날이 되면 아가씨께 모든 걸 털어놓겠다고 약조 드릴게요.”

“…….”

마리엘라는 원래 사람의 말을 잘 믿지 않는다. 그녀가 믿는 것은 자신의 손아귀 위에 놓인 사람들뿐이다.

그녀가 움직이고 조종하는 사람들.

남자는 아직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라오지 않았다. 그는 부드럽고 다정했지만, 동시에 정확한 선을 그을 줄 아는 남자였다. 마치 수많은 귀족 남자들이 자신들과 신분이 다른 여자를 ‘정부’로 한정 짓는 것처럼.

눈앞의 훤칠한 남자는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황금 닭일 뿐이다. 믿을 만한 이유도 없고, 믿을 구석도 없다.

그런데 무엇 때문일까?

그가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순간, 마리엘라는 이 남자가 정말로 그리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 *

마리엘라는 곧바로 마리안에게 나샨타라로 갈 수 있게 휴가를 하루 주십사 요청을 했다. 물론 제이 도련님에 관한 것을 이실직고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거짓말에 능한 사람이고, 교묘한 말로 사람을 조종하는 법을 알았다.

“외사촌 댁에 간다고?”

“네, 외사촌 언니가 죽을병에 걸려 오늘내일한다네요. 가서 은화 몇 닢이나마 보태주고 싶어서요.”

마리안은 마리엘라의 말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리엘라의 외사촌은 혹여 자신들에게도 피해가 올까 두려워 가족들을 몽땅 데리고 나샨타라로 도망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도 가족이라고 챙겨야 해?”

“몇 안 남은 핏줄인데 어쩌겠어요.”

마리엘라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대꾸했다.

마리안은 툴툴거리다가 결국에는 특별 휴가를 내주었다. 그녀는 유독 ‘가족’이라던가 ‘핏줄’이라는 단어에 약했다. 열다섯 살에 어머니를 병으로 잃은 뒤에 생긴 자비였다.

마리엘라는 감사의 인사를 한 뒤, 도련님이 주신 상아 단추와 여비를 챙겨 나샨타라로 떠났다.

* * *

그녀가 도련님이 부탁한 일을 모두 처리한 뒤, 리덴부르크 영지에 도착한 것은 아주 늦은 저녁이었다.

또각, 또각, 또각.

깜깜한 거리에서 들리는 것은 마리엘라의 구두 소리뿐이었다. 그녀는 서늘한 새벽바람에 몸을 움츠리며 계속 전진했다.

라산 사냥터로 향하는 길목을 지나가던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숲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가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숲 어딘가에서 하얗게 일렁이는 망토 같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네 자식들이 방금 도축된 새끼돼지처럼 대롱대롱 걸리는 걸 보고 싶은가 보지?’

그녀의 머릿속에 백작마님이 즐겨 쓰던 은색 망토가 떠올랐다. 아버지를 향해 매섭게 쏘아대던 목소리와 함께.

갑자기 마리엘라의 숨이 턱 막혔다.

천천히 몸을 옆으로 트는데, 곁눈으로 돌아가신 마님의 망토가 그녀에게 다가오는 환영이 보였다.

그녀는 웬만한 장정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겁이 없는 편이었지만, 그날 밤과 연관된 모든 것들은 예외였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마리엘라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무작정 앞으로 달려 나갔다.

탕탕탕!

무슨 정신으로 그 집까지 달려갔는지 모르겠다. 기억이 드문드문 잘라져 있었다. 마리엘라는 다급하게 나무문을 두드렸고, 이내 그의 품에 안겼다.

“마리 아가씨?”

남자는 갑자기 저를 껴안는 온기에 당혹스러워했다.

“……망토가, 하얀색 망토가.”

마리엘라는 제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고 헛소리를 계속 뱉었다.

숨이 다시 막혔다. 누군가 그녀의 목을 콱 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허리를 숙이고 어떻게든 숨을 쉬려고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숨통을 꾹 누른 듯한 감각이 강화될 뿐이었다.

숨을 마셔도 마셔지지 않았고, 내쉬어도 내쉬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의 목을 쥐고 헐떡였다. 그때였다.

“쉬이.”

갑자기 그녀의 등 뒤로 따듯한 온기가 퍼졌다. 남자가 그녀의 등에 손을 살포시 얹은 것이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셔 보세요, 아가씨.”

그는 그녀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한 손으로 마리엘라의 허리를 안정적으로 받쳐 지탱하면서, 나머지 한 손으로는 더듬더듬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는 그녀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고 엄지로 턱을 들어 올린 뒤에, 시선 처리가 부정확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천천히, 또 차분하게.”

그럴수록 마리엘라의 숨소리는 더 가빠졌지만, 그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쉬이-.”

남자는 같은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녀가 진정하고 스스로 호흡을 할 수 있도록 차분하고 안락한 분위기를 조성해주었다.

마침내 마리엘라가 남자의 말을 따라 천천히, 또 차분하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었을 때, 남자는 수고했다는 듯 그녀의 등을 조용히 토닥여주었다.

“……죄송해요, 제가 실수를.”

정신이 든 그녀가 남자에게 사과했다. 이번 사과는 진심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귀 끝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남자는 은은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저도 향초를 피워놓고 자는 날이 수도 없이 많았어요. 그럴 때면 어머니를 모시던 시녀들이 저를 품 안에 안고 제가 잠들 때까지 끝말잇기를 해주었답니다. 사실 끝말잇기도 아니었어요. 아무런 규칙 없이, 그냥 단어만 계속 나열만 했거든요. 주로 서로 좋아하는 것들을 말하곤 했어요. 곰 인형, 목검, 어머니의 향수 같은 것들이요.”

그 말에 마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얕게 웃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잖아요.”

“저는 아직도 어리답니다. 어리고, 나약하고, 겁이 많아서 지금도 이렇게.”

남자의 긴 손가락이 마리엘라의 얼굴선을 스치고 지나갔다. 갑작스킨십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아가씨의 자애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삶을 살고 있죠.”

“…….”

마리엘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큰일이야.’

남자를 꾀어야 하는 건 그녀인데, 되레 그녀가 남자에게 동하고 있다.

남자는 방긋 웃으며 마리엘라를 안았던 팔을 거뒀다.

“저는 아직도 초콜릿을 좋아한답니다. 아가씨는요?”

“……라즈베리를 가니쉬로 얹은 사과 파이요. 하지만 시나몬을 뿌리는 건 싫어해요.”

“편식을 특이하게 하시나 봐요.”

“골라 먹는 걸 좋아한다고 하죠.”

도련님은 말꼬리를 잡는 대신, 그의 유모가 만들었다는 이상한 끝말잇기를 이어나갔다.

“레드와인을 넣고 끓인 소고기 찜을 좋아합니다.”

“꿀을 가득 넣은 밀크티를 좋아해요.”

“저는 그냥 꿀을 좋아해요. 가끔은 간식 대신 한 숟갈씩 먹곤 하죠.”

“지금도요?”

“지금도요. 전 어리고, 나약하고, 겁이 많으니까요, 마리 아가씨.”

두 사람은 담요를 두르고 바닥에 앉아서 서로 좋아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주고받았다.

“음, 또 뭐가 있을까. 아, 공작 깃털로 만든 장식들을 좋아해요. 보고 있으면 제가 엄청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죠.”

“굉장히 특이한 취향이시네요.”

“아버지 검이 가장 탐이 나던, 일곱 살 소년의 그 감성을 아직 버리지 못했답니다.”

“음, 저는…….”

이야기의 주제가 음식을 넘어 사치품까지 다다랐다. 귀족의 하녀일 뿐인 마리엘라가 뱉을 수 있는 단어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녀는 한참을 고민했다. 그때 머릿속에서 일렁이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바람에 펄럭이는 푸른색 천.

“전, 까끌까끌한 천이 좋아요. 비단이나 가죽 말고, 시녀나 하녀들이 평소 입는 옷 재질 말이에요.”

마리엘라는 어머니의 옷을 기억한다.

“특이하시네요.”

“돌아가신 유모가 입었던 것이 생각나서.”

도련님이 자신을 의심하지 않게 적당히 둘러댄 마리엘라는 씁쓸히 웃었다. 그녀는 남자가 눈이 멀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둘은 계속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남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그녀에게 해주었다.

마리엘라는 적당히 호응하며 정말 재미있다며 그를 치켜세웠다.

남자는 뒷목을 긁적거리며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어디 가서 말재주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아가씨는 참 따뜻하고 아름다우신 분 같아요.”

“아뇨. 도련님은 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시는걸요. 아마 알게 된다면 저를 혐오하거나 경멸할지도 몰라요.”

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양심에 찔려서나, 자기혐오에 가득한 사람이라 자기 비하를 하지 않고서는 못 견디기 때문이 아니었다. 마리엘라는 지혜로운 여자였고, 세 치 혀로 남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법을 알았다.

그녀의 오늘 이 말은 훗날, 이 잘생긴 도련님이 저를 찾으러 올 때, 요긴하게 쓰일 터였다.

도련님이 마리엘라가 귀족가의 귀한 아가씨인 줄 알고 사랑에 빠진 뒤에, 그녀의 진짜 신분을 알게 되었을 때 그를 고심하게 만들고, 요동치게 만들고, 끝내 제게 달려오게 만들 지고지순하고, 불쌍하고, 처연한 말.

그렇지만 구질구질하지는 않아 그를 질리게 하지는 않는 것이 포인트였다.

마리엘라는 스스로의 언변에 만족스러워하며 입꼬리를 휘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저는 마리 아가씨에 대해 필요한 모든 것을 아는걸요. 아가씨는 지나가는 거지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줄 정도로 자애롭고, 저를 위해 시간을 쓰실 정도로 다정하죠.”

“…….”

“당신이 어떤 외양을 했든, 어떤 신분이고 어떤 과거를 가졌든. 그런 건 상관없어요. 그런 것은 다 헛것이에요. 눈을 잃으니 알겠더군요. 사람을 진짜로 빛나게 하는 건 그 사람의 내면에 있어요.”

남자의 말은 너무 뻔했다. 너무 옳고, 너무 선하고, 너무 향기로워 아무도 그 말을 반박하진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믿지 않는 말.

남자의 단순한 말에 이 마을에서 가장 영악한 처녀, 마리엘라의 입가가 굳은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남자가 너무 잘생겨서?

그의 애티튜드와 다정한 성격에 반해서?

그도 아니면 잘나신 귀족 나리가 저를 귀족 아가씨 취급을 해주는 것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외면보다 내면이 중요하다는 말을 믿으시나요? 솔직히 저는 그걸 잘 모르겠거든요.”

그녀는 저도 모르게 남자에게 진심을 담은 질문을 던졌다.

석 달 동안 그녀가 연기해 온 ‘마리 아가씨’와 비교해 대화의 주제나 말투의 결이 확연하게 달랐지만, 남자는 그것을 눈지 못했다.

“저도 여태까지는 몰랐었죠. 아가씨를 만나기 전까지는.”

“…….”

마리엘라는 침묵했다. 그녀는 남자의 녹색 눈동자가 자신을 꿰뚫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두 눈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에메랄드 보석 같은 눈동자가 그녀를 하녀 마리나 몰살당한 호반 집안의 생존자, 천애 고아, 보잘것없는 평민이 아닌, 마리엘라라는 이름을 가진 유일무이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평생을 남이 붙여준 호칭이나 신분 따위에 갇혀 살던 마리엘라가 눈앞의 남자에게 흔들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걸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깨를 덮고 있던 담요를 스르륵 뒤로 넘기고, 손을 뻗어 남자의 양 뺨을 감쌌다. 깃털같이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아가씨……?”

도련님은 바뀐 분위기를 감지하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제이 도련님. 지금부터 제가 입맞춤을 할 거예요. 싫다면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주세요.”

남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마리엘라는 그의 입술 위에 조심스럽게 안착했다.

담백하고 순수한 버드키스.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마리엘라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남자가 물었다.

“좋다면요?”

“네?”

“방금 입맞춤이 좋아서 한 번 더 하고 싶다면 뭘 하면 될까요, 마리 아가씨.”

자세히 보니 남자의 귀가 붉어져 있다. 첫사랑을 마주한 소년 같은 태도에 마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남자의 얼굴이 더 붉게 타올랐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마리엘라는 그 모습을 턱을 괴고 바라보다가 그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속삭이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키스.”

키스해주세요, 도련님.

* * *

마리엘라에게 약속된 쉬는 날은 변함없이 한 달에 한 번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요즘 그녀는 매일 마을에 내려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틈만 나면 성을 빠져나와 도련님의 집을 방문했다.

“밖은 위험해요. 꽃은 그만 주셔도 괜찮아요, 도련님.”

요즘 남자는 집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일이 많았다. 손으로 벽을 더듬어 계단을 내려와 집 근처에 피어 있는 들꽃을 꺾어다 꽃다발을 만들었다.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는걸요. 저는 당신에게 모든 걸 주고 싶어요. 지금 제 모든 건 바로 이 꽃이에요, 마리 아가씨.”

남자가 이렇게 말할 때면, 그녀의 마음이 봄에 피는 잔 꽃 같은 감정들로 크게 일렁인다. 남자의 보드라운 뺨과 살가운 웃음, 정중한 언행은 마리엘라에게 낯설고 낯간지러운 두근거림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어렵게 인정하기로 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 * *

“요즘 어딜 그렇게 쏘다녀?”

어느 날이었다. 마리안이 도끼눈을 뜨며 마리엘라를 추궁했다.

마리엘라는 태연한 태도를 유지하며 아가씨의 머리를 치장했다.

“제가 쏘다니면 얼마나 쏘다녔다고 그러세요. 기껏해야 시장 바닥 좀 돌아다닌 것 가지고. 아가씨를 위해 바친 이십 년 가까운 세월에 비해서 짧은 농땡이죠. 안 그래요?”

“수상해.”

마리안은 의심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거울을 통해 마리엘라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뭐가 그렇게 수상하세요.”

꿀꺽. 마리엘라는 티 나지 않게 침을 삼켰다.

“또 늙은 아저씨랑 같이 다니는 거 아니지?”

“늙은 아저씨라뇨. 비록 제가 아가씨의 하녀지만, 상할 의라는 게 있답니다.”

“마리, 너는 내가 죽을 때까지 나랑 함께해야 해. 알지?”

대화의 흐름이 다시 평소처럼 흘러간다. 마리엘라는 피식 웃고는 허리를 살짝 숙여 장난스레 마리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요, 아가씨는 제 생명의 은인이시니까 특별히 일곱 번의 생을 같이 해 드릴게요.”

“이건 내 진심이야.”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 같은 태도에 마리안이 입술을 삐죽였다. 마리엘라는 익숙하게 아가씨의 투정을 받아주었다.

“그게 진심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답니다.”

“결혼은 안 돼.”

“또 대답을 해드려야 하나요? 알겠다고 몇 번은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정부도 안 돼.”

“…….”

‘핵심을 찔렸군.’

아가씨의 머리를 빗던 마리엘라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내 남편을 나중에 꾀는 것도 안 돼. 나는 나만 바라봐주는 사람이 좋단 말이야.”

“아가씨 눈에 제가 그렇게 쓰레기로 보일 줄은 몰랐는데, 뭐, 일단 알겠어요. 일단 아가씨, 시집이나 가세요. 시집이나 가시고 그런 얘기를 합시다.”

마리엘라는 아가씨의 머리단장을 마치고 빗과 자질구레한 용품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힝. 하지만 나는 백마 탄 왕자님 같은 사람이 좋단 말이야. 이도 저도 아닌 사람에게 내 인생을 맡기긴 싫어.”

“아이고, 아가씨. 쓸데없이 꿈도 크셔라. 세상에 왕자님은 많고, 잘생긴 남자도 많지만 잘생긴 왕자님은 없답니다.”

“마침 요제프 왕자가 결혼 적령기래.”

“그래서요?”

마리엘라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투로 물었다.

“사람들 말로는 왕자님이 아주 잘 생겼다더라고.”

마리안의 눈빛이 아주 반짝반짝하다.

‘우리 아가씨, 또 헛꿈을 꾸고 계시는구나.’

마리엘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말이야, 마리. 내가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 왕자님이 들리시지 않을까? 우리 사냥터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니까 어쩌다 한 번쯤은 들리실 것 같은데.”

“아이고, 백작님 뒷목 잡고 쓰러지시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아가씨, 왕비는 외모 대신 혈통인 거 모르세요? 옆 나라의 공주님이나 공작가의 아가씨가 그 자리에 들어가겠죠.”

“꿈은 클수록 좋은 거라잖아!”

“꿈은 현실적일수록 좋은 거예요.”

마리는 단호하게 못 박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도 지금 헛꿈을 꾸고 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제이 도련님’이라는 이름을 가진 단꿈 말이다.

며칠 뒤, 밤이었다. 마리엘라는 침대에 누워 책을 뒤적거렸다.

그녀에게는 책을 읽는 습관이 있었다. 훗날 정부가 되었을 때, 귀족 나리들의 고상한 대화에 뒤처지지 않기 위한 대비책으로 한두 권 읽다 보니 독서에 재미를 느끼게 된 것이다.

어두운 방에서 촛불 하나에 의지해 글자를 읽어 내리고 있는데 별안간 마을에서 올라온 아이 하나가 그녀를 찾아왔다.

“크, 큰일 났어요!”

그녀는 그 아이가 누군지 단박에 알아보았다. 도련님에게 심부름꾼으로 붙여 놓았던 소년 로빈의 남동생이다.

소년은 울먹이며 도련님의 집에 하얀 망토를 뒤집어쓴 괴한들이 방문했다고 말했다. 마리엘라는 곧바로 겉옷을 챙겨 도련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갔다.

사실 마리엘라가 그곳을 방문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녀는 그저 리덴부르크가에서 일하는 하녀일 뿐이었으며, 도련님을 찾아올 괴한을 물리칠 그 어떤 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거기다가 리덴부르크 백작의 성과 도련님이 머무는 집은 거리가 꽤 있었다. 괴한이 만약 도련님을 해칠 생각이었다면, 로빈의 남동생이 그녀의 방문을 두드린 그 순간 이미 그의 목숨은 끝나 있을 것이다.

마리엘라는 그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그를 향해 달려 나갔다.

“제이 도련님!”

그녀가 문을 열어젖히고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도련님은 하얀 망토를 두른 사람들과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예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흘렀다.

“아, 마리 아가씨로군요. 아가씨를 못 보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참 다행이에요.”

“이게, 무슨…….”

마리엘라는 경황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하얀 로브를 쓴 사람 중, 유독 차가운 인상의 남자 하나가 눈에 걸렸다. 남자는 제이 도련님만큼 수려하게 생겼지만, 어딘가 수척하고, 서늘해 보였다.

도련님이 주변에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마리엘라의 앞에 섰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등에 입맞춤했다.

“아가씨의 도움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아가씨의 친절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 근방에서 얼어 죽거나 굶어 죽었을 거예요.”

“…….”

부드럽고 다정한 말. 마리엘라는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도련님이 자신에게 선을 긋고 있다. 그는 이렇게 떠나는 것이다. 과거의 일은 등 뒤로 묻어 두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려 한다.

‘정부는 무슨.’

그녀가 꾸었던 봄날의 단꿈이 부서진다.

마리엘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울먹울먹한 목소리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도련님은 그녀의 손등에 자신의 뺨을 가볍게 비볐다. 그리고 손끝이며, 손가락 마디, 손등과 손목에까지 자잘한 입맞춤을 이어 나간 뒤, 고개를 들어 마리엘라를 보았다.

남자의 눈에는 그녀가 보이지 않았겠지만, 마리엘라는 그의 초록색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곧, 청혼하러 오겠습니다. 마리 아가씨.”

“……청혼?”

예상치 못한 말에 마리엘라가 눈을 깜박였다.

“네, 당신은 제 세상의 전부니까요.”

그는 해사하게 웃으며 마리엘라의 손을 꽉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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