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마리안 디프네 리덴부르크 (2/21)

1. 마리안 디프네 리덴부르크

“내 널 위한 사슴을 잡아오마.”

가르트 남작은 올해 마흔여섯 살의 남자였다. 마리엘라의 손등을 감싼, 그의 두툼한 손끝이 나무꾼처럼 우둘투둘하다. 아마도 화살과 칼을 오래 잡아서겠지.

으, 늙었어.

마리엘라는 역겨움을 참고 속으로 시간을 쟀다.

일 초, 이 초, 삼 초…….

오 초 이상 손을 잡으면 분위기가 형성된다. 입맞춤 한 번 하지 않았지만, 마리엘라는 이 남자가 곧 자신을 위한 보석을 들고 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올봄이 되면…….”

남작이 퍽퍽하게 마른 입술을 침으로 축이고 무언가 대단한 결심을 선포하려 한다. 마리엘라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올망졸망한 눈으로 남자를 가득 바라보았다.

남자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다가 계속 말을 멈추었다. 자신의 결단에 스스로가 감격한 것이다.

멍청한 남자들은 가끔 이렇다. 자신의 삶을 너무 위대하게 여긴 나머지, 자신의 내면에서 거대하게 로맨스의 파도에 스스로를 풍덩 빠트려 버린다. 실제로 상대방이 그걸 어떻게 느끼는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은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가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자의식 과잉에다 지나친 자기애가 섞이면 곧잘 나오곤 하는 우스꽝스러운 광대극.

마리엘라는 그의 시혜적인 태도가 우스웠지만, 절대로 그것을 티 내지 않았다. 오히려 반기는 척 연기를 했다. 남작의 시혜적인 태도에서 오는 콩고물이 그녀의 인생 목표였으니까.

“올봄이 되면 내가.”

남작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마리는 남자의 입술만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랑 고백이든 정부 제안이든 빨리 말이나 해줬으면.’

고지를 코앞에 둔 그녀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그때였다.

“마리-.”

어디선가 잔잔하게 환청이 들린다.

‘아, 지금은 안 돼.’

마리엘라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은 진짜 안 돼, 5분, 5분만 있다가, 제발…….’

그녀는 간절하게 빌었으나, 바람과 다르게 환청은 점점 더 가까워져 갔다.

“마리, 마리, 마리 어디 있니?”

‘아, 제발.’

“마리!”

누군가가 고함을 질러 그녀를 불렀다. 역시 그것은 환청이 아니었다.

마리엘라는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남작은 우렁찬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마리엘라를 잡던 손을 놓고 몸을 돌렸다. 귀족의 체신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마리, 여기서 뭐 하니? 아가씨가 불러.”

목소리의 주인은 하녀장이었다.

휴. 마리엘라는 한숨을 푹 쉬고는 표정 관리를 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 하녀장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아가씨가 부르시던가요.”

“복통을 호소하셔.”

‘복통은 개뿔이.’

마리엘라는 콰득 어금니를 악물었다.

마리안 아가씨의 병은 모두 꾀병이다. 그녀가 가보지 않고 속단하는 이유는 이것이 벌써 다섯 번째 훼방이었기 때문이다.

올해 들어 다섯 번째!

요 몇 년을 통틀어 말하자면 스무 번이 넘었다.

남자랑 진도만 나가려고 하면 이 난리라니.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는 게 더 이상했다.

“휴.”

마리엘라는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의 속을 알고 있다고 해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마리엘라는 마리안의 전속 하녀였고, 생명의 빚을 진 몸이었다.

그녀는 별말 없이 마리안의 방을 찾아갔다. 그리고 빙빙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아가씨. 도대체 저한테 왜 그러세요?”

“나는 너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데 네가 나를 떠나면 어떻게 해.”

‘당당도 하셔라.’

마리엘라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마리안을 내려다보았다.

마리안은 속없고, 철없고, 생각도 없었지만, 정 하나만은 넘쳐흐르게 많았다.

마리엘라는 마리안의 놀이 친구 겸 보모의 자격으로 이 성에 들어왔고, 오랜 시간 동안 마리안의 곁을 지닌 그녀의 유일한 친구였다.

너무 오랜 시간 붙어 다녔기 때문인지, 둘은 생김새가 비슷하다는 말을 듣는 일이 잦았다.

마리안은 마리엘라를 자매처럼 여겼다. 그래서 마리엘라는 귀족 아가씨에게 고까운 태도를 보여도 매를 맞지 않을 수 있었다.

얇은 잠옷 차림으로 누워 있던 마리안이 벌떡 일어나 마리엘라의 허리를 껴안았다.

“너는 내가 시집갈 때까지 내 거야.”

‘그럼 제발 시집 좀 가시던가요.’

마리엘라와 마리안의 나이 스물다섯. 노처녀의 기로에 선 아주 위험한 나이였다.

오랜 시간 동안 마리안의 곁을 지킨 마리엘라는 확신했다.

리덴부르크가의 아가씨는 절대 결혼하지 못할 거라고.

그녀는 마리안 디프네 리덴부르크가 자신의 예비 약혼자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파혼서가 날라 올 때까지, 그 세 번의 과정을 전부 옆에서 지켜보았다.

세 번의 약혼과 세 번의 파혼.

그 기나긴 과정 동안 아가씨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아니, 똑같은 태도를 유지했다는 게 더 올바른 표현일지도 몰랐다.

우선 지네보 후작.

살짝 벗겨진 머리에 출렁거리는 뱃살이 인상 깊은 남자였다.

아가씨는 외부인들에게 보여주곤 하는 특유의 고고한 표정을 하고 차를 몇 번 홀짝거렸다.

“아이는…….”

몇 번의 대화가 오가고, 후작이 후사를 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돌연 아가씨가 눈을 치켜뜨고는 물었다.

“왜요?”

“예?”

“제가 왜 그쪽의 아이를 낳아서 저를 닮아 아름답고 깜찍해야 할 아이 얼굴을 망쳐놔야 하는 거죠?”

“지, 지금 무슨 말씀을…….”

후작은 분노에 차 턱 끝을 덜덜 떨었다. 아니 어쩌면 두려움에 찬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가씨는 쉴 새 없이 말을 이었다.

“그쪽은 거울을 보면서 주제 파악하는 법을 배우셔야겠어요. 제 아이의 친부가 되기에는 키도 작고, 피부도 엉망인 데다가, 살집도 있고, 무엇보다 머리가…….”

마리안 아가씨는 말을 하다말고 갸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귀족 아가씨 특유의 몸짓으로 고개를 살랑살랑 저은 그녀는 화룡점정의 말을 툭 집어넣었다.

“그럴 바엔 안 낳는 게 낫지.”

마리엘라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번 약혼은 망했구나.

며칠 뒤, 후작은 한 번 더 백작가를 찾았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조금 더 차분해진 모양새였다.

둘은 아무렇지 않게 차를 마셨다. 표면적인 대화가 끝나갈 때쯤, 후작이 마리안 아가씨에게 질문했다.

“실례되지만.”

“네, 말씀하세요.”

“저번의 말씀이 유효하신가요?”

“무슨 말이요?”

“저랑…… 결혼만 하고 아이는 갖지 않겠다는.”

“아아, 그거요?”

아가씨는 뻔뻔한 낯을 하고 과자를 오도독 씹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를 둘 생각이에요. 아이는 그쪽이랑 가지고 싶어요.”

“하하.”

후작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식은땀을 흘렸다.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 위의 땀을 허둥지둥 닦은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물었다.

“실례지만, 아가씨. 이 자리에 왜 나오신 거죠?”

이번에도 마리안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대꾸했다.

“당신이랑 결혼‘만’ 하려고요. 당신은 없지만, 당신 지위는 필요하니까.”

마리엘라는 확신했다.

아, 이 약혼은 진짜, 진짜 망했구나.

후작은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3일 뒤에 리덴부르크 백작가에 편지가 하나 날아왔다.

파혼 요청서였다.

백작이 조용히 마리엘라를 호출했다.

“파혼서가 들어왔는데, 이유를 아나?”

백작은 뒷짐을 지고 물었다.

마리엘라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가씨가 얼굴을 많이 보십니다.”

백작은 마리엘라의 말을 듣고 마리안 아가씨의 혼처를 다시 골랐다.

백작이 두 번째로 고른 남자는 필릭스 남작이었다.

그는 커다란 키, 까맣게 탄 피부, 두툼한 근육과 함께 호전적인 인상을 풍겼다.

마리안 아가씨는 남작을 데리고 정원을 걸었고, 마리엘라는 양산과 부채를 들고 아가씨의 뒤를 따랐다.

리덴부르크 백작가의 작은 자랑인 인조 연못을 앞에 두고 아가씨가 또 말실수를 했다.

“얼굴은 합격이네요.”

“네?”

“얼굴은 합격이라고요.”

마리엘라는 저게 말실수는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었다.

“아, 예. 감사합니다.”

다행히 필릭스 남작은 자존심이 없었다. 리덴부르크 백작가의 지참금이 탐이 났던 건지, 아니면 마리안 아가씨의 아름다운 외양에 빠진 것인지 그는 못 들은 척 대화를 넘겼다.

‘아, 이 사람이랑은 결혼을 할 수 있는 건가?’

마리엘라가 그렇게 생각을 했을 때 아가씨가 또 쓰레기 같은 말을 했다.

“그러니 얼굴을 좀 빌려야겠어요.”

“네?”

“제 정부가 되세요.”

“예?”

남작은 얼이 빠진 얼굴을 했다.

그는 곧 정색을 하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죄송하지만 아가씨. 저는 오늘 결혼할 여자를 보려고 온 겁니다.”

“결혼이요? 결혼이라니요.”

그게 가당키나 하는 소리냐는 듯, 아가씨는 있는 힘껏 남작을 비웃었다.

“고작 남작 따위가 뭘 할 수 있다고 이러는 거죠?”

그렇게 마리엘라는 두 번째로 백작에게 불려갔다. 그는 같은 질문을 했고, 그녀는 다른 대답을 했다.

“가문을 안 보는 게 아니셨어요.”

“…….”

백작은 침묵했다.

“가문과 얼굴. 두 가지를 다 원하십니다.”

‘아니면 정말로 잘생긴 정부를 혼수로 딸려 보내 주시던가요.’

마리엘라는 그렇게 덧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가족들의 전철을 밟아 대롱대롱 목이 매달리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백작이 마지막으로 고른 남자는 이안 백작이었다.

이안은 희멀건 한 피부와 모난 곳이 없는 흐릿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였다.

마리엘라는 이번 결혼은 정말 성사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건 그녀의 소망이기도 했다. 세 번의 파혼은 귀족가의 아가씨에게 치명타였다. 그녀는 제발 아가씨가 그것 하나만은 인지하고 있길 바라며 이 약혼이 무난하게 성사되기를 바랐다.

“탈락. 돌아가자.”

“네?”

그러나 그런 기대를 따라준다면 마리안이 아니었다. 마리안은 백작의 얼굴을 보자마자 뒤돌아나갔다.

“쟤 치켜뜨는 눈이 별로야.”

이 말을 덧붙이면서.

당연한 수순으로 마리엘라는 또다시 백작가의 서재로 호출당했다.

“……최고급으로 원하십니다.”

‘내가 키운 딸도 아닌데 왜 이렇게 창피한지 모르겠네.’

마리엘라는 근심한 표정의 백작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이게 다 염치없는 아가씨 때문이었다.

“마리. 왜 남들 잘하는 결혼을 나만 못 하는 거지.”

문제의 원인인 아가씨는 마리엘라에게 징징대기만 했다. 마리엘라는 누구보다 그 이유를 잘 알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정하게 아가씨를 위로했다.

“아가씨께 더 좋은 남자가 나타나려고 그러는 거예요.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맞아. 이렇게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백마 탄 왕자님이 내게 청혼을 하러 오실 거야.”

그 말을 들은 마리엘라는 일순, 자신의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그녀는 이 철 없는 아가씨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마리안 디프네 리덴부르크는 세 번의 파혼을 겪은 백작가의 아가씨다.

그녀는 얼굴과 집안, 모든 것을 적절히 갖춘 최고의 신붓감이었다.

좋은 조건을 가지고서도 마리안이 결혼을 못 한 이유는 단 하나.

아가씨는 개념이 좀 없었다.

그것도 좀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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