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프롤로그 (1/21)

프롤로그

“마님, 제발…….”

“네 자식들이 방금 도축된 새끼돼지처럼 대롱대롱 걸리는 걸 보고 싶은가 보지?”

“그것만은 따를 수가 없습니다. 제발 명령을 거두어 주십쇼, 제발…….”

그것이 마리엘라 호반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귀족 마님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 두 발을 싹싹 비는 모습.

그녀는 몰래 그 모습을 훔쳐보며 비참함과 두려움과 적의를 동시에 느꼈다.

기억에서 잊고 싶을 만큼 끔찍한 날이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일주일 뒤에 사형대 위에 목이 걸려 죽었으니까.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사랑하는 다른 가족들과 함께.

마리엘라의 아버지는 숲지기였다. 광산도, 특산물도, 인재도 없는 리덴부르크 백작가의 유일한 자랑거리인 라산사냥터의 숲지기.

비록 귀족 자제들과 그들이 데리고 온 기사들, 시종들에게 천대받는 게 일상인 일이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한 번도 제 직업을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두 가지의 커다란 자부심이 있었다. 하나는 라산 사냥터라는, 온 귀족이 아는 아주 멋진 숲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이 숲의 모든 나무는 내 손아귀에 있지. 버섯과 약초도 마찬가지야.”

술에 진탕 취하는 날이면, 그는 언제나 자식들을 모아놓고 그렇게 일장 연설을 하곤 했다.

또 다른 하나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가진 선량함에 관한 거였다.

“우리가 풍족한 양식이나 귀족 작위가 없어도 뭐 어떠냐. 바리 신께서 내려주신 가장 귀한 것을 소중히 여기니 언젠간 꼭 그 복을 받을 게다.”

호반 가족은 가난했고, 대대로 남자는 숲지기, 여자는 하녀 일을 맡아왔다.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그들은 한 번도 예배를 빠진 적이 없었으며, 남을 괄시하거나 질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주변에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자신들이 배가 좀 고프더라도 빵 한 쪽을 나눠주는 이타심을 보였다.

‘살인’이라는 험악한 단어가 호반 가족의 이름 앞에 붙은 것은 다 리덴부르크 마님 때문이었다.

백작마님의 남편 리덴부르크 백작은 남작가의 둘째 아들로, 백작 마님과 결혼해 백작이라는 신분을 얻은, 일종의 데릴사위였다.

리덴부르크 백작은 평소 아랫사람들에게 심한 언사와 폭력적인 행동, 그리고 성희롱으로 유명했는데, 백작마님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못된 본성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장례식을 치르자마자 리덴부르크 백작은 곧바로 애인을 들이기 시작했다.

마님은 질투가 심한 사람이었고, 백작이 애인을 들일 때마다 온갖 패악을 일삼았지만, 그것이 백작의 끊임없는 바람기를 잠재우지는 못했다. 아내의 등쌀에 밀린 백작은 아예 성 밖에 안락한 집을 하나 지어놓고 바람을 피웠다.

안락한 집에 드나드는 여자는 계속 바뀌었다. 어느 때는 풍만한 몸매에 흰 피부를 가진 중년 여성이었다가, 어느 때는 빼빼 마른 몸매에 키가 훤칠한 젊은 여성이었다가, 어느 때는 소녀 같은 외양의 단발머리 여성이기도 했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달라질 때마다 안락한 집의 주인은 바뀌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안락한 집의 주인이 결정되었다.

금발 머리, 분홍빛 입술, 창백한 뺨을 가진 어떤 여자.

사람들은 그녀의 매력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백작이 그녀에게 정착한 것만은 알았다.

그 소식을 들은 백작마님은 남편의 정부를 죽이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자신이 꼬투리를 잡히거나 피해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간단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바로 죽어도 상관없는 아랫사람을 골라 살인을 명하는 일이었다.

숲지기가 그 후보에 오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성 외부의 사람인 동시에 백작가 내부의 사람이기도 했다. 사실이 밝혀졌을 때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부인하기도 쉽고, 살인 명령을 내리기도 편했다.

하지만 착하고 선한 마리엘라의 아버지는 사람을 죽이기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백작부인의 명령을 온몸으로 거부했지만,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가족을 모두 죽이겠다는 협박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백작의 정부인 ‘창백한 뺨의 여자’를 숲으로 유인해 죽이게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백작마님의 명을 모두 수행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뿐이었다.

그녀의 가족은 싹 다 교수대에 올랐다. 아버지, 어머니, 오빠들, 그녀의 어린 동생까지. 창백한 뺨의 여인이 시신으로 발견되자, 백작이 사람을 풀어 누구보다 빠르게 범인을 찾아낸 것이다.

백작의 분노는 비천한 숲지기 한 명의 목숨으로는 잠재울 수 없었다.

모두가 숲지기의 배후가 누군지 알았지만, 백작은 그것을 굳이 알아내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숲지기의 일가족을 죽여 자신의 분노를 잠재우려고만 했다.

단죄보다는 화풀이에 가까운 처벌에서 마리엘라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그녀가 리덴부르크가의 금지옥엽 외동딸 마리안 아가씨의 놀이 친구이자 하녀였기 때문이다.

호반 가족의 교수대형이 결정되자마자, 마리안 아가씨는 다섯 시간을 울며불며 아버지에게 간청했다. 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던 백작은 결국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가족의 처참한 죽음부터 구사일생의 순간까지. 마리엘라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은 저 귀족 나리들이 결정했다.

귀족 나리들의 분노, 귀족 나리들의 기쁨, 귀족 나리들의 슬픔, 귀족 나리들의 욕망이 보잘것없는 평민의 목숨보다 귀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마리엘라는 결심했다. 내 비록 비천하게 태어났지만, 죽음까지 비천해지지는 않으리라.

그녀는 현실적인 여자였다. 큰일을 해 귀족 작위를 받는다든가, 돈벌이에 나서 대상인이 된다든가, 그것도 아니면 백마 탄 왕자님 같은 멋진 도련님과 사랑에 빠져 그의 정식 부인이 된다든가 하는 허무맹랑한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다.

리덴부르크 백작의 영지에는 백작가의 자랑인 라산사냥터가 있었고, 그곳은 백작의 친구들을 비롯한 귀한 분들이 자주 방문하였다.

‘애첩이 될 거야. 리덴부르크 백작이 아꼈던 그 창백한 뺨의 여자처럼.’

남들이 들으면 어린년이 벌써 되바라졌다고 등짝을 퍽퍽 때릴 테지만 상관없었다. 천박한 것이 비천한 것보다 나았다.

신분 상승의 계단. 그 언저리에라도 몸을 비벼둬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커진다. 마리엘라는 가족의 죽음을 눈앞에서 겪었고, 그들의 죽음을 이끄는 신분의 힘을 보았다. 살기 위해선 그 힘과 맞서 싸울 게 아니라, 어떻게든 그 힘 위에 올라타야 한다.

그렇게 십삼 년이 지났고, 그녀는 스물다섯 살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위해서라면 사랑에 빠진 아가씨를 연기하는 것쯤은 눈 깜박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여성으로 자라났다.

미모도 나쁘지 않고, 머리도 총명하며, 정부가 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야망 있는 하녀, 마리엘라 호반이 스물다섯까지 아무런 진전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다 마리안 아가씨 때문이다.

“마리, 널 위한 선물을 사 왔어! 빨리 내 방으로 와!”

“마리, 드레스를 골라줘.”

“마리, 편지 답장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눈치 없는 마리안 아가씨는 사사건건 그녀의 계획을 방해했다. 백작가의 하녀라는 본분을 집어 던질 수 없는 그녀는 늘 마리안 아가씨의 말을 고분고분 따랐다.

언젠가 기회가 오겠지,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살기를 십여 년. 드디어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줄 절호의 기회를 만났다.

“저, 저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를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눈이 먼 탓에 벽을 더듬거리며 시장을 돌아다니던 남자. 거지꼴을 하고 있었지만 마리엘라는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고귀한 혈통. 어쩌면 리덴부르크 백작보다 신분이 높은…….’

마리엘라는 고되기만 한 자신의 인생이 드디어 꽃을 피웠다고만 생각했다. 앞으로 여생은 핑크빛 나날밖에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신부는 신랑, 요제프 하이젠 데르샤바크 왕자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시겠습니까?”

현재 그녀는 신부의 뒤에서 드레스 자락이나 잡아주고 있다.

있는 힘껏 신부를 노려보면서.

분노한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부는 수줍은 얼굴로 조심스레 대답했다. 참으로 가증스러운 태도였다.

“네.”

그 모습을 보고 마리엘라는 탁 하고 힘이 풀렸다. 철없는 신부가 밉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왕자는 내가 꼬였는데 왜 시집은 네가 가냐.’

마리엘라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신부의 이름은 마리안 디프네 리덴부르크.

마리엘라가 모시던 백작가의 고명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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