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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97화 (완결) (97/97)

97화 완결

산샤는 행복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아드리안과 나란히 앉아 노을이 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행복하다’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올랐다.

“여름이 다 끝나가네.”

“겨울 준비를 시작해야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시선을 맞춰 고개를 끄덕이고,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짓고, 자연스레 키스한다.

손을 잡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 만족스러운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날마다 숙면을 취할 수 있는 것도 행복한 요소 중의 하나였다.

‘내 머리에서 당장 나가라’고 몰아낸 이후 글라키에스는 꿈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있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썩 꺼지라고 호통을 칠걸.

그렇지만 내내 글라키에스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 컸으니, 그때는 할 수 없기도 했다.

달라지고 성장했으니, 글라키에스도 몰아낼 수 있게 된 거지.

모리츠의 영혼을 소멸시키고 겨우 몇 주인데, 수십 년쯤 지난 것만 같다.

디아머드와 라인하르드 제국에 일어난 변화를 보면 수십 년이 아니라 수백 년이 지난 것 같기도 했다.

디아머드 영지 백성들은 모리츠가 후견인 노릇을 하면서 세금 명목으로 빼앗았던 밭과 집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물론 산샤가 찾아준 거였다.

이제 그들은 마정석 광산에서도 일을 하고 있으니, 라인하르드 제국 최고의 부자 백성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트리스와 티몬, 랄프와 딕키는 디아머드 영지 경영에 참여했고,

자크는 사법관 시험에 합격하였고, 예정대로 디아머드의 사법관이 되었다.

* * *

라인하르드 제국은 호레스 밀란 섭정 대공을 잃었다.

소문으로는 밀란이 갑자기 발광하여 뛰쳐나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모리츠를 두들겨 패겠다고 행궁에서 혼자 나왔다가, 아드리안의 은신처에서 길을 잃었으니….

아드리안은 은신처 어느 곳에서도 밀란의 기운을 느낄 수 없다고 했으나, 죽은 건 아닌 듯했다.

여기저기에서 밀란을 봤다는 사람들이 나왔으니까.

그들은 하나같이 아주 먼 곳에서 밀란을 봤다고 했다.

라즐로 제국이나, 대륙의 끝에 있는 항구.

또 누군가는 저 멀리 바다 건너 다른 대륙의 얼음산맥에서 봤다고도 했다.

봤다는 장소는 말하는 사람마다 달랐지만, 그들이 똑같이 하는 말이 있었다.

[밀란 대공이 완전히 미쳐 있어서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어. 형상만 사람이지, 이미 사람이 아닌 것 같더라고.]

라인하르드 제국의 귀족연합에서는, 처음에는 밀란을 찾으려고 했다.

그들의 권력은 밀란 대공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으니, 찾지 않으면 곤란했으니까.

귀족연합의 유일한 지도자는 밀란 대공이라면서, 밀란이 보였다는 곳마다 사람을 보냈다.

그러다가 금세 포기해 버렸다.

그들은 호레스 밀란 대공이 사망했다고 선언하고, 시체 없는 빈 관으로 장사지냈다.

그러고는 북부 행궁까지 달려와 조나스 악셀 황제에게 밀란 대공을 대신하여 귀족연합이 섭정하겠다고 통보했다.

조나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는 걸 잊어버린 사람처럼 멀뚱멀뚱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마르틴은 조나스가 의자에 너무 바르게 앉은 게 불편해서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했었다.

“폐하, 의자에 바로 앉아 있는 게 불편하시면 조금 늘어지셔도 괜찮은데….”

그렇게 말했다가, 평생 악몽에 나타날 만큼 매서운 눈길을 받고 말았지만.

귀족연합 대표가 나섰다.

“폐하, 그동안 이토록 큰일을 결정하신 적이 없으니, 대답하기 어려우신 줄은 압니다. 그저 하시던 대로 ‘그리하여라’라고 한마디만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저희가 다 알아서 할 것입니다. 폐하는 하시던 대로 유유자적 하고 싶은 거 하시면서 지내시면 되고요.”

조나스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하여라…?”

조나스는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문장의 끝을 올리며 묻는 얼굴로 귀족연합 대표를 내려다봤다.

대표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왜?

아무리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황제라지만, 어째서 딱 한 마디만 하면 되는 것도 제대로 못 한단 말이냐.

저 정도로 부족한 황제였나?

그때 조나스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대들이 밀란 대공을 더 열심히 더 오래 찾을 줄 알았어.”

“예?”

“그런데 그저 찾는 흉내만 낸 것 같고…. 사실은 찾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

“어,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밀란 대공이야말로 저희의 유일한 지도자이시며… 제국의 기둥이신….”

“뭐, 이해는 해. 밀란 대공이 가졌던 권력을 나눠 가질 생각을 하면, 나라고 해도 굳이 찾고 싶지 않을 테니까.”

“오해십니다, 폐하. 다만 국정의 공백을 오래 둘 수 없어서 결단을 내린 것일 뿐, 권력을 나눠 갖다니요. 그런… 그런….”

“되었소.”

조나스가 손을 들어 대표의 말을 멈추게 했다.

“구구절절 변명을 듣자는 게 아니고….”

“하오나 오해는 풀어야 하겠기에….”

조나스는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리며 코웃음 쳤다.

“오해는 한 적 없으니 입을 다물고 조용히 하시오. 다만 귀는 크게 열고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조나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귀족연합의 사람들을 눈 밑으로 깔아보며 말했다.

“내 나이가 스물이 넘었어. 정신은 올바르고 육체도 이상 없어. 이런 황제에게 섭정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대들이 뭘 하겠다고?”

귀족연합 사람들이 서로 웅성거리다가 그중 하나가 나섰다.

“하오나… 폐하는 그동안 국정운영에 참여해 본 적도 없으시고, 제왕 교육을 받지도 않으셨으며….”

그때 조나스가 팔을 휙 내저었다.

다다닥!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는데 창문이 다다닥 닫혔고, 오히려 방 안에 미세한 회오리가 일기 시작했다.

귀족연합 중 누군가가 외쳤다.

“바람을 다스리는 자!”

그가 무릎을 꿇으며 이마를 바닥에 붙였다.

그를 제외한 귀족연합 사람들은 흔들리는 눈빛을 나누면서도 그저 뻣뻣하게 조나스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조나스는 귀족연합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말했다.

“나에게 무릎 꿇지 않는 자, 대가를 치를 것이니….

제도로 돌아가 친정을 선포하겠소. 라인하르드 제국은 제대로 된 주인을 맞이하게 될 것이오.”

조나스의 말에 귀족연합 중 몇은 무릎을 꿇었고, 여전히 뻣뻣하게 버티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 * *

“그런데 왜 안 돌아가고 여기 계세요?”

산샤가 소파에 늘어져 있는 조나스에게 물었다.

“친정식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거 아냐. 그동안 휴가인 거지, 뭐.”

“그동안에도 처리해야 할 국정 현안은 쌓여 있을 텐데요.”

“그거 하라고 마르틴을 먼저 보냈잖아. 내가 필요하면 한 방에 달려갈 수도 있고.”

“어떻게요?”

쳇, 조나스가 혀를 차며 자세를 바꿨다. 더 편하게 늘어질 수 있는 자세로.

“…내 형이 마정석 광산의 주인이야. 그깟 이동 마도구는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이런….”

산샤 옆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던 아드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해가 있으시군요, 폐하. 마정석 광산의 주인은 산샤 디아머드 백작입니다.”

“둘이 결혼했잖아요. 결혼하면 마정석 광산의 소유권을 절반 가질 수 있는 거잖아요.”

“제가 거부했습니다.”

“아니, 왜요?”

“저는 클라이드와 디아머드의 수호자로서 제 의무에 충실하고 싶으니까요.”

조나스가 오만상을 구기며 툴툴거렸다.

“그게 그거구만, 뭐….”

“바람을 다스리는 자로서 각성했으면, 그 능력을 이용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건 안 된대요.”

“누가요?”

“정령의 돌이요. …내가 너무 둔하대. 게으르고. 능력답게 쓰려면 앞으로 십 년은 수련해야 한대요.

귀족연합들이 하도 어이없게 굴어서 기죽이려고 보여준 거였지, 사실은 그렇게도 쓰지 말랬는데….”

조나스가 문득 원망스럽다는 듯이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아드리안 경이 정령의 돌도 받고 황제도 하라고 했잖아요.”

아드리안이 표정의 변화도 없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클라이드와 디아머드의 수호자로서 제 의무에….”

“알았어요, 알았어.”

조나스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귀족연합들 하는 꼴이 하도 우스워서 급하게 친정 선포를 했지만, 아드리안 경을 그 자리로 돌려놓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는 것만 알아둬요.”

아드리안이 빙긋이 웃었다.

“제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에도 변함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니까!”

조나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드리안 경이 이렇게 나오니까, 아드리안 경을 황제로 만들겠다고 귀족연합 하고 싸울 생각도 못 해 본 거잖아. 어쩔 수 없으니까 내가 하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잖아…요.”

조나스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친정을 선택한 것처럼, 아드리안을 설득하는 것도 포기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기운이 쫙 빠진 목소리로 마지막 소원이라며 약속을 해달라고 했다.

“내가 국정인지 뭔지 엄청나게 지루한 걸 하는 동안 둘이서만 재미있게 지내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예?”

아드리안이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리고도 말을 못 하는데,

풉, 산샤가 참지 못하고 크게 웃어버렸다.

“왜 웃어? 나의 간절한 소원인데?”

“불가능한 걸 해달라니까요. 아드리안과 저는 둘이 같이 있는 것만으로 재미있는걸요.”

“에잇, 씨….”

조나스는 입을 삐쭉이며 산샤와 아드리안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다가 외쳤다.

“내가 여기에서 물러설 거라고 착각하지 마. 둘을 어떻게든 갈라놓고 말 거니까!”

쾅!

조나스가 달려 나간 뒤로 문이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잠깐의 적막.

산샤와 아드리안은 나란히 앉아 조용히 문을 바라보았다.

산샤가 중얼거렸다.

“폐하가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을까?”

아드리안이 산샤의 얼굴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 물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산샤가 입술 끝이 나른하게 늘어졌다.

“글쎄…, 잘 모르겠는걸. 감히 황제라고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을지 어떨지.”

“이렇게 하면 잘 알게 될 거야.”

아드리안이 부드럽게 산샤에게 키스하고 속삭였다.

“어때? 이젠 알겠어?”

산샤가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한 번으로는 모르겠어.”

아드리안 역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생각에도 한 번으로는 안 될 것 같더라.”

아드리안이 산샤를 소파에 밀어 눕히고 천천히 다가왔고,

산샤는 아드리안의 목을 끌어안으며 생각했다.

신이라 한들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겠느냐고.

-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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