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생각하고 있을 겨를도 없었다.
산샤가 무엇을 해야겠다고 결정하기 전에 몸이 먼저 튀어 나갔고, 동시에 글라키우리를 크게 휘둘렀다.
부웅, 검기가 솟구쳐 모리츠의 팔이 댕강 떨어졌고,
공중에 매달려 있던 아드리안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산샤는 아드리안에게 달려갔다.
“아드리안!”
아드리안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얼마나 오래 숨을 못 쉰 거야?”
산샤가 아드리안의 몸을 흔들며 외치는데, 순간 아드리안이 긴 숨을 몰아쉬었다.
질려 있던 얼굴에 핏기가 돌아왔고, 아드리안이 눈을 뜨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모리츠가 공중으로 띄워 목을 졸랐지만, 큰 타격은 주지 못한 듯했다.
산샤는 홱 고개를 들어 모리츠를 노려봤다.
아드리안이 무사한 걸 확인했으니, 이젠 모리츠를 잡아야 할 때.
모리츠는 여전히 입을 쩍 벌려 암흑을 토해내고 있었고, 이젠 잘려 나간 자리에서도 끈적거리는 것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 되었나?
애초에 그런 건 갖지 못한 놈이었을지도 모르지.
[가서 베어버려. 나의 현신인 네가 오르쿠스의 현신인 모리츠를 베어야 저주가 풀려.]
머릿속에서 글라키에스의 소리가 울렸다.
[내가 도와줄 거라는 생각은 버려. 내가 뭐 해주는 거 봤니? 나는 힌트만 줄 뿐이야. 네가 행동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베어버릴 생각이었다.
글라키에스, 당신은 당신 편할 대로만 움직이는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알아버렸거든.
산샤는 모리츠에게 달려가 검을 휘둘렀다.
한 번!
잘려나간 자리에서 더 많은 것들이 흘러나왔다.
이젠 마정석 광산보다 모리츠가 서 있는 곳이 끈적끈적한 암흑의 중심이 되어 가고 있었다.
산샤는 두 번째로 검을 휘둘렀다.
이젠 모리츠가 암흑인지, 암흑이 모리츠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다.
오히려 마정석 광산 쪽은 산샤가 튀어나올 때 끌고 나온 투명하고 하얀빛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면서 원래 색으로 돌아가려는 중이었다.
산샤는 암흑 그 자체가 되어 버린 모리츠에게 세 번째로 검을 휘둘렀다.
털썩, 예전에 모리츠였던 그것이 무너졌다.
사람이 아닌 암흑 덩어리가 되어 버린 그것이 꿀렁꿀렁 두어 번 크게 암흑을 뱉어내더니, 더는 아무것도 뱉지 못했다.
그렇게 모리츠의 형체였던 것이 꺼지고 그대로 사그라들었다.
“하아….”
끝났다.
아무리 포기를 모르는 모리츠라고 해도 더는 되살아날 수 없으리라.
산샤는 무거운 몸을 겨우 세우며 숨을 내쉬었다.
글라키우리가 알아서 움직이고 자신은 그저 손만 가져다 대고 있을 뿐이었지만, 몇 번 휘두르는 동안 기력이 탕진되었다.
머리도 무겁고 너무나 피곤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다.
아직 다 끝난 게 아닌데….
암흑을 걷어내야 하는데….
글라키에스를 믿고 그냥 둘 수가 없는데….
그때, 글라키에스가 속삭였다.
[과연 나의 현신. 잘했다. 이 여세를 몰라 얼음땅을 차지하러 가자.]
산샤는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시끄러워요. 얼음땅은 줘도 쓸 데가 없다니까. 암흑이나 걷으라고!”
[얼음땅을 정복하러 가겠다고 약속하면, 한 번에 싹 깨끗하게 걷어줄게.]
아, 귀찮아!
귀찮은 파리를 쫓듯 손을 내젓다가 그 힘을 못 이기고 쓰러져 버렸다.
아드리안이 재빠르게 달려와 받아준 덕에 그의 품으로 떨어졌지만.
산샤는 가물가물 감기는 눈에 억지로 힘을 주며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아드리안, 괜찮아?”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에도 괜찮아 보였다.
그렇지만 이렇게 정신없이 감기는 눈에 보이는 걸 믿을 수가 없어서, 아드리안의 뺨을 가만히 어루만져 봤다.
다행히도 온기가 제대로 느껴졌고, 혈색도 제대로 돌아온 것 같다.
산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앞으론 위험한 일을 하지 마.”
아드리안이 설핏 웃었다.
“내가 할 소리를….”
“내가 곁에 없으니까 금세 위험해지잖아. 앞으론 절대 떨어지지 말자. 내가 아드리안을 지켜 줄게.”
아드리안이 낮게 소리 내어 웃더니 말했다.
“글라키에스가 이젠 좀 쉬래. 암흑은 자기가 걷어 준다고.”
“어…?”
산샤는 겨우 실눈을 뜬 채로 물었다.
“당신도 글라키에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응.”
아드리안이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과거에 인연이 조금 있어서….”
“무….”
무슨 인연?
글라키에스와 당신에게 내가 모르는 인연이 있을 게 뭔데?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더 말을 할 기운도 없고 눈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일단은 좀 자자.
자고 나서 따지자.
그렇지만….
산샤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글라키에스와의 인연이라는 게, 좋은 것일 리가 없어.
밤마다 내 꿈속에 나타나서 숙면을 방해하는 것만 봐도 뻔한걸.
글라키에스, 아드리안을 괴롭혔으면 당신도 용서하지 않아.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복수할 거야.
* * *
산샤는 눈을 떴다.
자신의 방, 자신의 침대에 잠옷까지 곱게 갈아입고 누워 있었다.
“어머,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아니타가 호들갑스럽게 달려들었다.
얼마나 누워 있었던 걸까.
암흑은?
오르쿠스의 저주는 걷혔어?
산샤는 벌떡 일어나 창부터 바라봤다.
창밖이 환하게 밝았다.
암흑이 걷혔구나. 다행이다.
디아머드가 얼마나 암흑과 추위에 갇혀 있었는지 모르지만, 복구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닐 거다.
“휴우….”
산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글라키에스가 제대로 해냈구나. 그래도 신의는 지킬 줄 아는 신이었네.
[당연하지. 내가 하겠다는 일은 확실하게 해내는 존재니까.]
머릿속에 때려 박히는 글라키에스의 목소리.
이런 소리가 이 순간에 들리면 안 되는데?
산샤는 주위를 둘러봤다.
아니타가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제 깼냐고 아니타가 반가워했었잖아.
그렇다면 꿈일 리가 없는데….
산샤는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아니타, 나 지금 자고 있니?”
아니타가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깨셨잖아요.”
“그렇지? 꿈꾸고 있는 거 아니지?”
산샤는 이내 공중을 흘겨봤다.
“이건 뭐예요? 꿈에서만 보이기로 한 거 아니었나?”
[어쩌다 보니 그래 왔던 거지. 꼭 그거만 가능한 건 아니야. 게다가 보이지는 않잖아. 소리만 들리는 거지.]
“소리만 들리는 게 더 헷갈리잖아요.”
“아가씨?”
아니타가 조심스럽게 산샤를 부르더니, 손으로 이마를 짚어봤다.
“열은 없는데… 왜 그러세요? 너무 오래 자서 그런가?”
“아니, 그게 아니라….”
[네가 잠들기 전에 나한테 이를 갈았잖아. 아드리안을 괴롭혔으면 나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그래서 기다렸어. 해명은 하고 가야 하니까.]
“꿈에서 만나면 되잖아요.”
“아가씨!”
아니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신 차리시라고요. 잠을 좀 많이 잤다고 사람이 정신 줄을 놓고 그러면 안 되잖아요. 왜 자꾸 혼자 중얼거려요?”
[아이구, 깜짝이야.]
놀라기는 이쪽이 더 놀랐다고.
이러니까 머릿속에서 나가라는 거지.
내가 미친 줄 알잖아. 꿈에서만 보자니까.
[이제 가면 꿈에서 보기도 힘들단 말이야. 네가 글라키우리를 치켜들고 얼음땅을 정복하러 나설 게 아니면….]
그것 참 반가운 소리다.
얼음땅을 정복할 생각이 없으니, 이제 글라키에스 볼 일도 없다는 거구나.
산샤는 아니타가 열심히 종알거리는 얼굴을 보며 글라키에스의 소리를 들었다.
‘굳이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아도 다 듣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아가씨!”
아니타가 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 이야기를 듣고 계시는 거예요?”
“당연히 듣고 있지. 그런데, …무슨 말이었더라?”
아니타가 오만상을 구기면서도 다시 종알종알했다.
“사흘 밤낮을 내리 주무셨다고요. 아드리안 경이 내내 곁을 지키셨다는 말도 했잖아요.”
“아, 아드리안…!”
산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글라키에스, 당신이 아드리안에게 무슨 짓을 했구나.
아드리안이 말한 과거의 인연이라는 것 때문에 자고 있지 않는 데도 자꾸 말을 거는구나.
설명을 듣지 않아도 뭔지 알겠다. 그냥 이해가 되어 버렸어.
세부적인 내용은 몰라도 상관없다.
당신이 아드리안에게 아주 크게 잘못했고, 내가 알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것만 알면 됐다.
이게 뭔지는 아드리안에게 물어보겠어.
만약 아드리안이 용서해주겠다면 나도 용서하겠지만, 아니면 어림없다.
[어림없으면 어쩔 건데?]
복수한다.
[신에게 감히? 신에게 대적하는 인간은 벌을 받게 되어 있어. 아드리안도 그랬던 거고.]
“아가씨! 왜 멍하게 계시는 거예요. 정신 차리시라니까요.”
또 버럭 소리치는 아니타를 보고 산샤는 말했다.
“아니타, 너는 가서 아드리안을 찾아와.”
“예?”
“내 정신은 멀쩡하니까. 소리 그만 지르고, …아드리안에게 내가 깨어났다는 걸 알려주라고.”
아니타가 잠깐 눈을 깜빡거리며 산샤의 눈치를 살피더니 순순히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아니타가 문을 닫자, 산샤는 자세를 바로 하고 공중을 향해 위엄 있게 명령했다.
“내 머리에서 나가요. 더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을 거야. 굳이 말을 하고 싶다면 꿈에서 기다려.”
[헐….]
글라키에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웃었다.
[산샤 디아머드, 너 제법이구나. 내가 그동안 너무 잘해준 거지? 너는 내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였는지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다?]
“그럴 리가 있나요. 아직도 기억해요. 소리만으로 나를 죽일 수 있는 존재라는 것. 그렇지만….”
산샤는 잠깐 숨을 고르고 살짝 웃어 보였다.
“그렇지만 내가 변했어요. 마냥 두려워만 하던 내가 아니니까요. 당신이 그걸 잊어버리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