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당장에 산샤를 박살 낼 것처럼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던 모리츠가 휘청 몸이 크게 흔들리더니 강물에 빠져버린 것은.
“어? …어!”
산샤는 모리츠를 삼켜버린 강을 멍하니 바라봤다.
풍덩!
떨어질 때야 물론 커다란 소리가 나기는 했지만 금세 파문 하나 남지 않았다.
모리츠를 삼켜버린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모리츠가 달려들 때 이미 달려와 산샤를 감싸 안았던 아드리안도 말문이 막힌 건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스스로 욕망에 자멸하기를 바랐다지만, 이렇게 어이없이?
깜빡깜빡 강물만 바라보던 산샤가 겨우 말했다.
“…다리가 흐느적거리더라니.”
그러고는 덧붙였다.
“그러게. 자기 상태를 보고 덤볐어야지.”
헐, 아드리안이 헛웃음 소리를 냈다.
“…동정하는 거야?”
“아니! …모리츠가 강바닥에 처넣은 사람이 얼만데….”
당연히 죽어야 할 사람이 죽어야 할 방법으로 죽었다.
동정이라니… 자신의 욕망 외엔 어떤 것도 배려하지 않은 자에겐 요만큼도 내어 줄 수 없는 감정이다.
아쉬운 건 공개적으로 악행을 밝힐 기회가 사라진 것뿐.
“재판대에 세웠어야 했는데….”
그렇지만 지금은 모리츠의 죽음을 아쉬워할 때가 아니었다.
모리츠가 마지막 발악으로 저질러 놓은 짓은 그대로였으니까.
여전히 어둠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고, 마정석 광산의 입구는 암흑이 모이다 못해 끈적거리는 검은 수렁 같아 보였다.
산샤는 마정석 광산의 입구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걸 걷어낼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딱히 누가 일러주지 않았지만, 글라키에스의 후손으로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저건 마정석 광산이 빛을 찾으면 걷힐 것이다.
이미 빛을 잃어버린 광산에 빛을 찾아주려면, 여황의 문을 열었을 때처럼 글라키에스를 소환해야 하고….
그러려면 저 암흑을 헤치고 들어가야겠지.
마정석 광산 앞의 거석에 손을 얹고 글라키에스를 부르는 주문을 읊어줘야 하니까.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은 산샤 디아머드, 자신밖에 없다.
산샤는 안전한 아드리안의 품에서 벗어나 바로 섰다.
아드리안이 잠깐 놔주지 않으려고도 했지만, 금세 마음을 바꾸고 순순히 물러났다.
아드리안이 걱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레이디가 원하는 대로….”
그때였다.
“고오오오오!”
괴이한 소리와 함께 얼음강에서 무엇인가가 솟구쳤다.
털썩. 절벽에 내려서자,
무겁게 내려앉아 있던 암흑이 요동치며 그것에게 빨려 들어갔고, 그것은 더 끈끈한 암흑을 뱉어냈다.
“모리츠?”
아닌 게 아니라 그것은 모리츠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끝날 모리츠가 아니긴 했다. 포기를 모르는 모리츠가 아니었던가.
그렇지만 그것은 또 모리츠가 아니었다.
온몸에 뼈도 근육도 없는 것처럼 흐느적거리며 늘어진 얼굴로 꾸역꾸역 암흑을 토해내는 것이 어떻게 사람일 수 있을까.
가질 수 없으면 부숴버리겠다고 했던가.
모리츠는 디아머드에 사람이 살 수 없도록 하겠다는 일념만 남은 괴물이 되어 버렸다.
글라키에스의 얼음궁전에 얌전히 있으라고 했더니, 모리츠에게는 그마저 허락되지 않은 모양이다.
천국과 지옥 어디에도 갈 수 없고, 얼음궁전에도 남아 있을 수 없다면… 영혼의 소멸만이 답인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모리츠는 암흑과 서로 공생하면서도 그것에 기생하는 것 같았다.
모리츠 때문에 암흑은 더 짙게 뭉쳤고,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드리안이 왼손을 움직여 바람을 모으며 오른손으로는 산샤를 밀었다.
“들어가. 가서 빛을 찾아.”
“모리츠는?”
“여긴 내가 맡고 있을게. 너는 네가 해야 할 일을 해.”
산샤는 일부러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해치우고 올게. 조금만 버티고 있어.”
홱, 돌아서서 산샤는 암흑을 헤치며 걸어 들어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쪽에 들어오니 저쪽에서 아드리안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산샤는 그저 마정석 광산의 입구라고 짐작되는 곳을 향해 걸을 뿐이었다.
전망대에서 마정석 광산 입구까지 길어야 백 걸음일 텐데….
얼마를 걸었을까.
백 걸음은 훨씬 넘은 것 같은데.
끈적거리는 암흑의 대부분은 무거운 습기였던 모양이었다.
암흑의 중심에 들어간다 싶었는데 머리카락이 젖더니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끈적거리는 느낌이 스며들어 몸이 무거웠고, 다리를 잡아 늘어졌다.
젖은 머리카락은 목을 조이는 것 같았고, 한 발 한 발 내딛기가 숨이 찼다.
모리츠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모습이 생각났고, 아드리안이 혹시 모리츠에게 당한 건 아닐지 걱정도 되었다.
이제라도 돌아가서 아드리안을 도와줘야 할 것 같았지만, 산샤는 앞으로만 걸었다.
마정석 광산이 빛을 찾으면 끝날 어둠이다.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산샤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중얼거렸고,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턱!
앞이 가로막혔다.
오른쪽으로 한참을 걸었지만 막혀 있었고, 왼쪽으로 가도 마찬가지였다.
마정석 입구에 당도한 건가?
거석이야?
산샤는 더듬더듬 암흑 속을 더듬었다.
그러기를 한참.
손끝에 무엇인가가 걸렸다.
손끝의 감각만으로 산샤는 그것이 글라키에스의 머리카락인 걸 알았다.
글라키에스와 카이의 이야기를 새겨놓은 부조였다.
어릴 때부터 셀 수 없이 봐 왔다.
그들이 사랑하고 디아머드를 만들어 낸 이야기.
그리고 카이가 휘두르던 보검 글라키우리까지.
그렇지만 주문을 읊기 위해 손을 올려놓을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이즈음이어야만 하는데….
걸리는 게 없다.
공기는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당장 이 암흑을 갈라내지 않으면 글라키에스를 부르는 건 불가능해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무엇으로?
나에게는 바람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산샤는 힘들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바람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다고 한들, 이 안에는 숨 쉴 공기도 미약해서 소용없을지도 몰라.
글라키우리를 가져왔어야 했어.
암흑이 무거운 습기인 것을 확인했고, 검이 습기를 잘라낼 수 있다는 말은 못 들어봤지만.
습기라 해도 모아서 벽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잘라낼 수도 있지 않을까.
산샤는 거석을 콩콩 조심스럽게 치면서 검의 이름을 불렀다.
“글라키우리!”
자신의 검술 따위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검과 얼마나 공감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었지.
검을 처음 발견했을 때, 카이와 글라키에스 이야기를 새긴 부조에 숨어 있었다.
검은 처음엔 형체가 없는 빛이었다. 그런 상태로 움직이는 것은 모두 베어버린다고 했었다.
검의 형체를 가진 다음에도 직접 베거나 찌르는 게 아니라 휘둘러서 검기가 뻗어 나온다.
그것도 자신이 나오게 한 게 아니라, 검이 혼자 알아서 한다.
그러니 이렇게 부르면 나올 거다.
그러는 게 맞다.
…맞겠지?
…맞아야 한다.
“글라키우리!”
반응은 전혀 없지만, 뭐든 부를 때는 세 번을 채워야 하는 법.
산샤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검을 불렀다.
“글라키우리!”
스르릉.
글라키우리가 대답하는 소리다!
역시나 부조가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산샤는 두 손을 거석에 꼭 붙였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모든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 싶다.
그렇게 해서라도 글라키우리를 소환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산샤의 마음이 통했는지, 산샤의 손 밑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산샤는 단박에 희미한 빛을 움켜쥐고 쭉 뽑아냈다.
스르릉, 빛이 검의 모양으로 뽑혀 나왔다.
산샤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암흑을 향해 휘둘렀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됐다!
암흑에 균열이 생겼다.
암흑의 균열을 향해 온몸의 힘을 그러모아 한 번 더 검을 내리치자, 빠지직!
세상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는 소리가 거창했던 것이 무색하게 겨우 산샤가 혼자서 밀고 들어갈 틈이 벌어졌다.
“암흑을 완전히 갈라버릴 수는 없었던 거니?”
스르릉.
산샤의 질문에 답이라도 하듯 손에 잡혀 있던 빛이 작게 진동했다.
그렇다는 뜻으로 알아듣겠다.
산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벌어진 틈으로 거석이 보였고, 손을 올려야 할 곳도 제대로 보였다.
“얼음여황 글라키에스여, 그대를 소환한다. 그대의 반려 카이의 후손 로베르트와 마리에의 딸 산샤가 디아머드의 주인 될 자인지….”
아니, 산샤는 머리를 흔들었다.
“디아머드의 주인이 그대를 소환한다. 얼음여황 글라키에스여, 응답하라!”
그리고 산샤는 덧붙였다.
“바로 지금 응답해요. 글라키우리로 갈라버리기 전에.”
쿠르르릉.
땅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직접적인 울림이 말을 걸어왔다.
[한낱 미물 주제에 어디에서 협박 질이냐.]
“글라키에스!”
글라키에스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빨리 이 암흑을 거둬줘요.”
[신끼리의 대결이다. 오르쿠스가 전력을 다해 덤벼서 나도 힘들어.]
“오르쿠스는 하급 신이라고, 무시했었잖아요. 그런데 못 이겨요?”
[지금도 무시한다. 오르쿠스 하급 신, 천하의 볼품없는 놈. 단지 모리츠 저놈이…. 저놈의 그릇된 욕망이 저 정도일 줄 몰랐지.
저놈의 욕망으로 오르쿠스가 힘을 얻어서 저 난리를 피우고 있으니까, 내 현신인 네가…. 허억!]
글라키에스가 무언가에 놀란 듯 숨을 삼켰다.
그리고 정적.
산샤는 더럭 겁이 났다.
직감으로 알았다.
아드리안에게 무슨 일이 생겼구나.
“아드리안!”
산샤가 돌아서며 외치자, 글라키에스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산샤, 가라. 아드리안을 살려!]
쿠르르릉.
땅이 흔들렸고, 투명하면서 하얀 기운이 솟구쳤다.
순간적으로 어둠이 갈라졌고, 절벽에 모리츠에게 목이 조이고 있는 아드리안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