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아드리안이 의아한 듯 돌아봤다.
이제 손가락만 튕기면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바람이 모리츠의 원을 덮칠 터였다.
어째서?
뭐라도 시도를 해봐야 하는 거잖아.
그러나 산샤는 아드리안이 입을 열기 전에 먼저 고개를 저었다.
이 방법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니까.
말하지 않아도 산샤의 뜻을 알아들은 아드리안은 손을 펴서 바람을 흐트러트렸다.
산샤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모리츠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산샤!”
아드리안이 다급하게 부르며 잡으려고 했지만, 산샤는 그 손을 밀어냈다.
아드리안은 잔뜩 걱정하는 표정이면서도, 밀어내는 대로 물러섰다.
[내 일은 내가 할 거야.]
이미 말해놨으니, 직접적인 위험이 보이지 않는 한 지켜보기만 할 터였다.
여전히 정신없이 뱅뱅뱅 돌고 있는 모리츠가 점점 가까워졌고,
드디어 모리츠의 원의 경계선에 다다랐다.
산샤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두려워하지도 않고 평상심을 유지한 채로 경계선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쓰윽.
산샤의 몸이 모리츠의 원을 통과했다.
어떤 반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모리츠의 원은 강한 공격을 튕겨내는 구조였어.
저항이 없으니 반동도 없다.
가까워질수록 모리츠는 참혹한 모습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눈의 초점은 물론이고 팔다리도 개개 풀려서 사람의 형상이 아닌 것 같았다.
팔다리의 근육과 뼈가 문드러져 피부 껍질만 뒤집어쓴 액체 상태가 되어버린 듯했다.
또 어찌 보면 그의 육신과 영혼이 바닥의 원으로 조금씩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신이 원해서 돌고 있는 게 아니라, 어떤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의해 돌아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산샤는 원 안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 다음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였다.
어떻게 해야만 모리츠를 막고, 디아머드에 내린 어둠을 걷을 수 있을까.
그때 배앵, 돌아가는 모리츠와 눈이 마주쳤다.
짧은 순간이지만, 모리츠가 자신에게 애원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돌고 있는 자신을 멈춰달라는 것처럼 보였다.
산샤는 그대로 손을 뻗어 모리츠의 옷소매를 잡았다.
부우욱, 옷소매가 그대로 찢어졌고, 모리츠가 돌아가는 속도는 늦춰지지도 않았다.
산샤는 제 손에 있는 모리츠의 소맷자락을 바라봤다.
이런 옷이라니.
옷감이 낡고 해진 게 몇십 년은 되어 보였다.
언제나 새로 지은 옷만 입던 모리츠가 입을 것 같지 않은 옷.
저렇게 돌고 있는 것이 모리츠의 육신과 영혼뿐 아니라, 그를 덮고 있는 옷감에까지 영향을 주는 모양이다.
산샤는 그대로 팔을 뻗어 모리츠의 팔을 잡았다.
부우욱.
이번엔 소매가 전부 다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산샤는 손을 고쳐 잡으며 버텼다.
모리츠가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기세에 달려 몇 번 따라 돌기도 해야 했다.
그래도 버텼다.
발을 굳건하게 내딛고 바닥이 파일 만큼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모리츠의 속도가 느려지더니, 마침내 멈췄다.
모리츠에게서 검은 연기를 빨아들이던 글씨들도 움직임을 멈췄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반원도 사라졌다.
“이봐요, 모리츠! 괜찮아요?”
산샤는 외치면서도 낯설었다.
모리츠가 괜찮은지 확인하고 있다니!
당장 죽여도 시원찮을 사람인데.
그렇지만 죽이는 것은 디아머드의 정의에 따라 해야 할 일이니, 우선은 살려야만 하는 게 맞았다.
모리츠가 흐물거리는 고개를 들어 산샤를 바라봤다.
얼굴은 축 늘어졌고, 눈은 퀭했는데, 입을 헤벌쭉 벌리고 웅얼거렸다.
“산샤 디아머드, 네가 올 줄 알았다. 나를 살리러 왔구나.”
설마, 반가워하는 건 아니겠지?
오늘 여러모로 낯설다.
살리러 왔다고 자신을 반가워하는 모리츠라니.
“이리 나와요, 모리츠 자작. 바닥에 그려진 이게 뭔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당신의 기력을 빨아먹고 있어.”
비척비척 산샤에게 이끌려 나오던 모리츠가 갑자기 손을 뿌리치더니, 발음도 정확하게 외쳤다.
“죽음과 명부의 신 오르쿠스가 말하노니. 디아머드는 암흑에 갇혀 다시는 태양을 볼 수 없으리니, 영원히 추위와 싸워야 할 것이다. 디아머드에 다시는 생명이 살지 못하리라.”
그러고는 산샤를 보며 입을 쩍 벌리고 웃었다.
“글라키에스, 너는 나에게 졌다. 내가 이곳 디아머드를 접수할 것이다.”
산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육신도 영혼도 빼앗긴 빈껍데기 같더니, 바로 그거였어.
인제 보니 얼굴도 조금 변한 것 같다.
죽음과 명부의 신 오르쿠스에 실체가 있다면, 이렇게 생겼을까?
글라키에스가 자신과 닮은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구해주러 왔다고 반가워할 정신은 아직 남아 있는 것 보면, 완전히 몸을 다 뺏긴 건 아닌 모양이다.
산샤는 더 세게 모리츠를 틀어쥐고 당겼다.
“이리 나와요, 모리츠 자작. 조금만 더 있으면 완전히 당신이 아니게 될 거라고.”
“아니야아! 아니다아!”
모리츠가 손을 잡아 빼며 외쳤다.
“나는 죽음과 명부의 오르쿠스! 디아머드의 돌멩이 하나까지 다 부스러뜨려 없애 버릴 것이니….”
한참 외치더니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두 손을 모아쥐고 하늘로 높이 치켜들며 다시 외치기 시작했다.
“살려 주세요. 오르쿠스여, 나의 영혼에 안식을 주소서.
이름 없는 잡신이라도 좋아요. 아무나 와서 나를 살려줘어.”
모리츠의 절규가 처절했다.
모리츠의 영혼은 오르쿠스와 모리츠가 나눠 갖고 있는 형국인 것 같았다.
디아머드를 암흑에 가둘 거라는 건 오르쿠스이고, 살려달라고 외치는 건 모리츠겠지?
그러나 모리츠가 소리를 지르면 지를수록 원 안의 무엇인가가 서로 부딪치며 공명음을 내더니,
다시 오르쿠스를 일으키는 듯했다.
급기야 이상한 글자들에서 가물가물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척, 척. 모리츠가 무릎을 하나씩 펴더니 자세를 잡았다.
그냥 두면 다시 또 뱅뱅 돌아갈 게 분명했다.
이대로 그냥 둘 수는 없다.
모리츠가 막 원을 그리기 시작하는 순간 산샤는 온 힘을 다해서 모리츠를 걷어차 버렸다.
퍽!
데구르르르.
모리츠가 데굴데굴 굴러가는데.
막 피어오르던 검은 연기는 모리츠를 잃고 헤매다가 산샤에게 달려들었다.
“아악!”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는 순간에 휙!
산샤는 아드리안의 품에 안겼고, 동시에 바람이 날아와 문양과 글씨들을 덮쳤다.
제물을 잃은 문양과 글씨들은 바람을 막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지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데굴데굴 굴러가 전망대 난간에 부딪혀 멈춘 모리츠가 신음하며 움직였다.
모리츠가 머리를 끌어안고 버둥거리다가 난간에 몸을 기댔다.
“난간에 기대지 마요!”
산샤가 뛰어가며 외쳤다.
“그거, 내가 빠졌던 뒤에 임시로 만들어 놓은 거라서 몸을 기대면 안 된다고….”
모리츠가 자신이 기댄 난간을 돌아보더니 입을 비죽였다.
“내가 죽기를 바라는 거 아니냐? 오히려 난간에 확 기대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기가 막혀서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살려놨더니, 헛소리는…. 방금까지 자기가 무슨 꼴이었는지 자각도 없나 보죠?”
“왜 살린 거냐? 그대로 오르쿠스에게 육신과 영혼을 다 바치게 둬야지. 왜 살린 거냐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던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죠.”
“…애원했다고? 내가?”
“오르쿠스에게 육신과 영혼을 바치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울면서 절규하던걸. 살려달라고.”
모리츠가 두 팔로 머리를 싸매며 웅얼거렸다.
“오르쿠스에게 육신과 영혼을 바치면 영원히 명부에 묶여 있게 된다. 대신 내 기원은 이루어지지.”
“그래서 디아머드에 사람이 살 수 없게 해달라고 기원하고 육신과 영혼을 바친 거예요?”
“…….”
“왜? 글라키에스 얼음 궁전에 묶이기 싫어서?”
“…….”
“당신이 어떤 벌을 받을지 이미 알고 있었죠? 그걸 피하고 싶어서 오르쿠스를 불러들여요? 여긴 글라키에스 구역인데….”
모리츠는 묵묵부답,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려고 해도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산샤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더니 중얼거렸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천국에 가지 못하고, 묶여 있긴 마찬가지인데 왜 그런 짓을 하지?”
홱, 고개를 쳐든 모리츠는 눈을 부라리며 산샤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마법의 정수가 모인 곳을 찾아 오르쿠스를 불러내면 자신은 자신으로 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오르쿠스에게 육신과 영혼을 내줘야 하고, 죽은 다음엔 명부에 묶여 있기로 하는 계약이었으니까.
그래도 모리츠는 해야만 했다.
여기가 글라키에스 구역인데, 왜 오르쿠스를 불러들이냐고?
여기가 글라키에스 구역이니까!
글라키에스 것은 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모리츠는 흐느적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일어섰다.
“네가 뭘 알아? 선택받은 존재가 선택받지 못한 자의 비애를 알아? 네까짓 게 뭘 안다고 내 앞에서 종알거리는 거냐?”
산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모리츠를 봤다.
“다 죽어가는 걸 살려놨더니…. 물에 빠진 사람을 살려주면 자기 가방 내놓으라고 한다더니, 딱 그 꼴이네요.”
모리츠가 눈을 부라리며 당장이라도 산샤를 내리칠 것처럼 주먹을 흔들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산샤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더니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불행하다고 다른 사람들까지 다 불행하길 바라는 게 잘못이라는 건 알아요.”
“뭐?”
“정말 불행한 사람도 있겠지만, 당신의 불행은 스스로 만들어 낸 게 대부분인 것도 알고….”
“뭐가 어쩌고….”
“당신의 악행이 천벌 받아 마땅하다는 것도 알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며 산샤의 말을 듣고 있던 모리츠가 참지 못하고,
“으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