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한참을 달리던 마차가 급정거했다.
“아니, 이런. 말들이 왜 이래.”
마부 랄프가 당황해서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마차 문이 열렸다.
랄프가 난감한 듯 어찌할 바를 몰라 버벅거렸다.
“어쩌지요? 말들이 겁에 질려서 한 발도 더 가려고 하질 않습니다.”
말이 겁에 질릴 만도 했다.
칠흑처럼 어두운데 광포한 울림만이 사방을 채우고 있었다.
“지금 이게 얼음강이 내는 소리야?”
산샤의 말에 아드리안의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바람은 숨을 죽이고 있어.”
언제나 차갑고 도도하게 흐르던 강물이 울부짖다니.
얼음강을 이토록 화나게 할 게 무엇이란 말인가.
글라키에스가 자신을 기절시켜서라도 억지로 꿈을 꾸게 할 만했다.
다른 데서 헤매다가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와서 해결하라는 뜻이었겠지.
산샤는 마차에서 내렸고, 아드리안이 내리는 것을 보고는 랄프에게 말했다.
“랄프는 돌아가 있어. 말들을 얼른 조용한 데서 쉬게 해줘야지.”
“어쩌시려고요?”
“어쩌긴, 거의 다 왔잖아. 걸어가면 금방이야.”
“아니, 그래도 이렇게 어두운데….”
산샤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런 어둠.
어쩐지 낯이 익는데, 지난 생의 마지막 날 같았다.
발밑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길에 신발도 신지 못한 채로 끌려와, 얼음강에 처넣어졌었지.
“괜찮아. 이런 길을 맨발로도 갈 수 있어.”
“예? 아니, 맨발은 왜….”
랄프가 당황하며 산샤의 발부터 보는데, 산샤는 벌써 저만치 가고 있었다.
아드리안이 랄프에게 일별하고 산샤를 따라나서자,
랄프는 말들을 달래며 슬슬 강변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 * *
산샤와 아드리안은 묵묵하게 걸었다.
익숙하다고는 했지만, 돌이 차이는 길을 어둠 속에 걷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걷는 데 집중해야 하니 당연히 대화는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
쌕쌕 숨소리가 거칠어지던 산샤는 슬쩍 아드리안에게 물었다.
“당신은 걷는 거 괜찮아?”
아드리안이 지극히 평온하게 물끄러미 산샤를 바라봤다.
“괜찮구나?”
아드리안에게 질 수야 없지.
산샤가 없던 힘까지 그러모으는데 아드리안이 물었다.
“이런 길이 왜 익숙하다고 했어? 맨발로도 갈 수 있다니…. 마치 해 본 것처럼.”
“해 봤으니까.”
아드리안의 인상이 확 구겨지는 것을 보며 산샤는 얼른 덧붙였다.
“이번에 말고 지난 생에….”
“지난 생?”
“흐음….”
산샤는 잠깐 고민하다가 씨익 웃기부터 했다.
아드리안은 바람을 다스리는 자인데다가 시간을 뒤틀어서 은신처를 만드는 사람이니 회귀한 생에 대한 이해도 빠를 것 같았다.
“지난 생에 모리츠가 여황의 문을 열었던 날 밤에 나를 끌고 왔거든. 신발도 안 신겨서.”
아드리안이 멈췄다.
입은 벌렸으나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놀랄 일은 아닌데….
산샤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어차피 지난 생에서 있었던 일이고, 지금은 살아 있으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데.
아드리안이 충격을 받은 것 같아서 산샤는 일부러 더 가볍게 웃었다.
“그때 얼음강에 빠져서 죽었어.”
“뭐라고?”
“그게 끝인 줄 알았는데, 눈떠 보니까 살아 있는 거야. 그래서 오늘까지 온 거고.”
“내가 너를 죽게 뒀다고? 너를 보호하는 것만이, 내가 할 일이라고 떠들고 다니던 내가… 네가 죽는 것도 몰랐어?”
“어…. 그게 아닌데….”
산샤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괜히 말했나 보다.
아드리안도 그런 일이 있었냐며 웃어버릴 줄 알았는데, 아드리안에게는 지나간 일이 될 수 없었나?
슬쩍 훔쳐본 아드리안은 씩씩대고 있었다. 올라가는 길이 힘들어서 씩씩대는 건 확실히 아니었다.
산샤는 오히려 자신의 쌕쌕거리는 숨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괜히 숨소리가 컸다가는 아드리안의 신경을 거스를 것 같아서.
그렇게 숨 쉬는 것도 조심하면서 마정석 광산이 보이는 곳까지 올라섰고,
“아…!”
산샤는 탄식했다.
언제나 오묘한 흰빛에 둘러싸여 아름답게 빛나던 마정석 광산이 빛이라고는 한 점도 없이 짙은 어둠에 눌려 있었다.
안 그래도 어두운 중에 마정석 광산을 알아볼 수 있었던 건, 그중 가장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어둠의 바위로 꽉 눌러놓은 느낌이었다.
“무슨 짓을 하면 저렇게 만들어놓을 수 있는 거지?”
아드리안이 대답 대신 팔을 뻗어 한쪽을 가리켰다.
거기에 모리츠가 서 있었다.
큰 원을 그린 바닥에 이상한 글씨를 잔뜩 써놓고 그 위에서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춤이라니.
여름에 우박을 내리려면 저런 괴상한 짓을 해야 하는 건가?
모리츠가 빙글빙글 돌면 바닥에 새겨진 이상한 글자에서 검은 연기가 올라와서 마정석 광산에 쌓이는 것 같았다.
가만히 구경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저게 무엇이든 당장 멈추게 해야만 하니까.
“모리츠 디아머드! 당장 그만두지 못해?”
산샤가 소리친 그 순간에 벌써 아드리안은 달려갔다.
휘이잉!
퍽!
바람처럼 달려갔던 아드리안이 그대로 퍽 튕겨 나왔다.
달려들었던 힘만큼 튕겨 나온 것 같았다. 돌풍처럼 달려들었으니 돌풍에 얻어맞은 상태가 되어버렸달까.
진짜 돌풍이었다면, 아드리안을 다치게 하지 않았을 텐데.
“아드리안!”
경악하여 달려갔는데, 아드리안은 죽은 듯 눈을 감고 널브러져 있었다.
“아드리안!”
산샤는 연거푸 아드리안을 흔들며 이름을 외쳐댔다.
이대로 아드리안이 잘못된다면,
산샤는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도 하기 싫었다.
모리츠에게 복수하면 뭐 하나. 아드리안이 없는데.
“아악! 아드리안!”
산샤는 비명처럼 아드리안을 부르며 그에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토닥토닥 아드리안이 약하지만 정확하게 산샤의 등을 토닥였다.
산샤는 얼른 아드리안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드리안이 조용히 그렇지만 조금은 부끄러운 듯이 웃어 보였다.
“아드리안, 괜찮아?”
아드리안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게 해서 미안, 저놈이 널 죽였다는 생각에,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었다가….”
아드리안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자, 산샤는 심각한 순간인데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아드리안의 모습이 당황스럽기도 했다.
진중하고 과묵하던 아드리안은 사라지고 격한 감정에 휘둘리는 아드리안이라니.
산샤는 일어서는 아드리안을 부축했다.
“앞으론 그러지 마. 앞뒤 안 보고 달려드는 건 내가 할 거니까….”
“…아무리 너라도 앞뒤 안 보고 달려는 건, 하면 안 되지.”
산샤는 슬쩍 아드리안을 흘겨보며 타박했다.
“당신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둘은 여전히 미친 듯 춤을 추고 있는 모리츠를 바라봤다.
“당장은 저 짓거리를 멈추게 해야 할 테고….”
모리츠는 이미 무아지경에 빠진 것 같았다.
산샤와 아드리안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은 당연히 모르는 듯했다.
이미 그것은 모리츠라는 사람이 아니라, 큰 원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인형 같아 보였다.
빙글빙글 도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고, 속도가 빨라질수록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는 점점 더 진해졌다.
영혼이 빠져나가 빙글빙글 도는 기능만 남은 인형이 차곡차곡 마정석 광산을 막고 디아머드를 영원한 어둠에 잠기게 할 것 같았다.
“저 안에 들어갈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
“여럿이 공격하면 어떨까?”
아드리안이 허공을 향해 손짓했다.
검은 어둠 속에서 그보다 더 검은 자들이 착착착 나와 무릎을 꿇었다.
아드리안의 비밀병기, 그림자들이었다.
그들은 아드리안이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이미 모리츠에게 달려들었다.
누군가는 검을 휘두르고, 누군가는 창을 꽂았다.
그러나 누구도 모리츠의 원을 통과하지는 못했다.
퍽!
퍽!
퍽!
모두 나동그라지고 널브러졌다.
도저히 모리츠의 원은 통과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실패한 그림자들이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자,
아드리안은 산샤에게 속삭였다.
“나를 잡아.”
“응?”
아드리안은 산샤의 손목을 잡고 쑥 끌어당기더니 마치 산샤가 날아가 버리기라도 할 듯 힘주어 안았다.
그러고는 한쪽 팔을 뻗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살랑살랑 산들바람이 모여드는 것 같았다.
산샤는 무언가 모이고 있는 아드리안의 손끝을 보며 물었다.
“어쩌려고?”
“바람을 날려 보낼 거야. 지금까지 불러 본 적이 없는 아주 큰 걸로….”
아드리안의 말대로 손끝을 따라 아무것도 없는 곳에 무엇인가 생기는 것 같더니, 그 무엇인가가 뭉치고 뭉쳐서 점점 더 커졌다.
점점 점점 점점….
확!
아드리안의 손끝에서 거대한 것이 날아갔고, 바람도 숨을 숙이고 있던 곳에 갑자기 돌풍이 불어닥쳤다.
얼음 절벽의 모든 것을 다 날려버릴 듯한 거센 바람이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바람은 모리츠의 원 위로 몰려들었고, 회오리가 뱅뱅 돌아가면서 세력을 불려갔다.
바람은 스스로의 의지로 단 한 번의 일격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바람과 어둠으로 얼음 절벽은 태초의 암흑 세상이 된 것 같았다.
이제 힘이 모일 만큼 모였다.
어서 움직이게 해줘.
바람이 안달하며 울부짖었다.
광풍 사이에 선 아드리안의 아름다운 입술이 살짝 늘어졌다.
이제 그게 허락하면 바람은 모리츠의 원을 공격할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괜찮을까?
모리츠의 원은 공격한 만큼 되돌려 주고 있는데….
이렇게 어마어마한 바람으로 괜찮은 거야?
산샤는 아드리안의 손을 덥석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