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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92화 (92/97)

92화

창을 깨버릴 듯 거세게 들이치는 우박을 보고 산샤는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모리츠 디아머드! 기어이 이런 짓까지….”

“에엑?”

조나스가 이상한 소리를 질렀다가 얼른 입을 다물고 마르틴에게 눈짓했다.

마르틴이 싫은 표정으로 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레이디? 우박인데요. 자연현상이잖아요. 모리츠가 관련이 있을 리가….”

그러나 매섭게 보는 산샤의 눈초리에 기가 질려 뒷말은 삼켜 버렸다.

산샤의 표정과 태도를 보면 누가 뭐래도 우박은 모리츠가 내리고 있는 걸로 보였고, 반론은 절대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레이디를 이길 순 없다고 고개를 젓는 마르틴을 보고 조나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아니야, 이성적으로 생각해야지. 안 좋은 일을 다 모리츠 핑계 대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그런 마음으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아니긴? 여긴 북부잖아. 한겨울엔 추위에 코가 떨어져 나간다면서? 얼음이 흔한 동네잖아.”

“북부를 잘 아는 건 폐하가 아니라 접니다. 북부라고 해도 겨울에 코가 떨어져 나갈 일은 없고요. 당연히 여름엔 우박이 없습니다.”

산샤가 쥐고 있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한마디만 더 하면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가만두지 않을 듯 위협적이었다.

그 결기에 압도당한 마르틴은 슬그머니 물러서며 조나스에게 손짓했다.

그만하라고. 안전을 도모하자고.

그렇지만 조나스는 괴이해 보일 정도로 열망을 불사르며 더 박박 우겼다.

“아무리 그래도…. 모리츠는 그냥 보통 사람이야. 마법사도 아닌데 계절이 아닌 때에 우박을 어떻게 내려?”

“하아….”

들릴락 말락 한 작은 한숨.

순간 조나스는 입을 합 다물어 버렸다.

슬쩍 돌아보자 역시나 아드리안이 물끄러미 자신을 보고 있었다.

조나스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하고 아드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한숨을 쉬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로 상황 종료.

조나스는 산샤에게 더 따지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렸고, 마구 분출되던 열망도 한순간에 쪼그라들어 버렸다.

그건 산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까딱했다간 한 대 칠 것 같았던 주먹에서 힘을 풀더니 공손하게 손을 모았다.

“폐하와 북부의 기후변화에 관해 토론을 더 하고 싶지만, 지금은 모리츠를 막는 게 더 급해서….”

“기어이 가겠다는 말인가?”

마음 한구석에서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있던 조나스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중얼거렸다.

“모리츠일 리가 없다니까….”

그렇지만 이번에도 끝까지 말하지는 못했다.

아드리안이 일어서는 것을 보면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아드리안이 말했다.

“마법이란 어디에나 있고, 방법만 안다면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습니다.”

“모리츠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건가? 그런 걸 할 수 있었다면 그동안 모리츠는 더 어마어마한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요?”

“뒤늦게 깨달을 수도 있죠. 폐하가 그런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조나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드리안이 가볍게 묵례하고 돌아섰고, 산샤와 같이 나가는 동안 조나스는 껌뻑껌뻑 눈만 껌뻑거렸다.

탁.

그들이 나가고 마르틴이 쪼르르 다가와 은밀하게 물었다.

“폐하, 역시 마법을 쓰시는 거였네요?”

조나스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뭘 보고? …내가 한 거라고는 아드리안을 따라 달린 것밖에 없는데?”

“다른 사람들이 잘 못 알아보기도 하잖아요.”

“그거야 워낙 존재감 없는 황제니까.”

“망각의 기운 …그거 아니에요?”

“내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는 조나스를 따라 마르틴도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정령의 돌을 꺼내 보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마르틴은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 * *

산샤와 아드리안은 달려 나와 그대로 마차에 올라탔고, 랄프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출발했다.

우박은 더 거세졌고 멀리 어딘가에서 천둥과 번개도 내려치는 것 같았다.

산샤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며 시시각각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드리안이 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리츠인 건 확실한데,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려면 시간이 필요해.”

산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바람을 다스린다고 해도, 바람을 정보원으로 쓴다고 하지만,

바람이 북부 지역을 한 바퀴 돌아 아드리안에게 오는 데까지는 당연히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일이 일어나는 즉시 알게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드리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지금 무엇보다 부족한 게 시간이니 문제겠지.”

산샤는 말없이 이번에도 고개만 끄덕였다.

당장 우박이 밭작물에 해를 입히고 있다.

이대로 둔다면 겨울 식량이 부족해질 수도 있었다.

지금 당장 모리츠를 잡아서 우박을 멈추게 한다고 해도 겨울 식량난은 막을 수 없을지도 몰라.

그래도 산샤는 절망하지 않았다.

헤쳐 나가기로 했으니 헤쳐 나가면 된다.

설사 모리츠를 아예 잡지 못한다고 해도 역시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산샤 디아머드니까.

산샤는 아드리안의 손을 잡고 결연하게 말했다.

“당신을 믿어. 그러니까 당신도 내 운을 믿어 봐. 잘되고야 말 거니까.”

아드리안이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당연히 너를 믿지, 산샤 디아머드.”

산샤도 따라서 웃으며 속삭였다.

“당신이 웃으면 세상이 다 밝아지는 것….”

산샤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몸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 같더니, 그대로 털썩 아드리안의 품에 떨어졌다.

눈을 감은 얼굴이 창백했다.

“산샤?”

아드리안이 경악하여 불렀지만 산샤는 답을 하지도 못했다.

“산샤, 정신 차려…. 산샤!”

산샤를 부르는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애잔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산샤는 자신을 부르는 아드리안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자신을 흔드는 손길도 느꼈다.

그런데 대답할 수 없고, 눈을 뜰 수도 없었다.

몸이 천근만근으로 무겁고,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무엇인가 자신을 붙잡아 쑥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거 놔.

놔달라고요.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목청이 열리지 않는다.

‘살려 줘. 도와줘요.’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을 때 문득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안 죽었거든?”

산샤는 짜증인지 안심인지 모를 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다.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지다니, 건강한 자신이 할 짓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존재가 끼어들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겠지.

“글라키에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산샤의 항의에도 무지갯빛 머리를 풀어 헤친 글라키에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창백해진 산샤와 애절한 아드리안의 맞은편에 앉아서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니? 급하게 너한테 할 말은 있지.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곳은 너의 꿈속뿐이지. 이렇게라도 끌어당겨 오는 수밖에.”

“예고라도 하든가. …아드리안이 놀라서 어쩔 줄 모르잖아요.”

여전히 아드리안은 산샤의 이름을 부르며 창백해진 얼굴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러게. 쟤는 언제까지 너한테 이럴 거라니? 불면 날아갈까, 깨질까, 다칠까 애지중지. 카이도 이렇진 않았다.”

“하려는 이야기가 뭐예요?”

그냥 두면 줄줄 수다를 떨고 있을 게 뻔해서 산샤는 글라키에스의 말을 끊었다.

“갑자기 기절시켜서 불러들인 이유가 있을 거잖아요.”

수다를 마음대로 떨지 못한 글라키에스가 슬쩍 산샤를 흘겨보더니 말했다.

“마법을 쓸 수 없는 자가 마법을 불러오려면 마법의 정수가 몰려 있는 곳에 가야 한다.”

“예?”

“그래, 한 번에 이해 못 할 줄 알았다. 내 말을 잘 생각해 보면 모리츠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야.

아드리안의 바람이 소식을 물어오는 것보다 더 빨리.”

“이럴 거면 어디 있는지 그냥 알려주지.”

“그건 또 못 하지. 신들은 그러는 거 아니거든.”

글라키에스가 히죽 웃었다.

“눈을 떠라, 산샤. 해야 할 일을 얼른 마쳐야지.”

“하아….”

산샤가 숨을 내쉬었다.

“산샤?”

아드리안이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자 산샤가 거짓말처럼 똑 눈을 떴다.

“산샤, 정신이 들어? 괜찮아?”

산샤가 힘없이 미소 지었다.

“아드리안, …나, 돌아왔어.”

아드리안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직 눈에 초점도 없고 팔다리가 축 늘어져 있기는 했지만, 조금씩 힘이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글라키에스가 할 말이 있다고 끌어갔지 뭐야.”

아드리안이 미간을 확 찌푸리며 으드득 이를 갈았다.

“내가 언젠가는 글라키에스를….”

“쉬이….”

산샤가 손을 뻗어 아드리안의 뺨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꿈에서 빠져나오긴 했지만, 글라키에스가 아직 곁에 있다는 느낌이 있었다.

글라키에스가 기분 나쁘다고 아드리안을 공격하면 어쩌나.

아드리안이 고통받게 둘 수는 없었다.

둘이서 글라키에스와 싸워 이길 거라는 확신이 생길 때까지는 조심하는 게 좋지.

불면 날아갈까, 깨질까, 다칠까, 애지중지하는 건 산샤도 마찬가지니까.

그러니 지금은 모리츠를 잡으러 가자.

마법의 정수가 몰려 있는 곳에 모리츠가 있다.

산샤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고, 팔다리에도 힘이 생겼다.

산샤는 몸을 일으켜 창을 열고 외쳤다.

“랄프, 마차를 마정석 광산으로 돌려. 거기에 모리츠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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