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딸깍’ 소리가 나 버렸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문손잡이 소리 때문에 들켰다.
그러나 모리츠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을 잡으러 올 일은 없을 테니까.
그들도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을 잡아서 산샤에게 넘기는 건 위험부담이 있다고.
산샤가 잡으러 오면 못 이기는 척 내주는 모양새를 취해야지, 그 전에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는 없다고.
그러니 내주지 못하게 사라져주겠단 말이다.
한 발 한 발 열심히도 걸었다.
마르틴 바이다 후작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마차를 보내버렸지 않았나.
걷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사실 갈 데도 없다.
필요하면 언젠가는 아드리안의 은신처를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호레스 밀란 대공이 일을 당했다는데, 쉽게 그곳으로 갈 수가 없다.
자신도 잘못되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어디로 가야 할까.
행궁에서도 멀리 떨어지고, 산샤에게서도 멀리 떨어질 수 있는 어느 곳으로 가야 하는데, 거기가 어디일까.
막막하기만 했다.
걷는 게 너무 힘들어서, 모리츠는 길가에 있는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았다.
‘아구구구, 나 죽겠다’ 소리가 절로 새어 나온다.
그러고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모리츠 디아머드 신세가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을까.
디아머드 백작 가의 차남으로 태어나 성실하고 영특하다는 소리를 듣고 살았는데….
공부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모른다. 모리츠의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불세출의 천재가 나왔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뭐, 고용주의 아들이니 칭찬하기가 더 쉬웠던 것도 있었겠지만, 칭찬도 할 만하니 했겠지.
마리에에게 첫눈에 반했을 때는 약간 위기이기는 했다.
‘죽이고 싶은 사랑’이 뭔지 모를 거라고?
벌써 몇십 년 전에 경험한 게 죽이고 싶은 사랑이다.
어린것들이 어른을 무시해도 참….
그때는 마리에를 너무너무 사랑했지만, 언제나 죽여버리고 싶었다.
아무리 고백해도, 아무리 좋은 것을 가져다 바쳐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돌아보지도 않았으니까.
마리에 눈에는 오직 로베르트만 보이는 것 같았다.
로베르트보다 몇천 배나 훌륭한 사람으로서 도저히 마리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질투에 눈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스스로 느끼는 자부심에는 흠 하나 나지 않았다.
자신에게 만족하니 나날이 행복했다.
그 모든 것이 깨진 건 예언을 알게 된 때였다.
[글라키에스의 선택을 받은 자여. 글라키우리를 가진 자 얼음 땅을 갖게 되리니, 세세토록 글라키에스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모리츠는 글라키에스의 선택을 받은 자가 되고 싶었다.
얼음 땅을 갖게 된다지 않나.
디아머드에 국한되지 않고, 라인하르드 제국도 넘어서서 대륙을 정복하는 자가 된다는 거잖아.
대륙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닌가 말이다.
그게 되고 싶었다.
대륙에서 제일 높은 사람.
그게 되어서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오직 제일 높아지고 싶을 뿐이었다.
로베르트도 자신의 발아래 두고, 한 번도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았던 마리에도 깔아뭉개고 싶었다.
자신은 그 정도 꿈은 꿔도 되는 사람이니까.
성실하고 영특한 불세출의 천재니까.
글라키에스의 선택쯤 얼마든지 받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글라키에스는 자신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저 마리에랑 놀러 다니는 데만 정신 팔려 있는 로베르트를 선택했다.
로베르트가 대륙을 정복할 재목이었으면 깔끔하게 인정할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런데 로베르트는 평생 놀았고, 디아머드 사람들도 평생 놀게 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놀다가 가족 여행길에 죽어 버렸잖아. 내가 죽이기는 했지만.
그랬으면 글라키에스는 자신을 선택했어야 했다.
얼마나 간절했는데!
그만큼 원하니까 마차도 뒤집어 버린 거잖아.
그런데 글라키에스는 산샤를 선택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열 살짜리 계집애를. 열세 살이었나? 뭐, 어쨌든.
딱 그대로 로베트르와 마리에를 닮아서 평생 놀 것 같은 애를 선택하다니.
그래서야 어떻게 대륙을 정복하겠냔 말이다.
나라면 얼마든지 대륙을 정복해서, 글라키에스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는데….
대륙에서 가장 높은 자가 되어야 할 나는 지금 이 꼴이 뭐냐.
마차도 없이 퉁퉁 부은 다리로 그저 걷고 있다.
한참 걸은 것 같은데 행궁이 아직도 저렇게 가까이 있어.
모리츠는 절망스러웠다.
이대로라면 자신을 잡으러 오는 산샤와 맞부딪치고 말겠다.
얼마나 더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허리 밑으로 감각도 없다.
감각이 없으니 통증도 못 느껴서 오히려 나은 것 같았던 건 잠깐, 이제는 그냥 몸이 무너질 것 같다.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산샤에게 잡힐 수는 없으니까.
디아머드의 정의를 실천하겠다는 그 아이는 직접 사법관이 되어 자신을 심판할 모양인데….
굳이 법정에 서지 않아도 자신의 죄는 잘 알고 있을뿐더러, 어떤 처벌이 내려질지도 알고 있었다.
최소 사형.
목숨을 내놓는 것 말고는 달리 죗값을 치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자신의 죄가 사형으로는 해결이 안 될 중죄였다.
죽여 없앤 생명이 한둘이 아닌데, 자신의 목숨 하나로 갚아지겠나.
그러니 얼음강에 빠트려질 것이다. 절벽에서 밀어 넣고 떠오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겠지.
그러면 자신의 영혼은 영원히 얼음강 바닥에 얼어붙게 될 것이다. 천국도 지옥도 가지 못한 채로.
그건 싫다.
모리츠는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나를 이 꼴로 만든 게 글라키에스다!
무책임하게 예언을 하고 간절히 원하게 만들더니 끝내 선택해주지 않았잖아.
그런데 글라키에스에게 영혼을 바치라고?
싫어. 차라리 지옥에 가겠어.
모리츠는 벌떡 일어섰다.
얼음강에 빠질 거라는 생각을 하니 없었던 기운이 막 솟구치는 것 같았다.
글라키에스가 자신이 아닌 로베르트를 선택했을 때, 모리츠도 글라키에스를 버렸다.
그때 모리츠는 명부와 죽음의 신 오르쿠스와 계약했다.
그를 소환해서 디아머드를 싹 다 멸망시키려고도 했었다. 아버지에게 들켜서 추방당하는 바람에 못 하고 말았지만.
오르쿠스와 한 계약은 아직도 유효하다.
이제라도 디아머드는 멸망시킬 수 있단 말이지.
내가 갖지 못할 바에야 다 부숴버리는 것이 소유의 기본 아니겠나.
나, 모리츠 디아머드.
기본을 아는 남자.
기본이 뭔지 보여주고야 말겠다.
* * *
모리츠는 없었다.
산샤는 기사단은 돌려보내고, 아드리안과 함께 조나스의 응접실에 앉았다.
행궁에 잘 데리고 있을 거라고 큰소리치던 조나스는 먼 산을 보고 있었고, 마르틴은 홀짝홀짝 술을 마시면서 눈치만 살폈다.
결국 산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놓쳤다는 거네요.”
그러자 조나스가 인상을 확 구기며 마르틴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마르틴이 살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놓쳤다고 하는 건 약간 어폐가 있네요. 애초 잡아놓은 게 아니었으니까요.”
“행궁에 잘 데리고 있을 거라는 건, 잡아두겠다는 것과 같은 말 아닌가요?”
“그렇지만 묶어둘 수는 없잖아요. 나름대로 작위가 있는 귀족이고… 제국법상 그는 잘못은 없으니까요.”
“무슨 헛소리예요? 그게?”
산샤가 버럭 소리를 질렀고,
아드리안이 마르틴을 바라봤다.
산샤가 모든 일을 다 알아서 할 거라는 듯이 뒤로 물러나 있던 아드리안이었지만, 마르틴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마르틴은 찔끔 움츠러들며 술을 한 모금 넘겼다.
“제, 제국법에도 문제가 되려나요? 제가 법은 잘 몰라서….”
그러고는 조나스에게 눈짓을 했다.
조나스가 인상을 구기면서도 마르틴의 말을 받아서 부연 설명했다.
“살인은 제국법에도 문제가 되겠지만, 죽은 상대가 평민이니까 큰 죄는 아닐 테고…. 그것보다는 정치적인 문제가 있었어.”
“정치적인 문제는 뭐에요?”
“모리츠가 호레스 밀란 대공의 심복이잖아. 대공의 생사가 모호한 현 상황에 모리츠를 죽이라고 너에게 내줄 수가 없으니까….”
“죽이라는 게 아니라, 제대로 재판을 받으라는 건데요.”
“결국은 죽일 거잖아. 그러면 귀족들이 들고일어날 거야.”
“들고일어나면요?”
“그럼 나는 해결 못 하지. 그러니까 일어나지 못하게 막아야지. …미리 알아서 조심하는 거야.”
조나스가 슬쩍 산샤와 아드리안의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러니까 좀 일찍 오지 그랬어? 모리츠는 방금까지도 멀쩡하게 있었단 말이야.”
그 말에 마르틴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방금까지는 아니고… 딸깍 소리가 아까 났는데….”
“뭐, 어쨌든!”
조나스가 버럭 소리를 질러 마르틴의 말을 끊어버렸다.
“늦게 왔잖아. …모리츠가 지은 죄는, 나는 관심도 없고. …너를 위해서 내가 곤란해질 수는 없으니까.”
산샤는 그야말로 말문이 막혀 버렸다.
기가 막혀서 입이 저절로 벌어지기도 했다.
누가 뭐랬나.
모리츠가 도망갈 수도 있지.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알아서 먼저 선을 긋고 나서다니.
이런 소리를 듣자고 조나스를 몇 날 며칠이고 디아머드 성에서 재우고 먹이고 했던가.
“뭐? 그 표정은 뭐야?”
산샤는 조나스의 눈을 똑바로 보고 대답했다.
“황제 노릇이라는 게 이렇게 비겁한 거였나, 생각하는 표정입니다.”
조나스가 짜증스럽게 산샤를 노려봤다.
“그러니까 나는 황제를 하지 않고, 아드리안에게 돌려줄 거라고 했잖아.”
아드리안이 조용히 나섰다.
“돌려준다는 말은 좀 이상하군요. 전 황제였던 적이 없는데요. 제가 돌려받을 것이 아니에요.”
“뭐? 내가 황기사를 한 게 어떤 이유였는지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해? …요?”
“그건 폐하의 사정이겠죠.”
“인제 와서 이게 무슨 소리야?”
조나스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일어섰고, 그 기세에 의자가 벌러덩 넘어졌다.
그때.
우르르 쾅!
하늘에게 마른번개가 치고, 삽시간에 주위가 어두워졌다.
“이게 뭐죠?”
모두가 놀라 돌아보는데,
갑자기 우두두둑, 우박이 거세게 창을 때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