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호레스 밀란 대공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말에 모리츠도 마르틴처럼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걸 얼른 막는다는 게 주먹으로 목젖을 쳐버렸고, 비명이 저절로 튀어나와 버렸다.
비명을 막기엔 통증이 너무 심했단 말이다.
저쪽 방의 침묵이 길었다.
자신의 비명을 들었다는 건 확실했고, 대체 뭘 하느라 저렇게 오래 침묵하는 걸까.
자신이 엿듣는다는 것을 아니까 침실에서 나가서 다른 데서 이야기할 수도 있을 테고.
역시 자신이 엿듣는다는 것을 아니까 잡으러 올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자신이 일부러 엿듣는 건 아니지 않나.
한참 떨어져 있는 방인데 환기구를 같이 쓰는지 몰랐고, 환기구를 통해 소리가 바로 들리는 것도 몰랐으니까.
어찌 됐던 마르틴 바이다 후작이 내준 방이잖아.
저들도 당황한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이렇게 오래 사이를 둔다고?
모리츠를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공이 정말 죽었나?
그래서 모든 걸 대공에게 의지하던 두 청년이 어찌해야 할지 판단할 수 없는 건가?
그렇잖은가, 아무리 황제와 후작이라지만 중요한 일은 다 대공이 결정했고, 저들은 자리만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호레스 밀란 대공이 죽었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생생하게 펄펄 뛰던 사람이 아닌가. 그 손에 이쪽이 죽었으면 죽었지,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란 말이지.
그때 한참의 침묵을 깨고 조나스가 말했다.
“아드리안의 은신처에 들어갔대.”
“에엑?”
모리츠는 이젠 소리를 막을 생각도 하지 않고 괴성을 질러버렸다.
저쪽 방은 둘은 당연히 들었을 텐데도 무시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모리츠의 괴성은 아예 없었던 양 마르틴이 물었다.
“그게 뭔데요? 아드리안의 은신처?”
마르틴의 발음이 거의 또렷해져 있었다. 술이 확 다 깨버렸나 보다.
하긴 술이 깰 만하다.
모리츠도 잠이 다 깨버려서 바윗덩어리같이 무겁던 머리가 가벼워졌으니까
조나스가 마르틴에게 아드리안의 은신처에 관해 설명하는 소리를 들으며 모리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호레스 밀란이 미쳤나.
아드리안의 은신처에 들어가긴 왜 들어가?
아드리안의 은신처를 알려준 게 자신이기는 하지만, 당장 들어가 죽으라는 건 아니었다.
밀란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자신의 뒤를 봐줘야 할 사람이었다.
자신을 돕는 한 가장 오래 살아 있어야 할 사람이란 말이다.
행여 자신을 버리려고 할 때, 혼자만 죽을 수 없을 때 물귀신처럼 끌고 가려고 알려준 거였는데….
홀랑 들어가 버렸다고?
밀란 대공이 제정신이 아닌 듯 보이긴 했지만, 금방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끝내 괜찮아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 걸 만들어놓고 있었다니…. 놀랍네요.”
이젠 완전히 또렷해진 발음으로 마르틴이 말했다.
“아드리안이 원래 대단한 사람이긴 했다.”
오히려 조나스의 발음이 뭉개지고 있었다.
“일어나시라고요. 남의 침대에서 잠이라도 잘 셈이에요?”
“대공 안 온다니까.”
“대공도 안 올 건데 침실을 왜 지키고 있냐고요. 나가요. …나는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다고요.”
“아… 귀찮은데…. 뒹굴거리고 싶은데….”
“여기 아닌 다른 데서 뒹굴거려요. 나와요.”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탁!
문이 닫혔다.
저쪽 방엔 이제 아무도 없겠지.
모리츠도 환기구에서 귀를 떼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대공에게 도와달라고 행궁에 달려왔다가, 대공에게 삐쳐서 아드리안의 은신처에 대한 것을 흘렸다.
주의사항은 쏙 뺀 채로….
그랬더니 그새를 못 참고 달려가 버린 대공!
대공이 자신을 잡겠다고 뛰어나갔다는 소리는 마르틴에게 들었다.
자신을 잡겠다고 나가서,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자신이 가르쳐준 곳에 들어가 버렸다.
“내가 죽였다고 봐야 하나?”
당장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그러니 어쩐다?
행궁에 계속 있어야 하나, 나가야 하나?
모리츠는 팅팅 부은 다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몸 상태를 보면 어딜 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다리가 빠개지더라도 위험하다면 떠나야 했다.
그러니 행궁이 자신에게 위험한지 아닌지 판단을 내려야 한다.
밀란 대공이 죽었다고 완전한 끝은 아니었다.
대공은 선황제와 황태자를 죽이고 라인하르드 제국의 귀족사회를 재편성했었다.
작정하고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황태자를 지지하는 가문들이 황후를 배출했던 가문을 위시한 권력층이었고 그들을 정리하다 보니 그리된 거였지.
권력 가문들의 위세가 대단하여 황제도 함부로 하지 못했고, 그 밑에 깔린 하급 귀족들의 불만이 깊어지던 때에,
대공이 등장하여 싹 물갈이를 해준 거였다.
그러니 밀란 대공이 죽었다고 하면, 원래는 하급이었으나 이젠 상급 귀족이 된 이들은 어떻게 나올까?
행여나 예전 권력층에게 지금의 것을 빼앗길까 봐 똘똘 뭉쳐 저항할 터였다.
그들은 조나스를 잡고 늘어지겠지. 아드리안에게 황위를 내줄 수 없다고 할 거다.
아무리 바람을 다스리는 자라고 해도….
아무리 백성이 간절하게 원하는 황제라고 해도….
지금 가진 것을 내놓지 않을 거다.
조나스도 황위를 내놓지 않을걸.
권력이란 한 번 맛을 보면 내려놓을 수 없는 법이니까.
게다가 기존의 권력 가문도 돌아오기는 쉽지 않았다.
밀란 대공이 뿌리까지 다 갈아엎어 버리고 씨앗까지 태워 버렸으니까.
디아머드 백작 가는 원래 권력과는 관련이 없었으니 논외로 치고,
유일하게 보존된 가문이라면 모리츠가 알기로는 바이다 후작 가가 다였다.
대공의 은혜를 받았으니, 마르틴도 대공을 사랑한다고 하는 거겠지.
그러니 행궁에 계속 있어 봐?
모리츠는 자신의 다리를 주무르며 이리저리 궁리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니, 근데…. 시간의 틈에서 길을 잃었다는 게 죽었다는 뜻은 아니잖아.”
모리츠는 아픔을 참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소식을 조나스와 마르틴에게 알려야겠다.
대공을 살릴 수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조나스와 마르틴이 얼마나 좋아할까.
* * *
조나스는 드물게 똑바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대로 턱을 괴고 마르틴을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어떻게 할 것 같아?”
마르틴이 입을 벌렸으나 말은 못 하고, 이리저리 눈동자만 굴리다가 물었다.
“폐하 생각은 어떠신데요?”
“하아….”
조나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 그 방을 내줘서는….”
“원래 제 방이었잖아요. 대공이 필요할 때 바로바로 부를 수 있게 한 거라서….
대공이 오고 나서는 그 방을 쓸 일이 없었지만…. 제 딴에는 감시하려고 그런 거였다고요.”
마르틴에게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잘하려고 했다는 것을 아니까.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아 있기 힘들어져서, 조나스는 쭈욱 늘어지며 중얼거렸다.
“산샤가 잡으러 올 때까지 얌전히 있어야 하는데, 도망가 버릴 것 같으니까 그렇지.”
“도망가더라도 레이디 산샤가 도로 잡아 오겠죠. 북부 지역 어디로 가든 레이디가 잡아 오지 못할 곳은 없을걸요.”
“내 손으로 넘겨주고 싶단 말이야. 산샤한테 멋있어 보여야 하니까.”
마르틴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칫 웃어 버릴 뻔했다.
세상만사 어떤 것에도 뜨악해하던 조나스가 관심이 생긴 건 반가운 일이겠으나,
하필이면 그게 아드리안과 산샤인 것이 귀엽다고 해야 하나,
형을 질투하는 동생인 것 같기도 하고,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인 것도 같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이 어쨌든 몹시도 우스웠다.
“그렇다고 폐하가 모리츠 자작을 묶어놨다가 레이디에게 줄 수는 없어요.”
“왜 안 돼?”
“주목받는 일을 하시면 안 되니까요.”
끄응, 조나스가 신음하며 돌아앉았다.
황제를 지지한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대공을 따르는 가문들이었다.
아직 그들이 버티고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았다.
조나스가 산샤에게 모리츠를 내줬다가 들키면 아름답지 않은 일이 생길 테니까.
마르틴은 위로랍시고 덧붙였다.
“모리츠를 밧줄로 돌돌 말아서 준다고 해도 레이디 산샤는 멋있게 보지 않을 거예요.”
조나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혀를 찼다.
“아, 몰라…. 설령 놓치더라도 산샤가 잡겠지. 하다 안 되면 글라키에스인지…도 불러낸다더라.”
마르틴은 이번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디 산샤라면 다시 잡아 올 수 있다.
그녀가 가진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짐작도 할 수 없겠으나, 바람을 다스리는 자를 꽉 잡고 있는 건 확실하잖은가.
“…그럼 뭐, 우리는 술이나 더 마실까요?”
조나스가 찌푸린 채로 마르틴을 노려봤다.
“취할 만큼 취한 거 같은데, 술을 또 마시고 싶나?”
“제 사랑이 갔는데, 위로주 한 잔 정도는 마셔야죠.”
“헛.”
조나스가 헛웃음을 웃으면서도 마르틴을 보는 눈빛은 애잔했다.
“사랑이라니…. 어떻게 그런….”
“죽이고 싶은 사랑도 있는 법이니까요.”
그러다 문득 마르틴은 제 무릎을 쳤다.
“걱정 안 하셔도 되겠는데요. 모리츠는 여기 계속 있을 것 같아요.”
“왜?”
“제가 대공을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잖아요.
사랑하지만 죽이고 싶은 관계가 있다는 건 모를 테니까.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고, …어디 안 가겠네.”
“그렇다면 다행이고….”
말을 하던 중에 조나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마르틴에게 눈짓했다.
마르틴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세하게 울리는 ‘딸깍’ 소리를 들은 것이다.
조나스는 급하게 옆에 있는 종이에 글씨를 휘갈겼다.
-모리츠?
마르틴이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 행궁엔 마음 놓고 말할 수 있는 데가 없어?
마르틴은 두 팔을 벌려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마르틴이라고 뭐 알겠나.
“아, 몰라. 산샤한테 알아서 하라고 할 거야.”
조나스는 신경질적으로 펜을 던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