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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89화 (89/97)

89화

“아드리안!”

아드리안은 달려와 품에 쏙 안기는 산샤를 안았다.

얼마나 빠르게 달렸는지 품에 안기자 팔딱팔딱 뛰는 산샤의 심장 고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산샤가 고개를 들어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당장에라도 ‘하하하’ 소리 내어 웃을 것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기다릴 거 알고 일부러 이쪽으로 온 거지?”

아드리안은 대답 대신 웃었다.

산샤 말이 맞았다.

일부러 마차에서 내려 쪽문으로 들어와 대정원을 한참 돌아왔다.

산샤가 자신을 기다리느라 창밖만 바라보고 있을 게 뻔해서 조금이라도 빨리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드리안은 귀한 것을 만지듯 조심조심 산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며 기다려주고,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산샤.

온전한 내 사람.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일 수 있겠지만, 아드리안에게는 전혀 당연하지 않았다.

새삼 가슴이 저리게 좋았다.

행복했다.

깨져버리면 어쩌나 걱정될 만큼.

하하하!

산샤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소리 내어 웃더니, 아드리안의 손을 잡아 제 가슴에 포개 안았다.

“나는 막 깨지는 유리가 아니야. 그렇게 조심조심 만지지 않아도 된단 말이야.”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장난스럽게 윙크하는 산샤는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너무 좋아 아드리안은 쪽 입을 맞췄다.

그러자 산샤가 장난스럽게 쪽쪽 두 번 입을 맞췄다.

다시 아드리안이 세 번.

이번엔 산샤가 네 번.

주거니 받거니 서로의 입술을 스칠 때마다 장난기는 사라지고 진지한 표정이 되어 갔다.

아드리안에 이어 산샤의 차례가 되었다.

산샤는 살짝 흘겨보며 아드리안의 목에 팔을 둘러 당겼다.

아드리안이 나른하게 입술을 늘어뜨리더니, 그대로 산샤에게 깊은 키스를 해 왔다.

서로의 숨결 외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시간이 지나고,

산샤는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며 아드리안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키스할 때마다 이대로 숨이 막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드리안은 낮은 소리로 웃었다.

“키스만 하고 죽을 수는 없잖아.”

아드리안의 말에 산샤가 그의 허리를 바짝 끌어안으며 곱게 흘겨봤다.

“그럼 뭘 더 할 수 있을까?”

그러자 아드리안이 얼른 손을 들어 산샤의 눈을 가렸다.

“그렇게 보지 마.”

“왜?”

“그렇게 보고 있으면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어져.”

풉, 산샤는 빵 터지려는 웃음을 얼른 삼키고 아드리안에게서 한 발 떨어졌다.

그러고는 공중에 띄워진 아드리안의 손을 잡은 채로 돌아섰다.

“잠깐이라도 서로 얼굴을 보지 말자.”

아드리안이 못 이기는 척, 산샤를 따라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게 좋겠어.”

“그러면 일 이야기를 해 볼까?”

산샤는 아드리안을 외면하며 물었다.

“밀란은 역시 예상했던 대로 되었어?”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보고 있는데도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바로 느껴져서 산샤는 다시 물었다.

“시간의 틈에선 절대 못 나오나?”

“나올 수 있어. 본인이 어느 정도 움직이면 빼내 줄 수도 있고. …그렇지만 역시 선택의 문제라서, 지금까지의 밀란이라면 나오기 힘들겠지.”

“안됐네. 두 번만 깊이 생각해보면 다른 결정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당장 눈앞의 것만 쫓다가….”

“내가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야.”

“무슨 소리야, 그건?”

“이런 사람을 두려워해서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숨어 지냈다니, 얼마나 한심해.”

“으응?”

산샤는 아드리안을 돌아보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당신은 호레스 밀란이 두려워서 십 년을 숨어 지냈던 게 아니잖아.”

아드리안은 눈을 깜빡이며 산샤를 바라봤다.

산샤가 하는 말이야말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저렇게까지 크게 부정할 정도로… 다른 이유가 있었나?

“나 때문이잖아. 내 옆에서 나를 지키려고 여기 있었던 거잖아. 십 년 동안 당신은 호레스 밀란 따위는 고려하지도 않았을걸?”

아드리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웃어버렸다.

역시 산샤 말이 맞았다.

자신은 그동안 산샤 외엔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생각하지 않았다.

호레스 밀란이라니….

그자가 끼어들어 올 자리는 없었지.

아드리안은 다시 물었다.

“근데 너, 왜 갑자기 ‘당신’이래?”

산샤가 배시시 웃으며 아드리안의 팔에 매달렸다.

“앞으론 그렇게 부를 거야. 우린 부부잖아. 우리 애들 앞에서 ‘너’라고 하는 건 너무 애 같아서….”

“아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이 깜짝 놀라는 아드리안을 산샤는 다시 곱게 흘겨봤다.

“…이건 무슨 반응이야? 그렇게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아이 생각은 안 했어?”

아드리안이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고는 다시 산샤의 눈을 가리며 말했다.

“당분간 나를 보지 마.”

“왜?”

산샤가 발끈 토라지며 외쳤다.

“나는 행복하지 못한 유년을 보냈기 때문에 아이를 낳을 생각은 없었다. 뭐 이런 소리 할 거라면 그냥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거야.”

하하하.

아드리안이 크게 웃어버렸다. 그 와중에도 산샤의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어디에서 그런 말을 배운 거야?”

“아니타가 그러던데. 자기 읽는 로맨스 소설에서 그러더라고….”

“아니타가 글씨를 알아?”

“배우기 시작했는데, 로맨스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 폭발적으로 실력이 늘고 있대. 로맨스 소설이야말로 인생을 알게 해준다나.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래,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산샤와 거의 동시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를 외치고는 아드리안이 말했다.

“행복하지 못한 유년을 보냈을수록 내 아이는 행복하게 해주고 싶으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마.

보지 말라는 건, 너 닮은 아이를 빨리 만들고 싶다는 생각만 하게 되니까야. 준비한 일을 일단락할 때까지는 당분간 서로 보지 말고 정면만 보자.”

산샤는 고개를 끄덕이고 정면으로 돌아섰다.

“그래, 그러자. …애는 벌써 생겼을 수도 있지만.”

허업, 아드리안이 격하게 숨을 삼켰다.

산샤가 정면을 본 채로 손을 들어 아드리안이 말하려는 걸 막았다.

“그저 가능성을 말한 거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 지금은 내 순서가 왔다는 이야기만 할 거야. 모리츠를 잡아 와야지”

아드리안이 부축하듯 조심스럽게 산샤의 어깨를 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너, 아니, 당신은 조심해야 하지 않아? 내가 대신 가서 잡아 와도 되는데….”

산샤가 아드리안의 팔을 찰싹 때리고 흘겨봤다.

“내 일은 내가 할 거야.”

아드리안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산샤에게 키스했다.

* * *

설핏 잠이 들었나 보다.

모리츠는 무거운 머리를 부여잡으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런 상황에 잠이 들다니 어이가 없다. 그런데 깼다는 건 더 어이가 없었다.

그동안 몇 날 며칠, 못 잔 시간이 얼마였던가.

그야말로 피곤에 절어서 기절하듯 잠이 들었을 터인데, 그렇다면 웬만해서는 깨지 못할 거였다.

그런데도 깼다.

…왜 깼지?

한참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놨다 움직이다가 문득 깨달았다.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름다움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음정 박자 다 무시한 무시무시할 정도로 형편없는 노래였다.

그런데 그 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때려 박는 것처럼 컸다.

방엔 아무도 없이 자기 혼자인데….

“이게 뭐야. 신종 고문인가?”

모리츠는 방 안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소리의 원인을 찾아다녔다.

그러고는 찾아냈다.

환기구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느 방인지 같이 쓰는 환기구인 모양이었다.

환기구에 바짝 귀를 댔더니, 노랫소리가 더 정확하게 들렸다.

발음이 어마어마하게 뭉개지는 걸 보니, 술에 잔뜩 취한 것 같았다.

“팔자 좋군. 코가 비뚤어지게 마시고 노래까지 불러대다니, …대체 어느 놈이야? 아무리 그래도 궁궐인데….”

그때 뚝.

노랫소리가 멈췄다.

모리츠는 얼른 제 입을 막았다.

자신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걸까?

저쪽 소리가 이렇게 잘 들리면 이쪽 소리도 잘 들릴 수 있다는 걸 생각했어야 했는데….

밀란 대공 몰래 숨어 있는 것이니, 무조건 조심해야 하는데 말이다.

“너, 왜 여기 있는 거냐?”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모리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고는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놀란 거였지만,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역시 저쪽 방의 대화였다.

“주인도 없는 방에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또렷한 발음으로 하는 질문에 엉망으로 뭉개진 발음이 대답했다.

“주인도 없는 방이라니요. 대공의 침실이면 내 침실이기도 하죠.”

흥, 또렷한 발음의 사람이 콧방귀를 꼈다.

“너는 어떤 때 보면 외숙을 사랑하는 것 같더라?”

“당연하죠. 사랑합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 침실을 썼는데, 없던 사랑이라도 생기죠.”

“사랑이라니…. 그런 생각은 미처 못 해봤는데….”

“아무리 권력이 좋다고 해도 사랑하지 않으면 하기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저쪽 방에 침묵이 돌았다.

모리츠도 덩달아 숨소리까지 죽이고 환기구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한참 뒤에 털썩 누군가 어딘가에 몸을 던지는 소리가 났고, 또렷한 목소리가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너도 애환이 많겠구나.”

“말이라고 하세요?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고요.”

아….

그러니까 또렷한 발음은 조나스 악셀 황제이고 술에 취해 뭉개진 발음은 마르틴 바이다 후작인 모양이다.

비칠비칠 비틀거리는 걸음 소리가 나더니 마르틴이 말했다.

“이렇게 침대에 눕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일어나세요.”

“놔라.”

“대공이 와서 봤다가는 난리가 날 거예요.”

“대공은 안 와.”

“왜요? …허억!”

마르틴이 다급하게 숨을 삼키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죽었어요?”

“커헉!”

모리츠는 비명을 질렀다.

이번엔 확실하게 저쪽 방에서도 모리츠의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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