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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88화 (88/97)

88화

산샤의 집무실.

산샤는 책상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고, 소파에는 조나스가 늘어져 있었다.

조나스가 디아머드 성에 처소를 마련한 뒤로는 날마다 같은 풍경이었지만, 이번엔 세부적으로는 사정이 좀 달랐다.

산샤는 서류를 보는 척하며 밖에 신경을 쓰고 있었고, 조나스는 늘어져 있는 척하며 산샤를 보고 있었으니까.

산샤는 조나스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온통 밖에 신경이 쏠려 있는 것 같았다.

커다란 유리문 밖을 보는 시간 간격이 점점 짧아지다가 아예 밖에 시선이 고정되자 조나스는 참다못해 물었다.

“무슨 짓을 꾸민 거냐?”

그러나 산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처 조나스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여전히 밖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안 들리나?”

그래도 묵묵부답.

돌아보지도 않는다.

친절하지는 않아도 꼬박꼬박 대꾸해주던 산샤였는데, 정말 안 들리나 보다.

조나스는 잠깐 망설였다.

책상이라도 두들겨서 자신에게 집중시켜야 하나?

그러기엔 어쩐지 부끄러운데….

산샤가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자기답지 않다.

대답해주면 해주는 대로 안 해주면 안 해주는 대로,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세상만사 관심 없다는 태도를 보이는 게 자기다웠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래도 흥흥거릴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

산샤가 잔뜩 긴장하고 있는 표정도 그렇고, 밖을 보는 것 외엔 아무 데도 집중하지 못하는 것도 그랬다.

누가 보든 말든 딱 달라붙어 낯간지러운 짓을 해대던 아드리안은 왜 안 보이지?

명목상의 황제 노릇을 하느라고 는 것은 눈치뿐이었는데, 딱 보기에 산샤와 아드리안은 어마어마한 일을 벌인 것 같았다.

자신을 소외시켰지만, 자신과 엄청나게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이 분명했다.

그러니 이번엔 아는 척하고 관여해야만 할 것 같았다. 아무리 자기답지 않은 일이라 해도.

조나스는 느릿느릿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천천히 산샤에게 다가갔다.

그래도 산샤는 꼼짝도 하지 않고 창밖만 보고 있다.

쾅!

조나스는 그대로 책상을 내리쳤다.

온 힘을 다했기 때문에 소리도 어마어마했고, 책상이 흔들릴 정도로 충격이 대단했는데, 산샤의 반응은 뜨악했다.

돌아보기는 했으나, 보고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어딜 보는 거야, 나를 보라고!

“아드리안을 어디에 보낸 거냐?”

“무슨 말씀이신지….”

“네가 일에 집중 못 하는 게 아드리안 말고 다른 이유일 리가 없잖아.”

“그런 거 아닙니다.”

산샤는 서류를 내려다보며 부인했다.

그렇지만 역시 보고 있어도 보는 게 아니었다. 서류 볼 정신 같은 건 없나 보다.

아드리안이 자리 좀 비웠다고 이렇게까지 신경 쓸 리가 없는데….

조나스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산샤가 이렇게 바짝 긴장할 이유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아드리안이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거다.

그런데 자신이 전혀 모르는 일이다?

역시 결론은 하나밖에 없다.

“호레스 밀란 대공을 죽이러 간 거냐?”

산샤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뜨악한 표정이어서 조나스는 어쩐지 김이 샜다.

깜짝 놀라며 어떻게 알았느냐고 그건 비밀이라고 호들갑을 떨어주면 좋겠는데….

그럼 반응을 즐기면서 재미있기도 하고, 스스로 뿌듯할 텐데….

요즘 산샤는 자신이 어디에 재미를 느낄까 봐 걱정인 사람 같았다.

아드리안 앞에서는 잘도 호들갑스러우면서 자신 앞에서는 언제나 뜨악해. 심통 나게.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어보지도 않나?”

“…관심이 없으셨을 뿐이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니까요.”

기껏 애써 생각했는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고?

조나스는 입을 삐쭉거렸다.

이래서 산샤가 얄미우면서도 흥미롭다니까.

“지금까지는 무엇이든 우리가 하는 일을 대충 파악은 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것밖에 다른 일은 없으리라 생각하셨겠죠.”

“그래, 넌 똑똑해서 좋겠다.”

불쑥 쥐어박는 소리를 뱉고, 조나스는 산샤의 책상에 걸터앉았다.

“말해 봐라. 왜 비밀로 했지? 내가 혈육의 정에 이끌려 일을 그르칠까 봐?”

“그럴 리가 있나요?”

산샤가 서류철을 넓게 펼쳐 조나스의 엉덩이가 걸친 부분을 좁혀갔다.

“폐하에게 혈육의 정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압니다. 폐하에게 중요한 건 오직 아드리안뿐이잖아요.”

조나스는 산샤를 훑어봤다.

짜증 나. 언제나 다 들켜.

자신에게 요만큼도 관심이 없는 주제에 언제나 다 읽어 버리는 산샤는 불쾌하다.

얄밉고, 짜증 나고, 불쾌하고….

산샤 디아머드가 싫은 이유 백 가지도 쓰려면 쓰겠다.

인상을 구기고 흘겨보는 조나스에게 산샤는 웃어 보였다.

“제가 아드리안만 보고 있으니까 보였을 뿐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어요. 불쾌해하실 건 없어요.”

“봐, 봐…. 이런 사소한 감정까지 다 읽고 있잖아. 이러니 어떻게 안 불쾌하니?”

산샤는 피식 웃고 말았다.

조나스가 대부분 귀찮지만, 간혹 이렇게 귀엽다니까.

조나스는 사소하다고 했지만, 사소해 보이지 않는 게 그의 감정이었다.

그를 둘러싼 오러가 어찌나 요동을 치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으니까.

오러를 볼 수 있는 능력이 확실히 글라키에스의 축복이긴 한 것 같다.

오해하기 딱 좋은 조나스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니까.

그가 아무리 위협적으로 굴어도 감정의 기복이 심해서 일뿐이지 악의로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해주니까.

대체로 조나스에게 뜨악하게 반응하는 것도 그의 오러가 너무 나대니까 진정시키고 싶은 산샤의 배려였다.

물론 잘못 해석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오러를 두려워하지 않고 보게 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제대로 해석하려면 경험이 더 필요하겠지.

그래도 조나스에 대해 옳게 해석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조나스와 잘 지내고 싶으니까.

조나스는 아드리안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아드리안이 가장 외로울 때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준 사람이니까.

그래도 남의 책상에 앉는 버릇은 고쳐줬으면 좋겠는데….

산샤는 서류철로 살살 조나스의 엉덩이를 밀어내며 말했다.

“아드리안은 밀란 대공을 죽이지 않아요. 아드리안 손에 필요 없는 피를 묻히고 싶지 않으니까요.”

“대공의 피가 왜 필요 없어? 대공이야말로 최종 악당 아냐?”

조나스가 엉덩이를 비비적거리며 들어와 더 깊이 자리 잡으며 물었다.

산샤는 서류철로 장벽을 쌓으며 대답했다.

“아드리안이 굳이 죽여야 할 만큼 대단한 사람도 아니잖아요. 그저 이기적인 욕망에 충실한….”

순간 조나스가 엉덩이 비비적거리기를 멈춰버렸다.

산샤도 말을 멈추고, 쌓던 장벽도 그대로 둔 채 조나스를 올려다봤다.

껌뻑껌뻑 눈을 떴다 감았다가,

산샤를 물끄러미 보던 조나스가 ‘허어…’ 헛웃음인지 한숨인지 모호한 것을 뱉어냈다.

“대단하구나, 너. 감히 라인하르드 제국의 섭정 대공을 이기적인 욕망에 충실한 조무래기라고 해?”

“조무래기라고는 안 했는데….”

“그게 그 뜻이잖아.”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산샤는 어깨를 으쓱했다.

“상대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어서 두려운 건지, 내가 만든 두려움인지 잘 따져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또 뭔 소리야?”

“모리츠가 그렇게까지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내가 무작정 두려워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존재로 만들어준 것 같거든요.

밀란 대공도 그런 사람 아닐까요? 사람들이 지레 두려워해서 대단해진 사람.”

조나스는 미간을 찌푸리고 산샤를 노려봤다. 무슨 말인지 이해해보려고 하지만,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아드리안이 너의 의견에 동의했다는 거야?”

“제가 아닙니다. 아드리안의 뜻이었고, 제가 동의한 거예요.”

“그래서 너희는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

“선택의 기회를 줄 거예요.”

“뭘 줘?”

조나스가 책상에 아예 올라설 것처럼 펄쩍 뛰었고, 산샤는 장벽 쌓기를 포기해 버렸다.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선택을 한다면 살 기회를 줄 거라고요. …마지막 선택을 보러 아드리안이 간 거고….”

말하다가 문득 산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곤 그대로 뛰어나갔다.

“야, 어디가?”

조나스의 외침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바람을 다스리는 자는 산샤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빠르게 달려가 버렸다.

그렇게 저 멀리 한 점으로 보이는 데까지 달려가더니, 훌쩍 뛰어올라 안겼다.

아드리안이 거기 있었다.

아드리안이 한 품에 산샤를 끌어안았고, 쉴 새 없이 말하고 키스하고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조나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원 저 끄트머리에 있는 아드리안을 알아보고 달려가다니, 역시 대단한 레이디.

그런데 저 둘의 표정이 다 보이는 자신은 또 얼마나 대단한가.

조나스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아드리안이 돌아왔다는 것은 호레스 밀란이 어떤 식으로든 처리되었다는 뜻이겠지.

아마도 죽었으리라 생각했다.

산샤는 그가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선택을 하면 살 거라고 했지만, 그는 무조건 이기적인 욕망을 선택할 사람이었다.

“이기적인 욕망에 충실한 조무래기라니….”

그렇게 말해버리면 그동안 밀란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충실한 인형 노릇은 해 왔던 자신은 뭐가 되나.

악당에게 조종당하는 게 낫지, 조무래기에 조종당한 허수아비는 꼴이 너무 우습잖아.

조나스는 땅이 꺼져라 깊고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조무래기가 처리되었으면, 조무래기 덕에 잘 먹고 잘살던 자들이 다 들고일어날 텐데, 그건 어쩌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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