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함정인가?
어떻게 아드리안이 딱 맞춰 여기에?
호레스 밀란은 그제야 자신이 심각할 정도로 위험한 지경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클라이드, 그야말로 아드리안의 근거지가 아닌가.
아직 어두워지지도 않았는데 거리에 사람이 하나도 안 보이는 것도 수상하다.
이대로 쓱싹 죽어버려도 흔적 하나 남지 않을 거다.
호레스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호위 군사에 둘러싸여 있을 때야 아드리안이든 누구든, 바람을 다스리든 구름을 다스리든 상관없지만.
이렇게 혼자서는 곤란했다.
그렇지만 뒤로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아드리안과 가까워지는 건, 착각이겠지?
호텔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들이 꽤 있겠건만, 호텔까지 가는 길은 왜 이리 멀게 보이는지.
아드리안이 예의 바르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어딜 가시는 중이었나요?”
“호텔에 가려던 중인데….”
자신이 내는 소리가 낯설었다.
태연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저절로 떨려 나온다. 대공 위신이 말씀이 아니다.
사실 무섭기는 더럽게 무서웠다.
아드리안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등줄기가 서늘하다 못해 얼음 막대를 꽂아놓은 것 같았다.
어쩌다 이런 지경에 빠진 것일까.
제정신이었다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텐데.
모리츠 놈이 달려와서 잡소리를 늘어놓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그런데 그저 화만 났고, 더 따져 볼 여지도 없이 즉각적으로 달려 나오기만 했다.
향락을 즐기느라 정신 줄을 놨기 때문인가.
“혼자 나오다니, 대공답지 않군요.”
아드리안의 말에 솜털까지 다 일어서는 것 같았다.
“호텔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내가 갑자기 없어지면 의심할 거야.”
되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며 호레스는 멈춰서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경악했다.
호텔이 없다.
분명히 마부가 호텔 앞에 내려줬고, 한참 호텔 간판을 보고 서 있기도 했는데….
호텔이 어디 갔지?
아직도 정신이 온전히 돌아온 게 아닌가?
그놈의 향은 정신을 얼마나 뒤집어 놓은 거야?
아드리안이 의아하다는 듯 바라봤다.
“호텔이라면 한 골목 더 갔어야 했는데요.”
“뭐?”
호레스는 아드리안의 어깨너머를 슬쩍 건너다보고 탄식했다.
어떻게 된 거야?
자신이 보고 있던 간판이 왜 저렇게 멀리 있어?
“하, 하, 하!”
호레스는 두려운 만큼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이도 저도 안 되겠으면 호기로운 척이라도 해야지.
“난감할 뻔했는데, 자네를 만나다니 다행이지 뭔가. 이런 다행, 우연이 따로 없군.”
그러자 아드리안이 곤란하다는 듯이 살포시 웃어 보였다.
“우연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나는 대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어? 호레스는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솔직한 대답이라니.
함정을 파놓고 기다렸다는 사실이 알려져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건가?
여기에서 내가 빠져나가지 못할 거로 확신하는 거야? 내가 기어이 여기에서 죽어 버릴 거라고?
입을 뻐끔뻐끔 움직이면서도 호레스가 아무 소리를 못 내자, 아드리안이 다시 말했다.
“대공도 우연이라고 생각하진 않을 텐데요. 그런데도 우연이라고 하다니…. 역시 거짓을 일삼는 분이라 어쩔 수가 없군요.”
끄응, 호레스는 앓는 소리를 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누굴 거짓말쟁이로 모는 거냐고 호통치고 싶었는데, 인제는 정말로 말조심해야 한다.
조심조심 납작 엎드려서, 어쨌거나 살아날 방도를 찾아서 일단 살자.
오늘의 치욕은 나중에 한꺼번에 갚아주면 된다.
함정에 만들어 빠트린 것들도 다 찾아서 응징하리라.
호레스가 끙끙거리는 것을 보며 아드리안이 물었다.
“언제부터 계획된 일인지 궁금한가요?”
“뭐?”
“당신이 언제부터 함정에 빠졌는지 궁금하냐고 물었습니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겠군.”
“당신이 이곳에 초대받은 그 순간부터예요. 시작은….”
멈칫, 호레스는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초대는 산샤 디아머드가 했는데….”
“그러니까요. 당신은 호쾌하게 초대를 받아들이더군요. 모리츠가 따돌리려고 했던 걸 알면서도 전혀 꺼리지 않고.”
아드리안은 부드럽게 미소 짓더니 계속 말했다.
“감히 누가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있을까 …하는 자만이었겠죠.”
호레스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사실이 그랬다.
누가 감히 자신에게 해를 끼치겠는가. 그럴 수 있는 종자들은 다 해치워 버렸는데.
아드리안이 과거 황태자였다고 해도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혼자만 아니라면 징 박힌 주먹맛을 보여줄 수도 있다. 혼자여서 조심하는 거지, 혼자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그때, 아드리안이 피식 웃었다.
호레스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심정을 가라앉히려고 애써야 했다.
너는 왜 이렇게 여유가 넘치는 거냐고. 그런다고 내가 너를 두려워할 것 같냐고.
너는 나에게 쫓겨난 패배자일 뿐이라고 고래고래 소리치고 싶었다.
마음만은 그러했다.
몸은 이미 알아서 마비된 것 같았다. 아무리 힘을 줘도 큰 목소리는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십 년이었나요?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렀던 시간이? …자만에 빠질 만하죠. 아무리 둘러봐도 자신에게 조아린 뒤통수만 보였을 테니….”
아드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수록 더욱 삼가고 조심했어야 했는데 말이죠. 그랬으면 나에겐 어떤 기회도 오지 않았을 텐데.”
“기회라니…. 너에게 무슨 기회가 왔다는 건지 모르겠구나.”
호레스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두 눈을 부릅뜨고 또박또박 말했다.
더는 못 참겠다. 소리는 못 지르더라도 하고 싶은 말은 해야겠다.
“예전에 네가 무엇이었는지는 안다. 그렇다고 그게 인제 와서 무슨 소용이냐. 너는 나에게 쫓겨난 패배자일 뿐이야.”
아드리안의 입술 끝이 천천히 올라가는 듯하더니,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괜히 말했나?
호레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고 싶은 말을 했더니, 아드리안이 즐거워한다?
“예전에 내가 무엇이었는지는 나에게도 중요하지 않아요.”
차분하기만 하던 목소리까지 살짝 들뜬 것 같았다.
왜 저렇게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관심도 없다.
호레스는 이왕 시작한 거 빠르게 떠들었다.
“황제 자리를 되찾으려는 거잖아. 한 번 내 손에 들어온 걸 쉽게 내 줄 것 같으냐?
나에게 방해되는 건 다 죽여 없앴다. 너라고 무사할 것 같아?”
할 말을 하니 속이 좀 편해졌다. 버럭버럭 소리를 지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드리안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지 마세요. 되찾으려 한다니, 무슨 그럴 말을…. 내 것이었던 적이 없는데.”
“뭐?”
아드리안이 싱긋 웃었다.
“게다가 당신 것도 아니잖아요. 엄연히 황제는 조나스니까.”
순간 호레스는 너무 화가 나서 두려움을 잊어버렸다.
황제 까짓 거, 그저 이름뿐인 게 뭐 중요하다고. 실질적인 제국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인데!
눈이 뒤집히니까 목구멍의 마비도 풀려서, 호레스는 당당하게 외쳤다.
“조나스가 한 게 뭐 있어? 내가 한 거야. 내가 만들었어! 조나스는 명목상의 황제일 뿐이고, 제국의 주인은 바로 나….”
“하하하!”
호레스는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아드리안이 세상 재미있다는 듯이 웃기 시작해서.
아드리안의 유쾌한 웃음소리에 잠깐이나마 잊고 있었던 두려움이 몇 배가 되어 덮쳐오는 것 같았다.
부들부들 떨면서 아드리안이 웃는 걸 보고 있는데, 아드리안이 웃음 끝에 말했다.
“다행이네요. 당신이 이런 사람이라….”
“무, 무슨 소리야?”
“이제 걱정을 완전히 내려놨어요.”
“무슨 소리냐고? 알아듣게 말을 하라고.”
“혹시 그동안 조금이라도 변했으면 어쩌나. 사람 무서워할 줄 알게 되었으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그러면 반성할 기회를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아드리안이 산들산들 바람을 타듯 손을 흔들었다.
그의 손놀림에 바람의 방향이 바뀐 것 같더니, 잠시 후에 눈에 보이는 작은 회오리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역시 당신은 재고의 여지가 없어.”
아드리안이 손을 탁 튕기는 순간,
“아악!”
호레스는 비명을 지르며 뛰었다.
호텔에는 갈 수 없게 되었지만, 어디든 아드리안을 피해 몸을 숨길 수만 있으면 된다.
두고 보자.
살아남기만 하면 너 같은 건, 한 주먹감도 안 된다.
호레스는 당장 눈에 보이는 곳으로 냅다 뛰어 들어갔다.
꽈당!
문을 닫아걸고 돌아선 호레스는 흠칫 놀랐다.
벽난로가 활활 타고 있지 뭔가.
끝물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여름인데, 벽난로가 전혀 덥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창밖엔 눈이 내리고 있다!
“하하, 하, 하하하하….”
호레스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살았구나.
여기가 모리츠가 말하던 그 은신처구나.
시간과 공간의 틈에 숨을 수 있는 곳이라더니, 그래서 밖엔 눈이 내리는 거야.
여기라면 아드리안을 피할 수 있겠어.
그렇지만 지금 이 방에 있으면 아드리안이 곧 따라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누가 뭐래도 아드리안의 은신처니까.
호레스는 빗장이 잘 걸린 것을 확인하고 반대쪽 문을 밀고 나섰다.
“이런….”
아드리안은 닫힌 문 앞에 서서 난감한 듯 제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호레스 밀란이 스스로 은신처로 뛰어 들어갔다.
아드리안이 재배치하기 전에는 들어갔던 문 외에 어떤 문도 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물론 아니겠지.
얌전히 첫 번째 방에 있지도 않을 거다.
좀 더 안전한 곳을 찾겠다면 이 문 저 문 다 열어 봤을 테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볼까?”
아드리안은 가만히 문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호레스 밀란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고원을 헤매는 중이었다.
여름옷을 입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고원이라니….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있지만, 데리러 갈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아드리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이렇게 되어 버렸네.”
몇 번이나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결국 만들어 놓은 길로만 움직인 호레스 밀란을 애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