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호레스 밀란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엔 뭔지 모르겠는데, 너무 허전하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니 수행원이 하나도 없었다.
다음엔 이상하게 클라이드가 멀다고 생각했다. 이쯤 되면 보일만도 한데, 가도 가도 끝이 없어.
그러다가 알았다. 말도 마차도 없이 맨다리로 걷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자신은 수행원도 하나 없이 클라이드에 가겠다고 무작정 걷고 있는 거다.
“클라이드엔 왜 가려고 했더라?”
굉장히 다급하게 달려가던 중이었는데, 왜 그렇게 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고 기운도 없다.
호레스는 길가에 있는 나무 밑동에 걸터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뒤쪽으로 과일나무라도 있는지 다디단 과일 향이 풍겨왔다.
냄새를 맡았더니 허기가 밀려온다.
“아, 배고파.”
말하고 보니 정말 배가 고팠다.
몇 날 며칠 굶은 것처럼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정말 그동안 뭘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먹은 게 산샤의 대연회에서 마신 와인 몇 잔과 치즈 몇 조각인 것 같았다.
설마!
그게 언제 적인데.
정확히 언제 적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이 언제인지 몰라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호레스는 당혹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니까 자신은 산샤의 대연회가 끝나고 행궁으로 와서는, 먹지도 않고 침대에서만 지냈나 보다.
아무리 그게 좋아도 그렇지.
기가 막혔다.
그러다 문득!
몇 번이나 심호흡하면서 신선한 공기를 느끼던 중에,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옅은 안개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순간 불쾌함이 밀려들었고, 무엇보다 배가 고파서 죽을 것 같았다.
호레스는 기다시피 숲으로 들어가 단 향이 나는 과일을 마구 입에 밀어 넣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알겠다.
향 때문이다.
마르틴이 기쁨을 배가시켜 줄 거라면서 달짝지근하면서 야릇한 향을 피워 댔었지.
온몸과 머리가 마비되었었나?
향이 피워져 있던 동안엔 기쁨만 느끼는 몸과 머리가 되어 있었나 보다.
클라이드에 왜 가려고 했었는지는 생각났다.
모리츠 때문이었다.
모리츠를 잡아서 기분을 풀려고했다.
모리츠가 자신을 협박해서 기분이 아주 나빠졌으니까.
기분을 푸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애버려야 할 짓을 했다.
평생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을 발설해 버렸지. 용서할 수 없다.
아드리안의 은신처가 어쩌고 했던 거 보면, 거기 숨어 있을 거다.
클라이드 호텔 뒷골목이라고 했었지.
그 외에도 중요한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 같은데, 그건 모르겠다.
머릿속의 안개가 완전히 걷힌 건 아닌 것 같다.
“그러니 어쩐다?”
호레스는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한 번 보고, 클라이드 쪽을 한 번 봤다.
얼마나 왔는지도 모르고 앞으로 또 얼마를 가야 하는지도 모르니….
그때였다.
저쪽 길에서 마차 한 대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멈춰라!”
갑자기 숲에서 튀어나왔는데도, 마부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평온하게 말을 세웠다.
“나는 라인하르드 제국의 섭정대공 호레스 밀란이다.”
“아…!”
마부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그게 뭔지 저는 잘 모릅니다.”
기분이 팩 상했다.
어떻게 몰라. 라인하르드 제국의 백성이면 당연히 알고 모셔야지.
“이런 무지렁이가 있나! 감히 나를 몰라봐?”
버럭 소리를 지르고 제대로 교육할 작정으로 덤벼드는데,
“…뭐, 어쨌든. 귀하신 분은 마차를 타고 싶으신 겁니까?”
마부의 말에 멈칫, 호레스는 주먹을 말아 넣었다.
당장 아쉬운 것이 마차다.
아무리 참교육이 필요한 놈이라 해도 참는 수밖에 없었다.
“저는 클라이드에 갑니다만, 같은 방향이면 태워드리겠습니다.”
“뭐? 클라이드?”
이것 봐라. 마침맞게 클라이드에 가는 마차란다.
그렇지만 바로 마차에 올라타기엔 꺼림칙한 것들이 있었다.
문제는 아직 정신이 완전히 맑아지지 않아서 뭐가 꺼림칙한지 모르겠다는 것.
이럴 때는 무작정 나서기보다는 행궁으로 돌아가서 정신이 완전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옳을 거다.
“나는 북부 행궁으로 가야겠는데….”
“예? 여기에서 북부 행궁이 얼마인데요? 한참 가야 합니다. 두어 시간은 가야 할걸요. 클라이드는 거의 다 와 갑니다. 십여 분이면 도착할 겁니다.”
호레스는 입을 쩌억 벌렸다.
그러니까 마차로 두 시간도 넘는 거리를 힘든 줄도 모르고 걸어왔다는 거잖아.
얼마나 정신줄을 놓고 있었으면….
이런 상태로는 무슨 일을 해도 위험하다. 아무래도 역시 행궁으로 돌아가는 게 옳다.
“그래도 나는 행궁으로 가야겠는데….”
“그럼 저는 안 되겠습니다. 비켜주십시오.”
“아니야, 아니다.”
호레스는 손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정신 좀 맑지 않으면 뭐 어떤가.
자신은 호레스 밀란이 아닌가.
제국이 받들어 모시는 제국의 주인이란 말이다.
호레스가 거만하게 턱 끝으로 마부와 땅바닥을 가리켰다.
“내려와서 무릎을 꿇어라.”
“예?”
“네 등을 밟고 올라가야 하겠단 말이다.”
“…예?”
“발판이 없으니 너라도 발판이 되어주어야 하겠단 말이야.”
“…에…예?”
“이렇게 말귀가 어두워서야. 라인하르드 제국에서 내 발판이 되기를 소망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너에게 그 영광을 주겠다지 않나.”
마부가 끔뻑끔뻑 호레스를 보다가 한참 만에 말했다.
“클라이드에 안 가실 모양이군요. 그럼 뭐….”
“아니다, 아니야.”
호레스는 급하게 짐칸에 매달렸다.
행여나 두고 가버릴까 봐 두려워서인지 몸이 아주 가벼워져서, 훌쩍 잘도 뛰어올랐다.
마부가 비죽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잘 타시면서 괜히…. 자,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호레스는 인상을 구기며 혀를 찼다.
뭔가 마부에게 농락당한 느낌이랄까. 기분이 안 좋다.
이러면 안 될 것 같기도 한데, 뭐 어떠냐. 내가 호레스 밀란이다.
배는 더 고팠다.
정신없이 과일을 욱여넣었더니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은 사라졌지만, 허기는 더 심해졌다.
그때 마부가 말했다.
“참, 제 이름은 랄프입니다. 클라이드까지 잘 모시겠습니다.”
“천한 것이 이름 그까짓 게 뭐가 필요하다고….”
제대로 더 타박할 수도 있겠지만, 졸리기는 갑자기 왜 이리 졸린 거지.
그동안 잠도 제대로 안 잤던 모양이구나.
앞으로는 마르틴에게 향을 살살 피우라고 해야겠다.
그게 아주, 사람 잡는 향이었네.
끄응, 호레스는 신음하며 바닥에 누웠다.
* * *
호레스는 클라이드에 도착했다.
수행원 없이 돌아다녀 본 적이 없어서, 클라이드 호텔을 어떻게 찾아야 하나 걱정했는데,
마부가 딱 그 호텔 앞에 내려준 덕에 한시름 덜었다.
호레스는 두 다리를 딱 벌리고 서서 클라이드 호텔을 노려봤다.
이 호텔 뒤에 아드리안의 은신처가 있단 말이지?
마부는 내려주면서 호텔 뒷골목이 있다는 말은 못 들어봤다고 했다.
정 호텔 뒤가 궁금하거든 호텔에 들어가서 뒤로 향하는 문을 찾으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그렇지만 어쩐지 찜찜했다.
딱 맞춰 마차가 나타나 준 것도 어찌 생각하면 찜찜한 일이고,
제 이익과 상관없는 일에 친절하게 나서는 것도 찜찜했고,
아무리 섭정 대공도 모르는 무지렁이라고는 하나, 자신 앞에서 당당한 것도 찜찜했다.
원래 천한 것들은 당당할 수 없는 거거든.
행여 비천한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까 벌벌 떨기 마련이거든.
그런데 마부는 그저 친절한 이웃 같더란 말이지.
마차에서 잠깐이나마 졸았던 덕인지 정신이 좀 맑아졌나 보다.
팽팽 머리가 잘도 돌아간다.
생각해보면 북부 지역에 사는 것들이 전반적으로 이상하긴 했다.
이상하게 당당해.
하는 행동을 보면 귀족들과 제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산샤의 하녀라는 것도 주인을 제 막냇동생 보듯 하고,
고작해야 상인들의 수장이면서 아드리안은 또 얼마나 당당한가.
아드리안?
순간 호레스의 인상이 확 구겼다.
아무래도 생각나지 않던 중요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드리안이 ‘바람을 다스리는 자’라고 했다. 증거는 없지만.
그래서 증거를 찾아오라고 자신의 수하에게 명을 내렸었다. 은밀하고 신속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당부와 함께.
수하는 증거를 찾아왔던가?
호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찾았더라도 자신을 만날 수 없었겠지.
마르틴이 피워 놓은 향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설마!
마르틴이 아드리안에게 매수되었을까? 그래서 일부러 그런 향을 피웠던 걸까?
스멀스멀 의심이 피어올랐지만 호레스는 다시 고개를 저어버렸다.
그럴 리 없다.
나는 라인하르드 제국의 섭정 대공 호레스 밀란이다.
라인하르드 제국의 실질적인 주인이란 말이다.
마르틴 바이다는 나의 은혜를 입은 자다. 감히 나를 거역할 수 없어.
설령 아드리안이 바람을 다스리는 자라고 한들, 그까짓 것.
싸움 좀 잘한다는 거 아닌가?
내 군사와 호위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아드리안은 근처에도 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행궁으로 돌아가야겠다.
마부가 클라이드 동쪽에 마차 대여소가 있다고 했으니, 그쪽으로….
호레스가 뒷걸음질 칠 때였다.
어디선가 은은한 삼나무 향이 풍겨왔다.
그리고 들리는 나직한 목소리.
“이게 누구신가요? 호레스 밀란 대공이 여긴 웬일이시죠?”
호레스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아, 아드리안….”
아드리안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호레스를 바라봤다.
태양 빛을 닮은 금발이 사라락 날려 눈이 부셨다.
호레스는 생각했다.
바람을 다스리는 자니 뭐니, 증거를 찾아올 필요도 없겠다.
황후와 이렇게 똑 닮았는데, 어째서 그동안 몰라봤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