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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85화 (85/97)

85화

밀란의 침실에서 나오자마자 모리츠는 복도를 마구 달렸다.

엄청난 일을 저질러 버렸다.

어서 행궁을 떠나야만 했다.

밀란 대공을 위해 이런저런 암살을 하긴 했지만, 암묵적으로 비밀이었다.

밀란이 ‘내가 너에게 시켰다’고 말한 적이 없었고, 모리츠도 ‘내가 당신을 위해 했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은 두 사람이 모르는 일이어야만 했다.

대공이 자신의 뒤를 봐주는 것은 입 밖으로 내서 말하지 않은 비밀을 갖고 있어서였고,

지금까지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걸 대놓고 협박을 해버렸으니….

이제 자신은 언제라도 비밀을 누설할 수 있는 위험인물이 되어 버렸다.

첫 번째 제거 대상이 되어 버렸단 말이다.

미쳤지, 미쳤어. 어쩌자고 밀란 대공을 자극했을까.

네 것이 아닌 것을 탐한다는 말에 눈이 돌아버려서 미친 짓을 해버렸다. 그 순간 뵈는 게 없어서.

그래도 그렇지. 어쩌자고, 유일한 피난처를 내 손으로 부숴버렸단 말인가.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탄 모리츠는 외쳤다.

“가자, 어서 가!”

이쪽은 급해 죽겠는데 마부가 느긋하게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자작님?”

“어? …어디냐고?”

모리츠는 대답할 수 없었다.

어디냐니. 어디로 가야 하지?

모리츠 하우스로는 돌아갈 수 없다. 산샤의 체포를 피해 막 도망 나오지 않았나.

그나마 좀 멀리 떨어진 애플힙으로 갈까?

그렇지만 그곳도 안전하지 못했다. 산샤가 이미 알고 있는 곳이니까.

당장 나가라고 디아머드 성에서 쫓아낼 때 모리츠의 부동산 목록을 줄줄 읊어대지 않았던가.

북부 지역에 산샤의 체포령이 미치지 않은 곳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제도로 가기는 너무 멀고, 국경을 넘어가는 것도 싫다.

아니, 애초에 북부 지역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북부 지역을 떠난다는 것은 디아머드 백작 가를 완전히 포기한다고 선언하는 것 같아서.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포기할 수 없으니까.

내가 갖지 못할 바에야 깡그리 불을 질러 버릴 테다.

그러니 어디로 가야 한다?

마부가 조심스럽게 다시 불렀다.

“자작님? …가실 곳을 정해 주셔야 출발할 수 있는데요.”

끄응, 모리츠는 신음했다.

이제라도 대공에게 돌아가서 잘못했다고 납작 엎드릴까 싶은데.

마부가 ‘어? 저게 뭐지?’ 하고 의아한 소리를 냈다.

“저기 누가 오시는데요? 손을 내젓고 있어요. 가지 말라고… 자작님 다시 내리시라는 것 같아요.”

“아악!”

모리츠는 비명부터 질렀다.

차마 두려워서 밖을 내다볼 수도 없었다.

납작 엎드리기는 무슨, 대공에게 붙잡히면 죽는다.

“출발해. 무조건 출발이다.”

“그렇지만 저 분이….”

“당장 출발하라니까!”

모리츠가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모리츠는 눈을 끔뻑끔뻑하며 싱긋 웃는 미남자를 쳐다봤다.

“마르틴 바이다 후작?”

“아휴, 뭘 그렇게 빨리 달리나. 다리도 성치 않은 분이, 잠깐 멈추라고 그렇게 불렀는데, 못 들었어요?”

모리츠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마르틴이 피식 웃더니 한발 물러서면서 말했다.

“내려요.”

모리츠는 급한 대로 의자 커버를 잡고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왜요? 대공이 부르시는 거요? 내릴 수 없소. 대공을 보지 않을 거란 말이오.”

“본의 아니게 자작이 하는 말을 들어버렸는데 말이죠. 이대로 나가면 갈 데는 있고?”

“어?”

“레이디 산샤의 체포령을 피할 곳은 있냔 말입니다.”

“그… 그게….”

모리츠가 버벅거리는데, 마르틴은 손을 들어 모리츠의 말을 막고 자신이 계속 이어서 말했다.

“굳이 대답할 거 없어요. 그렇게 전속력으로 달려와 놓고는 마차를 출발시키지 못한 걸 보면 알 만하니까.”

“아니, 굳이 가자면 갈 데가 없는 것도 아닌데….”

“여기 있어요.”

“여기요?”

“자작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 행궁이잖소.”

“그렇지만 대공에게 한 짓이 있는데….”

“행궁의 관리는 내가 책임지고 있어요. 내 권한으로 방을 내드리죠.”

마르틴은 참으로 선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지만, 그래도 모리츠는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마르틴 바이다 후작이 굳이 쫓아와서 방을 내주겠다고 하는 게 이상했다.

이 사람은 누구 편이길래 자신에게 친절하게 구는지도 의심스러웠고.

돈과 권력에 무릎 꿇는 게 아닌 친절은 아무래도 믿을 수 없는 법이니까.

마르틴은 고개를 저으며 애처롭게 말했다.

“두 분은 갈라서면 안 되거든요. 지금은 대공이 약간 잘못 생각하고 있으니까…. 나는 대공을 위해서라도 자작을 잡아야 한단 말이지요. …알죠? 대공에 대한 나의 충성과 사랑.”

마르틴과 대공의 관계야말로 잘 알고 있었다.

호레스 밀란의 오른팔, 제국의 이인자 아닌가.

대공이 잘못된다면 누구보다 마르틴에게 안 좋을 테지.

둘이 갈라서면 안 된다는 건,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일 테고.

“그러게 대공께서는 어째서 그런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글쎄요. 그건 나도 궁금하네요. 북부의 정취에 취한 건지…. 얼음여황 글라키에스에게 홀린 건지….”

“아….”

“그러니 내가 대공을 잡고 있었던 거죠. 그런 이상한 소리를 밖에 나가선 못 하도록.”

“아, 그러면….”

모리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주섬주섬 챙겨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는 클라이드로 보내는 게 좋겠소.”

마르틴의 말에 모리츠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가 여기 있으면 모리츠가 아직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보내는 게 옳았다.

대공이 제정신을 찾을 때까지는 부딪치지 않는 게 좋겠지.

마차가 완전히 떠나고, 둘만 남았다.

마르틴은 뒷문으로 돌아가자고 했고, 모리츠는 시키는 대로 얌전히 따랐다.

조용히 걷던 중에 피식, 마르틴이 웃었다.

“그건 아주 신박했어요.”

“뭐, 말이오?”

“아드리안의 은신처를 대공에게 알린 거 말이오.”

모리츠는 눈을 땡그랗게 뜨고 마르틴을 돌아봤다.

은신처 이야기를 왜 했는지 안다고? 정말?

“미리 말을 흘려 놓고 급해지면 그걸로 대공의 뒤통수를 후려치겠다는 작전, …맞죠?”

“어….”

모리츠는 입을 벌렸으나 대답하지 못했다.

혹시라도 대공의 손에 죽게 되면 혼자만 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복수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약의 경우를 위해 은신처 이야기를 했다.

시간과 공간이 틀어져 있어서, 아무 문이나 열고 들어갔다가는 시간의 틈에 갇혀 버린다고 하지 않던가.

자신을 죽이려 들면 대공을 거기 가둬 버릴 작정이었다.

그런데 들켜 버렸어.

“혹시, 대공에게….”

“에이….”

마르틴이 슬쩍 고개를 비틀며 웃었다.

“비밀은 입 밖에 내지 않을 때 의미가 있죠.”

* * *

모리츠에게 방을 안내해주고 나오던 마르틴은 창밖을 보고 빙긋이 웃었다.

호레스 밀란이 정신없이 달려 나가고 있지 뭔가.

언제나 거할 정도로 거느리고 다니던 수행원 하나 없이 징 박힌 장갑과 부츠를 챙겨 입고, 마차나 말을 부를 생각도 안 한 모양이다.

지금 저 머릿속에는 어떤 계획도 없을 거다.

주도면밀하게 계획하여 선황제를 시해하고 자신에게 대항하는 귀족들을 몰살시킨 사람치고는 참 어이없다.

이게 다 자신의 공이다.

밀란이 침대 밖으로 나갈 생각을 못 하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얼마나 속살거렸던가.

-바람을 다스리는 자가 대수인가요? 싸움을 잘한다는 것뿐이잖아요.

-아드리안이 바람을 다스리는 자라고 한들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전하는 제국의 주인인걸요.

-대공이 북부에 오신 지, 얼마가 지났게요. 아직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는 게 바로 전하를 두려워한다는 증거죠.

처음엔 긴가민가해하며 이런 말이 통하겠나 싶은 마음이 컸다.

바람을 다스리는 자야 당연히 대수지.

그 능력 때문에 죽을 뻔했던 사람으로서 숨 쉬는 것도 조심스러운데….

그렇지만 ‘바람을 다스리는 자’의 진짜 능력은 싸움을 잘한다는 것으로 치부하고 넘길 수 있는 게 아니다.

바람을 다스리는 자, 황태자를 기다리는 게 황기사뿐인 줄 아나?

백성에게 ‘바람을 다스리는 자’의 존재는 여전히 어마어마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통해 버렸다.

통하기만 했겠나.

아드리안이 어차피 황가의 사람이니 산샤와 결혼하면 마정석 광산은 황가의 것이 된다는 신박한 논리도 밀란 스스로 만들어냈지 뭔가.

감히 자신에게 대적하는 자가 없이 지내다 보니 겁을 상실했다.

자만의 극치를 달리다가 무서운 게 없어진 거다. 백성의 열망 따위 아무 상관 없는 거고.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호레스 밀란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만들어 놓은 자신이 얼마나 뿌듯한지….

뭐, 정신을 흐리게 하는 향도 역할을 톡톡히 하긴 했다만….

“과연 레이디 산샤의 말 대로야.”

이게 다 산샤의 작전이었다.

모리츠와 밀란을 갈라놔야 한다.

모리츠가 도움이 필요해서 달려왔을 때, 밀란이 헛소리를 하게 해달라.

그것만 해주면 나머지는 자신이 다 알아서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마르틴은 두려웠다.

안 보는 데서야 황기사를 조직하는 등등, 할 일 못 할 일을 다 해왔다.

그렇지만 밀란의 눈앞에서만은 충성과 사랑으로 꽉 찬 모습만 보여 왔단 말이지.

그런 헛소리가 통할 리도 없고, 징 박힌 장갑에 얼굴 상할까 무섭다고 했더니,

산샤는 정신을 흐리게 하는 향을 알려줬다. 그걸 피워놓으면 무작정 패지는 못할 거라나.

어머니가 키우던 허브에 그런 게 있었단다.

참, 나….

별거 다 키우는 어머니에 별거 다 기억하는 딸이다.

마르틴은 검지로 창문을 꾸욱 눌렀다.

저 멀리 달려가고 있는 호레스 밀란이 그대로 손가락에 눌려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저자가 두려워 버러지처럼 기어 다닌 세월이 얼마냐.

그런데 이젠 저자가 버러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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