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모리츠는 제 귀를 의심했다.
이 대공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건가.
자기가 ‘바람을 다스리는 자’를 이용하겠다고?
“물론 바람을 다스리는 자가 나에게 위협적이던 때가 있긴 했다. 선황 폐하가 서거한 당시 정도?”
밀란이 그때를 회상하듯 시선을 멀리 보내며 눈을 깜빡거리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야 귀족들이 누구를 따를지 확실하지도 않았고, 적통 후계자가 나오면 어찌 될지도 몰랐으니까. 확실하게 없애야만 했지.”
선황과 황태자가 사고를 당하자, 호레스 밀란은 자신의 조카이자 황비의 소생인 조나스 악셀을 황제로 세웠다.
처음엔 밀란에게 반발하는 자들이 많았다.
클라우스 아드리안 황태자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기다려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했다.
‘바람을 다스리는 자’가 아닌가.
제국의 영광을 가져올 분인데,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찾아야만 한다고 했다.
그걸 싹 다 정리한 게 호레스 밀란이었다.
밀란은 고문할 건 고문하고 죽일 건 죽여버려서, 이젠 감히 그에게 맞서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자다가도 때릴 수 있는 게 배신인데요.”
딱!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나고 방 안은 좀 더 밝아져서 밀란의 표정이 제대로 보였는데, 모리츠는 얼른 자세를 가다듬었다.
표정이… 무섭다, 아주 많이.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심기가 몹시 상한 것 같았다.
역시 어둠은 불편하다.
표정이 안 보이니까 겁도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마구 하게 되잖아.
수틀리면 주먹질부터 하는 사람 앞에서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모리츠는 재빠르게 주변을 탐색하기도 했다. 침실에 징 박은 장갑을 두지는 않겠지?
밀란이 모리츠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다 안다는 듯이 혀를 찼다.
“어때? 밝아지니까 다시는 내 말을 끊고 나설 수 없겠지?”
“예, 전하. 제가 주제도 모르고 잠시 실수했습니다.”
밀란이 몸을 움직여 침대에 걸터앉자, 맨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가운 하나 걸친 건가?
참 간편하게도 입었다.
모리츠는 행여나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들킬까 봐서 더욱 고개를 숙였다.
정말 왜 저러는 거야.
이 중요한 시국에.
뭘 믿고.
“제국이 내 거야.”
밀란이 말했다.
“이젠 어떤 놈도 나에게 반항할 수 없단 말이다. ‘바람을 다스리는 자’? 정령의 돌로 증폭시키지도 못했는데, 그거 뭐, …싸움을 잘한다. 그 정도 아니겠어?”
“그렇게 마음 놓고 있기엔 백성들의 열망이….”
모리츠는 얼른 제 입을 막았다.
깜빡하고 또 말을 끊을 뻔했다.
모리츠가 황송스럽다는 듯 조아리자 밀란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나는 군대가 있고 세력 가문을 내키는 대로 움직일 수 있어. 가문들이 절대 배신할 수 없는 약점도 쥐고 있지. 바람을 다스리는 정도로는 접근도 할 수 없는 최강자란 말이다.”
최강의 착각을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그러나 모리츠는 하고 싶은 말을 참고 가만히 조아렸다.
“네 말대로 아드리안이 바람을 다스리는 자라고 해 보자. 내가 누구냐. 호레스 밀란이다. 바로 그놈의 원수란 말이지.
행궁에 있는 나를 죽이려고 시도할 만도 한데, 전혀 아무런 움직임도 없어. 이게 뭘 의미하는 것 같나?”
모리츠는 잠깐 궁리하다가 대답했다.
“아드리안이 바람을 다스리는 자가 아니다?”
“땡! …땡땡땡! 이렇게 아둔해서야, 어디….”
밀란은 자랑스럽게 외쳤다.
“감히 나에게 범접할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제까짓 힘으로는 나를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런 거란 말이다. 그래서 아무런 시도도 하지 못하는 거라고!”
조용하다고 진짜 조용한 줄 알면 안 되는데.
조용하다는 것은 무엇이든 꾸미고 있다는 뜻인데.
산샤와 아드리안이 뭔가 하고 있는 건 확실한데.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가는 모리츠 자신뿐만 아니라 호레스 밀란도 위험할 것 같은데!
모리츠는 별수 없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전하. 전하에게 그런 소리를 속살거린 자가 누구입니까?”
“누구면?”
밀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에겐 나를 사랑하고 생각해주는 충신이 많단 말이다.”
모리츠는 난감했다.
이런 반응을 기대하고 물어본 말이 아닌데….
밀란이 눈을 번들거리면서 마구 외쳐댔다.
“아드리안은 영리하단 말이지. 감히 나에게 대적할 시도도 하지 않고…. 몸을 사리고 그저 조용히 넘어가 주기를 기도하고 있어. 목숨만을 살려주기를 바라면서.”
아드리안이 영리하다는 건 동의하지만, ‘목숨만 살려주세요’라며 움츠리고 있는 건 아니라니까!
“어차피 아드리안은 황족 아니냐? 산샤와 결혼하면 마정석 광산은 황가의 것이 된단 말이지. 애초에 내가 생각하던 대로 되어가는 거라고.”
아드리안이 미쳤냐?
당신에게 마정석 광산을 내놓게?
모리츠는 결론을 내렸다.
호레스 밀란이 미쳤다.
이런 식이라면 순순히 호레스 밀란이 도와줄 거라고 기대하기는 힘들겠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앞뒤 살피지 않고 밀어버릴 힘이 필요하니까.
포기를 모르는 모리츠!
도와주지 않으면 도와주도록 압박해야지!
그때 밀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비릿하게 웃었다.
“그들의 결혼 선물로 뭐가 좋을 것 같나?”
모리츠는 끄응 속으로 앓는 소리를 삼켰다.
내가 걔네 결혼 선물까지 생각하고 있어야 한단 말이냐?
속이 터져 죽겠는데, 겉으로는 웃어야 해서 돌아버리겠다.
“글…쎄요.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모리츠가 뚱하게 대답했더니, 밀란이 낄낄 웃다가 말했다.
“내 생각엔 자네 만한 선물이 없단 말이야. 산샤 디아머드는 어떻게든 자넬 죽이고 싶어 하잖아. 안 그래? 자네 목에 큰 리본을 달아서 내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튀어나올 듯 커다랗게 눈을 뜨고 모리츠는 굳어버렸다.
이 작자가 뭐라는 거냐.
터진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하면 다 말인 줄 아나.
뻐끔뻐끔 입을 움직였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하, 자네도 참….”
밀란이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뭘 또 그렇게 놀라나. 농담이야, 농담. 우리 사이에 이런 농담도 못 하나?”
모리츠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심호흡까지 한 다음에야 겨우 소리를 낼 수 있었다.
“농담이시겠죠. 농담이셔야죠. 제가 전하에게 바친 충성을 전하가 아시는데요.”
모리츠는 밀란을 똑바로 보며 머리에 새겨주듯 천천히 말했다.
“제가 전하를 위해 더러운 짓을 좀 많이 했습니까? 전하를 위해 뒤집은 마차가 몇 대입니까?
그중에는 제국에서 가장 귀한 분의 마차도 있었고, 내 피붙이의 마차도 있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쩝. 밀란이 쓴 입맛을 다셨다.
“…자네가 내 일을 너무 많이 알고 있긴 하지.”
“전하의 발밑을 기어 다니는 세력 가문의 약점은 어떻게 잡으셨습니까? 저의 수완 덕을 톡톡히 보셨죠?”
“뭐, 그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그런데도 저는 다른 욕심은 없어요. 딱 여기 디아머드. 이것만 갖고 싶단 말입니다.”
밀란의 얼굴이 실룩거렸다.
웃고 싶은 건지 노려보고 싶은 건지 모호한 표정이 되더니, 밀란이 말했다.
“그 ‘딱 디아머드’만 갖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은 아나?”
“그들은 자격이 없는 자들이죠. 제 것이 아닌 걸 탐내는 자들!”
“자격 없는데, 제 것이 아닌 걸 탐내는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모리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호레스 밀란을 노려보았다.
평소라면 ‘감히 어디에 눈을 부라리냐’고 호통쳤을 밀란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못 본 척했다.
모리츠의 스위치를 눌러 버렸으니, 몸을 사려야 했다.
“그러니 산샤 그 얄미운 계집애가 재판을 열 수 없게 해주세요. 재판에 나서면 제가 무슨 말을 하게 될지 저도 모르겠으니까요.”
밀란은 빤히 모리츠를 보다가 말했다.
“행궁에 지낼 곳을 마련해 주겠네. 일이 해결될 때까지 숨어 있어.”
“제가 왜 숨어 있어야 합니까? 대공 전하의 말씀대로라면 겁먹을 필요가 없겠는데요. 대공 전하에게 벌벌 떨고 있는 아드리안과 산샤라면, 저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겠죠.”
“그게 그렇게 연결되는 이야기는 아닌 거 같은데? …걔들은 순수하게 나만 두려워하는 거야.”
“그러면 대공 전하가 저도 두려워하게 만들어 주세요. 제국의 주인이신데 그 정도는 쉽잖아요.”
모리츠는 간단하게 묵례하고 돌아섰다.
내내 조아리던 자가 나갈 때는 등을 쭉 펴고 당당하게 나가는 게 어찌 보며 멋있게도 보였지만,
멋있기는 개뿔.
밀란의 얼굴이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아, 참!”
모리츠가 문손잡이를 잡은 채 돌아섰다.
“클라이드 호텔 뒷골목엔 아드리안의 은신처도 있더군요. 시간과 공간의 틈에 숨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해요.”
“그게 뭐?”
“그렇다고요. 그런 게 있더라… 그것뿐입니다. …그럼.”
모리츠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밀란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르틴, 마르틴 바이다!”
옆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면서 마르틴이 빼꼼히 머리만 들이밀었다.
“예, 전하!”
“모리츠를 죽여버려라. 산샤의 재판에 서지 못하게 해.”
마르틴이 눈을 땡그랗게 뜨며 웃었다.
“전하, 사람을 잘못 찾으셨어요. 암살 담당은 제가 아니잖아요.”
“그럼 누가 해? 모리츠는 죽어야 할 놈이고, 다른 놈들은 황궁에 있는데.”
“어쨌든 저는 아니죠. 제가 할 수 있는 건 사랑뿐이에요, 다 아시면서.”
밀란이 무섭게 마르틴을 노려봤다.
“쓸모없는 것!”
그러나 마르틴은 ‘또 시작이구나’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도움이 안 되는 것!”
“예… 예….”
마르틴이 영혼 없이 대답하자 밀란은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질렀다.
“네 아버지의 죄를 알고도 너를 살려주고 사랑해줬는데 나한테 이렇게밖에 못 하겠어? 네가 나에게?”
마르틴이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제가 그렇죠, 뭐…. 쓸모없는 저는 그만 물러갈 테니까 화가 풀리면 다시 불러주세요.”
탁!
마르틴이 문을 닫고 사라졌다.
밀란은 견딜 수 없도록 화가 나서 복도로 뛰어나갔다.
징 박힌 장갑과 징 박힌 장화를 멀리 두지 말았어야 했다.
어서 갖춰 입고 아무나 손에 잡히는 대로 피를 봐야겠다.
그러다 문득 멈춰 서서 생각했다.
그 아무나가 모리츠면 안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