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카모마일 새싹을 어루만지며 아드리안의 품에 안겨 있으니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더 바랄 게 없다.
산샤는 가슴이 벅차올라서 저절로 큰 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밤이면 꿈에 글라키에스가 나와서 대륙을 가지라며 예언 운운하지만, 대륙이 뭐 대수라고.
아드리안이 여기 있는 걸.
“하아… 아드리안이 불쌍해.”
눈을 지그시 감고 느긋한 미소를 짓고 있던 아드리안이 깜짝 놀라며 산샤를 내려다봤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에 산샤는 볼멘소리를 했다.
“안겨 있는 게 좋다고.”
아드리안은 더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게 내가 불쌍한 거랑 관계가 있는 말이야?”
“너는 안길 수가 없으니까. 어떻게 자세를 잡아도 결국 안아주는 것밖에 못 하잖아.”
헐, 아드리안이 헛웃음을 웃으며 산샤의 머리를 가볍게 툭 쳤다.
“산샤 디아머드, 정말…. 네 생각은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
“어디로 튈지 모르긴? 내가 그런 것처럼 아드리안도 세상을 다 가진 듯 충만해졌으면 좋겠다는 거지.”
아드리안이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한동안 산샤를 바라봤다.
그러기를 한참.
아드리안이 겨우 물었다.
“너는 나에게 안겨 있을 때,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아?”
“으응?”
산샤는 정색을 하고 아드리안을 흘겨봤다.
“무슨 그런 말이 다 있지? 당연한 걸 물어보면 어떻게 해.”
“…당연한 거였나?”
“당연하지. 이해는 해. 너는 안겨보질 못했으니까 그게 뭔지 모르겠지. 그래서 내가 안아주고 싶은데… 봐, 키도 너무 크고 어깨도 넓어서….”
산샤는 팔을 아드리안에게 두르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폭 안겨 있는 느낌을 줄 수가 없어.”
그래도 산샤는 팔을 두른 김에 토닥토닥 아드리안을 다독여줬다.
“내가 제대로 안아주지는 못하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따뜻하게….”
아드리안이 나직하게 웃으며 산샤의 팔을 잡아당겼다.
산샤는 그대로 쏙 아드리안의 품에 들어가 안겼고, 편안한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중얼거렸다.
“내 품이 충분히 넓지 못해서 미안해.”
“그런 생각할 거 없어.”
머리에 입 맞추며 아드리안이 속삭였다.
“나는 이미 충만하니까….”
“그래. 네가 나를 안고 있는 걸로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인 건 알겠는데….”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정말 안겨 있다고 말하는 거야. 처음부터 지금까지 너 아니었으면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을 거니까.”
“어?”
“네가 나를 안아 옮겨온 거야.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어…?”
“너의 품은 네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크고 넓으니까 미안해할 필요가 없어.”
“어, 그…래.”
어쩌지?
굉장히 좋은데 부끄럽다.
산샤는 아드리안의 품에 파고들다가 문득 고개만 들고 속삭였다.
“키스 한 번 더 할까?”
아드리안의 입술이 다가와 귓불을 핥기라도 하듯 바짝 대고 나직하게 대답했다.
“방으로 가는 건 어때?”
한 손으로는 입꼬리가 정신없이 올라가는 걸 가리고 다른 손은 아드리안에게 내준 채 산샤는 돌아섰다.
둘은 손은 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여름이 끝나려는지 제법 바람이 선선했다.
말없이 한 발 한 발.
분위기에 젖어 걷다가 문득, 아드리안이 중얼거렸다.
“모리츠가 딱 맞춰 도망가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잡혀 들어왔으면 이런 여유를 갖지 못했을 텐데.”
“…프리스가 일을 잘해줬어. 모리츠가 딱 맞춰 도망갈 수 있게 만들었잖아.”
모든 게 산샤의 계획이었다.
모리츠의 집사 프리스에게서 닐스가 마법의 약을 들고 방문할 것이라는 정보를 듣는 순간.
그게 마법의 약이 아닌 건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모리츠도 눈이 있고 머리가 있는데 그런 약으로 상황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리가 없으니까.
닐스까지 한 번에 치워버리겠다는 나름의 작전이겠지.
그래서 산샤는 이참에 호레스 밀란까지 한 번에 치워버리기로 작정했다.
“프리스 덕에 닐스가 독약을 들고 오는 것도 대비할 수 있었고…. 정말 고마운 사람이라니까.”
“네가 가치를 알아주고 믿어줬으니까….”
아드리안의 말에 산샤는 피식 웃고 말았다.
“너는 무조건 내가 잘했다고 해줘서 좋아.”
“그거야…. 언제나 잘하니까….”
“에이, 그만해.”
까르르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걸 꾹 참고 산샤는 아드리안의 팔을 흔들었다.
아드리안이 산샤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물었다.
“정말 호레스 밀란에게 갈 거라고 생각해?”
“응. 자길 살려줄 수 있는 사람에게 갈 테니까. 모리츠에겐 밀란밖에 없잖아.”
“그렇지만 밀란은 살려주지 않겠지.”
순간 아드리안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라도 밀란이 살려주겠다고 나서면 어떻게 될까? 둘이 제대로 동맹을 이룬다면?”
타당한 걱정이기는 했지만, 산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 모리츠는 절대 자기 욕심을 못 버려. 그건 밀란도 마찬가지잖아.
서로 물어뜯다가 자멸하게 될 거야. …결국 자기가 자길 죽게 하는 것, 그게 그들이 받을 천벌이야.”
산샤는 활짝 웃으며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심각할 거, 없어. 되어가는 대로 맡겨두면 돼. 판은 다 깔아뒀잖아.”
아드리안의 산샤의 키스하며 속삭였다.
“레이디가 하고자 하는 대로 되리라.”
* * *
“들어오시랍니다. 여기에서 만나시겠답니다.”
호레스 밀란의 침실이 열리고 마르틴 바이다 후작이 나와 말했다.
이제나저제나 만나주기만을 기다리며 서성이던 모리츠는 펄쩍 뛰며 기뻐했다.
기사단이 자신을 체포하러 온다는 소식에 급한 대로 밀란 대공에게 달려왔다.
프리스가 산샤를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정보를 알려주는 게 다른 꿍꿍이 때문이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지만,
당장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마법의 약이라고 들려 보낸 게, ‘여황의 분노’라는 것도 알아버렸다지 않은가.
나는 모르는 일이다.
나는 마법의 약만 들려 보냈다고 우겨 볼 수야 있겠지.
그렇지만 그게 얼마나 가겠나.
결국 체포령까지 내린 걸 보면 다른 죄까지 물을 준비가 끝났다는 뜻일 텐데 말이다.
이럴 땐 밀란 대공의 권력이 필요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법도 없고 규칙도 없이 그냥 밀어버려야 하니까.
그런데 밀란 대공은 바로 만나주지 않았다.
대낮부터 침실에서 뭘 하는지 기다리라는 소리만 했다.
어디 앉아 있으라고 안내해 주는 놈 하나 없었다.
계속 서 있자니 아픈 다리가 욱신거려서 모리츠는 온갖 신을 불러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산샤, 마리에, 로베르트, 아버지, 어머니, 글라키에스 등등.
자신을 이렇게 만든 모든 이들을 저주의 구덩이에 처넣고 싶었다.
밀란 대공이 침실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리라 기도하던 순간 문이 열려서, 끔쩍 놀라기도 했다.
모리츠는 기쁘게 욱신거리는 다리는 끌고 들어갔다.
다리 아픈 환자에게 앉을 자리도 내주지 않는다고 저주를 퍼붓고 있던 건 까맣게 잊어버렸다.
방은 어두웠다.
커튼을 몇 겹씩 쳐서 밖에서 해가 뜨는지 지는지, 비가 오는지 마는지 전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방 안을 채우고 있는 야릇한 향기는 뭘까.
모리츠는 괜히 두근거려서 저절로 숨이 헐떡여졌다.
밀란 대공은 어디에 있는 걸까.
구석구석 희미하게 빛을 내는 발광석만 놓여 있는데 모든 물건이 그저 형체만 보여서, 뭐가 뭔지 모르겠다.
모리츠는 두리번거리다가 결국 볼멘소리를 냈다.
“대공 전하, 이 방에 계시지요? 불을 밝힐 수는 없겠습니까? 커튼을 좀 걷어도 될 텐데요. 밖은 아직 해가 떠 있단 말입니다.”
“쯧.”
밀란이 혀를 찼다.
“귀찮게 구는구나. 할 말이 있다길래 들여 보내주지 않았나. 할 말만 하고 나가면 그만 일 것을.”
“얼굴을 보고 말을 해야지요. 제가 대공 전하와 말을 하는지, 다른 누구와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정말 중요한 말인데요.”
“목숨이나 구걸할 주제에 까다롭기는….”
중얼거리더니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
구석에 놓인 발광석이 조금씩 밝아졌고, 어슴푸레하게나마 방 안의 것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밀란 대공은 여전히 침대에 있었다.
가운을 걸치기는 했지만 정말 입었다고 말하기엔 곤란했고, 손도 까딱하기 싫은 듯 지쳐 보였다.
밀란이 느리게 모리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 봐라. 얼굴. …이젠 말할 수 있겠지?”
모리츠가 솟구치는 짜증을 참으려 고개를 숙였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모리츠의 인사에 밀란의 답은 매서웠다.
“진짜 중요한 이야기여야 할 거다. 들어 봐서 별거 아니면 죽여 버린다.”
모리츠는 망설였다.
말을 잘해야 할 텐데….
당장 할 말이라고는 ‘살려달라’였다. ‘마정석 광산을 나눠 갖자’도 있지만.
자신에게는 아주 중요한 말인데 대공에게도 중요한 말일지는 모르겠다.
황제와 산샤를 결혼시켜서 마정석 광산을 갖겠다던 사람이, 정작 디아머드에 와서는 침실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아드리안이 ‘바람을 다스리는 자’라는 것을 알려줬는데도 눈에 띄는 움직임이 없었고.
딴생각을 하는 건 알겠는데 무슨 생각일까?
“너 그렇게 계속 말 안 하고 있을 거면 내가 먼저 말한다?”
모리츠는 깜짝 놀라 밀란을 바라봤다.
“하실 말씀이 있으셨습니까?”
끄응, 밀란이 몸을 일으켜 모리츠를 똑바로 보더니 말했다.
“내가 생각을 해봤단 말이지. 바람을 다스리는 자라는 게, 과연 그렇게 나에게 위협적인가. 내가 이용할 수는 없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