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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82화 (82/97)

82화

방 안의 모두가 자연스럽게 열린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드리안!”

아드리안이 마치 바람을 타고 온 것처럼 부드럽게 들어섰고,

산샤는 아드리안에게 달려가 푹 파묻혔다.

고개만 들어 아드리안을 바라보는 산샤에게서는 닐스한테 보이던 차가움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냥 즐겁고 행복한 소녀가 된 것 같았다.

“빨리 왔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더니….”

“가서 보니 별 게 아니어서….”

아드리안이 다정하게 산샤의 머리를 만져주더니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바로 마주 보인 닐스가 끔뻑 감았다 뜨더니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마시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는 찻잔을 받들어 모시고 있는 모양새가 어설펐다.

이번엔 독살을 꿈꿨던 건가?

집안사람으로는 불가능하니까 닐스를 보냈던 거로군.

닐스가 산샤에게 독을 먹일 수 있게 하려고 자신을 아델라이드로 불러낸 모양이었다.

방에 들어섰을 때 아드리안은 이미 탐색을 끝냈고 상황은 완벽하게 파악했다.

갑자기 닐스가 입술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웃어 보이려는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떨게 된 모양이었다.

아드리안은 어쩔 수 없이 웃어버렸다.

저렇게 기가 약해서야 무슨 수로 산샤에게 해를 끼칠 수 있을까.

역시 괜한 걱정이었다. 이렇게 달려올 일이 아니었다. 산샤 혼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던 일인 것을.

닐스는 산샤를 위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산샤에게 위협당하는 사람 같았다.

닐스가 들고 있는 찻잔을 언제 엎어 버릴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우당탕 부서지는 소리가 났고,

사람들은 놀라서 다시 문을 쳐다보았다.

조나스가 무엇인가에 거세게 밀린 듯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조나스 악셀!”

산샤가 저도 모르게 불렀다가 얼른 고개를 젓고 정정했다.

“폐하!”

그러자 조나스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조나스 악셀이 맞다. 나도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했잖아.”

‘그러란다고 황제의 이름을 마구 부를 수는 없잖아요’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산샤는 물었다.

“클라이드에 간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갔어. 가긴 갔는데…. 갔다가 밀려온 거지.”

“벌써 다녀왔다고요?”

오며 가며 벌써?

말을 타고 달렸다고 해도 왕복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닌데….

산샤가 더 자세한 설명을 원한다는 표정이자, 조나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하지만 설명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 줄로만 알고 있어. 바람이 끌고 밀어줬다고 생각하면 되겠네.”

그러고는 살짝 아드리안을 보는 게 원망하는 눈빛인 것 같기도 했다.

* * *

조나스는 클라이드에 아드리안을 보러 갔었다.

마르틴이 있거나 산샤가 있는 자리에서만 아드리안을 보는 건 여러모로 불편했다.

무엇보다 가장 불편한 것은 아드리안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는 거였다.

자신에게 하는 말도 꼭 산샤나 마르틴에게 하는 것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나에게 하는 말이구나 싶을 때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산샤와 마르틴이 없는 곳에서 만나고 싶었다. 조나스와 아드리안, 일대일 관계로.

그랬는데….

아델라이드 1층에서는 루카가 ‘선약이 없으면 아무나 만나주지 않는다’며 까탈스럽게 굴더니,

막상 자신을 본 아드리안이 한 첫 말은,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조나스는 혼란스러웠다.

예전 황궁에 살던 때처럼 ‘너’라고 해주니 황송하고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

기껏 제대로 시선 마주치고 자신에게 한 말이 전혀 환영하지 않는다는 말인 것을 슬퍼해야 할지 아리송했다.

그렇지만 오래 혼란스러워할 수도 없었다.

아드리안이 벌떡 일어나더니 바람처럼 휙휙 달려 나가면서 자신을 확 끌어당겼으니까.

“아아악!”

조나스는 처음엔 비명을 내질렀다.

“이런 건 나에게 맞지 않아요.”

사정도 해봤다.

그러나 막무가내였다.

휙휙 바람이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아드리안이 ‘바람을 다스리는 자’인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황궁에서 그 누구도 모르던 그때부터 그냥 알고 있었다.

황태자는 ‘바람을 다스리는 자’이고, 요람에서 잠깐 교감하고 만 게 아니라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바람의 도움을 받아 빨리 이동할 수 있는 건, 당연히 그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빨리 움직이는 건 능력자들이나 하는 일이라고요. 나는 바람을 다스리는 자가 아니에요.”

그러자 아드리안이 그렇게 빨리 움직이면서도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 너의 능력을 모르니?”

“무슨 능력이요? 나에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이렇게 빨리 움직이다가 죽을지도 몰라요.”

“디아머드 성에 도착할 때까지 네가 살아 있다면, 그땐 알겠구나. 네가 무엇인지….”

그랬는데….

* * *

살아서 도착해 버렸다.

아드리안의 말대로라면 자신에게도 ‘바람을 다스리는 자’의 능력이 있나 보다.

조나스는 그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바람의 정령과 교감을 해야 한다지 않았나?

그런 거 해 본 적이 없는데? 자신이 한 교감의 상대라고는 소파와 침대뿐인데?

“아아, 귀찮아.”

조나스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쭈욱 미끄러졌다.

그러곤 서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저었다.

“왜들 그렇게 서 있어? 좀 앉지? 정신 사납잖아. …이봐, 닐스 미켈 남작.”

“예? …예에.”

찻잔을 받쳐 들고 엉거주춤 서 있던 닐스가 화들짝 놀라며 조나스에게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닐스가 조심스럽게 눈을 치뜨며 말을 이었다.

“저의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이곳에서 폐하를 뵙게 될 것을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지라…. 미처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그랬군, 용서하지. 대신 앞으론 여기에서 아주 자주 많이 보게 될 것을 잊지 말게.”

“황공하옵니다, 폐하.”

조나스는 닐스가 여전히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는 찻잔을 봤다.

“그게 뭔데 그렇게 소중하게 받들어 모시고 있는 거야?”

“예?”

닐스의 시선이 찻잔으로 향했다.

지금껏 들고 있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던 듯, 새롭게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이게… 찻잔입니다. 차가 들어 있는….”

닐스의 멍한 대답에 조나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짓더니, 불쑥 손을 뻗어 닐스의 잔을 가져갔다.

“안 마실 거면 나 줘.”

“으아악!”

닐스가 비명을 지르고, 그보다 먼저 산샤가 달려와 찻잔을 후려쳤다.

찻잔이 날아가는 방향을 보고 있던 아니타는.

“지켜야 해!”

라고 외치며 찻주전자를 껴안고 몸을 웅크렸다.

그 위로 찻잔이 휘릭 돌아 떨어지는데 이번엔 벤야민이 달려들어 아니타를 감싸 안았다.

찻물이 사방에 날리고,

졸지에 찻물을 뒤집어쓴 조나스가 짜증스럽게 외쳤다.

“이게 다 무슨 소란이야! 너희들 다 황제 모독죄로 잡아 넣어버릴 거야.”

소란이 정리된 다음에는,

아무도 황제 모독죄로 잡혀 들어가지 않았고, 닐스만 살인미수로 잡혀갔다.

산샤는 가주로서 모리츠의 체포를 명했다.

조나스가 죽음으로 증명할 뻔했던 그것을 안전한 방법으로 검사하여 독이 든 것을 확인했고,

닐스의 증언 녹취록도 증거로 한몫했으니까.

그러나 기사단이 모리츠 하우스에 도착했을 때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모리츠는 도주한 다음이었다.

* * *

조나스는 여전히 산샤의 집무실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아무것도 보지 않은 척하면서 노려보고 있는 것은 유리문 바깥을 거닐고 있는 산샤와 아드리안.

바깥 정원은 언뜻 봐서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곳인데, 둘은 저기만 가면 더 눈꼴셔졌다.

둘이서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뭔가를 확인하고, 옷을 털어 주고,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시선을 나누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가 있는데….

그때만 되면 조나스는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또 그런다.

“아, …아니야. 안 돼. 하지 마. 안돼.”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조나스는 얼른 제 눈을 가려버렸다.

안 봐도 다 보이는 것 같았다.

뭘 하고 있을지 다 안다고!

그렇지만 오래 가리고 있을 수도 없었다.

조나스는 슬쩍 손가락 사이를 벌리고 눈을 떴다.

자신의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산샤와 아드리안은 아름다웠다.

키스하는 연인은 많이 봐 왔다.

그렇지만 저 둘 같은 이는 처음이다.

어쩌면 저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애틋하고 사랑스러울까.

주고받는 숨결은 어쩌면 저토록 달콤할까.

마침내 산샤가 행복한 한숨을 내쉬며 아드리안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고. 아드리안이 산샤의 머리에 입 맞췄다.

키스만으로도 저 정도라니….

보는 것만으로 짜릿하고 두근거려서 심장이 간지러웠다.

조나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산샤가 좋다.

아드리안은 더 좋다.

그렇지만 산샤와 아드리안이 서로 사랑하는 건 싫다.

어렸을 때는 오직 아드리안만 바라보며 견뎠다.

황제가 된 다음엔 산샤와 결혼하면 뭔가 달라질 거라는 기대로 버텼다.

지금의 자신이 있게 한 사람이 산샤와 아드리안이었다.

그런데 산샤와 아드리안에겐 조나스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싫다.

어떻게든 둘을 떼어놓고 싶다.

바람을 타고 달리고도 멀쩡한 걸 보고, 아드리안이 말했다.

“너의 능력을 알았지? 네 마음을 열어라. 정령과 교감할 수 있게 될 거다.”

“내게 그런 게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네가 나를 알아봤듯이 나도 너를 알아본 것뿐이야. …나는 네가 바람을 다스리는 자로서 제국을 다스려 주기 바란다.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거야.”

조나스는 아드리안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그 마음이 뭔지는 뻔히 알고 있었다.

귀찮은 황제 자리는 떠넘기고 자기는 산샤와 세상에 오직 둘만 있는 것처럼 그렇게 살겠다는 거 아닌가.

“그렇게 그냥 둘 줄 알아?”

조나스는 심술궂게 실룩거렸다.

“무슨 수를 써서든 둘이 떼어놓고야 말 거니까, 두고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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