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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81화 (81/97)

81화

녹을 거라는 말은 안 했나?

찻주전자에 넣기만 하면 산샤가 안겨 올 테고, 그러면 반려가 바뀔 거라는 소리만 했었나?

그 와중에도 모리츠에게 완전히 속았다고는 생각하기 싫어서, 닐스는 곰곰이 모리츠의 말을 떠올려봤다.

그렇지만 잘 모르겠다.

이랬던 것 같기도 하고 저랬던 것 같기도 했다.

그때는 아버지 빚을 못 갚느니 죽는 게 낫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다만 확실한 건, 저기에서 저게 나오면 안 된다는 거였다.

저건 닐스가 뭔가 했다는 너무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으니까.

닐스는 자기가 모르는 척하면 증거가 되지 않을 것처럼 슬쩍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끝까지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마법의 약의 효능이 무엇인지 산샤가 알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이번엔 콧대 부러지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무섭기도 했다.

‘어쩌면 잘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에 희망을 걸고 닐스는 슬쩍 물었다.

“그게 뭡니까?”

“여황의 분노.”

“에? 아닌데… 헙.”

하마터면 아는 척할 뻔했다.

아무래도 레이디가 잘 모르는 것 같다. 마법의 약치고는 이름이 너무 세잖아.

“…그게 뭔데요? 여황의 분노.”

“부정한 마정석 조각인데…. 이게 들어간 걸 한 방울이라도 마시면, 죽어요.”

역시 잘 모르는구나.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약으로 잘못 알고 있어.

닐스가 비죽이 웃는 걸 보고, 산샤가 물었다. 아주 가벼운 어조로.

“무슨 약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그래서 또 닐스는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대답했다.

“마법의 약이요. 사랑을 속삭이게 해주는 약이라고요. 그게 녹은 차를 마시면, 우리 둘의 사랑이 공고해지고…. 헙.”

닐스는 얼른 제 입을 막았다.

그러나 이번엔 너무 늦었다.

너무 많은 말을 해버렸어.

완전한 자백을 해버린 거나 마찬가지잖아.

산샤가 웃는 게, 이젠 무슨 말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닐스는 사실대로 다 털어놓기로 했다.

빚을 갚지 못하면 죽는 게 차라리 나은 삶이 될 거라는 것.

아버지가 모리츠도 공동 책임이라고 했다는 것.

그러자 모리츠가 둘 다 살 길이라며 마법의 약을 줬다는 것까지.

“살길이라니…. 먹으면 죽는 거라니까?”

산샤의 말에 닐스는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도 같이 마실 거였다니까요.”

“당신도 죽으라는 거죠.”

“그렇지가 않다니까요. 모리츠 자작이 절 죽였다는 걸 알면, 우리 아버지가 가만히 계실 분이 아닌데….”

“…실패하면, 들키면, 당신은 내 손에 죽겠죠. 이렇든 저렇든 모리츠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겠네.”

“…모리츠 자작은 날 죽일 이유가 없어요.”

여전히 부정하고 있었지만, 닐스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모리츠가 자신을 죽일 이유가 없기는 왜 없겠나.

그동안의 미운 짓거리만 생각해도 죽이고도 남을 것 같은데.

정말 둘 다 죽어버리라고 ‘여황의 분노’를 들려 보냈을까?

산샤가 닐스의 코앞까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끝에는 마법의 약이라고 믿고 싶은 그것이 있었다.

“그렇게 모리츠를 신뢰한다면, 이걸 입에 넣어보든가.”

반사적으로 닐스는 뒤로 물러났다.

산샤가 싱긋 웃었다.

“못 믿네?”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신뢰는 개뿔.

나도 못 믿는 세상에 믿긴 누굴 믿어?

닐스는 꺼이꺼이 울면서 외쳤다.

“모리츠 자작이 사랑의 마법이 일어날 거라고 했습니다.

내가 레이디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으니까, 레이디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만 인정하면 되니까. 그러면 모든 일이 해결되니까.

그래서 아니타가 차를 가져오자마자 도와주는 척하면서 주둥이에 넣었습니다.

그대로 녹아서 흔적도 없을 줄 알았습니다. 이제 우리의 사랑만 되찾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닐스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서 산샤를 바라봤다.

“내 죄라고는 모리츠 자작을 믿은 것밖에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믿을 놈을 믿었어야지, 왜 자작을 믿어서는….

여황의 분노라니요. 신뢰의 대가가 죽음이라니요.”

“그러니까…. 이게 닐스 자작이 넣었던 그것과 똑같다는 거죠?”

“예. 확실합니다. 주전자 주둥이로도 쏙 들어가게 생긴, 작고 하얀 알약. ‘여황의 분노’ 딱 바로 그것입니다.”

“방금 했던 말이 다 진실이라고 증명할 수 있겠어요?”

“당연하죠. 저는 진실이 아닌 건 말하지 않습니다. 레이디에 대한 사랑이 진심인 것처럼….”

산샤가 손을 들어 닐스의 말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불렀다.

“벤야민!”

“베… 벤야민?”

닐스가 어리둥절해서 돌아보는데, 벤야민이 종이 몇 장을 들고 들어왔다.

“방금 미켈 남작이 한 말은 다 받아 적었어?”

“예. 한마디도 빼지 않고 다 받아 적었습니다.”

벤야민이 닐스에게 자신이 들고 온 종이를 넘겨줬다.

거기에는 이 방에서 있었던 대화가 남김없이 적혀 있었다.

시작은 이러했다.

[닐스 미켈 남작 : (더듬더듬) 그동안 여, 여러 실례가 마, 많아서, 제, 제대로 사과, 하, 하고 시, 싶었습니다. 죄송했습니다.]

자신이 약을 손에 꼭 쥐고 벌벌 떨면서 산샤에게 말했던 딱 그대로였다.

닐스는 벤야민을 흘겨봤다.

이렇게 더듬었다고, 이렇게까지 똑같이 적을 건 뭐람.

벤야민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대로 적은 게 맞는지 확인해보시고, 맞으면 서명하십시오.”

“맞기는 다 맞아. 너무 맞아서 탈이지.”

삐쭉거리면서도 닐스는 유려한 글씨체로 멋을 부려가며 서명했다.

벤야민에게 넘기며 닐스는 산샤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모리츠가 죗값을 치르겠죠. 당신에게 ‘여황의 분노’를 들려 보내면서 같이 마시라고 했다는 것은 명백한 살인 미수니까.”

“이런 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보통은 그냥 달려가서 죽여버리면 그만인데요. 레이디는 가주잖아요. 가주의 권한으로….”

“디아머드의 정의는 그게 아니니까요. 가주의 권한 역시 법이 정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닐스가 추욱 늘어져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법에 어떻게 정해져 있어요?”

산샤가 웃어 보였다.

“당신은 디아머드의 정의가 실현되도록 도와줬으니…. 법에 정해진 대로 정상참작이 될 거예요. 디아머드에서 치를 죄는 없습니다.”

닐스는 또 쭈뼛거리다가 물었다.

“마정석 백 폰드는….”

“그건 갚아드릴게요.”

“아! 다행이다.”

닐스는 가벼운 마음으로 일어섰다.

갑자기 암울하기만 했던 세상이 밝아진 것 같았다.

마정석 백 폰드를 갚고도 몇 배나 되는 빚이 남아 있지만, 살아 있지 않은가.

안 죽었으니 다행이다.

이대로라면 모리츠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해서 돈을 받아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레이디가 비록 부정하고는 있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으니 디아머드의 법으로 도와줄 것 같기도 했다.

닐스는 끈적끈적한 미소를 입꼬리에 올리고 산샤를 바라봤다.

“그럼, 레이디. …오늘은 이만 안녕을 고할까요?”

산샤가 피식 웃으며 약을 들고 있지 않은 손을 내줬다.

닐스는 우아하게 손가락을 받쳐 잡고 끝에 입을 맞췄다.

그렇게 휙 돌아선 순간!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닐스는 급하게 벤야민에게 손가락을 휘저었다.

“거기 내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 그거 읽어 봐.”

“…‘레이디에 대한 사랑이 진심인 것처럼….’ 말입니까?”

“아니 그거 말고, 그거 위….”

“‘주전자 주둥이로도 쏙 들어가게 생긴 작고 하얀 알약’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거!”

“…그게 왜요? 수정할 데가 있으십니까?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아니, 그렇게 말했어. 말은 그렇게 했는데….”

닐스는 멀쩡하게 얌전히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찻주전자를 노려봤다.

아니타가 아직도 치우고 있는 산산조각이 난 찻잔도 봤다.

그러고는 산샤는 여전히 들고 있는 걸 또 유심히 바라봤다.

“약은 찻주전자에 넣었는데….”

그러고는 산샤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봤다.

“왜 그게 거기에 가 있을까요?”

산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주전자에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주전자에서 빼냈어요?”

산샤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어떻게 그래요? 주둥이로도 쏙 들어가게 생긴 작고 하얀 알약인데…. 넣는 순간 쏙 들어가서 녹았겠지.”

“노, 녹아요? 녹는 거예요?”

“모리츠가 녹는 거라고 하지 않던가요?”

했다. 한 것 같다. 녹는 거라고 했어.

아닌가? 안 했나? 녹는 거라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다.

닐스는 외쳤다.

“나를 속였군요?”

그러나 산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무것도 속이지 않았어요.”

“아니잖아. 속였잖아. 그걸 보여주면서 내가 가져온 것처럼, 응? 그랬잖아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산샤가 반문하더니, 냉정하게 따지기 시작했다.

“모리츠에게 ‘여황의 분노’를 받아와 찻주전자에 넣은 건 닐스 미켈 당신이고.

‘여황의 분노’를 보고 똑같은 걸 가져왔었다고 증언한 것도 닐스 미켈 당신이죠.

모리츠에게 속아서 그랬다는 변명도 했잖아요. 여기 어디에서 내가 당신을 속였다는 거죠?”

“그게 안 녹았다는 걸 알았으면, 내가 줄줄 다 고해바쳤겠어요? 내가 녹인 건 정말 마법의 약이었는지도 모르는데?”

“그래요, 그럼.”

산샤는 탁자 위의 찻주전자를 들어 빈 잔에 쪼로록 차를 따랐다.

그러고는 닐스에게 내밀었다.

“그렇게까지 모리츠를 믿고 싶으면 이걸 마셔요.”

“예?”

“마시고 죽으면 여황의 분노이고, 마시고 지금보다 더 느끼해지면 마법의 약이 녹아 있는 거겠죠.”

산샤가 찻잔을 든 손을 내밀었다.

닐스는 부들부들 떨며 찻잔을 받아 들었다.

산샤가 어서 마셔보라는 듯, 손을 들어 권했다.

어째야 하지?

마시면 안 될 것 같은데….

미치도록 갈등하는 상황에 갑자기!

휘잉 뜬금없이 바람이 불더니 정원으로 향한 문이 활짝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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