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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80화 (80/97)

80화

“더는 안 되겠습니까?”

닐스가 외쳤다.

그러고는 덥석 산샤의 손을 잡았다.

엉겁결에 산샤는 막 마시려던 찻잔을 놓쳐버렸고 그대로 날아가서 쨍그랑!

찻잔이 산산조각으로 깨진 것은 물론이고 온 데 찻물이 튀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닐스 미켈 남작!”

산샤의 목소리가 매섭게 와서 꽂혔다.

노려보는 눈빛은 더 무서웠다.

그렇지만 저 차를 마시게 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가게 될 것 같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딱 봐도 아닌 걸 뭐.

마법의 약을 먹인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닐스는 울고 싶었다.

그렇지만 산샤가 마법의 약을 탄 차를 마시는 순간 피눈물을 흘리게 될 것 같았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찻주전자에 약을 탔지만, 아무래도 모리츠에게 속은 것 같다.

기회는 이미 오래전에 날아가고 없었던 거야.

닐스는 슬그머니 손을 뒤로 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죄, 죄송합니다, 레이디. …빚을 다 갚아주신다는 말에 그만…. 너무 좋아서….”

산샤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깨진 찻잔을 치우던 아니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언제 빚을 다 갚아준다고 했다고 그래요? 마정석 백 폰드만 준다고 했지. 남작님이 빚이 그거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백 폰드만 있는 게 아니지 않니. 최소한 내 손가락을 보존할 정도는 도와주셔야 하니까요. 레이디.”

산샤가 멈칫 놀라며 닐스의 손가락을 쳐다봤다.

닐스는 아직은 무사한 손가락을 쫙 펴서 들어 보이며 처량하게 말했다.

“빚을 갚지 못하면 손가락이 문제가 아닙니다. …흑.”

자신의 신세가 너무 처량해서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후두둑 눈물을 떨어지는 것도 막을 수도 없었다.

남자의 눈물에 당황한 산샤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대부분이 아버지에게 빌린 거라고 알고 있는데….”

“크흑….”

닐스는 주먹으로 얼른 제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 흘리는 건 막지 못했다지만, 흐느끼는 것까지 보일 수는 없잖은가.

“아버지가 설마 빚을 못 갚았다고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겠어요? 잘린 손가락은 쓸 데도 없을 텐데….”

산샤의 말에 닐스는 더 참을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주먹으로 입을 막은 게 허사가 되었다.

닐스는 입을 막은 채로 외쳤다.

“레이디는 우리 아버지를 모르십니다.”

주먹으로 막고 있으니 발음이 뭉개져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겠지만, 대수냐.

아들보다는 돈을 택하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모리츠에게 속은 자신에 대한 한탄이 마구 쏟아졌다.

속았다, 속았어.

모리츠에게 속은 걸 이제야 깨닫다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모리츠는 디아머드 가문의 어른이 아니었다. 멀쩡한 산샤 디아머드의 재산을 가로채려던 날강도였지.

레이디 산샤가 모리츠가 시키는 대로 자신을 받아들일 일이 처음부터 없었던 거지.

오히려 모리츠가 소개했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싫었을 거야.

잘생기고 세련된 나의 매력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겠지.

공평한 출발선에 있었으면 나에게도 기회가 있었을 텐데.

내 매력이 어디에서든 꿀리는 매력이 아닌데…!

닐스는 입을 막은 채로 크흐윽 흐느끼며 몸을 떨었다.

남자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는데, 엉망진창이구나.

원래 이렇게 막장 인생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그의 흐느낌이 봇물이 터지듯 휘몰아쳤다.

산샤는 난감했다.

오늘 따라 사람이 영 불안정해 보이더니, 급기야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빚을 갚아 준댔더니 더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려?

그렇다고 우는 사람을 때려서 쫓아낼 수도 없고….

‘어떻게 하면 좋아?’

눈짓으로 아니타에게 물었지만, 아니타도 별 뾰족한 수는 없는 것 같았다.

그냥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깨진 찻잔 치우는 일에 집중하는 척했다.

그러다 문득 손을 놓고,

“쓰읍….”

아니타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닥을 이리저리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번쩍 고개를 들어서 산샤를 불렀다.

“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

아니타가 가리킨 것은 카펫을 적신 찻물의 얼룩이었다.

산샤의 시선이 얼룩으로 향하는 순간.

뚝, 닐스가 울기를 멈췄다.

산샤가 아니타 옆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는 걸 눈도 깜빡하지 않고 바라봤다.

뭘 저렇게 유심히 얼룩을 보고 있담. 조마조마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손톱으로 뭘 찍은 것 같은 건, 뭐야?

산샤가 일어나서 자신을 돌아봤다.

도저히 더는 안 되겠다.

이러다가 똑, 숨이 끊어져 버리겠어.

닐스는 산샤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소리쳤다.

“아니타! 뭐? 뭐를 보라는 거냐? 그게 뭔데? …그게 뭐 별거 있냐? 찻잔이 깨졌으니 찻물 때문에 얼룩진 거지.”

산샤가 피식 웃었다.

웃어? 이 시점이 웃을 시점이 아닌데?

그런데 자신을 보는 산샤의 눈빛도 심상치가 않았다.

닐스는 저도 모르게 퇴로를 확인했다.

도망갈까? 아무래도 도망을 가야겠지?

한 발을 막 뗀 순간이었다.

“이제라도 솔직히 다 말하면 손가락은 보존할 수 있게 해주고….”

“소, 솔직히요? 뭐, 뭐를요?”

“오늘 여기에서 하려고 했던 일.”

닐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법의 약을 탔다는 걸 먼저 말할까, 그 약을 못 먹게 했다는 걸 먼저 말할까.

아니면 끝까지 모르는 척할까.

닐스는 다급한 순간에도 모르는 척하는 쪽을 택했다.

설마 카펫의 얼룩만 보고 약을 탔다는 걸 알지는 못할 것이다.

괜히 제 발 저려 소리부터 질렀더니, …그래서 수상하게 보는 게 분명하다.

닐스는 슬쩍 뒤로 한 발 빼면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레이디. 이미 말했잖아요. 사과하러 온 거라고….”

그러자 산샤의 입매가 슬쩍 올라갔는데 눈빛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계속 모르쇠면 붙어가는 콧대를 다시 분질러 버릴 수도 있고….”

저건 꼭 마지막을 선택하게 하는 아버지의 말투 같다.

이미 다 알고 있을 때나 나오는 말투였다.

다 들켜 버렸구나.

어떻게 알았을까.

얼룩만 보고 알아채는 레이디와 하녀라니, 애초에 너무 불리한 싸움을 시작한 게 아닌가.

산샤가 한 발, 자신에게 다가왔다.

닐스는 얼른 한 손으로 코를 막았다.

게다가 주먹까지 쓰는 레이디는 절대 이길 수 없다.

“잠깐만요!”

닐스가 다른 팔을 뻗어 산샤를 막아 보려고 했다.

그러나 산샤는 멈추지 않았고,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서 주먹을 쥐었다.

닐스는 다급하게 외쳤다.

“모리츠예요.”

“……?”

“마법의 약이면 된다고, 만회할 수 있다고…. 이미 정한 반려 따위는 다 뒤집을 수 있다고….”

산샤가 얼굴을 찡그렸다.

“…마법의 약?”

“그래도 마시기 전에 막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정상참작 해주실 수 있지 않나요?”

아, 주책! 다시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닐스가 입술을 깨물며 주먹으로 입을 막는데, 산샤가 물었다.

“마법의 약이 뭐야?”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마법의 약으로 뭘 만회할 수 있어? 정상참작은 또 뭐고?”

껌벅껌벅, 닐스는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안 돌아가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봤다.

그래도 앞뒤를 맞출 수 없었고 영 답을 찾을 수도 없었다.

“…다 알고 물어본 거 아닌가요, 레이디?”

산샤가 두 손을 모아 단정하게 잡고 레이디답게 대답했다.

“내가 아는 건, 닐스 미켈 남작 당신이 아주 불안해 보인다는 거예요.”

몰랐다는 거네?

“…그것뿐이에요?”

“아니타가 이것 좀 보라는 소리에 놀라는 걸 보니, 차에 무슨 짓을 했나? 추측할 수 있었죠.”

그러니까 결국….

“내가 디아머드 가문한테 속았다는 거네요? 모리츠에 이어 레이디까지?”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나는 속인 거 없는데?”

순진무구하게 묻는 산샤를 보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무슨 말은 뭐가 무슨 말이에요? 레이디나 모리츠나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거지.”

제 가슴이라도 팡팡 내리치면 속이 풀릴까.

“되지도 않을 걸 불러들인 모리츠에게 속고, ‘오늘이면 된다. 내일이면 된다’하는 데 속고….

마지막 기회라니까 주는 약 얌전히 받아 와서는 이런, …이런 짓을 하고….

그런데 레이디까지 날 속였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아는 척.”

남은 인생 어떻게 될지 몰라서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었는데, 진짜 제대로 썩어 있었구나.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고, 애초에 될 일도 없었다.

지난 몇 달을 생각하면 그저 눈물이 앞을 가렸다.

“속았으면서도 또 속고…. 내가 너무너무… 너어무…. 어리석어서….”

꺼이꺼이 흐느끼는데 아니타가 중얼거렸다.

“그걸 이제야 알아차리다니, 답이 없네, 답이 없어.”

닐스는 억장이 무너졌다.

저 하녀에게도 속았다.

아니타가 수없이 가져간 돈주머니는 자신이 호구라는 증거다.

아니타에게만 속았겠냐, 콘스탄틴은 또 어떻고….

훌쩍, 순간 닐스는 코를 들이마시고 울기를 멈췄다.

감겨 오던 콘스탄틴의 표정이 생각나서였다.

그래도 콘스탄틴은 속이지 않았겠지.

진짜 제대로 자신의 매력에 퐁당 빠졌을 거다. 알고서는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게 또 자신의 매력이니까.

그때 산샤가 말했다.

“닐스 미켈 남작이 속이기 딱 좋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오늘은 속인 거, 없어요. 내가 아는 게 좀 있을 뿐이지.”

닐스에게서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레이디가 뭘 아는데요?”

산샤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또 맞을까 봐, 움찔 몸을 피하면서 본 산샤의 손가락 끝에 작은 알약이 보였다.

닐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저게 왜 저대로 있어?

찻주전자에 넣기만 하면 녹을 거라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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