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아드리안은 라즐로 제국의 ‘붉은 방 살수단’장의 방문을 받고, 누군가 계략을 꾸미고 있다는 것은 직감했다.
붉은 방 살수단은 라즐로 제국 황제의 직속 무사단으로 호위보다는 암살에 특화된 이들이었다.
그런 조직이 있다는 것 자체가 비밀.
연고 없는 아이들을 살수로 키워내는 단장은 세상 누구보다 비밀스러운 사람이어야 할 것인데,
굳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아드리안을 만나야겠다고 청했다.
갑작스러운 습격이었다.
미리 언질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나타나서 디아머드 성에 있던 아드리안을 클라이드로 불러들였으니까.
또한 거절할 수도 없었기에 타격감 어마어마한 공격이었다.
그래서 만나주었더니….
아이 하나가 도망갔다면서 국경 안쪽을 뒤질 수 있게 협조해 달라고 했다.
어이가 없었다.
그 정도는 협조가 필요 없는 일인데, 굳이?
이건 누가 봐도 아드리안을 클라이드에 끌어내려는 술수라고 생각되잖아.
처음엔 호레스가 배후에 있다고 생각했다.
타국 비밀 조직의 수장 정도를 움직이려면 최소한 대공쯤은 되어야 할 것 같아서.
아마도 ‘바람을 다스리는 자’에 대한 정보를 다 모았나 보다.
드디어 전면전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붉은 방 살수단장을 만나는 동안, 급하게 수집해 온 정보에 따르면 모리츠가 배후였다.
“모리츠가 엄청난 인맥을 갖고 있었군.”
“백작 가에서 추방당해 여기저기 떠돌면서 안 가본 데도 없고, 안 해 본 일도 없다니까요.”
아드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루카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걱정되지 않으세요?”
“걱정은 되는데….”
아드리안 손가락으로 톡톡 테이블을 치며 생각에 잠겼다.
모리츠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다.
인맥을 총동원해서 자신을 산샤 곁에서 치울 정도면 죽일 작정을 한 건데….
어떻게?
산샤가 따로 얼음강에 갈 리 없다. 일이 밀려서 정원을 산책할 여유도 없으니까.
집안의 사람들은 모두 산샤의 사람으로 재편되었기에 모리츠의 사주를 받아 독살을 시도할 사람도 없었고,
무엇보다 산샤 곁에는 글라키우리가 있지 않은가.
산샤의 검술 자체는 엉망이었지만, 글라키우리를 들면 엄청난 능력을 발휘했으니 아드리안의 그림자가 지킬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조나스도 있다.
풀을 발라놓은 것처럼 산샤에게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자신의 의붓동생 말이다.
자신이 했듯이 산샤를 위해서 시도 때도 없이 바람을 불러들이지는 않겠지만….
정말 위급한 상황이 오면 산샤를 위해 무엇이든 할 거라는 믿음이 조나스에게 있었다.
조나스에게는 능력도 있다.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망각의 기운이 있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걸 믿고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도 알고 있었고.
조나스가 측근 누구에게도 알린 것 같지 않아서,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루카에게도 비밀이 있는 것처럼 조나스는 조나스대로 이유가 있으려니 싶어서.
그러니 디아머드 성에 있는 산샤가 걱정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되지 않았다.
디아머드 성은 어느 때보다 든든했다.
모리츠의 계획이 뭔지 궁금할 뿐이었다.
* * *
모리츠가 마법의 약이라고 말하고 닐스에게 들려 보낸 것은 독약이었다.
독약이 녹아든 차를 한 방울이라도 먹으면 죽는다.
그동안 산샤를 죽이는 게 가장 간단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이지 않았던 것은 죽일 수 없어서였다.
여황의 문을 열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살려놔야 했고 죽여도 되겠다 싶어지자, 아드리안이 딱 달라붙어 있었다.
얼음강에 빠트려도 건져 내 오고, 자객이 와도 다 물리쳤다지.
그래서 산샤를 죽이지 않고 백작 가문을 차지할 방법을 찾아보려 하였으나, 결국 실패.
죽이는 것 외엔 답이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호레스 밀란까지 등판해서 디아머드를 먹으려고 하니, 한시가 급했다.
그러나 자신이 움직일 수는 없었다.
이미 눈 벌겋게 뜨고 경계하고 있으니 곤란했고, 행여 잘못될 수도 있잖아.
그래서 닐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큰소리 뻥뻥 치는 거만 믿고 데려왔다가 돈은 돈대로 고생은 고생대로 하게 만든 놈이니,
이렇게라도 써먹을 수 있어야지.
모리츠는 닐스부터 속이기로 했다.
독약을 주면서 산샤를 반려로 만들 수 있는 약이라고 한다.
산샤가 참지 못하고 안겨 오면 능력을 발휘하라고 한다.
제대로 관계를 맺고 나면 산샤가 너를 반려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꿈도 키워준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어이없을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는 놈이니 홀딱 넘어올 것이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닐스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약을 가지고 갔다.
‘아니타에게 부탁해서 주전자에 넣어달라고 할까요?’ 어쩌고 헛소리를 해서 골치가 아플 뻔하기는 했다.
아니타에게 들인 돈이 얼만데, 분명히 도와줄 거라나.
다 집어치우라고 하고 싶었지만, 알아듣게 잘 설명해서 혼자서 하기로 약속했다.
누구에게도 부탁하지 않고,
완전히 비밀스럽게.
약을 찻주전자에 넣기만 하면, 차를 마시는 놈들은 다 죽을 거다.
산샤가 죽는 김에 닐스도 죽겠지.
그 정도 희생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내내 골칫덩어리였던 놈이니, 마지막 가는 길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게 좋지 않겠나.
제 아버지에게 빚을 못 갚으면 어차피 죽기보다 못한 세상을 살아야 한다잖아.
혹시라도 아드리안이 곁에 있으면 일을 그르칠까 봐서 따로 손을 써뒀다.
붉은 방 살수단장에게 약속한 건 있지만, 그건 나중 일이다.
그때 가서는 단장을 죽일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고….
모리츠는 참으로 오랜만에, 느긋한 기분이 되었다.
이제 기쁜 소식만 기다리면 되려나?
* * *
약을 손에 꼭 쥐고 닐스는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닐스가 지금까지 해 온 일이라고는 예쁘게 꾸미고 흥청망청 쓴 것뿐이었다.
자기가 눈만 찡긋하면 여자들이 다 넘어왔다고 허풍을 떨고 다녔지만, 그것도 돈이 가진 힘이었을 뿐이었다.
지금껏 나쁜 짓을 한 적은 없었다.
여자들이 자신에게 허락하도록 돈을 퍼부은 적은 있어도, 약을 먹인 적은 없었다.
평생 처음, 자신이 생각해도 나쁜 짓을 하려니까 손발이 저리고 심장이 떨려서 산샤를 바로 볼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안 하면 어쩌나.
아버지 빚을 갚을 수가 없잖아.
산샤가 이상하게 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얼마나 이상해 보이면, 말없이 앉아 있을 곳이 필요해서 온 거라면, 자기는 조용히 일을 하고 있겠다고 했을까.
그러다가 드디어 아니타가 나타났다.
닐스는 잽싸게 산샤와 아니타가 둘이서 눈으로 대화를 하는 동안 주전자 주둥이에 약을 넣었다.
그러자 세상이 장밋빛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마법의 약이라더니, 먹기도 전부터 황홀경에 빠지는 건가.
배시시 웃음도 새어 나왔다.
산샤가 이상한 눈으로 보겠지만….
뭐, 웃어도 괜찮지.
이젠 좋아질 일만 있을 거다.
산샤가 차만 마시면 자신의 삶은 쫙 펴지는 거니까.
닐스는 자신이 나서서 산샤의 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실례가 많았습니다. 다 레이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일이니, 양해 바랍니다.”
산샤는 잔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양해는 할게요. 다급하셨으리라 생각하니까….”
“예?”
닐스가 깜짝 놀랐다가 이내 수긍했다. 자신의 치부를 다 알고 있다는 게 떠올랐으니까.
깔끔하게 정리된 서류를 가지 있지 않았던가.
닐스는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그러니 차를 빨리 마셔라.
네가 그걸 마시기만 하면 내 치부를 다 정리할 수 있다.
산샤가 물었다.
“여기 올 때 썼다던 마정석 백 폰드는 갚았나요?”
닐스는 다시 깜짝 놀라며 산샤를 바라봤다.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데, 산샤가 먼저 사과했다.
“아, 미안해요. 아직 갚지 못했겠지. …갚을 방법은 있어요?”
“아, 아니…. 그게….”
닐스는 한동안 버벅거리다가 겨우 물었다.
“그걸 왜 물어보는 겁니까?”
산샤가 찻잔을 입에 막 가져다 대다가, 닐스의 질문을 받고 소서에 내려놨다.
“다른 빚이야 남작의 개인적인 문제겠지만, 마정석 백 폰드는 모리츠 자작의 충동질에 속아서 쓴 거잖아요.
나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은 있겠다 싶어서…. 그것만큼은 갚아 주려고 해요.”
“그, 그걸 왜?”
갑자기 돈을 대신 갚아 주겠냐고 물었을 때 미쳤냐고 외치던 모리츠의 얼굴이 생각났다.
원래 돈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닌가.
나만 풍족하게 살면 그만,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상관할 바 없는 거잖아.
아버지까지도 돈 때문에 자신을 버리는 마당인데….
닐스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레이디 산샤가 나를 사랑하나 보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아드리안을 반려로 정한 거지, 사실은 정말 정말 나를 사랑하나 보다.
그러니까 대신 돈을 갚아 주겠다는 소리를 하지.
닐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외쳤다.
“그냥 나를 반려로 하면 될 거 아닙니까. 그럼 마정석 광산이 내 것인데 백 폰드쯤 껌값이죠.”
“헐….”
이건 안 나가고 서 있던 아니타의 헛웃음.
산샤도 어이가 없는지 입을 벌리고는 다물 줄을 몰랐다.
산샤가 한참 궁리하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사과하러 왔다더니, 아직 망상을 버리지 못했군요.”
아니타가 옆에서 거들었다.
“황제 폐하도 떨어뜨리고 선택한 아드리안 경인데, 뭔 배짱으로 아직도 들이댄대요? 괜히 마정석 백 폰드만 날리는구만.”
그런가?
마정석 백 폰드?
아니타 말이 사실이라면, 이 약을 먹여도 달라지는 건 없는 거 아니야?
닐스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간절하게 물었다.
“정말, 나는 아닙니까? 진짜 나는 안 되는 거예요?”
산샤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닐스 미켈 남작, 호의를 베풀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정말 말이 안 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목이 타네요.”
산샤는 무릎에 내려놓았던 찻잔을 들어 입에 갖다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