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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78화 (78/97)

78화

산샤는 처음부터 오래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아드리안의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며 물었다.

“아드리안, 나의 영혼의 반려가 되어 주겠어요?”

아드리안도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레이디, 당신이 원한다면 평생 당신과 함께하겠어요.”

아드리안의 입술이 부드럽게 올라가고, 눈빛이 빛났다.

산샤는 두 손을 내밀었고, 아드리안이 그 손을 맞잡아 자신에게 당겼다.

산샤는 그대로 아드리안의 품에 안겨 환하게 웃었고 아드리안은 산샤의 입술에 키스했다.

산샤가 아드리안을 처음 보았던 그때, 정했던 그대로 이루어졌다.

* * *

“예외는 없었단 말이지.”

조나스가 소파에 누워서 뒤집힌 채로 산샤를 보며 이죽거렸다.

산샤는 한숨을 내쉬고 바닥을 쓸고 있는 조나스의 머리카락을 바라봤다.

연회는 며칠 전에 끝났다.

손님들은 모두 돌아갔고, 별채의 게스트룸에 들었던 이들까지 모두 돌아갔다.

그런데 조나스는 행궁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날이면 날마다 집무실 소파를 차지하고 누워서 산샤를 괴롭혔다.

자신의 말로는 가족이 될 사이끼리 친목을 도모하는 거라지만, 괴롭히는 거 맞다.

행궁으로 돌아가지 않는 건 이해한다.

호레스 밀란이 차지하고 있으니 가고 싶지 않겠지.

그렇다고 집무실 소파에 누워 있을 일은 아니잖아.

별채 게스트룸은 싫다고 해서 본채에 방도 내줬고, 밖은 저토록 신록이 짙어 아름다운데….

방으로 가든지 산책을 하든지, 제발 뭐라도 하란 말이다.

산책하고 싶어도 일해야 하는 사람 방해하지 말고.

산샤는 조나스의 말을 흘려 버리고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이젠 조나스가 무슨 말을 해도 봐 주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보고 있는 서류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조나스가 긴 머리카락으로 바닥을 한 번 더 쓸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래 봐야 아주 널브러진 상태에서 조금 덜 널브러진 상태로 바뀐 거지만.

“왜 대답하지 않는 거야, 레이디 산샤!”

“벌써 같은 말에 같은 답을 백 번쯤 했습니다.”

“거짓말! …백 번은 못 했다.”

산샤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조나스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럼 지금 백 번 채우죠. 다시는 똑같은 말은 하지 못하도록…. 잘 들으세요, 폐하!”

산샤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뱉으며 말했다.

“저는 열 살, 아드리안을 처음 본 그때부터 아드리안 외에 누구도 반려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드리안만이 저의 유일한 반려였지요.”

“…우와!”

조나스가 짝, 짝, 짝, 천천히 손뼉을 쳤다.

“백 번을 들어도 감동적이야.”

“감사합니다. 그럼 이젠 제가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시겠어요?”

“일해. 누가 일하지 말랬나? 하라고. 방해할 생각은 전혀 없다.”

산샤는 말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빤히 조나스를 보고만 있을 뿐.

조나스는 처음엔 빤빤하게 고개를 쳐들고 모르는 척하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더니,

그래도 산샤가 노려보고 있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며 투덜거렸다.

“아드리안은 어디 있나?”

“클라이드에 갔습니다.”

“둘 다 놀아주지도 않고…. 심심하게….”

“친구 있으시잖아요. 마르틴 바이다 후작.”

“호레스 밀란 대공 때문에 바쁘다.”

“아….”

방에서 나갈 때까지 흔들림 없이 노려보려고 했는데, 잠깐 흔들렸다.

연회가 끝나고 행궁으로 간 호레스는 방으로 들어가서는 며칠째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마르틴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호레스의 명을 전했는데,

기껏해야 무엇이 먹고 싶다거나,

목욕 준비를 하는 데 무슨 향을 넣어라, 하는 것들뿐이었다.

그 사람은 모리츠와는 달리 부지런한 것과는 아주 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바람을 다스리는 자’를 찾았다는데, 관련한 움직임이 전혀 없다.

아드리안은 모리츠의 정보가 완전하지 않고 자신의 짐작을 말한 것이니, 호레스가 믿을 수 없을 거라고 했다.

게다가 ‘바람을 다스리는 자’로 지목한 사람이 아드리안 아닌가.

산샤가 반려로 정한 사람이니 그냥 괜히 미워서 뒤집어씌운 것일 수도 있고….

그러니 호레스는 자신의 조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고 했다.

확실한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그래도 ‘바람을 다스리는 자’가 나타났다는 말은 호레스를 심히 불편하게 하는 것이라….

“마르틴이 최선을 다해서 달래고 있단 말이야.”

“그렇군요. …바이다 후작도 고생이 많군요.”

“고생이랄 건 없다. 본인이 즐기니까, 뭐….”

조나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디에 가시려고요?”

“클라이드에 가볼까 하는데?”

“혼자서요? 수행원도 없이?”

조나스가 비죽이 웃어 보였다.

“사람들이 나를 잘 몰라본다. 알아보고도 금방 잊어버리기도 하고. …너는 일해라. 나는 놀다 올 테니….”

그렇게 조나스가 나가고, 시간이 얼마 흐르지도 않았는데 아니타가 방문객이 있다고 알려왔다.

닐스 미켈 남작이라나.

연회가 있던 날, 호레스에게 얻어맞고 기절한 것을 모리츠가 싣고 갔었는데….

“깨어나자마자 온 건가?”

“아직도 병색이 짙은 거 보면 그런 것 같아요. 엄청 세게 맞았나 봐요.”

“그랬나 봐. 대공이 주먹이 세다더라.”

산샤는 서류를 옆으로 치워 버렸다. 오늘 일하기는 글렀다.

아직 병색이 짙은 데도 찾아왔다는 것은, 모리츠가 보낸 게 분명했으니 맞아들여야 했다.

모리츠의 계략이 발동되는 모양이다.

아니타의 안내를 따라온 닐스는 깜짝 놀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몸이 삐쩍 마른 건 그렇다 치고,

정신에도 문제가 생긴 듯 눈동자가 끊임없이 불안하게 움직이며 자리에 앉는 것도 편하게 못 하고 쭈뼛거리고 있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무장되어 있던 닐스 미켈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닐스가 더듬더듬 말을 했다.

“그, 그동안 여러 실례가 많아서, 제대로 사과를 하고 싶었습니다. 죄송했습니다.”

“예.”

산샤도 반쯤 고개를 숙여 닐스의 정중한 사과를 받았다.

그러나, 그러고는 침묵.

닐스는 넋이 나간 것 같았다.

기껏 찾아와서는 넋 놓고 앉아 있어?

“미켈 남작?”

“예?”

닐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산샤를 바라봤다.

“말없이 앉아 있을 곳이 필요해서 온 거라면, 나는 조용히 일을 하고 있을까요?”

“아니요. 아닙니다.”

닐스가 빠르게 손사래를 쳤다.

“아니타가 늦네요.”

“예?”

“차를 가져와야 하는데요. 차를 마시고 싶거든요. 목이 말라서….”

닐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두 손을 꼭 쥐고 만지작거리는 것이, 손안에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 * *

닐스는 호레스에게 얻어맞아 정신을 잃고 며칠 후에 겨우 깨어났다.

깨어나서 처음 들은 소식은 산샤가 반려를 정했다는 것.

예외 없이 아드리안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편지가 왔다.

[반려가 되지 못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내 돈을 갚을 여력이 없을테니 대가를 받으러 가겠다.]

다행히 아버지는 마정석으로 한 방에 오는 낭비를 하진 않는다.

그러니 자신에겐 한 달 정도의 시간이 남은 거였다.

빚을 갚지 못하면 손가락이 잘릴 거라고 징징거렸었다.

그러나 정말 빚을 갚지 못하면 손가락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흠집 없이 데려다가 머리카락 하나까지 돈으로 바꿀 분이었다.

아들이라도 예외는 없다.

어딘가로 팔려 간 뒤의 삶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엉엉 울었더니 모리츠가 말했다.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가 죽는 게 더 나을 신세가 되고야 말겠나?”

“그럼 어떻게 합니까?”

“빚을 갚아야지.”

“자작님이 도와주시려고요?”

급하게 달려드는 닐스에게 모리츠는 콧방귀를 꼈다.

“미쳤나? 내가 자네 돈을 왜 갚아 줘?”

닐스는 바락바락 대들었다.

“갚아 줘야죠! …뭐, 저만 당할 줄 압니까? 자작님도 무사하진 못할 겁니다.”

그런데 모리츠가 은밀하게 속삭여 왔다.

“산샤의 재산을 가질 생각을 해야지. …반려는 한 번 정했으면 그만이라고 누가 그래? 다시 정하면 될 거 아냐.”

“어떻게요?”

“자빠뜨려….”

“제정신이십니까?”

닐스는 멍 자국을 모리츠에게 들이밀었다.

“이게 어쩌다 생긴 자국인지 모르세요?”

막 들이미는 닐스의 얼굴을 밀어내며 모리츠는 경멸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힘으로야 자네가 어떻게 산샤를 이기겠나, 머리를 써야지.”

“머리도 저쪽이 더 나은 거 같은데….”

그때 모리츠는 주머니에서 작은 알약 하나를 꺼냈다.

“이걸 가지고 산샤를 만나러 가게. 찾아가게.”

닐스는 모리츠가 쥐여 준 약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이게 뭡니까?”

“뭐긴 뭐겠나, 자네를 산샤의 반려로 만들어줄 마법의 약이지.”

“예?”

“앉아서 이야기하다 보면 차가 나올 게 아닌가. 이걸 타. 그러면 산샤가 자네에게 안기지 않고는 못 배길걸? 그때 제대로 자네의 진면목을 보여줘.”

멈칫, 모리츠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더니 확인했다.

“…그건 자신 있다고 했지?”

“예, 예…. 물론입니다. 그건 자신 있죠. 그렇지만 이걸 어떻게 산샤의 잔에 넣습니까? 눈앞에서 뻔히 보고 있는데….”

쯔쯔, 모리츠가 혀를 찼다.

“이걸 어떻게 산샤에게만 탈 생각을 해? 자네 능력으로는 절대 못 하지.”

“그럼 어떻게….”

“주전자에 넣어. 주둥이에 슬쩍 넣어 버리면 되잖아?”

* * *

그런 사연으로 꼭 쥐고 있는 그것, 작은 알약을 넣을 찻주전자가 오질 않으니, 닐스는 애가 탔다.

찻주전자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 외엔 다른 쪽으로는 머리도 돌아가지 않았다.

이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아버지에게 잡혀 들어가, 죽는 게 나은 세상에 던져질 테니까.

그때였다.

드디어 아니타가 다과를 준비한 트롤리를 밀고 들어왔다.

“하하, 이게 뭔가. 많이도 준비했네.”

닐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니타에게 달려가 트롤리를 빼앗았고, 직접 밀고 들어왔다.

산샤와 아니타가 ‘이게 무슨 일이냐’고 시선을 나누는 동안 몰래 주전자에 약을 넣는 것도 성공.

닐스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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