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조용한 방으로 안내해 들어간 모리츠는 호레스를 피해서 대각선 끝, 방의 가장 구석에 가서 섰다.
그 자리에 있는 안락의자의 등받이를 방패처럼 부여잡고서.
자신을 부축해 왔던 닐스는 방 가운데 그대로 있게 했다.
무슨 일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닐스가 허옇게 뜬 얼굴을 찌푸리고 모리츠와 호레스를 번갈아 보았다.
모리츠가 맹수에 몰린 토끼 같다면, 호레스는 마치 축제를 맞이한 들뜬 소년 같았다.
우르르 따라왔던 수행원들은 익숙한 일인 양 척척 움직이고 있었다.
호레스의 겉옷을 벗기고 검은 옷으로 갈아입히더니 질끈 허리띠를 묶어 주었다.
신발도 갈아신기고, 풀어 헤쳐진 머리카락도 단정하게 묶었다.
마지막으로 호레스에게 무엇인가를 두 손으로 받치고, 다시 우르르 나갔다.
마지막으로 나가던 수행원이 문을 닫기 전 닐스를 걱정스러운 듯 슬쩍 봤지만, 딸깍 문이 닫혔다.
그리고 정적.
수행원이 호레스에게 주고 간 건 장갑이었다.
잔뜩 징이 박혀 있어서 끼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일 것 같았는데,
호레스는 조심조심 정성스럽게 장갑을 끼었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었다가 펴보며 점검도 했다.
그러고는 방 안을 이리저리 지그재그로 돌아다니면서, 한 발 한 발 모리츠에게 다가갔다.
“방이 좋군. 잘 꾸몄어.”
“제헤….”
모리츠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오다니, 호레스를 두려워하고 있는 게 너무 표가 나서 부끄러웠다.
크흠 목청을 가다듬고 모리츠는 평온을 가장하며 다시 말했다.
“제 집무실입니다. 아름답게 꾸미려고 최선을 다했죠.”
“집무실이었던 거, 아닌가? …쫓겨났잖아.”
“…돌아올 거니까요.”
호레스가 멈춰 서서 씨익 웃었다.
“포기를 모르는 모리츠 …라는 거야?”
모리츠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빠르게 말했다.
“초대장이 아직도 안 갔던 건….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대공께 의도적으로 초대장을 잘못 보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풉!
호레스가 웃음을 크게 참는 척하더니, 반짝반짝 징을 빛내며 살포시 입을 가렸다.
그러고는 매서운 눈초리로 목소리만은 다정하게 말했다.
“묻지 않았는데?”
“그흐….”
또 갈라졌다, 목소리.
모리츠는 벌렁거리는 심장 박동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결례하였으니,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
퍼억!
멍청하게 방 중간에 서서 호레스와 모리츠를 번갈아 보고 서 있던 닐스는 순간,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에 배에 와서 꽂히는 건 뭐고, 내장이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은 뭔가.
닐스는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어 버렸다.
꺽꺽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저 배를 움켜쥐고 깜빡깜빡 정신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닐스가 축 늘어져 버리자, 호레스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모리츠를 봤다.
“이렇게 맷집 없는 놈을 데리고 다녀?”
당황스럽기는 모리츠도 마찬가지였다.
피가 튀고 엉망으로 뭉개지는 것을 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호레스는 언제나 옆에 있는 놈을 패 왔다.
아무 죄도 없는 놈이 단지 옆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나가는 것을 보면,
원래 맞아야 했던 놈은 목숨을 내걸고 충성을 바치게 되었다. 옆에 있던 놈처럼 되기 싫어서 바짝 기는 것이겠지만.
그런데 옆에 있는 놈이 이렇게 한 방에 나가떨어져 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방에는 아무도 없는데?
호레스와 모리츠 단둘뿐인데?
모리츠는 다급하게 외쳤다.
“제가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이마 깨진 것도 아직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고요.”
톡톡, 징 박힌 부츠로 닐스를 건드려보던 호레스가 뜨악한 눈으로 돌아봤다.
“저도 저놈처럼 한 방에 나가떨어질 겁니다. …재미가 없으실 거라고요.”
헐, 호레스가 헛웃음을 뱉더니 중얼거렸다.
“팰 생각은 없었는데, 저 말을 듣고 보니 패고 싶네.”
“예에?”
모리츠는 안락의자 등받이를 잡은 채로 털썩 주저앉았다.
닐스 저놈은 어째서 저렇게 약해 빠져서는.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돈 쓰는 거하고 꾸미는 것밖에 없어.
어떻게 가만히 맞고만 있으면 되는 것도 제대로 못 해.
“일어나라, 모리츠!”
호레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모리츠는 안락의자 뒤에 바짝 몸을 숨기며 외쳤다.
“살려주십시오, 대공. 잘못했습니다.”
“잘못은 무슨?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나를 따돌리려고 했던 것을 인정한단 말이냐?”
“아니요, 아닙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그 순간에도 모리츠는 의도적이었다는 걸 인정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벌떡 일어나 손사래를 쳤다.
“실수였지만 …제가 아니라 밑에서 일하는 놈들의 실수였지만….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잘못했다는 겁니다.
의도적이라니요? 절대 아닙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어느새 호레스는 모리츠가 바라보는 대각선 끝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징 박힌 장갑은 이미 벗어 던져 버리고, 편하게 의자 깊숙이 앉아서 오토만에 다리도 올려놓았다.
징 박힌 부츠도 벗어 버렸네.
눈이 마주치자, 모리츠에게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라. 다리도 불편하다면서.”
“예?”
“그렇게 있으면 뼈라도 제대로 붙겠냐?”
모리츠는 고개를 갸웃했다.
친절한 호레스는 이상한데….
믿어도 되는 건가?
보통은 이렇게 굼뜨게 굴어도 크게 혼나야 하는데, 호레스는 귀찮다는 듯 귀나 후벼 파고 있었다.
“정, 정말 앉아도 됩니까?”
“재미없어졌어. 제대로 앉아서 보고나 해 봐.”
모리츠는 조심스럽게 눈동자를 굴렸다.
보고를 할 게 있긴 하다.
사실은 호레스를 따돌리고 조나스와 협상하면서 쓰려고 했던 정보지만, 지금 호레스나 조나스를 따질 처지가 아니지 않는가.
조나스는 진짜 고급 정보를 알아보는 안목도 없는 것 같고.
“그렇지만… 이 말씀은 아주 가까이서 은밀하게 말씀드려야 하는데요.”
“그래?”
호레스가 오토만에 올려진 다리를 옆으로 살짝 치우더니 턱으로 가리켰다.
“여기 앉아서 해 봐라.”
모리츠는 호레스의 발치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은밀하게 속삭였다.
“바람을 다스리는 자를 찾았습니다.”
* * *
“지옥을 맛보고 있을 거라기엔 너무 조용하지 않아요?”
산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나스가 설명한 바에 따르면 곤죽이 되도록 맞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맞으면 아프니까 끔찍한 비명을 지르지 않겠나.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도 호레스가 어떤 식으로 대화하는지 알고 있어서, 행여나 들려올 끔찍한 소리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고요하기만 했다.
누굴 패고 맞는 식의 대화가 아닌 게 분명했다.
고통스럽게 당하는 사람을 어떻게 구해올 수 있을까, 아무리 모리츠라도 처맞고 있으면 구해줘야지.
그런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이게 뭐야.
산샤는 조나스를 살짝 흘겨봤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본인의 외숙을 잘 모르시나 봅니다.”
조나스가 입을 삐쭉 내밀더니 대답했다.
“나의 외숙이 변덕이 심하다는 건 안다. 다른 방법이 생각났겠지. 사람을 곤죽 만드는 거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던가.”
“바람을 다스리는 자를 발견했다는 보고 같은 걸 말하는 건가요, 폐하?”
아드리안의 말에 조나스는 또 입을 삐죽 내밀고 말았다.
산샤가 아드리안에게 물었다.
“그런 말을 하고 있어? 그렇다고 바람이 말해주는 거야?”
아드리안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언제나 예상을 넘어서는 모리츠야. 이렇게 부지런하게 움직이다니….”
산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이럴 줄 알고 있었다.
호레스가 나타나면 ‘바람을 다스리는 자’에 대한 보고부터 할 줄 알았다.
살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가장 값비싼 정보이니 내밀 수밖에.
그걸로 조나스와 협상하려고 했던 건 잊어버렸을 거다.
충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욕망에만 진심인 사람 아닌가.
그런 입으로 조나스에게 ‘충심’을 이야기했다지?
깨알 같은 놈.
산샤는 가볍게 콧방귀를 꼈다.
산샤의 전략이라는 것은, ‘내가 모리츠라면 어떨까’가 다였다.
모리츠에게 호레스를 데려다주면 어떨까.
포기를 모르는 모리츠는 호레스를 충동질해서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것이다.
호레스가 자신의 것을 뺏으려고 하면 죽이는 것도 망설이지 않겠지.
자신의 욕망에만 진심이기는 호레스도 마찬가지.
똑같은 놈들 둘을 붙여놓고,
그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주고,
그들이 움직일 판을 깔아준다.
다음은 둘이 알아서 할 것이다.
그들은 예상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예상보다 더 빠르다.
모리츠가 부지런한 건 상상 이상이니까.
이제 그들의 악행은 자신들이 손으로 벌해질 것이다.
* * *
연회의 밤은 정신없이 깊어져 가고 있었다.
처음엔 사람들도 호레스가 돌아올까 봐 두려움에 떨며 이제나저제나 입구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슬슬 두려움에 익숙해져서 처음처럼 무섭지 않았고, 점점 호레스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모리츠와 둘이 해결해야 할 일이 많은 모양이지.
애초에 밀란 대공이 이 연회에 나타난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잖아.
모리츠와 할 일이 많아서 지나던 길에 들렀나 봐.
그렇게 결론이 나자 갑자기 해방감을 느꼈고 그때부터는 정신 줄을 놓고 놀기 시작했다.
반려가 되고 싶어 했던 귀족 사내들도 산샤가 양쪽에 아드리안과 조나스를 끼고 다니는 걸 보고는 깔끔하게 포기해 버렸다.
조금만 노력하면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자신을 닦아 세우던 걸 놔버리니, 역시 해방감이 넘쳐났다.
그들은 끊임없이 먹고 마시고 춤을 추고 떠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연회를 열었던 목적을 이룰 시간이 되었다.
음악이 잦아들고 산샤가 홀 중앙에 섰다.
샹들리에가 화려하게 산샤를 비추고, 자리에 모인 모두 행복감에 젖어서 바라봤다.
“디아머드 백작 가문을 계승한 산샤 디아머드가 평생의 반려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산샤는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아드리안을 바라봤다.